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36화 : 전쟁을 위한 메덴의 원탁회의
전쟁을 위한 메덴의 원탁회의
라미레스의 예측대로 메덴은 또다시 원탁이 소집되었다.
이번엔 메덴에 원탁이 도입된 이래 최대 규모의 회의였다. 기존 원탁의 의원들을 제외하고도 수련자라면 누구나 참석할 수 있게 조치한 때문이었다. 그만큼 중요한 사안을 결정해야 하는 자리였다. 또한 나중에라도 잡음이 생길 걸 방지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치앙마가 전과 다름없이 회의를 주재하고 있었지만 그는 예전과는 달리 매우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렵게 생각하는 거물들이 원탁에 참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스승이자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바소름이 추종자들을 이끌고 상석에 앉아 있었고, 그 반대편 쪽엔 중도의 입장을 표방하는 카포가 여럿 수련자들에 둘러싸인 채 근엄하게 자리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수련자들 중 비중 있는 인물들은 어디 있다가 나타났는지 모조리 한 자리씩을 꿰차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벵골만이 보이지 않는다.
치앙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갔다.
“모두들 들으셨다시피 어처구니없게도 원탁의 명령을 수행하던 특사 케로이가 암살되었습니다. 불법 단체인 전사평의회에 의해 수련자가, 그것도 특사로 파견된 수련자가 살해되었습니다.
초유의 이 사건에 대한 제 소견부터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현재 무한계의 정황을 따져 볼 때 전사평의회와 저희 메덴이 전쟁을 하면 치명적입니다. 이건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전쟁을 해야 한다고 감히 주장하는 바입니다. 우리가 그 동안 치중했던 건 메테우스 님의 이상인 평등과 자유를 이 땅 무한계에 실현시키고자 함이었습니다. 물론 과오도 여러 번 있었고 비난을 받은 적도 있었지만 그리 큰 흠 없이 잘 유지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무한계에 전사들이 없다면 시끄러울 일이 없습니다. 그들은 늘 분쟁의 중심에 있었고, 그들에 의해 분열과 대립이 파생되었습니다. 그 죄가 어찌 작다 하겠습니까!
이제는 전사평의회란 괴뢰 집단을 통해 또다시 무한계를 폭풍 속으로 몰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를 비롯한 원탁은 그들의 불법적인 집회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던 바 특사로 수련자 케로이 님을 파견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의도는 그들에게 경고를 취해 더 이상의 섣부른 행보를 차단시키고자 함이었습니다. 필요하다면 소규모의 국지전을 통해서라도 그들의 잘못된 판단을 바로잡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뜻은 너무도 확고합니다. 특사를 살해했다는 건 전면전도 불사하겠다는 강력한 전쟁 위지의 표현입니다. 만약 지금 단계에서 저희들이 양보해 물러선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이후를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영역을 확장하느라 혈안이 되겠지요. 전면전을 피해야 한다는 약점을 기화로 방자한 행동을 서슴지 않겠지요. 객관적인 전력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아는 그들이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었던 건 바로 그 점입니다.
그들이 믿는 건 그것 한 가지일 것입니다. 방치해 둔다면 결국에 가서는…… 메덴의 권위는 더 이상 빌붙일 곳이 없게 되고, 무한계를 위해 그 동안 우리가 애써 온 것들이 단시간에 무너져 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청하건대 메덴 전체에 동원령을 내려 군대를 편성하고 전사평의회를 이 땅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전쟁은…… 이제 피할 수 없습니다.”
수련자 카포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치앙마는 놓치지 않았다.
‘카포가 긍정적인 뜻을 표했으니 다 된 건가? 그렇지만 아직은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치앙마는 전쟁을 원한다. 전쟁을 통해서 그가 얻을 수 있는 게 많기 때문이다. 확고한 지위와 권력이 보장되고 장차 있을 마계와의 전쟁에 무한계를 대표하는 지도자로 추대될 수도 있다.
그것뿐이던가? 각 계파로 나뉘어져 분산된 수련자의 힘을 하나로 집결할 수 있게 된다. 더 이상 누구 눈치 볼 것 없이 독단적으로 모든 일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였다.
