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18화 : 광명의 검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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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검 – 118화 : 광명의 검을 찾아서


광명의 검을 찾아서

우주에 생명이 존재하던 첫 시기를 기억해내는 영자들은 단 하나도 없다. 무수한 생을 살아가며 그들의 기억은 고스란히 남겨져 있지만 일정 주기를 거쳐 완전히 새롭게 거듭나게 되고, 그때까지의 기억은 전혀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기 마련이었다.
보통의 영자들 경우를 예로 들면 영체가 자연소멸하는 시기는 대체로 2천 년에서 5천 년 사이에 이루어진다. 이를 영자들은 죽음이라 칭한다. 죽으면 순수한 영의 상태로 돌아가게 되고 이러한 영혼들은 한곳으로 모이게 되는데, 무한계의 금역이라 불리는 ‘메테우스의 강’너머에 있다고 알려져 있다.
새로운 영체를 입은 영자들이 메테우스의 강을 건너 무한계로 들어서기에 다들 이렇게 추정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자연소멸과 새로운 영체를 입는 시점 사이의 기억은 그 누구에게서도 찾아 볼 수 없다.
반복은 권태를 낳는다.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기억으로 생의 반복에 염증을 느낄 때쯤 다행인지 불행인지 완전소멸에 가까운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이다. 이를 두고 영혼과 기억에 대한 서로 상이한 입장이 나타나게 된다.
매우 오래 전, 현자 페소와 아함은 자그마치 5천 년이 넘도록 논쟁을 벌였지만 결말은 나지 않았다. 페소는 기억만이 소멸한다고 주장한데 반해 아함은 영혼까지 소멸한다고 말했다.
시간이 지나며 아함의 영혼소멸론은 점차로 설득력을 잃어 갔다. 기억의 부침이 거듭되다 결국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는 시점 이후의 완전소멸 단계에서 놀랍게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새로운 존재들이 나타난 것이 그 첫 번째 이유였다.
영계 역사상 그 경지에 이른 이는 꽤 된다. 더 이상의 기억소멸을 겪지 않아도 되는 불사의 존재들ㅇ느 과거나 현재에 영계로 절대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 다음에는 천상계의 천주들과 선계 8선의 증언이 결정적이었다.
그들 역시나 최초의 시간에 대한 기억은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서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스스로의 영혼이 단일하게 존재하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했다. 이들 역시나 특별한 생의 기회를 제외하고는 기억소멸을 모면한 불사의 존재들이었다.
이런 그들이 직감적으로나마 그걸 느끼고 있다는 사실에 영자들은 주목하기 시작했고, 결국 영혼은 결단코 소멸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일단락된다. 어쨌든 일반 영자들의 경우에 그들이 새로운 영체를 입을 때마다 남겨지는 기억은 점차로 희미해져 가다 결국엔 완전하게 소멸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 주기에 있어서도 특정적인 구별을 적용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했다.
이런 반복이 지겨워서일까? 아니면 별 의미가 없다고 여긴 것일까? 어느 때부터인가 영자들의 관심이 완전자에서 멀어져 가기 시작했다. 그나마 가장 충실하게 그 길을 걸어가는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곧 천상계와 선계다.
까마득한 예전에는 천상계가 다른 차원계를 지배했던 적이 있었다. 영자들 중 고급한 수준에 오른 자들이 천상계에 들었고, 이들은 전체에 비하면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들은 다른 영자들의 스승이었으며 지도자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들은 집단을 형성해 스스로를 천상천이라 부르며 모든 이들 위에 군림했다.
처음 하나의 하늘에 불과했던 천상천은 점차로 세분화되어 서른세개로 확대되었고, 아라한의 수도 대폭 늘어났다. 이럴 즈음에 조금은 특별한 인물이 새롭게 부상했으니 그의 이름은 메테우스였다.
메테우스는 당시의 천상천에서도 가장 지혜롭고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의 영도력은 탁월해 천상천의 천주를 불안케 했다. 메테우스는 새롭게 분리되어 나가는 세력들을 그다지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는 ‘분쟁의 씻앗들이 발아하고 있구나. 멀지 않은 장래에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쳐 온 하늘을 뒤덮을 날이 올 것이다. 자유가 없는 곳에 내가 더 이상 머물러 무엇하리요.’라고 말하며 새롭게 차원을 개척해 나가니, 그것이 곧 무한계의 시작이었다.
당시의 무한계는 모든 영자들이 바라는 이상향이었다. 메테우스는 그들을 속박하지도 특별한 가르침으로 이끌지도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무한계 너머의 범접할 수 없는 세계에 머물러 있었다.
죽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비밀지대를 향해 집요하게 열려 있던 그의 집착은 결국 살아 그 강을 건너가게끔 만들어 버린다. 그 이후로 메테우스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등장이 영계에 미친 영향은 참으로 지대했다. 그 하나는 물론 무한계로의 확장이었고, 그 다음은 자유에 대한 개념이 영자들 사이에서 확연하게 자리 잡아 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에 가서 ‘무타질라’라고 불리는 새로운 성향의 영자들을 만들기에 이른다.
‘중도자’ 또는 ‘새로운 길을 걷는 자’ 라는 의미가 말해 주듯 이들은 자유의 신봉자였으며, 기존의 질서에는 아랑곳없이 스스로의 수련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특별한 성향의 영자였다. 지금에 와서 이들의 신분은 영계 내 가장 주목할 만한 위치로 간주되기에 이른다.
출신은 제각각이지만 그 어느 곳에도 소속됨 없이 자유롭게 세상을 떠돌며 수련에만 전념하는 그들. 그렇기에 모든 이들에게 때로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수련자들의 성지인 메덴은 메테우스의 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메테우스가 강을 건너기 전까지 머물렀던 땅으로 , 지금까지도 상당수의 수련자들이 머무는 성스런 대지이기도 했다. 천상계의 아라한도, 선계의 선인들도 아난다를 특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어떤 영자도 스스로 수련자로 자처하지는 못한다. 수련자는 메덴의 서지에서 받아들여져야만 가능하고 다른 수련자들에게 인정받아야만 한다. 아난다는 무타질라의 정통 맥을 이은 수련자였다. 그를 바라보는 다른 이들의 눈에서는 감출 수 없는 감탄의 기색이 역력했다.
부드러운 미소와 겸손한 어투. 한때는 천상계의 상좌 아라한이기도 했던 그였기에 천상계에서 파견 나온 아라한들의 태도는 더욱 조심스러워 보였다.
지금 석실엔 아난다와 너울, 각시를 포함하여 총 열두 명이 원탁에 둘러 앉아 있다. 각시의 설명이 좌중을 떠돌고 있는 내내 모두의 시선은 아난다에게만 머물러 있었다. 그리 흔하게 볼 수 없는 수련자에 대한 관심은 외부 세계로 잘 나오지 않는 아라한들이 더했다.
아난다가 조용한 어조로 각시의 말을 이었다.
“파천 님의 출관이 있은 연후에야 우리들의 여행은 시작될 것입니다. 모두들 떠나오시면서 들으셨겠지만 이번 일에는 따르는 위험이 큽니다. 그만큼 보람도 크겠지만 우리에게 돌아올 대가는 그것뿐입니다.
명예를 위해 나서신다면 실망할 것이요, 힘을 얻고자 한다면 낭패를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오직 한 가지 일념이 아니면 견디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됩니다. 순수한 열정이 아니면 참기 힘들겠지요.
아무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일행에서 빠질 의사가 있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 누구도 비난하지 않습니다.”
“아난다 님, 그런 말씀은 마십시오. 우리 중에 그런 뜻이 있는 자가 있었다면 이곳까지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저희로서도 이번 선발대에 포함되었다는 것은 영광스런 일이지요. 기쁜 마음으로 수행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말한 이는 천상계 33천 중 대범천의 아라한인 마고였다. 마고는 대범천의 상징이기도 한 붉은 깃털을 머리털 사이에 꽂고 있었다. 이번에 천상계에서는 단 세 곳에서만 아라한들을 보냈는데 대범천과 균천, 이사나천이었다. 각기 한 명과 두 명, 세 명의 아라한들을 보냈다.
너울은 처음 그들을 맞이하고 나서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천상계 33천 중에 단 세 곳에서만 참여했다는 것도 그랬고, 단지 여섯의 아라한만 보냈다는 것도 영 이해가 가지 않았다. 더군다나 무력을 담당하는 신장들이 아닌 아라한의 능력에도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러고 있는 차에 자신이 속한 선계의 선인들이 도착했는데 그들을 보고나가 이번에는 화가 나려 했다. 단 세 명. 속으로 노군을 욕하며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를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난다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지만 지금까지도 불만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마음가짐이라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실 거라 생각되는 군요.”
“감사합니다.”
“언제쯤 파천 님이 출관을 하시는 거죠?”
“곧 언제요?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건가요?”
균천의 미타는 반짝이는 눈으로 아난다를 빤히 직시했다. 균천은 여자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그것도 하나같이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닌 소녀들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미타 역시 빼어나게ㅐ 아름답기는 마찬가지였다. 균천에서 미타와 동행한 찬다마나는 얼른 미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왜 그래?”
미타는 찬다마나가 자신의 옆구리를 찌른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찬다마나는 당황한 기색을 보인다. 그녀는 또다시 열리는 미타의 입을 얼른 한 손으로 틀어막고는 황급하게 말했다.
“아난다 님. 미타의 불경을 용서하세요.”
찬다마나는 미타의 태도가 불경스러운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난다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물어 보십시오.”
“그것 봐. 괜히 앞질러 가지 말고 가만있어 봐. 아난다 님, 무한계를 종단한다고 하셨는데 어디 어디를 거쳐 가는 건가요?”
“행로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의 의견을 종합해서 결정할 겁니다. 위험 지역은 최대한 피해야겠지요. 그러나 현 중부권의 상황이 특정 지역 구분 없이 전체적으로 위험하니 어떤 행로든 어렵기는 마찬가지일 겁니다.”
“추후 합류할 인원은 얼마나 됩니까? 설마하니 이 인원만으로 중부권을 종단하실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그건 절대로 불가능 합니다. 절반도 가지 못하고 좌절하게 될 겁니다.
