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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610화


1610화. 눈을 떠도 마찬가지군. (5)

회의가 열리는 전각 앞, 제갈자인이 인상을 찌푸린 채 서 있었다.

종리곡이 순순히 따라나서니 그도 별수 없이 오기는 했지만, 까마득하게 어린놈이 오라 가라 지시해 대는 판에 제갈자인의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건방진⋯⋯.’

하다못해 현종이나 당군악이 대신 부르는 허울이라도 보였다면 제갈자인도 이리 불만을 내보이지는 못했을 터다. 천우맹이라는 곳은 얼마나 체계가 없기에 그 쉬운 일 하나 제대로 못 한다는 말인가?

문을 열고 들어가면 펼쳐질 일이 눈에 훤하다. 하지만 상관없다.

‘아주 혼을 쏙 빼 주지!’

그는 나직이 이를 갈며 불편한 심정을 고스란히 담은 거친 손길로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그런데⋯⋯.

“거, 굼벵이를 삶아 먹었나! 왜 이렇게 늦게 와요!”

문을 열고 들어간 제갈자인의 입이 슬그머니 벌어졌다. 온 얼굴에 심통이 그득한 웬 어린놈이 자신에게 삿대질하는 꼴이 보인 것이다.

‘뭐지?’

너무 당황한 나머지 화를 낼 겨를도 없었다. 심지어는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던가 되돌아보게 될 정도였다.

“내⋯⋯게 한 말인가?”

“여기 늦게 온 사람이 그쪽 말고 또 있어요, 그럼?”

쥐똥만 한 놈이 매섭게 눈을 부라리니 제갈자인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허⋯⋯.”

탄식 같은 헛웃음만 연신 흘리던 제갈자인이 막 한마디를 하려던 찰나였다. 그 어린놈이 또 버럭 소리를 지른다.

“다른 사람들은 뭐 발에 종기라도 돋아서 펄쩍펄쩍 일찍일찍 뛰어다니나? 오라는 소리 들은 지 한참 됐을 텐데 뭐 그렇게 여유가 흘러넘쳐서 이제야 와요! 아, 한 번 늦은 걸로는 부족하셔?”

제갈자인의 이성이 뚜둑 끊겼다.

“이⋯⋯!”

진노한 그가 고함을 치려는 순간, 이번엔 뒤에 있던 종리곡이 어깨를 짚으며 만류하고 슬그머니 앞으로 나섰다.

“미안하군. 다음부터는 조금 더 일찍 오지.”

“예. 그래도 장문인은 말이 좀 통하네요.”

“⋯⋯이쪽도 덴 적이 워낙에 많아서 말일세.”

청명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뭐. 하긴 그럴 만도 하죠.”

“⋯⋯.”

종리곡의 이마에 힘줄이 슬쩍 불거졌다.

이미 예상했으니 참으려고 했지만, 이렇게 별안간에 울컥 솟는 울화까지 어쩔 순 없었다.

어쩌다 저런 게 하필 종남의 옆 산에 기어들어서는!

“크흠.”

종리곡은 언짢은 마음을 털 듯이 헛기침하고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리곤 아직 멀뚱히 선 제갈자인과 모용위경에게 손짓했다.

“앉으시지요.”

“장문인.”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건 사실 아닙니까?”

영 못마땅한 얼굴로 잠시 침묵하던 제갈자인이 결국 착석했다. 모용위경도 눈치를 보며 그런 두 사람의 옆자리에 앉았다.

청명이 그들을 보며 짧게 혀를 차더니 입을 뗐다.

“어쨌든 그럼 다 왔⋯⋯.”

“죄송합니다.”

문이 열리며 종남의 진금룡과 이송백이 안으로 들어왔다. 청명이 눈살을 확 찌푸렸다.

이를 놓치지 않고 포착한 제갈자인이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이놈!’

지금 분명 종남의 어린 제자들이 이곳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 물고 늘어질 셈이겠지! 화산검협이 그리 나온다면 제갈자인도 청명의 나이와 배분을 들어 공격할 수 있을 터.

‘문파의 비호 아래 오만방자한 놈에게 현실을 똑똑히 알려 주마.’

제갈자인은 청명의 말이 떨어지기만을 고대했다. 그리고 마침내⋯⋯!

“자아알한다. 얼마나 빠르신지 아주 눈이 돌아갈 판이네.”

“듣자마자 왔⋯⋯.”

“아이고오! 심지어 장문인께서 먼저 와 계시네. 세상에, 제자 놈이 장문인보다 늦게 미적미적 와서 장문인을 기다리게 한다는 말은 내 살다 살다 처음 들었네. 강호가 거꾸로 돌아가도 유분수지! 나 때는 안 그랬는데!”

으드드득.

진금룡이 이를 갈아붙이며 검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이송백이 진금룡의 손목을 슬며시 잡고 만류했다.

