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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


1653화. 좋은 날이군. (3)

파아앗.

검이 허공을 가른다.

더없이 깔끔한 일격이다. 하지만 그 검 끝에 이전과 같은 날카로움은 서려 있지 않았다.

무뎌졌음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이 검에 담긴 건 그저 부드러움이었다.

날카로움 대신 부드러움을 담아 내는 것이 곧 무당의 검.

쾌속한 검격 안에 흐를 듯한 부드러움을 실었단 것은, 곧 이 검을 쓰는 이의 실력이 절정의 경지에 오르리라는 사실을 의미했다.

파아앗.

검이 다시 한번 내질러졌다.

우뚝.

하지만 이번 검격은 이전처럼 부드럽게 이어지지 않았다. 검을 쓰는 이가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듯 몇 차례 다시 검을 내지르다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였다.

“사형! 사혀어어어어어엉!”

검수가 시선을 옆으로 슬쩍 돌렸다. 사색이 된 그의 사제가 부리나케 달려오고 있었다.

“웬 호들갑이냐?”

“크, 큰일 났습니다, 진현 사형! 소, 소식 들으셨습니까?”

진현이라 불린 이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소식을 말하는 거냐? 말을 좀 제대로…….”

진현이 따끔하게 한마디 하려는데, 사제가 말허리를 끊으며 다급히 외쳤다.

“장일소가 사패련을 이끌고 이곳으로 오고 있답니다!”

조금 벌어져 있던 진현의 입이 다시 꾹 닫혔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눈빛에 서늘함이 어렸다.

“사실이냐?”

“예! 지금 소문이 쫙 퍼지고 있습니다. 놈들이 이쪽을 향해 이동하고 있다고, 사패련을 감시하던 개방에서 소식을 전해 왔다 합니다.”

“그래?”

진현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뿐, 그 이상 가타부타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답답해진 사제, 진송이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사형?”

“……어떻게 되냐니?”

“사패련 아닙니까, 사패련. 저희 무당이 홀로 맞서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잖습니까?”

“…….”

“듣자 하니 소림도 박살이 났다고 하던데…… 놈들이 몰려오기 전에 여길 버리고…….”

“입 다물어라.”

순간 날아든 일갈에 진송이 화들짝 놀라 목을 움츠렸다.

“한번 꺼낸 말은 무엇으로도 되돌릴 수 없다. 그러니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죄……송합니다, 사형.”

“이 상황에 어찌 대처할지 정하는 건 장문인이시다. 우리는 그저 명에 따르면 그만.”

어찌 이 말을 부정할 수 있으랴. 진송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예?”

그러나 진현도 제 생각을 다 억누를 수는 없었는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였다.

“이럴 때 달아날 것이라면 굳이 봉문도 하지 않았겠지.”

늘어뜨려 있던 진현의 검이 짧게 검명을 토해 냈다.

타다다닷.

고요하기 짝이 없던 무당의 경내에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자, 장문인을 뵙습니다.”

“장문인, 강녕하십니까!”

경내를 오가던 몇몇이 다급히 이동하는 무리를 보고 급히 예를 표했다. 이들은 얼마나 급한지 예를 표하는 제자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걸음을 재촉하기에 바빴다.

성성한 백발이 휘날렸다. 당대 무당의 최고 배분인 허자 배들. 굳은 얼굴로 선두에 서서 이들을 이끄는 건 무당의 임시 장문인 허산자였다.

무당 장문인이 거하는 상청궁조차 한달음에 지나친 이들은 무당에서도 한참 외진 곳에 있는 작은 모옥에 도달하고야 걸음을 멈추었다.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낡아 빠진 모옥을 무거운 눈으로 바라보던 허산자는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에들 있어라.”

“예.”

작게 심호흡한 허산자가 문 앞까지 다가가 장문인이란 직위에 어울리지 않는 공손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장문인. 안에 계십니까? 허산입니다.”

남들이 본다면 기이하게 여길 일이다.