더군다가 중부지대의 위험성을 감안할 때 공간이동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결국 한 발씩 떼어 전진하는 수밖에 없으니 최소한의 전력은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각시의 지적은 정확했다. 공간이동은 쉽게 위험 지역을 빠져 나갈 수 있는 이점이 있음에도 그다지 즐겨 사용되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극도로 신중한 판단을 통해 선택되는 방법이었다.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공간이동을 할 때 특정 지역으로 이동하기가 용이하지 않다는 건 작은 이유에 불과했다 그것보다는 프라즈마 운용이 뛰어나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이동했다 하더라도 일시지간 힘을 회복할 수 없다는 맹점이 더 큰 것이었다.
그럴 때 적이라도 만나게 된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결국 많은 시간이 소모된다 하더라도 차례차례 뚫고 나가는 방법 외에 다른 수가 마땅치 않은 것이다. 이때 무초선인이 다소 낙관적인 의견을 내놓는다.
“반드시 위험을 만난다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아무리 패권에 눈이 먼 전사들이라 하더라도 공개적으로 우리를 공격하지는 않을 듯도 싶습니다만…… 또한 서로 견제하는 상황에 있으니 잘만 이용하면 무탈하게 통과할 수도 있을 겁니다. 먼저 전력을 드러내 남을 이롭게 하려는 어리석은 자들은 그리 많지 않을 듯 싶군요.”
아난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운이 따른다면 무초 님의 말씀대로 될 공산도 크지요.”
이것저것 따지고 앉아 있는 다른 자들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가 하나 있었다. 미타는 하품을 하며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고는 일행들을 찬찬히 살펴갔다.
‘모두 고리타분한 위인들이야. 아난다 수련자는 생각보다 잘 생기긴 했지만 함부로 대하기가 쉽지 않고, 범천의 마고와 이사나천의 이레네가 그나마 조금 통하겠어. 너울은…… 호호, 왠지 재미있을 것 같단 말이야.’
미타가 내심으로 이런 생각에 빠져 있는 걸 너울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며 생글거리고 웃자 너울은 죄 지은 것도 없이 뜨끔했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난감해 얼른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 분이 안배한 일곱별들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겁니까?”
일곱별.
천상계의 아라한들과 선계의 선인들 사이에서 최고의 관심을 일으키는 명칭이었다. 천상계 서른세 명의 천주 중 열둘과 선계의 태상노군과 함께 모든 걸 안배했다는 신비한 수호자가 마지막으로 만났다는 인물들.
귿르 중에 둘은 누구인지 밝혀졌다. 하나는 아난다 수련자였고, 또 하나는 마계 대마신 출신으로, 메덴의 무법자로 불렸던 라미레스 수련자였다.
“라미레스 님은 인간세에서 죽음을 당하셨으니 조금 더 있어야 합류가 될 듯하고…… 나머지 다섯 분은 어찌 되는 건가요? 선발대에 합류하지 않는 겁니까?”
각시의 심각한 표정에 미타는 속으로 혀를 찼다.
‘무척 심각한 걸 좋아하는 애야. 가만있어도 잘 알아서들 하겠지. 뭐 그런 걸 꼬치꼬치 물어 본담.’
아난다는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그 부분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나머지 다섯 영자가 누구인지는 저로서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어느 시점에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도 지금 단계에서 예측하기란 난감한 일입니다. 지금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여정이 끝나기 전에 반드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란 점, 이것 하나입니다.”
“수호자는 대체 어떤 분입니까? 오래 전부터 영계에 존재했다는데 도무지 어떤 신분인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군요. 그의 계획과 안배에 따라 본계와 선계가 움직여 간다는 것도 저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 의문은 오래 전부터 지니고 있던 겁니다. 대체 그는 누구입니까?”
마고의 의문은 사실상 여기 있는 모든 영자들이 지니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아난다의 표정이 야릇해져 갔다.
“그 분의 실체에 대해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잇는 영자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이건 천주님들이나 태상께서도 마찬가지겠지요. 분명한 건 오래 전부터 그 분은 영계의 질서와 평화를 위해 어두운 음지에서 노력을 기울여 오셨다는 겁니다.
수련자들의 성지라는 메덴의 석탑에는 메테우스 님이 남기신 글귀가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 의미가 완전히 해석되는 것은 아니나 분명한 건 그 분 역시 수호자를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현 용족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옛용족의 족장인 그레고스 님께서 말씀하시길, 용의 운명은 수호자의 운명과 맞닿아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안배는 파천 님에게서 끝이 납니다.
파천 님의 출판 이후에 결정되거나 안배되어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진 의무를 충실히 하며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수호자를 직접 만나신 것이 아니었어요?”
미타가 미심쩍은 눈길을 보냈다.
“물론 그 분을 뵈었지요. 그렇지만 그 분의 용모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제 기억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생생한 음성뿐입니다.”
아난다는 그 순간을 다시 떠올렸다. 조용하나 힘있는 음성. 전신을 억누를는 듯 힘차나 부드럽고 따뜻한 기운. 조금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는 진실된 어조. 그 순간 아난다는 그 앞에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무릎을 꿇었고 그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였다.
‘그 분과의 약속…… 반드시 지켜 나갈 것이다.’
아난다의 내심은 당시의 그 순간으로 돌아가 뜨겁게 달궈지고 있었다.

파천의 출관을 기다리는 심정은 모두가 동일했다.
그가 나와야 시작된다, 라는 의미는 달리 생각하면 영자들에게 자존심 상하는 일일 수도 있었다. 자신들보다 훨씬 열등한 존재로 인식해 오고 있던 인간계의 생령에게 영계의 운명을 지운 것 같은 수치심이 그들 모두의 가슴속에는 알게 모르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관점의 기저에는 파천이라는 한 생령이 왜 그런 적임자로 선택되었는지에 대한 풀 수 없는 의문과 수호자의 안배가 과연 앞으로 어떤 식으로 영계에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한 물음도 동반되고 있었다. 그 시기를 알 수 없어 막막하기는 아난다도 마찬가지였다.
무연의 영력은 최고로조 달해있었으므로 더 이상 안으로 들어가 볼 수도 없었다. 아난다는 무연이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말했었다.
‘무연이야 말로 인연자를 새롭게 변화시킬 것이다.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아닌 내부로의 바라봄은 조용하나 깊고 힘찬 바람으로 휘몰아칠 것이다. 그는 서서히 변해 갈 것이며, 다른 누구에 의해서가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해 갈 것이다.
그는 희망인 동시에 절망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대책은 없다. 그를 끝까지 보호하라. 그가 스스로의 힘으로 진실을 바라볼 수 있을 때까지.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틀을 부수고 나올 때 영혼들은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할 것이다.’
확신에 가득 차 있던 그 음성은 지금까지 아난다를 지탱해 왔고, 험난한 미래를 견뎌 갈 용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파천은 아난다에게 더 이상 외부인이 될 수 없었으며 어쩌면 바로 그 자신일 수도 있었다.
홀로 있는 아난다의 처소에 너울이 들어왔다. 그는 뜰의 현 상황과 각지에서 수집된 정보들을 간략하게 보고했다. 아난다는 이것저것 따져 물으며 진지한 태도로 분석하고는 했다. 그런 그에게 너울이 조심스레 운을 뗀다.
“슈트레의 제안을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슈트레가 선발대를 수행하겠다고 제안해 온 건 뜰 내에서도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슈트레가 어떤 의도를 지녔는가에 대한 관심보다는 과연 슈트레의 제안을 선발대가 거절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컸다.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선발대를 수행하겠다고 나서는 영자들이 있다면 누구나 받아들일 겁니다. 단지 그 수에는 제한이 있어야겠지요. 이렇게 말하십시오. 동행은 허락할 수 없지만 수행 자체를 거부할 생각은 없다고 말입니다.”
‘그럼 라치오와 겹칠지도 모르는데…… ’
너울은 라치오와 슈트레의 관계가 어떤지에 대한 사전적ㅇ니 지식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별 충돌이 없을 거라고 단정 지으며 마음 놓고 있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저번에 말씀드렸던 아레나는 조만간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저도 기대가 되는군요.”
아난다가 모든 전산들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는 건 아니다. 대다수의 수련자들이 그랬다. 그렇지만 보통의 수련자들보다는 더 많이 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그도 아레나가 메덴의 성지에 있었다는 사실 이외에는 그리 많은 걸 알고 있지 못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메덴의 성지에서 보냈다. 수련자가 되기 전에는 천상계를 거의 떠나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아난다의 이름이 영계에 잘 알려져 있는 건 그의 수행기가 워낙에 특이했기 때문이다.
수련자들은 주로 상주하는 처소를 하나 마련해 두고 일정 주기에 따라 수행을 떠난다. 수행기에는 무한계 전체를 떠돌며 특별하면서도 강도 높은 수련을 하기 마련이었다.
대다수의 수련자들은 무한계를 주유하긴 하지만 일반의 일에 잘 관여하지 않으며,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이 일상적이다. 그들을 만나기 쉽지 않은 이유가 이런 데 있었다. 그들의 가공할 능력은 웬만한 전사들의ㅏ 시선에 포착되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난다는 조금 달랐다. 그는 수행기 동안 적극적으로 영자들의 삶에 개입하려 노력해 왔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분쟁 지역이 아닌 일반 영자들의 삶 가운데 그는 언제나 함께 있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도움의 손길을 간절히 기대하는 자들에게 그의 출현은 가뭄 중의 단비만큼이나 소중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가 지금껏 베푼 선행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를 수련자들의 빛나는 이름들 가운데서도 특별한 것으로 부각시킨 건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요 근래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전사 양성소인 펠라모들의 회합이 수차례 있었다고 합니다. 펠라모는 전사단들과 공생의 긴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움직임엔 우리가 모르는 배경이 있는 것 같습니다.”
너울은 그들의 동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펠라모의 대부분은 남부권과 북부권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에 반해 전사단의 8할은 중부권에 몰려 있었다. 전사단간의 우위 변화에 따라 줄을 대고 있는 펠라모의 성쇠 역시 결정되기 때문에 펠라모간에도 보이지 않는 경쟁의식이 팽배해 있었다.
그런 그들이 화합을 가졌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앗다. 이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너울은 중부권의 상황에 외부로 알려지지 않은 변화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믿을 수 없는 일이 전개되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펠라모의 회합이라니요?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습니까?”
“처음 있는 일입니다.”
아난다 역시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다.
“자세히 알아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슈트레를 만나 보면 무엇인가 건질 수 잇을 것 같습니다만.”
