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32화 : 메덴과 전사평의회

랜덤 이미지

황제의 검 – 132화 : 메덴과 전사평의회


메덴과 전사평의회

루딘의 비행매소에 뒤처져 있던 선발대원들까지 합류했다. 그들은 그다지 크게 달라 보이는 점은 엿보이지 않았으나 어딘가 모르게 믿음직해 보이기는 했다. 파천이 다른 이들의 소식을 물었을 때 라미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천상계에 속한 이들은 곧바로 공간이동 되어 갔기에 좀 늦을 거야. 나머지는 곧 합류하겠지. 큰 기대는 갖지 마라. 그들 중 합류할 자는 극소수일 테니.”
라미레스와 아난다가 서로의 의견을 절충해 제안하면 파천이 승낙하는 형식으로 선발대의 진로는 결정되었다.
그들은 비행선을 떠나 중부권으로 들어섰다. 예전과 비교해 보았을 때 선발대가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라면 파천을 제외한 모두가 라미레스의 눈치를 살핀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수가 이동해 가는 데도 말을 아끼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전체적으로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가끔씩 떠드는 이가 있어 살펴보면 역시나 라미레스가 아니면 가끔씩 튀어나와 지껄이는 아그립바 정도였다. 라치오가 그들 중에 당당히 끼어서 행동하는 게 또 하나의 달라진 풍경이었다.
록페른 산은 무한계에서도 특이한 곳이다. 이곳은 다른 곳들과 달리 비교조차 용납하지 않는 엄청난 중력이 작용한다. 술법이나 진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연적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누가 무엇으로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록페른 산의 정상까지 오르기 위해서는 신문과 능력의 고하를 막론하고 두 발로 걸어서 오를 수밖에 없었다.
만약 누가 있어 그 산의 정상에 날아오르기라도 하는 날이라면 아마도 전 무한계 영자들은 그를 최강이라 외치며 서슴지 않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것이다. 망ㅎ은 시도가 있었지만 그건 한낱 시도에 그칠 뿐이었다.
선발대가 산 중턱에 나타났다. 일렬로 서서 험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몇몇 대원들은 힘에 부친지 숨을 헐떡이기까지 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몇 걸음을 딛는 것으로도 상대하기 벅찬 강자와 몇 번의 공방을 한 것만큼이나 쉬이 피로하게 만들었다.
제일 앞서 힘차게 걸음을 딛던 라미레스가 뒤를 돌아보며 핀잔을 준다.
“어이, 거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힘들면 언제라도 이탈해도 좋다.”
라미레스는 틈만 나면 그런 말을 했다. 굳이 애써 가며 이 일에 참여할 이유가 없다는 견해였다. 무슨 숭고한 희생이라도 된다면야 말리지 않겠지만 자신의 판단으로는 모든 게 하잘 것 없는 짓이 될 공산이 크다고 말했다. 그런 일에 분명한 목적의식도 없는 이들이 참여하며 고생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었다.
바로 뒤에서 걷던 파천은 라미레스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리 앞장 서기난 해.”
파천의 핀잔에 라미레스는 겸연쩍은 표정을 하고는 다시 힘찬 걸음으로 앞장서 갔다.
이들이 향하는 곳은 록페른의 정상이었다. 처음에는 전혀 예정되어 있지 않은 곳이었는데 돌연 라미네스가 필히 가야할 이유가 있다고 주장했다. 파천을 떼어 놓고 가기는 안심이 되지 않았기에 결국은 모두가 동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반 영자들은 오르기를 생각조차 하지 않는 곳이 바로 이 산이었다. 그리고 절대로 고만고만한 실력을 가진 무리로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잘못되는 날에는 절반도 오르지 못하고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기진맥진한 채 누군가의 구조를 기다려야한다면 이보다 더 곤란한 경우가 어디 있겠는가. 어쩌면 애타게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다 소멸을 맞아야 할지도 모른다.
록페른의 정상은 밑에서 보기와는 다르게 매우 평평했다.
정상에 서자 거짓말처럼 몸이 가벼워졌다. 전신을 땅속으로 끌어들일 것 같은 막대한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너울은 지금까지 오르느라 힘든 건 모조리 싹 잊어버리고 연신 감탄성을 연발했다.
“이야 끝내 주는 데였군. 이런 곳인 줄 알았으면 진작에 와보는 건데.”
그가 이렇게까지 환호성을 질러 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탁 트인 시야가 먼저 모두를 반겼다. 나지막한 융단이 너른 정상을 꽉 채우고 있는 듯한 전경이었다. 키가 일정한 가지각색의 꽃들이 저마다 아름다움을 뽐내며 일정 구획을 차지한 채 피어나 있었는데 그것이 마치 솜씨 있는 화가가 그려놓은 잘 정돈된 풍경화 같았다.
이름 모를 꽃들에는 어김없이 기이하게 생긴 곤충들이 들러붙어 있다. 각시가 손을 살짝 내 뻗어 만지려 하자 투명한 날개를 뻗어 쏜살같이 멀리 달아나는 것이었다.
차마 발을 디뎌 훼손시킬 마음이 가시게 만드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길은 없었다. 라마레스가 허공에 두둥실 뜬 채 앞으로 나아갔다. 그 뒤를 다른 이들이 속속 따르기 시작했다.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길 왜 오자고 했을까, 파천은 의문이 들었다. 묵묵히 뒤를 따르다 결국은 입을 열고야 말았다.
“무엇 때문이지?” “반드시 만나야 할 자가 있다.”
그가 강조할 정도면 중요한 인물일 것이다. 파천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이었다.
“저기다. 여전하군.”
얼마나 왔을까, 라미레스가 가리키는 곳에 한 채의 석옥이 주변의 풍경을 전혀 훼손하지 않은 채 동화되어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에 누군가 살고 있으리란 생각은 전혀 들게 하지 않는 전경이었다.
“신선이 산다면 아마 이런 곳에 살 거야.”
파천이 흘린 말에 라미레스가 웃었다.
“선계의 신선들은 거대하고 화려한 궁전을 짓고 살지 이런 데서 살지 않는다.”
뒤쪽에 약간 처져 아름다운 꽃들의 자태에 눈길을 빼앗겼던 너울이 압이 한 뼘이나 삐죽 튀어나와 툴툴 거렸다.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저만 해도…….”
“네가 신선 축에나 끼냐?”
얼른 입을 다물어 버린 너울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구시렁댄다.
석옥의 형태가 일목요연하게 파악될 거리까지 가까워지자 라미레스가 모두를 그 자리에 멈추게 했다.
“잠시 이곳에서 기다려라. 파천, 따라와라.”
그만을 대동하고 석옥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다.
“거기 멈추지 못할까! 여기가 어디라고 네 놈이 또 얼굴을 디민단 말이냐!”
록페른을 함몰시킬 듯한 고함소리에 파천은 얼마나 놀랬던지 심장이 덜컥 멎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잘 있었나?”
라미레스는 전혀 개의치 않고 소리의 임자를 불러냈다.
응답하지 않는다.
“들어가겠네.”
“들어오지 마라.”
“들어가네. 자, 가자.”
라미레스가 석옥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아다니다 그 자리에 멈춘 채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놈이 아예 입구조차 없애 버렸구나.’
자세히 보니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없었다.
“하하하하, 어찌 들어올 셈이냐?”
“독한 놈. 문을 아예 없애 버리고 그 곳에 들어앉아 도라도 닦고 있나보군. 어서 문을 열어라. 아니면 네 집을 깨부순다.”
“그랬다간 다시는 날 볼 수없을 줄 알아라.”
“그럼 이번까지는 그 잘난 얼굴을 보여 줄 참인가 보군. 자, 수고스럽겠지만 부탁하네.”
“에잉, 저 놈은 누가 좀 안 잡아 가나.”
“날 잡아 갈 놈들이 누가 있어야지.”
파천은 기다렸다. 어조가 훨씬 부드러워져 있었고 내용으로 보아도 안으로 들일 것 같았다.
“뭘 그리 꾸물대는 거냐, 이놈아.”
라미레스의 독촉에 예의 그 음성이 투덜댔다.
“저놈의 성질머리하고는.”
슈우욱
‘기상천외한 방법이로군.’
집을 통째로 들어 올리고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는 이가 있었다. 바닥이 뚫려 있을 거라고는, 그리고 설마하니 저런 식으로 안팎을 오갔으리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라미레스와 파천이 안으로 들어서자 집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밖에 서 있던 아난다와 일행은 물끄러미 그 장면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어쩐 일이냐?”
사방 2 장여 정도나 될까 싶은 작은 공간이었다. 안에는 아무런 흔한 장식의 탁자도 보이지 않았다. 맨 바닥에 덜퍼덕 주저앉은 채 곱지 않은 눈길로 심상찮은 라미레스의 방문을 캐물었다.
“내놔라.”
“뭘 말이냐?”
동그란 얼굴이 더 동그래 보인다. 퉁방울만한 눈을 크게 뜨자 튀어나올 듯싶었다. 왜소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큰 손으로 자신의 매끄러운 턱을 쓰다듬는다.
“내가 맡겨 놓은 걸 내놓으란 말이다.”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짐작 가는 바가 없다.”
눈을 슬쩍 내리깔며 고개를 저어 보인다.
“네 놈과 노닥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다. 빨리 안 내놓으면 네 놈이 아끼는 화원을 뒤집어 엎어 버리겠다.”
라미레스의 으름장은 확실히 효과가 있어 보였다.
“뭐야? 어디 해봐라, 이놈아. 이제는 내게 협박까지 해?”
“내가 못할 것 같으냐!”
정말로 그럴 심산인지 손을 뒤로 슬쩍 내미는 순간.
언제까지나 꿈쩍하지 않을 것 같던 상대가 라미레스의 손을 부둥켜안고 어울리지 않는 웃음을 헤벌쭉 짓고 만다.
“헤헤, 왜 또 이러실까. 자, 자 장난 그만하고 우리 진지하게 얘기해 보자고.”
“맡겨 놓은 것 내놔.”
“알았다, 이놈아. 내 놓으면 될 것 아냐. 쪼잔한 놈. 그 동안 네 놈이 날 부려먹은 걸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네 놈이 양심이라는 게 있는 놈이라면 내게 이럴 수는 없는 거다. 이 천하의 유일무이한 날강도 같은 놈아.”
파천은 그가 궁금했다. 라미레스와 격의 없이 이놈, 저놈 할 수 있는 자가 그리 흔하겠는가. 그런 점에서 눈앞의 상대는 파천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인물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해 봐라. 오래 된 일이라 까먹었다. 뭘 내놓으라는 건지 말해봐.”
“알파이온!”
“알파이온? 그걸 나한테 맡겼었나?”
“이놈이 또!”
“아, 알았다. 잠깐만 찾아보고.”
다급하게 말을 잇더니 손바닥을 펼치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워낙에 많을 걸 감춰 두고 있으니 찾는 데 시간이 좀……. 헉, 알았다. 여기 있다, 여기 있어.”
파천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장면에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손바닥을 펼쳐 보이는 데 그곳에 동그란 형태의 구멍이 뚫리더니 무엇인가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것이었다. 구멍 안으로 넓고 큰 공간이 보였다.
