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621화
1621화. 우리의 피와 목숨으로! (1)
모용위경은 망연히 모두를 보기만 했다.
‘이런…….’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와 버렸단 말인가? 시작할 때는 분위기가 이렇지 않았다. 청명의 무리한 제안에 대해 성토하고 각자의 지분을 적당히 챙겨 가는 걸로 끝날 분위기였다.
그런데 종리곡 한 사람 때문에 완전히 상황이 바뀌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입장이 가장 곤란해진 건 모용위경이었다.
하다못해 제갈세가만이라도 그와 뜻을 함께해 주었다면 이리 돌출되지는 않았을 텐데, 제갈세가마저 화산의 편에 서면서 어처구니없이 그가 반화산의 선봉에 선 꼴이 되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등골이 서늘해지며 식은땀이 흘렀다. 모용세가가 저 화산의 대척점에 선다고?
‘아니.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모용위경은 티 나지 않게 새외의 문파들을 힐끗 바라보았다. 따지고 보면 청명의 제안에 가장 먼저 거부의 뜻을 밝힌 건 남만야수궁과 북해빙궁이었다. 저들이 목소리를 좀 더 높일 수 있게 하면…….
모용위경은 특히 설소백을 유의 깊게 보았다. 아무래도 맹소는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아직은 어려 머리와 생각이 굳지 않았을 설소백과 연대하는 게 나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그의 간절한 시선을 모르는 건지, 설소백은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큰 관심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참을 그리 고개 숙이고 있던 설소백이 이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맑은 눈망울에 망설임을 품은 채로 곁에 앉은 한이명을 보았다.
“저…….”
“뜻대로 하십시오, 궁주님.”
“……예?”
설소백이 말을 채 다 꺼내기도 전에 한이명이 답했다. 당황한 설소백이 눈을 휘둥그레 뜨자, 한이명은 빙그레 웃었다.
“궁주는 모든 궁도의 생사를 결정하는 위치고, 북해빙궁의 궁주는 다름 아닌 당신이십니다.”
“…….”
“알고 있습니다. 궁주님께서 청명 도장의 제안을 거부했던 건 제 체면을 봐주기 위해서였음을.”
“총관님…….”
한이명이 다시 한번 빙그레 웃었다.
사실 설소백으로서는 청명의 제안을 거부할 이유가 딱히 없었다. 그는 내어놓을 게 없으니까.
표면적으로는 설소백이 궁주지만, 빙궁의 궁도들을 실질적으로 지휘하고 다스리는 이는 다름 아닌 한이명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설소백이 한이명이 가진 지휘권을 빼앗아 화산에 넘기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테다.
“궁주님께서는 참 다정하신 분입니다. 다만…… 때로는 그 다정함이 지나쳐 굳이 묻기도 전에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게 문제이지요. 만일 궁주님이 제게 지나가는 말로라도 상의하셨다면, 저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궁주님의 뜻을 지지했을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든.”
설소백의 얼굴에 여러 감정이 떠올랐다.
“마음이 복잡하십니까?”
“……조금은요.”
“그럼 구태여 이유를 찾지 마시고 마음에 물어보십시오. 때로는 그게 옳은 방향이 됩니다.”
설소백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보며 한이명은 몰래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따지고 보면 설소백은 빙궁에 빚진 것이 없다. 오히려 북해인들은 전대 궁주의 명으로 그를 추격하고 제거하려 했지, 그에게 무언가를 내어준 적은 없으니까.
우습게도 그런 설소백을 도와주고 이끌어 준 건 화산의 다섯 검수다. 아마 설소백은 북해인들보다 그 다섯에게 더욱 친밀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설소백은 늘 이들과 쌓은 친분 때문에 고민했다. 제 사적인 감정으로 인해 궁주라는 입장에 어울리지 않는, 북해인들의 고통을 초래하는 선택을 내리게 되진 않을까 하고.
곁에서 지켜보면서도 한이명은 섣불리 조언할 수 없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궁주를 보필하는 존재. 결국 가장 결정적인, 최후의 선택은 오직 설소백 스스로 해야 한다.
나이가 어리더라도, 경험이 부족하다 해도 마찬가지다. 그게 궁주라는 자리에 오른 이의 숙명이다.
아무런 재촉도 없는 가운데 고민을 마친 설소백이 눈을 떴다. 그리고 현종과 청명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말씀하시지요, 궁주.”