“⋯⋯어차피 말로는 못 이깁니다, 사형. 진짜로 검 뽑으실 게 아니라면 그냥 참으시지요.”

“⋯⋯.”

보다 못한 종리곡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 끌지 말고 앉아라. 중한 분들이 계신 자리다.”

이송백의 만류에도 버티던 진금룡이지만, 종리곡의 말에는 더 고집부리지 못하고 착석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청명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건 잊지 않았다.

이는 큰 충돌을 고대하던 제갈자인의 입장에서는 ‘엥?’ 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화산검협이 가장 먼저 이름을 알렸던 건 종남의 진금룡을 꺾으면서부터였다. 그러니 둘 사이엔 원한이 켜켜이 쌓여 있을 터.

게다가 종남과 화산의 관계까지 고려한다면 절대 이렇게 곱게 넘어갈 리가 없는데?

그런데 청명은 팔짱을 끼고 못마땅한 기색만 보일 뿐, 두 사람을 쫓아낼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뜻대로 굴러가는 구석이 하나도 없자 다급해진 제갈자인은 못 참고 슬며시 입을 열었다.

“⋯⋯종남의 두 사람이 이런 자리에 참여해도 되는가?”

“네?”

“두 사람은 배분이나⋯⋯ 직위로 보아 중진이라고 할 수는 없을 텐데. 이건 중진들의 회의가 아니었던가?”

진금룡과 이송백의 얼굴이 굳어졌다.

제갈자인은 그 얼굴을 애써 모른 척했다. 본의 아니게 종남을 공격한 모양새가 되긴 했지만, 어물쩍 그냥 넘겨 버리기에는 아쉬움이 너무 컸다.

“오해하지 마시게. 참석한 데 불만이 있다는 게 아니라, 그저 자격에 대한⋯⋯.”

“자격?”

청명이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회의실 안의 몇몇이 황급히 청명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자격? 자격이요? 자격?”

“⋯⋯가, 갑자기 왜 그러는가? 내 못 할 말이라도⋯⋯.”

“아니, 신기해서 그러죠.”

청명이 방긋 웃더니 종리곡을 일별했다.

“사패련이랑은 굳이 안 싸워도 될 것 같지 않아요, 장문인?”

“⋯⋯그건 무슨 말인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대왕 대머리 놈 옆에 찰싹 붙어서 우릴 죽어라 욕해 대셨을 분들이 여기 앉아서 자격 운운하는 걸 보니까 어차피 세상이 곧 망할 것 같거든요. 다른 게 망조인가? 이게 망조지. 그런 판에 굳이 고생하며 싸울 필요가 있을까 싶고요?”

제갈자인의 얼굴이 정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가 비명 같은 일갈을 내지르려는데.

“쿡쿡쿡쿡.”

“⋯⋯.”

옆에서 새어 나온 웃음소리가 제갈자인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른 이도 아닌 종리곡이 청명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고 만 것이다.

“자, 장문인!”

“아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종리곡이 헛기침하며 웃음을 갈무리했다. 제갈자인의 시선을 슬쩍 외면하면서 말이다.

청명이 비아냥거리며 툭 쏘았다.

“자격 따질 거면 여기서 제일 자격 없는 건 그쪽에 계신 두 분이죠.”

그는 제갈자인이 반박할 틈 따윈 주지 않았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요? 자격 당연히 있죠. 여기 있는 두 사람은 그 전장의 참상을 누구보다 먼저 본 이들이거든요. ‘누구’보다 말이죠.”

탁자 아래, 제갈자인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청명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수 없기 때문이다.

‘저 개 같은 놈이⋯⋯.’

이가 빠득빠득 갈렸다.

종남과 화산은 견원 관계에 가까우니 이를 이용해 공격해 보려 했건만. 저놈이 대뜸 종남을 비호하고 나선 덕분에 그의 꼴만 우스워지지 않았는가!

하지만 지금 당장은 반박하기도 어렵다. 그럴수록 그의 실수만 모두에게 거듭 상기시키는 꼴이 되어 버릴 테니.

제갈자인이 조용해지자 청명이 노골적으로 혀를 찼다.

“사람이 염치라는 게 있어야지.”

“⋯⋯.”

“뭐 뀐 놈이 성낸다고, 뭐가 그리 잘나서 자꾸 남들한테 화를 내고 지적질인지 모르겠네. 성질 같아서는 진짜 콱 그냥⋯⋯.”

“자, 자. 총사, 일단 진정하게. 이렇게 화를 낼 일이 아니잖은가?”

“화난 거 아닌데요?”

“그래, 그래. 알지. 그러니 이 정도로 하고⋯⋯.”

“아니. 내가 화가 나서 그러는 게 아니라니까요? 그냥 웃기지도 않는 짓을 하길래 말해 준 것뿐이에요. 누가 보면 여기가 하남이고, 저 양반들이 여기 주인인 것 같잖아요? 내가 어이가 없어서, 하 진짜 그냥⋯⋯.”

