화산귀환-1578화
1578화. 어디 가져가 보렴. (3)
딱히 감출 생각도 없이 활짝 펼쳐 든 전서를, 백천 역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사패련……. 지금 구파가 사패련을 공격한다는 거냐?”
충격으로 목소리가 잘게 떨려 나왔다.
청명 역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
그의 입에서 억눌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 미친 중대가리가!”
콰직!
청명이 손에 쥔 전서를 콱 움켜쥐어 구겨 버렸다. 바스러지고 끝내 흩어지는 전서 조각들만 보아도 그의 심정이 고스란히 보였다.
조걸이 흔들리는 눈으로 윤종을 돌아봤다.
“구파와 사패련이 전면전을 벌인다는 겁니까? 그것도 지금 당장?”
“……그런 모양이다.”
왜 상황이 그렇게까지 되어 버렸지. 그럼 천우맹 본단은 지금 어찌 움직이고 있는가?
숱한 의문이 떠올랐지만, 머리 안에서 정리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결국 조걸의 입을 비집고 머뭇머뭇 나온 건 질문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말뿐이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
“아, 아니, 제 말은……. 그렇게 되면 누가 이기는 겁니까?”
“글쎄……. 아무리 그래도 구파가 이기지 않을까? 설마 방장이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진 않았을 테고.”
“그럼 장일소는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는 놈입니까? 교활하기는 놈도 만만치 않잖습니까. 아니, 사실 교활한 걸로만 따지자면 방장은 상대도 안 될 겁니다!”
짧은 정적이 그들 사이에 내려앉았다.
섣불리 승패를 점치기는 어렵다. 구파와 사패련의 전력이 각각 어느 정도 되는지 정확하게 아는 이가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게다가…….
‘더 강한 쪽이 반드시 이긴다고 할 수는 없어.’
이미 그들이 이곳에서 증명했으니까.
가진 전력으로만 비교하면 그들은 대패하고 목이 잘렸어야 한다. 하지만 정작 심장을 뚫린 이는 흑룡왕이고, 사분오열되어 달아난 쪽은 수로채였다.
그렇기에 어느 쪽이 반드시 이긴다고 쉽사리 말할 수 없었다.
어쨌든 이 순간에 확실한 건 단 하나뿐이었다.
“가야 해!”
“뭐?”
청명의 단호한 외침에 조걸이 크게 당황했다.
“자, 잠깐만, 인마! 여기가 어딘 줄 몰라? 안휘야, 안휘! 발에 땀 나도록 달려도 도착하면 모든 게 다 끝나 있을 거라고! 그리고 구파는…….”
콱!
순간 윤종이 팔꿈치로 조걸의 옆구리를 세게 찔렀다.
조걸은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가 순간 아차 했다. 혜연의 침통한 얼굴이 그제야 보였기 때문이다.
“스, 스님. 저는 그게…….”
“아닙니다, 시주.”
혜연이 개의치 말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저 역시 방장과 다른 이들이 행한 일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시주의 입장에서 그들을 온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얼마나 힘들지도 말입니다.”
“스님…….”
“하지만 저 역시 그곳으로 가 봐야겠습니다.”
혜연이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이해하고 말고가 어디 있습니까! 당연한 거지!”
저 전장으로 가고 있는 이들은 다름 아닌 혜연의 사형제고 스승들이 아닌가?
조걸이라도 당연히 가기를 택했을 것이다. 설령 그들이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다고 해도, 제 손으로 잡아다 꿇리고 죄를 물을지언정 아주 외면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혜연을 보내 주는 것이 맞다. 다만…….
“안 된다.”
백천이 청명을 보며 말했다.
“지금 우리는 움직일 수 없다.”
“…….”
“이곳은 아직 완전히 평정되지 않았다. 너도 알겠지. 이런 상황에 우리가 빠져 버리면 흩어진 수적 놈들과 먼저 강북에 들어와 있던 사파 놈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청명의 얼굴이 굳었다.
백천의 말 역시 틀리지 않았다. 그 사파 놈들을 방치하고 가 버린다면 이 땅은 더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건 차라리 흑룡왕의 목을 베지 않은 것만 못한 결과다.
