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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634화


1634화. 모두 사라져 버리기 전에. (4)

“오?”

“사숙?”

터덜터덜 숙소로 돌아가다 조걸과 윤종을 마주친 백천이 퀭해진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본다.

“헐.”

“……이건 영 맛이 가셨는데.”

“괜찮습니까? 사숙?”

“……괜찮…….”

백천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자 조걸이 윤종에게 속삭였다.

“생각보다 상태가 많이 안 좋지 않습니까?”

“그래도 아버지 아니냐? 가출한 자식놈이 아버지를 만나면 보통은 저리되는 법이지. 아니, 보통은 다리 몽둥이가 부러지던가?”

“그럼 용케 멀쩡히 돌아왔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지. ‘아직은’ 멀쩡하다고 해야지. 언제 부러질지 모를 다리니까.”

“아.”

조걸이 힐끔 백천의 다리를 바라본다. 하기야 그도 과거 화산에 오기 전 일주일쯤 가출을 했다 잡혔을 때, 정말 어디 하나가 부러질 만큼 두들겨 맞았었다.

고작 일주일 때문에 그리 두들겨 맞았는데, 이 인간은 이제 가출한 지 십 년은 우습게 넘어가지 않는가? 물론 이쯤 되면 가출이 아니라 독립으로 불러야 마땅하겠지만, 진초백의 입장은 또 다르겠지.

시커멓게 죽은 백천의 안색을 살피던 윤종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도 천륜이란 끊기 어려운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기회에 적당히 관계를 회복해 보십시오. 사숙.”

“윤종아.”

“예?”

“……우리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알고 있어?”

“음…….”

윤종이 눈을 살짝 좁혔다. 먼발치에서 몇 번 본 적 있지만, 사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른다. 그저 백천과 닮았다는 것만 알 뿐.

“잘은…….”

“하나만 생각해 봐라.”

“뭘 말입니까?”

“그 밑에서 진금룡이 나왔다.”

“…….”

그 말에 윤종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렇군요. 사숙의 아버지라.”

조걸과 윤종이 서로를 힐끔 보며 수군댔다.

“세상에. 생각해 보니 사숙과 진금룡의 아버지네요. 보통 사람이 아닐 수밖에.”

“그렇지. 사숙의 아버지니까.”

이 새끼들이?

백천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하지만 맞는 말이라 딱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진금룡보다는 나을 것 아닙니까?”

“내 생각인데. 형……. 아니, 진금룡이랑 나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거든?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한 가지가 아닌 것 같은데…….”

“진짜 뒈지고 싶냐?”

“……뭡니까? 그 공통점이라는 게?”

백천이 힘없이 중얼댔다.

“죽도록 얻어맞아 봤다는 거지. 누구한테.”

“아, 대가리가 깨져 봤다는 말씀이시군.”

“확실히 그건 공통점이라 할 수 있지. 그런데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입니까?”

“그러니까…….”

백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껄끄럽기는 한데, 우리 아버지는……. 맞아 본 적이 없는 진금룡 같은 사람이다.”

“히이이이익!”

“으으으으으…….”

윤종과 조걸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들의 뇌리에 청명에게 두들겨 맞기 직전의 그 재수 없던 진금룡과 백천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두 사람이 그대로 나이를 먹었다면 대체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힘드시겠네요.”

“그……. 생각해 보니 천륜이라고 해서 꼭 이어 가야 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출가를 했으니까.”

백천이 제 얼굴을 주물러 대며 힘없이 대답했다.

“말이 쉽지…….”

“하긴.”

“그도 그렇죠.”

절로 한숨이 새어 나온다.

물론 진초백도 나이를 먹었고, 시간도 많이 흘렀으니 분명 예전보다는 유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사이가 나쁜 아버지와 함께 행동해야 한다는 부담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그 순간, 윤종이 뭔가 움찔하더니 심각한 얼굴로 백천을 바라본다.

“사숙. 한 가지 여쭈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뭐.”

“그……. 진금룡은 그럼 일반 당원이 되는 거잖습니까?”

“그렇지.”

“그 사람은 어느 당에 속해 있습니까?”

“…….”

“설마…….”

백천이 고개를 돌려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가에 뭔가 투명한 것이 반짝이는 광경을 본 윤종과 조걸이 또다시 서로를 돌아본다.

