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696화
으드드득.
천면수사가 이 갈아붙이는 소리가 섬뜩하게 새어 나왔다.
당장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지금 이 절벽에는 헤아리기도 힘들 만큼 많은 사패련도들이 있다. 그중에는 그가 이끌고 온 하오문도의 수도 적지 않다.
그러나 지금 천면수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신의 목숨이었다. 어차피 문도 따위야 시간만 있다면 얼마든지 다시 모을 수 있으니.
그럼에도 천면수사는 여전히 단 한 걸음도 못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발을 떼려 할 때마다 섬뜩한 살기가 온몸을 찔러 왔기 때문이다. 마치 경고하듯이.
천면수사는 그의 앞에 선 자. 아니, 그자의 손에 들린 비수를 노려보았다.
여인의 장신구로나 쓸 만한 저 작은 비수가 그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묶어 두고 있었다.
“네놈…….”
그는 다른 이도 아닌 천면수사다. 저런 장난감 같은 비도를 무서워할 인물이 아니다.
하지만 그 비도를 쥔 사람이 독왕 당군악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저자의 손에 쥐여 있는 날붙이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천하를 다 뒤져 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뭐 하자는 짓거리지?”
천면수사가 노기를 드러내며 따져 물었다.
그러자 당군악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나는 그쪽을 신뢰할 수 없어서 말일세.”
“…….”
“정말 도주를 할지, 수작질을 벌일지 확신할 수 없으니 여기에 묶어 두는 수밖에.”
으득.
천면수사가 이를 악물었다.
“내 목숨이 걸린 일이다!”
“안다. 그래서 더욱 놓아줄 수 없지. 목숨이 걸린 이상, 네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
“누가 그러더군. 변수는 없애 버리는 게 최선이라고.”
“저놈들이 빠져나갈 때까지 말인가?”
“그렇다네.”
“그럼 너도 죽을 텐데?”
“내가 죽음을 두려워할 사람으로 보이나?”
“죽음은 두렵지 않겠지. 하지만 개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법 아닌가?”
“생각이 다르군. 나는 개죽음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당군악이 차분하게 답했다. 그 눈빛은 잔물결 하나 없는 깊은 호수 같았다.
“화산의 안전 확보는 내 목숨을 걸 가치가 있는 일이지.”
천면수사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저 말이 그저 허세가 아님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나를 잡아 둔다고 저들의 활로가 열린단 보장은 없을 텐데? 고작해야 일말의 가능성이 미약하게 생기는 것뿐이겠지. 그따위 일에 귀한 목숨을 걸겠다는 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하의 독왕 당군악이?”
“일말의 가능성이라…….”
당군악이 슬쩍 눈만 돌렸다. 무당을 구출하려는 화산의 모습이 보였다. 이 와중에도 저들은 생존자들을 둘러업고 있다.
“그거면 족하지.”
“……미쳤군.”
“그럴지도.”
과거의 그였다면 뭐라 했을까. 길게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 지금의 천면수사와 똑같이 말했을 것이다.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당군악은 아니다.
어리석지 않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행할 수 있게 된 것뿐이다.
당군악은 저도 모르게 살짝 웃었다.
“친구를 잘못 사귄 대가겠지.”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당장 비키…….”
파아아앗!
벼락처럼 뻗어진 비도가 천면수사의 얼굴 바로 옆을 스쳤다.
천면수사가 눈을 치떴다. 허공을 빙글 돈 비도가 다시금 돌아와 당군악의 손에 내려앉았다.
그의 손에 들린 비도의 수는 어느새 둘로 늘어 있었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익…….”
“이제부터 경고는 없다, 천면수사.”
뿌드드득.
천면수사의 얼굴은 이제 체면 따위도 없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확실히…… 이해했다.”
늘어져 있던 천면수사의 손이 더 희고 창백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너를 죽이는 게 이곳에서 나가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걸.”
“할 수 있다면야 그렇겠지. 하지만 네가 그럴 수 있을까?”
“노오오옴!”
폭발적인 기세와 함께, 일순 천면수사의 육신이 수십으로 분열했다. 그 숱한 천면수사들이 일제히 당군악을 향해 쇄도했다.
콰각!
천면수사들이 당군악의 손에 들린 소도들과 거칠게 충돌했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당군악의 시선이 짧게나마 화산 쪽으로 향한다.