‘스승 바소름의 그늘을 벗어날 수도 있다.’
사실 그가 바라는 것 중 가장 큰 부분은 그것이었다. 바소름의 그늘은 너무도 크고 깊어 자력으로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그런 의지를 나타내기만 해도 자신은 이 자리를 내놓고 물러나야 할지도 몰랐다. 카포가 말했다.
“의장의 말에 일리가 있군. 나도 동의하는 바야. 전사들을 이렇게까지 클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게 아니었어.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이라도 밑동을 잘라내야지.
우리 쪽 출혈도 어느 정도는 감수해야겠지. 필요하다면 내가 천상계에 다리를 놓아 볼 테니 연합 작전을 펼쳐 보는 것도 괜찮겠군. 그래야 다른 놈들이 이득 보는 걸 막을 수가 있어. 우리의 피해를 최소화시킬 수 있는 방안이 충분히 마련된 뒤에 시작해도 해야겠지.”
카포의 신중한 발언에 치앙마는 힘이 나는 듯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천상계뿐만 아니라 선계에도 협조를 요청할 생각입니다. 전사들을 몰아낸 연후엔 곧바로 전시 체제로 돌입해 마계의 침략에 대비할 것입니다.”
“흐음, 좋아. 그럼 굳이 말을 늘일 필요 없이 거수로 결정하지.”
원탁의 확대 회의는 전원 찬성이 아닌 과반수 이상의 찬성만 얻어도 사안을 통과시킬 수 있다. 카포는 급한 성격대로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여 관철시키려 했다. 더 이상의 얘기는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치앙마는 그렇지 않았다.
“누구 다른 분의 의견은 없으신지요?”
바소름 옆에 있는 듯 없는 듯 고요히 앉아 있던 자의 입이 열렸다. 그는 바소름의 측근인 수련자 세네카였다. 진중한 성격이었고 치밀하고 침착한 그는 바소름의 왼팔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이유로 치앙마와는 알게 모르게 경쟁적인 구도를 이루고 있었다.
“내가 한마디 하겠소.”
“그러시오, 세네카 수련자.”
“분명 의장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전쟁은 피해야 한다고 했소. 그렇지 않소?”
“그랬소. 그렇지만…….”
“그것이 큰 그림이오. 전사들과 본 메덴과의 전쟁은 여하한 경우에도 반드시 피해야 할 최악의 수요. 더 이상 회의를 진행시킬 필요성도 느끼지 않소. 그들을 다독거려 우리 그늘에 두려 하는 시도라면 그 방안을 얘기해 보겠으나 전쟁을 하겠느냐 말겠느냐, 라니.
작은 그림은 큰 그림의 일부일 뿐. 누구도 그걸 위해 큰 그림을 망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소. 우리의 자존심이 훼손되었소? 수련자의 자존심이라는 게 뭐요? 그것부터 물어 봅시다.
우리가 언제 무한계를 지배하고자 수련자의 길을 걸었던 적이 있었습니까? 권위라고 했는데 무슨 권위를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소. 만약 잘못되고 그른 것이 있다면 모든 일이 진정된 뒤 그때 가서 해결해도 늦지는 않습니다.
전사들의 입장을 충분히 헤아려 보지도 않고 무조건 몰아붙인다면 누구라도 반발하기 마련입니다. 그들이라고 다르겠습니까? 전사들의 성향이야 일찍부터 알고 있던 바가 아니고? 그런데 무조건 인정할 수 없다, 해체해라, 라는 식으로 몰아붙이니 그들이 잠자코 받아들이겠소이까?
처음부터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전쟁은 불가하오. 그 결과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이 어디 마계뿐입니까. 규모야 그들이 가장 크다지만 위협적인 적들은 그들말고도 도처에 산재해 있소이다.
제발…… 정신들 차리시오. 여차하면 모든 건 끝장나는 겁니다. 여기서의 결정이 무한계뿐만 아니라 전 영계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수도 있음을 명심하시고 좀더 신중한 결정을 내려야 할줄로 압니다.”
