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663화
1663화. 그곳이 어디든. (3)
“⋯⋯.”
대조적이었다.
거대한 산이 시커먼 연기와 세상을 녹일 것 같은 열기를 뿜어내며 통째로 불타오르고 있는 반면, 그 광경을 바라보는 두 개의 눈동자는 마치 북해의 설원을 보는 것처럼 차갑기 짝이 없었다.
아니,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산맥이 더욱 크게 불타오를수록 그 산을 바라보는 눈은 더욱더 차가워져만 갔다.
“중앙에 기름이 부족합니다!”
“당장 보충해라! 마을에 기름을 징발하러 간 놈들은 왜 늦는 거냐!”
“이, 인근에 커다란 마을이⋯⋯.”
“뻔한 변명을 늘어놓을 시간에 움직여라! 당장!”
등 뒤에서 소란과 다급한 악다구니가 연이어 들려왔지만, 석상처럼 굳은 사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서쪽의 희생이 큽니다!”
“수로채의 잔졸들을 그쪽으로 밀어 넣어라!”
“그들은 중앙으로 향했습니다!”
“방향을 돌리면 그만 아니냐! 당장 수기를 치고 전령을 보내! 어서!”
“예!”
단순히 불을 지르고 병력을 투입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저 타오르는 불길의 선(線)을 유지하며 일괄적으로 적들을 밀어 올리는 것. 그리하여 저들에게 몸을 빼낼 공간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산의 지형은 불규칙하기 짝이 없고, 불길이란 불어오는 바람의 방향이 잠시 바뀌는 것만으로도 제멋대로 뒤틀리는 요물이다. 그 모든 변수를 면밀하게 고려하여 타오르는 불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천하에 몇이나 되겠는가.
그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 독심나찰 호가명의 입이 무정하게 열렸다.
“남동쪽이 늦다.”
“예! 군사!”
“가서⋯⋯.”
“예.”
그의 입에서 고저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본보기로 두엇의 팔다리를 잘라 불길에 산채로 던져 넣어라. 그리고 다시 한번 늑장을 부릴 시에는 그곳에 있는 모든 놈들을 같은 꼴로 만들어 줄 것이라 전해라.”
“⋯⋯.”
“대답은?”
“예, 옛! 군사!”
“가라.”
“예!”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섬전처럼 움직인다. 다급함을 넘어 공포감마저 보이는 움직임. 조금이라도 늑장을 부렸다가는 자신들이 산채로 불길에 던져질 것이라는 위기감이 확연히 느껴졌다.
하지만 호가명은 이미 내린 명령에 대한 반응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 시선을 불타는 산에 고정했다.
전해져 온다.
여기까지 저 열기가 뻗어올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저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달아오르고, 심장이 뛰는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호가명은 더욱 냉정하게 자신을 억눌렀다.
무언가를 시작하는 데 필요한 건 용기와 열정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완성하는데 필요한 것은 냉철한 이성이다.
호가명은 그 원리에 충실했다. 제 피를 식히는 기분으로 이곳에서 벌어지는 움직임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화공이라⋯⋯.”
그런 호가명의 귓가에 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무겁게 내리누른 호가명의 목소리와는 달리, 한껏 비틀린 듯 제 감정을 숨기지 않는 목소리였다.
“고전적이로군.”
“고전적이라는 말은 곧 정석적이란 말입니다.”
“음?”
호가명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 정석이란 수도 없는 시행을 통해서 검증된 것을 말합니다.”
어쩌면 무례한 행동일 수도 있지만, 그는 지금 저 산에서 벌어지는 움직임에서 눈을 뗄 수 없다. 다행히도 지금 그에게 말을 건네는 이는 이런 사소한 무례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병법을 논하는 이들조차 때로는 그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흐음⋯⋯.”
호가명의 말을 들은 장일소가 옅은 비음을 흘렸다.
“효과적이라는 말이로구나. 그렇지?”
“불에 타면 죽는 건 무인이나 양민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혹여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버틸 수 있을 만한 내력을 가진 이가 무당에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 봐야 고작 몇몇을 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겠지.”