“그럼 수고스럽겠지만 그래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그 자가 순순히 사실을 알려 줄지…… ”
“흐음…… 뭔가 우리가 모르는 변수가 발생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어쨌든 준비는 철저히 해주세요. 최선을 다해 보고 나머지는 하늘의 뜻에 맡겨야지요.”
너울은 생각난 김에 곧장 슈트레를 만나 보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아난다는 좀처럼 얼굴에서 미소를 거두는 법이 없다. 그렇지만 이 순간 그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그분의 예상대로라면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간계를 더 경계해야 한다 하셨다. 일곱 영자들 가운데서도 배신자는 나올 수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 내 모든 걸 이번 일에 바치리라.”
아난다의 열정은 어둠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불꽃같았다. 순수하기에 더 아름다운 결심은 이렇게 굳세어져 간다.

너울은 기분이 몹시나 불쾌했다. 각시는 왜 그렇게 볼이 부어 있냐고 물었다. 그러자 대뜸 한다는 소리가 이랬다.
“네 그놈같이 거만하고 몰상식하고 제 주제 파악도 못하는 놈은 처음이다. 그런 놈을 상대하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하고 처량해서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오려다 간신히 참았다. 정말 살다 보니 별 놈을 다 만나 보는구나. 아니, 어찌 그런 놈이 그 정도의 명성을 지니게 되었는지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머리로는 헤아릴 수가 없다.”
“왜 그러는데?”
너울이 흥분을 잘하긴 하지만 이 정도로 험담을 심하게 하는 걸 들어 본 적이 없어서인지 각시 또한 강한 호기심을 나타냈다.
“다시 생각하기도 싫다. 그냥 확 엎어 버리고 나오는 건데…… ”
“말해 봐. 내가 들어 보고 판단할 테니.”
“후우…… ”
너울은 몇 번인가 깊이 호흡을 고르고 나서야 진정했다.
“슈트레의 궁을 찾아 갔다. 정말 으리으리하게 해놓고 살더구나. 나는 또 천상계의 어느 별궁에라도 와 있는 줄 착각했지. 어떤 아리따운 여자가 나를 그곳으로 안내했다. 기다리는 동안 말벗이라도 하겠다며 나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길래 좀 어색하고 그러더군.
뭐, 그런대로 상냥하고 재치도 있었던지라 지루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이놈이 오지를 않는 거야. 나는 그녀에게 슈트레가 지금 이 궁에 없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있다고 하더군. 그런데 왜 오지 않느냐고 하니까, 그 여자가 하는 말이 취침중이라는 거야.
그 순간 머리 속이 하얗게 비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그래서 어찌된 일이냐고 추궁했더니 그 여자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거침없이 이렇게 말하는 거야. ‘설사 선계의 노군이 오신다고 해도 궁주님은 취침시간에 집무를 보시지 않습니다. 그건 이곳에서 당연히 지켜야 할 규칙 같은 것이죠.’라고.”
“하, 그 여자 대단하네.”
“그 여자가 아니라 그놈이 대단한 거지.”
“그래서 너는 어떻게 했어? 설마하니 그냥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물론 아니지. 그 자식한테 소식은 전했냐고 했더니 그럴 수 없다고 하더군. 그때까지만 해도 좀 괴팍한가 보다 정도였다. 수하들이 슈트레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그런 것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내가 천천히 그것도 아주 정중하게 다시 말했다. 시간을 다투는 일이니 나중에 봉변을 당하지 않으려면 슈트레에게 즉시 알리라고 말야.”
“그것 가지고 그렇게 화를 내는 거야? 잠시 기다렸다고?”
“끝까지 들어. 내가 그정도 갖고 화를 내는 좀스런 놈이냐!”
너울의 이어진 얘기는 대충 이랬다.
너울은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소식을 전하러 간 여자까지 아예 오지 않는 것이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감감무소식이자 그는 슬슬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즉시 이놈의 궁을 때려 부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한 번 더눌러 참았다. 자신은 현재 아난다 수련자의 대리인 자격으로 이곳을 찾아온 것이라며 몇 번이나 스스로를 달래며 가라앉혔다. 그렇지만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그의 인내력도 한계에 달하게 된다.
그가 막 발작하려는 찰나였다. 그렇게도 상냥하고 재치 있는 말상대로 비쳤던 아까 그 여자가 다시 나타났는데 순간 하마터면 심한 욕설을 내뱉을 뻔했다.
그녀는 여전히 친절한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말했다.
“궁주님께서는 지금 막 일어나셨습니다. 잠시만 더 기다리시면 만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너무 무례하군. 슈트레가 날 무시하는 건 괜찮으나 날 보내신 아난다 님마저 안중에 두지 않는 위인이라면…… 이곳에 내가 더 이상 있어야 할 이유가 없겠군. 전해라. 오만함의 대가를 언젠가는 치르게 해줄 거라고.”
“네? 무슨 말씀이신지…… ”
상대의 당황해 하는 모습까지도 조롱하는 걸로 비칠 지경이었다. 화가 난 너울이 내실을 빠져 나갈 때였다.
“궁주님 드십니다.”
짜랑짜랑한 목소리와 더불어 묵직한 헛기침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제야 이 모든 게 놈의 계획된 수작이라는 걸 깨닫게 된 너울은 더 이상 이 자리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허허, 이것 늦어서 미안하오. 자, 들어가서 앉으십시다.”
첫 대면이건만 인사도 없다. 아무리 예전처럼 권위를 내세우는 시대는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의 예의라는 것이 있었다. 너울은 선계의 중상위 선인이었다. 이곳은 더군다나 선계와 인접한 뜰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금 슈트레의 행동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안하무인의 오만한 작태였다.
너울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선 슈트레의 뒤로는 전사 복장을 한 십여 명의 수하들이 기세 좋게 경호하며 따른다. 이어 묘한 장면이 연출되기 시작했다. 자신을 감싸고 두 줄로 들어서는 전사들 가운데 갇혀 키 작은 너울ㅇ느 터져 나오려는 분노를 삭이고 있어야만 했다.
먼저 착석한 슈트레의 뒤로 전사들이 죽 늘어선다. 너울은 천천히 돌아섰다.
“슈트레, 당신…… 배짱이 좋은 게 아니라…… 정신 나갔군.“
드디어 너울의 분노가 터지고 만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벌써 손을 썼어야 정상이지만 오늘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잘 참아낸 것이다.
그렇지만 상대는 슈트레였다. 적어도 이곳 뜰과 남부권에서는 꽤나 큰소리친다는 인물이고 보면 너울의 이런 태도를 가만 용납하고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그럼에도 그는 웃기만 할 뿐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네 앞에 앉고 싶지 않으니 간단하게 말하마. 슈트레! 선발대를 경호하든 수행하든 네 마음대로 하거라. 대신 한 가지는 네가 명심하고 지켜 줘야겠다. 될 수 있는 한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마라. 아난다 님은 네 제안을 허락하셨지만 나는 아니다. 다시 전하지. 잘 들어!선발대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건 용납하겠지만 동행할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마라. 그 번뻔한 낯짝을 다시 본다면 짓뭉게고 싶을지도 모르겠어.”
그 말을 끝으로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려세웠다. 그러자 느릿한 슈트레의 말이 귓가로 흘러 들어왔다.
“너울, 하는 짓을 보니 아직 멀었군. 어려, 쯧쯧. 그리고 난 아난다 수련자가 직접 올 줄 알았건만 널 보내다니…… 날 너무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냐. 너희 선발대가 내 도움이 없이도 무한계를 무사히 통과할 성 싶으냐.
먼저 와서 부탁해도 부족한 판에 네 지금 태도는 날 무척이나 당혹스럽게 만드는구나. 배웅하지 않을 테니 잘 가라. 그리고 아난다에게 전해. 내가 입 밖에 낸 소리니 너희들 끝까지 보호해 주기는 하겠어. 그렇지만 다음번에도 이런 식이라면 아주 곤란해. 그만 가봐.”
뚜벅뚜벅 걸어가는 너울은 슈트레가 마구 지껄여대는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몽땅 귓속에 담아 넣었다. 그는 이미 흥분의 도가 지나쳐 전신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저놈이 감히……’
너울은 내심과는 달리 다른 행동을 취할 수는 없었다. 아직은 껌뻑거리는 눈이나마 간신히 뜨고 있는 이성이라는 놈의 간절하면서도 끈질긴 부탁과 주변에서 알게 모르게 감시하는 수십 쌍의 눈길을 느꼈기 때문이다.
너울의 얘기를 모두 전해 들은 각시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아니 그 작자는 우리를 적대하겠다는 거야, 돕겠다는 거야?”
“몰라, 지금으로서는.”
“거절해도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할 놈인 것 같고, 이것 영 찜찜한데? 아난다 님께는 보고했니?”
“아니.”
“하긴 뭐라고 전하겠어. 그러면 회합에 대해서는 말도 못 꺼낸 거네.”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된 거지. 내가 잘못한 거냐?”
“아냐, 잘했어. 그런 놈이라면 앞으로도 상종하지 마.”
“후우,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몰라. 그런 놈이라면 분명 라치오와 부딪침이 있을 거야. 껄끄러운 놈들끼리 치고받으라고 내버려 두지 뭐.”
“호호, 그것 좋은 생각이다.”
너을과 각시가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볍게 말하고 있었지만 마음 한쪽을 지그시 누르는 일말의 불안감은 떨칠 수 없었다. 슈트레의 행동을 단지 생각 없는 자의 경박함으로 돌리기에는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펠라모간의 회합이 있었다는 것과 슈트레의 행동에 어떤 관련성이 있지 않을까, 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던 선발대에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파천의 출관. 그가 무연에게서 벗어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에 대한 호기심으로 선발대원들은 한달음에 아난다의 처소로 모여들었다.
마침 이때는 아레나 역시 선발대에 합류해 있었다. 그녀 역시 평소와는 달리 약간 상기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스물여섯 쌍의 눈길은 파천의 전신을 해부라도 하려는 듯 맹렬하게 퍼부어졌다. 너울과 각시까지 파천의 달라진 점을 찾느라 다른 영자들과 마찬가지였다. 장내는 지나칠 정도로 조용해 어색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모두들 자신만을 쳐다보고 있자 파천은 어색함을 벗어나고자 헛기침을 했다. 아난다가 파천에게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출관을 축하드립니다.” “고맙소.”
파천의 음성은 조용한 가운데 힘이 실려 있었다.