현재 무당의 장문인은 당연히 허산자일 터. 하지만 정작 허산은 모옥 안에 있는 사람을 장문인이라 부르고 있다. 한 대에 장문이 둘일 수는 없을 텐데도 말이다.

그러나 허산을 따라 이곳까지 온 이들은 이런 상황에 익숙하기라도 한 양, 이런 괴이한 언행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들어오시오.”

허락이 떨어지자 허산자는 지체 없이 문을 열고 모옥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내부의 광경이 눈에 들어온 순간, 그의 얼굴이 일순 굳어졌다.

도인에게는 검소함이 기본이라지만, 이 삭막한 모옥은 낡다 못해 여기저기 금이 가서 웃풍이 거세었다. 수련을 위한 곳이라기보다 차라리 고행을 위한 곳이라 느껴질 지경이었다.

허산자의 시선이 한쪽 구석으로 옮겨졌다. 낡고 오래된 도포 차림의 백발노인이 앉아 있었다.

허산자는 그를 향해 정중히 예를 표했다.

“허산이 장문인을 뵙습니다.”

노인 역시 담담히 마주 예를 표했다. 그러나 이내 그 얼굴엔 짧게 질책하는 기색이 어렸다.

“장문사제. 본 도는 더 이상 무당의 장문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더 말씀을 드려야겠습니까?”

“그런 말씀 마십시오, 장문인. 저같이 부족한 사람이 어찌 무당의 장문이 될 수 있겠습니까? 사정이 여의찮아 제가 잠시 어울리지 않는 장문의 위(位)를 맡고 있음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일입니다.”

몸을 낮춘 허산자의 대답에 노인, 허도진인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 부르지 말라 몇 번이나 타이르고, 화도 내 보았다. 그러나 장로들은 물론이고 허산조차 그의 말을 듣질 않는다.

짙디짙었던 흑발과 관운장 같은 미염(美髥)은 어느새 하얗게 세어 버려 과거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지만, 그 냉막한 얼굴과 눈빛만큼은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깊어진 눈빛은 이전의 허도진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탈속의 자세마저 느끼게 했다.

“그래. 어찌 걸음 하셨습니까?”

“사패련이 이리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지 않으셨습니까.”

허도진인은 마땅히 대꾸하지 않았지만,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은 것만으로도 이미 소식을 접했음을 드러냈다.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장문인.”

대답이 없자, 허산자가 다시 한번 입을 열어 재촉했다.

“장로들은 중과부적을 논하고 있습니다. 무당의 힘만으로 저들을 막아 내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어려운 일이라…….”

“예. 하여 금선탈각(金蝉脱殻)의 계를 활용함이 어떠한가, 하고…….”

“금선탈각이라. 결국은 달아나자는 말씀이시군요.”

“일단 장로들의 뜻은 그러합니다.”

“장문사제의 생각도 같으십니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무엇이 진정으로 무당을 위한 길인지…….”

허산자가 말끝을 흐렸다.

어려운 결정일 수밖에.

적과 정면으로 싸우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지금의 사패련은 과거와 다르다. 그들은 이미 소림과 팽가, 그리고 공동을 짓밟은 시대의 패자(霸者)다.

그런 이들을 무당 홀로 감당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달아날 수도 없다. 무당은 봉문 한 이후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아 왔다. 그런데 이제 와 물러선다면 기껏 봉문을 풀고 하는 일이 달아나는 거라고 온갖 지탄을 받게 될 것이다.

실리와 명분, 그 어느 것 하나도 쉽사리 버릴 수 없다.

그렇기에 허산자는 알 수밖에 없었다.

과거 장강에서 허도진인이 내렸던 선택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는지. 옳고 그름을 떠나 얼마나 많은 것을 짊어진 결정이었는지 말이다.

“제게는…… 너무 어렵습니다. 부디 가르침을 주십시오, 장문인.”

“……금선탈각이라.”