호가명의 눈이 조금 더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무인들이 불을 딱히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 불길이 번지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흐음.”
“하지만 그럴 수 없다면?”
“⋯⋯.”
호가명이 그 목소리에 확신을 담아 말했다.
“놈들의 처지는 불길에 둘러싸인 평범한 군과 다를 바가 없어질 것입니다. 그 뒤부터는 쉬운 일이지요.”
장일소가 쿡쿡하며 웃었다.
“그 발목을 잡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희생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희생을 감수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 순간 호가명이 고개를 돌려 장일소를 바라본다.
“아니면⋯⋯ 희생을 줄이는 걸 원하십니까?”
“쯧쯧. 성격이 나쁘구나.”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호가명을 보며 장일소가 피식 웃고 말았다.
정석이란 무섭다. 장일소는 그 말에 동의하는 편이었다.
그는 뻔한 수를 쓰기보다는 사람의 예측을 벗어나는 변수를 최대한 만들어 내는 수를 선호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잘 알고 있었다. 변수가 통하지 않는 우직한 수단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아마 지금 무당의 검수들이 그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저 어중이떠중이 같은 것들도 타죽어 나가겠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저놈들과 무당의 검수들을 교환하는 것만으로도 남는 장사니까.
“하지만 놈들이 발을 빼 버린다면 무의미하게 불만 지른 꼴이 되지 않겠니? 그럼 영 재미가 없는데 말이다.”
“놈들은 결코 발을 뺄 수 없습니다. 상황이 이리된 이상 더욱 그렇겠지요.”
“흐으으음?”
장일소가 재미있다는 듯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어째서?”
“저들이 족쇄에 붙들렸기 때문입니다.”
“족쇄?”
“예.”
호가명의 눈이 무당산의 위쪽으로 향한다.
우뚝 솟아 있는 천주봉. 무당의 전각들이 있는 곳으로.
“놈들은 자신들의 발을 묶고 있는 것이 저 불과 목숨을 돌보지 않고 공격하는 이들이라 여기겠지만, 실제로 족쇄가 되어 놈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은 그놈들이 그토록 자랑스러워 하는 ‘각오’입니다.”
“각오라⋯⋯.”
“놈들이 물러설 수 없는 이유는 이미 한 번 목숨을 걸고 싸우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지요.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법. 상황이 어려워졌다고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는 일은 저들에게는 어려운 일입니다.”
우스운 일이었다.
만약 호가명이나 장일소가 저런 상황에 처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단 한 순간의 고민도 없이 몸을 빼 버리겠지.’
굳이 적이 원하는 대로 해 줄 필요가 없다. 쓸데없는 희생을 치를 필요 같은 건 더더욱 없었다. 타오르는 불길을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과 몸을 돌리는 것이 거의 동시에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저들은 그러지 못한다.
이 차이. 그래, 이 차이가 정(正)과 사(邪)를 나눈다. 사파에게는 거름보다 못한 명분과 체면이 저들에게는 무겁디무거운 족쇄가 된다.
그가 진작 이 차이를 깨닫고 전략을 짜 왔다면 사패련은 지금보다 더욱 융성했을 것을. 지금까지 사파들만을 상대하느라 이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었다.
“하하핫.”
그 순간, 장일소가 낮게 웃었다.
“이런, 이런. 이리되면 내가 영 마뜩잖은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잖니.”
“⋯⋯.”
뼈 아픈 말이었다.
호가명도 장일소도 안다. 호가명이 어떻게 저들의 대응을 예측할 수 있게 되었는지.
모든 것이 한 사람 덕분이다.
명분과 원칙에 대한 집착. 지독한 실리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협의’를 이해하지 못했을 때 얼마나 혹독한 꼴을 당하게 되는지, 호가명은 단 한 사람 덕분에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불가해의 영역에 든 이를 이해하려 악을 쓰다 보니 저들의 머릿속 선택지를 대충이나마 예측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비싼 수업료를 치른 대가는 있구나.”
