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02화 : 혈마천 대추격전
혈마천 대추격전
근래 마도련은 한 가지 일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예전
에는 곽주와 심여랑이 연 내를 헤집고 다니더니, 그들이 잠
잠해진 이후로는 다른 이가 그들을 대신하여 누비고 다녔다.
그나마 곽주는 어깆는 있었을지언정 사리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감찰이라는 제 직무에 대한 지나친 원리원칙으로 다른 사람들을 피
곤하게 했지만 지금 연 내를 뒤집어 놓는 자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
이것 저것 가리는 것이 없었고 그 행동 또한 감히 정상적인 사고로
예측한다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제멋대로였다. 그럼에도 아무도
제지하지 못했다. 그 주인공은 율극이었다.
파천이 사라지고 광마존 역시나 슬그머니 사라져 버리자 그를 통
제할 사람이 없어져 버린 셈이 되었다. 그나마 제갈초홍의 말은 비교
적 듣는 편이어서 그가 사람들을 이유 없이 살해하는 것만은 막을 수
있었다. 그에게 당한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다짜고짜 다가와서 패
는 것은 다반사였고, 만일 대항을 한다거나 도주를 할 경우 더 큰 손
해를 보게 된다. 그의 무공이라는 것이 워낙에 상식을 벗어나는 무지
막지한 것이다 보니 대항을 해보았자 소용이 없었고, 이래저래피해
만 속출했다.
율극의 행패가 도를 지나쳐 가자 결국 전전긍긍하던 마도련의 수
뇌부가 이 일 때문에 회의를 열기까지 이으렀는데, 어찌 알았는지 아
니면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대전에 쳐들어 와서는 그곳을 발칵 뒤집
어 놓았다. 간신히 제갈초홍이 앞을 가로막자 그 특유의 어색한 웃음
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이고 말았다. 그는 제갈초홍에게 ‘예쁜 누나’
라고 불렀다. 자기도 사내 놈인지라 본능적으로 미인을 알아보는 건
지 그녀 앞에서만은 발작을 하다가도 얌전해지곤 했다. 일이 이 지경
이고 보면 그녀의 하는 일이란 종일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혹시
라도 있을지 모를 행패를 사전에 방비하는 일이 되어 버렸고, 마도련
의 산적한 공무는 뒷전이 되어 버렸다. 이런 차에 그녀에게 날아 온
소식은 간만에 그녀의 얼굴을 활짝 펴게 만들었다.
그녀는 존마전에 모인 마도련의 수뇌들을 향해 대공의 명을 전했
다. 그것은 장사에 새로 생긴 회천문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은 회천
문을 좋지 않게 보고 있었는데 대공의 명은 ‘그들을 받아들이고 대
등한 관계에서 비밀리에 힘을 합하라’ 는 것이었다. 그들은 대공이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를 제갈초홍에게 집요하게 물어 왔지만 그녀
로서도 달리 둘러댈 말이 없었는지라 새외의 일을 조사하러 갔다고
만 했다. 사람들은 그녀의 말에 자연히 광마도 그 뒤를 쫓았다고 생
각하게 되었다.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 미리 갈 필요는 없지만 저 골칫덩이를 이곳
에 계속 둘 수도 없고……. 이것 어떡한다지?’
율극은 제갈초홍 앞에서 얌전하게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자신을
유심히 쳐다보는지도 느끼지 못하고 연신 차만 홀짝여댔다.
“더 줘.”
율극은 앞에 차 주전자가 놓여 있음에도 두 손으로 찻잔을 받쳐들
고 제갈초홍에게 내밀었다. 어떻게 보자니 천진난만한 아이의 모습
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가 언제 그렇게 무서운 인물이었던가,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하긴 그녀 자신도 한때 존마전에서의 공포를 맛보
긴 했지 않았던가. 여차했으면 그의 손에 죽임을 당할 뻔했던 기억이
떠오르자 언제 저 자가 발작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공포감 때문인지
자신도 모르게 온몸이 떨려 왔다.
“알았어요. 여기 있어요.”
그녀는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애써 웃음 지으며
차를 따라 주었다.
“헤, 예쁜 누나는 너무 예뻐.”
그에게 이런 말을 들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건만 그래도 그녀의 입
가에는 절로 미소가 배어 나왔다. 세상 천지에 예쁘다는 말을 듣고
얼굴을 찡그릴 여자가 있을까.
“내가 그렇게 예뻐요?”
“히, 세상에서 예쁜 누나가 제일 예쁘다.”
제갈초홍 역시 미모를 추켜세워 주는 말에 기분이 나쁠 리 없었
다. 비록 그 상대가 바보라 할지라도. 그녀는 눈앞에서 또다시 차를
마시는 데 전념하는 율극은 다시 한 번 자세히 쳐다보았다. 파천에
게서 율극에 대한 얘기를 들었기에 그의 운명이 기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북해빙궁의 후계자라 했던가? 전설의 빙궁의 후계자가 이 모양으
로 변하다니. 동생은 파란 눈을 지닌 이국의 여인이라 들었는데 이
자는 어찌 보면 중원인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이국인 같기도 하
니……. 혹시 중원의 피가 섞인 것은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지.’
이번에는 후루룩 단숨에 차를 마셔 버린 율극이 자리에서 벌떡 일
어선다. 그 모습에 놀란 제갈초홍 역시 따라 일어섰다.
“왜 그러죠?”
“이제 놀러 갈 시간이다. 나 놀다가 올게.”
그 말을 끝으로 순식간에 밖으로 사라져 가는 율극. 다급해진 제갈
초홍도 그를 쫓아 몸을 날렸다. 또다시 이곳 저곳에서 비명소리와 고
함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저 미친 놈이 또 발작이다. 모두 도망가.”
여기 저기 부산하게 도망 다니는 마도련의 고수들. 고양이가 쥐를
몰아 가듯 얼굴 가득 흥미로운 미소를 배어 문 율극이 킬킬거리며 그
들 뒤를 쫓고 있었다. 이따금씩 손을 흔들어 그들을 팬다. 원래가 죽
일 생각이 없어서인지 손에서 구음마장이 발동되지는 않았다. 그냥
쇠몽둥이 같은 두 팔을 휘둘러 두드려댈 뿐이었다. 이미 마도련 내에
그에게 대항하지 말라는 명령이 떨어져 있는지라 그들은 그저 도망
가거나 가만히 몇 대 맞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맞는다는 것
이 그리 쉽지만은 안았다. 고통은 둘째 치고라도 이러다 저 바보 놈
이 잘못 힘을 쓰기라도 한다면 바로 황천으로 떠나야 한다는 두려움
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안 돼요.”