“이거 당원 명부 누가 짰냐?”

“뭐 뻔한 걸 물어보십니까? 청명이가 짰잖습니까.”

“우연일까?”

“아이고, 사형. 말 같은 소리를 하십시오. 그 새끼가 하는 일에 우연이 어디 있습니까. 이거 분명히 고의입니다.”

그렇다는 건 청명이 놈은 여기에 진초백과 진금룡이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백천을 그 당의 부당주로 밀어 넣었다는 말이 아닌가.

“……진짜 사람 새낀가?”

“악독한 새끼…….”

치를 떨던 두 사람이 마치 짠 듯이 백천을 향해 다가가서 그의 어깨를 양쪽에서 감쌌다.

“힘내십시오, 사숙. 뭘 어쩌겠습니까? 이왕 이리된 거 마음이라도 편히 먹으십시오.”

“그렇습니다, 사숙. 그래도 가족 아닙니까, 가족.”

“가족이라서 그래……. 가족이라서.”

“아…….”

그 말도 맞지.

차마 더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하는 그들을 본 백천이 그래도 어른이라고 먼저 입을 열었다.

“너희는? 너희도 당주님들을 따로 뵈었을 것 아니냐? 그분들은 괜찮으시더냐?”

“야수궁주님이야 뭐. 항상 좋으시죠. 물론 가까이서 대화를 하면 귀가 좀 아프긴 하지만…….”

“그래.”

백천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 사람이라면 야수궁주의 주변에 어슬렁대는 영물들 때문에 정신이 사납겠지만, 조걸은 딱히 그런 것도 없을 것이다. 본인이 사람보다는 그쪽에 가까운 인간이니까.

“모용가주님께서도 생각보다 대화가 통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래?”

조금 뜻밖이라는 듯 백천이 윤종을 바라본다.

“본인의 역할은 잘 알고 있으시다면서, 쓸데없이 고집을 부려 일을 방해하지 않을 거라 하시더군요. 이전에 봤던 모습과는 조금 달라 보였습니다.”

“……한 가문의 가주이신 분이다. 당연히 생각이 넓으시겠지.”

“예. 생각해 보니 이전까지는 제갈가주님을 말리시면서 최대한 중재를 하시던 분 아니셨습니까?”

“그랬지.”

“한편이라고 생각하면 꽤 온화해지시는 분 같습니다. 저만 잘하면 큰 문제는 없을 듯합니다.”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군악과 혜연은 당연히 문제가 없을 것이고, 풍영신개와 남궁도위의 조합도 문제가 생기기 어려울 것이다. 남궁도위가 혈기가 넘치는 면은 있지만, 풍영신개는 지금까지 그 개방을 암중에서 통솔하던 이다. 분명 서로 조화를 맞출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나만…….”

“울지 마세요, 사숙.”

“다 큰 양반이 창피하게!”

소매로 얼굴을 훔쳐 닦은 백천이 한숨을 푹하고 내쉰다.

“여하튼 최선을 다해 보자. 이제는 정말……. 그래, 정말 그것밖에 안 남았으니까.”

“예. 사숙.”

“예.”

윤종과 조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야 지지리 궁상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막상 전장에 돌입하면 누구보다 자신의 역할을 해낼 사람이 백천이리라.

다만 그런 백천을 바라보는 윤종의 눈빛은 조걸만큼 편하지 못했다. 조걸도 백천도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그보다 우린 이제 무슨 일을 하게 되는 겁니까? 아무도 뭘 일러 주지 않으니 대체 뭘 해야 할지.”

조걸이 머리를 긁적이자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너희는 명령을 받는 위치가 아니라 명령을 하는 위치다.”

“예.”

“그러니 남이 할 일을 일러 주길 기다리지 말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여야 한다.”

“그러니까 그걸 잘…….”

조걸이 곤란한 얼굴을 하자, 백천이 피식 웃었다.

“나 같으면 일단 내 당의 사람들부터 먼저 만나 보겠다. 아무리 명으로 이어진 사이라지만, 서로 잘 알게 된다면 조금은 수월해지는 법이니까.”

“아, 그렇겠네요.”

조걸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평소라면 그도 쉽사리 생각해 낼 수 있는 일이지만, 갑자기 부당주라는 막중한 자리에 오르니 머리가 잘 돌지 않는 기분이었다.