가만히 되뇌던 허도진인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중요한 건 무당의 제자들을 헛되이 잃지 않는 것이겠지요. 소림으로 가십시오. 그곳에 남아 있는 소림의 제자들과 함께한다면, 천우맹의 지원이 올 때까지는 버틸 수 있을 것입니다.”

거의 관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려던 허산자가 멈칫했다. 허도진인의 말에서 순간 기이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무언가 이상했다.

“……가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허산자가 의아한 듯 물었지만, 허도진인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허산자는 조금 초조해졌다.

“당연히 장문인께서 이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찌 그런 말씀을…….”

“…….”

“장문인?”

대답을 재촉하는 말에 허도진인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한 번은 물러설 수 있습니다.”

“…….”

“하지만 두 번은 물러설 수 없습니다. 두 번 물러서게 되는 순간 처음 물러섰던 행위의 의미도 정해지는 법이지요. 무당은 결국 제 목숨이 아까워 적을 두고 두 번이나 달아났다는 손가락질을 두고두고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됩니다.”

“아, 아니, 장문인. 하지만…….”

“그러니 증명해야지요. 무당이 그저 물러나는 게 아님을. 저들과 맞서 싸울 의지가 충만함을.”

“…….”

“제자들을 이끌고 소림으로 가십시오. 나는 이곳에 남아 과거에 미처 지키지 못했던 것을 지키겠습니다.”

“지키지 못했던 것이라니요? 그게 대체 무엇입니까?”

순간 허도진인의 눈에 서늘한 한기가 스몄다.

“무당의 명예.”

그 짧은 말이 주는 무게가 일순 사위를 짓누르는 듯했다. 허산자 역시 숨이 막힌다는 듯 움찔했다. 허도진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사제인 그조차 몸을 떨 만큼 날카로웠다.

“장……문인.”

“내가 버린……. 다른 사람도 아닌 이 내가 저 장강의 깊은 물 속에 수장시켜 버렸던 명예.”

허도진인의 목소리는 아주 오랜 시간 공들여 벼려 온 칼날 같았다.

“그저 그것을 지키려 합니다. 이번만큼은, 반드시.”

허산자는 숨이 막혀 오는 걸 느꼈다.

절실히 말리고 싶었다. 무의미한 짓이라고 만류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그는 알고 있다. 무당이 문을 걸어 잠근 이후 허도진인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자신이 저지른 일의 대가를 짊어지고, 얼마나 뼈저리게 고행하며 살아왔는지.

그런 허도진인 앞에서 허산자가 감히 어떤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허도진인이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자들을 불러 모으십시오. 결정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자, 장문인.”

“사제.”

허산자가 여전히 머뭇거리자 허도진인의 말투가 바뀌었다. 일변한 기세에 허산자는 감히 대꾸도 못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제자들을 이끌고 소림으로 가게. 그리고 이곳에는 나와 뜻을 함께할 이들만 남기게.”

허도진인이 천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와 함께 죽어 줄 이는 필요 없네. 하지만 무당의 명예를 위해 죽을 이가 몇쯤 되는 것은 괜찮겠지. 나는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하겠네.”

“장문인…….”

“말릴 필요 없다네.”

허도진인의 입가에 섬뜩하게까지 느껴지는 미소가 환하게 피어났다.

“그날, 그 순간부터 나는 오직 지금만을 기다리며 살아왔으니까.”

조용히 읊조리며 허도진인이 낡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날만을 기다렸다는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눈을 감으면 뇌리에 계속 떠오르는 한 사람의 얼굴이 있었다. 그의 멱살을 움켜잡고 울분을 토해 내던 한 남자. 그날 그를 비웃던 장일소와 더불어, 한시도 잊어 본 적이 없는 얼굴이다.

“사과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것 하나는 아쉽군. 하지만…… 상관없겠지.”

그의 입가에 맺혀 있던 미소가 아주 조금 부드럽게 누그러졌다.

“사과란 말로 하는 게 아니니까.”

뜻은, 끝내 전해질 것이다.

그의 죽음으로.

저 멀리에 있을 그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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