막 한 사람을 패가던 율극의 동작이 멈추었다. 얼굴을 가리고 위를
빠끔히 쳐다보던 무사는 제갈초홍이 장내에 나타나자 안도의 한숨
을 내쉬었다. 율극이 소리가 들려 온 쪽으로 몸을 돌려세우며 제갈초
홍을 바라본다.
“예쁜 누나, 나랑 놀려고 왔구나.”
“네, 그래요. 그러니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하지 말아요.”
“응, 알았어.”
“어서 가요.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그녀가 율극의 손을 붙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율극은 그녀 몰래
한 발을 뒤로 쭉 내뻗었다.
“컥.”
안심하고 있다 얼굴을 얻어맞은 무사는 한쪽으로 처박혀 버렸다.
무방비 상태로 얻어맞았기에 그 고통은 더욱 컸다.
‘할 수 없다. 미리 이 자를 데리고 나서는 수밖에.’
그 날 오후 제갈초홍과 율극은 일단의 고수들을 데리고 마도련 총
단을 나섰다. 그가 밖으로 나간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생각보다 많은
인물들이 그들 일행을 배웅하려고 나왔다. 두 무리간에 희비가 엇갈
리는 순간이었다. 마도련 총단에 남아 있는 인물들에게서는 안심하
는 기색이 엿보였고 제갈초홍과 함께 밖으로 나서는 자들의 얼굴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표정 그대로였다. 어쩌면 그들이 완전히 사
라지고 나면 그 자리에 남은 자들의 입에서 만세 소리가 나올지도 몰
랐다.
온통 핏빛으로 물들어 있는 대전은 거대했다. 대전을 떠받들고 있
는 석주의 둘레만도 열 사람이 손을 맞잡아야만 겨우 닿을 정도로 거
대했으며 그런 석주가 대전 내에는 양쪽으로 무려 여든 개도 더 되었
다. 그곳에 수천 명이 넘을 듯한 인원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고개를 조아리고 바닥에 끓
어 엎드려 있었고 제일 앞에는 금으로 된 무면탈을 쓰고 있는 인물이
대전 내에서 유일하게 서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전면을 바라보았다. 앞으로는 수십 개나 넘는 계
단이 위쪽으로 경사지게 펼쳐져 있었는데 그 옆으로는 각기 하나씩
의 횃불이 춤을 추며 어둠을 몰아냈다. 단상의 벽면에는 거대한 악마
상이 세워져 있다. 뿔이 두 개가 달려 있고 그 뿔만큼이나 큰 이빨들
이 벌린 입 사이로 삐죽하니 튀어 나와 있었다. 손은 네 개가 되었는
데 그 하나 하나에는 인간으로 짐작되는 것들이 쥐어져 있었다. 그
중에는 찢어지고 갈라진 채 반쪽의 몸만 있는 것도 보였고 손 바깥쪽
으로 터져 나온 살점도 붙어 있었다. 그런가 하면 공포에 질린 채 고
통을 호소하는 인간의 모습도 있었다. 그 모두가 돌이라는 것이 안심
이 될 정도로 그 형태는 너무나 생생했다. 악마가 존재한다면 이런
곳에 있지 않을까 싶을 만큼 주변의 분위기가 음침했으며 공포스러
웠다.
악마상 앞에는 일장은 됨직한 석판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실오라
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아리따운 소녀가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가슴
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으로 봐서는 죽은 것은 아니었다. 이런 곳에
서 잠을 자고 있는 소녀라니…….
‘사형이 출관하면 이 땅은 그때부터 지옥을 경허마게 될 것이다.
혈마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사이자 지배자인 그 앞에서 중원은 견
디지 못한다. 인간의 몸으로서는 익힐 수 없다는 삼대마공을 완전히
대성했다면 과연 그 누가 있어 사형의 앞을 막겠는가. 사부님은 말씀
하셨다. 혈마천으로 봐서는 사형의 천재적인 자질과 오성은 얼마나
다행한 일이며, 중원의 입장에서는 불운이라고. 또한 사형의 악마적
인 성품은 혈마천조차도 파괴시킬지 모른다는 말씀도 하셨다. 난 사
형이 두렵다. 스스로 하늘을 발아래 두겠다고 말하는 자!’
그는 사형을 생각하며 두려움에 절로 몸을 떨어대었다. 금면탈을
쓰고 있는 자는 혈마천의 대총사였다. 그는 단상을 보며 처연한 표정
이 되었다.
‘미안하다, 소연. 너를 지켜 주고 싶지만 이미 너는 그들에게 선택
당했다. 나로서도…… 너를 지킬 수가 없겠구나. 후우, 네 오빠에게
는 뭐라고 해여 할지.’
그는 고개를 숙였다.
둥둥둥
거대한 철고가 대전 전체를 울렸다. 북소리는 멈추지 않고 이어졌
다. 내공으로 소리를 차단하지 않으면 고막이 터질 정도로 큰 소리였
다. 그 압력에 의해 심장의 박동마저 빨라지는 듯했다.
둥둥둥둥
멈추지 않을 것 같던 북 소리가 멈추었다. 계단 위 한쪽 면에서 일
단의 인물들이 장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인다. 그들의
얼굴에는 대총사와는 다른 탈이 하나씩 씌어져 정체를 가리고 있었
다. 악마탈의 주인들은 기다란 장포를 휘날리며 안으로 들어서는데
손에는 무엇인가가 들려져 있었다. 모두 총 일곱 명이었다.
‘악마를 숭상하는 자들. 저들이 사형에게로 온 뒤부터 사형은 변
했다.’
그들은 손에 들고 있는 것들을 석판 위에서 고요히 잠들어 있는 소
녀의 주위로 진열했다. 그들 중에 두 명은 단상 좌우에 있는 거대한
화로에 불을 붙인다.
펑
기름이 들어 있었던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불기둥이 치솟았다. 그
러자 계단 아래 바닥에 부복하고 있던 수천 명의 인물들의 입에서 괴
이한 소리들이 발해지기 시작했다.
“우우우우.”
기분 나쁜 소리였다.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 그를 불러내기
라도 하는 것처럼 묘한 기분이 들게 했다. 그 소리에 대총사의 몸은
다시 한 번 전율을 일으킨다.
‘썪었다. 이곳은 이제 예전의 혈마천이 아니다. 저들은 무인이 아
니라 광인이며, 이곳은 무림 문파가 아니라 사교 집단이 되었다. 세
상을 피로 적시는 것만이 최대의 목표인 자들. 빌어먹을, 그렇지만
내게는 이런 것들을 바꿀 만한 힘도 없고 용기도 없다.’
고함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석판 주위로 빙 둘러선 7인은 한 사람
씩 석판 앞으로 나섰다. 맨 첫 번째 인물의 손에는 조금은 크다 싶을
정도의 그릇이 들려 있었다. 그는 그것을 기울여 석판 위에 잠들어
있는 소녀의 몸에다 부었다.
