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화산귀환-1640화


1640화. 짐승도 고마움은 압니다. (5)

시야가 온통 붉다.

빨갛지 않은 것이 없다. 물론 이 순간 느끼기엔 적절치 않은 감상일지 모르지만 말이다.

달도 뜨지 않은 그믐의 밤이 타오르는 불길의 색으로 물들어 갔다. 지독하리만큼 강렬하고 몸서리쳐질 만큼 이질적인 광경은 그날, 호가명의 두 눈에 화인(火印)처럼 새겨졌다.

누군가의 비명, 울부짖음, 그리고 또 절망. 그 모든 것이 귓속을 어지럽혔다.

화마는 모든 걸 집어삼키며 밝기를 더해 갔다. 마치 저 하늘에 어둠을 남기고 모습을 감춘 태양이 이곳에 강림하기라도 한 양.

불길을 망연히 바라보던 호가명은 문득 이 모든 게 그저 희극적이라 느꼈다.

이토록 수월한 일이었던가?

이리도 간단히 할 수 있는 일이었던가?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숱한 악행을 저질렀음에도 자신들에게 겨눠질 칼날에 대한 대비는 조금도 하지 않고 살았단 말인가.

이들은 누군가가 자신을 노릴 수 있단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그토록 많은 원한을 사며 살아왔음에도 말이다.

그 사실이 우스워 결국 호가명은 헛웃음을 지었다.

“아아아아악!”

또 하나의 비명이 귀를 찔렀다. 그 안에 서린 공포, 억울함 등이 여실히 느껴졌다.

대체 무엇이 억울하단 말인가. 자신들의 손에 짓밟힌 이들을 생각하면 육신이 갈기갈기 찢겨도 부족할 것을. 대체 저들이 사는 세상과 그가 살아온 세상이 무어가 그리 다르단 말인가?

매캐한 연기가 코를 찌르고, 그사이 뒤섞인 피비린내가 비위를 상하게 했다. 의복은 물론이고 그의 피부에까지 스미는 듯했다.

“으윽! 으아악!”

그때, 악에 받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호가명이 그쪽을 돌아보니 활짝 열린 장원 대문으로 장일소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누군가의 머리채를 잡아채어 질질 끌면서.

“노, 놓아……. 놓아라, 이놈!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제 머리채를 잡은 손을 어떻게든 떼어 놓으려 휘적거리며 발버둥 치는 뚱뚱한 노인. 그가 누구인지 호가명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장일소가 덤덤하게 물었다.

“원하던 게 이놈 맞나?”

호가명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은 노인에게서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장일소가 잡고 있던 이를 호가명의 앞으로 물건짝 던지듯 내던졌다.

콰당!

“으……. 으으…….”

노인이 고통에 신음하며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뒤늦게 눈앞에 선 이를 확인했다.

“너, 너는…….”

그 눈빛에 짧은 절망, 짙은 낭패감, 미미한 두려움, 사람으로서 느끼는 당혹감 등이 비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의 눈빛에는 다시 분노만이 이글거렸다.

“네놈은 누구냐?”

“…….”

호가명은 그 순간 멍해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람이 너무 분노하면 순간적으로 넋을 놓기 마련이었다.

그러자 노인은 더 득의양양해서는 분기탱천했다.

“네, 네 이놈! 이런 짓을 하고도 감히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이자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호가명이 누구인지.

용서를 구하길 바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를 알아보기는 할 거라고 믿었다.

어쩌면, 언젠가 그의 힘을 뛰어넘어 복수를 도모할 호가명을 경계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호가명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지고, 수많은 대답을 준비해 뒀다. 황자와 그의 관계, 그리고 이자가 꺼내 들 숱한 패들에 대한 대책까지.

하지만 이 순간, 그 모든 게 무의미해졌다.

“네, 네놈이 누군지는 상관없다. 보아하니 글줄깨나 읽은 놈 같은데, 네놈이라면 내가 누군지 똑똑히 알 터. 이 일이 얼마나 무도하고 또 무모한 짓인지 모를 리 없겠지!”

호가명은 결국 허탈한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허세를 부리는 게 아니다. 노인은 정말로 모르고 있다. 이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자신이 지금 호가명의 발에 짓밟히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왕사(王師)…….”

어찌 모를 수 있단 말인가?