‘이걸 믿어야 한단 말인가?’
“그 동안 많이도 숨겨 놓았구나.”
“히히, 다 내 밑천 아니겠냐. 내가 무슨 낙이 있어야지. 그건 그렇고 이건 무엇에다 쓰려고?”
“그건 알 필요 없다.”
손바닥에 완벽한 형체를 다 드러내 놓자 구멍이 점차로 작아졌다. 곧 언제 그랬느냐 싶게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손바닥 위에 올려진 건 영롱한 오색의 빛을 띤 작은 수정구슬이었다. 라미레스가 그걸 향해 손을 뻗자 얼른 손을 움켜쥔 상대가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내가 맞춰 볼까? 알파이온은 원령을 구별해 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원령체를 수련하는 자들은 혈안이 되어서 찾는 보물 중의 보물. 이건 네게 전혀 소용이 없는 물건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저놈 때문인가?”
라미레스가 잇몸까지 드러낸 채 씨익 웃었다.
“그래 잘 맞췄다. 장하다, 이놈아.”
“흐음, 원령체 수련을 쌓은 놈이라……. 생령이 원령을? 너 제 정신이냐?”
“너도 눈이 이제 다 되어 가는구나. 자세히 봐라. 내가 왜 이러는지를.”
파천은 전신을 훑듯이 스치는 상대의 눈빛에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군. 이것도 수호자의 짓이겠지? 하여간…… 괴물이로군, 이 녀석은. 너 그걸 알면서도 이 녀석을 완성시킬 참이냐? 잘못하면 재앙이 될지도 모르거늘.”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라미레스, 착각하지마라. 넌 일곱별이기 이전에…….”
“그만 둬. 나도 충분히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이니 더 이상의 잔소리는 사양한다.”
“으음…….”
라미레스의 손이 두툼한 상대의 손을 우악스럽게 움켜쥐더니 그 안에서 알파이온을 뺏어 들었다.
“나 그럼 이만 가마.”
“정 떨어지는 놈. 꼴도 보기 싫으니 그만 사라져라.”
상대는 무엇이 그리 못마땅한지 금세 뒤로 돌아 앉았다.
라미레스는 그런 건 신경도 쓰이지 않는지 파천에게 태연하게 말했다.
“볼일 다 봤으니 그만 가자, 파천.”
그리고 둘은 일어섰다.
“설마하니 내 손으로 문을 열고 나가란 건 아니겠지?”
두 말 없이 한 손으로 집을 들어 올린 상대는 여전히 돌아앉은 채였다.
집을 나서기 전 라미레스가 잠깐 멈추어 섰다. 돌아설 듯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신 라미레스는 영언으로 그에게 말했다.
[이제 시작해도 좋다.]
둘은 밖으로 나왔다.

루하스 강에서 있었던 사건은 전사들을 통해 무한계 전체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이 소식을 치앙마 역시 들었다. 그는 다급히 메덴의 원탁을 소집했다. 몇몇이 빠지기는 했지만 평소보다 많은 수의 수련자들이 참석했다.
치앙마의 들뜬 얼굴은 그가 얼마나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애쓰는 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그가 열을 낼 때는 가만 받아 주는 게 최상의 처신임을 보두는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전사평의회가 하룬에서 결성된다고 하오. 선발대는 현재 중부권을 종단하고 있소. 오늘의 의제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전사평의회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정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선발대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의논하는 것이오. 모두들 기탄없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해 주었으면 좋겠소.”
모두 심각한 척은 하고 있었지만 그다지 관심도 없는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을 아낀다는 표현이 옳으리라. 괜히 잘못 나서다간 본전도 뽑지 못한다는 걸 저어해서였다. 어쩔 수없던지 치앙마가 다시 입을 열었다.
“메덴의 공식적인 입장 표명이 있었음에도 전사들은 연합기구를 조직하려 하고 있소이다.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들 생각하시오. 우리가 이대로 가만히 있는다면 다른 영자들의 비웃음을 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내 생각은 이렇습니다. 먼저 원탁에서 결의안을 채택해 수련자를 급파했으면 하오. 먼저 그들의 뜻을 파악하고 나아가서 가능하다면 그들을 설득해 보기로 합시다. 그게 정 안 된다면 어쩔 수없는 일이잖소. 치는 수밖에.“
치앙마는 원래 전사들과 적대적인 관계를 원치 않는 입장을 취해 왔었다. 예전 페리칸의 일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를 불꽃 연못에 가둔 건 그로서는 최대한의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던 그가 돌연 입장을 바꿔 전사들을 공공연하게 무시하는 발언을 일삼는가 싶더니 급기야 그들을 치자고까지 한다. 입을 다물고는 있었지만 다른 수련자들은 속으로 욕을 해댔다.
원탁의 구성 인원은 적을 때는 십여 명에서 많게는 스무 명에 이른다. 그들은 다른 수련자들의 추천을 받아 원탁에 들게 되고 여기서 결정된 건 전체 수련자의 뜻을 대표한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어떤 사안도 원탁에서 조심스럽게 다뤄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걸 감안하면 치앙마는 원탁을 주재하기엔 지나치게 약점이 많은 위인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여전히 원탁의 주재자로 남아 있을 수 있는 데엔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 있었다.
수련자들 사이에서도 알게 모르게 성향에 따른 계파가 존재했는데 그 중에 최대의 계파를 꼽으라면 당연 바소름이 이끄는 곳이라는 데엔 이견이 없었다. 바소름은 치앙마의 오늘이 있게 해 준 장본인이었다.
바소름의 최대 적수는 대수련자 벵골이었다. 두 계파의 겨룸은 오랜 기간 동안 메덴을 이끌어온 힘의 근원이었다. 서로간의 경쟁은 알게 모르게 서로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등의 순기능을 해왔다.
이와는 달리 역기능도 많아 원탁을 차지하기 위한 암투가 빈번했다. 대체적으로 중립을 취해왔던 카포가 또 하나의 축을 담당하지 않았다면 메덴은 진작에 두 동강 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던 메덴에 변화의 바람이 분 것은 대수련자 벵골이 메덴을 떠나고부터였다. 그가 사라진 메덴은 바소롬의 차지가 되었다. 카포는 원래가 정치적인 입지에는 관심이 없던 그 누구도 바소름의 독주를 견제할 자가 없었다. 당연 원탁은 바소름의 계파원들로 채워져 갔다. 바소름의 제자이자 오른팔이기도 했던 이가 바로 치앙마였다. 그는 알고 보면 바소름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이런 힘의 구도로만 본다면 바소름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은 치앙마가 할 수 없는 일은 메덴에서 전무 해야만 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가 못했다. 예전 벵골을 따르던 수련자들의 수도 만만찮았고 카포도 알게 모르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치앙마의 전횡을 견제하는 이가 있었으니 메덴과 무한계의 무법자로 불리는 라미네스였다.
그는 어깨를 든든하게 하고 목을 곧게 하는 세력을 지니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 이름만으로도 모두에게 부담을 주는 인물이었다. 명성의 경중만으로 따져 보아도 치앙마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명망 깊은 아난다나 메사 같은 수련자들까지 은근히 치앙마를 견제하는 입장을 취하고 보니 그가 독단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던 그가 야심차게 시작한 일이 전사들에 대한 견제에 이은 핍박이었다. 의외로 생각대로 맞아떨어져 수련자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게 되었다. 전사평의회는 대체적으로 온건한 성향의 수련자들까지 치앙마의 편으로 끌어들이게 하는 시발점이자 자극제가 되었다.
게다가 전사들과는 상극이라 할 수 있는 카포까지 무게를 실어 주니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몸들을 사린다.
“전사평의회가 결성되면 우리와의 충돌은 불가피하게 될 겁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노골적으로 우리 메덴을 향해 성토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이런 시점이거늘 우리가 망설일 이유가 무에 있겠습니까?
다시 제안하겠습니다. 수련자를 파견해 그들에게 일차적으로 경고를 하고, 말을 듣지 않을 시엔 힘으로 와해시켜야 합니다. 제 뜻에 반대 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만약 여기서 반대가 나온다면 이 안을 다시는 원탁에서 거론할 수 없게 된다. 치앙마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반대는 아니오만…….”
치앙마가 가슴을 쓸어 내렸다.
“말씀하십시오. 수련자 스뎅.”
카포의 계파에 속한 수련자였다. 그라면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무력 충돌은 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시점은 그리 좋지가 않습니다. 우리를 제일의 적으로 여기는 대적자들이 나타났고, 제왕의 파견자들이 여기저기서 출몰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저 멀리서 마계가 입을 쩌억 벌리고 우리를 노려보고 있는 형국이니……. 이왕이면 좋게 대화로 풀어 나가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사실 전사들이 연합기구를 만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에 자위적인 방어를 도모하는 걸 아무도 뭐라 할 수는 없었다. 무가 봐도 매우 합당한 절차를 밟고 있는 그들이었다.
그런데도, 굳이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 게 뻔한데도 애써 참견하려한다. 거기에는 무한계를 주도하는 건 자신들이어야 한다는 일종의 오만이 바탕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적인 면에서 전사들이 훨씬 앞서기에 만약 메덴과 전사평의회간에 극적으로 동맹이라도 맺게 되는 날에는 대등한 지위가 형성 될 수밖에 없었다. 이걸 방비하기 위한 포석도 상당 부분 작용하고 있었다.
치앙마는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화가 되지 않는 상대니 그러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싸웁니까? 누구 좋아라 하고 말이요.”
“막무가내로 싸우자는 게 아닙니다. 일단은 점잖게 타일러 보고 그러고 나서!”
“내가 그들이라도 강행시켜 나갈 거요.”
“그러니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모인 게 아니겠습니까? 그 대책을 우리 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마련해 보자는 의미에서요.”
이미 결론은 나 있는 셈이었다. 단지 지금의 원탁은 형식에 불과했다. 메덴은 전사들의 연합기구를 인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힘으로라도 저지해야 한다. 대다수의 수련자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런 입장과 정반대의 노선을 택한 자가 없지는 않았으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원탁에 나갈 수 없는 약한 자들에 불과했다. 슬슬 분위기를 결정짓기 위한 치앙마의 마지막 말이 끝맺음을 준비했다.
“우리의 이런 배려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고집을 부린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동안 전사들의 분쟁으로 인해 무한계가 얼마나 시끄러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껏 참아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은 그들을 내버려 둘 수가 없습니다. 지금이 위기 상황이기 때문에 더욱 우리는 참아서는 안 됩니다. 하루 속히 무한계를 정비해 목전에 닥친 위기 상황들을 타개해 나가는 데 전력을 경주해야 합니다. 우리의 이러한 강력한 의지를 저들에게 보여 줘야 하는 것입니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이 안에 대한 최종 발언의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반대가 없다면 만장일치로 가결하도록 하겠습니다. 없으십니까? 없는 것으로 알고 가결하도록 하겠습니다.“
땅땅땅
일사천리였다.
“다음은 선발대에 대한 것입니다. 흐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들은 수호자의 안배에 의해 결성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영광스럽게도 자랑스런 수련자 두 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수련자 라미레스 님과 아난다 님입니다.