‘역겨운 자들. 인간으로서 저런 짓을 하다니.’
뱃속에서 무엇인가가 끊임없이 꿈틀대는 듯했다. 금방이라도 토
할 것만 같았다. 악마탈의 인물이 붓는 것의 정체는 피였다. 아직은
붉은 것으로 보아 취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인간의 피를 짜내어 저런 짓을 하다니.’
동물의 피가 아닌 인간의 피. 그릇 안에는 사람의 머리도 보였다.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은 여인이었다. 그가 그릇 안의 피를 누워 있
는 소녀의 몸 곳곳에 빠짐없이 붓고 나자 또 한명의 악마탈이 나섰
다. 그는 손에 향을 들고 있었는데 하나씩 불을 붙이더니 어이없게도
소녀의 피부를 뚫고 향을 세우는 것이 아닌가. 총 여섯 개의 향을 꽂
은 곳은 대부분 치명적이지 않은 곳이었으며, 피부만을 살짝 뚫은 듯
했다.
이어 다음 사람은 인간의 뼛가루를 그녀 주위에 골고루 뿌렸다. 그
뼛가루 위에 불붙은 초를 빽빽하게 늘어 놓는다. 이어 피를 흠뻑 바
른 붓으로 종이에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도 아니고 그림도 아닌
기이한 문양을 새겨 넣더니 불을 붙여 태웠다. 이제 두 사람이 남았
을 뿐이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손을 쳐들었다. 그러자 몇몇 인물들
이 벌거벗은 소년 하나를 데리고 들어왔다. 소년은 공포에 질려 있었
는데 그럼에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악마탈의 인물은 작은 소도를 꺼
내어 그의 심장에 천천히 밀어 넣었다. 인간이기에 고통을 느끼는 건
당연했고, 소년의 얼굴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소년이 완전히 죽은 것을 확인한 후에야 소도를 뽑았다. 그는
피 묻은 소도를 마지막 악마탈의 주인에게 넘겨 주고는 죽어 버린 소
년을 불붙은 화로 속으로 집어던져 버렸다. 곧바로 살 타는 내음이
장내를 진동했다. 이어 이미 할 일을 다한 여섯 사람들은 석판 주위
로 일정한 각격으로 앉아서는 주문인지 노래인지 모를 소리들을 흘
려내기 시작했다. 마지막 인물의 손에는 소년의 생명을 뺏은 소도를,
또 한 손에는 작은 종을 들고 있었다.
뎅뎅
종소리와 함께 여섯 명의 주문은 더욱 고조되어 갔다. 그들은 멈추
지 않고 그 짓을 계속했다. 소도를 번쩍 치켜들고 다른 한 손에 있는
종을 흔들었다.
뎅
세 번째 종소리가 나자 계단 아래에 있던 수천 명의 입에서 더 이
상의 소리가 흘러 나오지 않았다. 이런 짓을 여러 번 해보았는지 익
숙한 모습들이었다. 그들은 고개를 들어 앞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눈
은 충혈되어 금방이라도 피를 쏟을 것만 같았다.
‘모두 미쳤다. 이런 곳에 몸을 담고 있는 게 저주스럽다. 소연아,
미안하다. 너를 지켜 주겠다고 약속했건만. 너를 지켜 주겠다
고…….’
그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으며 부르르 떨려 나왔다. 얼마나 힘주어
쥐었는지 손가락 끝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흘러 나왔다.
‘나는 무인이기 전에 사내다. 약속은…… 지켜야 한다. 빌어먹을,
어찌해야 하는가.’
그는 갈등했다. 자신으로서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미친 짓을 막을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처음으로 그는 사형에 대한 두려움이 가시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천천히 사방
을 둘러보았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 고향이었다. 거대한 석주
들을 쳐다보았다. 어이없게도 그곳에는 하나씩의 시체들이 걸려 있
었다. 거대한 대못에 의해 두 팔이 포개어져 석주에 박혀 있었다. 그
들 중에는 아직 죽지 않은 자들도 있었다. 그들의 몸을 타고 피가 흘
러 나왔다. 심장에 박혀 있는 소도에서도 피가 흘러 나왔다.
‘흐흐, 모두가 미쳤어. 어제까지 같은 동료였던 자들을 저렇게 만
들다니. 저놈들.’
그가 발작적으로 고개를 단상 위의 인물들에게로 향했다. 무면탈
의 뚫려 있는 눈 부위에서 불꽃이 일어나는 듯했다.
‘저놈들이 이 모든 일의 원흉들이다. 사형의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막아 버린 놈들.’
종을 치던 악마탈의 주인이 석판 앞으로 더욱 가까이 밀착했다. 이
어 소도를 하늘 높이 쳐들었다. 앉아 있던 여섯 명의 입에서 지금보
다 배나 더 큰 소리들이 흘러 나왔다.
[잘 들어라. 이대로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 놈들을 내가 죽이겠다.
너희들은 내가 움직이는 즉시 석주에 박힌 동료들의 고통을 덜어 주
어라.]
[주군, 뒷일을 어찍 마당하시려고…….]
[뒷일? 죽기밖에 더 하겠느냐? 너희들한테는 미안하다. 빠지고 싶
은 사람은 빠져도 좋다.]
[주군, 우리들의 운명은 주군의 것입니다.]
[주군을 따르겠습니다.]
여기저기서 한께번에 전음이 전해져 왔다. 그러고 보니 석주 주위
로 대전을 호위하듯 서 있는 인물들이 어둠 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의 숫자는 3백 명 정도였다. 그들은 천천히 자신이 있던 자리에
서 움직여 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혼대였다. 대총사 직속의 그들은
혈마천 내에서도 특별한 위치에 있는 자들이었다. 수많은 조직들이
혈마천 내에 있지만 그들이 투입되는 일이란 혈마천에서도 좀처럼 드물
었다. 대총사는 그들의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번쩍 치켜든
소도에 눈이 간 대총사는 급한 마음에 소리를 질렀다.
“멈춰라.”
악마탈의 주인은 치켜든 소도를 내리치다 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고개를 들린다. 바닥에 앉아 있던 나머지 인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이미 대총사는 그들 곁으로 다가와 있었고 빼어 든 검으로 제일
먼저 소도를 쥐고 있던 인물의 목을 뎅강 잘라 버렸다. 그러자 앉아
있던 자들이 분분히 일어섰다.
“네 놈이 감히…….”
“이런 짓을 하고도…….”
“천주가 아시면…….”
그들은 각기 무슨 말인가를 뱉어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들
은 하던 말을 끝내지 못했다. 빛이 번쩍, 하는 것 같더니 그들 여섯의
목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그들은 무공을 모르는 자들인 것 같았
다. 대총사가 목 없는 한 인물의 장포를 부욱 찢어 내는 것과 동시에
마혼대 3백 명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부는 석주에 매달려
고통 중에 죽어가던 자들을 일수에 죽여 주었고, 나머지는 대전을 가
로지르며 길을 뚫기 시작했다. 대총사는 장포로 소연이라 불린 소녀
의 나신을 가리고는 품에 안고 도약했다.