게다가 애초에 조를 짜서 위험을 감수하고 나온 건 사파 잔당들이 양민들을 해치는 걸 막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기에 백천이 이리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청명 역시 물러설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백천의 눈이 청명의 눈과 허공에서 잠시 충돌했다.
“사숙, 나는…….”
“네가 가라.”
“……응?”
“우린 못 간다. 하지만 너는 갈 수 있지. 내가 이곳에 남아서 남은 일들을 처리하마. 너는 섬서로 가라. 지금 당장!”
청명이 살짝 놀란 얼굴로 백천을 바라보았다.
과거의 백천이었다면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청명을 말리든가, 굳이 따라나서든가. 억지를 쓰거나 권위로 찍어누르는 한이 있더라도 제 뜻을 기어이 관철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백천은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청명이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구분하고 있었다.
“걸이는 내가 데리고 있으마.”
“예? 저요?”
“여길 조금이라도 빨리 정리하려면 발 빠른 놈이 필요하다.”
“아, 아니, 사숙……. 저는…….”
그 순간 윤종이 조걸의 뒷머리를 잡아 꽉 눌렀다.
“입 좀 닫아!”
“끄응…….”
조걸은 영 마뜩잖은 얼굴로 신음을 흘렸다.
물론 그의 성정만 놓고 따지자면 당연히 더 큰 전장으로 달려가고 싶을 터.
하지만 백천은 조걸이 입은 부상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조걸을 대동하면 청명의 발이 묶이고 더뎌질 수밖에 없다.
“사매나 종이는…….”
“저는 여기 있겠습니다.”
윤종이 슬쩍 청명을 보았다. 여전히 전처럼 부드럽진 않은 눈빛이다. 그러나 그것이 청명을 따라나서지 않는 이유는 아니었다.
“그걸 위해 온 거니까요.”
“……그래.”
백천이 유이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사매는?”
“사질과 같이 갈게요.”
“그래.”
백천은 슬쩍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사실은 한 사람이라도 더 붙여 주고 싶다. 이 무모한 놈이라면 반드시 무슨 일이라도 저지르려 들 테니까.
그러나 더는 시간을 끌 수 없었다. 막 입을 떼려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우리도 간다.”
백천이 고개를 획 돌렸다.
“……따라간다고?”
“여기선 더 할 게 없다. 그리고…… 듣자 하니 위험에 노출된 게 소림만은 아닌 모양인데.”
진금룡의 말에 백천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패련이 북상하고 있다면, 종남 역시 그 위험에 노출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들을 막을 명분이 없다.
아니, 애초에 오지 않아도 될 길을 온 이들이 아닌가.
“그…….”
백천이 입술이 살짝 달싹였다. 하지만 끝끝내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런 그를 보며 진금룡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약해 빠진 놈.”
“……뭐?”
“나댈 생각 말고 몸 잘 사려라. 흑룡왕까지 잡아 놓고 잡졸 같은 수적 놈 칼에 죽기라도 하면, 강호사 내내 다시없을 멍청이로 불릴 테니 말이다.”
“정말, 말을 해도……! 망할 인간 같으니!”
가만 듣고 있던 조걸이 윤종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거 지금 몸조심하란 소립니까?”
“……그런 거 같다.”
“그 말을 왜 저렇게 합니까?”
“……진가는 다 저런 것 같던데. 옛날 사숙도 비슷했잖아.”
“듣고 보니 확실히.”
“거기 조용히 해라, 이 새끼들아!”
백천이 애먼 조걸과 윤종에게 화살을 돌리는 사이, 진금룡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청명의 곁으로 다가갔다.
“안 된다는 말은 안 하겠지, 화산신룡?”
“언제 적 화산신룡이야.”
“그렇게 부르고 싶거든. 내가 만들어 준 별호니까.”
청명이 진금룡과 그 뒤를 따르는 이송백을 쏘아보았다.
“따라올 수 있으면 마음대로 해. 배려 같은 건 꿈도 꾸지 말고.”
“바라던 바다.”
그렇게 청명은 유이설, 진금룡과 이송백, 혜연을 대동하게 되었다. 슬그머니 초조함이 묻어나는 얼굴로 그가 백천에게 말했다.
“간다.”
“그래. 이쪽도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바로 출발하마.”
청명은 이렇다 할 대답 없이 몸을 돌려 섬전처럼 나아갔다. 네 사람도 그를 빠르게 뒤쫓았다.