선발대는 파천이람 생령으로 하여금 광명을 가져오는 게 목적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꺼져가는 무한계에 새 빛을 던져 주고자 각 차원계에서 선발된 영자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당연히…… 그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야 하며, 필요하다면 그들의 여정에 힘을 보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루하스 강에서 대적자들의 비행선이 저질렀던 그런 만행을 또다시 준비하고 있는 자들이 이 무한계에 득시글거린다는 사실이지요.
우리는 그러한 불순한 의도를 지닌 자들을 색출해 저지하고 선발대의 여정이 무사할 수 있도록 기원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 생각으로는 메덴에서도 마땅한 적임자들을 선출해 그들과 동행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저의 제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기탄없이 의견을 개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지금 의장님의 말씀은 선발대를 돕고자 우리 쪽에서도 수련자를 파견해야 한다는 그런 뜻입니까?”
이번엔 어느 계파에도 속하지 않은 수련자였다. 치앙마는 최대한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 그렇죠.”
“라미레스 님이나 아난다 님이 계시는 데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요? 남부권이야 모르겠지만 중부권이나 북부권에서 드러 내놓고 선발대를 저지할 세력이 있습니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숨어 있는 적들은 의외로 많습니다. 이 점을 잊지 마시길. 또 혹시 압니까? 전사들이 그들의 앞길을 막을 지도 모릅니다.”
“설마하니…….”
“자, 또 다른 의견 없으십니까?”
치앙마는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은 모든 게 내 생각대로 잘 될 것 같구나. 선발대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감시하다 가능하다면…… 광명까지…….’
그가 짐짓 생각하는 건 다른 데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이후 파견될 수련자들은 그의 수족들로 채워질 게 뻔했다.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엔 자신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수련자였다. 치앙마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저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탁월하신 혜안이 엿보이는 제안이라 생각합니다. 누가 반대 하겠습니까? 이 모든 게 영계를 위한 일이거늘 반대란 있을 수 없습니다.”
치앙마는 괜히 얼굴이 뜨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대놓고 칭찬을 하니 그로서도 민망했던지 황망히 다른 의견을 물었다.
“지금은 전사들의 일 만으로도 벅찹니다. 분산시킬 여력이 있겠습니까? 물론 전력의 낭비라고 주장하는 건 아닙니다. 충분히 그럴 역량이 우리에겐 있습니다만……. 전사들이나 우리들이나 칠대부족도 선발대의 앞을 막지 않는다면 라미레스 님이나 아난다 님 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라 사료됩니다.
그러니 이번 안은 그다지 바람직한 건 아닌 것 같아 보이는군요. 제 의견을 다시 정리하자면 치앙마님과 기본적인 입장에서는 동일하고 또 동의하지만 지금은 그쪽보다는 전사들 쪽에 더 치중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원탁의 장점이자 단점이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단 하나만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어도 어떤 훌륭한 의견도 더 이상 진행시킬 수가 없었다. 수련자는 반대한다고 말하지 않고 곧바로 부결시켜 버린다고 했다. 생각이 바뀌지 않을 것임을 강력히 드러낸 것이다.
치앙마는 자신이 내 놓은 의견을 단 한번에 묵살시켜버린 수련자를 은근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이렇게 되면……. 내 쪽에서 비밀리에 실행할 수밖에 없겠군. 골치 아프게 되었군.’
오늘의 원탁은 그렇게 끝났다. 어떤 이도 반대 의사를 표명한 수련자가 다른 뜻이 있어서 부결시켰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는 충분히 그럴 듯한 근거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선발대의 행로는 이제 무한계의 영자들에게 가장 큰 관심거리였다. 그들이 지나는 것을 보기 위해 일부러 먼 곳에서 찾아 나선 이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선발대의 입장에서는 그리 썩 나쁜 기분만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반길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매소나 매소 주변을 지나게 될 때는 구름같이 몰려든 영자들 때문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게다가 아예 끝까지 동행할 심산인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졸졸 따라다니는 무리까지 생겨나고 보면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는 셈이었다.
파천은 이제 영계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알려졌다. 그전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라미레스와 페리칸, 카이로, 브라함과 페드로가 선발대에 합류한 이유가 컸다. 쉽게 대먄하기 힘든 이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는 건 일반적인 영자들의 입장에서는 뿌리칠 수없는 유혹이기도 했다.
이번엔 브라함과 페드로가 제일 앞서 있었고 그 뒤를 라미레스, 아난다, 파천이 따른다. 페리칸과 카이로는 파천의 옆에 바싹 붙어 있었다. 아레나와 앙샹뜨, 도나투스가 배후를 담당했으며 그 뒤를 나머지 대원들이 차지했다. 제일 뒤에는 라치오와 동료들이 걷고 있었다.
파천의 머리위에 앉은 채 손을 흔들고 있는 아그립바가 신이 나서 떠들었다.
“마치 완전자가 된 기분이군.”
완전자의 출현이 있을 때에나 연출되던 상황이 지금 눈앞에서 벌어진다는 뜻이었다.
파천은 이 때 다른 생각에 몰입하고 있었다.
‘천마의 말대로라면 난 수호자의 계획을 충실히 이행하는 꼭두각시밖에 되지 않는다. 내 의지라고, 내 삶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모든 것이 통제 가운데 있었단 말인가? 교묘하게도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안배하고 저항 없이 따르게 하다니. 메타트론도, 수호자도 영계를 그들이 원하는 구도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끝에 가서야 그들이 원하는 게 무언 지를 알 수 있겠지. 반발해 뜻을 꺾어 버려도 그것 또한 계산이 되어 있을 지도 모르지. 한심하군,’
파천은 설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아이들의 얼굴이 겹쳤다. 아이들은 금세 장성한 모습으로 교체된다. 머리를 흔들었다.
‘끝까지 간다.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끝까지 가보이겠다.’
단순한 오기만은 아니었다. 이때 앞서 가던 라미레스가 파천에게 일렀다.
[설란도 곧 합류할 거다. 많이 보고 싶겠지?]
말이라고 할까! 파천은 설란이란 이름만이라도 가슴 한 켠이 메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움의 파고는 드높았다. 사랑은 모든 걸 뛰어넘는 가장 단순한 욕구일지도 모른다. 곁에 함께 있고 싶다는 간절한 여망은 파천을 점차 갈증나게 만들었다. 그런데 먼저 걱정이 앞섰다.
‘그녀도 다른 모습일까?’
그럴 가능성이 많았다. 천상천에 속해 있어 영체를 입자마자 곧 바로 이동돼 갔다는 설란. 다른 천상계에 속한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다시 돌아와 자신 앞에 섰을 때 알아보지 못할까봐 걱정되었다. 낯선 느낌에 어색할까봐 염려된다. 그래도 보고 싶었다. 만나고 싶었다.
파천은 다른 찬인들의 소식도 궁금했으나 물어 보지는 않았다. 만날 이는 어떻게 해서든 만나게 되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앞을 향해 쭉 뻗은 길은 군대군데 움푹 패여 있는 곳이 보였다. 그 주위로 결투의 흔적이 여겨지는 파편들도 눈에 띄었다. 중부권에 들어선 것을 실감나게 하는 전경이었다.
라미레스가 말했다.
“이 주변은 벨하이족의 영토다. 그리고 그 주변에 세 개의 전사단들이 거점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쓸데없는 싸움에 휩쓸리지 않도록 모두 주의하도록.”
그의 충고가 아니어도 선발대들은 어느 정도 숙지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파천만 모르고 있을 따름이었다.
파천이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십여 장 뒤를 따르고 있는 무리의 수는 대충 셈해도 2백여 명은 넘는 듯했다. 그들이 왜 자신들을 따라 오는지 파천은 알 길이 없었다.
“저것들은 뭐야?”
아그랍바가 종알거리는 말에 파천이 시선을 돌렸다. 앞쪽 멀리 일단의 무리들이 열을 짓고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뭐지?”
파천의 물음에 라미네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별일도 아니니 신경 쓸 것 없다.”
그들과 가까워져 갔다. 무리 중의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매우 정중하게 청했다.
“선발대를 잠시 모실 영광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일 없다.”
라미네스는 더 이상의 대화조차 달갑지 않은지 짧게 거절했다.
“저희는…….”
“너희가 누군지 궁금하지도 않으니 그망 사라지도록. 더 이상 귀찮게 하면 적으로 간주하겠다.”
라미네스의 으름장에 상대는 기가 죽어 입을 달싹이기만 할 뿐 더 이상의 말은 늘어놓지 못했다.
“가자.” 선발대는 그들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까지 싸늘하게야 대할 필요가 있었나?”
“이놈 저놈 얘기 다 들어 주다간 어느 세월에 도착할까?”
딴은 맞는 말이었다.
라미레스의 염려처럼 이런 비슷한 상황은 몇 번이나 되풀이 되었다. 전사들로 보이는 이도 있었고, 독특한 부족의 모습도 보였다. 그들을 모조리 외면하며 선발대는 갈 길만을 고집했다. 예정된 곳만 거쳐 가고 나머지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상대조차 해 주지 않으니 쓸데없는 일로 시간을 소비하지 않게 되었다.
선발대가 속도를 붙이기 시작했다. 허공에 떠서 날아가는데도 앞을 박아서는 영자들은 줄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라미레스가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했다. 그의 방법은 간단했다. 앞을 막는 무리에게 겁을 주어 물러서게 하거나 말도 없이 한 곳으로 밀어내 버리고 갈 길을 가는 것이었다.
선발대는 이런 일로 인해 속도를 줄여야 할 필요가 없었다. 라미레스가 경계하는 건 여러 가지였다. 단지 시간과 심력의 낭비만을 경계함이 아니었다. 혹시라도 무리 중에 뒤섞여 있을 암수를 대비하는 면이 더 강했다.
선발대의 다음 목적지는 매소 하룬 이었다. 전사평의회가 열린다는 바로 그곳 이었다.
라미레스가 말했다.
“하룬을 지나면 그 뒤부터는 칠대부족의 거점지역이 나온다. 그리고 악독한 부족들도 상당히 많다. 내가 생각하는 위험지역은 거기부터다. 그 전에 별 다른 일은 발생하지 않을 거야.
하룬에서 전사평의회 모임을 지켜본 뒤 파천은 나와 함께 갈 곳이 있다. 그 동안 선발대는 하룬에 머문다.“
“어디를 가시려는 겁니까?”
“묻지 마라. 이건 다 파천을 위한 것이니.”
아난다는 굽히지 않고 물고 늘어졌다.
“파천 님을 동행시킨다니 저는 알아야겠습니다.”
“잠시 갔다 올 곳이 있다. 이건…… 수호자의 당부이기도 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수호자의 당부. 그 말에 아난다는 호기심이 동했다.
라미레스는 영언으로 아난다에게만 말해 주었다.
[메덴으로 갔다 오겠다.]
[메덴에는 왜?]
[목적지는 메테우스의 석탑이다.]
[수호자께서 그런 당부를 하셨단 말입니까?]
[그렇다.]
아난다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라미레스가 거짓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메테우스의 석탑에 가야할 이유가 아난다는 궁금했다. 그러나 사실 라미레스도 그 이유는 몰랐다. 파천을 그곳에 데리고 가야 한다는 부탁만 받았을 뿐이다.
