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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607화


1607화. 눈을 떠도 마찬가지군. (2)

“다른 분들은?”

“일단 다들 배정된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임소병의 말에 당군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백천의 말은 말 그대로 폭탄이 되었다. 아직 정리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처럼 남았건만, 그 하나의 말이 모든 의제를 집어삼켜 버렸다.

그 분위기에서 회의를 이어 나가기란 쉽지 않았기에, 일단은 파할 수밖에 없었다.

“배신이라⋯⋯.”

나직이 중얼거린 당군악은 금세 굳게 입을 닫았다. 그리고 슬쩍 현종을 바라보았다.

굳이 묻지 않아도 눈가에 내려앉은 수심이 훤히 보였다. 내심을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군사는 어떻게 보는가?”

“흐음.”

현종, 당군악과 다탁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던 임소병이 혀를 차며 부채 끝으로 볼을 톡톡 두드렸다.

“합리적입니다.”

“⋯⋯.”

“확실히 그것 말고는 다른 가능성이 없습니다.”

“패군이 따로 병력을 육성했을 확률은 정말 없는가?”

“장일소에게 그만한 힘이 있었다면 애초에 사패련이라는 연합 형태를 이루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냥 만인방이 사파를 일통했겠죠.”

“⋯⋯.”

“그리고 만약 사패련이 결성된 이후 장일소가 그만한 이들을 육성하는 데 성공했다?”

임소병이 어깨를 으쓱한다.

“그럼 뭐 고민할 것 있겠습니까? 당장 호북으로 달려가서 목숨만 살려 달라 빌어야겠지요.”

당군악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터졌다.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말게. 우리야 농으로 듣겠지만.”

“다른 사람들의 귀에는 그리 안 들린다는 말씀이시겠지요. 조심하겠습니다.”

당군악은 피로로 경직된 눈가를 문지르며 물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누가 배신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가능한 문파들을 말씀드립니까?”

“⋯⋯아닐세.”

들어 봐야 괜한 의심만 깊어지겠지.

적들은 나날이 강대해지고, 이쪽은 그런 적을 견제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그런데 이제는 외부의 적만이 아닌 내부의 배신마저 경계해야 한다니.

그 모든 상황이 당군악에게 하나의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정말 이길 수 있는 걸까?’

어쩌면 장일소의 존재를 우려하면서도 그를 가장 무시해 왔던 건 다름 아닌 당군악일지도 모른다.

그는 단 한 번도 천우맹과 구파일방이 이 지경까지 몰릴 거라고 여긴 적이 없었다.

“⋯⋯놈들은 지금 어쩌고 있는가?”

“호북 외곽의 장원 몇 개를 점거한 후로 움직임이 없습니다.”

당군악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내부 정리가 필요하겠지.

“맹주님.”

당군악의 부름을 받은 현종이 말없이 시선을 던져 왔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 중입니까?”

“⋯⋯가주님.”

“예.”

“⋯⋯배신이라 함은, 정도(正道)를 따르던 이들이 장일소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당군악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왜 갑자기 이런 뻔한 말을 하신단 말인가.

“그렇겠지요.”

“어째서요?”

“⋯⋯예?”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한다는 말입니까?”

당군악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현종이 조용히 말했다.

“그땐 우리에게 승기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사패련을 돕고 나서지 않았다면 사파는 승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요. 이쪽이 기울었을 때 저들에게 굴복한 것도 아니고, 충분히 유리한 입장에 서 있었음에도 적에게 고개를 조아릴 만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당군악의 얼굴이 절로 굳어졌다.

이 점은 생각지 못했다. 배신자가 있을 수 있단 사실 자체가 너무 충격적이라 이에 매몰되어 있었던 것이다.

“당위⋯⋯.”

맞는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배신할 이유가 없었다. 하물며 그만한 실력을 지닌 이들이 대체 뭐가 아쉬워서 사패련의 편을 들고 나선단 말인가?

“⋯⋯패군이 뭔가 혹할 만한 약조를 한 게 아니겠습니까? 강북을 넘겨준다든가⋯⋯.”

그 말에 임소병이 피식 웃었다.

“사파의 말을 믿고 배신하는 정파라니. 동화책에도 안 나올 이야기군요.”

그 말도 맞다. 생각하면 할수록 오리무중이다.

‘허깨비 같군.’

분명 존재하되, 도무지 실체가 없다.

“대체⋯⋯.”

오래도록 궁리하던 임소병이 짜증 난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총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은 제일 정신 나간 양반의 의견을 들어 봐야 할 것 같은데.”

