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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612화


1612화. 그러니 허물 수밖에요. (2)

“총사…….”

당군악이 황망한 얼굴로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청명이 한 손을 슬쩍 들며 잠시 막았다.

“그 전에 확인부터 해 보죠.”

청명의 시선이 제갈자인에게로 향했다.

“왜 졌죠?”

제갈자인의 얼굴이 순간 불쾌감으로 물들었다. 뻔한 걸 왜 굳이 또 묻는다는 말인가?

“거듭 말하지 않았는가? 정체불명의 적이 우리의 앞을…….”

“아뇨. 제가 묻는 건, 설사 그런 일이 벌어졌다 해도 구파의 전력이 정말 그렇게 참패를 당할 정도였냐는 거예요.”

“…….”

“예상하셨어요? 조금 늦은 것만으로 이리되리라는 걸?”

제갈자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전장에 도달하여 본 광경이 너무도 참담해서 헤아려 따질 겨를이 부족했지만, 이건 확실히 그도 생각했던 부분이다.

“병법적으로만 논하자면…….”

답을 망설이던 제갈자인이 결국 고개를 내저었다.

개인적인 감정이 좋지 않다고는 하나 제갈 성을 쓰는 자로서 병법을 두고 논함에 거짓이 있을 순 없다.

“그렇지 않네. 확실히.”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도 같아요. 사패련 놈들이 아무리 대단한 술수를 썼다고 해도, 가진 힘이 비약적으로 세지거나 하는 건 아니에요. 소림과 팽가, 그리고 공동이라면 그렇게까지 박살 날 전력은 절대 아니었어요. 설령 소림의 힘이 완전하지 않았다고 해도.”

몇몇 이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청명은 다시 날카롭게 제갈자인을 보며 물었다.

“그럼, 왜 그렇게 된 거죠?”

제갈자인은 바짝 마른 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저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왜냐고?

아직도 그 참혹했던 광경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병법을 공부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그저 참상으로만 보일 장면이었다.

하지만 제갈자인은 그 속에서도 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끝장나 버린 전장의 모습과 얼마 되지 않는 생존자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그 이유는 너무도 명확해진다.

“지휘의 붕괴……와 독단적 행동.”

답을 뱉은 제갈자인이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네……. 아니, 총사의 말이 맞네. 분명 그리 몰살당할 전력이 아니었지. 그리된 이유는 그들이 처음 약조했던 대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네.”

“그들이라 함은?”

“팽가와 공동이겠지. 원래 그들은 소림의 주공(主攻)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맡았네. 그들이 제 역할에 충실했다면 시신이 그리 난장판으로 곳곳에 널부러……. 아니, 곳곳에서 죽어 있지는 않았겠지.”

잠시 말실수를 했다고 여긴 제갈자인이 눈치를 살폈지만, 청명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회의를 이어 갔다.

“그럼 그들이 약속된 전술을 따르지 않은 이유는 뭐죠?”

“그건…….”

이건 굳이 병법까지 들먹일 것도 아니다. 제갈자인이 대답하지 않아도 이곳에 있는 이들이라면 모두 그 이유를 알고 있을 것이다.

“……공명심 때문이겠지요. 패군의 목을 취해 문파의 명성을 드높이고 싶다는 욕심.”

제갈자인은 또 한 번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어찌 그러셨소.’

생각할수록 안타깝기 그지없다.

승리만 했다면, 이길 수만 있었다면 그 영광은 모두가 나누었을 터. 소림이 가장 큰 영광을 가져가고 남은 영광만으로도 한 문파를 빛내기에 부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 시점에 그리 말도 안 되는 짓을 했는가. 어쩌자고?

결국은 때에 걸맞지 않게 타오른 욕심이 이토록 끔찍한 결과를 빚고 만 것이다.

하지만 제갈자인은 안타까워할지언정 비난하지는 못했다. 그들이 어떤 마음이었을지, 어떤 심정이었을지 그가 가장 잘 아니까.

문파의 이름을 빛내고 싶은 마음이야 모든 수장들의 공통된 마음 아니던가? 만일 제갈자인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리 행동하지 않았을 거란 확신은 가질 수 없었다.