메테우스의 강은 처음 메테우스가 천상계를 떠나 올 때만 해도 허공중에 흐르고 있는 한 줄기 신비의 강이었다. 그곳에 정착했을 때만 해도 천상계에서 볼 때는 무한계의 끝은 메테우스 강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중부권의 중심에서 서북쪽에 위치한 메덴은 무한계 중부권 전체로 보면 오히려 중심 쪽에 가까웠다. 하룬과의 거리도 그리 멀다고 할 수 없는 곳이 사실은 메덴이었다.
이런 점에서 하룬의 전사평의회 임시본부가 생겨 난다는 것에 메덴이 흥분하는 건 충분히 공감이 가는 일이다. 라미레스가 하룬까지는 별 일이 없을 거라 했지만 내심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이번이 세 번째의 휴식이다. 거대한 바위들로 치장한 산은 멀리서 볼 때와는 또 달랐다. 계곡마다 물이 가득 넘쳐흐르고 이름 모를 꽃들이 바위 틈새를 비집고 제 아름다움을 뽐내며 피어 있었다.
바람이 흔들 때마다 향긋한 향기가 하늘과 땅 위를 진동한다. 바위의 표면은 묻어날 듯 뽀얀 백색이었다. 대충 둘러앉아 편하게 휴식을 취한다. 라미레스는 잠시 어디 갔다 오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라치오는 동료들은 조금 떨어져 보여 있었는데 그들 중 밴살렛이 라치오에게 눈짓을 보냈다. 라치오가 물었다.
[왜?]
[우리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진행괴어 가고 있잖은가? 이래서야 우리 목적을 이룰 기회는 오지도 않을 것 같은데.]
[기다려라. 예상보다 선발대의 진용이 강해져서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있을 놈들이 아니다.]
[이런 대접을 받아가면서까지 붙어 있으려니, 원…….]
쿤사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는데 명상 중인 것 같았다.
[뭔가 잡히나?]
[아직.]
[라미레스는 지금 어디 있지?]
[산 주변을 돌아보고 있어.]
[다들 기운은?]
[전혀. 조금 멀리서 잡힐 듯 말 긋한 기운이 포착되기는 하는 데……. 모르겠다.]
그들을 주의 깊게 살피는 자들은 없었다. 너울은 아까부터 각시와 실랑이 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냐. 분명히 싸우게 되 거야. 메뎅니 가만 있을 리가 없다고.”
“메덴이 잠자코 있으면 별 일이야 있을라고.”
“메덴이 먼저 싸움을 걸면?”
“그럴 일은 없어.”
“햐, 얘가 내 말을 믿으려 하지를 않네. 이봐 아레나, 네 생각은 어떠냐?”
다리를 쭉 뻗고 누워 있던 아레나가 상반신을 틀며 대답했다.
“난 너울에게 한 표.”
그러자 이번엔 권터가 참견했다.
“나도 너울 쪽이야.”
모두 관심을 기울이는가 싶더니 너도나도 참여해 너울과 각시의 견해에 무게를 실어 주었다.
“아난다 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앙상뜨가 메덴의 수련자인 아난다에게 예상을 물었다. 아난다는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좋든 싫든 메덴은 자신이 속한 곳이다. 그곳의 치부를 스스로 들춰내는 게 내킬 리가 없었다.
“제 생각엔…….”
모두의 시선이 아난다에게 집중되었다.
“메덴이 선수를 칠 것 같습니다. 치앙마는 분명…… 그렇게 해서라도 주도권을 쥐려고 하겠죠.”
“결국 전쟁이 벌어진단 말인가?”
파천은 좀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어떻게 된 위인들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시기에 그런 어리석은 수를 두려하는 자들이 수련자라니.
“그렇게 되겠지요.”
“그럼 하룬을 거쳐 가는 건 다시 생각해 봐야 하는 건 아닐까?” “예정대로 한다.”
어느새 라미레스가 가까이 와 있었다. 그가 주변을 둘러 본 건 여기 도착할 때부터 께름칙한 기분 때문이었다. 뭔가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포착하지 못한 것이다.
“메덴이 하루를 친다면 우리도 휩쓸린 텐데.”
“메덴이 하룬을 공격할 가능성은 높다 할 수있지. 그렇지만 당분간은 아냐. 치앙마도 그리 한심한 수준은 아니거든. 아직은 명분이 없으니 대외적으로 그럴 듯해 보이는 제안쯤은 해 보고 나서 공격을 해도 하겠지.”
파천의 옆자리에 몸을 내려 앉힌 라미레스가 브라함쪽 을 본다.
“여길 떠나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돼.”
“우리는 신경 쓰지 마쇼.”
“아난다가 뭔가 제안을 했나 하긴 보군. 저 두 망나니가 끈질기게 붙어 있는 걸 보면 말이야.”
“참 나, 누가 누구 보고…….”
브라함은 기가 찼다. 따져 보면 다른 이들은 모르지만 라미레스가 그런 말을 할 입장은 아닌 것이다. 할 말은 꼬박꼬박 해대고 있었지만 라미레스와 마주 앉아있다는 게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하하하하, 그렇지. 내가 그런 말을 할 처지는 아니지. 하여간 선발대를 가만 살펴보면 인물 구성이 참 재미있단 말이야. 별의 별 천덕꾸러기가 다 모여 있군. 앞으로 어떤 자들이 도 섞여 화려하게 만들어 줄지 기대가 되는군.”
이 때, 페리칸은 파천의 옆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여기 온 건 파천 때문이었다. 마계에게 당한 걸 되돌려 주는 것. 함께 해야 할 일이었다. 단순한 앙갚음이라 해도 좋았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지존.”
“말해라, 광, 아니 페……리칸.”
아직은 어색했다. 아난다, 라미레스, 페리칸, 카이로라는 이름은 그에게는 아직 생소하고 낯설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 이름에 익숙 해져야한다.
“혹시라도……. 다른 이들이 참여하지 않는다 해도 실망하지는…… 마십시오.”
페리칸은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고 있었다. 인간세에서의 짧은 인연을 영계에서까지 이어 가기란 쉬울 수 없는 선택이었다. 더군다나 영계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건 더 했다. 그걸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별로 개의치 않아.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지. 너희들만이라도 난 만족한다.”
솔직한 파천의 심정이었다. 아무도 오지 않으리란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올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지존께서 광명을 가져오는 순간부터 우리의 반격은 시작될 겁니다.”
파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은 힘이 없었다. 상대해야 할 마계에 비하면 수적으로나 실력으로나 훨씬 못 미치는 건 사실이었다. 중단할 수 없는 열정과 의지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우선은 무한계의 통합 건이었고, 그 다음에야 천상계와 선계의 힘을 빌어 대등하게 맞설 수 있게 된다. 굳이 그 중심에 자신이 서지 않아도 좋았다. 마계를 상대할 수만 있다면 그들의 의도를, 전진을 꺾어 놓을 수만 있다면 파천은 만족할 수 있었다.
복수를 한다고 해서 잃어버렸던 것들을 되찾거나 회복할 수는 없겠지만 허마한 심정을 조금은 달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한계의 통합은 지난한 일이 될 것이다. 내가 보기엔 불가능해 보인다.’
웬만큼 길이 보인다면 용기를 갖고 뚫고 나갈 수 있겠지만 이건 어둠 그 자체다. 불을 붙이고 심지를 한껏 돋운다 해도 밝힐 수 있는 공간은 한계가 있는 법이다. 강렬한 태양이 요구되는 시점이었다.
‘그들 모두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구심점. 그것이 무엇일까?’
마계가 지금 침략해 들어온다면 어찌 될까를 생각해 보았다. 지리멸렬할 것 같았다. 적어도 파천이 지금껏 보고 살핀 바로는 그렇게 될 확률이 십중팔구였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스스로의 힘을 극대화시켜 놓는 것이다. 앞으로의 일은 닥쳐서 생각해도 된다. 지금은 그것만 집중해야 할 시점인 것이다. 파천은 벌써 벽에 부딪혔었다. 제왕의 파견자들은 그가 상대할 수 있는 적수가 아니었다.
그런데 라미레스는 어떤가. 그런 그들을, 자신은 도저히 넘을 수 없었던 벽을 그는 장난처럼 부숴 버리지 않았던가. 예전 천마에게서 무공을 배우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 천마나 혜능의 경지는 그로서는 바라보기도 벅찬 높은 산이었고 너른 바다였다. 그러나 결국엔, 그 불가능할 것 같은 경지를 파천은 뛰어 넘었다.
중단하지만 않으면 결국엔 당도한다는 평소의 지론은 지금이라도 달라질 게 없었다. 여전했다.
‘포기하지 않으면 된다. 실패하더라도 스스로 최선을 다했으면 그걸로 족하다.’
파천은 궁금한 것이 있었다. 라미레스가 제왕의 파견자들을 어찌 그렇게 쉽게 해치울 수가 있었는지가 얼른 이해 가지 않았다. 큰 위력도 느껴지지 않는 발광에 그들은 저항도 못하고 먼지로 화했다.
‘기회가 온다면 물어 봐야겠어.’
이때 라미레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긴장의 빛이 역력했다. 라미레스가 돌연히 그런 행동을 취하자 다른 이들도 더불어 긴장했다.
“무슨 일입니까?”
소리 죽여 묻는 아난다를 쳐다보지도 않고 라미레스는 그럼 그렇지, 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잠깐만 여기들 있어라. 흩어지지 말고 여기 꼼짝말고 있어. 페리칸만 날 따라와라.”
라미레스가 그 자리에서 몸을 솓구쳤다. 그에 뒤질세라 페리칸도 함께 움직였다.
“무슨 일이죠?”
페리칸은 아직까지 연문을 모르는 듯했다. 라미레스가 짧게 대답했다.
“여기에 뭔가가 있었어.”
라미레스는 조금 전 미세한 기운을 감지했었다. 끊어졌다 이어졌다 했지만 그를 속일 수는 없었다. 그러던 것이 갑자기 증폭 되는 듯하더니 또 사그라졌다. 그 순간 라미레스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들이 움직여 간 곳은 선발대가 있는 반대편 방향이었다. 산을 돌아 정 반대 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 곳은 천 장이 넘을 득한 단애였다.
그 위에 라미레스와 페리칸이 섰다.
“이곳에 뭐가 있다고 그러시는지…….”
페리칸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애를 써봐도 감지되는 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궁금해. 지금부터 그걸 알아볼 참이다. 어떤 쥐새끼들이 숨어 있는지를 말야.”
라미레스의 신형이 아래쪽으로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그 뒤를 얼굴 가득 의문을 담고 있는 페리칸이 따랐다. 절벽의 중간쯤에나 도착했을까? 라미레스의 신형이 허공 중에 우뚝 멈춰 섰다. 그의 두 눈은 절벽을 샅샅이 훑어 갔다.
“바로 저곳이로군.”
그가 가리키는 곳을 페리칸의 시선이 따라간다. 페리칸은 라미레스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곳과 그 주변 절벽이 어떤 이유에서 차이가 나는지를 납득할 수 없었다.
“모르겠나?”