쉬익
이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계단 아래에 있던 혈마
천의 인물들은 설마하니 천주의 사제이자 혈마천 서열 제3위의 인
물이 이런 짓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처음에는 얼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마온대가 길을 뚤허 가자 저항하기 시
작했다.
“모두 길을 비켜라. 나는 너희들을 죽이고 싶지 않다. 난 아직 너희
들을 형제로 생각한다. 제발 비켜 주길 바란다.”
바닥에 내려선 대총사의 음성엔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그것을 느
꼈음인가 아니면 마혼대의 살수가 무서워서인가. 그들이 주춤주춤
물러서는가 했더니 금세 그들 가운데 길이 나버렸다. 그 사이로 대총
사와 마혼대 3백 명은 재빠르게 대전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웅성웅성
그들은 아직도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
았다. 천주가 없는 지금 최고의 명령권자가 배신을 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들도 대총사의 행동에 은연중 동의를 했기 때문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들은 혈마천을 벗어나기까지 한 번도 제지를 받지 않았다. 대전
의 상황을 모르는 다른 혈마천 인물들은 대총사가 보이자 인사까지
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대총사는 알고 있었다.
‘솔직히 여길 벗어난다고 해도 살아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혈마천
의 진정한 힘은 천주에게만 집중되어 있다. 천주 직속 예하 부대들이
움직이면 그때부터는 지옥이 열리는 것이다. 그들이 이 소식을 접하
고 추적을 시작하기까지는 두시진 정도 걸릴 것이다. 그 전에 최대한
멀리 달아나야 한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지?’
소림사 방장이자 무림맹의 부맹주인 지우대사는 자신의 사제이자
정도사령대 부령사인 풍운비룡 청운학과 함께 소림사로 돌아 왔다.
무림맹의 일을 제쳐 두고 갑자기 소림사로 돌아온 것이다. 청운학은
소림사로 돌아오는 내내 그것이 궁금했으나 특별히 물어 보지는 않
았다. 방장이 돌아오자 소림사 경내는 일순 긴장감에 휩싸이기 시작
했다. 무림맹에 남아 있는 소림사의 일부 승려들을 제외하고, 지자
항렬의 고승들과 그들에게는 사숙이 되는 법자 항렬의 유일한 고승
인 법문 스님까지 한 자리에 모였다. 청운학 역시 그 자리에 함께 배
석했다. 그들은 모두 말이 없었다. 소림사 최고의 배분자인 법문 스
님이 입을 다물고 있으니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법문은 전대 방장이자, 지우방장과 청운학에게는 사부가 되는 인
물이었다. 소림사 역사상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무공이 뛰어나
고 수행이 깊은 고승이었다.
잠룡대제와 개왕과는 어릴 적부터 친구이기도 한 그는 소림사로
출가한 이후 각고의 노력과 수행으로 지금과 같은 위치에 오른 인물
이었다. 원래는 어릴 때 개왕과 함께 개방도로 지냈던 적도 있는 특
이한 이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그의 승포는 개방도라
고 해도 의심하지 않을 만큼 누더기였다. 백발은 허리어림까지 내려
와 있었고 수염도 가슴을 뒤덮었다. 그의 입은 좀체 열릴 기미르 보
이지 않았다.
“사부님, 대체 무슨 일인지요?”
현 소림사 방장인 지우가 말을 꺼냈다. 청운학은 그 말에 사형 역
시나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의 시선은
자연 사부인 법문에게로 향했다.
법문은 지우의 물음에는 대답도 않고 청운학을 바라보며 입을 열
었다.
“운학아, 그 분을 만나 보니 어떠하더냐?”
‘그 분이라면?’
누구에 대해 묻는지를 깨달은 청운학은 공손히 대답했다.
“사숙조께서는 제가 처음 대하는 천고의 신인이셨습니다. 그 무공
의 고강함은 말할 것도 없고 처세하시는 거나 대세를 바라보는 눈 또
한 탁월하신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조직을 장악하고 통솔하는 능
력 또한 대단하신 듯했습니다.”
파천을 표현하는 데 있어 이것도 부족하다는 생각을 언뜻 했지만
그가 느낀 것은 솔직히 그것만은 아니었다. 가끔씩 터져 나오는 잔인
한 성품과 심계가 어찌 보면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 때
문에 아직 그는 파천에 대해서 단정적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렇지만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만큼 뛰어난 인물을 또다시 보기는 힘
들 것이란 생각 역시 하고 있었다.
“그렇더냐? 허허, 그런 분을 대했으니 우리 운학이도 눈이 많이 열
렸겠구나.”
“그렇습니다.”
청운학은 그 말을 하며 얼굴을 붉혔다. 따지고 보면 자신보다 어린
사람이 그 정도로 뛰어나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 때문이었다. 이것은
곧바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다가왔다.
“방장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신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엉뚱한 얘기만 늘어 놓은 사부를 보
며 지우는 공손히 대답을 해갔다.
“제가 보기엔 그 능력의 모자람은 없으나 심성이 정갈하지는 않은
것 같았습니다. 사숙조를 대하자면 가끔 패도적인 기질이 느껴지곤
했습니다.”
그는 비교적 파천에 대해 객관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 말
에 고개를 끄덕이던 법문은 잠시 다른 제자들을 바라본다. 그들 또한
아직 무슨 일 때문인지를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무림의 역사에서 그 동안 혈겁이 있어 온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
지. 거의 백 년에 한 번 꼴로 대대적인 난이 있어 온 게 사실이다. 내
가 너희들을 한자리에 급하게 불러모은 것은 소림사가 이 땅에 샹겨
난 이래 최대의 위기에 대해서 말하고자 함이다.”
조금은 큰 선방에 모여 있던 인물들은 이 순간의 놀람을 어찌 다스
려야 할지 몰라 얼굴을 굳히는가 하면 염주를 빠르게 굴리기도 하고
그도 아니면 불호를 연신 흘려내기도 했다.
“그 많은 혈난에 소림은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다. 크게든 적게든
혈난을 종식시키고 무림의 평화를 구현하는 데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미타불.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작게는 소림에 미칠
혈난이요, 크게는 전 무림과 중생들에게 미칠 혈날이다. 이미 오래
전에 달마조사께서는 이 일을 예견하신 적이 있지만 설마하니 현세
에 그 일이 벌어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사부님,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요?”
청운학은 뜬금없이 구름 잡는 소리를 해대는 사부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운학아, 소림에 가장 큰 비밀이 뭔지 아느냐?”