설령 그 모든 게 허명이라고 해도, 왕의 스승이라 불릴 만큼의 학식을 쌓은 이다. 치열하기 이를 데 없다는 황궁의 암투를 수십 년간 버텨 낸 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제 상황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이리 아둔한 소리를 지껄이는 걸까?

생각할수록 자꾸 실소가 새어 나왔다.

그래, 모를 만도 하다. 사람은 자신이 개미에 물려 죽을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치 않을 테니까. 개미에 물리고서도 자신이 죽는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을 테니까.

이 늙은이에게 호가명과 그의 가문 따위는 그저 하찮은 개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뿐이다.

그러니 그의 가문을, 개미굴을 모조리 짓밟아 놓고도 경계조차 없이 편히 잤겠지. 개미는 복수할 줄 모르니까. 사람은 그렇게 믿으니까.

“아직, 아직은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모두 물리고 죄를 빈다면 네놈 목숨 하나쯤은 살려 주마!”

“…….”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면, 네놈은 물론이고 네 구족을 모조리 능지(陵遲)에 처할 것이다! 이건 절대 단순한 협박이 아니다! 알겠느냐?”

호가명은 웃었다.

아니, 울었다.

고작 이런 자에게, 이따위 하찮은 놈의 욕심 때문에 그의 가문이 그런 꼴을 당해야 했던 것인가? 고작?

호가명이 공맹의 말씀을 좇던 시절 바라보았던 왕사는 너무도 드높고 위대했다. 하지만 이렇게 짐승이 되어 바라보니 왕사는 그저 비대하게 살찐 추한 늙은이일 뿐이었다.

마침내 호가명이 입을 뗐다.

“어찌 멸하시겠습니까?”

“……뭐?”

“제 친지들은 이미 당신의 손에 모조리 죽어 버렸는데, 어떻게 멸한단 겁니까? 무덤을 파헤쳐 그 백골이라도 짓밟으시겠습니까?”

왕사의 눈이 짧게 흔들렸다.

“안타깝습니다, 왕사.”

“네, 네놈…….”

노인이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자신이 가진 어떤 수도 호가명에게 통하지 않을 것임을.

탐욕과 오만으로 가득하던 눈동자가 이젠 공포로 뒤룩뒤룩 구르기 시작했다.

“자, 잠시만! 잠시 기다리게! 원하는 게 무엇인가?”

“…….”

“나는 줄 수 있네. 자네에게 뭐든 줄 수 있어. 관직! 재물! 권세! 향락! 그게 무엇이든 내가 줄 수 있단 말일세! 하지만 내가 죽는다면 자네는 평생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될 뿐이네! 알고 있지 않은가?”

호가명의 표정에 변화가 없자 다급해진 노인이 네발로 기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자, 잘 생각해 보게! 이미 잃은 것은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너무 절실하여 순수하게까지 보이는 간절한 염원이 노인의 눈빛에 어렸다. 이를 싸늘하게 내려다보던 호가명이 말했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

“이미 당신의 가족도, 친지도 목이 베였습니다. 그런데 다 늙어 죽을 날만 기다리는 당신이 그렇게 혼자 살아남아 무엇을 하겠다고? 차라리 이곳에서 당당히 죽는 게 낫지 않습니까.”

그러자 왕사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모르는 소리! 가족이니, 친지니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다고!”

“…….”

“내가 있어야 그들도 의미가 있는 걸세! 내가 없는 그들에게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나만 살아 있다면 가족은 다시 만들 수 있네. 나만 힘을 잃지 않는다면!”

노인의 눈빛에 바글거리는 저것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호가명은 알고 있었다.

과거 한때나마 수많은 유림과 중원의 존경을 받았던 이가 마지막 순간까지 부여잡은 게 그저 욕심이라니. 욕망이라니.

“그러니 살려 주게! 자, 자네도 가족을 잃지 않았나! 나 역시 마찬가지일세. 그럼 우리가 서로 가족이 되면 되지 않겠나?”

“……가족?”

이건 먹히는구나, 생각했는지 노인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양자로 들어오게! 그럼 내 모든 재산과 권력을 자네가 가지게 될 걸세. 그럼 자네 가족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편히 보내 줄 수 있지 않겠는가?”

호가명의 바짓단을 잡은 노인의 손아귀에 더 큰 힘이 실렸다. 그 손을 호가명은 그저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제안에 대답한 건 호가명이 아닌 다른 한 사람이었다.