“모두 파천 님의 출관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너무나 기쁘군요.”
파천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 자가 누군데 나를 만났던 것처럼 말하는 거지?’
파천의 이런 의문은 다른 영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날 아시오?”
“그럼요, 너무도 잘 알지요.”
“우리 언젠가 만난 적이 있소?” “네.”
파천의 의문은 점점 깊이를 더해 갔다.
“제가 누군지 모르시겠습니까?”
아난다의 부드러운 미소가 파천의 시선에 가득 차올랐다. 그 미소는 너무도 각별해 지켜보던 이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아난다의 미소 속에 담긴 감정은 분명 따스한 정이었다. 파천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눈앞에 있는 자를 만난 적이 없다. 지금껏 영계에 들어와 만나 이는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너울과 각시가 파천이 알고 있는 영자의 전부였다. 나머지는 다들 생소한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자신을 잘 아는 듯 말하지 않는가?
“그대는 누구길래 날 안다고 하는 거요?”
파천은 상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상대에게서 익숙한 느낌이 전해지는 걸 깨닫고는 흠칫했다.
“그대는 …… 혹시?”
“혜능입니다.”
아난다는 분명 혜능이라고 말했다 파천의 머릿속은 일시지간 하얗게 비어 버렸다. 아무런 생각도,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꽤 오랜만에 뵙는군요.”
파천은 무슨 말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간신히 그의 입이 열리고 자그맣게 소리가 흘러 나왔다.
“혜능…… 혜능이라고?”
“네, 제가 바로 혜능입니다.”
순간 파천의 눈이 붉게 충혈되어 갔다. 천마와 더불어 스승이자 친구이기도 했고, 든든한 후원자이자 변함없는 동반자였든 혜능. 언제나 변함없는 혜능. 언제나 변함없는 모습으로 흔들림 없는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해주었던 혜능을 어찌 잊을 수 있으리요.
그의 죽음 앞에서 한참을 넋 놓고 울어야 했었는데 그를 다시 만난 것이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곳에서 자신이 가장 힘들고 어려운 때에, 의지할 곳 하나 없이 외로움에 사무쳐 그리움으로 매 순간을 힘겹게 이겨내고 있는 이때에 혜능이 자신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혜능.”
파천이 무너졌다. 다시는 울지 않으리라, 약해지지 않으리라 다짐했는데 또다시 무너지고 있었다. 혜능과 파천은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파천은 서러움에, 혜능은 그런 그가 애처로워 함께 눈물을 흘렸다. 장대의 인물들은 영문도 모른 채 두 사람의 벅찬 감정이 동화되어 갔다.

장내는 해후의 북받치는 감정을 쏟아내는 파천과 혜능의 시간만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그 시간을 짧게 지나갔으며, 어느새 정돈되어 냉정을 되찾았다.
파천의 얼굴은 처음보다 상당히 밝아져 있었다. 그의 옆에서 혜능은 따스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 이미 모든 이들을 소개받은 이후였던지라 파천은 어색함을 떨쳐 버리고 연신 밝은 표정으로 모두를 대했다. 그의 모습은 너무도 눈이 부셔 보였다.
그의 얼굴이 흠잡을 데 없이 잘 생겼기 때문이 아니었다. 무슨 특별한 능력이 있어 신비한 기운을 내뿜기 때문도 아니었다. 막 태어난 갓난아기의 순수함처럼 그는 깨끗해 보였다. 그의 이런 특별한 기운은 너울과 각시마저 감동시켜 갔다.
처음 대했을 때와 파천은 너무도 달라져 있었다. 여전히 어딘가 한 구석이 허전해 보이긴 했지만 보는 이를 즐겁게 하는, 예전에 없던 때묻지 않은 순수함이 모두를 감동시키고 있었다.
“하하하,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다니 꿈만 같아. 독고무의 얼굴보다는 지금이 훨씬 잘생겼는데?”
아난다에게 스스럼없이 대하는 그를 모두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난다 님이 인간이었을 때는 어떤 분이셨는데?”
미타의 질문에 파천은 장난스런 표정이 되었다.
“글세…… 뭐라고 해야 할까? 모습은 미청년인데 세상 다산 고리타분한 늙은이 정도?”
“정말?”
“혜능, 한 가지만 물어 봐도 될까?”
파천은 아난다를 여전히 혜능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예전처럼 똑같이 대했다.
“무엇이든 물어 보세요. 제가 답할 수 있는 거라면 파천 님의 궁금증을 풀어드리겠습니다.”
혜능, 그러니까 아난다 역시나 예전과 다름없이 파천을 대했다. 파천의 얼굴이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으음…… 이건 좀 심각한데. 물어 보기 전에 먼저 한 가지만 부탁할게.”
“그러세요.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그 말투 좀 바꿀 수 없을까?”
“네?”
파천이 원하는 게 무언지를 알게 된 아난다. 잠시 곤혹스런 표정으로 갈등하고 있는 그를 파천은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그냥 우리 친구처럼 서로에게 편히 대하는 게 어떨까? 다들 내게 그렇게 대하잖아?”
“그게 편하시다면……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어허.”
“…… ”
아난다와 파천을 번갈아 쳐다보는 다른 영자들은 내색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지금 난처한 지경에 빠져 있었다. 천하의 아난다 수련자를 저렇게 대할 수 있다는 건 자신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 않던가. 이런 점을 생각하자 앞으로 파천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감하기도 했다.
“그런데 물어 볼 게 있다고……. 했…… 잖…… ”
아직은 어색한지 아난다는 말끝을 슬쩍 흐렸다.
“널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다른 이들도 여기서 다시 볼 수 있는건가?”
“가능합니다.”
파천은 아난다의 말투과 금방 바뀌길 기대한다는 건 무리가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쯤이냐?”
파천은 설란과 천마 그리고 수하들을 다시 만날 수도 있다는 기대에 한껏 마음이 들떠 갔다.
“그 시기는 각각 달라서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늦어도 여정이 끝나기 전에는 모두 만날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문제는 있습니다.”
“무슨 문제?”
“그들의 의지가 파천 님을 다시 만나길 원치 않을 경우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세에서의 인연을 별다르게 생각지 않는다면 굳이 파천님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는 않겠지요.”
파천은 불안을 떨쳐 버릴 수 있었다.
‘분명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우리는 맹세했다. 어찌 그날의 원한을 잊을 수 있으리. 다시 만나 서로의 힘을 모아 우리들 손으로 마계를 무너뜨리리라.’
파천은 새로운 희망에 고무되어 갔다. 이런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난다였기에 연신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들이 가세하기만 한다면 파천 님에게는 든든한 힘이 되겠지요.’
아난다는 앞으로 영계에 불어 닥칠 새로운 바람을 기대했다.
“그런데 혜능.”
“네.”
“그 시기가 각각 다르다는 건 무슨 말이야?”
“그건 각각의 영혼이 정화되는 데 소모되는 시간 역시나 각기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세의 업에 따라 그들이 감당해야 할 시간의 무게는 저마다 다릅니다. 정화에 걸리는 시간이 설사 같다 해도 각자가 느끼는 시간 흐름 역시나 다르게 느껴집니다.
세세한 기억은 잃어버리지만 당시의 고통만은 생생하게 간직합니다. 정화의 고통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해서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지요.”
다른 영자들 역시나 공감하는지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정화를 마친 영혼은 새로운 영체를 입고 영계에 들게 되지요. 대부분은 예전의 삶을 되찾게 되지만 개중에는 전혀 낯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모든 건 스스로의 의지로 결정하게 됩니다.”
“그럼 그들이 영체를 입은 뒤에 처음 발을 딛는 장소는 어디지?”
“메덴입니다.”
“메덴? 수련자들의 대지를 말하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파천은 무연을 통해 상당한 부분의 지식을 축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세세한 부분까지는 모르고 있었기에 다시 물었다.
“그곳은 어떤 곳이지?”
아난다는 파천의 궁금증을 풀어 주기 위해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아난다의 설명이 끝나고 나서야 파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곳은 수련자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인가?”
“그렇지는 않지만 일반 영자들은 들어가길 꺼려 하는 곳이지요.”
“그건 왜 그렇지?”
“그건 내가 설명하지.”
지금껏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고 있던 아레나가 나셨다. 그러고 보니 아레나 또한 메덴과는 인연이 깊었다. 더군다나 수련자도 아니면서 오랜 시간을 메덴의 언저리에서 지내 왔지 않은가. 그녀만큼 그 심정을 잘 헤아리는 영자도 드물 것이었다.
“아난다 님은 수련자시니 일반 영자들의 입장을 나만큼 잘 알지는 못하시겠죠. 메덴은 양면성을 지닌 땅입니다. 아무리 숭고하고 아름다운 동기도 세월의 흐름 앞에서는 변질되는 법이지요. 메덴 역시나 그런 상식을 뒤엎지는 못했으니 조금 안타깝습니다.”
아레나의 말로는 메덴 역시나 시간이 흘러 가며 점차로 변질되고 있다고 했다.
“아난다 님의 말씀처럼 메덴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그렇지만 누구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그 어느 곳보다도 폐쇄적인 곳이죠. 수련자만이 숨쉬고 호흡할 수 있는 곳. 메덴은 그런 곳입니다.
수련자가 되기 위해서는 메덴의 원탁을 거쳐야 하고, 설사 그곳에서 인증을 받는다 하더라도 곧 바로 수련자의 무리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지금의 현실은 분명 그렇습니다.
원탁을 열고 이행하는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알게 모르게 계파가 형성되어 있고, 그건 여러 가지 폐단을 낳고 있지요. 물로 아난다 님처럼 그런 부분에 초연하신 분들도 계시지만 대다수의 수련자들은 그리 의지가 굳지 못하시더군요.
제 스승인 메사 역시 그런 구조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아난다 님도 알고 계신 그리 오래되지 않은 얘기를 해야겠군요.
중부권의 분쟁이 막 심화되어 가던 때였습니다. 세력 분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을 때였지요. 페리칸이라 불리던 유명한 전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화신체가 되어 검을 휘두르면 당해낼 자가 없을 정도로 극강한 자였지요.
그러다 보니 여러 세력에서 그를 끌어들이려 노력했습니다. 그는 전사로 알려지긴 했지만 특정 조직에 소속되길 꺼려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여러 전사단의 집중적인 견제와 공격 가운데 살길을 찾아 도주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그의 발길이 최후로 향했던 곳은 메덴이었습니다. 알고 계시죠?”
