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1775화
1775화. 지금 누구라고 했습니까? (10)
청명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이러한 눈빛에도 천면수사는 더는 이전과 같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강하다.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듣던 만큼은 아니다. 그리고 확신컨대, 지금의 강함을 지속하지는 못할 것이다.
천면수사가 슬쩍 제 입술을 핥았다. 익숙한 입술과 덜렁대는 면구의 어색한 감촉이 동시에 혀끝을 스쳤다.
‘지원은…… 그리 오래지 않아 도착하겠지.’
이곳은 말 그대로 용담호혈. 지원이 도착한다면 아무리 천면수사 담여해라고 해도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기란 요원할 터다. 당장 발을 빼는 쪽이 현명하다.
이를 알면서도 천면수사는 고민했다.
천우맹의 지원이 도착하는 시점과, 검귀의 밑천이 드러나는 시점 중 어느 쪽이 더 빠르게 다가올 것인가.
이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을 터. 하지만.
“살다 보면 때로는…….”
천면수사의 양손에 새하얀 기운이 어리기 시작했다.
“도박을 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지!”
쾅!
천면수사가 땅을 강하게 박찼다.
콰아아아아아아아!
양손에서 뿜어져 나온 장영이 거친 눈 폭풍처럼 사방에 휘몰아쳤다. 북해의 삭풍이 불어오는 듯 사위가 삽시간에 희게 물들어 버렸다.
그극.
그토록 흰 세상 속에 홀로 검은 자가 있다.
늘어뜨려 두었던 검을 들어 올린 청명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그저 제게로 쏟아지는 장영의 눈보라를 마주했다.
창백한 낯빛과 대비되는 검은 눈동자. 그의 눈매가 이윽고 거칠게 일그러졌다.
위잉.
그의 검 끝이 파르르 떨린다 싶더니, 이내 수많은 꽃송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눈 속에서 매화가 피어나는 듯한 광경은 기이하고도 장엄했다.
천하에서 오직 두 사람만이 볼 수 있는, 둘만 보기에는 과히 웅대한 광경이었다.
파아아앗!
사방으로 뻗어 나간 매화잎들이 눈송이처럼 휘몰아치는 장영과 맞닥뜨렸다.
콰앙! 카가강!
동시에 폭음과 쇳소리가 겹치듯 터져 나왔다. 꽃잎과 눈송이의 충돌에서는 결코 날 수 없을 소음이었다.
거대한 쇳덩이가 우그러지는 소리 같기도 하고, 환상 속 거대한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 같기도 했다.
천면수사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괴물 같은……!’
천면수사가 일으키는 변화는 그 당사자도 제어하지 못한다.
그러나 저 매화검기는 천면수사가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날린 장영마저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받아치고 있다.
가슴속에 밀려드는 이 감정을 경악이라 해야 할지, 경외라 해야 할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자존심을 들먹이는 것조차 우스꽝스럽다. 권사로서의 그와, 검수로서의 매화검귀. 어느 쪽이 위에 서 있는지는 이 광경만 놓고 보아도 더 논할 가치가 없다.
숱한 강자를 지켜보고, 그 많은 경지를 견식 했던 천면수사에게도, 저 검수의 검은 설명할 길이 없을 만큼 드높았다.
하지만 되레 그렇기에.
“타아아아아압!”
천면수사는 내력을 있는 대로 끌어 올리며 장력을 내뿜었다.
저 검기는 분명 신기(神奇)에 가깝다. 그런 만큼 당연히 유지하는 데 막대한 심력과 내력이 소모될 터.
콰아아아아아!
휘몰아치던 눈보라가 쌓이고 쌓여 숫제 눈사태처럼 청명을 향해 쏟아졌다. 변화(變)에 변화를 겹쳐 쌓아 무거움(重)으로 승화(昇化)하는 경지.
천면수사 담여해. 사파제일수(邪派第一手)로 불리는 그의 명성에 부족함이 없는……. 아니, 외려 뛰어넘는 경지의 수공이었다.
콰아아아아!
아니나 다를까, 끝을 모르고 피어나던 붉은 꽃이 주춤한다. 한겨울 시리도록 차가운 설산에서도 생명을 잃지 않고 피어오른 설매가 내리고 또 내리는 눈의 무게는 끝내 이기지 못하고 이지러지듯.
피어오른 꽃송이들이 거듭 쌓인 장력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뭉그러지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압!”