“천우맹은……. 아니, 화산은 연맹에 참여할 새외인들이 차별받지 않을 거라고 보장할 수 있습니까?”
“궁주. 그건 당연한…….”
“아니. 못 해요.”
긍정하는 현종의 대답과 부정하는 청명의 대답이 동시에 나왔다. 당연히 시선은 청명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못 한다고요?”
“예.”
청명이 설소백을 똑바로 보았다.
지금의 설소백은 청명이 아는 북해의 꼬맹이가 아니다. 이젠 어엿한 청년이자 북해빙궁의 궁주로서 이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이에 걸맞은, 온당한 대접을 해야 한다.
“노력은 할 겁니다.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하겠죠. 하지만 사람들의 오랜 인식을 뿌리부터 대번에 바꿀 방법은 없습니다.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 윽박지르는 말 한마디로 바뀔 인식이면 이리 고생할 이유도 없죠.”
설소백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다만, 그럼에도 노력할 겁니다. 이어져 오던 멍청한 짓들이 반복되지 않도록. 언젠가는 그따위 편견 없이 서로를 바라볼 수 있게. 그리고 이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건 분명 우리만은 아닐 겁니다.”
북해 역시 한 발짝 나서야 한다는 뜻이다. 차갑고 고립된 북해 땅에 내내 웅크리고 있기만 한다면 영원히 그들에 대한 인식은 바뀌지 않을 테니까.
설소백 역시 청명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말씀하신 것처럼 벽을 허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청명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보다는 나은 관계로 갈 거야.”
“…….”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테니까.”
설소백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오래도록 청명을 빤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입이 열렸다.
“저희 북해빙궁은 기존의 입장을 내려놓고, 화산과 함께하겠습니다.”
한이명의 입가에 남몰래 작은 미소가 어렸다.
“저는 북해빙궁의 궁주로서,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빙궁주가 가진 모든 권한을 연맹에 양여합니다. 이 사실은 모든 빙궁도들에게 전해질 것이며, 어떤 권위로도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청명이 고개를 느리게 끄덕이려는 찰나, 설소백이 말을 덧붙였다.
“다만, 도장. 하나는 약속해 주십시오. 도장의 그 말이 그저 중원인들을 위한 감언이설이 아니었음을, 이 모든 건 희생을 줄이기 위한 일이었음을 반드시 증명해 주십시오.”
설소백의 두 눈은 이제 흔들림 없었다. 청명이 나직이,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게 답했다.
“반드시.”
설소백의 고개도 그제야 끄덕여진다.
‘훌륭하셨습니다, 궁주님.’
한이명은 속으로만 칭찬을 전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긴 시간을 지나, 비로소 설소백이 북해빙궁의 진정한 궁주가 된 기분이었다.
내려놓는다는 건 가진 이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이제야 그가 미숙하다는 핑계를 벗어던지고, 스스로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짊어질 각오를 한 것이다.
“그럼, 야수궁주님.”
“…….”
“대답이 달라져야 할 것 같은데요?”
설소백의 그 당돌한 말에 맹소가 난감한 기색을 보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화산도 그렇고……. 어째 요즘 젊은이들은 영 예전 같질 않군.”
“……그 말은 동감입니다.”
“마찬가지로.”
현종과 당군악은 물론이고, 다른 문주들 역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옳고 그름을 논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백천이 던졌던 폭탄을 청명이 급류로 바꾸어 모든 걸 쓸어 버리고 있는 광경이다. 그리고 설소백이 이에 부채질하고 있다. 과거에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맹소의 푸념과 실소에 경직되어 있던 내부 분위기가 조금 풀어졌다. 잠시 후 그는 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의 음성엔 모두를 집중시키는 힘이 있었다.
“과거 마교와 전쟁하던 때, 화산의 검존과 당가의 암존께서 운남으로 향하는 마교의 군세를 막아서셨습니다.”
몇몇 이들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는 천우맹 내에서야 당연하게 알려진 사실이나, 천우맹만 벗어나면 모르는 이들이 더 많을 만큼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비화였다.
“당시 중원과 새외의 관계는 지금보다 더욱 안 좋았지요. 서로를 적으로 여겼고, 오히려 상대의 몰락에 기뻐하던 관계였습니다.”
야수와도 같은 맹소의 얼굴에 웃음기라고는 없었다.