아난다는 침통한 얼굴이었다. 그 역시 당시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메덴으로 들어선 페리칸을 추격하던 전사들은 더 이상 뒤쫓지 못했지요. 그제야 마음을 놓는 페리칸은 곧장 원탁을 향해 갔습니다. 아마도 수련자의 신분을 얻기 위해서였겠지요. 그가 발붙일 곳은 메덴뿐이었기에 당연한 선택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메덴의 원탁은 당시 어떤 결정을 내렸습니까!”
“그랬지요. 당시의 페리칸에 대한 결정으로 메덴은 한차례 몸살을 앓았지요. 그는…… 불행한 사내입니다. 다른 시기였다면 수련자가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아난다의 변명에 아레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제 스승인 메사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메덴은 더 이상 성지가 아니다, 라고요. 당시 원탁은 외부와 암중으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거죠. 원탁의 지도자들은 페리칸이 수련자가 되는 걸 용납하지 않았을뿐더러…… 메덴의 유형지인 불꽃연못에 그를 가둬버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럴 수가……”
“어찌……”
아라한들과 선인들은 아레나의 말에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들도 불꽃연못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다. 밖에서 꺼내 주지 않는 한 자력으로 나올 수 없는 곳이 메덴의 불꽃연못이었다.
그런 곳에 도움을 청하러 온 자를 가둬 버리다니. 그들의 얼굴에는 수련자로서 어찌 그럴 수 있는가, 라는 실망과 아레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의 빛이 서로 교차하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요? 아난다 님은 알고 계십니까?”
“으음…… 당시 원탁을 주재했던 수련자는…… 치앙마였소.”
“알고 있습니다.”
“치앙마는…… 야심이 많은 자였소. 원탁의 지도층에 들기 위해 그는 많은 수련자들을 자신의 동조자나 지원자로 끌어들였고, 그 결과 지도층에 들 수 있었습니다. 치앙마의 야심은 끝이 없었소. 틈만 나면 그는 수련자들을 설득하려 했었소. 중부권의 혼란이 장차는 무한계 전체 뿐만 아니라 영계를 분쟁 가운데 몰아넣을 것 같으니 메덴이 나서서 무한계를 평정하자고 말하곤 했었소.
대부분 수련자들은 그의 뜻에 반대했소. 그렇지만 그는 야심을 쉽게 접을 위인은 아니었소. 지금도 아마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겠지요.”
“치앙마뿐만 아닙니다. 메덴은 사실상 겉으로 보여지는 것과는 달리 안은 썩어들어 간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나마 지금가지 별 탈 없이 견뎌 오고 있는 건 아난다 님 같은 명망 있는 수련자들 때문이지요.”
“과찬의 말씀입니다.”
“몇 분의 명망 있는 수련자분들의 영향력은 오히려 원탁의 영향력을 능가할 정도입니다. 그런 견제가 없었다면 메덴은 세상을 집어삼켰을 것입니다.”
아레나의 말은 사실이었다. 만약 수련자들이 힘을 합해 무한계를 장악하고자 한다면 큰 힘 들이지 않고도 가능할 것이었다.
“치앙마의 추악한 야심을 가장 강력하게 견제하셨던 분 중의 한 분이 라미레스 수련자셨지요. 그 분은 메덴의 무법자라고 불릴 만한 분이셨습니다. 아난다 님과 라미레스 님 같은 그런 분들이 계시지 않았다면, 글쎄요…… 과연 수련자들이 영자들에게 지금과 같은 존경을 받을 수 있었을지 의문이 앞서는군요.”
라미레스는 바알세불, 즉 천마의 새로운 이름이기도 했다.
천마는 영계에서도 아주 특별한 위치에 있었다. 그가 마계의 대마신이었다는 걸 모르는 영자는 아무도 없다. 그의 능력은 영계 전체를 따져 보아도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수준이었으므로 감히 그 앞에서 함부로 행동할 영자들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메덴의 성지에 들어 수련자가 되자 처음에는 모두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하긴 왜 그렇지 않겠는가. 마계의 대마신이었다는 신분은 두려움과 함께 불신의 조건으로 다가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 모두의 의심스런 눈초리가 바뀌기 시작한 건 수련자가 되고 나서의 일련의 행동들이 있고부터였으니.
그는 진정 무법자라는 이름에 걸맞는 위인이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어떤 부조리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강직한 성품은 수련자들 사이에서 금방 두드러지기 시작했고, 이런 그의 인물됨을 흠모하는 영자들의 수를 점차로 늘려 주게 되었던 것이다.
파천은 아레나의 메덴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에 대해 생각했다.
‘인간계나 여기나 크게 다르지는 않군. 어찌 보면 한심한 일이기도 해. 역시 많이 안다는 게 중요한 건 아냐. 알고 있다 해도 행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인가. 그것으로 더 큰 질책을 받아야 마땅하겠지.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니 변명조차 하지 못할 게 아닌가.’
아레나가 더 이상 하고 싶은 말이 없는지 잠자코 있자 파천이 입을 열었다.
“어디를 가도 썩은 부류는 있기 마련이군. 썩은 건 도려내면 그만이야. 중요한 건 더 이상 곪지 않게 확대되는 걸 막아야 한다는 거지.”
“무슨 방법으로?”
아레나는 지금의 상황들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어떤 처방이 있어 체질적인 개선을 바랄 수 있겠는가.
“힘을 모아야지. 흩어져 있는 힘을 하나로 모을 수만 있다면…… 불가능한 건 없지. 드러나지 않아서 크게 생각되지 않을 뿐, 도처에 흩어져 있는 힘은 상상을 초월할 거야. 구심점이 없어 모을 수 없었다면 구심점을 만드는 거야. 계기만 주어진다면 뜻있는 자들은 모이기 마련이지.
아레나, 난 말야. 선발대를 안배한 그 자의 뜻을 이렇게 해석해.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힘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시도로 말야. 우리에 대한 호기심은 그들 모두의 서선을 우리에게로 집중케 할거고, 결국 우리의 관심은 주목을 넘어 자발적인 참여로 이어지겠지.
지금 상황이 어렵다면 일부의 힘으로 타개해 나갈 수는 없어. 그렇다고 전체를 통일해서 무언가를 해보겠다고 할 때는 시기를 놓쳐 버리지.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은 있고 그 희망을 모두가 볼 수 있게 해주면 되는거야.
어느 때,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시기에 우리도 놀랄 만한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잠재된 역량은 그 동안의 억눌림과 좌절이 컸을수록 더 큰 힘으로 폭발하는 법이거든. 무언가를 변화시키는 건 어떤 결과물이 있고 나서가 아닌 과정 가운데 일어난다고 생각해.”
파천의 말에서는 부정적인 견해라고는 조금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는 그런 점에서 예전과는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렇게나 변하게 만들었는지는 그만이 알 일이었다. 그의 눈은 불굴의 의지를 표현해내듯 강한 확신으로 들끓고 있었다.
“이제 떠나는 일만 남았군요. 모두 마음의 준비는 되었겠지요? 우리는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파천 님을 보호해야 합니다. 모두들 각오를 새롭게 해주세요.”
“지금 당장 출발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더 이상 이곳에서 지체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라치오나 슈트레에게도 미리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떠난다면 그들은 알아서 모든 일을 실행할 겁니다. 그 정도의 준비는 되어 있겠지요. 알리지 말고 될 수 있는 한 조용하게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아난다의 의견에 파천이 반대하고 나섰다.
“혜능, 내 생각은 조금 다른데…… ”
“말씀하세요.”
“몰래 떠나도 닥칠 위험이라면 피할 수 없어. 그렇다면 차라리 모든 이들이 알 수 있도록 하는 게 나을 것 같군. 그래야 할 이유는 조금 전 얘기했고.”
“으음……”
아난다는 파천의 제안에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파천의 의견에도 일리는 있었다. 그렇지만 아난다의 입장에서는 그리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위험은 줄여야 했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도 지켜보는 눈과 귀를 줄여야 하는 것이다. 그의 갈등은 그리 길지 않았다.
“파천님의 견해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아난다의 결정에 모두는 새롭게 파천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보호해야 할 대상임에는 틀림없었다. 달라진 건 없었다. 그렇지만 모두는 파천의 다른 점을 보기 시작했다.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파천은 너울에게 질문했다.
“먼저 이곳 뜰에서 영자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 어디지?”
“뜰의 중심부지. 주점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기도 해.”
“좋아, 그곳으로 먼저 간다. 자, 가자.”

뜰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길가를 가득 메운 무리들은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당당하게 걸어가는 행렬을 주의 깊에 살폈다. 엄청난 수의 영자들이 a였음에도 그다지 큰 소란이 빚어지지는 않았다.
오가는 자들의 발을 묶어 버린 건 작은 무리의 행렬이 주는 특별한 인상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 가운데 아라한이나 선인들, 또는 아레나 같은 유명 전사가 포함되어 있음을 그들이 알아보기 때문도 아니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파천으로 인해서였다. 생령. 영체를 입지 않은 살아 있는 인간을 영계에서 마주치는 색다른 경험이 모두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진 까닭이었다.
파천에 대한 소문은 영계 전체에 조금씩 퍼져 나가 지금은 대다수의 영자들이 알고 있었다. 지금 그 생령이 포함되어 있는 행렬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것이 주는 의미는 굉장했다. 보란 듯이 대로를 활보라는 자들. 그들이 그렇게도 궁금해 하던 선발대임을 알게 된 것이다. 영자들이 한꺼번에 몰려든 건 너무도 자연스런 일이었다.
저희들끼리 수군거리기만 할 뿐 아무도 선발대 앞을 막아서지 않는다. 관심 어린 시선을 보낼지언정 특별히 당부를 하거나 기대어린 환호를 지르지도 않는다. 일상의 권태가 지겨운 가운데 뜻하지 않았던 일탈의 풍경을 감상이라도 하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혹시나 무슨 돌발적인 상황이라도 생길까 싶어 마음 졸이는 건 파천의 옆을 가리듯 늘어선 너울을 비롯한 선발대원들이었다. 너울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것 괜한 짓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난 그리 싫지 않은데?”
파천은 태연하기만 했다. 오히려 활짝 웃으며 손을 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 작은 몸짓 하나에 군중들은 반응하기 시작했다.
“야, 정말 잘생겼네.”
“생령의 기운을 다 느껴 보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야.”