“애초에 이 전쟁은 방장이 잘못 시작한 거예요. 그리고 그 잘못 시작한 전쟁에 예상 못 한 변수까지 끼어들었죠.”

청명의 눈이 제갈자인을 떠나 다른 이들을 훑었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에서 언제든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에요. 그럼…… 전쟁에 응할 시기를 제대로 잡고 변수가 없었다면 이길 수 있었을까요?”

제갈자인이 입술을 깨물며 고민하다 답했다.

“……쉽지 않았을 것 같소.”

“가주님?”

의외의 답이라 여긴 모용위경이 당황한 얼굴로 제갈자인을 보았다. 그러나 제갈자인은 답을 알기에 솔직히 말할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여럿인 군대가 승리했다는 말은 들어 본 적 없으니까.”

이건 그의 문제가 아니라 가문의 문제다. 그는 어쨌든 병법에 능통한 제갈가의 사람 아닌가. 대립하고 이익을 위해 물어뜯을 수는 있다 해도 가문의 정체성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제갈자인은 그런 사람이었다.

“제 말이 그거예요.”

청명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배신자의 존재? 물론 중요하죠. 하지만 거기에 시선을 빼앗겨 진짜 고쳐야 할 걸 못 고치면 다음에도 결과는 뻔해요.”

당군악이 무겁게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하지만, 총사. 천우맹은 구파와는 다르지 않은가?”

“어떻게 다르죠?”

“그래도 우리는…….”

당군악은 무어라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입에 올리기엔 조금 낯간지럽다는 듯이. 청명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마 저들도 그리 믿었을 거예요. 그들의 연합은 흔들리지 않는다고.”

“…….”

“우리에게 신뢰가 있다면 저들에게는 역사가 있죠. 우리는 미래로 나아가는 길을 보았다고 여겼고, 저들에겐 곤란한 형편에도 서로 의지하며 돕던 의리가 있었어요.”

모용위경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리 생각했다. 아무리 천우맹이 무섭게 기세를 불린다 해도 수백 년간 연합해 온 구파와 오대세가의 유대를 넘어설 수는 없으리라고. 이런 지경이 되어서도 함께 싸우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동지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여지없이 깨졌어요. 배신 때문도, 갈등 때문도 아니에요. 오히려 서로에 대한 믿음은 굳건했겠죠. 그런데도 끝내는 오합지졸이 되었어요. 왜?”

청명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떨어졌다.

“제 문파를 더 빛내고 싶다는 공명심을, 제 이름을 천하에 떨치고 싶다는 명예욕을 버릴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장일소는 그 욕망을 누구보다 잘 이용할 줄 아는 놈이니까.”

제갈자인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와 화산검협은 같은 걸 보았다. 비슷하게 도착했고, 같은 광경을 보았으며, 같은 곳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가 내놓은 답과 저자가 내놓은 답은 완전히 다르다.

무엇이 옳고 그르다를 논할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건, 청명이 그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을 이미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이 같은 건 문제가 아니로구나.’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왜 저 사람이 총사의 자리에 앉아 있는지. 어떻게 이 쟁쟁한 이들이 모인 곳의 회의를 주도하고 있는지.

세상을 저렇게 볼 눈을 가졌으며, 저런 말을 과감하게 할 줄 아는 이이기에 천우맹의 맹주와 부맹주가 그의 말 한마디에 부리나케 달려오는 것이다.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대처할 수 있다. 역사 속 숱한 패배 뒤에는 반드시 그런 마음이 존재하죠.”

당군악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다르다는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소리다.

이는 당연히 인정해야 할 옳은 의견이었다.

회의실에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때 제갈자인이 입을 뗐다.

“하나 물어도 되겠는가?”

“네.”

“총사의 말은……. 아니, 총사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상황에 대한 진단이 가능하다고 해도 해결책이 없다면 무의미할 터.”

지금까지와는 달리 어투에 예의가 실렸다. 모두의 놀란 시선 속에 제갈자인은 잠시 숨을 골랐다.