“그래. 그래. 알았네. 알았어.”

당군악은 진땀을 뻘뻘 흘리며 청명을 어르고 달랬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제갈자인이 저런 태도를 보이는데 청명이 잘도 참고 있다 싶었다. 심지어 현종에게 불손한 태도를 거듭 보였음에도 말이다.

아마 청명은 그걸 마음속에 담아두었다가 지금 후려치려는 게 분명하다. 이래서 뒤끝 있는 놈은 항시 조심해야 하는 것을.

“쯧.”

청명이 크게 혀를 차고는 모두를 쭉 돌아보았다.

“그럼 이제 진짜로 다 온 거죠?”

벌컥!

“죄, 죄송합니다! 전달을 늦게 받아서⋯⋯.”

격하게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백천을 본 청명이 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어휴. 썩을. 내가 그냥 나가 뒈져야지.”

“⋯⋯.”

한편 제갈자인은 심호흡하며 애써 마음을 다스렸다.

사실 그도 알고 있다.

그의 말이 지금껏 먹혔던 이유는 천우맹 측에서 나름대로 그를 배려해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저들이 그 ‘배려’를 내려놓고 그의 실책을 공격해 들어오는 순간 그의 입지는 급격히 줄어들 것이다.

배려가 사라지는 순간 남는 것은 붕괴된 오대세가의 말석, 그리고 패배의 원인이라는 두 가지 평가뿐일 터.

그렇기에 제갈자인은 재빠르게 종남과 모용세가를 규합하려 했다. 명분이 사라지더라도 세력이 있다면 발언권을 잃지 않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저 망할 어린놈은 그런 그의 의도를 알고 있기라도 한 듯 회의 시작도 전에 그에게 면박을 주었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말이다.

그 말에 제대로 반박조차 하지 못했으니 이젠 그의 입지가 거의 박살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대로는 안 끝난다.’

그렇다면 남은 길은 하나. 그는 제갈세가의 가주다. 논리로 무장하는 데는 자신 있으니 저 안하무인으로 날뛰는 놈을 말로써 눌러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리 갑작스레 모두를 모은 건가.”

마침 종리곡이 포문을 열어 주었다.

“회의해야죠.”

“이미 하지 않았는가?”

“그걸 뭐 회의라고 할 수 있어요? 다들 제 할 말만 하다 끝났는데?”

“으음.”

그 말에는 동의한다는 듯 종리곡이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그 회의의 결과로 남은 건 배신자가 있다는 추측 하나뿐이었다. 물론 그 한 가지가 무척 컸지만.

“그렇다는 말은, 자네는 배신자의 정체를 알아냈다 이 말인가?”

청명을 보는 종리곡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모두의 시선이 청명에게로 쏠렸다.

“정파 내에 배신자가 존재하는 이상, 우리가 세울 어떤 대책도 무의미하네. 그렇기에 회의를 더 이어 갈 수 없었던 게지. 간자가 있다면 전략이 노출될 것이고, 배신자가 있다면 동료라 믿었던 이에게 등을 공격당할 수도 있으니 말일세. 그럼에도 이리 다급하게 모두를 불러 모은 걸 보니 자네는 배신자의 정체를 알아냈을 걸세. 그렇지 않은가?”

중인들의 시선에 여러 감정이 어렸다.

호기심, 노기, 우려, 그리고 묘한 불안.

그 모든 시선 속에 청명은⋯⋯ 귀를 후비적거렸다. 아주 심드렁하게.

“뭐래.”

“응?”

“뭔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어요. 배신자가 있는 거랑 그게 뭔 상관이라고.”

“⋯⋯응?”

종리곡은 당황한 기색을 숨길 생각도 못 했다.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인가? 배신자의 정체를 안단 말인가, 모른단 말인가?”

“아니,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고요. 내가 도사라고 진짜 점이라도 치는 줄 아시나!”

청명이 와락 짜증을 냈다.

“내가 그런 재주가 있으면 뭐 하러 힘들게 칼 들고 설쳐요! 어디 가서 깃발 하나만 꽂으면 떼돈을 벌 건데!”

의외의 대답에 종리곡은 체면이고 뭐고 입을 멍하니 벌리고 말았다.

“모른다고?”

“네. 모르죠.”

“그럼⋯⋯ 이 늦은 시각에 갑자기 왜 사람들을 모은 건가?”

“이러니 개판이 나는 거지.”

“⋯⋯.”

청명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중요한 건 배신자가 있느냐가 아니에요. 진짜 중요한 건⋯⋯.”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가! 배신자의 존재가 중요하지 않다니!”

그 순간, 제갈자인이 청명의 말허리를 자르며 벌떡 일어섰다.

“허이고?”

“그 말에 자네가 책임질 수 있는가!”

소리치는 제갈자인의 눈에는 핏발까지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청명의 한쪽 입꼬리가 이내 씨익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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