“제가 볼 때는…… 이상한 점이 발견되지 않습니다만.”
“둥그런 형태로 발열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나름대로 감추려고 노력은 했지만 내 눈은 못 속인다. 원래 있던 구멍을 나중에 다시 메운 흔적이다. 바로 저기!”
그러고 보니 둥그렇게 아주 미세한 선이 그어져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로 희미했다. 라미레스는 다짜고짜 손을 흔들었다.
콰쾅
절벽에 원래 있었던 듯싶은 동굴이 입을 쩍 벌리며 드러났다.
“들어가 볼까”
라미레스가 태연하게 그렇게 말하며 안으로 쑥 들어가자 페리칸은 고개를 저었다.
‘저안에 정말로 무엇인가가 있다면 이런 소란을 눈치 채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무작정 들어가시다니……. 자신감이겠지.’
조심스럽게 라미레스의 뒤를 따라붙은 페리칸은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몰려드는 악취에 코를 벌름거렸다.
“이건 무슨 냄새죠?”
“…….”
라미레스도 처음 맡아 보는 고약한 냄새였다. 동굴은 그들의 생각보다도 훨씬 더 깊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미로처럼 형성되어 갔던 길을 몇 번이나 헤매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이렇게 해서는 시간만 낭비하겠는데.”
라미레스는 길게 생각지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 일을 처리했다. 나누어진 길이 나타나면 둘을 하나로 합쳐버린다. 동굴과 동굴을 구분하는 벽이 허물어지니 점차 거대한 광장이 되어갔다. 그런데도 위가 허물어지지 않는 게 신기했다. 라미레스는 그걸 보며 확신에 차 중얼거렸다.
“약물 처리한 흔적이 보이는 군. 위를 굳혀 놨어. 동굴을 뚫기 편하게 하기 위해서 처리한 것이겠지. 어디서 많이 보던 것 같은데?”
페리칸도 그제야 생각나는 게 있었다.
“스메이 부족인가 봅니다.”
스메이라면 루딘족과 함께 무한계 이대 장인으로 인정받는 부족이었다. 그들의 흔적이 이곳에서 발견됐다는 건 좀 의외의 일이었다.
루딘족도 그렇지만 스메이족도 웬만해서는 영자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은거부족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곳에 동굴을 뚫고 지낼 자들은 아니었다. 루딘족은 비행매소를 만들어 동중을 떠다니고, 스메이는 주로 강이나 호수 근처에서 발견되고는 했다.
이들이 만든 갑옷이나 보검 등은 영자들이라면 누구나 탐을 내는 보물이다. 그 동안 만들어낸 것만 따져도 무한계 전사를 모조리 무장시키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런 그들이 이곳에 숨어 있었단 말인가?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최근에 스메이족을 봤다는 영자들은 하나도 없었다. 여기에 숨어 있어서 그랬던가?”
말을 하면서도 라미레스는 계속 동굴을 부수며 앞으로 나갔다. 그렇게 한참을 전진하던 그들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바로 여긴가 보군.”
벌겋게 녹이 슨 철문이 둘의 앞을 가로 막았다. 라미레스는 가까이 다가가 철문의 표면을 손으로 문질렀다. 손바닥에 묻어나는 걸 살피기 위해서였다.
“뭔지 알겠냐?”
“게르슘이로군요.”
“그래, 분명해.”
게르슘은 스메이 부족이 병기를 제작할 때 주로 사용하는 합금이었다. 겉모양은 녹이 슨 것처럼 보이지만 껍질을 벗기면 내부는 전혀 다른 상태다.
그때다.
문이 저절로 열리며 밝은 빛이 안에서 번져 나왔다. 예의 그 고약한 냄새가 안에서부터 확 풍겨 나왔다. 페리칸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리고 말았다. 안으로 접어드는 순간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 나왔다.
“좀 요란한 방문이로군요.”
스메이 부족의 일원임을 나타내는 붉은 별이 전체에 골고루 그려진 옷을 입은 여자였다. 창백한 얼굴에 징그러운 자상이 가득하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아마도 이놈 때문에 오시게 된 듯합니다만…….”
여자의 어깨에 매달려 있는 건 길잡이들이 하나씩 데리고 다니는 헤이힌이었다. 그놈은 다른 헤이힌에 비해 유난히 큰 귀를 지니고 있었다.
‘그럼 내가 느낀 기운이 저 헤이힌, 원숭이란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군.’
라미레스가 조금 전 느낀 건 헤이힌 따위가 흘려낼 기운이 아니었다.
“너희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나?”
다짜고짜 동굴을 부수고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여기서 무엇 하냐, 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그냥 삽니다, 라고 대답해야 하나? 스메이 여자는 한참을 고민하는 것 같더니 간신히 이렇게 답했다.
“그냥 실지요.”
“난 강력한 기운을 감지하고 따라왔다. 헤이힌 따위가 흘려낼 기운이 아니었어.”
그 순간 미세하나마 여자의 표정이 변하는 걸 라미레스는 놓치지 않았다.
“어디서 느끼셨습니까?”
“절벽 위에서 흘린 기운이었지. 그 다음엔 놓쳐 버렸지만 말이야.”
여자는 한숨을 포옥 쉬며 처연하게 말했다.
“여기도 더 이상은 있을 수 없게 되었군요.”
여자의 얼굴엔 두려움이 가득했다.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세요. 그들이, 그들이 곧 들이닥칠 거예요.”
허둥대던 여자는 안으로 들어가더니 누군가를 품에 안고 나왔다. 죽은 듯 눈을 감고 있는 스메이 남자였다. 라미레스는 어찌된 연유인지 알아보고 싶어졌다.
여자가 밖을 향해 나가려는 걸 제지했다. 그녀의 손은 라미레스의 손에 결박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되었다.
“잠깐 몇 가지 물어 볼 게 있다.”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빨리…….”
“뭘 겁내는지 모르지만 우리와 함께라면 안전하다.”
라미레스의 그 말이 겁에 질려 있는 여자를 안심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상대가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난 라미레스다.”
그제야 여자의 얼굴이 변했다. 안심하는 얼굴이라기보다는 처연한 무언가가 안색에 젖어들었다. 스메이 여자는 라미레스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다 그만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페리칸은 종잡을 수 없는 여자의 행동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건 라미레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왜 우나?”
“흑흑흑…….”
라미레스는 은근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윽박지를 뭉제도 아니었다. 그는 여자가 마음을 진정시키고 어찌된 연유인지를 털어놓길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츰 잦아지던 울음이 그쳤다.
“진정 라미레스 님이라면…….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언제 본 사이라고 이제는 부탁까지 하려 한다.
“절 함께 데려가 주세요.”
“으음.”
엉뚱한 부탁에 라미레스는 혼란스러웠다.
“제발 부탁입니다.”
“무슨 일인지 차근하게 얘기해 봐라. 듣고 나서…… 결정하겠다.”
스메이 부족의 여자는 자신의 이름을 두름이라 밝혔다.
“저와 여기 죽은 듯 잠자고 있는 가름이 스메이의 마지막 생존자입니다.”
놀라운 말이었다. 마지막 생존자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도 큰 것이었다.
“족장님은 적에게 소멸당했고, 다른 부족원들은 사로잡혀 끌려갔습니다.”
그가 한 말은 라미레스를 당황케 했다. 스메이 부족이라 해서 모두가 장인인 건 아니었다. 그들은 그 뛰어난 솜씨로 인해 예전부터 여러 부족들과 전사들에게 갖가지 무리한 요구에 시달렸기에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최소한의 무력은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한 부족의 족장이라면 그에 걸맞는 실력자이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스메이 부족의 족장이라면 말해 무엇하랴. 그런데 그런 스메이 부족 전원이 사로잡혀 갔으며 부족장은 죽었다고 한다.
그들이 어디로 끌려갔고, 무엇 때문에 자신들이 이런 일을 당해야 했는지를 모른다고 했다. 그녀가 아는 건 한 가지였다.
“그들은 스스로를 마신이라고 불렀습니다.”
드디어 마계가 침투를 시작한 건가, 라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마계의 놈들이 어찌 마신이라 불릴 수 있더냐? 마물이라고 불러라, 라고 했다는 것이다.
“자신들은 진정한 마신이라 했습니다. 차원을 정화하는 마신.”
라미레스는 그 말에 충격을 받았다. 인간계에 말세가 도래하면 나타난다는 마신. 그들은 인격체가 아닌 규정될 수 없는 힘에 불과했다. 오히려 현상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스스로를 그 마신이라 했다지 않은가?“
“어쨌든 좋다. 그들이 요구한 건 뭐였지?”
“자신들이 요구하는 걸 만들라고 했습니다.”
페리칸은 다른 게 궁금했다.
“그들의 모습은 어땠소?”
“무한계에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독특한 모습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신이 검었는데 유독 머리털과 손, 발만이 붉었습니다.”
“또 다른 특징은……. 생각나는 대로 말해 보시요.”
“눈이, 눈이 맞아요. 눈도 붉었던 걸로 기억해요.”
“또 다른 건 없소? 특이한 장식이라든가 갑옷 같은 거라든가?”
라미레스의 묵직한 음성이 페리칸의 다음 말을 끊어 버렸다.
“됐다. 놈이 이곳으로 들어오고 있다. 직접 확인해 보면 되지.”
라미레스와 페리칸이 돌아섰다.
퍽퍽
발자국 소리가 이상했다. 일부러 자기의 출현을 알리려는 의도 같았다. 이어지던 발자국 소리가 멈췄다.
“아악! 바로, 저 자, 저 자예요.”
여자는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러댔다. 라미레스는 눈앞에 버티고 선 자를 유심히 살폈다.
“설명대로 재수 없게 생긴 놈이군.”
아무것도 갈치지 않았다. 나체라는 말이다.
“크크크, 계집! 여기 숨어 살았구나. 이곳이 마지막 은신처였나?”
그 자가 말할 때마다 붉은 혀가 입으로 보이는데 놀랍게도 뱀의 혀처럼 두 개로 갈라져있었다.
“괴물이었군.”
라미레스의 말에 자칭 마신이라 했던 자가 반응했다.
“계집을 데려 가겠다.”
“그래라. 내게는 필요 없으니 마음대로 해라.”
페리칸은 어이없어하며 라미레스를 쳐다보았다.
“정말 내주실 겁니까?”
“데려 가겠다는 데 그래야겠지. 그럴 능력이 된다면 말야.”
그제야 무슨 뜻인지를 알고 페리칸은 한시름 놓는다. 아무리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정말이지 눈앞에 서 있는 놈은 지금까지 겪어 본 생명체 가운데 가장 기분을 더럽게 했다. 저런 놈에게 스메이의 여자를 넘겨 준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겁에 질려 있는 여자를.
“내 일을 방해할 셈이냐?”
마신은 라미레스가 만만치 않은 상대라고 느꼈음인지 쉽사리 공격하지 못하고 그렇게 재차 확인했다.
“너는 누구냐?”
라미레스가 궁금한 걸 물었다.
“나는 마신이다.”
“하하하하, 그럼 난 대마신이니 넌 내 쫄따구로구나.”
마신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스메이 부족을 왜 끌고 갔지?”
