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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6화. 끊을 각오는 있어. (1)

종리곡은 말없이 청명을 응시했다. 청명 역시 피하는 일 없이 그 시선을 받아들였다. 종리곡이 말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군.”

청명은 그 말을 예상했다는 듯 의자에 등을 기댔다.

“말 그대로예요. 당신은 인정도, 반성도 할 수도 없죠. 그럴 수 없었겠죠.”

종리곡이 눈살을 찌푸리며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청명이 빨랐다.

“애초에 그 모든 건 당신이 선택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때 당신은 존재하지도 않았으니까. 아닌가요?”

종리곡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는다. 동요는 없었다. 그저 침묵만이 자리할 뿐.

짧지 않은 그 침묵의 의미를 청명이 굳이 해석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지 않은가요?”

종리곡은 천장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속죄 역시 그의 것이 아니다.

종리곡이 아닌 다른 이가 보기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생각만큼 단순하고 쉽지 않다. 백 년에 이르는 역사를 모조리 부정하고, 그 역사 속 모든 이들에게 침을 뱉고, 문파의 근간을 뒤흔들고, 모든 오욕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바로 종리곡에게 돌아올 것이다. 그가 지키려 했던 것들이 오히려 그에게 비난을 쏟아부을 것이다.

과연 종리곡이 그 길을 갈 수 있을까?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종리곡은 청명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청명이 실소하듯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은 이미 다 했어요. 이건 그냥 내 한풀이죠.”

“한풀이?”

“네.”

잠깐 침묵하던 청명이 눈을 내리깔며 쓰게 말했다.

“이해해 보려고 했어요. 하지만 결국 안 됐죠. 아무리 이유를 가져다 붙여 봐도, 댁들이 반성할 용기조차 없는 겁쟁이들일 뿐이라는 건 달라지지 않으니까.”

“…….”

“그래서 무시했어요.”

청명은 저도 모르게 씁쓸하게 웃었다.

“생각하지 않으면 되니까. 그냥 묻어 두면 되니까. 그러면 굳이 이 일에 대해 논하며 적의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알게 되었죠.”

“무엇을?”

“그게 회피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종리곡의 눈가가 찰나간 희미하게 떨렸다.

“풀 수 없는 매듭이니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언젠가는 그 매듭이 피가 안 통하게 막고 결국 더 큰 상처를 만든다고 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 동안은 괜찮을 테니까.”

청명은 나직이 웃었는데, 종리곡은 그 소리가 어쩐지 견딜 수 없도록 무겁게만 느껴졌다. 연유는 알 수 없지만, 손끝이 저릴 정도다. 그는 어쩌면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일지도 모른다.

종리곡은 동요한 기색을 감추며 차갑게 청명을 쏘아보았다. 이제 와 기세에서 밀릴 순 없지 않은가.

“이는 결국 너 역시 겁쟁이라는 의미 아닌가?”

대놓고 날이 선 말이었지만 의외로 청명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종리곡의 말을 인정했다.

“네. 나도 겁쟁이죠, 당신 말대로. 단죄할 각오도 없고, 그렇다고 용서할 용기도 없으니까. 아마 나는…… 나는 평생 종남이라는 두 글자를 받아들이지 못하겠죠.”

잠시 말을 멈춘 청명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종리곡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적어도 당신만큼 겁쟁이는 아니겠지.”

“화산검…….”

“잘못되었음을 알아도 고개만 돌려 버리는, 직시할 용기가 없어 자신이 떠맡았던 짐을 후대로 고스란히 미뤄 버리는 그런 비열한 인간은 아니란 소리야.”

종리곡의 얼굴이 차게 굳어졌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냉정하지 못했다. 그 눈 안에는 어느새 노기와 분노, 억울함 등 수많은 것이 들끓고 있었다.

“내가 비겁하다고 했나?”

“아닌가?”

“잘도 지껄이는군. 그러는 너 역시 그저 종남의 힘이 필요한 것뿐 아닌가?”

다소 감정이 앞서자 종리곡의 눈빛뿐 아니라 말에도 시퍼렇게 날이 섰다.

“네게 조금이라도 진정성이 있다면 적어도 지금 같은 상황에 이런 말을 꺼내 들지는 않겠지. 이 일을 굳이 지금 꺼내는 게 그저 네놈이 종남의 전력을 끌어 쓰고 이용하기 위한 게 아니라는, 적당히 던지는 도발이 아니라는 보장이 있나?”