단호했다. 치앙마로서는 전혀 예기치 못했던 자에게서 나온 반대였다.
아무리 자신과는 경쟁 관계에 있다고는 하지만 바소름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는 그가 이렇게 치열하게 반대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치앙마의 시선이 무엇인가를 확인하고자 바소름에게로 향했다. 바소름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미동도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모를 일이었다. 치앙마는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치앙마는 떠듬거리며 회의를 속개했다.
“세네카 님께서…… 의견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다른 의견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카포의 얼굴이 편치 않은 걸 치앙마는 발견했다.
‘당신이라도 좀 적극적으로 나서 줘야지, 가만있으면 어쩐단 말인가?’
카포 옆에 있던 수련자 하나가 나섰다.
“그럼 세네카 님께 묻겠습니다.”
“말씀하시오, 프리슈 수련자.”
“케로이의 죽음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를 지니고 있습니까? 이대로 참고 넘어가야 한단 뜻은 아니겠지요.”
“당연 그건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 사건으로 인해 본 메덴과 전사들의 불편한 관계가 지속된다면 과감하게 묻어버려야 합니다. 그들을 회유하는 데 거치적거린다면 말입니다.”
“뭐요?”
“케로이 수련자가 아니라 그 누구였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전사평의회에서 응당 그에 대한 조치를 해준다면 우리로서는 반겨야 할 일이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오. 지금의 상황에서는 말이오.”
“조치라면?”
“내부적인 징계 정도겠지요. 난 케로이 수련자의 죽음도 왠지 석연치가 않소. 설사 전사들이 내부적으로 우리와 전쟁을 결정했다 해도 그리고 선전포고를 해온 뒤라고 해도 그런 어리석은 짓을 벌일 거라고는 믿지 않소. 이건 좀더 캐봐야 할 여지가 남아 있소.”
“너무 하시는 것 아닙니까? 전사들의 입장을 고려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 때문에 억울한 죽음을 당한 케로이를 외면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오.”
“그렇지요. 억울하게 죽었다면 풀어 줘야겠지요. 만약 말이오. 이건 가정에 불과하지만……. 우리와 전사평의회간의 전쟁을 원하는 자가 계획적으로 그를 죽였다면 그때는 어쩌시겠소? 그럴 가능성이 더 많지 않소? 내가 만약 암중의 적이라면 그 방법이야말로 가장 손 쉬운 것이니 그 일에 전력할게요.
더군다나 메덴의 뜻이 전사평의회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뒤이니 어려울 일도 아니지요. 어쩌면 우리는 적의 농간에 놀아나고 있는지도 모르오.”
그 말은 특정한 방향으로 뜻을 굳히지 않고 미뤄 두고 있는 수련자들에게 경각심을 일으키게 했다. 가능성에 불과하지만 듣고 보니 그럴 듯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현 구도로 봤을 때는 가장 적절한 방법일 수도 있는 매우 경제적인 술수였던 것이다.
치앙마가 세네카에게 주의를 주었다.
“확실하지도 않은 일을 확대 해석해 혼동을 일으키게 하시면 곤란합니다.”
“알겠소. 명심하리다.”
이때다. 바소름이 눈을 뜨고 치앙마에게 시선을 주었다. 뒤이어 그의 시선이 회의장 전체를 샅샅이 훑어 간다.
수련자들 가운데서도 최고의 거물이라 할 수 있는 바소름. 무한계의 내로라 하는 강자들도 그 앞에 서면 주눅이 들게 마련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별종도 간혹 있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라미레스 같은.
바소름은 벵골과 함게 수련자 중 가장 영향력 있는 거물이었다. 메테우스를 끝까지 보필했으며 그의 뜻에 따라 메덴을 지금껏 키워오고 관리해 왔던 인물이었다. 라미레스도 그와 벵골은 인정했으며 그들에게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었다.
바소름이 회의기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입을 떼었다.