“비밀이라 하시면……. 그야 사부님께서 친우들을 만나시면 그때
마다 개고기를 드신다는 것이…….”
그가 말하다 사형인 지우가 눈치를 주자 급히 말문을 막아 버렸다.
“허허허, 그야 비밀이랄 것도 없지. 내가 일기로 개왕이 소문을 내
서 웬만한 무림 인사들은 모두 알고 있는 일이 아니더냐?”
“그렇…… 습니까?”
“소림 역사상 최고의 무공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최고의 무공이라면…… 소림72예 상의 무공 중에 하나겠지요. 그
도 아니면……. 아, 달마삼검이 있었군요.”
“달마삼검이라……. 그것이 어찌 소림의 최고 무공이라 하겠느냐.
사실 따지고 보면 소림72예 상의 무공은 모두 어느 것이 더 뛰어나
다 할 수 없지. 그것을 익히는 사람의 재질이나 완성도에 의해서 결
정이 날지언정 그 자체로서는 우열을 가리기가 쉽지가 않단다. 달마
삼검 역시나 뛰어나긴 하지만 최고라 부를 수는 없다.”
그때 지우가 끼어 들었다.
“혹시…… 불영륜(佛影輪)의 전설에 대해서 말씀하시려는 것은 아
닌지여?”
“허허, 잘 보았느니라.”
“불영륜이라 하시면, 바로 달마조사께서 말년에 창안하셨다는 그
무공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청운학이 놀라 부르짖었다.
“그렇단다. 그것 또한 비밀이라 할 수 없지. 소림에 불영륜이란 무
공이 있다는 것 또한 무림에 전설처럼 전해져 오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 대체 무어란 말인가? 그는 쉽게 입을 열 것 같지 않았다.
“소림의 역대 방장들은 죽기 전에 다음 대 방장에게 한 가지 전언
을 남길 의무를 지니고 있다. 노납 또한 불씨가 꺼지기 전에 그러려
고 했지. 그런데 상황이 바뀌였다”
“상황이라 하시면?”
“가장 큰 비밀이란……..”
그가 또 뜸을 들이기 시작하자 수행 깊은 노승들조차 그 궁금함에
침을 꿀꺽 삼켰다.
“불영륜은 마공이다.”
“…….”
“…….”
모두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공이 소림을 대표하는 최고의 무공이란 말인가? 달마조사께서
마공을 창안하셨다는 말이지 않은가? 어찌 그런 일이…….’
청운학은 도무지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가 않
았다. 혹시 사부께서 노망이 드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믿고 싶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전해져 오기로 불영륜은 선골(仙
骨)과 마신(魔身)을 동시에 지니지 않고서는 보지도 못하고 익히지도
못한다 하였다. 뿐만 아니라 무림의 마지막 혈난에만 나타난다고도
했지.”
“마지막 혈난이라니요? 어찌 마지막이 있을 수 있습니까? 무림이
존재하는 한 혈난은 계속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인간의 추악한 욕망
이 존재하는 한 혈난이 멈출 수 있습니까?”
청운학은 법문의 말에 강한 의문을 표시햇다. 그러자 법문도 동감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노납 역시 드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지 못하겠구나
네 말대로 중생의 욕망이 존재하는 한 무림에 혈난은 멈춤이 없겠지.
그럼에도 마지막 혈난이라 하신 이유가 있겠지. 그리고 또 하나는 그
불영륜이 나타나는 징조에 대한 얘기가 전해져 온다. 그런데 얼마 전
조사동을 들른 노납은 믿을 수 없는 일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바로
그 불영륜이 나타나기 전에 나타난다는 징조가 보인 것이다.”
그는 이어 한 시진 가량을 멈춤 없이 입을 열어 갔다. 때로는 조용
하게 때로는 격양된 목소리가 밖으로 흘러 나왔다.
이후 방 안에 있던 인물들이 모두 밖으로 나온 뒤에 소림은 또다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강에 도착한 파천과 정도사령대는 근처를 이 잡듯이 뒤져서 배
를 섭외했다. 5백 명이 한꺼번에 탈 만한 배라고는 몇 척 되지 않았
고, 있다면 상선이나 정기적으로 있는 대형 여객선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부분 예약이 되어 있거나 일정이 맞지 않아 애를 먹었다.
한 시진 정도를 부령사가 부하들을 동원해 근방을 알아 보고 있었지
만 마땅한 배가 없었다. 마침 그때 자신을 금와전장 소속 상선의 선
장이라고 밝힌 사람이 다가왔고, 부령사는 조금은 의외였는지라 망
설이다 그를 파천에게로 데려 갔다. 그의 말을 들은 파천은 속으로
의노가 보낸 사람이란 걸 알았지만 시침 뚝 떼고 비용을 부담하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최고급 배를 대절할 정도사령대 일행은 순탄한 여정
을 계속할 수 있었다. 아예 처음부터 말해 두기를 중간에 정박하지
않고 장사까지 가기로 했으므로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고 배에 실었
다. 이러는 데 필요한 시간을 지체한 것 빼고는 그다지 많은 시간을
빼앗기지는 않았다. 파천은, 선장의 말에 의하면 이 배의 최고 귀빈
실아란 곳에 묵게 되었다. 그의 말대로 푹신한 양탄자가 바닥에 깔려
있고 상아로 만든 침상까지 갖추어져 있는 고급 선실이었다. 파천은
참상에 드러누워 이것저것 생각에 잠겨 갔다. 한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되는 곳이 무림이라는 것은 이미 몸으로 체험한 바다.
‘내가 그려 가고 있는 그림은 어떤 형태일까?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다르겠지? 아직도 난 내가 갈 길이 명
확하게 어디로 이어져야 할지를 모르겠다. 무림 제패? 상여락의 말
처럼 그건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무림이란 세계 자체가 하나
의 조직이 지배하기란 너무 거대하고 억세다. 강호인들은 기본적으
로 강한 힘에 굴복당하기도 하지만 제도적인 지배에는 본능적으로
저항하기 마련이다.
강호의 정신은 자유로움이다. 나 또한 그것을 원해 강호인이 되었
지 않은가. 그런 내가 그들을 지배하려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가
않다. 지배가 아닌 군림이라면 모르지만. 존재는 하되 그들을 억압하
지 않는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절대적 힘이 존재한다면 그 힘은 분
쟁을 억제할 수 있고, 속이야 어떻든 평화를 유지하는 힘이 된다. 과
연 이것이 가능할까? 도처에 존재하는 암초와 그 뒤에 버티고 있는
거대한 힘. 그 실체마저 모호한 지금에 속단하기는 이르다. 아니 힘
들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나 혼자서라면 난, 시도조차 하지 않
앗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게는 친구들이 있다. 죽음마저 갈라 놓을
수 없는 피로 맺은 동지들이 있다. 그들이 있는 한 불가능한 망상만
은 아니리라.’