무진을 둘러업고 화산을 지휘하는 백천, 그리고 그를 보좌하는 다른 이들의 모습.
이상도 하지.
저곳에 청명은 없건만, 저들은 마치 청명이 있을 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달라진 건 없다. 이 위급한 상황에서도 말이다.
‘그저 단 한 걸음이다.’
협의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제 목숨이 위협받는 와중에도 쓰러진 이를 외면하지 않는 것. 잠깐의 위기, 조금의 손해를 감수할 의지. 쓰러진 이를 위해 단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용기가 바로 협의다.
당군악이 천 근 같은 무게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파아아앗!
이윽고 그의 소도가 백 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날카롭게 허공을 그었다.
* * *
“서둘러라!”
“예.”
콰각!
절벽에 손을 박아 넣은 태양궁의 궁도가 이를 악물며 몸을 끌어 올렸다.
슬쩍 내려다보니 까마득하다는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웠다. 그들이 사는 임읍에도 높은 산은 넘쳐나지만, 이런 절벽은 흔치 않았다.
그리고 사실 남해태양궁은 산과 거리가 먼 드넓은 평원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의 문파들은 괴이하게도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 높은 산에 자리를 잡고 있지만 말이다.
남해태양궁이 유별나서가 아니다. 애초에 수뇌가 왕족으로 구성된 문파다. 그런 곳이 인적 드문 산에 자리를 잡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왕족을 수행하는 궁도들 역시 이런 험준한 산에 발을 들일 일이 거의 없었다.
“엇!”
파삭!
움켜잡은 돌부리가 맥없이 부서져 버렸다. 휘청이며 흔들린 궁도가 기겁하며 절벽을 더듬어 가까스로 다시 잡을 곳을 찾아냈다. 겨우 손가락 한 마디나 걸칠 수 있을 작은 틈. 그 틈에 제 체중을 모조리 의지한 셈이다. 궁도의 온 얼굴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무학은 익숙하지 않은 일을 비교적 수월하게 해 줄 뿐, 능숙하게 만들어 주지는 못한다.
이 높은 절벽에 매달려 전진하는 건 숙련된 무인인 그들에게도 고역이었다. 특히나 가슴에 언제 터질지 모를 폭약을 품고 있는 상황에선 더더욱 그랬다.
‘어째서 이런…….’
궁도는 아랫입술을 꽉 짓깨물었다.
아니다. 의문을 가져서는 안 된다. 궁주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궁주의 명은 곧 왕의 명령. 거역한다면 제 목숨은 물론이고 가족과 친척의 목숨까지 내어놓아야 한다.
당장 목을 내어놓으라 해도 기쁜 마음으로 내놓는 것이 궁주를 수행하는 태양궁도가 온당히 지녀야 할 자세이다.
“서둘러라!”
“으!”
태양궁도가 다시 한번 손을 뻗어 절벽 면을 더듬었다. 도무지 잡을 곳이 없자 손가락에 내력을 밀어 넣어 손을 박아 넣었다.
“됐습니다!”
“시작해라!”
“예!”
콰가가각!
사전에 약속했던 위치에 도달하자 그들은 일제히 몸을 절벽에 붙인 채, 한 손으로 절벽을 뚫기 시작했다.
콰앙! 콰앙!
암석이 부서지는 소리가 절벽을 울렸다.
“깊이 파내라! 밖에서 터뜨려서는 한 번에 무너뜨릴 수 없다. 깊이 파내고 그 안에 폭약을 박아 넣어야 한다!”
“예!”
크게 대답하면서도 태양궁도는 저도 모르게 또다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몸을 맡길 밧줄 하나 없이, 까딱하면 수백 장 낭떠러지로 추락하게 될 절벽에 매달려 있다. 그 와중에 단단한 암석을 뚫기가 쉬울 리 없다.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는 시도조차 못 할 일이다.
하지만 명을 받은 이상, 몸은 충실히 그에 따랐다. 설령 결과가 제 죽음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콰앙! 콰앙!
열양기공을 잔뜩 품은 주먹이 절벽을 연이어 내리친다. 돌 파편이 무수히 튀며 얼굴을 때렸다. 목숨이 걸린 절박한 상황이기 때문일까. 매끈한 절벽에 금세 깊은 구멍이 만들어졌다.