“저 역시 그리 생각합니다.”
한 사람을 떠올리며 짧게 들끓었던 호가명의 눈이 다시 냉정하게 가라앉는다.
“좋군.”
짤랑.
장일소의 손목에 채워진 패물들이 맑은 소리를 내며 울렸다.
“하지만 가명아. 저놈들이 그리 순순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텐데?”
“물론입니다.”
호가명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천주봉으로 향하는 중턱. 길게 이어진 새하얀 절벽.
불길은 태울 것이 있다면 모조리 태우며 나아가지만, 태울 것이 없을 때는 더는 전진하지 못한다. 조금이라도 머리가 있는 자라면 저 절벽을 점거하고 밀려오는 불길에 대항하려 들 것이다.
“하지만 바라던 바입니다.”
“바랐다고?”
그 순간 호가명의 입꼬리가 살짝 비틀렸다. 마치 장일소가 짓는 미소처럼.
“잡아 죽여야 할 놈들이 한곳에 모여 준다는데, 반갑지 않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호가명이 살짝 주먹을 쥐었다 편다.
상대는 무당이다.
과거에는 무려 무당이었겠지만, 지금의 호가명에게는 고작해야 무당이다.
세상을 뒤흔든 격전을 통해서 스스로를 단련한 것은 저들만이 아니다. 장일소도 그도 과거와는 다르다. 장강을 겪기 전의 그에게는 어려웠던 일이, 지금의 그에게는 너무도 수월하다.
요란하게 불을 질러 댔지만, 아직 그들이 대동한 사패련의 본대는 전장에 투입조차 되지 않은 상황. 적당한 무대를 만들고 이들을 투입한다면 무당 하나를 짓밟는 것은 어린아이 손목을 비트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변수가 있다면 오히려⋯⋯.
“다만⋯⋯.”
“알고 있단다.”
호가명이 말을 하기도 전에 장일소가 고개를 끄덕인다.
“놈들이 오고 있겠지.”
“예.”
“어떨 것 같으냐? 놈들이 지금 어디에 있을까?”
호가명이 살짝 마른침을 삼켰다.
무당을 농락하고 있는 호가명이지만, 그들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여전히 긴장되는 일이다. 특히나 ‘그’가 포함된 그들을 논한다는 것은.
이곳이 강남이라면 놈들의 움직임을 손에 잡힐 듯 알 수 있었겠지만, 이곳은 강북. 그들의 정보망이 작동하는 곳이 아니다. 적지에서 싸운다는 것은 그렇기에 위험했다.
정보가 없다면 남은 것은 예측과 원리뿐이었다.
“아직 충분히 가까이 오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니?”
장일소가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어 냈다.
과거라면 몰랐겠지만, 지금의 호가명은 저 미소의 의미를 안다. 그리고 그 미소에 대한 대답도 이미 준비해 두었다.
“예. 놈들이 생각이 있다면 이 상황 자체를 함정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무당이 미끼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당연히 언제 있을지 모를 습격을 우려하며 진격 속도를 늦추려 하겠지요. 자칫 서두르다 자신들이 습격을 당하게 된다면 원군을 오지 않은 것만 못한 결과가 나올 테니까요.”
“흐음. 그렇지, 당연히 그래야겠지.”
지극히 상식적인 예측이었다. 누구도 반론을 제시하지 못할 만큼.
“그러니 놈들은 아마 분명히⋯⋯.”
그 순간, 호가명의 시선이 서쪽으로 향한다. 그의 두 눈이 이전과는 비할 수 없을 만큼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이미 거의 지척에 도달해 있을 것입니다.”
“⋯⋯흐음?”
호가명의 두 눈이 섬뜩한 빛을 번뜩였다.
“제가 아는 매화검귀라면 절대 제가 예측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을 테니까요.”
원독과 경탄. 그리고 질시와 두려움.
그 모든 것이 휘감긴 눈빛이 서쪽으로 향한다. 지금 그들의 목을 겨누고 날아오고 있을, 아직은 보이지 않는 칼날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