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609화
1609화. 눈을 떠도 마찬가지군. (4)
“끄으으응⋯⋯.”
앓는 소리를 흘린 조걸이 터덜터덜 화음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아이고, 죽겠네.”
저 먼 숭산에서부터 이곳까지 미친 듯이 달려오느라 거의 녹초가 된 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달려온 것에 비해 앞에 펼쳐진 화음은 조용하다 못해 고요하기까지 했다.
“자, 보십쇼. 별일 없잖습니까?”
“⋯⋯.”
“어차피 사숙이 갔으니까 우린 이렇게까지 빨리 따라갈 필요 없다고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뭐 하겠다고 그 먼 데서 여기까지 굳이!”
“⋯⋯.”
“아니, 게다가 꼭 데리고 갈 사람이 필요하면 소소를 데려가시라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사람 쉬지도 못하게⋯⋯.”
“걸아.”
“예?”
“입 좀 다물어라. 제발.”
“들어 보십쇼. 제가 말씀을 몇 번이나 드렸잖습니까. 우린 그냥 천천히 와도 된다니까요? 어차피 높으신 양반들이 다 알아서 할 건데, 어이구. 구경이나 하겠다고 그렇게 발에 땀 나도록 달려오는 게 말이나⋯⋯.”
“⋯⋯걸아. 나는 한 번씩 생각한단다.”
“예?”
“끝없이 조잘대는 조동아리에 검집을 쑤셔 넣는 감각이 어떤 걸까 하고 말이다.”
“⋯⋯.”
순간 등골이 서늘해진 조걸이 재빨리 입을 닫았다. 그런 그를 보며 윤종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차마 도인이 할 짓이 아니라 그저 궁금함으로 남겨 두고 있긴 하지만, 네가 하는 말을 계속 듣고 있다 보면 도인으로서 못 할 경험을 한 번쯤 해 보는 것도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조걸은 입을 꾹 다문 채로 눈만 굴렸다.
옛날 같았으면 한마디라도 더 깐죽거려 보겠지만, 어째 요즘은 이 양반이 좀 무섭다. 한 번씩 눈에서 칼 쏘며 희번덕대는 걸 보면 살짝 섬뜩하기도 하고.
마침내 조용해지자 윤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눈치 보던 조걸이 슬그머니 물었다.
“이건 근데 궁금해서 묻는 건데요. 그냥 진짜 궁금해서.”
“⋯⋯뭔데.”
“진짜 왜 이렇게 급하게 오신 겁니까? 생각하신 바라도 있습니까?”
윤종은 질린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조걸의 이 포기하지 않는 근성은 배워야 한다.
“네 말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겠지. 기껏해야 자리나 채우는 정도일 것이다. 어쩌면 회의실 안에 들어갈 수 없을지도 모르고.”
“제 말이요. 기껏해야 꿔다 놓은 보릿자루 아닙니까?”
“그래서다.”
“엥?”
윤종이 화음을 응시하며 말했다.
“할 수 있는 게 보릿자루 역할밖에 없다고 해도, 그 보릿자루에 위안받는 이가 있을 수도 있잖느냐. 등 뒤에 누군가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분명하니까.”
“뭔 소립니까, 그게?”
“됐다⋯⋯. 그냥 그렇게만 알아 둬라.”
윤종은 말을 줄이며 익숙한⋯⋯. 아니, 이제 익숙하다기에는 좀 많이 변해 버린 화음의 정경을 둘러보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화음이 고요로 물들어 있다.
윤종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어렸다.
“그래도 다행히, 늦지 않게 온 모양이구나.”
그의 시선은 어느새 화음을 넘어 화산으로 향해 있었다.
높고 거친 산을 박차며 누군가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내려오고 있었다.
❀ ❀ ❀
“그보다, 이제 어찌하실 생각이신지?”
제갈자인의 신중한 눈길이 모용위경과 종리곡에게로 향했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제갈가주님?”
모용위경이 되물으니 제갈자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상황은 명징합니다. 지금이야 당장 떨어진 화두 때문에 혼란스럽지만, 진정되고 나면 입장 정리에 들어가겠지요.”
“⋯⋯정리라 하시면?”
“패전의 잔당에게 제 살을 나눠 줄 이는 없단 의미입니다.”