평소라면 청명은 이 말에 살기를 보이고도 남았을 것이다. 본인의 선택이 아니었다 해도 잘못을 저지른 쪽에서 이리 나오니 그럴 만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안휘로 갔었다.”

청명의 담담한 목소리가 울렸다.

“종남 문도들을 데리고.”

의외의 말에 종리곡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진금룡과 이송백을 위시한 종남의 제자들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게 무어가 어쨌단 말인가.”

“함께 싸우더군. 그 종남 놈들과 화산 놈들이 말이야.”

종리곡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청명은 찻잔을 살짝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알고 있나?”

“……글쎄.”

“거기에 내가 없었으니까.”

청명의 말은 실로 무거웠고, 또 더없이 씁쓸했다.

“그리고 거기에 당신이 없었으니까.”

이에 모자라지 않는 씁쓸함이 종리곡의 눈빛에도 스몄다. 청명의 말뜻을 그도 이해한 것이다.

“같이 검을 휘두르고, 서로를 살리겠다고 몸을 던지더군.”

“…….”

“꼭 끼어들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던 건 아니야. 일단 지켜보다 정말로 위험해지면 그땐 나서려 했지. 그런데…… 나설 수가 없더군.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어. 왜인지 알아?”

알 것 같다. 갈 수 없었겠지. 그곳에 끼어드는 자신이 불순물같이 느껴져서. 자신이 끼어드는 순간 모든 것이 혼탁하게 흐려질까 봐.

청명이 씁쓸하게 물었다.

“거기에 나와 당신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질문만 있을 뿐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둘 다 알았다.

다시 나뉘었을 것이다, 종남과 화산이라는 이름으로. 결코 나란히 설 수는 없었을 것이다. 넘을 수 없는 경계에 갇혀서 말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당신 그리고 나. 우리 같은 것들이 막아서고 있는 거야. 매듭이 저들의 목까지 점점 조여 갈 것을 알면서도.”

종리곡은 그저 무표정하게 청명을 마주 보았다. 그러나 굳게 닫힌 입술 안쪽으로는 입 안 살을 초조하게 짓씹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애써 떼었다.

“네 말 대로라면, 내버려 두면 될 일 아닌가? 네 말대로 과거에 사로잡힌 이들이 죽고 없어지면 결국 다시 흘러갈 게 아닌가. 결과만 좋다면야 지금 우리가 잠시 회피하는 게 뭐가 나쁘다는…….”

“그렇게 넘길 건가?”

“……무슨 말이냐?”

“당신이 스스로 저지르지 않았던 죄를 떠맡았던 것처럼, 저들에게 또 그 짐을 넘길 셈인가? 당신이 만든 짐까지 더해서?”

종리곡의 눈이 희미하게 떨렸다.

“지금 당신이 느끼는 감정과 그 모든 것을 제자에게, 그리고 또 그다음 대의 제자에게까지 그저 떠넘기겠다고? 다시 강요하겠다고?”

“…….”

“그게 종남의 가르침인가?”

종리곡은 생각에 잠겼다. 물론 청명의 말을 받아들인 것도, 그 도발에 넘어간 것도 아니다. 다만 한 가지 생각이 들기는 하였다.

‘나는 언제부터 화산을 증오했지?’

척박한 산에 박혀 지내는 몰락한 문파를 왜 그리도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던가? 화산검협이 등장하기 이전엔 화산은 그에게 단 한 번의 반항조차 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그 증오는…… 정말 종리곡의 것이었나?

그때, 청명이 피식 웃었다.

“웃기는 일이야. 문도들에게 옳은 길을 가르쳐야 할 문파가…… 서로 증오하라 강요하고 있지. 본디 서로 원한이 없어야 할 이들끼리 증오하게 만들고 그게 옳다고 가르치는 거야. 더러운 짓거리지?”

종리곡이 눈을 감았다. 청명이 입가를 비틀었다.

“그런데…… 나도 크게 다르진 않더라고.”

물론 청명의 증오는 죽는 순간까지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걸 굳이 저들에게까지 고스란히 물려줄 필요는 없다.