“꼬마야, 꼭 광명을 가져 와라. 그래서 콧대 높은 것들을 콱 찍어 눌러버려.”
고요하던 대로에 생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한꺼번에 터진 소리들은 대부분이 선발대를 응원하는 소리들이었다. 선발대가 움직여 가자 군중들이 따라 움직였다. 선발대를 완전히 둘러싸고 꿈틀대는 모습이 일대 장관을 연출했다.
아레나가 투덜대기 시작했다.
“시끄럽군. 빨리 여길 빠져 나가고 싶은 맘 뿐이야.”
그때다. 선발대의 앞쪽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선발대에 긴장이 서렸다. 물이 갈라지듯 앞쪽이 훤히 트이며 일단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파천은 의아한 시선으로 그들을 주의 깊게 살폈다.
전신을 가죽 재질의 옷으로 감쌌는데 표면에 푸른색의 복잡한 문양을 잔뜩 새겨 넣었다. 파천의 시선을 끈 건 그들의 손이었다. 조금 둔해 보일 정도로 두꺼운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런데 손목을 지나 팔꿈치 어림까지 덮을 정도로 길었다. 팔뚝의 바깥 면에는 작은 단검이 하나씩 꽂혀 있다.
자연스레 파천의 시선이 그들의 허리 쪽으로 옮겨 갔다. 기대했던 검이나 도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끝이 뭉뚝한 단봉 같은 것들을 허리에 하나씩 매달았다. 아레나도 그와 같은 것을 매달고 있었는데 그걸 기억해낸 파천이 아레나에게 물었다.
“아레나, 허리에 달고 있는 건 뭐지?”
“이것 말이냐?”
“그래.”
“파라슈.”
막 파천이 파라슈가 무어냐고 물어 보려다 그만 둔다. 일단의 무리들이 근처까지 다다랐기 때문이다. 선발대의 제일 앞쪽으로 너울이 나섰고 주변에 선인들과 아라한들이 경계한다. 아난다와 아레나만이 파천의 곁을 지켰다.
“슈트레, 여기는 무슨 일로 왔나?”
선발대 앞을 가로막고 나선 건 다름 아닌 슈트레였다. 여전히 거만한 태도의 슈트레는 너울의 험악한 시선을 대하고도 능청스럽게 웃었다.
“비켜라, 너울. 나는 적이 아니다.”
“무슨 일로 왔냐고 물었다.”
슈트레는 턱밑에 난 수염을 비비꼬며 말했다.
“내가 보호해야 할 대상을 확인하러 왔다고 해두지. ”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거기서 해라. 더 이상의 접근은 내가 용납하지 않는다.”
“이것 왜 이러실까. 그렇게 감정적으로 처리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말야. 그렇지 않소, 아난다 수련자?”
슈트레는 너울의 몇 걸음 뒤쪽에 있는 아난다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슈트레와 너울 간의 묘한 신경전은 지켜보던 이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영자들은 그런 가운데서도 지금의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너울, 길을 열어라.”
파천의 말에도 너울은 꼼짝하지 않는다.
“이것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군.”
슈트레는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 보이며 제 뒤에 늘어선 전사들을 슬쩍 쳐다본다. 마치 무력 시위라도 하는 듯한 태도였다.
“무슨 일로 았소?”
정중한 아난다의 물음에 슈트레는 잠시 뜸을 들였다.
“이것 너무들 하는군. 이런 식이면 아무 대가 없이 봉사하는 우리들이 섭섭한데…… ”
“너울 선인, 잠시 비켜서시오.”
어떤 일이 있어도 꿈쩍하지 않을 것 같던 너울이 아난다의 지시가 있고 나서야 옆으로 길을 열었다. 그 사이로 슈트레와 전사들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너울의 옆을 스쳐가던 슈트레가 작은 소리로 귀에다 소곤댔다.
“너무 설쳐대지 마라. 제 주제를 알아야 명대로 사는 법이란다, 꼬마야.”
모욕적이면서도 도발적인 언사였다. 너울은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그는 슈트레의 뒤통수를 뚫어 버릴 듯이 노려보는 수밖에 다릴 도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결심이 싹트고 있었으니.
“무슨 말을 하고자 왔소?”
“아난다 수련자, 출정한다면 미리 언질을 주셔야 하는 것 아니오? 동지로서 그 정도는 예의일 것 같은데…… 내 요구가 무리한 것이요?”
“우리가 언제부터 동지였습니까? 금시초문이군요.”
순간 슈트레의 얼굴이 살짝 일글어졌다. 그것도 잠시, 언제 그랬느냐 싶게 웃음이 감돈다.
“어쨌든 이제 시작된 셈이구려. 내 힘이 닿는 한 선발대의 여정을 보호하겠소. 항상 나와 내 수하들이 곁에서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언젠가는 그대들이 내게 고마움을 표시할 날이 있을 거라 믿겠소. 그럼 잘해 봅시다.”
슈트레가 파천을 슬쩍 쳐다본다. 그의 두 눈은 미묘한 감정을 담고 번들거렸다. 한발을 떼어놓으며 호의가 담긴 시선을 파천에게 주어보지만 파천의 표정은 냉담함, 그 자체였다.
‘이 자는 상대해서 그다지 득 될게 없는 위인이로군. 욕심이 가득한 눈이야. 뭘 노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
슈트레에 대한 파천의 첫인상이 벌써부터 낙제점을 주고 있음을 슈트레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슈트레가 멈추지 않고 계속 다가오자 아레나가 차갑게 경고했다.
“더 이상 다가서지 마라. 죽고 싶다면 원하는 대로 하고.”
상황을 지켜보던 영자들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천하의 슈트레에게 저런 식의 말을 하고도 무사한 자는 이곳 뜰에서는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그들이 지닌 상식으로는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호. 그 유명한 페나인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최고의 여전사 아레나. 하하. 이것 거물을 몰라봐서 미안하오.”
그는 호들갑을 떨며 괜히 아레나를 추켜세웠다.
“더러운 입은 오물만 쏟아내지. 네 입에 내 이름을 올리지 마라. 나까지 더러워지니 말야.”
아레나가 이렇게까지 슈트레를 비난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곳 뜰에 머물며 슈트레에 대한 갖은 악명을 팡에게서 들어왓기 때문이다. 평상시 그다지 좋지 않게 생각해 보던 차에 무례한 행동을 직접 목도하고 보니 부아가 치민 것이다.
“말을 너무 함부로 하는군. 패망은 입으로부터 시작되는 법이지.”
“아난다 님, 더 이상 지체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아레나는 더 이상 슈트레의 말을 듣고 있을 정도로 인내심이 많지 않았다.
“그만 떠나도록 하지요.”
‘이런 개망신을 당하다니.’
슈트레는 상대조차 해주지 않고 무시당하자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치밀어 올랐다
파천이 이때 슈트레의 체면을 세워주려는 의도인지 아니면 그가 불쌍해 보였는지 슬쩍 말을 건넨다.
“할 말이 있으면 마저 하시오. 괜히 나중에 혼자서 열 내며 후회하지 말고.”
‘이 죽일 놈들이!‘
슈트레는 숨을 고르게 끓어오르는 화를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었다.
“내가 여기 온 건…… 내 휘하의 전사들 중 고르고 고른 서른 명과 함께 내가 당신들의 주변을 경계……”
이때 그의 말을 끊으며 결정적으로 파천이 슈트레의 속을 뒤집어 놓는다.
“아까 그 얘기는 했던 것 같은데…… 이제 보니 생색내려고 왔군. 부탁하지도 않은 일을 자진해서 하는 사람치고는 바라는 게 많아. 공치사라도 듣고 싶다면야 못해 줄 이유는 없소. 아주 수고했소. 이제 됐소?”
너울에게서 슈트레와 라치오에 대해 들었던 얘기가 있었으므로 파천 역시나 그리 달갑지 않게 대했다.
슈트레의 입술을 비집고 끙끙거리는 소리가 작게나마 흘러나왔다.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눈앞에 있는 일행들을 쳐 죽이고 싶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또다시 미소를 지으려고 얼굴 근육을 꿈틀거려 보는데 이번에는 잘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불쌍해 보이기도 했다. 파천은 킥, 하고 웃고 말았다.
“이것 봐, 꼬마야. 함부로 입을 놀리다가는 봉변당하기 딱 알맞은 곳이 바로 이곳이란다.”
슈트레가 더 이상은 참지 못할 만큼 한계에 부딪혔는지 손을 뻗어 파천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 그걸 아난다나 아레나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리는 없었다. 아레나가 살기등등해 소리쳤다.
“마지막 경고다. 더 이상 손을 뻗치면 네 목은 떨어진다.”
“내 목이 그리 쉽게 떨어질 것 같으냐! 네가 아무리 페나인 전투의 최후 생존자라고는 해도 나 또한 북부전사동맹의 수석전사였다. 날 쉽게 생각하지 마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어느새 뻗어 오던 손이 허공에 딱 멈춰 앞으로도 뒤로도 나가지 않는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파천의 머리카락 한올이라도 움켜쥐고 싶은데 그러기엔 좀 불안한 감이 있었던 것이다. 아레나가 싱그런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호, 그 잘난 북부전사동매의 전사, 더군다나 수석전사셨다고? 시험해 봐도 좋아. 네 목을 걸고 하는 내기라면 나도 오랜만에 신명나게 춤을 춰볼 생각도 있고.”
점잖은 아난다까지 맞장구를 치고 나온다.
“저는 아레나 님께 걸겠습니다.”
“나도 아레나에게 걸지.”
슈트레는 뒤에서 그렇게 외친 자가 누군지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얄미운 너울이 신이 나서 외친 소리였다. 슈트레의 뒤에 서 있던 전사들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명예 하나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전사들이었다. 저런 꼴을 보이는 자를 주인으로 섬기는 자신들의 신세가 한심하게 여겨진 건 너무도 당연했다. 더군다나 이렇게 많은 영자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망신을 당하고 있으니 그 심정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차라리 손을 빨리 빼내든가. 그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한 꼴로 눈알만 굴리고 있으니 어찌 보면 답답했다. 루카가 지켜보다 마지못해 나섰다.
“이만 가시지요. 저들이 거부한다 해도 우리가 저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있음은 전 영계가 알고 있는 일. 이만 하면 됐습니다. 생명이 경각에 달려도 저럴 수 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흐음, 그래. 내가 참아야지. 세상 물정 모르는 답답한 위인들하고 내가 무슨 말을 더 나누겠는가. 저런 위인들에게 일말의 희망이나 걸어야 하는 영계의 운명이 안타까울 따름이로다.”
