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35화 : 페리칸, 네 뜻대로 하라
페리칸, 네 뜻대로 하라
하룬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페이룬트는 절경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예전 칠대부족의 시초를 연 카란이 잠시 이곳에 머문 적이 있기에 그걸 기리고자 칠대부족 간의 회동이 많았던 장소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새로운 풍조인 노예 시장의 등장으로 메덴으로부터 치욕적인 폐쇄 조치를 당한 역사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하룬의 북쪽, 그러니까 페이룬트 산의 정상 부근에 해당되는 지점이었다. 거인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상의 거봉 이름이 바로 페이룬트였다.
전설에 의하면 원래는 두 개의 봉우리였는데 카란이 두 절개지를 하나로 합쳐 레이룬트라 명명했다 한다. ‘힘센 자’란 뜻을 지니고 있으니 그의 성격을 얼마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페이룬트의 정면을 깔끔하게 잘린 절벽이다. 절벽면 중간 중간에 동굴이 많아 때로 지나치는 수련자들이 머물기도 하던 장소였다. 그중에 상단 부근에 해당하는 동굴 안이었다.
“그런 식으로 무마할 줄은 몰랐습니다. 저희가 직접 나서서 케로이를 죽이겠습니다. 그런 다음 모든 전사들이 볼 수 있도록 광장에 갖다 놓으면…… 애초의 계획대로 진행될 것입니다.”
은발의 사내였다. 그는 우둘투둘한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도차 바닥에 닿을 듯 깊이 숙이고 있었다. 그의 전면에는 돌을 깎아 만든 커다란 의자가 있었는데 거기엔 검은 안개가 뭉쳐 흐르고 있었다. 물론 바람이 일지 않는 깊은 동굴 속이라고는 하지만 유독 의자 위에만 짙은 안개가 뭉쳐 있다는 건 기이한 일이었다.
“케로이가 정말로…… 살아 있다고 보느냐?”
의자 위에서 또렷한 음성이 흘러나오자 뭉펴 있던 안개가 출렁거렸다 묘한 박자감이 느껴지는 흐름이었다.
바닥에 이마를 대로 있던 은발의 사내가 고개를 살짝 들어 정면을 주시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
“에레츠의 그노시스가 직접 한 일이다. 실수는 없었을 터.”
“그렇다면?”
“누군가 케로이의 대역을 한 거겠지.”
“으음, 그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노시스의 위치는 파악이 되었는가?”
“그것이……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 쪽과 의도적으로 접촉을 피하려는 인상이 짙습니다.”
“그렇겠지. 그 자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왔다. 혼자 움직이는 걸 좋아한다고 들었다 에레츠의 그노시스들 중 단연 최고로 인정받는 일문이다.
언젠가 우리 푸뉴마의 하이오스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다. 에레츠의 객관적인 전력은 우리 프뉴마와 비교할 바가 못 되지만 상층부의 몇몇 수뇌들만은 전혀 손색이 없다고. 그 중에 그노시스 헤이룬은 평소부터 수하로 탐을 낼 정도로 뛰어나다고 칭찬하셨지.
바로 그가 메덴을 떠나 이곳에 왔다. 우리가 아무리 상위 군단 소속이라 해도 직급은 엄연히 우리들 위다. 그에게서 별다른 명령이 없다면 지켜 보는 게 상책이다. 만약 일이 잘못될 경우 책임은 우리가 아닌 그가 지게 되는 것이니.”
“그렇군요. 그럼 수하들에게 별다른 명령은 내리지 않겠습니다.”
“그래라.”
“평의회 의장은 슐탄이 차지할 게 뻔하니 어차피 다른 변수는 없습니다.”
“그는?”
“대기중입니다. 처음엔 완강히 거절했지만 그 또한 달리 방법이 없었겠지요. 이런 일에 나선다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그 자의 약정을 우리가 쥐고 있는 한 그는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감시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만 나가 봐.”
은발의 사내는 그 상태로 허송으로 떠올라 동굴을 빠져나갔다. 검은 안개가 또다시 요동을 쳤다.
“실패는 용납할 수 없다. 메덴과 전사평의회는 어쩔 수 없이 싸우게 될 것이다. 이번 결과에 따라 내 지위에 변동이 있으니 놓칠 수 없는 기회지. 하하하하.”
아레나가 팡의 일을 알게 되었다. 그건 우연이었다. 에어어 전사들이 다시 재조사를 하던 중 팡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게 되었고, 에어어를 통해 파천이 그 기름을 들었다. 선발대가 모인 자리에서 여러 얘기가 오갔는데 그 자리에서 어쩌다 팡의 이름을 파천이 언급한 것이다.
선발대에 포함되어 있던 라치오와 동료들, 너울의 얼굴이 급변했지만 가장 크게 놀란 건 역시나 아레나였다.
아레나는 곧장 피요르 전사단을 찾아갔고, 단주의 입회하에 조사 받던 자의 인상착의에 대해 듣게 되었다. 아레나는 팡이 왜 이곳 하룬에 와 있는지부터가 이해 가지 않았다. 그는 실종되었다고 했다. 취조하던 두 명의 전사를 죽이고 사라졌다는 것이다.
아레나는 부정했다 그의 실력을 빤히 아는 아레나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팡을 찾아보기로 작심하고 에이어 전사단의 도움을 받아 하룬 곳곳을 뒤졌지만 그가 남긴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팡의 실종. 두 전사의 죽음.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떤 식의 연결점도 찾을 수 없다는 게 아레나는 답답했다. 아레나가 평소와는 달리 흥분하는 걸 보고 파천이 말했다.
“찾을 만큼 찾아 봤으니 이제 포기해.”
“…… ”
“실종되었다니 살아 있을 가능성이 많아. 어딘가…… 갈아 있겠지. 그러니 너무 심려하지 마라.”
“너라면…… 라미레스 님이나 아난다 님이 그런 경우를 당했다면…… 마음 놓고 아무렇지 않게 태연하게 기다릴 수 있겠어?”
파천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아레나를 막을 길이 없었다.
그녀는 평의회 의장 선출을 위한 대결이 곧 있을 거한 통보를 받고도 밖으로 홀로 나갔다. 이대로 기다리고 있을 수 없게 만들 정도로 팡은 아레나에게 소중한 친구였다. 아레나가 밖으로 부리나케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파천은 라치오에게 부탁했다.
“아레나의 뒤를 따라 주시오. 팡의 모습을 알고 있으니 적임자일 것 같소.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지요.”
라치오가 밖으로 나가자 그의 동료들도 함께 동행했다. 그들은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는다. 파천은 지금까지도 라치오가 선발대에 잔류라고 있는 진실 된 의도를 알지 못했다.
“자, 이제 결정의 순간이 왔으니 가볼까?”
선발대는 에이어와 슐탄의 대결을 보기 위해 실내를 나섰다. 전사평의회 발족을 만장에 알리는 첫 출발점. 그 운명을 결정할 대결은 전사들 모두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이뤄지기로 되어 있었다.
하룬의 덩 중앙에 있는 대광장은 벌써부터 후끈한 열기로 달아올랐다. 광장을 빼곡이 매운 전사들에게는 누가 이길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두 후보 간의 성향은 정반대임이 드러났다. 에이어가 의장이 되면 전쟁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대의 경우라면 메덴과의 싸움은 기정사실이다. 아무리 싸움을 즐겨하는 전사들이라 해도 승리할 가능성이 없는 무모한 싸움은 되도록 피하고 싶은 맘이 더 컸다.
더군다나 그 결과가 무한계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했다. 그럼에도 전사의 성향을 메덴과 싸워 지리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자존심과 명예를 위해서라면 죽음을 택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깊은 관련이 있는 몇몇 전사들을 제외하고는 특정한 후보의 승리를 간절히 염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결과에 따라 지난 지지와는 상관없이 전사들의 위치는 재조정될 것이다. 명실공히 규모만으로 놓고 보면 무한계 최대의 조직이 탄생하려는 순간이었다.
광장에 선발대가 나타나자 전사들이 일정 공간을 비워 주었다. 단지 단주들이 호의적이라서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렇게 흐르는 건 아니었다. 선발대가 그 동안 보여 준 진실된 모습들이 전사들에게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진심으로 전사평의회를 지지하는 그들을 전사들 역시나 좋아하고 반겼다.
광장의 반대편을 서로 점유한 양 진영 사이에 묘한 신경전이 펼쳐진다. 오늘의 대결을 주재할 인물로 앙샹뜨가 추대되었다. 가장 중립적이고 공정한 인물로 적임자였기 때문이다. 펠라모를 운영한다는 점과 전사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다는 것 또한 작용했다.
광장에 운집한 전사들의 수를 헤아린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건물 옥상들뿐만 아니라 멀리 허공중에도 새까맣게 떠 있는 무리들이 보였다. 그 많은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앙샹뜨가 광장 중앙으로 사뿐히 걸어갔다. 앙샹뜨의 입이 매우 느리게 열렸다.
“전사들의 연합기구인 전사평의회 발족을 선언합니다.”