천면수사의 입에서 쇳소리 같은 괴성이 터져 나왔다.
변과 환의 싸움으로는 승산이 없다. 그건 이미 확인했다. 그러나 내력과 내력의 싸움이라면 오히려 그가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 지금 그 가능성을 움켜잡은 것이다.
단전이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담여해는 입으로 피를 흘리면서도 꿋꿋하게 장력을 내뿜었다.
이는 천재일우의 기회다. 어쩌면 다시는 오지 않을, 단 한 번의 기회.
매화검귀 청명. 저 화산검협을 죽일 수만 있다면 전쟁의 무게 추는 팔 할 이상 사패련 쪽으로 실릴 것이다. 그러면 더없이 커다란 공을 세우는 셈…….
순간, 그의 손이 움찔했다.
‘그것’은 담여해가 주춤함과 동시에. 아니, 어쩌면 그보다 먼저 벌어졌다.
위잉.
눈사태를 힘겹게 막아 내던 매화잎들이 일순 자취를 감추었다. 마치 지금껏 담여해가 본 게 환상이기라도 한 것처럼.
담여해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막지 않는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작정이 아니라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끝내 정신이 나가 버리지 않고서야…….
“정 죽고 싶다면 원대로 해 주마!”
담여해가 마지막 남은 힘을 모조리 쥐어짜려던 순간이었다.
움찔.
전신에 소름이 내달렸다. 이는 지금껏 담여해가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본능의 경고였다. 생명력을 쥐어짜며 울려 퍼지는 영혼의 경고.
처음에는 그저 화선지에 떨어진 피 한 방울처럼 온통 하얀 세상 속에 작디작은 붉은 점이 하나 찍힌 것뿐이었다. 극히 미세한 변화였다.
하지만 그 붉은 점은 이내 천면수사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태로 화해 새하얀 장력을 덮쳤다.
콰아아아아아아!
급격한 탁류가 둑 위로 넘쳐 오르듯 치솟는다. 붉디붉은 기운이 그의 장력을 타 넘고 집어삼키며 밀려들었다. 고막을 터뜨릴 것 같은 굉음과 함께.
콰콰콰콰콰!
붉은 탁류가 거칠게 밀어닥쳤다. 이는 죽음의 또 다른 형태였다.
“으, 으아앗!”
무슨 수를 써도 저 급류를 막아 낼 수 없음을 직감한 천면수사가 전력을 다해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 순간.
천면수사는 보았다. 자신이 몸을 날린 방향에서 이미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검수를. 심혼을 얼려 버릴 것처럼 차가운 눈빛을.
파아앗!
천면수사가 단 한 걸음에 십여 장 뒤로 훌쩍 물러섰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그는 흔들리는 눈빛을 어쩌지 못하고 앞을 주시했다. 그리고 이내 저 멀리 홀로 선 이의 모습을 보는 순간, 절로 입이 벌어지며 격한 숨을 토하기 시작했다.
“허억, 허억…….”
턱이 열리고,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천면수사의 시선이 조금 아래로 향했다.
청명이 서 있는 곳보다 조금 앞쪽의 바닥에 작은 무언가가 떨어져 있다. 실로 익숙하면서도 지독하게 낯설었다.
“…….”
천면수사는 말없이 제 왼손을 들어 올렸다.
없다.
그의 수공을 늘상 든든히 받쳐 주던 좌수의 소지와 약지가 사라졌다. 손가락이 있어야 할 자리는 밑동부터 잘려 나가 뜨거운 피를 쏟고 있었다.
천면수사는 손을 지혈하는 대신, 피 흘리는 손으로 아랫배를 움켜잡았다.
주르륵.
갈라진 의복 사이로 피가 꿀렁꿀렁 새어 나오고 있었다. 손을 떼는 순간 배가 벌어지고 내장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찰나, 그 짧은 공방에 검으로 손가락 두 개를 자르고 아랫배마저 단숨에 갈라 버린 것이다.
두 치, 아니 한 치만 깊게 들어왔어도 그는 이미 저승 구경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너.”
천면수사가 경악한 표정으로 청명을 다시 바라보았다.
청명은 낯빛이 창백하게 질린 채 입으로 검게 죽은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천면수사는 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가 입은 상처는 아무리 심각해 보인다 해도 결국 살가죽이 갈라진 외상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저 매화검귀는 내상을 입고 죽은 피를 흘리고 있다.