그럴 듯한 말로 훼손된 체면을 세어 보려 했지만 누구 하나 그렇게 보아주지 않는다. 오늘이 슈트레 생애 최악의 날임은 그나 주변에 있는 영자들이나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래저래 체면을 구긴 슈트레는 아무 소리 않고 선발대의 앞길을 열었다. 그들이 영자들의 환호를 받으며 멀어져 가는 걸 그는 멍한 시선으로 쳐다본다.
“왜 그러셨습니까?”
“…… ”
“조금 전 설사 아레나가 슈트레 님을 공격한다 해도 저희들이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아레나는 결코 공격하지 않았을 겁니다.”
“천만에…… 너는 모른다. 그녀의 기운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정말…… 꼭 죽을 것만 같았어. 이런 참담한 심정은…… 처음이다.”
‘이제 보니 아레나가 슈트레에게만 기운을 뻗쳤나 보군. 그래서 그렇게 얼어 있었던 거였어.’
루카는 아레나의 능력이 생각보다 더 가공하다는 점에 놀라워했다.
‘역시 페나인 전투의 최후 생존자라는 건가? 무한계 최고 여전사의 명성이 괜히 생겨난 건 아니구나.’
낭패한 신색으로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는 슈트레 일행. 그 일행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라치오는 친구들을 향해 말했다.
“보았느냐. 내가 왜 아레나를 우리 일에 끌어들이려 했는지를 말야. 그녀의 진가는 세상에 완전하게 드러나지도 않았어. 아난다 수련자야 원래 극강한 실력자라지만…… 아레나 역시 대단하지.
슈트레는 상대를 잘못 고른거야. 놈은 배경만 믿고 설치는 철부지에 지나지 않지. 저런 놈을 꺾어 앉히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가 지금껏 참고 기다렸던 건 대어를 낚기 위함이지, 저런 잔챙이를 노리기 위함이 아니었어.
이제 때가 온 거다. 머지않아 세상은 우리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될 거야. 그때가 되면 우리들의 명예에 흠집을 낸 놈들을 모조리 잡아다 그들의 어리석음을 제 입으로 토해 놓게 만들겠다.”
“라치오, 슈트레의 목은 내가 딴다. 약속해라.”
“그래, 슈트레는 네 거다.”
로이는 과거의 치욕을 다시 한 번 뼛속깊이 되새겼다.

선발대가 뜰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영자들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들의 진심 어린 기대감을 반영하듯 선발대의 뒤를 줄기차게 따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힘껏 소리를 내어 선발대를 연호하기까지 했다. 다분히 자연스런 발로였으므로 저마다 흥분을 감추지 않고 있었고 이대로 조금만 더 분위기가 고조된다면 전쟁을 앞둔 출정식이 부럽지 않을 지경이었다. 뜰에서 이런 분위기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것은 영자들 모두에게 깊숙이 감추어져 있던 잠재된 불만의 적나라한 노출이기도 했다.
선발대는 마음 한쪽이 찡해지는 걸 느끼고는 애써 태연한 척하느라 힘들어했다.
광명을 가져 올 것이라 믿는 영자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들이 이렇게 환호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무한계가 지금처럼 극한 상황까지 치달아올 동안에도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외면만 해왔던 선계와 천상계가 아니던가. 그들이 이런 식으로나마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는 점이 모두에게 작은 희망을 던진 것이다.
아직은 영자들 가슴에 천상계나 선계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무한계가 아무리 크고 영자들의 수가 많다지만 여전히 천상계나 선계가 영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파천은 변화하는 전경에 거듭 놀라워했다. 뜰을 벗어나자 곧장 울창한 숲이 나타나는가 했더니 그곳을 벗어나자 깎아지른 단애가 끝없이 펼쳐져 있지 않은가. 놀랍게도 그런 곳에마저 길은 잘 닦여 있다는 점이었다. 파천은 엉뚱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누가 길을 닦았을까? 이들에게는 길이 필요 없다. 그럼에도 평탄한 길을 닦아놓은 이유가 뭘까?’
사실이 그랬다. 지금 선발대의 움직임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닥에서 한 자 정도 떠서 이동해 가고 있었다. 그들은 굳이 걷지도, 뛰지도 않았으며 허공높이 치솟아 오르지도 않았다. 강이 흘러 가듯 바람이 불어 가듯 너무도 자연스런 모습들이었다.
파천 역시나 그들 가운데서 동일한 동작으로 별 어려움 없이 이동해가고 있었다. 그는 프리즈마를 운용하는 게 무척 자연스러워 보였다. 처음에 약간의 걱정이라도 가졌던 자들은 파천의 능숙한 동작에 마음을 놓는 눈치였다. 파천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전음을 펼쳐 아난다에게만 물었다.
(혜능, 길을 누가 닦아 놓았지? 그리고 필요도 없는 길을 닦아 놓은 이유가 뭐야? )
“그건 내가 말해 주지.”
옆에 있던 아레나가 갑자기 끼어들자 파천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전음을 들었단 말인가?’
“뭘 그렇게 놀라는 거야?”
“아, 아냐.”
“길뿐만이 아니라 조금 전 우리가 지나쳐 왔던 모든 풍경이 누군가에 의해 조형된 거야. 영계는 원래 비어있는 공간이었어. 메테우스 님이 처음 무한계를 열었다는 건 달리 말해 허공중에 대지를 조성해 갔다는 의미야.
그곳에 영자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고, 새로운 환경들이 만들어져 갔지. 지금도 마찬가지야. 무한계는 끊임없이 확장되고 있어. 이 길을 닦은 자는 아마도 여행하는 영자들의 편의를 위해서였을 거야. 방향을 잃고 헤매지 말라고 말야.”
파천은 눈앞에 펼쳐진 모든 전경이 사람, 아니 영자들이 만들었다는 걸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놀랍군, 놀라워!”
선발대의 t이동 속도는 일정했다. 파천의 현재의 속도를 가늠해 보았다.
‘이 정도의 속도라면 중원을 하루 만에 왕복하고도 남을 정도야.’
그럼에도 스스로 힘겹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무척이나 신기했다.
“자, 이제 뜰을 완전히 벗어났으니 잠시 쉬었다 갑시다.”
아난다의 제안에 모두는 한 동작으로 멈췄다.
그들이 멈춰선 곳은 막 넓은 초원이 시작되는 지점이었다. 낮게 깔린 풀들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풍경에 파천은 마음이 아늑해지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아난다가 한곳에 자리를 잡고 앉자 다른 이들도 근처에 편하게 앉는다. 그런 중에도 그들의 위치는 교묘하게 파천을 보호하는 형국이었다.
“이동 경로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려야겠군요. 남부권에서는 그다지 큰 위험은 없겠지만 그래도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직선을 택해서 갈 경우 우리는 남부권에서만 열두 개의 매소를 지나쳐야 합니다.”
매소는 뜰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제야말로 무한계로 들어섰다는 말이기도 했다. 너울이 질문했다.
“모든 매소를 다 지나칠 생각이십니까?”
“굳이 그럴 이유는 없겠지요. 상황에 따라 대처하겠습니다. 매소의 간격을 따져 보아 휴식을 취해야 할 시점이면 매소에 들되 그렇지 않으면 그냥 우회해서 가겠습니다.”
아레나가 바닥에 지도를 그리며 아난다를 쳐다보았다.
“우리가 있는 곳이 이곳입니다. 아난다 님의 말씀대로 직선을 택하게 되면 열두 매소를 거쳐야 하는 건 맞습니다.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몇 곳은 피해 가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곳이 어디죠?”
“바이롬 전사단의 여역인 이곳과 불칸의 성. 전사총이 있는 이곳,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행자들의 무덤이라 불리는 바로 이곳입니다.”
역시 아레나는 무한계 곳곳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지적에 모두는 고개까지 끄덕이며 동의를 표시했다. 이때 파천이 입을 열었다.
“우리 선발대의 역할을 다시 한 번 짚어 보아야겠군. 그렇게 모두 피해 갈 것이면 굳이 요란을 떨며 출발할 필요가 없었지. 광명을 가져오는 것만 목적이라면 윟머 지역을 피해 신속하게 진행하는 게 나을 것이지만 그것만이 우리 역할은 아니잖아?”
“그래서 어쩌자는 거지, 파천?”
“어쩌긴…… 모조리 부딪쳐 보는 거지. 바이롬이든, 불칸이든 부딪쳐 보고 그들의 입장을 알아 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겠어? 앞으로도 마찬가지야. 난 우리 선발대의 사명이 그거라고 생각하는데, 적과 동지를 구분하고 끌어 들일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결집시켜 가는 것. 윟멍르 각오하고 우리를 최대한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해.”
“네 말에도 일리는 있지만 그건 너무 무리한 발상이야.”
“혜능, 네 생각은 어때?”
아난다는 고민하는 눈치였다. 아레나의 견해에도, 파천의 생각에도 나름대로 동의할 부분이 있었다. 선발대의 최후 결정권은 자신에게 있었다. 아난다는 파천을 다시 한 번 응시했다.
‘성패는 미완의 파천 님에게 달렸다. 저 분에게 좀더 많은 기회를 주는 게 나중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을까……. 수호자님의 그 말씀은 이런 상황까지 염두에 둔 것일지도 모른다.’
아난다는 좌중을 둘러보다 결심한 듯 말했다.
“모두에게 동의를 구할 일이 있습니다. 선발대의 지휘 체계를 다시 재조정해야 할 듯 합니다. 현재는 제가 선발대의 대장 노릇을 하고 있었지만…… 제 권한을 파천 님에게 양도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모든 결정권은 파천님에게 있음을 밝힙니다.”
폭탄선언이었다. 아레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영자들은 강한 거부함을 드러냈다. 아레나가 이빨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그것 괜찮을 듯합니다. 저는 동의합니다.”
그녀의 신속한 동의에도 불구하고 모두의 얼굴은 편치가 않았다. 파천은 그들모두에게 불안감을 주는 미숙한 애송이에 불과했다. 아난다의 절대적인 신뢰도, 수호자의 안배도 이런 그들의 관점을 하루 아침에 뒤집을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영계에 대한 적응력을 이제 막 갖추기 시작한 어설픈 애송이에게 자신들의 생명과 나아가서 영계의 운명을 맡겨야 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일까. 모두의 생각을 대변하듯 너울이 강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그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어찌 파천에게 선발대에 대한 명령권을 이양하신다고 하시는 겁니까? 무슨 생각이 있어 그런 결정을 하신 거겠지만 저희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부탁해도 안 되겠습니까?”