와와와와
하늘을 한 번에 내려 앉히고 땅을 하늘과 맞닿게 할 듯한 요란한 함성이 온 하룬의 상공을 진동시켰다. 모두의 얼굴엔 진심으로 감격해 마지않는 기쁨이 넘실댔다. 그 동안의 소모적인 분쟁을 종식시키고 무한계를 위이해 분연히 나선 것이다.
무한계 영자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손가락질 받기나 했지 언제 대의를 n이해 힘을 써본 적이 있었던가? 그래서일까, 전사들의 얼굴엔 무한계를 내 손으로 지킨다는 뿌듯함과 함께 변치 않을 결연한 의지로 불타 올랐다. 그것만으로도 최소한 이순간만은 그들 모두가 하나였다,.
앙샹뜨의 손이 위로 올라갔다. 거짓말처럼, 마치 여러 번의 연습을 거틴 것처럼 일시에 함성이 멈췄다.
“지금은 전사평의회 의장을 선출하는 매우 뜻깊은 자리입니다.
평의회 입회를 희망하신 단주님들과 펠라모 운영자들의 사전 협의에 의해 두 분의 호보가 추대되었습니다. 한 분은 전통을 자랑하는 중부권 최강 전사단인 에이어 전사단주이신 에이어 님이시고…… “
와와와와
“또 한분은 그에 못지 않은 슐탄 전사단의 단주님이신 슐탄 님이십니다.”
와와와와
파천은 전사들의 함성소리만 놓고 따져 보았다.
‘에이어가 역시나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이것만으로 결정한다면 상대가 되지 않는군.’
“그간 평의회 결성을 반대하려는 움직임도 있었고 아직까지도 이곳 하룬에는 정체가 파악되지 않는 덕이 암약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반드시 하나로 단결할 것이며 또한 이겨 나갈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옳소.”
“당연한 소리요.”
“전사의 기상으로 적을 무찌르자.”
“우와와!”
앙샹뜨는 한껏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전사가 싫어 펠라모를 열었다는 여인. 그녀는 어쩔 수 없는 전사였다.
“두 분의 후보께서는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슐탄과 에이어가 무리의 대열에서 이탈해 앙샹뜨 곁으로 다가왔다.
“명심해 주실 것이 있습니다. 이 대결은 단지 서로간의 실력을 겨루어 보는 자리일 뿐이지, 우열이 가려지는 순간 결투를 멈춰 주십시오.
지금까지의 대립은 이 시간부로 종결되고 이후 결정이 나면 결과를 존중해 주셔야 합니다. 이 점 명심하시도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대결 장소는 이곳 광장에 한정시키겠습니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시거나 공간을 이탈하게 되면 패배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심사관의 자격으로 실력파가 많이 난다고 판단될 시에는 제 재량권으로 승부를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점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지금 하세요.“
슐탄은 고개를 저었다.
“없소.”
“에이어님은?”
“저도 없습니다.”
“슐탄 님께서는 직접 출전 하시겠습까?”
“아니오. 대리자가 있소.”
“에이어 님은요?”
“전 직접…… 하겠소.”
전사들이 술렁거린다. 슐탄이 대리자를 내세우기로 했다는 소식은 모두 들어 알고 있었다. 과연 누구일까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여러 가지 예상이 나오기는 했지만 지금까지고 그 주인송은 비밀의 장막에 가려져 있었다.
“대리자에 대한 검증이 있겠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자격 조건은 두 가지 입니다. 전사여야 하며 신분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단서만 충족시키면 대리자로서 자격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동의하십니까?”
“그렇소.”
“그럼 지금 불러내시지요.”
모두는 가슴을 졸이며 사방을 훑어보았다. 파천을 비롯한 선발대와 에이어 진영에서도 숨결을 고르며 전면을 주시했다.
“나의 대리자를 소개하겠소.”
그는 뭐가 그리 자랑스러운지 환한 얼굴로 자신감 있는 어조로 말했다. 변화는…… 없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광장으로 나서는 이가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이죠?”
앙샹뜨의 질문에 슐탄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
“대리자가 없다면 그냥 슐탄께서 직접 나서시는 게 어떻지요? 그게 더 의미가 있을 듯한데 말입니다.”
에어아가 안심이 되었던지 한결 여유를 되찾았다. 슐탄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잠깐만 기다려 보시오. 대리자는 나서시오. 어디에 계십니까?”
그의 어조는 간절함을 넘어 안타까움까지 배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스스로 출전해선 오늘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음을 그 자신이 잘 알았다. 오대 전사단주 누구라도 벅차기는 마찬가지였다. 준비해 놓은 대리자가 출전하지 않는다면 낭패를 면키 어렵다.
‘어떻게 된 건가? 분명 그 분이 나서기로 하지 않았던가? 안 돼. 여기서 차질을 빚으면 모든 건 끝장이다.’
슐탄이 광장 이곳저곳을 살피며 허둥대는 꼴을 보였다. 슐탄의 이런 모습은 그를 지지하는 전사들이 보기에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이런 중요한 대결에 대리자를 내세운다는 것도 그리 합당하게 여겨지지 않거늘 저 허둥대는 꼴은 뭐란 말인가, 이런 표정들이었다.
가만 지켜보고 있던 앙샹뜨가 슐탄에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대리자가 나서지 않는다면 슐탄께서 직접 출전하시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잠시 시간 여유를 주시오.”
조금 생각하던 앙샹뜨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잠시일뿐입니다.”
“알았소.”
슐탄이 몸을 솟구쳤다. 어딘가로 가려는 것 같았다. 파천의 눈이 빛을 발했다.
[라미레스, 놈의 뒤를 쫓아 봐라.]
그때다.
“내가 슐탄의 대리자다.”
광장 위로 뭔가가 뚝 떨어져 내렸다. 슐탄의 얼굴이 죽음의 위기에서 구원이라도 받은 양 환해졌다.
“왜 이제야 오시는 겁니까?”
“그렇게 됐다.”
둘의 관계가 묘했다. 전사들은 영문을 몰라 서로 소리 죽여 수군 거렸다.
“자, 대결을 시작하지. 상대가 자네인가?”
앙샹뜨가 나타난 사내의 앞을 막아섰다.
“잠깐, 먼저 신분을 밝혀 주시죠.”
“왜?”
“그러셔야만 합니다. 전사라는 신분이 확실한지를 가려내기 전에는 이 대결을 승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타난 사내는 키가 트고 우람했다. 에이어 또한 작지 않은 체구였는데 마주서면 겨우 가슴까지 닿을 정도였다. 상체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아 울퉁불퉁한 근육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양 손목과 팔뚝에 은사슬을 감고 있어 이채롭다.
그는 앙샹뜨를 내려다 보며 싱긋 웃었다. 가지런한 치아를 모두 드러내고 웃던 사내가 뒤돌아 섰다.
“이걸 보고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는가?”
등에는 저것이 정말 새겨 넣은 것일까 싶을 정도로 생생하게 살아 있는 문신이 가득했다. 검은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었고 그 사이로 번개가 번쩍인다. 하늘로 승천하는 용이 꿈틀대고 땅에는 독수리 떼들이 죽은 시체를 뜯어먹고 있다. 그 사이 공간 중에 한 사내가 머리를 휘날리며 거대한 창을 들고 있었다. 그 장의 시선이 향한 곳은 허공. 아름다운 여인이 하늘을 우러르며 슬픈 얼굴을 하고 있다.
앙샹뜨가 고개를 갸웃했다. 파천은 이때 라미레스를 쳐다보던 중 이었다 누군지 물어 볼 요량이었다.
라미레스와 그 옆에 있던 아난다의 얼굴에 놀람이 가득했다.
[누군데 그래? 아는 인물인가?]
라미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어 역시 그 자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얼굴은 이미 절망에 휩싸여 있었다.
“틀렸어.”
라미레스는 시작도 되지 않은 승부의 결과가 이미 끝났다고 말라고 있었다. 아난다 역시 그 생각에 동의하는 것 같았다.
“혹시 했는데…… 이렇게 되면 그나저나 어찌 저 자가 슐탄의 대리자로 나선단 말입니까?”
그때까지도 그 자를 알아보는 이들은 숨을 죽이고 정신을 수습하지 못하는 중이었고, 모르는 이들은 어리둥절해 있었다. 둘러선 전사들 중 하나가 생각난 듯 짧은 외침을 토했다.
“전사 몰간이다 몰간이 틀림없다!”
외침 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광장은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전사 몰간.
직접 대면해 본 이는 이 중에 극소수일 것이다. 워낙에 오래 전에 이름을 날렸던 일물이었으며, 얼마인지 모를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세상에 나타난 적이 없었던 전설의 이름이었다.
메테우스의 친구이자 가장 든든한 지지자였던 카란, 그의 충직한 수하 중 비교적 잘 알려진 이름이었다. 마계의 대마신 타루나와 겨뤄 아깝게 패했다는 인물이기도 했다. 라미레스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름은 몰간. 카란의 심족들 중 불칸과 함께 외부에 가장 널리 알려진 강자다. 에이어로서는 역부족이다. 해보나마나야. 승부는 결정됐다.]
파천이 막 몰간을 쳐다볼 때 그는 돌아서서 앙샹뜨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결격 사유는 없는가? 날 모르겠다면 저기 있는 라미레스에게 물어 보면 될 것이다.”