“⋯⋯.”

당군악과 현종이 저도 모르게 서로를 마주 보았다.

❀ ❀ ❀

“⋯⋯배신이라니.”

모용위경이 넋을 놓은 듯 중얼거렸다. 그러자 제갈자인이 물었다.

“그 말을 믿으십니까?”

“믿고 싶지는 않지만⋯⋯ 믿지 않을 도리도 없지 않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배신이라니.”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얼굴은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종리곡은 조용히 쥐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피식 웃고 말았다.

자리를 파하자마자 이 둘이 그의 처소에 들어와 앉은 참이다.

종남과 딱히 친밀한 관계는 아니더라도 어색하기 짝이 없는 천우맹보다는 낫다는 생각이었겠지.

그게 아니면, 지금까지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해 본 적이 없으니 자신들에게 지시를 내려 줄 누군가가 필요해서든가.

“장문인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아니나 다를까 제갈자인이 넌지시 종리곡에게 물어 왔다.

“그 전에⋯⋯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예, 말씀하시지요.”

“그들이 정말 존재하긴 했었습니까?”

“⋯⋯예?”

제갈자인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어안이 벙벙하여 종리곡을 응시했다.

“두 분을 막아선 이들 말입니다. 그들이 정말 존재했었냐 묻고 있는 것입니다.”

잠시 후, 제갈자인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장문인!”

“흥분하지 마십시오. 확인에 불과하니까. 저는 설령 두 분께서 말을 맞춘 것이었다 한들 비난할 마음이 없습니다. 지금은 차라리 그게 나은 상황이지요. 그럼 적어도 사패련에 의문의 전력이 추가되었다는 게 아닌 셈이니 말입니다.”

제갈자인이 입술을 짓깨물었다.

“제가 드린 말씀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습니다.”

“음.”

종리곡이 나직이 앓는 소리를 흘렸다.

그럼 결국 배신자가 존재했다는 말이다.

그 순간 모용위경이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가 우둔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 모든 상황 자체가 이해가 안 갑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정체불명의 적들이 나타났다고 해서 그들을 꼭 배신자라 단정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제삼의 세력이 놈들에게 들러붙은 것일 수도 있고.”

제갈자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랬으면 굳이 정체를 숨길 필요가 없었다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저들이 정체를 숨기기 위해 애쓰는 걸 명확히 보았습니다.”

“아니, 그렇긴 하지만⋯⋯.”

종리곡이 다시 찻잔을 입에 가져왔다. 더 이야기해 본들 탁상공론이고, 같은 이야기의 반복일 뿐이다.

“하나 더 여쭙겠습니다.”

“예, 장문인.”

“그들과 싸울 때 어떤 식으로 싸우셨습니까?”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듣자 하니 서로 큰 피해 없이 물러섰다고 들었습니다. 전면전이 벌어졌다면 그리 끝나지는 않았을 터, 직접 손을 섞은 건 몇 정도입니까?”

제갈자인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건⋯⋯.”

우물쭈물하던 그는 종리곡의 눈치를 살피더니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열⋯⋯. 아니, 열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찻잔을 기울이려던 종리곡의 손이 우뚝 멈춘다.

“열?”

“⋯⋯예.”

“인원은 일백 이상. 그리고 실제 겨뤄 본 것은 열. 그런데 가주께서는 어째서 그들 모두가 고수라고 확신하셨습니까?”

“그건⋯⋯.”

모용위경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기세가 있지 않습니까? 제대로 무학을 배운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풍모. 놈들에게는 그게 있었습니다.”

종리곡의 입가가 살짝 비틀렸다.

“결국은 그저 눈으로 짐작하기에 그리 보였다는 말씀이시군요.”

“아, 아니, 그건 말이 조금⋯⋯.”

모용위경이 떠듬떠듬 변명을 붙였지만, 제갈자인은 입을 꾹 닫은 채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야 종리곡은 대강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합리적이군.’

적들이 강했다는 건 거짓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제대로 확인한 건 고작 십여 명에 불과하다.

그 십여 명의 뒤로 붙은 다른 이들이 그저 수만 채우는 허장성세에 불과했다 해도 확인할 길이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제갈자인은 굳이 희생을 감수하며 적과 싸우려 들지 않았다.

이유는 두 가지였을 것이다.

하나는, 그 정체 모를 자들을 이겨 봐야 이쪽의 희생이 크다면 본대는 어차피 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그보다 더 결정적인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정체조차 알 수 없는 이들을 상대로 목숨을 걸 만큼 이들이 열정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리라.