“죽고 싶지 않으면 비켜.”
“오랜만에 들어 보는 말이군. 죽여 보시지. 이 독사같은 놈아.”
“후회할 거다.”
“이미 후회하고 있어. 꼴 더러운 놈을 봤으니 눈을 씻어야겠는데……. 어디 물이 없나?”
“우리 일을 방해하면 영원히 저주를 받는다.”
“그것 재미있겠군. 혹시 너와 같아지는 건 아니겠지? 그것만 아니면 상관없어.”
“마황께서 말씀하셨다.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모습을 드러내지 말라고. 너희들은 내 모습을 봤으니 보두 죽어야 한다.”
“호, 너희들도 마황이 있냐? 그래도 있을 건 다 있군.”
“닥쳐!”
“시답지 않은 소리 지껄이지 말고 덤비려면 빨리 덤비고 아니면 꺼져라.”
라미레스답지 않은 말이었다. 진작에 제압하고 끝장을 봤어야 그다웠다. 마신의 눈길이 두름에게 꽂혔다.
“네가 필요하다. 네가 있어야만 완성할 수 있어.”
“싫어, 싫어! 난 가지 않을 테야.”
그가 눈길을 주는 것만으로도 두름은 소름이 돋는지 뒷걸음질치려 했다. 페리칸이 그녀의 팔을 힘껏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며 진정시켰다.
“괜찮소. 진정하시오.”
“자, 어떡할 테냐? 이 좁은 곳에서 나와 승부를 볼 참이냐, 아니면 그냥 사라질래?”
“으음…….”
마신은 한참을 망설였다. 그의 판단은 그냥 물러서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생긴 것과는 달리 현명한 자였다.
“계집! 내 손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 넌 날 따다가야 한다. 다시 오마.”
라미레스는 상대가 밖으로 나가는 걸 막지 않았다.
페리칸이 물었다.
“왜 그냥 보냅니까?”
“그게 좋아. 이득이 없다.”
라미레스는 두름과 함께 선발대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파천과 일행은 라미레스가 왜 이리 늦는지 궁금해하다 함께 오는 이를 발견하고는 의아해했다.
페리칸의 이어진 설명이 끝났음에도 모두는 의문 가득한 얼굴을 했다. 스메이 부족의 불행 앞에 잠시 숙연해진 자도 있었다. 예전 스메이 부족과 인연이 있었던 아난다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마신…… 이라니.”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라미레스가 짜증이 가득한 음성으로 크게 외쳤다.
“출발한다.”

그들은 하룬으로 향했다. 두름의 품에 안겨 있던 자를 아난다가 몇 번이고 살펴봤지만 고개를 젖기만 했다. 도나투스가 봤어도 마찬가지였고, 앙샹뜨도 손을 들었다. 방법이 없었다. 죽은 건 아니었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의식을 차리지 못하니 죽은 것만도 못해 보였다.
라미레스는 제일 앞서 가며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가 파악하고 예상하는 그 어떤 부류 가운데도 없는 이상한 것들이 불쑥 튀어나온 데 대한 불쾌감이었다.
‘그놈들은 뭔가?’
그것이 그의 머리를 압박했다. 속이 답답했다. 그가 선발대에 닥칠 수 있는 예상되는 위험 가운데 이럼 건 없었다. 괜한 일에 참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차라리 놈을 죽이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차라리 놈을 죽이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도 생겼다.
“고민이 있나?”
파천의 물음에 라미레스는 피식 웃었다.
“내게 고민 따위가 있을 리가 없잖아.”
“그래, 그래야 너답지.”
둘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움직였다. 머지 않아 하룬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그 전에 라미레스는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었다.

파천은 난처해했다.
“모르겠어. 이해할 수가 없다.”
라미레스의 설명은 난해하기 그지없었다. 스스로도 답답했던지 머리를 감싸쥐며 묘안을 생각해낸다.
“자,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자.”
선발대의 무리 중에서 약간 빠져 나와 둘은 한적한 곳에 있는 중이었다.
라미레스의 손에는 록페른에서 뺏다시피 얻은 알파이온이 들려 있었다,
“이걸 입에다 물어라.”
“그리고는?” “호흡을 하면서 프리즈마를 입을 통해 빨아들여.” 파천은 난감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방법이었다. 프리즈마는 모공을 통해 받아들였다. 그런데 입을 통해 받아들이라니.
“그래서 대체 뭘 하자는 거야?” “어이구, 정말 답답하네. 나도 방법이 안 떠오른다. 분명 방법이 있을 텐데.”
“차근차근 설명해봐라. 네가 알고 있는 걸.”
라미레스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하나하나 설명해 나가기 시작했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여는 것인지, 그 원리가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거의 대부분의 영자들은 프라즈마를 결합해서 사용한다. 그렇지만 그 작용의 마지막 단계는 분열이야. 분열에 의해서 힘이 일어나는 거지. 우주에 존재하는 프리즈마는 가공되지 않은 기운의 덩어리일 뿐이다.
간단하게 생각해. 이건 기와 같다. 단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그렇게 생각해라. 프리즈마를 좀 더 자세히, 잘게 나누어 보면 각기 다른 독특한 성질을 지닌 최소 단위로 나눌 수 있다. 그런 수 억, 수십 억 개의 알갱이가 모여서 프리즈마의 독특한 성질을 형성한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가지?“
“그래.”
“그 프리즈마의 알갱이를 의지로서 결합시켜 사용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 힘이 발생하는 현상을 살펴보면 단위체로서의 프리즈마를 두 개 또는 그 이상으로 분열시켜서 힘을 얻는 거야. 이해 가나?”
“최소 알갱이를 나누는 거야? 아니면 단위체를 나누는 거야?”
“단위체를 나눈다. 그 단위체는 최소 단위, 즉 알갱이가 모여 이루어진 거다. 그렇지만 그건 나눌 수 없다고 생각해라. 가능할 수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그런 걸 해낼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으니까.”
“그래, 거기까지는 이해했어.”
“자, 예를 들어 볼께. 하나의 단위체를 나눌 때 엄청난 열이 방출된다. 그 열은 다시 다른 단위체에 영향을 끼치고 그건 다시 다른 단위체에……. 이런 식으로 연속적으로 반응해서 막대한 힘을 일으키게 되는 거지.
이것이 일반적인 방법이다. 얼마나 더 큰 힘으로 더 많은 수의 단위체를 연속적으로 분열시킬 수 있느냐에 따라 힘의 차이가 정해지는 것이다.“
“흐음, 그럼 저번에 네가 제왕의 파견자들을 죽인 것도 그런 방식인가?”
“그래. 단지 다른 영자들은 이 현상을 이해하지 못한 채 본능적인 느낌으로 사용한다는 것이고 나 정도 되면 그 원리를 이해하면서 사용하게 되지.”
‘또 저놈의 잘난 체하는 병이 도진 건가?’
파천은 예전 천마에게서 무공을 배울 때의 기억을 되살렸다. 그걸 보면 천마는 늘 자신에게 주기만 한다. 라미레스는 파천에게 스승인 셈이었다. 라미레스가 영계에 다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생각한 게 파천을 어떻게 하면 성장시킬까, 하는 고민이었고, 곧바로 그 준비에 착수했었다.
그의 관심은 온통 그것에 집중되어 있는 듯했다. 아무리 열정을 다해 가르치고 길을 제시해도 배우는 자가 그걸 따라오지 못한다면 금방 지친다. 그런 점에서 파천은 스승을 만족시키는 아주 훌륭한 제자였다.
“그런데 이와는 다른 방법이 존재한다. 완전히 반대의 방법이다.”
“그건 뭐지?” 분열조차 그는 완전히 습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원리를 이해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신의 것일 수는 없었다. 그런데 또 나른 걸 얘기하고 있으니.
“융합의 방식이다. 이건 원리만 존재할 뿐 한번도 본 적은 없다.”
“융합의 방식?”
“그래, 분열할 때 열이 발생하듯이 결합에도 발열 현상이 따른다. 단위체는 서로 간에 밀어내는 척력이 작용한다. 프리즈마라는 기운의 덩어리는 각각의 단위체가 독립해서 뭉쳐 있을 뿐 서로 간의 경계가 확실하지. 이 단위체를 하나로 합치는 게 융합이다.”
“척력이 작용한다며?”
“그 척력을 무력화 시켜야 가능하겠지. 척력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상상할 수 없는 열이 필요하다. 그 열이 척력을 감소시킬 때 단위체의 중심에 작용하는 인력이 서로를 하나로 자연스럽게 합치게 된다.
이때 발생하는 열은 분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겠지. 단지 예상일뿐이다.“
“필요로 하는 열을 어떻게 발생시키지?”
“분열로서 이끌어 내야지.”
“무슨 말이야?”
파천은 멍청해져서 그렇게 물었다.
“분열할 때 발생하는 열을 이용해 척력을 없애고 융합을 시도하면 된다. 그건 다시 막대한 열을 발생시키고 다른 단위체의 융합에 사용된다. 이런 식으로 연속적으로 이끌어내면 그 힘은…… 전능한 것이 되겠지.
그리고 단순한 폭발이 아니라 가열에서 팽창으로, 다시 그 과정을 완전하게 제어해 융합의 열만을 끌어내서 폭발시키고 작용력은 보존시킨다. 원령이란 이 단위체를 이르는 다른 표현일 뿐이다.
원령체가 된다는 건 몸 안에 받아들인 원령으로 끊임없이 폭발을 일으키고 그 작용력은 보존시키는 상태를 말한다. 제어가 쉽지 않겠지.“
또다시 머리가 복잡해진 파천.
“그런데 분열과 융합을 어떻게 동시에 사용할 수 있다는 거지?”
“동시는 아니다. 순차적이다. 먼저 발열의 힘으로 원령, 즉 단위체의 결합을 유도한다. 그 다음에 그걸 제어하면서 폭발력으로 연속적인 융합으로 이끄는 것이다.”
“가능한…… 일이냐?”
“몰라.”
“무슨 그런 말이 있어?”
“나도 원리만 알 뿐이라고 했잖아.”
“너는 대체 그런 걸 누구한테 배운 거야? 혼자 스스로 터득한 건 아닐 테고.”
“수호자.”
“뭐?”
“그가 말해 줬어. 그는…… 어쩌면 융합의 힘을 지니고 있을 거야. 내가 전에 너에게 했던 우주검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지. 가상의 경지. 누군가 그 힘을 사용할 수 있겠지만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은 능력. 바로 꿈의 경지, 곧 신의 경지다. 그걸 도와주는 게 바로 이 알파이온이란 것이다.”
“이것도…… 수호자에게서 얻은 건가?”
“그래. 이 알파이온은 원령을 받아들이고 느끼고 제어할 수 있게 도와준다. 나중에는 필요 없어지겠지만 이것으로 수련을 하는 거야. 그런데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모르니…….”
“뭐야? 그럼 수호자는 네게 그런 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단 말이냐?”
“당연히…… 내가 안다고 생각했겠지. 허 참, 이런 낭패가 있나.”
파천은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수호자라는 이름의 한계가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 궁금했다. 모든 것이 그의 안배로서 시작되고 있다는 게 소름끼치고 무서웠다.