순식간에 멀어져 간 다섯 사람을 가만히 보던 백천의 두 눈에, 그제야 숨기지 못한 깊은 우려가 떠올랐다.
파아아앗!
청명은 땅을 박차며 연신 속도를 더했다.
‘서둘러야 해!’
뒤로 따라붙은 이들이 버거워하는 게 보지 않고도 느껴지지만, 지금은 저들의 속도에 맞춰 줄 여유가 없다.
‘법정, 이 머저리 같은 인간이……!’
청명이 이를 갈아붙였다.
왜 아직도 모른단 말인가? 왜 아직 자신에 대한 과신을 버리지 못했단 말인가?
장일소가 어떤 놈인지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왜 아직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공명심(功名心) 따위에 매달린단 말인가? 심지어 불자라는 작자가!
‘더 빨리!’
콰앙!
땅을 더 세게 박찼다.
피처럼 붉은 노을이 천천히 퍼져 나가고 있었다.
* * *
“방장!”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법정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전방을 주시했다.
저 멀리 있는 이들이 보인다. 정확하게는 그 무리의 선두에 선 화려한 차림의 남자가 보였다.
“……패군.”
“장일소가 분명합니다!”
법정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확연히 알 수 있다. 저자가 결코 가짜가 아님을.
가짜를 내세우는 건 분명 훌륭한 수이나, 상대가 이미 경계하며 대비할 때는 써먹기 어렵다.
그리고 법정의 예민한 감각은 장일소가 흘려내는 음산한 사기(邪氣)를 또렷하게 읽어 냈다.
“아미타불. 과연 그런 것 같구려.”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법정의 시선은 이 와중에도 장일소에게 꽂혀 있었다. 건너편에 있는 장일소 역시 분명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다행히 제때 도착한 것 같소이다.”
“매복은…….”
“없소.”
법정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라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이곳까지 내달린 게 아니다.
섬서의 산세는 험하다. 그런 지형에 접어들면 상대의 매복을 피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나 이곳은 아직 섬서로 향하는 호북의 길목이다. 이 너른 평야에는 몸을 숨길 곳도, 함정을 팔 곳도 없다.
이 말인즉, 오로지 힘의 승부로만 결판을 낼 수 있단 뜻이다.
변수만 줄일 수 있다면 필승(必勝)을 자신할 수 있다. 이곳에서 적과 마주한 것만으로도 이미 승기를 잡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사패련의 입장에서는 불행하기 짝이 없는 일이겠으나 말이다.
“하면, 어쩌시겠습니까? 바로 공격합니까?”
종리형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장일소의 흰 목을 베고 싶어 안달이 난 것이다.
하기야 왜 그렇지 않겠는가? 종리형도 법정만큼이나 저들에게 원한이 깊을 터인데.
그러나 법정은 그런 종리형의 경거망동을 허락지 않았다.
대신 슬쩍 위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미 노을이 제법 번졌다. 시간을 가늠해 본 법정이 나직하게 불호를 외었다.
“사파의 수괴라고는 하나, 이만한 세력을 이끄는 자입니다.”
“……하면?”
“유언쯤은 들어 봐야겠지요.”
법정이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그를 따르던 이들이 보조를 맞춰 걷기 시작했다.
태산이 통째로 움직이는 듯 대단한 기세였다.
구파일방이 어떻게 천하에 이름을 떨쳐 왔는지 잘 보여 주는 광경이었다.
쿠웅!
적을 향해 조금 더 나아간 법정이 땅이 울리도록 진각을 밟았다.
“패군께서 거기 계시오? 소림의 법정이 뵙기를 청하오!”
어마어마한 내력이 실린 사자후였다.
같은 편조차도 순간적으로 질릴 정도인데, 그에 마주 선 이들이야 얼마나 공포스러울지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정작 그 고함에 돌아온 건, 느릿하다 못해 권태롭기까지 한 대답이었다. 법정의 사자후에 비하자면 속삭이는 쪽에 가까웠다.
“귀 안 먹었으니 그렇게 소리 지를 것 없어. 나는 여기에 있단다.”
패군 장일소. 그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장신구들이 이리저리 부딪히며 짤랑이는 소리가, 순간적으로 고요해진 평야에 음악처럼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