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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629화


1629화. 좋은 게 좋은 거잖습니까? (4)

“하여……. 이렇게 가주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

제갈자인이 멍한 눈으로 현종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예.”

“당주……를 뽑아야 하는데.”

제갈자인의 시선이 현종 옆에서 구시렁대고 있는 청명에게로 향한다.

“총사의…… 의견을 도무지 신뢰할 수 없어서 저를 불렀다는 말입니까?”

“송구하게도 그렇습니다.”

“…….”

이 순간 제갈자인의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은 그저 하나뿐이었다.

‘화산에 수맥이라도 흐르나?’

왜 화산파 무복을 입고 있는 인간들은 하나같이 정신이 나가 있단 말인가?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만…….”

이쯤 되니 사실 그만 몰랐을 뿐, 제갈세가와 화산이 선대부터 대대로 죽고 못 사는 사이가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였다. 그게 아니고서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화산을 향해 원색적인 비난을 늘어놓던 그를 이리 대하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런데 왜 하필 저를…….”

“가장 객관적으로 상황을 봐 주실 분 같아서입니다.”

“……객관적이요?”

“예.”

제갈자인의 얼굴이 살짝 뒤틀렸다.

말이야 객관적이라고 하지만, 그 속뜻은 ‘네가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가장 대놓고 화산을 욕한 인간이라서’가 아닌가?

“부탁드리겠습니다, 가주님.”

“총사의…… 총명함은 제가 감히 따를 수 없을 정도입니다. 굳이 제 의견을 구하실…….”

“그리 봐 주시면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만.”

현종이 힐끔 청명을 바라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타고난 영민함을 다스릴 인성을 아직 갖추지 못한 터라.”

“…….”

“사람부터 만들었어야 하는 건데…….”

“다른 문파 사람 앞에서 창피하게!”

“시끄럽다, 이놈아!”

삐죽 입을 내미는 청명을 보고 있으니 제갈자인은 농담이 아니라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여긴 대체 어떤 세상인가.

“하여튼 그러니 의견을 부탁드립니다.”

“…….”

확실히 엉덩이를 뺄 상황은 아니었다. 지금 그들에게 시간이 남아도는 것도 아니고.

“그게 맹을 위한 일이라면 작은 소견이나마 내어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가주님께서도 당주 자리를 하나 맡아 주시는 것이.”

“그건 안 됩니다.”

“예?”

이전과는 달리 단호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에 현종이 움찔해 제갈자인을 바라본다.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맹에 헌신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저 저는 제가 있어야 할 자리가 있다 여길 뿐입니다.”

“있어야 할 자리라고 하시면?”

“지휘체계가 일원화된다면 각 당의 당주도 중요하지만, 지휘부의 중요성도 커집니다. 제 생각에 지금의 지휘부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으음.”

현종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실질적으로 지금 천우맹의 지휘를 맡고 있는 이는 청명과 당군악, 그리고 임소병이다. 제갈자인 역시 그들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리라.

그저 종남과 모용처럼 이번에 맹에 합류한 이들은 아직 저들의 명을 듣는데 껄끄러움이 있다는 의미에 가까울 것이다.

“하여 저는 지휘부에 몸을 담고 싶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현종이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제갈자인을 바라보았다.

지휘부에 몸을 담는다는 건 청명의 명을 들으면서 임소병과 부대끼겠다는 의미다. 명문세가의 가주인 그가 쉬이 선택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 총사께서 그리 말씀하셨지요.”

현종의 고개가 무겁게 끄덕여졌다.

말은 안 했지만, 야속하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던 이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한 울타리 안에 들어와 서로 지지해 주는 관계가 될 줄이야. 이래서 사람을 쉬이 판단해서는 안 되는 모양이다.

“그럼…….”

“그런 의미에서 다른 분을 추천해야 한다면.”

제갈자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종남의 종리곡 장문인을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으으음.”