그는 몸을 뒤척였다.
“대령사, 접니다.”
“들어와라.”
그가 몸을 일으키자 부령사 곽운성이 문을 열고 들어선다. 파천 앞
에 선 곽운성은 그를 향해 공손하게 아뢰었다.
“맹에서 전서가 왔습니다.”
“무슨 소식인가?”
“간추려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소식은 북해에서 움직
임이 있다는 전갈입니다.”
“북해라고?”
“그렇습니다. 아마도 북해빙궁이 긴 잠에서 깨어난 듯합니다. 이
것은 개방에서부터 온 소식입니다.”
“으음, 그래? 드디어 그들도 중원으로 뛰쳐나왔군. 이제 사사혈교
와 신수궁만 남은 셈인가? 그리고?”
“네 또 한가지 소식은 맹에서 들어 온 소식입니다. 무림맹 산해관
지부에서 수상한 무리들을 포착했다는 소식입니다. 거기에 대한 내
용은 여기 있습니다.
급보
영원 일대에서 대혈투가 벌어진 것으로 압니다. 그쪽은 왕래하는
상인들에 의하면 그 일대에 수천 명에 달하는 무인들이 출몰하였
으며 그들과 사투를 벌이며 남진하고 있는 인물들은 수백 명 단위
라고 합니다. 곧 이곳 산해관에 도착할 듯싶습니다. 어찌 했으면
좋을지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무림맹 산해관지부장
짤막하지만 의미심장한 전언이었다. 파천은 곽운성을 쳐다보며
말했다.
“부령사.”
“네.”
“산해관 근처에 수천 명을 동원할 정도의 대 문파가 있는가?”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그래?”
파천의 두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이것 뭔가 수상한데. 그렇다면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찬황
부라면 달단 쪽이니 아닐 테고, 사황성이나 사사혈교도 청해나 서장,
천축 쪽이다. 신수궁은 알려지기에 남해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혈마천이란 말인가? 그런데 추격을 당하는 인물들은 누구
지? 하여튼 이것 흥미로운 소식인데? 하긴 속단할 것은 아니겠군. 천
황부가 거기까지 가지 말란 법도 없고, 무림에 알려져 있지 않은 신
비 세력일 수도 있으니.’
“부령사.”
“네.”
“즉시 전서를 날려서 그들을 예의 주시하고 그들의 행로를 두 시진
단위로 보고하라고 일러라. 그리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하간이
나 임제 등지의 병력을 순천부로 이동시켜 놓도록.”
“존명.”
곽운성은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사라졌다.
강상에서의 밤은 사람을 들뜨게 만든다. 출렁이는 강 물결을 따라
마음도 같이 뛰놀기 마련이다. 뱃전에는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사령
들이 우르르 나와서 이런 저런 얘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처음에는 마
도련의 권역인 장강에 배를 띄우고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긴장하던
그들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저 유람이라도
나온 사람들과 다름이 없어 보였다. 특히 여 사령들은 간만에 긴장에
서 풀려나 꿈에서나 맛볼 정취를 마음껏 느끼고 있는 듯했다.
여기저기 모여 앉거나 서 있는 사령들의 모습은 젊음 때문인지 더
빛나 보였다. 특히 남녀 사령들이 함께 모여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
었는데 어쩌면 이 밤에 새로운 사랑이 싹틀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하, 그래서 소제가 “만보문의 소문주요” 그랬더니 그 자의 얼굴
이 썩은 돼지간처럼 변하더니 살려달라고 싹싹 빌더군요. 어찌나 통
쾌하던지. 그때 비로소 처음으로 무문의 후예라는 걸 자랑스럽게 생
각했었습니다.”
남궁혁련은 연신 침을 튀기며 자신의 얘기를 늘어 놓는 만보문 소
문주 철장선협(鐵掌宣俠) 만귀현(萬貴賢)의 말에 귀를 열어 놓고 있다
‘풋’ 하고 웃고 말았다. 그들 주위로는 정도사령대의 핵심들이라 할
수 있는 인물들이 여럿 보이고 있었다. 물론 그들 대부분은 오련회나
구정련 핵심 문파들의 후예들이었다. 정도사령대 내에서도 이들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특히 오련회주의 아들인 남궁혁련은 부령사들
을 제외하고는 사령들의 우두머리 역할을 은연중 하고 있는 실정이
었다. 그러니 자연히 그 주위에는 항상 사람들이 들끓었다. 지금 겉
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그의 생각은 항시 사천으로 가 있었다. 오련회
소속의 후예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모두 그랬다. 이런 속사정도 헤아
리지 못하고 만귀현은 또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는 산동성 청주에 있는 만보문의 소문주로서 그쪽 지방에서야
그의 이름만 들어도 한 수 접어 주는 처지였지만 이곳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그렇지만 활달한 성격과 재치 있는 입담으로 금방 사령들과
친해질 수 있었는데 그는 그런 자신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해 오던 터
였다. 사실 그의 속마음은 남궁혁련의 두 여동생 중 막내인 남궁혜미
에게 쏠려 있었다. 앉으나 서나 자나 깨어 있으나 그의 생각은 항상
남궁혜미만으로 가득 차 있을 지경이었다. 이런 속내를 들키지 않고
혼자 속앓이를 하다, 그의 정성이 통했음인지 남궁혁련과 친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 요즘은 자연스럽게 그들과 어울리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하루는 저희 만보문에서 청주 일대의 명사들을 초청해 연회를 배
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마도의 전설적 고수라는 홍포마제(紅
布魔帝)가 본문을 방문한 겁니다. 스스로를 홍포마제라고 하니 그 생
김새나 풍기는 분위기가 그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더군요. 그래서 마
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들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잠깐만 홓포마제라면 혹시 회천문 99마 중 하나라는 그 자를
말하는 건가?”
“형님도 참. 그 말고 또 누가 홍포마제라고 스스로를 칭하겠습니
까?”
“으음.”
“흠, 그렇군.”
여기저기서 놀람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는 더 신이 나서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옛날이라면 임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회
천문에 그가 버젓이 버티고 있으닉 그가 만보문에 갔었는지 아닌지
는 모르나 일단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철혈권 팽정후는 그의 어깨를
탁 치며 그를 재촉했다.
“현제, 빨리 다음 얘기로 넘어가게. 이거야 원 궁금해서.”
“하하, 형님도 참. 그래서 제가 앞으로 나서서…….”
이 대목에 가서는 모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만다. 그렇지만 그
는 개의치 않았다.
“본문에는 어떻게 오시게 되었느냐고 물었지요. 물론 정중하게 물
었습니다. 제가 아무리 실력이 출중하다고 할지라도 홍포마제는 솔
직히 제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명성을 떨치던 자이지 않습니까?”
