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601화
1601화. 웃음도 안 나오는군. (6)
“련주님.”
호가명이 장일소에게 조심스레 술병을 내밀었다.
장일소가 피식 웃으며 그 병을 받아 들었다. 그는 호가명이 어느새 공수해 온 말에 올라 있었다.
“내가 이래서 너를 어쩌지 못하는 거란다.”
“그럼 제 안위를 위해서라도 더욱 진귀한 술을 구해야겠군요.”
“되었다. 무슨 말을 못 하겠구나.”
장일소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이미 전장에서는 한참 멀어졌다. 이 정도 호사는 누려도 될 것이다. 느릿하게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 모습을 가라앉은 눈으로 지켜보던 호가명이 입을 열었다.
“경하드립니다.”
“경하?”
“이 승리는 길이 남을 것입니다.”
단순한 공치사가 아니다. 이 대전은 반드시 강호의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사파가 처음으로 저 정파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가한 승리로 말이다.
장일소란 이름은 구파의 치세를 끝내고 사파 천하를 이룩한 이로 기록되리라. 그게 영광의 역사든, 치욕의 역사든.
“새삼스럽게 굴 것 없다.”
하지만 정작 그 당사자인 장일소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항상 하던 일이지. 이번에는 규모가 조금 더 커졌을 뿐. 딱히 대단하게 잘한 것도 없단다. 내가 뛰어난 게 아니라 저놈들이 머저리였을 뿐이야.”
장일소는 항상 이런 식이다.
“하지만 이번 승리는 단순히 머저리들을 농락한 게 아니겠지요. 그 역시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았습니까?”
“누구? 화산검협 말이냐?”
“예.”
잠시 침묵하던 장일소가 쿡쿡대며 웃었다.
“가명아.”
“예.”
“내가 그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니?”
“물론입니다.”
“마음은 고맙구나.”
호가명은 술을 들이켜는 장일소를 슬쩍 살폈다.
“련주님께서는 그리 생각지 않으십니까?”
“뭐, 나은 면도 있을 거란다.”
상처투성이 손가락이 턱을 타고 흘러내린 술을 훔쳤다.
“그리고 아닌 면도 있겠지. 하지만 이 승부를 가른 건 ‘누가 더 뛰어난 인물인가.’ 따위의 하찮은 문제가 아니란다.”
“⋯⋯하면 어떤⋯⋯.”
“과히 많은 게지.”
장일소가 우습다는 듯이 웃었다.
“안휘에, 호북에, 심지어 해남까지. 아니, 아니야. 어쩌면 놈은 강남마저도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
호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일소가 천천히 술병을 돌렸다.
“나는 지켜야 할 것이 없는데, 그는 천하를 모조리 지켜야 하지. 몸이 열 개가 아닌 이상 모든 곳에서 활약할 수는 없는데 말이다. 그러니 이건 애초에 공평하지 않은 내기지.”
호가명의 얼굴이 굳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생각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알고 있니, 가명아?”
“⋯⋯.”
“그놈은 자기 자신이 있는 곳에서는 패한 적이 없단다. 언제나 이겨 왔지. 장강? 놈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항상 더 많은 결과를 얻었을 것이다.”
“확실히⋯⋯.”
그러고 싶지 않지만, 인정해야만 했다. 다름 아닌 호가명이 그 ‘활약’의 희생자니까.
“그러니까 반대로 그를 상대하는 법도 간단하지. 지키게 해 주면 된단다. 이 넓은 천하를 모조리.”
장일소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고작 한 쌍밖에 안 되는 손으로 그 많은 것들을 움켜쥐다 보면.”
째앵.
장일소의 손에 쥐여 있던 술병이 산산조각 나며 튕겨 나갔다. 꽉 쥔 손에서 투명한 술이 줄줄 흘러내렸다.
“결국은 그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는 것들이 생기기 마련이지.”
“⋯⋯.”
“나는 그저 선택할 여지를 준 거란다. 안휘를 지킬 것인지, 아니면 구파를 지킬 것인지. 소림을 지킬 것인지, 아니면⋯⋯.”
장일소의 입꼬리가 기이하게 말려 올라간다.
“놈이 그리 중히 여기는 화산을 지킬 것인지.”
“⋯⋯.”
“물론 그 선택을 모두 알고 하는 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하하하핫!”