확실히 남은 구파일방의 대표 격인 그를 배제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남만야수궁의 궁주님께서도 당연히 그 자리를 차지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아시겠지요?”

현종이 묵묵히 동의를 표했다.

새외의 두 문파가 차별받는다는 느낌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빙궁과 야수궁 중 하나는 반드시 중용되어야 한다. 연륜과 실력을 고려한다면 야수궁주를 뽑는 건 당연한 선택지가 될 것이다.

“그리고 오대세가를 대표할 만한 문파도 하나 필요합니다.”

“남궁세가를 말씀하심입니까?”

“아니요. 남궁도위 소공자는 남궁세가 내에서는 인정을 받았을지 모르나, 당주로서의 무게감은 부족합니다. 그에게는 당주보다 부당주의 자리가 합당합니다.”

“그럼…….”

제갈자인의 시선이 현종의 옆에 앉은 이에게로 향했다.

“저는 솔직히 부맹주라는 자리에 무슨 의미가 있는 줄 모르겠습니다. 실력이 있는 이라면 허울뿐인 자리에 앉혀 두기보다는 전장으로 보내야겠지요.”

그의 시선을 받은 당군악의 표정이 더없이 진중해진다.

“사천당가의 세는 약해졌을지 모르나, 독왕 당군악의 실력은 그대로일 터, 쓰지 않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

현종이 조금 저어되는 얼굴로 당군악을 돌아보았다. 사파를 상대할 당주로서 당군악보다 합당한 이가 있겠냐만, 그는 천우맹의 부맹주였다. 당주로 자리를 옮긴다는 건 실질적인 강등이나 다름없는 처사. 그걸 당군악이 받아들일지는…….

“안 그래도…….”

당군악이 옅게 웃으며 제 턱을 쓸어내렸다.

“회의실에 앉아 있는 게 좀이 쑤시던 참입니다. 제갈 가주께서 그리 말씀해 주신다면 부담 없이 제자리로 갈 수 있겠군요.”

“가주님…….”

“당가 입장에서도 더없이 좋은 기회입니다. 아직 사천당가가 그 힘을 잃지 않았음을 제가 증명해 내겠습니다.”

현종이 더없이 고마움을 담아 당군악을 바라본다.

“하필 총사의 명을 받아야 한다는 게 좀 껄끄럽지만.”

“예? 제가 뭘요?”

“……아닐세. 아무것도.”

당군악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럼 세 자리는 확정이 되었군요. 남은 건 두 자리인데.”

제갈자인이 현종을 바라보았다.

“맹주님. 화산의 장문…….”

“안 됩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현종이 제갈자인의 말을 잘랐다.

“이미 화산은 과할 정도로 많은 자리를 얻었습니다. 거기에 당주의 자리까지 탐내는 건 과욕입니다.”

“으음……. 하지만.”

“그 일만은 제 뜻대로 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제갈자인이 한발 물러섰다. 화산이 당주를 맡지 않는다 한들, 부당주 자리는 대부분 화산이 채울 테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가장 머릿수가 많은 녹림의 장에게도 한 자리는 주어야겠지만, 그는 군사…….”

“뭔 사파 새끼가 당주를 맡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그 꼴 못 봅니다!”

“…….”

“정신 나가셨어요? 가주님도 생각을 좀 하고 말씀을 하……. 아악! 귀! 내 귀!”

“입 다물라고 하지 않았느냐!”

“아야. 장문인, 귀! 귀 떨어져요!”

“…….”

서로 간의 경계를 허물어 새로운 세상을 열자는 ‘사파 혐오론자’가 지금 제갈자인의 눈앞에 있었다.

“……여하튼 그러니 녹림왕은 안 되겠고.”

제갈자인의 손가락이 책상을 톡톡 두드린다. 종리곡과 맹소, 그리고 당군악의 무게감에 뒤지지 않는 이로 당주 자리를 채우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럼 남은 건……. 개방밖에는 없는데.”

“거지새끼가 당주? 차라리 사파 놈을 앉히지!”