‘배신이라⋯⋯.’

종리곡이 흘러나오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이래서야 그들의 정체가 무엇이었든, 배신자가 있었다는 말 자체는 부정하기 어렵지 않은가?

적극적으로 칼을 들이미는 것만이 배신은 아닐 테니까.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법정의 입장에서는 누가 진짜 배신자일까?

“장문인.”

들려오는 목소리에, 종리곡은 떠오르는 상념을 접어 두었다. 지금은 이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범위가 과하게 넓어지는군요.”

“그 말은⋯⋯.”

“의도만 있다면 어렵지 않다는 말입니다. 백 정도의 인원과 열 명 정도의 고수만 보유할 수 있다면 누구든 그곳에 있을 수 있었다는 말이겠지요. 예를 들면⋯⋯.”

종리곡이 묘한 웃음을 흘렸다.

“지금은 그 담장 안에 누가 있는지 확인할 수 없는 이들이라든가.”

제갈자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장문인!”

“그게 아니면, 먼 변방에 있어 중원에 일에 아직 관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 이들이라든가.”

이번에는 모용위경의 얼굴이 살짝 질린다.

“장문인, 지금 그 말씀은⋯⋯.”

“그게 아니면.”

종리곡이 담담히 말했다.

“지금 여러분의 앞에 앉아 있는 이일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

“⋯⋯.”

이제 입까지 굳어 버린 것처럼 말을 잃은 두 사람을 빤히 보던 종리곡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제 말은, 그런 조건으로는 특정이 불가능하단 뜻입니다. 누구라도 배신자가 될 수 있지요.”

“그⋯⋯렇긴 합니다.”

“그럼 대체 어찌 대처해야 할지⋯⋯.”

“글쎄요.”

종리곡이 한숨을 내쉬며 차를 단번에 들이켰다.

“조금 우스운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저는 나름 화산과 천우맹에 대해 잘 아는 이입니다.”

“예, 장문인.”

“천우맹⋯⋯. 아니, 화산이라는 문파는 보통 이런 경우 상식적으로 가는 법이 없더군요.”

“예?”

“⋯⋯사람의 문제인지, 아니면 문파의 문제인지는 몰라도.”

종리곡이 시선을 돌렸다. 창 너머에 지긋지긋할 만큼 우뚝 솟은 화산이 보인다. 이를 빤히 보던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 ❀ ❀

붉은 노을이 엎질러진 듯 온 세상을 물들여 간다.

화산 북봉(北峯) 어귀에 앉은 청명의 얼굴도 점차 붉어졌다.

그렇게 미동도 없이 지는 노을만 물끄러미 보는 청명의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여기 있었구나.”

청명은 말없이 돌아보았다.

“화산 사람이 틈만 나면 산을 타다니. 너처럼 산 타는 걸 좋아하는 놈은 세상에 또 없을 거다. 어떻게 시간만 나면 여기에 와 있냐? 어차피 곧 내려가야 할 텐데.”

백천은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다가왔다. 그리고는 청명의 곁에 턱 걸터앉았다.

청명이 물었다.

“무슨 일이야?”

“뭔 일이 있어야 오냐?”

백천은 청명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청명이 보던 하늘만 보며 답했다.

“그냥 눈총도 좀 피할 겸 올라와 본 거지.”

그 말에 청명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눈총받는다는 인식은 있는 모양이네.”

“나도 눈치가 있는 사람이다.”

“낯짝이 워낙 두꺼워서 그런 건 모를 줄 알았거든.”

이번엔 백천이 옅은 웃음을 터트렸다.

백천은 배신자가 아니다. 배신자가 있을 가능성을 언급했을 뿐.

하지만 사람들은 늘 그렇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직면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기어이 코앞에 들이미는 이를 외려 불편하게 여긴다. 심지어 손가락질하고 욕하기도 한다.

결국 현실을 받아들이고 나면 분위기가 곧 바뀌기야 하겠지만, 한동안은 불편한 시선을 감내해야 하리라.

“그래서 도망 나왔어?”

“뭐, 도망이라기보다는⋯⋯ 잠시 피한 거지.”

“왜 하필 여긴데?”

“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

잠깐 말을 멈춘 백천이 시선을 돌려 청명을 바라보았다.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지금 내가 받는 이 시선을, 지금까지는 네가 받았겠구나 하고.”

“⋯⋯.”

노을은 점점 빠르게 검붉어지고 짙어졌다. 청명의 얼굴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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