모용위경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우릴 박대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가능한 일입니다. 아니, 외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이상하지요. 저들이 우릴 보듬을 이유야 없지 않습니까? 애초에 우린 강호사에 남을 패전을 초래했고, 그 끔찍한 전쟁에서 멀쩡히 살아 돌아온 셈이니 말입니다.”
“크흠.”
모용위경은 그 말이 불편한 듯 헛기침을 흘렸다. 하지만 제갈자인은 꿋꿋하게 말을 이어 갔다.
“게다가 이젠 가진 힘도 천우맹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지요. 까딱하다가는 궂은 일만 하는 패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제갈자인의 말을 곱씹으며 모용위경은 얼굴을 굳혔다.
현종이 그럴 위인은 아니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모용위경 역시 안다. 한 집단을 이끌어 나가는 이는 그 개인의 공명정대함과 무관하게 비정한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그 역시 가주이니 모를 리 없다.
“하면, 제갈가주님께선 어찌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선택해야겠지요. 천우맹을 떠나 권토중래(捲土重來)를 노리든가.”
제갈자인이 살짝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니면, 우리 역시 저들이 괄시하기 어려울 만한 세를 구축하든가.”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제갈자인의 시선이 종리곡에게 꽂혔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장문인?”
“⋯⋯.”
종리곡은 반쯤 식은 찻잔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제갈자인은 대답을 재촉하듯 덧붙였다.
“종남과 모용, 그리고 제갈이라면 저들도 결코 우리를 함부로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저들에게서 천우맹의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저들의 연합은 단단해 보이지만 실상은 느슨하기 짝이 없습니다. 당가는 어렵다고 해도, 개방과 남궁, 해남은 과거의 연이 있으니 적당히 관계를 맺기 어렵지 않을 겁니다. 이를 바탕으로 움직인다면⋯⋯.”
여기까지 들은 종리곡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를 호의로 받아들인 제갈자인이 살짝 화색을 띠었다.
“종남이라면 그 문파들을 이끌기에 부족함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된다면 맹주와 대등한 관계에 오르기도 그리 어렵진 않을 것입니다. 종남이라면 당연히 그리해야지요.”
관계가 불편한 현종의 아래로 정말 들어갈 것이냐는 은근한 도발이었다. 종리곡은 찻잔 안에 고인 식은 차를 보며 생각했다.
‘익숙하군.’
그러면서도 새삼스러웠다.
과거에는 이 모든 것들이 일상에 가까웠다. 한 집단 안에서도 암묵적으로 적을 규정하고, 자신의 편이 될 이들을 규정한다. 앞에서는 웃으면서 뒤로는 다른 말을 하고, 언제고 가장 큰 이득을 볼 수 있을 기회를 찾느라 머릿속이 분주했다.
종리곡은 딱히 제갈자인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았다.
종남이 봉문하기 전에 이런 일에 가장 열성적이었던 이가 바로 종리곡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종리곡부터가 이런 세 가르기로 구파일방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 종남의 위상을 만들어 내었다.
제갈자인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아는 것이 그것뿐이다. 그저 해 온 것이 그런 일일 뿐이다.
평생을 그리 살고, 그게 옳다고 믿었던 사람이 갑자기 삶을 바꾸는 게 쉬울 리 있겠는가? 바꿔야 한다는 인식도 없을 터인데.
“⋯⋯장문인?”
제갈자인이 거듭 재촉하자 마침내 종리곡이 찻잔을 다탁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작게 웃었다.
“일리 있는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논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만한 일을 논하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예, 예. 맞는 말씀입니다만⋯⋯ 지금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시간 아닙니까.”
“뭐, 그렇기도 합니다만.”
우습게도 지금 제갈자인은 종리곡에게 커다란 가르침을 주었다.
말 자체로 가르침을 준 게 아니다. 종리곡은 제갈자인의 의도에서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적당히 이 상황을 덮고 넘어가려는 제 모습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나 역시 같은 족속이로군.’
긴 봉문을 거치며 자신이 꽤 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그 역시 저들처럼 평생을 살아왔다. 생각과 태도가 크게 다를 리 없다.
만일 이곳에 앉은 이가 진금룡이었다면 어땠을까?
“쿡쿡.”
머릿속으로 그려 보던 종리곡은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그 융통성 없는 진금룡이라면 악취가 진동하니 당장 눈앞에서 꺼지라고 쏘아붙였을지도 모른다.