그럼에도 파천은 거부할 수 없는 자신을 절감했다. 더 강한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유혹. 그건 복수를 할 수 있다는 바람에 줄을 대고 있었다. 서로는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그걸 알면서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파천과 라미레스는 한참이나 더 머리를 맞대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지만 마땅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가 단위체를 느끼는 건 어떤 이치로만 도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상태와 경지가 되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라 볼 수 있었다.
마치 춤의 아름다운 동작이 어떻게 나오는 가를 이해를 할 수 있겠지만 그걸 똑같이 따라할 수 없는 것과 같았다. 흉내 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무의미한 것이다.
“어차피 단시간에 이룰 수 있는 건 아냐. 그만하고 가자.”
파천이 지쳤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 라미레스가 애쓰는 게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한 말처럼 이건 단시일에 승부를 볼 일이 아니었다. 파천은 그럼에도 표정이 밝았다.
‘해결해야 할 숙제가 생겼다. 이걸 풀어내면 문제는 상당 부분 해결될 수도 있다. 희망이 생겼으니 염려할 게 무언가!’
파천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냐, 불가능하냐의 부분을 따지기 전에 희망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웃을 수 있었다. 게다가 어려움은 있을지언정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란 계산이 섰다. 괜히 수호자가 안배한 건 아니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다 속으로 뜨끔해한다.
‘어느 새 나도 모르게 수호자를 의지하게 되다니.’
파천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 힘으로 이룬다. 비록 그것이 주변의 도움으로 인한 것이겠지만 모든 건 내가 이루어내겠다.’

선발대가 하룬에 도착했다.
그들이 하룬에 나타났다는 건 모두에게 빠르게 알려졌다. 그 초입에서 파천은 낯이 익은 자들을 만났다. 제왕의 파견자들을 소멸시키고 대적자들이 비행선을 떠났을 때 전사들은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그 무리에 끼어 함께 강을 건넜던 자들. 바로크 전사들이었다.
그들은 바로크를 찾아 이곳까지 온 것이다. 그들은 아직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최소한 이유만이라도 알아야만 했다. 바로크를 만나 멱살을 잡고 왜 약속 장소에 오지 않았냐고, 왜 우리를 모른 척하느냐고 그 한마디만이라도 해봐야만 했다.
그래서 그들은 혹시라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가지며 하룬을 떠나지 않고 서성이고 있었던 것이다.
파천은 우선은 반가웠다. 하룬에서 만난 그들은 더 초러해 보였다. 중부권 최강 전사들이 모조리 모인 장소였다. 그들 가운데 서 있는 바로크 전사들이 모조리 모인 장소였다. 그들 가운데 서 있는 바로크 전사들은 볼품없어 보였다. 축 처진 어깨 때문이었으리라. 누구도 똑바로 마주치지 못하는 겁먹은 눈동자 때문임이 틀림없다. 파천은 그들이 가여웠다. 그래서 손을 내밀었다.
“함께 동행하죠.”
그래서 그들은 선발대와 함께 하게 되었다.
더 이상 그들은 풀죽어 있지도, 기가 죽어 있지도 않았다. 모두가 선발대의 일원쯤으로 보아 주니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선발대는 하룬의 중심 지역으로 이동해 갔다. 선발대에 대해 전사들도 호의적인 태도를 원래는 이럴 이유까지는 없었다. 굳이 호의적일 것도 적대적일 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선발대가 아니었으면 루하스 강을 건너지 못했을 전사들로 인해서였다.
그걸 알고 있는 전사들이 선발대를 환대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중심으로 이르는 대로에 바삐 걷던 자들도, 대화에 열중이던 자들도 한참 실랑이중이던 자들도 하던 일을 멈추고 선발대를 주시했다. 그리고 길을 열어 주었고 때로 박수를 보내거나 환호성을 질러 주기도 했다.
하룬의 중심에 다다른 선발대는 한 곳으로 안내되어 갔다. 하룬을 제 소굴로 삼고 있던 거대 노예상인 벤하민의 궁성이었다. 지금은 전사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멘하민은 지하 감옥에 갇혀 있다고 했다. 그의 수하들은 모두 도망갔으며 노예들은 풀려났다.
지금 하룬은 전사들의 세상이었다. 감히 누가 이곳에서 소란을 피울 수가 있겠으며 큰 소리를 지를 수 있을 것이가. 벤하민의 궁성은 뜰에서 가장 크다는 슈레트의 궁전을 능가하는 규모였다. 이곳이 앞으로도 전사평의회의 임시 본부로 사용될 장소였다.
궁성에 들지 못하는 전사들은 상대적으로 명성이 덜하거나 실력이 달리거나 소속도 분명치 않은 ‘자칭 전사’들일 경우가 많았다. 오대전사단은 말할 것도 없고, 이름 높은 전사들은 모두 궁성에 모여 있었으며 그들은 스스로의 위치에 걸맞은 거처를 제공받고 있었다. 평의회를 구성하는 일을 도맡아하고 있는 오대전사단이 그 모든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선발대가 안내되어 간 곳은 한참 회의 중인 삼층의 대전이었다. 양팔을 벌리고 서로 다섯은 너끈히 들락거릴 수 있을 문이 활짝 열리며 큰 소리가 대전 안을 향해 퍼져 나갔다.
“선발대가 도착했습니다.”
파천이 앞을 보니 회려한 복장을 한 전사들이 장방형으로 배열된 긴 탁자에 하나씩 딸린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수만 해도 족히 백은 넘어 보였다. 그들은 모두 일어났다. 제일 가까운 데 있던 자들은 등을 보이고 앉아 있다 뒤로 돌아보았다.
제일 앞서 있던 라미레스가 뒤에 있던 앙샹뜨를 불렀다.
“자네가 앞장서게.”
등을 떠밀리다시피 앞서게 된 앙상뜨는 전사들을 향해 눈인사를 했다. 그들 역시 안면이 있는 자들은 인사를 해왔고, 그렇지 않은 자들도 주의 깊게 살폈다.
파천은 뒤따라 들어가며 눈에 익은 인물들을 몇몇 발견할 수 있었다. 슈트레와 바이롬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그들은 말석은 아니지만 그다지 주요 좌석이 아닌 좌편 쪽에 앉아 있었다. 정면 쪽은 가장 지위와 명성이 높은 인물들인 것 같았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롬멜 전사단의 가린차, 유클릿 전사단의 슐츠와 마이어, 바로크를 비롯한 루하스 강에서 보았던 전사들도 보였다. 제일 정면에 앉아 있는 스무 명 정도의 전사들이 자리에서 일어선 채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말했다.
“어서들 오십시오. 선발대를 환영합니다. 자, 자리에 앉으십시오.”
파천은 왜 자신들을 이곳으로 안내해 왔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전사들의 회의에 앙샹뜨는 모르지만 자신들이 함께 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중앙 쪽에 마련된 상석으로 인도된 선발대는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선발대를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들에서는 무엇이든 알아내야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번뜩이는 듯도 했다.
‘여기서 보는 슈트레는 볼품없군.’
어찌 보면 그가 대전 안에 함께 앉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할지도 몰랐다. 사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중부권 일부 전사들과의 친분 때문이었다.
“자, 회의를 계속 진행시키겠습니다.”
조금 전 선발대를 환대했던 바로 그 전사였다.
“누구지?”
라미레스에게 슬쩍 물었다.
라미레스는 팔짱을 끼고 있다가 파천의 물음에 대답해 주었다.
“저 자가 바로 오대전사단 중 전통이 가장 깊다 할 수 있는 에이어전사단주 에이어다. 좌측이 옥캄, 그 옆이 롬멜, 에이어 우측이 유클릿과 엑크하르트다.”
‘역시나 오대 전사단주들이 전사평의회를 이끌어 가는군, 저 중에 누가 의장이 될까?’
초미의 관심사였다. 누구라고 함부로 속단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지지도 면으로 따져도 그렇고 실력 면에서 비교해 봐도 누가 더 상위라고 단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전사단주 중에서도 의장이 되지 말란 법도 없었다. 뚜껑을 열어 보기 전에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었다.
“의장을 선출하고 모든 걸 결정해야겠지만 일이 다급하게 되었으니 먼저 이 안부터 통과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의사 발언을 진행시켜 주십시오.”
“제가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 전사평의회에 참석한 전사단만해도 이백오십사개인 것으로 집계가 되었습니다. 차후 합류할 것이라 통보한 곳이 육십팔개, 아직은 머뭇거리고 있지만 곧 합류할게 분명한 전사단까지 하면 거의 오백여 개가 넘습니다.
전사들의 수만 따져 보아도 십만 명이 넘는 대군이지요. 게다가 전사단에 합류하지 않은 전사들까지 계산하면 이십만은 족히 넘을 것입니다. 이런 대병력을 거느리고 있는 우리가 메덴을 겁낸대서야 말이 되겠습니까! 이 참에 메덴에 따끔한 일침을 가해야 할 줄로 압니다.”
“좀더 신중해야 합니다. 메덴과 우리가 싸우게 되면 결과적으로 무한계는 자멸하고 맙니다. 그 뒷감당을 어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대책이 있습니까?”
“그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들의 제안을 거절한다고 해도 그들은 쉽사리 공격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둘 다 붕괴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쪽도 쉽사리 승리를 장담할 수 없고 승리한다 해도 그 결과는 참혹할 겁니다.
그렇다면 남은 전력으로 무엇을 도모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적절히 대처한다면 서로의 자존심도 세우고 평의회도 유지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는가의 문제지요. 우리가 왜 그들의 눈치를 봐야 합니까? 왜 그들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지시를 이행해야 합니까? 얼마나 무시하고 깔보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발상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 동안 그들의 오만한 작태를 참아 넘겨 왔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만약 평의회가 결성되었는데도 이런 처사가 여전하다면 전 평의회 결성 자체에 회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건 단호하게 말씀드리는데 만약 그런 결정이 있을 시에는 전 가차없이 여길 떠나겠습니다.“
오대전사단주는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그들은 듣고만 있었다. 전체적인 분위기를 따져 보는 듯했다. 이때 파천도 익히 아는 인물이 일어섰다. 그는 슈레트였다.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기 메덴의 수련자 부니 세 분, 아니 두 분이었군요. 한 분은 제명 당했으니 빼야겠군요. 그 분들께 질문을 해보도록 하죠. 의장님, 허락해 주십시요.”
임시 의장인 에이어는 난처한 얼굴을 했다.
“저 라미레스 님, 아난다 님, 그래도 되겠습니까?”
“뭐 상관은 없겠지. 그래 뭐가 궁금한가?” 라미레스가 몸을 틀어 슈레트 쪽을 보았다. 슈레트는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을 의식하며 몇 번 헛기침을 하고서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파천은 그가 무리 주에서 튀어 보이기 위해 무리한 만용을 부리기 시작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교활한 자’
“라미레스 님께 묻겠습니다. 메덴이 저희에게 부탁, 아니 지시를 내렸습니다. 메덴이 허락할 수 없으니 전사평의회를 즉각 해산하라는 내용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가 보지.”
“뜻을 분명히 해 주시죠.”
“자네 말은 내가 동의 하느냐, 아니냐를 묻고 싶은 건가?”