그가 라미레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라미레스, 이런 자리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군.”
“그건 내가 할 소리다. 카란이 이 사실을 알면 눈물을 흘리며 통탄하겠군.”
몰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라미레스를 외면하고 앙샹뜨를 다시 내려다본다.
“자, 이제 시작하자.”
슐탄이 뒤로 물러서서 수하들에게로 갔다.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그가 하는 말을 들은 것인가. 롬멜이 그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부끄러운줄 알아라. 이렇게 해서 얻은 승리가 무슨 가치가 있더냐?”
괜히 억울해서 배호는 소리였지만 슐탄의 얼굴은 금세 붉어졌다.
그는 못 들은 척 상대도 하지 않는다.
앙샹뜨가 물었다.
“에이어 님께서는 이의가 없으십니까?”
“없…… 소.”
몰간이 상대라면 아무리 용을 써 봐도 승리할 확률은 전무할 것이었다. 체념한 것인지 그의 표정은 그래서 더욱 평온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슬그머니 죽어 버린 투지를 다시금 불태웠다.
“까짓…… 죽기밖에 더하겠냐?”
몰간이 웃었다.
“죽이지 않을 테니 걱정마라.”
파천은 돌아가는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걸 알았다. 몰간에 대해서 들은 기억은 없다 그렇지만 에이어나 마리메스, 아난다의 반응을 보면 대충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에이어는 이미 진 것이다.
‘상대의 명성에 주눅이 들 정도라면 승부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요행을 바랄 수는 없지. 더군다나 이렇게 중요한 대결이라면 더더욱이나. 방법은…… 방법은 없나?’
두 전사 사이에 서 있던 앙샹뜨가 간단한 주의를 당부하고는 뒤로 물러섰다.
“시작하세요.”
[그만 가자. 볼 것도 없다. 슐탄이 기뻐 날뛰는 꼴은 보기 싫으니 여길 떠나자. 무한계는 끝났어.]
파천은 라미레스의 말에 낙담했다.
“대결을 멈춰라.”
돌연한 외침에 앙샹뜨의 얼굴이 밝아진다. 그녀는 얼른 두 전사 사이를 막아서고는 결투가 시작되려는 걸 제지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그녀는 환한 얼굴이 향한 곳은 파천의 옆이었다.
페리칸, 그가 몰간과 에이어의 결투를 막고 나선 것이다. 파천은 의아했다.
‘설마?’
“지존, 허락해 주십시오. 보작하나 제가 에이어 단주의 대리자로 나서겠습니다.”
라미레스가 언제 그랬느냐 싶게 웃음을 띄며 말했다.
“잘 생각했어. 자네의 이런 결단이야말로 제대로 원한을 갚는 거지. 자네의 용기 있는 결단에 박수를 보내네.”
그는 페리칸을 추켜세우며 연신 웃음을 흘렸다. 선발대가 환호성을 지르고 어찌된 영문인지를 모르는 전사들은 어리벙벙해져 그걸 지켜본다. 에이어가 페리칸을 향해 다가왔다.
“정말 그래 주시겠습니까?”
“그렇소. 그렇다고 해서 그간의 모든 걸 잊었다는 건 아니오. 이 싸움은 지존을 위해서 하는 것! 그대들과는 상관이 없소.”
모양이야 어떻든 이기면 되지 않겠는가. 한시름 놓은 에이어는 방금 지옥의 불길을 보고 온 것처럼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앙샹뜨가 슐탄에게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에이어 단주께서 대리자를 내세우는데 이의가 없으신지요?”
“이미 출전자가 결정된 마당에 이제 와서 대리자를 내세우는 건 규칙 위반이지 않소?”
라미레스가 슐탄의 되도 않은 소리에 딴죽을 걸고 나섰다.
“규칙은 무슨? 네가 먼저 대리자를 내세우는 바람에 있지도 않은 규칙을 만들게 되었거늘. 네 입에서 규칙 운운하는 소리가 나온단 말이냐! 여기서 제동을 걸면 나도 가만 참고 있지는 않을 거다. 알아서 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울상이 된 슐탄과는 달리 몰간은 태연하기만 했다.
“누구라도 좋으니 빨리 나서라.”
앙샹뜨는 더 이상의 말이 나오기 전에 얼른 결정지어 버렸다.
“페리칸 님이 에이어 단주님의 대리자로 결정되었습니다. 몰간 님과 페리칸 님의 대결로 모든 걸 결정짓도록 하겠습니다.”
“잠깐.”
이번엔 엉뚱하게도 파천이 제지했다.
“페리칸, 한 가지만 묻자. 하지 않겠다고 하더니 왜 마음을 바꿨느냐?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할 필요는 없다.”
옆에 있던 라미레스는 파천이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리는 게 안타까웠던지 얼른 참견했다.
“너는 또 갑자기 왜 그래? 페리칸이 다 생각이 있으니까 나섰겠지. 자, 자 이러지들 말고…… 저기 기다리고 있는 몰간에게 미안하지도 않나? 그리고 이왕 나섰으니 몰간을 죽사발 만들어 버리는 것 잊지 말고.”
호들갑 떨고 있는 라미레스의 말은 페리칸의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페리칸이 무릎을 꿇었다.
“허락해 주십시오.”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대라. 날 이해시키지 못한다면…… 이 대결을 허락할 수 없다.”
몰간과 페리칸의 결투. 무한계뿐만 아니라 영계 전체를 진동시킬 만한 대결전이라 할 수 있었다. 그걸 보게 될 전사들은 벌써부터 흥분해 사태의 추이를 숨죽이고 바라보고 있다.
아무도 파천과 페리칸의 대화에 참견하지 않는다. 단지 몰간만이 조금 전 라미레스의 말에 화가 조금 나 있는 듯했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점잖았다.
“지존, 이유를 대라 하신다면…… 지존의 명이 있기 전에 그 뜻을 헤어려 먼저 행하는 것도 수하된 도리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를 앞세울 수도 있었지만 제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절…… 믿어 주신다면 저 자와 싸워 보고 싶습니다. 지존께는 언제나…… 믿음직한 수하로 기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가? 그래, 너라면…… 이길 수 있을 거다. 아니, 이겨라. 이건 명령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겨라. 그리고…… 무사해라.”
“존명!”
힘찬 외침과 함께 페리칸이 파천 앞에 우뚝 섰다. 에이어 잔주를 지지하는 모든 이들의 기대를 한 몸에 지고 그는 발길을 돌려 전방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라미레스가 흥분해 외쳤다.
“페리칸 넌 이길 수 있다. 내 말을 믿어라. 너라면 이길 수 있어.”
파천이 물었다.
[정말이냐?]
[몰라. 그렇지만…… 이 승부는 해보기 전에는 아무도 모른다. 백중지세. 누가 더 고도의 집중력을 유지하느냐에 달렸지.]
에이어와 오대전사단주의 얼굴은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희망에 들떠 있었다. 모든게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생각지도 못했던 구원자가 손을 내민 것이다.
아직 승부가 결정 난 건 아니지만 희망을 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만족했다. 이와는 반대로 다 끝났다고 여긴 승부가 원점으로 돌아가자 슐탄은 불만에 차 시부렁거렸다.
“아무리 자신이 있어도 그렇지, 안 해도 될 승부를 하려 하다니. 이긴다고 보장할 수도 없는 일이거늘. 페리칸이 어떤 자인데…… 나 참.”
몰간이 다가오는 페리칸을 은근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페리칸이라고? 꽤 인심을 받고 있나 보군. 그 동안 무한계를 떠나 있어 소식에 어두웠거늘, 너 같은 신진 강자가 등장해 있을 줄은 몰랐어. 이왕이면 후회없는 승부가 되었으면 아네.”
페리칸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주선 그의 체격은 몰간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었다. 오히려 더 단단해 보였다.
“시시한 대결일 줄 알았는데…… 내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될 줄 알아서 영 기분이 더러웠는데 너 같은 강자가 대결 상대가 되어 기쁘게 생각한다.
기대하마. 할 수 있다면 나 이겨 봐라. 그러나 힘들 거야. 그 동안 네가 상대해 왔던 부류들과는 차원이 다를 테니 말야. 긴장되나? 그렇겠지. 금방 끝날 테니 너무 염려하지 마라.“
몰간은 페리칸에 대해서 모른다. 자신의 명성에 지닌 무게감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상대가 지금 눈앞에 서 있음을 절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페리칸이 처음으로 몰간의 말에 화답했다.
“명성을 입으로 쌓았나 보군. 말이 많아진다는 건 불안하다는 증거. 넌 오늘…… 두 번째의 패배를 당하게 될 것이다.”
두 번째의 패배. 몰간이 마계 대마신 타루나에게 패했던 일을 상기시키는 말이었다.
“으음, 그럴 수도 있겠지. 허나…… 저기 있는 라미레스라면 모를까, 너 종도가 할 말은 아니다. 호기로 받아들이지.”
순간 페리칸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두 팔을 자연스럽게 내려뜨렸다. 이미 준비 자세에 들어간 걸 알아챈 몰간은 막 입을 열려다가 그만둔다. 대결에 돌입한 이상 더 이상 떠들어대는 건 무의미했다. 모든 건 실력으로 입증되는 것이다.