“허, 이 사람 참. 사설은 빼고 본론만 얘기하라니까.”
당정우까지 재촉하고 나섰다.
“흐흠, 그랬더니 홍포마제 왈 ‘내가 산중 은거를 깨고 몇십 년 만에
세상에 나왔는데 사람 구경해 본적이 오래라 반가운 마음에 찾아 왔
으며, 또한 이곳에서 연회가 열린다기에 배나 채울까 하고 왔다’ 라
고 그로지 않겠습니까?”
“에이, 아무려면 홍포마제가 그랬을까?”
팽정후가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짓자 만귀현은 두 손을 흔들어 가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제가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좋아, 그랬다 치고. 그 다음은?”
얘기의 맥을 끊어 놓는 팽정후를 모두 곱지 않은 시선으로 쳐다본
다. 팽정후도 그것을 느꼈음인가 얼른 입을 다물어 버렸다. 좌중의
분위기가 자기 쪽으로 완전히 몰입되어 있음을 확신하게 된 만귀현
은 이때구나 싶어 더 열을 올렸다.
“그래서 제가 고개를 숙이며 어서 오십시오, 선배님, 그랬더니 그
자가 크게 껄껄걸 웃으며 ‘세상에 귀한 것이 있으니 진인(眞人)이 귀
하고 그 진인을 알아 보는 사람이 귀하다’ 라고 그러더군요. 그의 말
이 무슨 뜻인지를 알게 된 나는 그를 정중하게 안내하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지요. 그는 연회장으로 들어가며 수십 명의 인물들이
모여 있음에도 하나도 기가 죽지 않은 채 큰 소리로 이르기를 ‘나는
먹고 즐기는 것을 탐하지는 않지만 오늘 연회가 있다 하여 왔으니 나
는 개의치 말고 당신들 즐기던 대로 하라. 그러나 내게 좋지 않은 마
음을 품고 행여나 귀찮게 한다면 반드시 피를 보게 될 것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솔직히 그 자의 옆에 서 있는데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
로 강한 기운을 뿜어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소제의 무공이 지금에
비하면 형편없었는지라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때 벌어졌지요.”
그는 숨이 찬지 목이 마른지 옆에 있는 물잔을 들어 빠르게 마셨
다. 사령들은 조바심을 내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사람이 이르기를 ‘천하에 내가 두려운 것이 없지만 두 가지 두
려워하는 것이 있으니, 그 하나는 발가벗은 여인이며 또 하나는 믿을
수 없는 친구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 자가 외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가 싶었더니, 아 글쎄 갑자기 잔칫상 위로 뛰어 올라가 술에 취
해 엎어져 있는 자를 공격해 가는 겁니다. 그런데 웬 걸요, 조금 전까
지 정신이 혼미하여 술에 취하여 있는 줄 알았던 취객이 벌떡 일어나
산을 무너뜨릴 만한 공력을 손으로 내뿜는 겁니다. 저도 놀라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놀랐죠.
두 사람은 처음에는 비등하게 싸우는 듯했으나 금세 홍포마제의
손이 우위를 점하기 시작하며 취객의 손이 어지러워져 갔죠.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홍포마제는 호랑이가 울부짖는 듯한 소리
를 발하며 상대를 제압했고, 순식간에 손이 검날이 되어 상대의 목을
치는 겁니다. 그는 취객의 머리를 한 손에 움켜쥐고는 ‘이제 내가 복
수를 하였으니 세상에 원이 없구나. 당신들의 즐거움을 잠시 뺏어서
미안하다. 그대들은 연회를 계속하라’ 그리고는 밖으로 사라져 가는
겁니다. 내 옆을 지나치며 그가 말하기를 ‘소 형제에게 내 충고를 하
나 하는데 앞으로 친구를 가려서 사귀어라’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또다시 참지 못하고 팽정후가 다그쳤다. 만귀현은 그런 그를 물끄
러미 보며.
“그래서는요? 그게 끝이죠.”
“뭐?”
“우하하하.”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몇몇은 허탈한 웃음을 짓고 있었
는데 그 중에는 남궁아연도 끼어 있었다. 그때 또다시 만귀현이 입을
열었다.
“그때 제가 두 가지를 느꼈죠. 그의 말대로 친구는 가려 사귀어야
겠다는 것 한 가지와 천하의 마인이라 알려진 그 자에게도 알고 보면
그만의 사연이 있고 그런 자에게도 배울 점이 있더란 겁니다.”
“배울 점? 그게 뭔데? 살인을 잘 하는 것?”
“에이 형님도. 그게 뭐 배울 점인가요? 그자가 비록 천하에 마인이
라 지탄을 받지만 원수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분할 줄 알더란 거죠.
만약 그가 기분대로 마음껏 살인을 자행했더라면 그 중에 누가 있어
그의 손속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 이후로부터 전 결코 세상의
소문대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짝짝짝
갑자기 들려 온 박수소리에 모두 고개를 돌린다. 그곳에 달빛을 받
고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대령사님을 뵙습니다.”
파천이었다.
“만귀현.”
“조, 존명.”
그는 대령사가 자신의 얘기를 듣고 있었는지는 생각도 못하고 있
었던지라 황송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말을 더듬고 말았다.
“그대의 말에 내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말인데…….”
그가 물끝을 흐리자 모두의 얼굴에는 의문이 떠오른다.
“부령사.”
“부르셨습니까?”
“이곳에 술이 있을 것이야. 최소한의 경비 인원만 제외하고 오늘
은 마음껏 먹고 취하도록 조치해라.”
“대령사, 이곳은 적의 소굴인데 어찌하여…….”
“오늘은 내가 자네들을 지킬 테니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그 말에 모두의 얼굴에 감격이 떠올랐다. 파천의 시선이 남궁혁련
등에게 머물렀다.
“남궁혁련.”
“네, 대령사.”
“걱정이 많겠지. 그러나 너무 염려하지 마라. 어려움은 있을지언
정 결코 최악의 상황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말은 남궁혁련 등 오련회 후예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위로의
말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감격과 더불어 충정의 뜻이 깊게 새겨져
갔다.
‘대령사…….’
남궁혁련은 객점에서 처음 그를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와는
하늘과 땅처럼 처지가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
히 믿음과 존경이 더불어 우러나고 있었다. 그의 고개가 더욱 깊숙이
숙여졌다. 선실로 사라져 가는 대령사의 등으로 달빛에 묻어 사령들
의 신뢰도 함께 쏟아졌다.
“그들이 순천부 우측 백 리 지점을 통과했단 보고입니다.”
“여전히 그 숫자 그대로인가? 추격자들은?”
“추격은 여전하며 쫓기는 자들의 숫자가 2백이 채 안 된다고 합니
다.”
“흐음, 2백이라. 백 여명 이상이 죽었단 말이군. 그래도 대단하군.