“난 그저 깨달았을 뿐이야. 내가 끊어 내지 못한다면 다음에는 내가 아닌 누군가가 같은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는 걸. 화산과 종남이라는 껍데기를 걷은 채로 보니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나는 이제 그 허울을 걷으려는 거고.”

입을 굳게 다문 채 듣던 종리곡이 말했다.

“말하지 않았던가. 사람의 본성이란 게, 결국 나와 타인을 나누고 증오하게 되어 있다고. 그런 짓을 해 봐야 언젠가는 다시 서로 화산과 종남이라는 이름을 걸고 칼을 겨누게 되겠지. 너 역시 잘 알고 있을 텐데?”

“그건 적어도 그들의 증오야.”

“…….”

“스스로 쌓은 증오고, 스스로 내린 결론이겠지. 어차피 증오하게 될 테니 이런 위기 앞에서도 계속 증오를 유지하자는 개소리를 지껄일 이유는 못 돼.”

청명의 얼굴은 다소 복잡해 보였다. 그러나 이미 마음을 굳히고 이곳에 온 이상 목소리만큼은 담담했다.

“나 역시 몰라. 저들이 무엇을 만들지. 무엇을 쌓아 갈지. 어쩌면 그 결과가 지금보다 더 끔찍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적어도…… 그 결과를 저들 스스로 선택할 수는 있다. 죽어 나자빠진 것들이 용기가 없어 풀지 못하고 다음 세대로 미루기만 했던 문드러진 관계를 넘어서, 우린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청명이 몸을 돌렸다.

“할 말은 다 했어.”

“……화산검협.”

“이제 선택은 당신이 하면 돼. 종남이 아닌 당신이. 나는 내밀었으니까, 이젠 당신 차례야.”

종리곡은 다소 화가 난 얼굴로 다탁을 내리쳤다. 거친 목소리가 쏟아졌다.

“무엇을! 무엇을 선택하라는 건가? 나더러 뭘 하라는 건가?”

“…….”

“우리가 잘못했었다고 화산에 머리라도 조아리라는 건가? 온 천하에 우리가 얼마나 금수만도 못했는지 외치기라도 하라는 건가?”

종리곡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대체 나더러 무엇을 하라는 거냐!”

“그건 당신이 생각해.”

청명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종리곡의 울분에 찬 목소리와 대비되는 서늘함이 깔려 있었다.

“나는 이미 내 뜻을 다 전했다. 남은 건 당신의 몫이지. 이 이상은 내 것이 아냐. 당신에게 이렇게 기회를 주는 것만으로도 내겐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그는 미련 없이 걸어가 문고리를 잡았다. 그때, 종리곡의 질문이 발목을 잡았다.

“왜 나인가?”

청명은 뒤를 돌아보았다. 종리곡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조금 전까지 거칠게 외쳤던 것들이 모두 거짓말인 것처럼 어떠한 동요도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내가 그런 말에 가책을 느껴 넘어갈 인간으로 보였나? 그리 쉽게 휘두를 수 있는 인간으로 보이나?”

“…….”

“그 모든 것을 택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외려 나 자신을 구렁텅이에 몰아넣는 꼴이 되고 말 텐데. 내가 이 정도 계산도 못 할 것 같았는가?”

청명은 이렇다 할 표정 없이 짧게 말했다.

“설마.”

“……그럼 왜 나인가?”

그의 선대 중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저 이 시대에 태어나 종남의 장문인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종리곡이 그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가? 고작 그런 이유로?

대답을 바란 건 아니다. 그저 한탄에 가까운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청명은 그 한탄에 답해 주었다.

“당신이 설령 사파에도 비견 못 할 구제 불능 악당이라고 해도, 당신은 종남의 장문인이니까.”

그가 말해 놓고도 자신이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어른이잖아?”

“…….”

“그게 전부야.”

탁.

청명이 떠나고 문이 닫혔다.

종리곡만이 남겨진 방 안, 적막이 내려앉았다. 닫힌 문을 하염없이 보던 시선이 천천히 다탁으로 향했다.

하나의 다탁. 그 위에 놓인 두 개의 찻잔.

청명 쪽에 놓인 찻잔은 가득 차 있었지만, 종리곡의 찻잔은 말라비틀어진 논처럼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어른이라…….’

애송이 놈이.

종리곡은 그 다탁을 차마 더 바라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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