파천은 몰간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었기에 왠지 불안하기만 했다.
“라미레스, 너와 비교하면 몰간이라는 자는 어느 정도냐?”
“나와?”
“그래.”
“허 참, 파천 네가 아직도 날 잘 모르는가 본데. 저놈은 한 주먹감이다. 나와 대등하게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을 찾아 보기란 쉽지 않다. 무한계에서는…… ”
그 뒤로도 한참이나 라미레스는 제 자랑이 이어졌다.
파천은 괜히 물어 보았다 싶어 후회 막급이었다.
대치한 둘은 좀체 움직일 생각이 없는 듯했다. 서로에 대한 견제 때문인지 누구 하나 쉽게 공격을 시도하지 못했다. 그러나 대치하고 있는 둘은 지금 치밀하게 계산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놈의 기세가 처음과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이것 잘못하다가는 망신 당하겠는걸?’
몰간은 자신에게만 집중되고 있는 막강한 기운을 전신으로 맞받고 있는 중이었다.
주변에 바람 한 점 날리지 않을 정도로 고도로 밀집된 기운이었다. 그는 상대를 쉽게 생각할 수 없었다 처음 가볍게 여겼던 것과는 차원이 다FMS 상대임을 때달았다. 그래서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신중하게 대처해 가기로 재삼 스스로에게 주지시켰다.
서로가 서로를 잘 모르니 작은 실수 하나가 승부를 결정지을 것이다. 균형이 팽팽하면 언제 끝날지 모르나 일순의 흐트러짐이 승부를 쉽게 가늠할지도 몰랐다.
‘가장 자신 있는 수법을 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놈을 유인해야 한다. 그렇지만 저놈 또한 웅크리고 있으니.’
몰간은 상대의 장기가 무언지 모른다. 그건 페리칸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이때 라미레스의 영언이 페리칸 뇌리 속으로 파고들었다.
[몰간은 공간왜곡의 수법에 능하다. 전에 타루나와 상대했을 때도 화산체로 유인해서 공간왜곡으로 승부를 보려 했었지. 그 이외에는 네 실력이면 별로 대수롭지 않을 거야.]
페리칸은 중요한 정보를 얻게 된 것이다. 비등한 실력자들간의 결투에 있어 상대에 대해 얼마간이라도 알고 있다는 건 그만큼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효과가 있었다. 페리칸은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공격 양상을 미리 그려 보았다.
둘의 치열한 수 읽기가 진행되는 동안 파천은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저 자는 바로크가 아닌가?’
바로크가 웬일인지 마이어의 곁을 떠나 혼자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 걸 발견한 것이다. 파천은 즉시 카이로에게 명령했다.
[카이로, 바로크의 뒤를 따라 봐라.]
[네? 쩝…… 그러죠.]
카이로는 둘의 싸움을 볼 수 없다는 게 영 불만이었던지 입맛을 다시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가 무리 중에서 사라진 걸 알아챈 이는 몇 되지 않았다.
라미레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 곧 다시 전면에 집중했다. 누구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승부였다. 더군다나 전사평의회란 초유의 거대 집단의 초대 지도자를 뽑는 대결이었다.
화르르륵
먼저 몰간에게서 변화가 있었다. 그의 영체를 휩싸고 불길이 이글거리며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아주 느릿하게 공중으로 떠오르던 몰간이 바닥에서 한 자 위치에서 멈췄다.
“화신체로 승부를 보자.”
몰간이 페리탄에게 그렇게 제의하고는 곧장 화신하기 시작했다. 피부 밖으로 흘러 나온 유백색의 기류가 그의 전신을 딱딱한 껍질처럼 둘러쌌다.
페리칸도 이에 질세라 화신을 시작했다.
화악
눈을 뜨고 마주보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빛이 뿜어졌다. 그 사이로 투명한 막이 서서히 형태를 갖춰 가는 게 보였다. 서로 형태는 달랐지만 둘 모두 최고의 힘을 결집시키고 있는 건 같았다.
화신체는 공격과 방어가 자유로운 대신 다양한 형태의 공격은 할 수 없다. 힘은 극대화되고 움직임 또한 놀랍게 향상되지만 눈을 현혹시키는 변화에는 중점을 두지 않는다.
그럼에도 강자들일수록 화신체를 선호하는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다른 모든 장점을 무력화시키는 속도와 강함이라면 그보다 더 탁월한 공격법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페리칸과 몰간이 화신한 건 당연한 일이다.
스팟
몰간이 움직였다. 그 움직임을 파악해내려는 실력자는 둘러선 이중에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는 먼저 페리칸의 전면을 치다 뒤쪽으로 돌아갔지만 페리칸의 반응이 만만찮아 다시 제 위치로 돌아온 것이다.
둘은 그 간의 부동을 버리고 상대의 허점을 노려 빠르세 공격를 퍼부어 갔다. 움직임이 시작되면 허점은 자연 노출되는 법. 그러나 누구 하나 쉽게 승기를 잡지는 못했다. 둘의 주먹이 맞닿았다가 떨어지고 발이 부딪치기를 수십 번.
파파파파팟
눈을 한 번 떴다 감는 동안에도 수십 번의 공격이 오가니 뭐가 어찌 된 연유인지를 파악해 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공간이 연괘적으로 폭발을 일으켰다. 페리칸이 두 손을 휘두른 결과였다.
일정 구역을 벗어나지 않게 힘을 조절하고 있는 듯했다. 고도의 정밀함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광장에 상당한 넚이의 공간이 확보되어 있다지만 몰간과 페리칸이 제한을 두지 않고 공격을 뿜어낸다면 이 정도쯤 쉽게 초토화될 것이다.
그럼에도 둘의 대결을 관전하는 전사들은 어떤 위협도 느낄 수 없었다. 페리칸의 주먹이 몰간의 복부를 향해 찔러 가다 막아서는 몰간의 주먹과 부딪친다. 그 순간 페리칸의 손이 활짝 펼쳐지며 주먹을 감싸듯이 잡아 안쪽으로 끌어들였다. 거의 동시적으로 두 발이 몰간의 상체 곳곳을 향해 포화를 터트렸다.
콰콰쾅
몰간은 간신히 방비해 내긴 했지만 가슴을 쓸어 내릴 정도로 간담이 써늘해졌다. 품안에서 터진 연쇄적인 폭발을 견뎌냈으니 그 놀람이 어느 정도였겠는가. 그럼에도 그는 무사했다. 그렇다고 숨 돌리고 여유를 부리고 있을 틈이 없었다. 페리칸의 이어지는 공격이 멈춤 없이 노도와 같이 밀려 왔던 것이다.
몰간의 두 손바닥이 마주쳤다. 떨어지자 뇌전이 발생되며 페리칸을 강타한다. 페리칸의 신형이 회전하며 되려 몰간의 뒤쪽으로 움직였고, 그 순간 몰간은 사방에서 몰려오는 기운을 감지했다.
“이건?”
거대한 압력이 신속히 간격을 좁히며 몰간을 짓눌어왔다.
“하앗.”
몰간의 입에서 기합성이 터진 순간 사방에서 가해지던 압력이 일시에 감소된다. 그러나 페리칸의 움직임을 놓쳐 버린 몰간이 순간 당황했다.
‘어디냐?’
몰간이 그 자리에서 빠르게 몸을 솟구치며 사방을 향해 눈길을 주었다.
‘없다. 이런 눈속임을?’
콰쾅
“허헉.”
몰간의 등에서 막강한 타격음이 작렬했다.
핑핑
몰간은 등을 가격당하는 순간 곧바로 그 힘을 빌려 회전했는데 그러자 사방을 향해 불꽃이 몰려 나갔다. 전사들은 놀라 부르짖었다.
“피해라.”
부산을 떨며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무리들에 의해 광좡 곳곳은 아내 모래를 바람결에 흩날려 놓은 것 처럼 소란스러워졌다.
불꽃을 맞받을 자신이 없는 자들이 꽉 조인 대열에서 이탈하고자 몸을 날리는 통에 빚어진 소란이었다.
자기 앞으로 날아오는 불꽃 덩어리를 한 손으로 슬쩍 쳐내던 라미레스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탐색전은 그만하고 이제 그만 끝을 보지, 그래?”
맙소사. 지금까지의 대결이 단지 탐색전에 불과했더란 말인가? 그 소리를 들은 자들은 누구 할 것 없이 경악지색이다. 라미레스의 그 말을 확인시켜 주기라도 하듯 둘은 처음 위치에 호흡한 점 흐트러지지 않은 화신체로 서 있었다.
“내 비록 오늘 원치 않는 싸움에 나서서 부끄러움에 심기가 편치 않았다만 그대를 대하고 보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후회 없는 승부가 될 것 같아 마음이 되려 흡족하구나. 그대는 그렇지 않은가 보이.”
“난 싸움에 임하면 이기기 위함만을 생각할 뿐 다른 건 따져 보지 않는다. 더군다나 지금의 대결은 반드시 이겨야 할 승부!”