쫓는 자들의 숫자가 그리 많음에도 그 정도의 숫자를 유지하며 그리
빨리 내려올 수 있다는 것이 말이야.”
다음날이었다. 강을 바라보며 조용히 뇌까리는 그를 향해 부령사
곽운성은 이런 말을 했다.
“조금만 더 가면 하간입니다. 이제는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그들이 아무런 통지도 없이 내륙까지 침해한 것을 보면 우리를 조금
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자들입니다.”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들의 숫자가 그 정도라면 하간과 임제, 순
천부의 인원이 총동원되어도 모자랄 듯한데. 그리고 만에 하나 그들
이 절정 고수급의 인물들이라면 지부에 있는 수하들의 실력으로야
당해내겠는가? 차라리 그냥 방관하라고 전해라. 어차피 그들 역시
물림맹 지부를 그냥 지나치는 것을 보면 괜히 건드려 봐야 득이 없
어.”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쫓기는 자들이 목표로 하는 곳은 어디인가? 설마하니 무림맹이란
말인가?’
“이런, 이게 무슨 말이냐? 대체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 사형이
왜?”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사장들의 목을 잘라 죽이고는 제물로
선택된 소녀를 데리고 도주중이라 합니다.”
“마혼대는, 마혼대는?”
상여락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자신의 필생의 천적이
라고까지 생각해 오던 사형이었던지라 이럴 때 기뻐해야겠지만 결
코 그런 마음은 들지가 않았다. 마치 사형의 어려움이 자신에게도 느
껴지는 듯했다.
“마혼대도 함께 도주중이라 합니다. 그 뒤를 천주의 직속 부대가
쫓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지금 어디까지 오고 있다고 했느냐?”
“하간을 막 지났다는 보고입니다.”
“하간을 지나? 그렇다면 계속 남진했다는 말인데. 대체 사형은 무
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저지른 건가? 그리고 어디로 갈 셈이지?”
“총사, 대제사장의 명령에 의하면…….”
“집어치워라. 그 냄새나는 늙은이 따위가 내게 명령을 내릴 수 있
단 말이냐?”
하긴 그랬다. 서열상으로 따져도 그들은 결코 누가 누구의 아래라
고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 너 조금 전에 나보고 뭐라고 그랬지?”
“네? 총사라고…….”
“너, 이 재수 없는 자식.”
와락
상여락은 전갈을 갖고 온 자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자신
의 얼굴로 바짝 끌어 당겼다.
“잘 들어라. 그가 배신을 했건 누굴 죽였건 간에 아직은 내가 사형
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니 내게 이총사라 불러라. 무슨 소리인지
알겠느냐, 빌어먹을.”
잡고 있던 멱살을 놓아 주자 상대는 사색이 되어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부리나케 내실에서 빠져 나갔다.
“온통 썩어 버렸다. 멍청한 작자들. 무슨 일을 이따위로 하는 거
야?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형이 없는 혈마천은 생각할 수도 없
다.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사형과는 또 다르다. 제길, 대사형은 대
체 뭐 하느라고 아직도 나오지 않는 거지? 설마하니 그 늙은 작자들
이 혈마천을 온통 말아먹을 때까지 기라릴 셈인가? 이놈들, 이 빛은
꼭 갚아 주마.”
잡고 있던 탁자의 한쪽 모서리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의 이
런 반응은 자신들의 영역을 침해당한 야수의 분노였다. 사형제간에
치고 받고 암투를 벌이느 것은 어디까지나 같은 식구끼리의 문제
였다. 상여락은 자신의 사형과 마찬가지로 대제사장 이하 제사장
을 병적으로 싫어했으며 마주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며 싸우기 일
쑤였다.
“사형, 이대로 죽으면 내가 용서하지 않는다. 날 제외하고는 아무
도 사형을 나락으로 밀어 넣지 못한다. 그런 놈들에게 당한다면 용서
하지 않을 테다.”
그의 분노는 대단한 것이었다.
마도련에도 이 소식은 전해졌다. 비록 자세하지는 않지만 그들 또
한 정보통은 있었기 때문이다. 마도련의 수뇌부들은 이 일을 별로 대
수롭게 여기지 않은 눈치였다. 그들과는 지리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
져 있었고, 전혀 연관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심은 온통 내일
로 다가온 회천문의 개파대전에 쏠려 있었다. 그러나 마도련 인물
들 중 두사람만은 태도가 달랐다.
한당은 처음 그 소식을 접했을 때 처음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
을, 그 다음엔 기쁨을, 나중엔 초조감으로 물들어 갔다. 그는 결국 자
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대총사, 당신의 용기에 경의를 표하오. 당신은 진정한 사내요.”
한당의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그대가 날 위해 용기를 내줬으니 이제는 내가 그대를 위해 힘을
쓰리다.”
그는 사제들과 사매를 불렀다. 그들은 얘기를 듣는 내내 놀란 표정
을 지우지 못했다.
“도와 줄 수 있는가?”
“사형, 염려 마십시오. 소제의 생명이 남아 있는 한은 당연히 도와
야지요.”
“사형은 당연한 말씀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십니까?”
“그럼 사형은 우리가 그런 일을 당하면 모름 척하시겠어요?
네 사람은 손을 굳게 맞잡았다.
“고맙다, 진정 고맙다. 내 너희들의 마음은 평생 잊지 않으마.”
그의 눈에 언뜻 눈물이 보인 것도 같았다. 철혈의 피를 지닌 듯 모
든 일에 냉정하기만 했던 한당에게서 이런 모습은 진정 의외였다.
또 한 사람 여기 격동을 감추지 못하는 인물이 있었다. 연약한 손
을 지닌 이는 여인이라는 존재였다. 제갈초홍은 비교적 늦게 이 소식
을 접하게 되었다. 서찰을 말아 쥐는 손길을 떨리고 있었다.
“정황으로 봐서는 사부님이다. 내게 유일하게 인간적으로 대했던
인물. 무공을 가르쳐 주고 삶의 의미를 가르쳐 주었던……. 당신이
왜 이런 선택을 하신 거죠?”
그녀는 머리를 짚었다. 그녀는 지금 율극 때문에 일찍 마도련 밖으
로 나와 있었다. 그녀는 아직 그 깊은 속사정은 모르고 있었다. 왜 그
가 이런 선택을 했는지는 더더군다나 짚이는 바가 없었다.
“휴우, 어찌해야 하는가? 그 분의 어려움을 모른 척해야 하는가?
그렇다고 내게 무슨 힘이 있다고……. 그렇다, 이것을 지존께 알리
자. 그 방법이 최선이다.”
제갈초홍의 이런 결정은 여러 사람의 운명을 바꿀 만한 영향력이
있었다. 적어도 그가 관계하는 사람 때문에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