한껏 날이 선 검 같은 진금룡이 아주 가끔 불편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둥글기만 한 자신이 너무 늙어 버렸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다.
“어쨌건 지금 당장은 그런 걸 논할 시간이 없을 겁니다.”
“예? 그건 또 무슨⋯⋯.”
그때였다.
똑똑똑.
급하게 달려오는 듯한 인기척과 함께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문이 열리며 한 청년이 고개를 조아렸다.
“가주님. 조금 전 회의했던 전각으로 지금 당장 다시 모여 달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다시 모이라고?”
제갈자인은 저도 모르게 창 쪽을 돌아보았다. 컴컴했다.
“이미 해가 다 떨어졌거늘.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도 좀 전에 파한 회의를 어찌 이 늦은 시간에 다시 이어 간단 말이냐?”
“저는 그저 전달을 받은 터라⋯⋯.”
“누가 부른 것이냐? 맹주님인가?”
“그게⋯⋯ 일단 총사라고 전달을 받았습니다.”
“총사?”
천우맹에 그런 직위가 있었던가? 제갈자인의 의문을 알기라도 하는 듯 종리곡이 중얼거렸다.
“화산검협이로군.”
제갈자인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화산검협 청명이 천우맹의 총사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니, 그게 뭔⋯⋯.”
그는 이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어 버렸다.
어린아이에게 총사라는 과분한 직위가 가당키나 한가? 아무리 강호가 강한 자를 우대하는 곳이라지만 이건 과하다.
“잠깐, 잠깐. 그렇다는 건, 지금 그가 우리를 불렀다는 소린가?”
황당함이 가시고 그 자리에 노기가 밀려들었다.
“천우맹의 총사라는 자리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일문의 가주들을 오라 가라 한다는 말인가! 그것도 이런 상황⋯⋯.”
하지만 제갈자인의 호통은 다 터져 나오기도 전에 멎었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종리곡 때문이었다.
“⋯⋯장문인?”
“부른다고 하니 가야지요.”
“자, 장문인, 잠시!”
얼마나 당황했는지 제갈자인은 말까지 더듬고 말았다.
총사라는 거창한 직책을 지녔다 해도 결국 화산의 이대제자에 불과하다. 천하의 종남 장문인이 어찌 그런 이의 부름에 움직인단 말인가?
종남의 꼴이 얼마나 우스워지는지는 생각지도 않고?
“장문인, 이건 경우가 아닙니다!”
“한 가지 알아 두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예?”
“제가 보아 온 천우맹은 그런 경우 같은 걸 따지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 생각으로 이곳에 머무르시면 아마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저길 보시면 아시겠군요.”
종리곡이 열린 문틈을 향해 턱짓했다. 그곳을 본 제갈자인과 모용위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도 익히 아는 두 사람이 경공까지 펼치며 대로를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저, 저분들이.”
“이대제자니 뭐니 하지만, 천우맹의 맹주와 부맹주까지 불러 대는 이입니다. 그러니 그 말을 듣는 게 그리 창피한 일은 아닐 겁니다.”
순식간에 까마득히 멀어진 현종과 당군악의 자취를 더듬듯 보던 가주들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종리곡은 웃음기 어린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가실 거면 서두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객의 입장에서 주인보다 느긋하게 도착하면 되레 욕먹기 딱 좋지 않겠습니까.”
그는 그 말을 남기고 전각을 나섰다.
감각으로 느껴진다. 사방에 퍼져 있던 화음의 중진들이 재빠르게 한곳으로 모여들고 있는 게 말이다.
기분 탓인지, 고작 그 움직임만으로도 묘한 활기가 느껴진다. 조금 전까진 한없이 가라앉아 있는 듯 느껴졌던 화음이 말이다.
종리곡의 입술 새로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거기 있느냐?”
“예, 장문인.”
“금룡이와 송백이에게 회의에 참석하라고 전해라. 막는 이가 있다면 내가 들여보내라 했다 하고.”
“예.”
고개를 끄덕인 종리곡이 땅을 박찼다.
‘자, 그럼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일지 어디 한번 들어나 볼까?’
그가 화산을 통해 배운 게 있다면, 문파의 미래는 영광에 취한 이들의 손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 바로 그거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