“그런 상황에 마교가 야수궁을 노린다는 건, 어쩌면 중원인에게 나쁠 게 없는 소식이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검존과 암존께서는 목숨을 걸고 그들을 막아섰습니다. 아마 그분들이 없었다면 저는, 나아가 남만야수궁은 지금 이 자리에 없겠지요.”
모두의 얼굴에 여러 가지 감정이, 감회가 스쳤다.
“은혜를 입은 그 역사로 인해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다. 적대적이던 관계를 풀게끔 한 건 구구절절한 말이 아니라, 목숨을 건 그 두 분의 행동이었다는 뜻이지요. 딱 한 번이었던 그 검존과 암존의 움직임이 백 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세상을 바꿔 놓았습니다.”
말하던 맹소가 작게 웃었다.
“물론 저는 검존이 아닙니다. 그런 위대한 일을 할 수도 없고, 할 능력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의 시선이 청명에게로 가서 멎는다.
“하나 지금 같은 세상에도 경계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중요한 건 사람이라는 둥의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짐작해 보건대, 아마 과거의 검존께서도 같은 생각으로 마교의 앞에 서셨던 것이겠지요.”
청명은 저도 모르게 탁자 아래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맹소가 말을 이었다.
“저는 역시 맹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저는 아직 세상이 그렇게 바뀌지는 않았다고 여깁니다. 다만…….”
이번엔 맹소의 시선이 청명에게서 떠나 현종, 그리고 당군악에게로 향했다.
“남만야수궁이 화산과 사천당가에 진 빚을 갚아야 할 때가 지금이라면, 지금의 화산과 당가가 그때의 검존과 암존과 같은 마음이라면, 야수궁은 두 문파와 함께할 것입니다. 벽을 허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번에는 우리가 스스로 희생할 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맹소의 담담하고도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회의실 안에 울려 퍼졌다.
“어떠십니까?”
맹소의 물음이 거꾸로 돌아오니 당군악이 작게 헛기침했다.
“사실…… 선조께서 어떤 생각으로 그때 마교를 막아서셨는지 지금의 우리는 알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당군악이 품에서 열한 개의 비도를 꺼내어 내려놓았다.
“그분이 어떤 마음으로 싸웠는지는 지금의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지켜야 한다는 것. 단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서 목숨을 걸 줄 알아야 한다는 것.”
손끝으로 반질반질해진 비도의 손잡이를 가볍게 쓸어내린 당군악이 고개를 들었다.
“그 마음이 여전히 당가에 있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이젠 현종의 대답만이 남았다. 맹소와 당군악이 동시에 바라보니 현종이 희미한 침음을 흘리다 입을 뗐다.
“선조의 높은 의기를 지금의 저희가 감히 흉내라도 낼 수 있겠습니까. 그저…… 그분들이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려 할 뿐입니다. 그 의기는 여전히 화산에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고 화산에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현종다운 대답이었다. 맹소는 청명을 보며 넌지시 물었다. 사실 이 질문을 가장 던져 보고 싶던 인물이기도 했다.
“자네는 어떤가? 자네가 그분들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청명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피식 웃었다. 맹소야 나름대로 진지하게 물었겠지만, 사실 청명의 입장에선 이만큼 웃긴 질문이 있겠는가.
대답은 정해져 있다.
“고작 같은 사람이 되려고 이러고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럼?”
“뛰어넘어야죠.”
청명의 콧잔등이 조금 일그러졌다. 마치 야수가 공격성과 흉포함을 드러내는 듯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모자랐으니까. 그때보다 더, 훨씬 더 잘해 내야죠. 안 그러면 그 과거를 살아간 이들을 볼 낯이 없지 않겠어요?”
맹소는 거대한 몸을 들썩이며 웃었다.
“이래서 자네를 어쩔 수 없는 거라네, 총사!”
과거와 현재가 이어진다. 같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또한 다르지 않다. 야수궁주 맹소의 얼굴에도 청명의 것과 다르지 않은 야수의 기운이 어렸다.
“남만야수궁은 증명할 것입니다. 매화검존과 암존의 의기가 이어진 곳이 그저 화산과 당가뿐만이 아님을. 우리 남만야수궁에도 그 의기가 살아 있음을. 우리의 피와 목숨으로!”
피가 뜨겁게 끓어오르는, 그런 선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