“요놈의 조동아리! 요놈의 조동아리!”

“아악! 아파요!”

현종의 손이 찰지게 청명의 조동아리를 찰싹찰싹 때려 댔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제 얼굴을 마구 주무른 현종이 한숨을 내쉰다.

“개방주는 지금 방주의 자리에 오른 지도 얼마 되지 않아 당주 자리까지 역임하는 건 어려울 겁니다. 게다가…….”

“예. 개방의 특성상 그들만은 당에 소속되어 활동하기가 쉽지 않지요.”

평범한 거지들은 몰라도 최소한 정보를 다루는 정보개(情報丐)들만큼은 조직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을 이끌 방주도 필요하다.

“으음. 그럼 개방도…….”

“꼭 방주가 당주가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요.”

“으음?”

“거기 이제 할 일이 줄어서 놀고 있는 양반이 하나 있는데, 홍 아저씨보다야 그 양반이 낫죠.”

제갈자인이 ‘아.’하는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전대 방주라면 당주로서는 현 방주보다 나은 면이 있겠군요.”

“풍영신개라…….”

당군악의 고개도 끄덕여진다. 그 명성에 비해서는 알려진 것이 적은 인물이지만, 당주에게 필요한 무게감은 확실히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 남은 건 한 자린데.”

“후우.”

현종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온다. 남은 한 자리를 채우는 것이 영 쉽지가 않았다.

운암은 그가 거절했고, 해남파는 부당주로도 아직은 부족하다 할 곽환소가 이끌고 있는 상황이다. 설소백 역시 그 나이를 고려할 때는 당주로서 어울리는 이가 아니었다.

남은 것은 유령문의 도운찬 정도인데……. 그를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을 판이니 도저히 당주로 올릴 수가 없었다.

“맹주님.”

“으으음.”

은근한 당군악의 목소리에 현종의 얼굴이 굳어진다.

‘이리되면…….’

결국은 당주 자리에 화산의 장문인 운암을 올릴 수밖에 없는가?

현종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가 장문인의 자리를 내려놓으며 운암은 과도한 부담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 이에게 당주라는 자리마저 맡으라 하는 것은 너무 과한 일이 아닐까? 천성적으로 마음이 약한 이인 것을…….

하지만 다른 도리가 없는 상황. 하는 수 없다고 생각한 현종이 입을 열려 할 찰나였다.

“맹주님.”

“예?”

제갈자인이 한층 진중해진 표정으로 현종을 바라본다.

“혹시 제가 한 사람을 추천해도 되겠습니까?”

* * *

“……당주요?”

모용위경이 표정이 절로 멍해졌다.

“예. 가주님.”

“제, 제가 말입니까?”

“예.”

모용위경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눈빛으로 제갈자인을 바라본다.

당주라니. 당장 그가 화산에 대해 원색적인 비난을 해 댄 것이 바로 며칠 전의 일이거늘, 고작 다섯 자리밖에 없는 당주 자리에 그가 오른다는 말인가?

그것도 화산의 장문인을 제치고?

“그게…….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저는…….”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

제갈자인이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여기서는 말이 되는 소리인 모양입니다.”

“…….”

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당황하던 모용위경이 순간 떠올랐다는 듯 재빨리 말했다.

“매, 맹주께서……. 아니! 총사께서 반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게…….”

“예?”

제갈자인의 얼굴이 어색해졌다.

“……모용가주께서 맡아 주신다면 더없이 힘이 될 거라 하셨습니다.”

“그, 그런. 총사께서 그리 마음이 넓은 분이셨다니.”

모용위경의 감격한 얼굴을 보며 제갈자인이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 아! 그 양반이 있었네! 어후, 귀찮은 거 하나 덜었네요. 얼른 줘 버리죠. 안 그래도 입이 댓 발 나와 있던데, 그거라도 주면 조용해지겠죠.

차마…….

있는 그대로의 말을 전할 자신이 없는 제갈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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