“흐음, 그렇겠지. 이게 어디 보통 일이라야지. 전사들의 우두머리를 결하는 자리가 아니던가? 단지 주역으로 나서야 할 자들이 뒤로 물러난 판에 우리들 같은 엉뚱한 이들이 자리를 차지했지만. 어쨌든 의미가 있는 승부이긴 하지.”
“단지 그것 때문이 아니다. 내가 이겨야만 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저기 생령의 명령 때문이겠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 자네 정도의 강자가 주인을 섬기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닌데 그것이 하고 많은 자들 중에 생령이라니.”
“말이 길어지면 보는 이들도 지겨울 터. 어서 빨리 결 하는게 나을 듯싶은데.”
“그리 서두를 이유가 있는가? 우리의 승부는 쉽게 나지 않음을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어느 한쪽이 집중력이 떨어져 호흡을 놓치는 일이 벌어질 리도 만무하고, 전혀 예측지 못할 신묘한 술수를 부릴 리도 없으니 균형은 무너지기 쉽지 않지. 승부를 속히 결정짓고 싶은가?”
“오래 끌고 싶은 맘은 없다.”
“급한 친구로군. 간만에 적수다운 적수를 만나 난 이순간이 즐겁기만 하거늘, 그대는 전혀 그렇지 않은가 보군. 좋네.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게 어떠하겠는가?”
“어떻게 하자는 건가?”
“어쨌든 승부만 결하면 될 것이니 우열을 가리는 방법이야 굳이 이런 드잡이질을 하지 않아도 될 것 아닌가?”
“그래서?”
“순수한 힘을 겨루어 보는걸세. 내 비록 그대를 이길 비책을 지니고 있지만 굳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
페리칸은 그것이 공간왜곡의 수법임을 알고 있었다. 정직하게 부동의 자세에서 공간왜곡을 시도해 온다면 쉽게 대처할 수 있겠지만 중간중간 대비하지 못한 순간에 섞어 온다면 당해내기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그런 우위를 스스로 버리겠다 하지 않는가?
“순수한 힘을 겨루어 보자?”
“그렇네. 둘이 한 걸음의 거리를 격하고 마주서서 한 호흡에 결판을 내자는 거지. 견딜 만하면 좀 길어질 수도 있지만, 무작정 겨루는 것보다는 훨씬 쉽게 결정 날 것 같은데…… 내 제안이 그럴듯하지 않은가?”
한걸음의 거리를 마주하고 서로 공격한다는 건 위험천만한 대결이었다. 둘 중에 하나는 큰 변을 당할 우려가 있었다. 페리칸은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흔쾌히 몰간의 제안을 승낙한다.
“좋다. 그게 좋겠군.”
둘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천천히 서로에게 다가섰다. 어느 한쪽이라도 약속을 어기고 기습을 가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삼장, 이장, 일 장 그리고 한 걸음. 페리칸이 피식 웃었다.
“이런 자리가 아니었다면 제대로 승부를 결해 볼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군.”
몰간을 인정하는 발언이었다. 신뢰할 수 있는 사내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걸 페리칸은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의 경험에 비춰 볼 때 단 한 번의 승부에 모든 걸 걸어야 하는 전사들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족속이었다.
그런데 몰간은 달랐다. 입밖에 낸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전사의 명예가 뭔지 아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내 처지가 안타까울 따름이야.”
둘은 마치 친구 사이라도 되는 듯 친근한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소로의 눈을 통해 그들은 짧은 순간 많은 교감을 주고 받고 있었다.
몰간이 진심 어린 충고를 했다.
“조심하게. 내 힘은 그대의 상상을 초월할지도 모르네.”
“나 또한 마찬가지.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 또한 내 전부를 드러내 보인 적은 없거든.”
“하하하하. 좋아, 아주 좋아. 자, 그럼 시작해 볼까?”
둘의 대결이 또다시 돌입되자 긴장감은 종전보다 배는 커졌다. 둘은 그 간격을 벌리고서도 섣불리 공격하지 못했다. 한 번의 공격이다. 그럼에도 이리 경계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은 건 그 한 번의 공격이 실패할 것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공격면이 아무리 넚어질 수 있다 해도 힘의 최고점이 이르는 부분은 한정되어 있다. 그것을 비껴내면 이긴다. 둘의 생각은 똑같았다.
어느 누구든 공격을 시작하면 거의 비슷한 시점에 상대의 공격 Z또한 이어질 것이다. 조금이라도 빠른 게 유리한 게 아니라 역습의 기회는 무방비 상태의 상대를 제압할 것이기 때문이다.
극도의 집중력은 둘의 신경을 한껏 팽팽하게 당겨 놓았다. 서로간의 무언의 약속은 상대의 공격을 피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을 정해 놓은 것이다 다름없다. 지켜보는 이들은 침을 삼키며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기 위해 덩달아 집중한다. 파천의 주먹이 꽉 쥐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맺힌 땀이 고였다 바닥으로 떨어진다.
“타앗.”
“하앗.”
둘의 기합성이 누가 먼저라고 할 수 없ㄷ을 정도로 거의 동시에 허공을 갈랐다.
번쩍
둘 사이의 고 좁은 간격을 가득 채운 빛은 너무도 강렬했다. 어찌 보면 아름답기까지 한 발광이었다.
“크어억.”
어찌 되었는가? 비명성이 누군가의 입에서 터져 나온 건 틀림없었다. 굳게 다문 입술을 비집고 흘러 나온 소리는 극히 작아 귀기울여 듣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을 정도였다.
“쿨럭, 쿨럭.”
무릎은 꿇고 기침을 하고 있는 이가 있었다 그걸 확인한 파천은 눈앞이 깜깜해져 왔다. 페리칸이 각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피가 검붉은 것이 내상을 입은 게 틀림없었다.
“페리칸.”
파천이 뛰어나가려 했다. 라미레스가 파천의 팔을 완강하게 잡아 당겼다.
“기다려봐. 그리 심한 부상은 아니다.”
너무도 쉽세 가려진 승부 앞에 지켜보던 이들은 맥 빠지는 기분이들 정도였다. 뭐가 어찌 된 것인지는 결정을 내려 줘야 할 앙샹뜨도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몰간은 뒤로 주르륵 물러나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게 보였다. 누가 이겼는가? 슐탄이 외쳤다.
“이겼다. 이겼어. 우리가 이겼단 말이다.”
와아
슐탄을 지지하던 자들에게서 하늘이 떠나갈 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와는 반대로 에이어의 진영은 침울함에 빠져들었다.
“한심한 것들…… ”
몰간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 나온 소리는 자그마했다. 라미레스의 팔을 뿌리치고 막 앞으로 달려 나가려던 파천에게 들린 뒤이은 몰간의 음성.
“내가…… 졌네.”
파천은 라미레스의 얼굴을 찾았다. 라미레스는 웃고 있었다. 몰간의 눈이 페리칸을 찾았다.
“자네는…… 내 생각보다 더 강하군.”
“대단한 힘이었소. 여태껏 내가 겪어 보지 못한…… ”
“허허, 결국 자네 말대로 되었군. 두 번째의 패배라…… . 그렇지만 오늘은 그리 나쁜 기분만은 아니야.”
슐탄이 앞으로 뛰어나오며 외쳤다.
“무슨 소리요. 지다니? 분명 이겼거늘.”
몰간은 슐탄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어쩐지 측은함이 뒤섞였다.
“능력도 되지 않는 것이 욕심만 키웠구나. 내가 졌다.”
“당신이 이겼고. 분명 이겼단 말이오.”
“닥쳐라! 이놈이 누구앞이라고 함부로 언성을 높인단 말이냐? 왜? 다 잡은 고기를 놓치니 심정이 죽을 것 같으냐? 내가 졌다. 그것도 알아보지 못하는 놈이 무슨……. . 한심한!”
라미레스와 파천 그리도 아난가사 페리칸의 곁으로 왔다.
라미레스가 말했다.
“페리칸은 내상을 입긴 했디만 화신체는 여전하다. 그렇지만 몰간은 화신체가 깨졌어. 내강 또한 페리칸에 비할 수 없을 정도다.”
그랬던가?
“우웩.”
몰간이 그제야 함고 있던 핏덩이를 입 밖으로 토해 놓는다. 덩어리진 피가 울컥울컥 넘어오는데 라미레스의 말처럼 내상이 어지간히 약한 게 아니었다.
“괜찮겠소?”
페리칸이 걱정스런 물음에 몰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
“이 정도쯤이야. 난 이만 가네.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또 보니. 아 참, 라미레스. 자네가 강한 건 인정하지만 한 주먹감은 너무한 것 아닌가? 난 그정도로 약하지 않아.”
“하하하하.”
라미레스가 웃었다. 그는 정말 유쾌한 듯 마음껏 웃었다.
“그래, 몰간. 너는 진정한 강자다. 힘만 센 골빈 놈이 아닌 걸 내 인정하지.”
몰간이 자리를 뜨려다 페리칸을 다시 주시해 왔다. 그때다. 라미레스에게 영언이 전달되었다.
[그를 보내지 마라. 그를 보내면 죽는다. 그를 붙잡아다오. 난 불칸이다. 부탁한다, 라미레스. 그를 강제로라도 잡아다오.]