지독하게 복잡하다. 범인(凡人)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면서도 쉬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장일소는 그 모든 걸 가장 단순하게 정리했다.
핵심은 화산검협을 어떻게 끌어내느냐.
그리고 어떻게 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싸우느냐다.
‘어쩌면⋯⋯.’
순간 호가명의 등골로 한기가 흘렀다.
“감히⋯⋯ 하나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런 사족 붙이지 않아도 된다고 해도 자꾸만 그러는구나. 얼마든지 물어보렴.”
“련주님께서는⋯⋯.”
호가명은 잠깐 머뭇거렸다. 어쩌면 이 질문을 입에 담는 것 자체가 불경일지도 모르므로.
그럼에도 망설임 끝에 입을 열고 말았다. 도무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 곧 모용과 제갈, 그리고 천우맹이 당도하리란 걸 예상하셨습니까?”
“흐음?”
장일소의 두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밝은 눈동자에 유쾌함이 어려 있었다.
“어떨 것 같니?”
호가명은 침묵했다. 감히 대답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장일소가 묘한 미소를 흘렸다.
“전혀 몰랐단다.”
호가명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장일소는 딱히 대단한 소리를 한 것도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물론 올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 시기를 정확하게 알기란 어렵잖니. 아무리 나라고 해도 말이다.”
“그, 그럼 어째서?”
“왜 물러났냐고?”
호가명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불경을 저지르고 말았다.
“글쎄⋯⋯. 왜일까?”
장일소는 이렇다 할 대답을 명쾌하게 들려주진 않았다. 하지만 알 것 같았다.
예측할 필요가 없다.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미 정했으니까. 그가 있는 곳에서는 싸우지 않는다고.
생각은 화산검협이 할 것이다. 그가 판단할 것이다. 이길 가능성이 있다고, 이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다고.
반대로 말하면, 그가 걸어오는 싸움에만 응하지 않으면 사패련은 적어도 패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호가명은 벽에 맞닥뜨린 듯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모든 작전은, 그 구조는 상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해야만 하지 않는가⋯⋯?
구파를 상대하는 장일소가 반드시 이길 것이라 믿고 안휘에서 이곳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화산검협.
그리고 그런 화산검협을 보자마자 그 많은 대군을 이끌고도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버린 장일소.
‘둘 다⋯⋯.’
둘 다 제정신이 아니다.
감히 입에 담을 순 없지만, 이 상황을 설명할 길은 그 말뿐이다.
세상에서 서로를 가장 증오하는 두 사람이, 반대로 서로를 가장 완벽하게 믿고 있다는 것은 비극이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역설이었다.
호가명은 속에서부터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무언가를 지그시 눌렀다. 그리곤 이 정체 모를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말을 돌렸다.
“그럼⋯⋯ 이번에는 놈이 어디를 선택했을 거라고 예상하십니까?”
“소림이란다.”
“⋯⋯놈에게는 화산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그렇지. 하지만 이번엔 둘 모두를 올려 두고 비교할 수 없거든. 이미 한번 해 버린 선택은 돌이킬 수 없지.”
“⋯⋯.”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해 아쉽구나.”
장일소가 제 손에 묻은 술을 혀로 핥아 올렸다.
“자기도 모르게 해 버린 선택 때문에 발버둥 치는 놈의 얼굴은 다시 없을 유희일 텐데 말이다.”
금세 옅어진 주향이 피비린내와 함께 입 안에 맴돌았다. 그는 희미하게 조소했다.
이제 이 수는 더 쓸 수 없다. 정파는 이제 결국 천우맹의 이름하에 재편될 테니까.
하지만⋯⋯.
“그러니 내 마지막 선물 정도는 즐겁게 받아 주려무나. 꽤 정성 들여 준비했으니까.”
장일소의 얼굴에 새파란 귀기가 넘실거렸다.
❀ ❀ ❀
타다다다!
일백이 훨씬 넘는 말들이 황야를 질주한다. 붉은색과 흰색이 묘하게 어우러지고 뒤섞인 장포가 바람에 휘날렸다.
말을 재촉하는 이들의 눈에선 흉흉한 기세가 흘렀다.
“서둘러라!”
장일소가 명한 시간이 다 되어 간다.