“하지만 무인과 공명심은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총사께서는 도문에 적(籍)을 두고 있어 모르실 수 있지만, 평범한 무인들에게 공명심을 내려놓고 그저 싸우기만 하라는 건 사람에게 숨을 쉬지 말라는 것과 그리 다를 바 없는 이야기지요.”

청명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죠.”

“그럼 결국 무의미한 논의가 되지 않겠습니까? 마음가짐에서 벌어지는 일의 대책이 마음가짐을 달리 먹는 것이라면…… 결국은 뻔한 소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번엔 청명이 고개를 저었다.

“말씀하신 대로 사람의 마음을 말 몇 마디로 돌리는 건 불가능하죠. 분명 방장도 이번 전투에 앞서 거듭 신신당부했을 거예요. 미리 약속한 대로 움직여야 한다고.”

제갈자인은 다소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적으로 법정을 거의 대면하지 않은 그조차 넌덜머리가 날 정도였으니, 곁에 있었던 공동 장문인이나 팽 가주는 거의 귀에 못이 박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욕망을 이겨 내지 못했다.

“아무리 강하게 마음먹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예요. 장일소는 그 굳은 결심의 틈을 찾아내는 인간이니까.”

생존자들의 말처럼, 장일소가 스스로 제 목을 내밀며 베어 가라고 외치지 않았다면 공동과 팽가도 그 지경으로 뒤흔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완벽한 군율을 갖춘 군대조차도 승리의 순간에는 포진이 흐트러지는 법. 사람이 하는 일에 완벽이란 있을 수 없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청명이 단호하게 말했다.

“사람은 어찌할 수 없죠. 그저 믿는 수밖에. 여기에 앉아 있는 이들이, 그리고 지금껏 우리가 함께 등을 맡겨 온 이들이 제 명성과 욕심보다는 곁에 있는 동료를 우선시할 거라고 믿고 싸우는 수밖에.”

그의 눈빛이 모두에게 하나하나 가 닿았다. 이 자리에 앉은 이들은 그 눈빛에 담긴 무게를 안다. 고개를 무겁게 끄덕일 수밖에 없다.

그때, 청명이 본론을 꺼내었다.

“하지만 바꿀 수 있는 것도 있죠.”

“그게 무엇입니까?”

“문파.”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사실 대수롭지 않게 여길 만한 말은 아니었다. 의문 어린 시선을 짧게 주고받은 각 문의 수장들이 얼떨떨한 얼굴로 되물었다.

“……문파라면?”

청명이 깊게 심호흡을 했다.

“말 그대로예요. 화산이란 이름, 당가라는 이름, 제갈이라는 이름, 종남이라는 이름, 정파와 사파, 그리고 새외. 대문파와 중소문파라는 구분도. 그 모든 이름과 모든 벽, 서로를 다르게 만드는 경계들.”

청명의 말이 이어질수록 수장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청명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를 눈치챈 것이다.

“사람은 바꿀 수 없지만 문파의 경계는 허물 수 있어요. 서로 다른 이들이 함께하며 도달할 곳이 결국 그 ‘다름’의 직면이라면 방법은 하나밖에 안 남죠.”

청명의 말이 천근의 무게를 싣고 떨어졌다.

“진정으로 같아지는 것.”

누군가가 황급히 입을 떼려 했지만, 청명은 틈을 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현종에게 똑바로 향해 있었다.

“천우맹에 소속된 각 문파의 지휘권을 모두 회수하고, 소속된 모든 맹도들을 맹의 이름으로 묶어 문파의 경계를 없애야 한다고 봅니다.”

“…….”

“그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쥐 죽은 듯한 침묵이 회의실 안에 고였다.

누구도 말을 꺼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조금 전에 들은 것이 너무 어처구니없었기 때문이다.

“쿡……쿡쿡.”

사람을 집어삼키고도 남을 법한 침묵 속에서 누군가가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작은 소리였지만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쏟아졌다.

“장문대리?”

“아……. 죄송합니다.”

백천은 아직 웃음이 걸린 입을 손으로 살짝 막았다.

뭐가 걸었던 길인가? 뭐가 받았던 시선인가?

‘하여튼 못 당한다니까.’

백천은 그리 느꼈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 이 모든 게 너무도 청명다운 해결책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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