라미레스는 순간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이 된다.
‘불칸마저 나왔다는 말인가? 그런데 무슨 소리지? 왜 몰간을 보내면 죽는다는 말일까?’
몰간이 돌아섰다. 침통한 표정의 슐탄은 도무지 지금의 사태를 인정할 수 없었는지 헛 웃음만 흘리고 있었다. 이때 앙샹뜨의 최후 결정이 내려졌다.
“두 호보가 내세운 대리자의 대결로 에이어님이…… 전사평의회 의장이 되셨음을 공식적으로 확정합니다.”
우와와와와
어느 진영이라 딱히 구분 지을 수 없는 힘찬 함성이 하룬의 하늘을 뒤흔들었다. 우렁찬 함성을 뒤로 한 채 몰간은 쓸쓸히 퇴장하고 있었다.
[라미레스, 부탁이네. 제발.]
간곡한 불칸의 청이 빗발쳤다. 라미레스는 의혹을 접어 두고 몰간을 불러 세웠다.
“몰간! 기다려봐.”
몰간의 발걸음이 멈췄다.
“잠시 나와 얘기 좀 하지.”
몰간은 여전히 등을 보인 채로 짧게 대답했다.
“난 대마신하고는 할 얘기가 없어.”
“바알세불이 아닌 수련자 라미레스와는 할 얘기가 있을 것 같은데 말야 어떤가?”
“글세…… .”
“잠깐이면 돼.”
몰간은 망설이다 결국은 승낙했다.
“그러지.”
에이어의 명령에 a다라 단주들 모두가 한 자리에 소집되었다. 그들은 대회의장으로 선발대와 함께 들어갔다. 라미레스만이 거길 떠나 몰간을 다른 곳으로 인도해 갔다.
불칸의 영언에 따라 몰간을 한곳으로 이끌었다. 페이룬트의 반대편 쪽, 다시 말해 하룬 외곽의 남쪽 지역으로 온 것이다.
“어디까지 갈 셈인가? 내체 무슨 얘기를 하자고 나를…… .”
“자네를 보고 싶어하는 이는 따로 있어.”
“무슨 소린가. 대체 누가 나를 보고 싶어한다는 말인가?”
“기다려 봐, 우리 뒤를 따르던 놈들을 처치하고 오느라 좀 늦을 거야.”
몰간은 평평한 바위 위로 올라가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빌어먹을…… 이것 상처가 꽤 갚은데. 그래 봐야 잠깐이면 치료할 수 있지만…… 대단했어. 페리칸이라고 했던가? 앞으로도 그 이름을 잊을 수가 없겠는걸.”
“페리탄은 카란과 자네들이 사라진 뒤에 나타난 무한계 전사들 중 최강자야. 칠대부족장이라 하더라도 승부는 장담하지 못해.”
“그랬군. 역시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는 거였어. 그런데 대체 누구를 기다리는 건가?”
“오는군.”
라미레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와 몰간 사이에 나타난 이가 있었다.
“날세.”
몰간이 얼마나 놀랐더니 상처 입은 것도 잊고 그만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너는!”
“그래. 나다, 불칸. 바알세불, 아니지 이제는 라미레스라고 불러야 겠지. 어쨌든 부탁을 들어 줘서 고맙다.”
불칸은 몰간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 몰간은 무엇 때문인지 안절부절 못하고 당황하기만 했다. 불칸이 말했다.
“너 지금 제정신이냐? 카란이 돌아오면 무슨 낯으로 그를 보려고 이딴 딧을 하고 다니는 거냐? 날 똑바로 봐라, 몰간. 어서 대답해봐. 네 뒤를 따라다니는 저놈들은 대체 뭐냐? 어서 대답하지 못해?”
점점 음성이 커지더니 급기야 비명소리처럼 커졌다. 몰간의 눈동자는 초점을 찾지 못하고 흔들리기만 했다. 그는 초라해 보였다. 라미레스는 자신이 나설 일이 아님을 깨닫고는 한쪽으로 물러섰다.
“휴우, 그래. 나도 네게 이런 말 할 처지는 아니지.”
불칸은 조금 전 몰간이 엉덩이를 붙이고 있던 자리에 무너지듯이 앉았다.
“로메로가 돌아왔다.”
몰간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심적 충격이 이만저만 큰 게 아니었다. 조금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라미레스도 로메로를 알고 있었다.
‘로메로는 카란과 함께 스스로를 봉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거늘. 그가 돌아왔다는 말은?’
“그럼, 그럼…… 카란도……. 카란도 돌아왔는가?”
“아니, 카란은 메테우스가 돌아오면 나카나겠지. 그가 했던 말처럼 말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몰간 나를 쪽바로 봐라. 네가 알고 있는 걸 하나 남김 없이 털어 놔라.
아니다. 나부터 말하지. 난 루하스 강에서부터 선발대 뒤를 쫓아왔다. 라미레스, 너도 내 기운을 느꼈을 꺼야.“
“느끼긴 했지만 너인 줄은 몰랐다.”
“로메로의 지시였다. 파천이란 생령을 보호하라고 했다. 난 지금까지도 왜 그가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는 모른다.”
그는 분명 명령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몰간, 네가 아닌 내게 말이야. 조금 전 알게 되었다. 네게는 그런 명령을 내릴 수가 없었던 거야. 어이없게도 몰간……. 네가 적의 주구 노릇을 하고 있을 줄이야.”
“아냐, 그게 아니다.”
“내 말 끝까지 들어!”
몰간은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로메로가 돌아오다니…… 이럴 줄 알았다면 조금만 더 인내하는 건데.’
그는 지금 사진이 한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휘말리기는 했지만 단 한 번도 후회라는 걸 해 본 적이 없는 그가 가슴을 치며 후회하고 있었다.
“하룬에 와서 난…… 이상한 기류를 느꼈다. 분명 전사들의 기와는 다른 생소한 기운이 느껴지더군. 그것도 외곽 지역에서. 난 곳곳을 뒤졌다, 은밀하게. 그러다 몇 가지를 알게 됐지. 라미레스, 너도 알고 있었나?”
“아니, 전혀.”
라미레스는 자기도 몰랐던 걸 불칸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으음, 이건 생각보다 더 심각하군. 모두 때를 잘못 계산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 적의 움직임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고 있다. 잘못하면 한번 움찔해 보지도 못하고 당할 수도 있겠다. 더군다나 천지를 모르고 적의 주구 노릇이나 하는 저런 한심한 놈까지 있으니 말야.
내가 느낀 걸 라미레스, 네가 못 느꼈다는 건 좀 문제가 있는데. 선발대 내에도 적의 첩자가 있다는 말이군. 기운 감지를 흐리게 하는 놈이 뒤섞여 있다는 말이지. 그것도 대단한 놈이.“
라미레스는 한 방 얻어맞은 표정이 된다. 선발대의 적의 첩자가 포함될 수 있다는 건 예전부터 생각해 오던 바였다. 그렇지만 지금의 구성원들 중에 그럴 만한 혐의가 있는 인물은 없었다.
‘혹시 라치오?‘
라미레스가 혐의를 둘 수 있는 한계였다.
불칸이 말을 이어 갔다. 그 역기 아직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모습이었다.
“여기에 침투해 있는 놈들은 놀랍게도…… 아바돈의 군대였다.”
라미레스가 놀라 반문했다.
“아바돈의 군대가 들어와 있다고?”
“그래, 그들 중 여기 있는 놈들은 제2군인 프뉴마인 것 같았다. 여기까지가 내가 알아낸 전부다. 이제는 몰간 네가 말할 차례다. 놈들은 네가 실패할 경우 널 죽일 것이라 말했다. 알겠어? 그대로 돌아갔다면 넌 그놈들의 손에 죽었을 것이다. 지금의 상태라면 넌 대항도 못해 보고 죽었겠지. 그냥 놔둘 걸 그랬나?”
뭐라고 변명할 법도 한데 몰간은 그러지 않았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게에 비난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몰간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 아바돈의 프뉴마가 하룬에 들어와 있다. 놈들은 전사들을 충동질해 메덴과 전쟁을 하는 게 목적이다.”
그 정도는 나도 알아.“
“그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 하룬의 명령권자는 프뉴마의 다이모니온 계급이었다. 그런제 지금은 더 놓은 직급의 인물이 와 있다. 나도 한 번도 본 적은 없다. 단지…… 그가 메덴에서 왔다는 것과 그의 계급이 그노시스라는 것만 알고 있지.”
“몰간! 내가 묻고 싶은 건 그런게 아냐. 왜 네가 그들의 지시를 따르고 있냐는 의문이다. 솔직하게 철어 놔라. 넌…… 카란을 배신한 건가? 그런 거냐? 메테우스처럼 카란을 배신한 거냐고?”
“아냐, 아니다. 난 카란을 배신한 적 없어. 단지 그들이 원하는 일을 한 가지만 해주기로 한 것뿐이다. 더 이상 그들과 나를 결부시키지 마라.”