툭.

그가 호가명의 근처에 무언가를 떨어트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땅에 꽂힌 한 자루 비수가 눈에 들어왔다.

“나쁘지 않은 제안 같은데?”

그 비수를 주워 든 호가명이 입을 연 사람, 장일소를 물끄러미 보았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 하셨습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장일소가 조소하는 듯 입꼬리를 뒤틀었다.

“의심은 들겠지. 하지만 내가 보기에 저 제안은 진심인 것 같은데. 저런 놈은 딱히 원한이라는 걸 가지지 않아. 다른 친지들이 죽어 나자빠진 이상, 제 재산을 관리하고 자신을 극진히 모셔 줄 똑똑한 어린놈이 필요하지 않겠어?”

“…….”

“네가 약조만 제대로 한다면, 저놈은 정말 너를 양자로 들일 테지. 그럼 너는 저놈의 모든 것을 이어받게 된다. 다른 이들은 평생을 개처럼 일해도 결코 쥐지 못할 부와, 목숨을 내걸어도 결코 바랄 수조차 없을 권세까지.”

호가명의 눈빛이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장일소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네가 아무리 복수를 한다 해도 이미 잃은 게 돌아오진 않아. 죽은 놈은 죽은 놈일 뿐, 저승에서 네가 한 복수에 기뻐할 일도 없을 거다. 그럼 남은 건 고작 해 봐야 네 너절한 원한뿐.”

장일소가 비웃듯 말했다.

“그 원한에 대한 대가로는 결코 부족하지 않은 제안을 받은 것 같은데.”

장일소를 빤히 바라보던 호가명이 물었다.

“당신은 괜찮습니까?”

“나는 대가만 받으면 그만이지.”

장일소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말려 올라간다.

“네가 이쯤에서 정리해 준다면, 나 역시 앞으로 감당해야 할 것들을 피할 수 있게 될 거고. 애초에 그런 거래 아니었던가?”

“…….”

호가명의 시선이 다시 왕사에게로 향했다.

왕사는 그사이에도 간절하게 호가명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조금 전까지 없었던 희망이 확실히 어려 있었다. 호가명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잠시의 침묵 끝에 호가명이 입을 열었다.

“……좋은 제안입니다.”

“그, 그럼……!”

“덕분에 이제 확실히 알겠군요.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을 했는지.”

왕사의 두 눈이 흔들렸다.

“왕사. 알아 두십시오. 제 이름은 호가명입니다.”

“호, 호가…….”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파아아아앗!

콰드드득!

호가명이 섬전처럼 휘두른 비수가 왕사의 어깻죽지에 파고들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왕사의 입에서 처절하기 짝이 없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깨에 박힌 비수가 좌우로 뒤틀릴 때마다 무참히 튄 피가 호가명의 얼굴에 끼얹어졌다.

“그따위 것을 대가로 지불하겠다고? 그딴 것을?”

“아, 아악! 아아아악!”

호가명은 산발이 된 왕사의 머리채를 콱 틀어잡았다.

“잘 알아 두십시오, 왕사.”

호가명의 핏발 선 눈이 눈물 맺힌 왕사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 눈에 들어찬 독기가 금방이라도 왕사를 태우고 녹여 버릴 듯했다.

“거래란 건, 서로 구미가 당길 만한 것을 내밀 때 성립 가능한 겁니다. 당신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들이밀 게 아니라.”

파아앗.

호가명이 왕사의 어깻죽지에 박힌 비수를 뽑아 역수로 돌려 잡았다.

제 피로 물든 비수를 보는 왕사의 두 눈에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절망이 어렸다.

“제, 제발…….”

“예순일곱의 목숨이다. 지금부터 그들이 느꼈을 고통을 똑똑히 알게 해 주마. 그러니 부디…….”

“살려…….”

이를 악문 호가명의 눈이 원독으로 타올랐다.

“쉽게 죽지 마라.”

파아아아앗!

비수가 왕사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몇 번이고 튀어 오르는 피, 터져 나오는 끔찍한 비명, 힘없이 흐느끼다 통곡하는 소리.

이 모든 소란을 말없이 지켜보던 장일소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피어났다.

짙은 구름 사이로 마침내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낸 그믐달과 닮은 웃음이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