살짝 고개를 드니 이 와중에도 절벽을 마저 기어오르겠다고 발버둥 치는 사패련 무리가 보였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어느 쪽이 더 멍청한 걸까?
이 일이 제 목숨을 앗아 갈지도 모르는데도 명을 따르겠다고 애를 쓰는 그 자신과, 제 운명이 어찌 될지도 모르고 악착같이 절벽을 기어오르는 멍청한 개미 떼 같은 저들.
둘 중 어느 쪽이 더 미련한가.
하지만 의문에 대한 해답은 의외의 곳에서 나왔다.
“아래! 아래에서 누군가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뭐? 아래?”
절벽을 파던 이들이 하나같이 놀라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그들은 보았다.
아래쪽. 역으로 경사진 가파르기 짝이 없는 절벽을, 새하얀 무언가가 타 오르고 있었다.
‘저게 뭐야?’
태양궁도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곳을 올라온다고? 지금?
‘알았을 게 아닌가?’
이미 한차례 폭발이 일어났다. 눈으로 직접 그 광경을 보지 못한 위쪽 놈들이야 상황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 절벽 아래에 있던 이들은 다르다.
상황이 어떤지를 뻔히 알면서 이 저승의 입구나 다름없는 절벽을 타고 오른다고? 제정신인가?
“저 멍청한!”
“빠, 빠릅니다! 곧 도달합니다!”
“비경(費煚)! 구계(歐季)! 수하들을 이끌고 저놈을 막아라!”
“예!”
절벽에 매달려 있던 이들 중 몇몇이 아래에서 솟구치는 이를 향해 쏘아졌다.
파파파팟!
절벽을 박차고 내려가는 그들의 육신에서 새빨간 기운이 용암처럼 솟구쳤다. 극성으로 끌어 올린 열양기공이 형체를 지니고 몸 주위를 휘도는 것이다.
절벽을 녹여 버릴 듯한 뜨거운 기파만 보아도 그들이 얼마나 잘 단련된 무인인지 알 수 있었다.
‘이토록 무모한 짓을 하는 놈이 있다니.’
아무래도 중원 놈들은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다. 이 상황에서 달아나기는커녕 절벽을 오르는 것도 미친 짓거리지만, 그게 혼자라는 사실이 더욱 어처구니없다.
혼자서 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머지는 신경 쓰지 말고 절벽을 뚫는 데 집중해라. 더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된다!”
“예!”
시선을 잠시 뺏겼던 태양궁도가 얼른 대답하며 박차를 가하려던 그 순간.
우우우우우웅!
아래에서 괴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거대한 무언가가 진동하는 것도 같고, 수천 마리 벌 떼가 동시에 날갯짓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귀를 잡아끄는 소음에 결국 태양궁도들은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잠깐 넋을 놓고 말았다.
남해태양궁의 이름을 무색하게 할 만큼 새하얀 태양이 어두운 절벽을 거짓말처럼 환하게 밝혀 내고 있었다.
‘뭐……?’
콰아아아아아아앙!
새하얀 기운이 일시에 터져 나갔다. 적을 막으러 나섰던 태양궁도들이 말 그대로 피떡이 되어 사방으로 튕겨 올랐다.
“……어?”
아래로 쏘아졌던 속도보다 몇 배는 빠르게 도로 튕겨 오른 이의 죽은 눈이 절벽에 매달려 있던 이와 마주쳤다.
이미 숨이 끊긴 육신이 마치 작별을 고하듯 솟아올랐다가 다시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광경에 모두의 등골에 소름이 내달렸다. 잠시 후, 모두가 이 말도 안 되는 검기를 뿜어낸 이를 바라보았다.
“오오오오오오!”
그는 범 같은 포효를 내지르며 빛나는 백색 검을 들고 쇄도해 왔다. 그 가공할 기세에 태양궁도들의 몸이 굳어졌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어째서 처음 보는 저자의 기세가 감히 그들을 움츠러들게 하는가? 오직 위대한 이들만을 모셔 오고 복종해 온 그들을?
우우우우우웅!
사내의 검이 다시 백색으로 빛났다.
태양과도 같다. 그 빛이 어둠에 잠긴 세상을 순식간에 밝게 비추었다.
‘제…왕……?’
사내의 검이 전력을 실은 채 허공을 힘있게 갈랐다.
콰아아아아!
제왕의 백색 검기가 절벽에 매달린 이들을 향해 거센 파도처럼 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