“왜? 그 이유가 뭐냐? 적일 수밖에 없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 줘야 할 이유가 뭐냐? 무슨 약점이라도 잡혔나? 아니면 네가 거절할 수 없는 보물이라도 안겨 준다고 하던가? 그도 아니면 영체소멸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가르쳐 준다고 하던가?”
“그런 게 아냐. 그런 게,”
“그럼 뭐야?”
라미레스는 불칸이 이렇게 흥분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런 게 아니다. 그녀가, 그녀가 놈들에게 잡혀 있다. 난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의 요구를…… 묵살할 수 없었다.”
“빌어먹을. 그렇게 된 거였나? 차라리 잘됐군.”
그나마 다른 이유가 아니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불칸은 몰간을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너는 아직도 느녀에게서 벗어나지 못했구나.”
“허허허…… .”
자조적인 웃음은 서글프기만 했다.
“이제는 어떻게 할 셈이냐? 네가 그들의 요구를 들어 준다 해서 그녀를 풀어 줄것이라 믿다니…… . 너는 여전히 어리석구나.”
“그래. 난 어리석지. 그러니 그런 날 택한 거겠지.”
“이제는 어떻게 할 거야?”
라미레스가 시큰둥하게 대신 말했다.
“뭘 어떻게 하긴. 일단 놈들을 쓸어 버려야지.”
불칸이 한숨을 푸욱 내쉰다.
“그래, 그래야겠지. 라미레스, 나 그리고 여기 이 얼간이 정도만 힘을 합해도 여기 침투해 있는 놈들은 솎아 낼 수 있을 거다.
문제는 그노시스야. 그놈은 위치를 파악해낼 수 없어. 그놈 역시 라미레스, 네가 여기 있는 한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겠지. 선발대가 이곳을 떠난 이후엔…… . 솔직히 별 대책이 없다. 프뉴마든 에레츠든 아니면 회상위군인 우라노스라도 쳐들어온다면 꼼짝없이 이곳은 놈들에게 상납해야 한다.“
라미레스는 궁금한 것이 있었다.
“로메로는 지금 어디에 있나?”
“제왕의 파견자를 찾아 나섰다.”
“그들은 왜?”
“모르지. 그놈의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는 나도 모르지.”
“로메로가 나섰다면 이들의 움직임도 읽고 있을지 모르겠군. 굳이 파천을 보호하라고 널 보낸 것만은 아닐 거다.”
“그럴지도. 이놈들이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전혀 예상 밖이다. 우리는 수족이 없다. 그에 비해 이놈들은 대군이다. 조직력에서 우리가 밀린다. 상대하기 쉽지 않은데…… 큰일이다.”
라미레스는 다른 얘기를 언급했다.
“불칸, 혹시 마신에 대해 들은 적이 있나?”
“마신이라면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나?sp 부하들이 마신들이었잖아.”
“그 마신 말고.”
“그 마신 말고 다른 마신이 또 있다는 말이냐?”
어리둥절해 있는 불칸에게 라미레스는 자신이 겪은 일을 얘기해 주었다. 스메이부족이 그들에게 멸망당했다는 말과 함께.
“이젠 별의별 놈들이 다 나타나는군. 뭐야 그럼? 그놈들도 우리 적이란 말인가?”
“지금으로 봐서는.”
세 명은 한동안 말을 아꼈다.
라미레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불칸에게 당부했다.
“나는 일단 선발대에 합류한다. 나머지는 나중에 상의하자.”
“결론은 내고 가야 할 것 아닌가?”
“결론이 날 일이 아냐. 다시 말하는데 선발대는 여기서 발 묶어 놓고 기다리고 있을 입장이 아니다. 평의회가 정리되는 대로 곧장 떠난다. 여기 파견되어 있는 놈들을 처치해 봐야 소용이 없다. 인원은 또 채워질 테니 말야. 근본적인 대책은 없다. 메덴과의 협상도 급한 시점이고.
나머지 일은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난 이만 가겠다.“
그 말을 끝으로 라미레스는 불칸의 부름을 외면했다. 그는 선발대내에 첩자가 있다는 불칸의 경고가 영 마음에 글렸다.
평의회 의장직에 오른 에이어는 곧장 장로를 임명했다. 장로는 평의회 의원들 중에서도 지휘부를 형성하며 의장을 보좌하는 역할 이외에도 의장의 독단적인 전횡을 견제할 의무를 함께 지니고 있는 중책이었다.
나머지 사대전사단주가 장로로 임명되었고, 에이어가 의장이 되는데 일등 수훈을 세운 페리칸을 명예직 장로에 임명했다. 페리칸은 별로 달갑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달리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그 외에 앙샹뜨와 슐탄이 거명되었다. 앙샹뜨는 스스로 거절했다. 이유는 선발대를 떠날 수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도 명예 장로로 임명된다. 슐탄은 별말 없이 잠자코 받아들렸다.
모든 게 일사천리였다. 파천은 옆에서 지켜보며 미진한 부분이 많아 답답한 심정이었다. 그걸 지적해 주고 싶은데 좀체 말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에이어는 시종일관 진지했다.
“의장으로 명하겠소. 메덴과의 전쟁은 차선일 뿐 최선이 될 수 없소. 일단은 그들과의 협정을 추진해 보고 여의치 않을 때 방어의 최종 수단으로 전쟁을 생각하겠소. 그렇게들 아시고 일단은 해산하도록 하겠소.”
파천은 너무 답답했다. 이런 식으로 맺어지면 에이어가 의장이 되었다는 것 이외는 달라지는 게 하나도 없었다. 방만한 조직을 이 상태로 유지한다면 매우 비효육적이다. 제대로 된 지휘 체계도 없는 조직이란 외풍이 가해지면 금세 약점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다.
참다못한 파천이 나섰다.
“의장님, 제가 한 가지 건의를 드리겠습니다.”
“무엇입니까? 말씀하시지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현 상태의 전사평의회는 통합의 의미가 전혀 없습니다. 이대로라면 굳이 전사평의회를 발족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단일한 성격의 전사단이 수백 개 이상 함께 모여 있다는 의미 외에 어떤 기대치도 가질 수 없는 실정입니다.
이래서는 소용이 없습니다. 외부의 적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려면 조직체계를 일신해야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제일 먼저…… 전사단을 해체해야 합니다.”
모두가 얼토당토않은 말이라 반대하고 나섰다. 장내가 소란해지자 의장인 에이어가 수습했다.
파천은 말을 이어갔다.
“그런 뒤 실력에 우선해 새로운 지휘 체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의장의 권한을 확대하고 직속부대를 편성해야 하며 전체 전사들을 몇 개 단위의 부대로 재편성해야 합니다.
또한 명령 계통을 확고히 하기 위해 부대 내에 새로운 직위를 만들어 모든 걸 새롭게 해야 합니다. 이런 바탕 위에 하룬의 외부 지역에 소규모 작전 부대를 파견해 외부의 정보를 수집하고, 적의 움직임을 탐지해 효과적으로 대처해 나가야 하는 것이죠.
그 이외에도 많습니다. 이를 위해 의장님과 장로님들만으로 구성된 회릐응 여시는 게 시급합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그건 분명합니다.”
“그건 파천의 말이 맞는 것 같군.”
라미레스가 안으로 들어서며 거든 말이었다.
에어어뿐만 아니라 장로가 된 인물들까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문제는 오랜 전통을 지닌 전사단들을 해체하는 문제였다. 그들이 순순히 따라 줄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해야 할 부분이었다.
결국 에어어는 장로회의를 소집했고 거기서 결정되는 사안에 대해서는 반대가 많더라도 밀어붙이기로 했다.
카이로가 생각보다 늦어지자 파천은 은근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 일을 아난다와 라미레스에게 의논했다. 라미레스는 한 가지 짚이는 것이 있어 내심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으나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늦는 게 조금 이상한데. 라미레스, 카이로에게 영언 전달이 가능할까?”
“그야 의식이 없거나 스스로 거부하지 않는 한 가능은 하지. 해볼까?”
“그래, 한번 해봐라.”
라미레스는 잠시 집중을 하더니 곧장 영언 전달을 시도했다. 하룬 전 지역에 걸쳐 조밀한 망을 형성해 여러 차례 시도했다.
라미레스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내내 파천은 불안감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이때 아난다가 갑자기 떠오른 말을 꺼냈다.
“아레나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잠시 그녀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녀 뒤를 따르게 했던 라치오와 동료들까지 감감무소식이지 않은가? 이때다.
콰당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두름이 안으로 구르듯 뛰어들며 다급하게 말했다.
“가름이, 가름이 사라졌어요.”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파천은 한꺼번에 줄지어 일어난 실종에 어안이 벙벙했다. 라미레스가 눈을 뜨며 허탈한 어조로 말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게 분명해.”
카이로와 아레나 정도가 소식을 전하지 못할 정도로 손쉽게 제압 당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라미레스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말을 했다.
“방해를 받는 지역이라면 영언을 못 들을 수도 있다. 결국은…… .”
파천은 라미레스가 뭔가 알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라미레스는 곧장 불칸에게 영언을 전달했다.
[불칸, 선발대 내에 문제가 발생했다. 몇몇 대원이 실종됐다. 아무래도 놈들의 짓인 것 같다.]
[그래서?]