아난다의 간청에 너울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무초선인이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십시오. 그리 쉽게 결정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이번엔 이사나천의 이레네까지 거든다.
“그렇습니다. 너무 성급한 결정이신 것 같습니다.”
아레나는 그런 그들을 한심한 듯 쳐다본다.
“이것 다들 왜 이러는지 모르겠군. 설마하니 파천을 믿지 못해서란 말인가? 혹여 그가 잘못된 결정을 내릴 시에는 우리가 견제하면 되는 거고, 사전 지식이 부족하다면 옆에서 보좌하면 되잖아! 어차피 끝까지 갈 장본인은 그야. 우리는 그를 보호하는 역할이 전부고. 자신이 갈 길을 스스로 결정하게 하는 건데 왜 이리 반대가 심한거지?”
아난다 역시 자신의 뜻을 결코 굽힐 생각이 없음을 재차 밝힌다.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일 필요까진 없습니다. 파천 님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한다는 의미일 뿐 크게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제 결정에 반대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난다는 더 이상의 논의를 피하고자 아예 딱 잘라 결정을 내려 버린다. 불만이 많았지만 다른 대원들은 입을 꾹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작 장본인인 파천은 영 달갑지 않은 심정이었다.
“혜능, 지금의 결정에 나는 승복할 수 없어. 내 의견은 무시되어도 좋은 건가? 난 아직 선발대를 이끌 만큼 상황 파악에 능숙하지 못하고 사전 지식도 부족해. 상황이 위급해지면 일사불란한 지휘통제가 필요한 법인데…… 그때는 어쩌려고 그러지?
불신이 깊으니 설사 내가 결정한다 해도 누가 자진해서 따라 줄까? 결국 결속력은 약화되고 임하는 자세 또한 헤이해질 건 뻔한 일. 내 스스로 그럴 만한 자신이 생긴다면 또 모를까. 지금의 결정은 성급한 감이 있어 보여.
그러니 일방적으로 결정을 확정할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는 게 나을 것 같군. 솔직하게 말하면…… 나 바보 되기 싫어서 그래.”
파천은 마지막에 장난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 썩 좋은 기분은 아닐 텐데도 그런 분위기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선발대의 분위기가 어색해진 건 당연했다. 미타가 손바닥을 마주치며 주위를 환기시킨다.
“자, 자. 그럼 그렇게 결정된 걸로 하고 이제 또 움직여야 하지 않겠어요?”
아난다는 자신의 결정을 강경하게 밀어붙일 수 없었다.
“그럼…… 파천 님의 의견을 존중해 일단은 유보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모두들 다시 한 번 심사숙고 해주시길 당부드립니다.”
선발대는 다시 앞을 향해 전진해 갔다. 그들은 여정이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기약할 수 없는 난관들이 그들 앞에 잔득 웅크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중에 그것을 겁내거나 피하고자 하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서로에 대한 신뢰와 결속력만이 위기 가운데 빛을 발할 것이다. 그들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주지시켰다.

그들은 별 어려움 없이 빠르게 전진해 갈 수 있었다. 간혹 영자들을 만나긴 했지만 전혀 불순한 의도가 없는 단순한 여행자에 불과했다. 첫 번째 매소를 얼마 남기지 않고 막 산의 정상으로 오르려던 때였다. 제일 앞서 있던 너울이 손을 들었다. 일행의 움직임이 동시에 멎는다.
“누구냐? 썩 나서거라.”
너울이 앞으로 조금 튀어나가자 그 뒤를 무초와 마고가 따랐다. 이미 약속된 움직임인 듯 신속했다. 파천은 너울이 주시하고 있는 산마루의 큰 나무를 쳐다보았다. 측백나무처럼 생겼는데 잎이 삐죽하고 검붉었다. 가지들은 위로 솟구쳐 많은 팔을 하늘로 향하고 잇는 듯 묘하게 생겼다.
너울의 외침소리에 호응이라도 하는 것처럼 가지들이 마구 떨림을 보였다.
“그대들은 선발대가 맞는가?”
파천은 순간 귀를 막고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서고 말았다. 이렇게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자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너울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조금 전의 긴장감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는 상대가 누군지를 짐작한 듯했다.
“이것 영광인걸. 자하린에 그대가 와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던 일인데 말야. 우리를 반겨 주러 왔을 리는 없고…… 무슨 용건인가?”
“역시 소문대로군. 아난다 수련자와 여전사 아레나 그리고 선계의 말썽꾸러기 너울까지. 아주 흥미롭군.”
“그대와 노닥거릴 시간이 없다. 무슨 잉ㅍ로 우리 앞을 막아선 거지?”
“자하린에 들어가지 마라. 그걸 알려 주려고 왔다.”
“왜지?”
“그대들은 저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가? 이미 무한계는 그대들이 알고 있던 곳이 아니다. 검은 저주의 바람이 자하린에까지 손을 뻗쳤다. 돌아가라. 전진하고 싶다면 힘을 모아서 오라. 천상계와 선계의 전 힘을 결집시켜서 쓸어버릴 각오를 하고 오라.”
파천의 옆을 지키던 아난다가 한발 앞서 나가며 조용하게 말했다.
“모습을 보이시오. 자하린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그대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어 하는 걸 다시, 자세하게 말해 주시오.”
“아난다 수련자, 그대는 나를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을 잘 알고 있소. 선발대에 그대가 포함되어 있다는 걸 듣고 난 선발대를 돕고 싶은 마음이 들었소. 그렇지만 그럴 수가 없소. 그만큼의 용기가 없기 때문이지. 난 불가능한 일에 매달려 헛되게 소멸되고 싶지는 않거든.”
나무가 위로 쑥 솟구치더니 서서히 기울어지며 땅으로 넘어진다. 파천은 자세히 보고 있다 놀람의 기성을 발했다. 이제 보니 그 거대한 나무가 뿌리 채 뽑혀 나간 것이었다.
나무가 넘어지고 나자 땅에서 무엇인가가 천천히 올라오는 게 보였다. 얼굴이 밤하늘을 보는 것처럼 새카맣다. 머리털이 있어야 할 부분에는 촘촘한 가시가 돋아나 있고 놀랍게도 몸통엔 팔이 달려 있지 않았다.
땅속에 구덩이를 파놓고 있다 상체를 일으킨 자는 상당히 큰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파천은 그의 두 눈이 멀리서도 똑똑히 보일 정도로 크고 맑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다. 팔이 없는 게 아니라…… 저럴 수가.’
파천이 이렇게 놀라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괴상하게 생긴 자의 팔이 갑자기 생겨났기 때문이다. 아니, 자세히 보니 팔이 등 쪽에서 어깨를 거쳐 휘어나오는 게 아닌가? 파천은 이 믿지 못할 장면을 신기해하며 돌아가는 상황을 가만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자하린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대지가 전해주는 소리로 저들을 느낄 수가 있었지. 그러니 내 충고를 받아들여 그냥 돌아들 가라. 내가 당신들 앞을 막아선 것도 나로서는 대단히 큰 용기를 낼 것이다.”
“당신은 구루족인데 어떻게 이곳까지 흘러 들어온 거지? 구루족은 북부권을 잘 떠나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정말 소식에 어둡군. 우리 부족이 북부권을 떠난 지는 꽤나 되었다. 우리 또한 전쟁의 소용돌이를 피하지는 못했지. 난 족장님의 명에 따라 새로 정착할 땅을 물색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다 이곳까지 흘러 들어온 거지.
그대들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난 오랜만에 희망이라는 걸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적은 너무 강해. 그대들은 아직 몰라. 나는 곳까지 오며 많은 걸 보고 느낄 수 있었다. 더 이상 희망은 없어. 이미 모든 건 결정된 것이다. 나도 곧 부족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개척되지 않은 곳을 찾아 떠날 참이다. 무한계는 곧 죽을 것이다.“
아레나는 그런 그를 비웃었다.
“구루족 족장이라면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대는 열셋의 파견자 중의 하나겠군.”
“그렇다.”
“그대가 보고 느낀 것은 그대의 판단일 뿐 우리 또한 그러리라고 단정하지 마라. 그리고 네가 그렇게 우는 소리 하지 않아도 현 무한계가 어떤지는 잘 알고 있다. 너울, 앞을 열어라.”
너울은 뭔가 불안한 듯 아난다를 쳐다보았다.
“충고는 고맙소. 그렇지만 우리는 가야 하오.”
“어리석구나. 자하린에 누가 와 있는지 아는가?”
“누가 와 있는데?”
너울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 구루족 영자의 얼굴이 푸들푸들 떨렸다.
“발락의 도살자가 와 있다. 뿐만 아니라 중부권 최강 전사단 중 하나인 붉은 전사, 롬멜의 일개조도 와 있다.
바이롬 전사단의 전사들은 그 근처에서 숨죽이고 눈치만 보고 있지. 크크크, 남부권의 애송이들은 감히 근접하지도 못하고 있어. 그들뿐만이 아니야. 도처에 강자들이 득실대고 있어. 왜 그들이 이 변방에까지 와 있을까?
바로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이 중에 과연 그들을 겁내지 않을 자들이 몇이나 될까? 아난다 수련자와 아레나 정도겠지. 아레나도 내 충고를 무시하겠는가.”
파천은 그들이 그토록이나 대단한가 싶어 아난다와 아레나의 표정을 살폈다. 표정의 변화는 없어싿. 다른 대원들은 그 앞쪽에 있었던지라 표정을 알 수는 없었다.
“자, 그대로 전진하세요.”
아난다는 침착하게 명을 내렸다.
“아난다, 어리석구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것을.”
구루족 영자의 몸이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땅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너울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꼼짝하지 않았다. 너울이 그러고 있자 뒤에 서 있던 각시가 재촉하고 나섰다.
“너울, 뭐 하고 있는 거야?”
“어, 그, 그래.”
선발대는 다시 앞을 향해 전진했다.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움직이는 속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구루족 영자가 거론한 강자들을 듣지 못한 것처럼 대형도 바뀌지 않았다. 그렇지만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선발대 전체를 휩싸고 있었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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