어쩌면 이 순간도 유리한 쪽은 오히려 천면수사일지 모른다. 그의 부상이 가벼워서가 아니라, 저자의 내상이 심각한 수준이므로.
하지만…….
그 순간 청명이 입을 열었다.
“약해졌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겠지.”
“…….”
“하지만, 그래서?”
청명의 입꼬리에 희미한 비웃음이 어렸다. 검게 젖은 입술이 곡선을 그리며 휘는 모습은 천하의 천면수사도 섬뜩함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너 따위가 뭘 할 수 있다는 거냐?”
천면수사는 청명에게 달려들지 못했다.
어쩌면 청명의 저 말도 허세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금 천면수사가 가벼운 공격을 내지르는 것만으로도 내상 입은 매화 검귀의 숨통을 끊어 놓는 게 가능할 수도 있다.
그저 한 번, 장력을 내뿜는 것만으로도 말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감히 손을 뻗을 수 없었다. 공격은 고사하고 발을 앞으로 디딜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마치 눈앞에 칠흑 같은 명계의 강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천면수사의 턱 끝을 타고 굵은 땀방울이 흘렀다.
그가 곧장 몸을 돌려 달아나 버리지 않은 건, 상처 입을 대로 입은 자존심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확실히…… 그렇겠지.”
얼굴을 참혹하게 일그러뜨린 천면수사가 말했다.
“하지만, 어떨까? 너는 그럴지 모르지만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일까? 과연 약해진 네가 지금까지처럼 다른 놈들까지 지켜 낼 수 있을까?”
청명이 말없이 천면수사를 노려보았다. 천면수사 역시 오기 가득한 눈빛으로 청명을 마주 보았다.
“이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마. 그리고 모든 걸 잃은 네놈을 비웃으러 돌아올 것이다.”
잠시의 침묵 끝에.
파앗.
천면수사의 모습이 그대로 퍽 꺼지듯 사라졌다.
청명은 천면수사가 사라진 자리를 말없이 응시했다. 그리고 한참 동안 그곳을 바라보다 돌연 새우처럼 허리를 구부정하게 말았다.
“우욱.”
청명이 급하게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우웨에에에에에에엑!”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검은 피가 줄줄 쏟아졌다. 몇 번이고 피를 토해 낸 그가 검게 젖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가늘게 떨리고 있는 그 주먹 안에 실린 감정을 청명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었다.
오래도록 몸을 굽히고 있던 청명이 느리게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여명이 다가오지 않은, 어두운 밤하늘. 별들은 늘 그래 왔듯 어떠한 말도 해 주지 않는다.
그렇게 얼마나 서 있었을까.
“……뭐야.”
청명의 고개가 돌아갔다. 이 어둠과 고독을 뚫고 천천히 다가오는 한 사람에게로.
무심하던 청명의 눈에 점점 의혹이 피어났다.
“너……는?”
심연처럼 가라앉은 청명의 두 눈과 대비되는, 깊고 심유한 두 눈이 작게 빛나고 있었다.
“옴 마니 반메 훔.”
“…….”
“만나고 싶었습니다, 시주.”
경건하게 합장한 달뢰라마가 청명을 향해 작게 고개 숙였다.
* * *
백천의 눈이 갈 곳을 모르고 떨렸다.
“지금…… 지금 뭐라고…….”
숨이 가빠지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천 길 낭떠러지로 홀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지금 누구라고 했습니까?”
너희가 버린 점창의 장문인. 그리 말했던가?
“쿡쿡.”
자신을 진송원이라고 밝힌 이가 억눌린 웃음을 흘렸다.
“왜? 이제 와 죄책감이라도 드는 건가?”
“나는…….”
진송원이 살기 어린 눈빛으로 백천을 노려보았다.
“그게 아니면, 죽었어야 할 것들이 살아 나타나니 당황한 건가? 화산의 장문대리 백천?”
백천은 그만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이들이 밝힌 정체대로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그에게 쏟아 낸 증오도, 원망도.
하지만 그 전에 들어야 한다.
“말씀해 주십시오.”
“……뭐라고?”
“저는 들어야겠습니다.”
백천이 단호해진 태도로 진송원을 마주 보았다.
“점창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당신들이 이곳에 있는 건지, 모두 말입니다.”
모든 현실을 직면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