“그렇습니다.”
“자네 제 정신인가? 내가 동의하고 안 하고가 무슨 문제지? 난 원탁의 회원도 아니야. 메덴의 결정에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못한단 말일세.”
“그렇지 않습니다. 에, 제가 묻고 싶은 건 지명도 높으신 라미레스 님이 객관적으로 판단했을 때 이 지시가 아무런 하자가 없으며, 우리가 거기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개인적인 견해를 말씀해 주십시요.”
“흐음, 좋아. 말하지. 난 메덴의 결정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지 않아.”
웅성웅성
아난다의 당황하는 얼굴을 보며 파천은 웃었다. 뒤에 나올 말이 뻔히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전사평의회가 그것을 거부하는 것 또한 잘못된 것은 아니지.”
“상당히 애매모호한 입장이군요.” “원래가 다 그런 거지. 어느 쪽이 일방적으로 옳은 경우란 거의 보지 못했으니까.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라 전사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가, 하는 부분이겠지.
소신대로 하면 되는 거지 누구 눈치 볼 건 없지. 저쪽에서 힘으로 눌러 오면 힘으로 마주 치면 되는 거고. 그럼 무한계가 아작 나겠군. 볼 만하겠어.“
자신은 전혀 관련이 없는 구경꾼이라도 되는 듯한 말투였다.
슈트레가 그걸 꼬집고 나섰다.
“그런 무책임한 발언이 어디 있습니까? 마치 싸움이라도 붙었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들리는 군요.”
“그렇게 들렸다면 자네 심보가 고약해서이거나 귀가 잘못되었거나 둘 중의 하나일 거야.”
“킥킥.”
“하하하하.”
여기 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같은 질문이면 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전 메덴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지도 않습니다.”
“다른 질문입니다. 우리가 정면으로 메덴의 뜻을 거부했을 때 예상되는 상황을 말씀해 주시죠.”
이건 저번에 선발대 내에서도 팽팽하게 대립되었던 내용이었다. 그때 아난다는 메덴이 전사평의회를 공격할 것이라고 했었다. 잠시 심사숙고하던 아난다가 말을 골라 가며 신중하게 이어 갔다.
“여러분은 분명히 거부할 것입니다. 틀림없는 일일 겁니다. 그렇다면 메덴은 또 한번 회유책을 쓰게 되겠죠. 전사평의회의 존재는 인정하되 활동에 제약을 가하려 할 겁니다. 이것마저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때는 무력을 사용해 억압하려는 시도가 뒤따르겠죠. 그런 뒤에 적당한 기회를 엿봐 무한계 통합을 구실삼아 예하에 두려 할 겁니다.”
“그렇다면 저희가 어떻게 처결하는 게 최선이라 생각하십니까?”
에이어였다. 아난다는 옆쪽에 앉아 있는 에이어를 쳐다봤다.
“그걸 수련자인 저에게 물으십니까?”
“아난다 님의 양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라미레스 님의 말씀처럼 소신…… 껏 행동 하십시요. 전사평의회의 결성은 지금의 무한계 상황에서는 당연한 일일 수 있습니다. 메덴은 그걸 강제할 권한이 없습니다.”
짝짝짝짝
전사들의 일부가 일어서며 박수를 쳤다. 파천은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저들은 이걸 노렸다. 그걸 알면서도 저들의 뜻에 따라주는 아난다도…… 참 대단하군. 자신들의 정당성을 아난다의 입을 통해 만방에 알리는 효과라니.’
유클릿이 아난다에게 물었다.
“메덴과 전사평의회의 전력을 비교하면 어느 쪽에 더 점수를 주시겠습니까?”
“냉정하게 말씀드리자면……. 다른 변수가 없다면 점사평의회는 백 번 싸워 백 번 집니다.”
“으음.”
“믿을 수없소.” “말도 안돼.” 조금 전까지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내던 자들의 태도가 싹 달라졌다.
“메덴은 단일 세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전사평의회는 규모에 비해 단결력이 너무 떨어집니다. 처음에는 비등하게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차후 시간이 흐르면서 내부적으로 균열과 갈등은 따를 수밖에 없고, 만약 지도력에 문제가 있다면 그 시일은 더 당겨질 겁니다.
메덴은 강합니다. 무한계에서는 그들이 최강입니다. 그건 부인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얼마 버티지 못합니다.”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그런데 에이어를 비롯한 오대전사단주의 고개가 미미하게 끄덕여지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장내는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조용해졌다. 아난다의 말을 인정하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었다. 다른 이들도 아닌 중부권 최강 전사단을 이끄는 수장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태도를 보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롬멜이 투박한 음성을 흘렸다.
“아난다 수련자의 말씀이 백 번 지당하오. 싸우면 우리는 지겠지요. 메덴의 저력은 냉정하게 말해 우리 전사들과 칠대부족을 합쳐 놓은 정도라 볼 수 있소. 그럼에도 우리는 싸워야 할지도 모르오. 그걸 뻔히 알면서도 말입니다.
방법을……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메덴과 싸우지 않고서도 우리 뜻을 펼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결론은 그것이었다. 싸우자면 못 싸울 것도 없다. 단 질 것을 뻔히 알고 싸우는 건 끝까지 막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다른 방책을 세워 둬야 한다. 결론은 이렇게 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방법이 과연 뭐란 말인가……
“간단하지. 메덴도 그걸 알고 있으니 적극적으로 나올 수 있는 거지. 만약 싸우게 되면 둘 다 괴멸할 거라는 판단이 선다면 태도는 달라지겠지. 그렇게 만들어야지 다른 수가 있나? 이쪽의 힘이 모자라면 더 키워야 하고, 그럴 수단이 없으면 최소한 그렇게 보이게끔은 해야지. 부풀려서라도 말야. 그걸 찾는 건 여러분들의 몫으로 남겨 둬야겠지.”
라미레스가 간단하게 결론을 내려 버렸다. 파천은 생각했다.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나라면…….’
파천은 전사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너무도 다양한 세력의 결집이라는 게 최대의 약점이란 걸 간파했다. 그걸 먼저 보완해야 한다.
‘전체를 완전히 장악하고 조직을 단순화시켜야 한다. 철저한 상명하복으로 위계를 세우고 사방에 퍼져 있는 전력을 일정 세력권 내로 결집시켜야 한다. 그것이 첫 번째며…….’
파천은 생각을 이어 갔다. 그에게는 그런 일을 치러 본 경험이 있었다. 벅찬 상대와 중원을 놓고 싸워 본 경험은 그간의 상당한 시행착오를 거치며 그를 한 단계 성숙시켜 주지 않았던가.
파천은 전사들을 돕고 싶은 맘도 있었지만 그럴 수 없는 입장이 안타까웠다.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의 이후에 파천을 비롯한 선발대는 마련된 거처로 돌아왔다. 그들에게는 따로 독립된 공간이 주어졌다. 감시도 없었을 뿐더러 상당히 호화로운 장소를 제공받은 것이다.
전사들이 선발대를 대하는 모습에서 그들이 얼마나 예의를 다하는가를 알게 해주는 건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파천은 라미레스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왜 날 끌고 나온 거냐?”
“할 일이 있다. 나 혼자 나다니면 오해가 있을 수도 있으니 널 데리고 온 거고.”
동행하기에 가장 편한 상대가 라미레스였다. 그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없었다. 툴툴거리면서도 라미레스는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 또한 파천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어딜 가려고?”
“찾아 볼 자가 있어.”
“누군데?”
“바로크.”
“그게 누군데?”
바로크에 대한 설명을 다 듣고 난 라미레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슐탄은 알지만 바로크는 잘 모르겠는데.”
“너야 전 영계에 소문이 쩌렁쩌렁하게 나지 않은 자는 잘 모르잖아.”
“하긴 그렇지.”
파천은 아차, 싶었다. 조금만 추켜 세워줘도 한없이 기고 만장하는 습성을 잠시 잊었던 것이다.
파천은 전사들에게 물어 물어 유클릿 전사단의 거처를 알아냈다. 마이어를 만나러 왔다고 했더니 쉽게 안내해 주었다. 안내하던 전사는 지나치게 파천의 눈동자만 노려보았다. 파천은 그것이 라미레스의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임을 나중에서야 깨닫게 된다. 파천과 라미레스는 마이어를 기다렸다.
“너무 깊이 관여하지 마라. 지나친 간섭에 전사들은 민감하다.”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어.”
“내가 볼 때는 이미 끝난 것 같은데 미련을 가지는 부하들이 어리석은 거지. 출세를 위해서 더 큰 데로 떠난 자를 어쩌겠어?”
“그게 아닌 것 같으니 그러는 거지.”
“그게 아니라니?”
“만나 보면 알아.”
마이어가 들어왔다. 그는 혼자였다.
“절 찾으셨다구요?”
그는 파천을 대하는 게 예전과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죽이라는 명까지 내렸던 그가 깎듯이 예의를 다했다. 그걸 보며 파천은 왠지 모를 씁쓸함을 느꼈다.
‘라미레스의 위력이겠군.’
“무슨…… 일이신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바로크를 만나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네? 그는…… 왜?”
“지금 여기에 있죠?”
“있습니다만……. 이유를 말씀하지 않으시면 곤란합니다.”
‘이것 봐라. 뭐가 있기는 있나 본데.’
라미레스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건 대면하고 나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럴 수 없겠군요.”
“이것 봐, 마이어.”
“네. 말씀하십시오, 라미레스 님.”
“어려운 부탁도 아닌데 거절하는 이유가 뭔가?”
“제 수하의 문제입니다. 지휘관의 입장에서 분명한 까닭도 모르고, 외부인에게 내보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조금 빈약한 변명이었다.
“그럼 내가 이유를 대면 되겠군. 난 그 녀석에게 볼일이 있다. 예전에 나랑 붙은 적이 있었거든. 그때의 일로 그러니 데려 와라. 됐나?”
마이어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저를 무척 곤란하게 만드시는군요.”
“오히려 자네가 거부하니까 더 이상해서 그러지. 안 되겠군. 유클릿을 마나 봐야겠어. 자네하고는 말이 안 되겠어.”
라미레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마이어가 당황하며 옷깃을 잡았다.
“왜 이러십니까? 절 너무 궁지에 몰지 마십시오. 알았습니다. 데려오지요. 데려 오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여전히 편치 않은 표정으로 밖으로 나가는 마이어를 보며 파천은 생각했다.
‘어쩌면 그의 일은 마이어만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군.’
잠시 뒤 마이어의 뒤를 따라 무표정한 바로크가 돌아왔다.
그는 앉지도 않고 서서 다음 명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거기 앉아라.”
“네.”
전혀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였다.
“데려 왔습니다. 이제 용건을 말씀하시지요.”
“잠시 나가 계시면 안 되겠습니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자 마이어는 정색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럼 할 수 없지요. 바로크.”
바로크의 눈동자는 여전히 정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바로크, 이쪽을 보세요.”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행동했다.
라미레스가 손을 펼쳐 바로크의 눈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이것 맛이 갔군. 정상이 아냐.”
파천은 예상이 실제로 확인되자 얼굴을 굳혔다. 마이어가 당황한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