“그럼 그 뒤에는요?”

“그 뒤에는…….”

백천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

“기다려야지.”

“…….”

“저들이 내릴 지시를.”

* * *

청명. 임소병. 그리고 제갈자인.

정파를 대표하는 책사와 사파를 대표하는 책사. 그리고 최근 몇 해 동안 그 비상함만은 대적할 자가 없음을 증명해 온 천우맹의 총사.

그 세 사람이 작은 다탁을 중앙에 두고 둘러앉아 있었다.

“편제는 끝냈습니다. 다소의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머지않아 한 몸처럼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제갈자인의 말에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편제를 짜면서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서로 너무 가까워서도 안 되지만 서로 너무 멀어서도 안 된다.

이상으로만 따지자면 가장 어색하고 사이가 나쁜 이들이 함께 싸우며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 것이 옳겠지만, 청명은 당장 눈앞에 들이닥친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만 외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희생을 줄이고, 사패련을 이기는 것. 모든 것은 그 목적 하나를 위해 준비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후에는…….

청명의 생각이 깊어지려는 찰나, 임소병이 입을 열었다.

“중요한 건 그 다소의 시간.”

“음.”

“그리고…… 이제 사패련이 어찌 움직이는가겠군요.”

제갈자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사패련의 움직임은 여전히 없습니까?”

“개방이 눈을 떼지 않고 있지만, 아직은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대체 왜…….”

제갈자인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뭔가 이상하다. 지금 저들은 완벽히 승기를 잡은 상황. 그대로 몰아붙였다면 천우맹 역시 대응에 애를 먹었을 것이다. 그런데 별 의미도 없는 호북에 자리를 잡고 시간을 끌어 버린 덕택에 그들이 준비할 시간을 내어 주지 않았는가.

“무슨 계략을 꾸미는 게 아니겠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그게 맞겠지만…….”

임소병은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장일소의 모든 수에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임소병조차 이 행위의 의미를 조금도 읽어 낼 수 없었다.

그러니 당장 기댈 곳이라고는…….

“총사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

임소병의 질문을 받은 청명의 시선이 다탁 위에 펼쳐진 지도로 고정된다. 그의 두 눈이 깊게 그리고 또 깊게 침전해 들어갔다.

“계략이라…….”

청명의 고개가 저어진다.

“주저앉는 계책 따위는 없어.”

“하지만 그는 이전에도…….”

“그건 주저앉은 게 아니야, 칼끝을 겨누고 있었던 거지. 지금은 달라. 아무리 생각해도 그저 무의미해.”

“으음. 그렇다면?”

임소병의 머리가 복잡해지려는 찰나였다.

쿵!

“아아악!”

임소병이 제 머리를 부여잡고 뒤로 나뒹군다.

“왜! 왜 때립니까!”

“쯧!”

청명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고 그런 임소병을 바라본다.

“그래도 천우맹의 군사고, 못해도 녹림의 왕이라는 새끼가 잔뜩 쫄아서는!”

“……예?”

“그 새끼도 어차피 사람이야. 모든 일을 계획하고, 모든 일을 제 뜻대로 할 수는 없어.”

“…….”

청명이 눈을 가늘게 떴다.

모든 전쟁에는 변수가 발생한다. 때로는 큰 변수, 때로는 작은 변수. 그리고 때로는 사소하지만 치명적인 변수까지.

때때로 그 작은 변수가 전장의 판도를 말도 안 되게 뒤바꾸어 버리기도 한다.

“지금 상황은 분명해. 놈은 분명 예측하지 못한 변수를 맞닥뜨렸다.”

“…….”

“그러니까 우리가 해야 할 건 하나야.”

청명의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주저앉은 놈을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것.”

임소병이 일순 숨을 멈췄다.

그리고 그 순간 청명의 말이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방어는 할 만큼 했어. 지겹고 끔찍할 정도로.”

탁!

청명의 손, 그 다섯 손가락이 지도를 찍는다. 그리고 그 손가락들이 이내 지도를 구기며 모여들었다.

“이젠 우리 차례야.”

“총사…….”

“공격한다.”

청명의 두 눈에서 살기가 흘러나왔다.

“놈의 숨통을……. 완전히 끊을 때까지.”

섬뜩하고.

또 서늘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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