개방의 눈을 피하기 위해 서장으로 향하는 산맥을 타고 대초원을 한참이나 질주한 끝에 마침내 이곳에 이르렀다.
이제 목표인 화음까지는 금방이다. 선두에 선 이가 입술을 핥았다.
‘화산⋯⋯.’
실로 증오스러운 이름이 아닌가. 그 이름을 무너뜨리는 게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생각에 머리카락이 쭈뼛 설 만큼 흥분되었다.
계획대로라면 화산이 자리 잡은 화음은 지금 무주공산 그 자체일 터.
“도착하는 즉시 모조리 죽이고, 불을 질러라. 놈들이 그 광경을 보고 울부짖을 수 있게.”
“예!”
선두를 달리던 홍견이 말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더 빨리!’
아직 여유가 있음에도 마음이 자꾸만 타들어 간다.
조금만 늦어도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저 증오스러운 화산검협이 당도하기 전에, 화음에 살아 있는 것들은 모조리 지워 버려야 한다. 그가 모든 걸 잃고, 마침내 자기 자신까지 잃어서 원귀로 날뛰도록.
‘더!’
다시 한번 말을 재촉하려는 순간이었다.
“조장! 앞에!”
“음?”
홍견이 눈살을 찌푸렸다.
대초원에서 섬서로 이어지는 길은 말 그대로 황무지나 다름없다. 딱히 시야를 가릴 것도 없는 광활한 황무지.
한데 사람의 흔적이 있을 리 없는 그 황량한 대지 위에 무언가가 있었다.
‘사람?’
황무지를 걷고 있는 이의 피풍의는 낡아서 바람이 부는 대로 너덜거렸다. 사실 피풍의라기보다는 거적에 가까운 무언가다.
심지어 피풍의 아래로 드러난 발에는 신발조차 신겨져 있지 않았다.
이런 황야를 거지보다 못한 꼴로 걷는다면⋯⋯.
‘광인인가?’
제정신 박힌 자가 저런 차림으로 이 땅을 횡단할 일은 없을 터.
“어찌합니까?”
“당연한 소리를.”
챙.
도집에서 새파란 도가 뽑혀 나왔다.
굳이 눈을 남길 필요는 없다. 만일을 대비해 그들을 본 이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
‘운이 없었다고 생각해라.’
타앗!
말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준마가 날뛰듯 사내를 향해 돌진했다. 삽시간에 접근한 홍견이 사내의 등을 향해 도를 내리쳤다.
❀ ❀ ❀
“도, 도장?”
화음의 대로로 갑자기 뛰어든 청명의 모습에, 황종의는 화들짝 놀랐다.
“후욱! 후욱! 후욱!”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호흡을 토해 내는 청명의 모습이 낯설었다. 청명은 숨을 고를 틈도 없이 황급히 좌우를 살폈다. 눈이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황종의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운암이 거침없이 청명에게 다가왔다.
“어떻게? 혼자 왔느냐?”
청명은 그 말조차 들리지 않는 듯, 그저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기 바빴다.
그렇게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끝에 청명의 입이 열렸다.
“⋯⋯적은?”
“적?”
운암이 눈을 찌푸렸다.
“적이라니? 사패련은 호북에 있지 않으냐?”
“⋯⋯.”
“태상장문인께서 맹도들을 이끌고 호북으로 가셨다. 전달받지 못했더냐?”
운암의 얼굴에 걱정이 스쳤다. 청명은 그 얼굴을 멍하니 보았다. 손끝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뭐⋯⋯지?’
청명이 먼저 도달했다? 아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놈들이 그리 어설플 리가 없다.
그럼 애초에 놈들이 화음을 노리지 않았다? 아니. 그런 일 역시 있을 수 없다.
장일소가 그를 알듯이, 그 역시 장일소를 안다. 그 상황에서 굳이 병력을 빼돌려 노릴 만한 곳은 오직 이곳뿐이다.
그렇다면 이 광경은 대체 어찌된 일인가. 왜 화음은 여전히 평화로운가?
“청명아?”
청명의 두 눈이 혼란에 잠겼다.
“대체⋯⋯.”
힘없이 입을 벌린 채 영 갈피를 잡지 못하던 청명이, 앓듯이 속내를 흘렸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무언가 쩌적 금이 가는 듯한 소리가 청명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