[네 제안대로 하지. 놈들을 지금 곧바로 친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놈들의 근거지가 어딘가?]
[페이룬트 절벽의 동굴 일대다.]
[인원은?]
[파악된 것만 50여명. 그 외에 하룬 일대에 암약하는 놈들도 있겠지.]
[좋다. 지금 즉시 움직인다.]
[알았다. 그곳에서 보지.]
영언은 끊어졌다.
라미레스는 곧바로 선발대원들을 모아들였고 전사평의회 의장과 슐탄을 제외한 장로들까지 한자리에 불렀다. 그는 간략하게 설명했다.
“이번 일은 나와 아난다, 파천 그리고 페리칸만 움직인다. 나머지는 평의회 본부에서 떠나지 말고 이왕이면 모구 한자리에 모여 있도록.
내가 한 말 명심들 해라. 절대 흩어지면 안된다. 어떤 일이 발생할 지 모르니.“
라미레스와 파천, 아난다와 페리칸은 페이룬트 산을 향해 떠났다. 하룬을 감싸고 있는 아름다운 산에 그런 좀벌레들이 서식한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 일이었다.
“저 동굴들에 있다는 말이냐?”
“그래. 자, 가자.”
슈슈슈슛
네 명은 바람이 되어 허공을 갈랐다. 그들이 절벽에 가까워지는 순간 다른 쪽에서 합류하는 드 그림자가 있었다. 그들은 불칸과 몰간이었다. 몰간은 어느새 치료를 다했는지 멀쩡한 모습을 보였다.
“바로 저기야. 이쯤 되면 놈들도 우리 움직임을 느끼고 있겠지. 어떻게 반응하는지 볼까?”
불칸은 갑자기 가속해 동굴 속으로 혼자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뒤를 따르던 라미레스가 혀를 찼다.
“저놈의 호승심은…… 아직도 버리지 못했군.”
동굴은 깊었다. 안으로 쏜살같이 들어서던 불칸과 그 뒤를 따르던 선발대의 종적이 사라진 직후였다.
우르르릉
동굴이 무너지듯 요동치더니 벽면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건 잠깐 동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우르르릉
동굴이 삽시간에 무너져 내렸다. 붕괴의 현장에서 터져 나온 소리는 라미레스의 것이었다.
“모두 탈출해.”
콰콰콰쾅
요란한 굉음과 함께 이미 동굴은 흔적도 없었다. 산의 일부가 형태를 바꿀 정도로 거대한 붕괴였다. 얼마나 컸던지 그 소리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던 하룬의 전사평의회 본부에까지 들렸다.
뒤 이어 또 한 번의 요란한 굉음이 하늘로 퍼져 올랐다.
쾅
산의 일부가 뻥 뚫리는 듯한 소리였다.
실제로 절벽 한 부분에 십여 명은 족히 통과할 수 있을 만큼 큰 구멍이 뚫리더니 그곳으로부터 튀어나오는 것이 있었다. 파천 일행이었다. 흙먼지를 가득 뒤집어쓴 채였지만 모두는 무사했다.
“이놈들 봐라?”
라미레스가 어이없어 하며 막힌 동굴과 새로 뚫린 동굴을 번갈아 쳐다본다. 이때 불칸이 이마를 탁 쳤다.
“기운이 끊어졌다. 놈들이 기운을 감췄어. 잠적할 셈인가?”
불칸의 말은 파천에게는 청천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와 같았다. 적들이 지하로 숨든 수면 아래로 가라앉든 그런 건 지금의 파천에게 그다지 큰 관심거리랄 수 없었다. 문제는 실종된 선발대원들이었다. 그들의 종적도 함께 묻혀 버린다면 곤란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찾아 볼 방법은?”
“움직이길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어.”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여섯 명은 흩어져 페이룬트 산 곳곳을 뒤지고 다녔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이 헛수고에 불과했다. 어떤 흔적도 발견되지 않는다.
허탈한 심정으로 전사평의회 본부로 돌아온 일행은 한자리에 모였다. 라미레스와 파천, 아난다와 페리칸, 불칸과 몰간, 의장 에이어는 따로 모였다. 라미레스가 파천의 눈치를 살피더니 어렵게 입을 연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파천. 우리 먼저 떠나자.”
“여기는?”
파천은 멍한 시선을 천장 쪽에 두고 있었다. 모든 사정 얘기를 듣고 난 뒤였다.
특히 불칸이 했던 말 때문에 파천의 심려는 더욱 커졌다. 라미레스가 떠난 이후에 그들이 움직일 거란 예상이었다.
“여기는 불칸과 페리칸, 아난다 등에게 맡겨 두면 별 문제는 없을거다.”
“정말 그럴까?”
“그럼,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지 않는 한 별탈 없을 거야.”
“만약 대규모 병력으로 이곳을 쳐온다면?”
“그럼 천상계나 선계도 움직이겠지 메덴도 가만있지는 않을 거고.”
“그 전에 여기 있는 자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라미레스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가야 한다, 파천. 네가 할 일은 여기에 있지 않다. 너는 전진해야 한다. 좋든 싫든 간에.’
결국 모든 걸 미정인 상태로 묻어 둔 채 파천과 라미레스는 하룬을 떠나기로 했다. 빠른 시간 내에 돌아온다는 기양과 함께.
파천의 심정은 착잡한 것 이상이었다. 시작과 마찬가지로 뜻을 같이 한다는 목적 한 가지만으로도 끝을 함께 하고 싶은 이유는 충분했다.
잠시 할 일이 있어 이탈하지만 파천은 다시 돌아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선발대원 전원을 이끌고 모든 여정을 마치겠다고 다짐했다.
이루 그들과 함께 마계에 맞서 싸울 걸 꿈꾸면서 파천은 하룬을 떠났다. 그의 가슴에 간직된 소망이 이루어지려면 그는 더 강해져야 했다.
‘지금 가는 길이 목표를 향해 한 걸음씩 가까워져 가는 길임을 믿기에 난 멈추지 않는다.’
모두의 한결같은 마음을 등과 어깨에 지고 머리에 이고 하는 파천은 그래서 더 무거웠다.
어느 순간 누군가가 걸었을 길은 그 기억만을 간직한 채 홀로 굽이굽이 이어져 있다. 산을 넘고 언덕을 지나 하늘에 맞닿을 듯 숨가쁘게 내달리 있다.
하늘은 저 홀로 높고 강은 깊어 흐르는 소리 들리지 않는다. 넓은 들엔 인적 드물어 같이 할 이 흔하지 않다.
파천과 라미레스는 한시도 쉬지 않고 공간을 내질렀다. 그들이 목적하는 곳은 메덴. 수련자의 성지라 불리는 하늘 아래 가장 비밀이 많은 곳이었다.
메테우스를 기리기 위해 모여든 자들이 그의 삶의 여정을 본받아 따른 것이 수련자의 탄생이었으나. 그 이전부터 그곳은 신비를 간직한 장소였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영계의 마지막 금역이라 부를 수 있는 망각의 강이 흐르는 곳. 메테우스가 굳이 이곳에서 마지막을 보낸 이유가 있었을 터.
파천은 설레는 마음을 금치 못했다. 자잘하다 할 수 없는 걱정거리들이 태산처럼 마음을 압박해 왔지만 그럼에도 그는 기대로 밤잠 설치는 어린 소년의 심정이 되었다.
메덴이 가까워져 갈수록 라미레스의 얼굴에서 설핏 긴장이 서린다. 녹녹치 않은 일이 버티고 있으리라.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룬을 떠나올 때 불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자네가 칼을 뽑아야 할지도 몰라. 치앙마를 제거해야 한다면 그렇게라도 해야지. 메덴을 수습하게.
나서는 이들로 인해 잠시 대세가 오인되는 것일지도 모르지. 숨은 수련자들의 뜻을 이끌어낼 수만 있다면 대세는 달라질 수도 있네. 명심하게. 자네에게 무한계의 운명이 걸려 있음을. 전쟁은 불가! 막아야 하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막아야 하네.“
라미레스 또한 동의하는 바였다.
‘그렇지만 어떻게?’
치앙마를 제거한다 해서 끝날 문제라면 이리 고민하지도 않는다. 특사 케로이가 죽었다 미리 계획된 일이었으니 이 소식은 벌써 메덴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지금쯤이면 동원령을 내리기 위한 원탁이 소집되었을지도 모른다. 과연 협상의 여지가 남아 있는 것인가?’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파천은 이때 다른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설란…… .’
그녀가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이들이 있는 자리에서야 내색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소식이 가장 궁금했다. 천상계로 공간 이동되어 갔다는 것만 알 뿐, 그 뒤의 소식은 듣지 못했다. 보고 싶은 얼굴은 눈감으면 더 생생했고 손 내밀면 만져질 듯했다. 파천은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다른 수하들도 마찬가지였다.
‘오지 않는다면…… . 또 그럴 만한 연유가 있겠지.’
라미레스가 더 속도를 내자고 했다. 다급함이 묻어나는 음성이었다.
파천은 그가 옆에 있어 든든했다.
‘네가 없었으면 어찌할 뻔했는가…… .’
서로의 가슴은 굳이 열어 확인해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그 진실 됨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