“모두들 너무 흥분해 있어. 침착함을 잃는다면 바로 볼 수 없지. 진실은 절반의 가능성을 어둠 속에 감추고 있거든. 치앙마.”
“네.”
치앙마의 낯빛이 긴장으로 얼어붙었다.
바소름은 낮은 음성으로 자분자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전사들을 너무 한곳으로 몰지 마라. 그들은, 진정한 전사들은 명예가 무언지 안다. 그런 짓을 할 자들은 아니야.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순수하다는 거야.
순수한 자들은 그래서 잘 이용당하기는 해도 대의를 위해서는 자신마저 버릴 줄 아는 용기가 있다. 내 뜻이 궁금하겠지?”
“그렇습니다.”
“전쟁을 했으면 좋겠느냐?”
마치 둘만이 이 자리에 있는 듯한 물음이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모든 건 때를 살펴 결행해야 한다. 때가 아니야. 과한 욕심으로 시기를 읽지 못하고 고집을 부리다간 모든 걸 잃게 된다. 지금은 기다리고 참아야 할 때. 먼저 움직이다간 적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지. 힘을 비축해 두고 가만 웅크리고 있을 때지. 언젠가는…… 그 힘이 크게 소용되는 때가 올 게야.
모든 동지들에게 고하오. 메덴은 먼저 침략하지 않소. 전사들이 메덴을 쳐온다면 당연히 막아내야겠지만 우리가 먼저 그들을 쳐서는 안 되오. 메테우스 님은 늘 말씀하셨지요. 이곳을 끝까지 지켜내고 있습니다. 메덴은…… 영계의 희망이 되어야 하오.”
잠시 숙연한 기운이 회의장 내를 감돈다. 메테우스를 곁에서 보필했던 바소름이 그를 언급하며 진실된 어조로 말했기 때문이다.
치앙마는 속으로 다 틀렸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바소름 님이 내 뒤통수를 칠 줄이야.’
그는 수련자들의 얼굴을 살폈다. 과반수는 커녕 카포를 추종하는 자들 중에서도 반대표가 나올 듯한 분위기였다.
이때다. 회의장 안으로 치앙마의 수하가 들어왔다. 그는 곧장 치앙마에게 다가오더니 작은 소리로 말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걸 지켜보던 세네카의 시선이 그리 곱지 않았다. 메덴은 수련자들의 대지다. 수련자들 중에 수하들을 양성하는 전통은 없었다. 그걸 무너뜨린 이가 바로 치앙마였다. 그는 수련자가 아닌 자들을 대거 끌어들여 사조직을 만든 것이다.
바소름이 묵인했으니 세네카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치앙마의 얼굴이 다소 밝아진 걸 세네카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 동안 메덴을 떠나 계셨던 벵골 님께서 돌아오셨다는 소식입니다. 곧 이곳으로 드실 것입니다.”
대수련자 벵골. 바소름과 더불어 양대 주축을 이루는 거물이다. 바소름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메테우스를 보필했던 자였다. 종적조차 묘연했던 벵골이 메덴으로 돌아온 것이다.
측근들 몇만 데리고 메덴을 떠났던 그가 다시 돌아왔다는 건 메덴의 구도에 변화의 조짐을 예고하는 일이기도 했다.
치앙마의 말을 들은 수련자들이 놀람의 기색을 보인다. 세네카는 얼른 바소름의 눈치를 살폈다.
바소름은 다시 눈을 감고 깊은 침묵 속에 빠져들어 있었다.
벵골이 회의장 안으로 모습을 보이는 순간 바소름과 카포를 제외한 전 수련자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벵골이 상징이기도 한 윤기 나는 백발이 그의 어깨 위에서 휘날리고 있었다. 그는 혼자였다. 그를 따르던 수련자들은 하나도 대동하지 않고 그 혼자만이 메덴을 다시 찾은 것이다.
치앙마가 손수 나서서 그의 자리로 안내했다. 벵골은 자리에 앉으며 바소름을 시선으로 먼저 찾았다. 이내 카포와 간단한 눈인사를 하고는 제자리로 돌아간 치앙마에게 물었다.
“소식을 듣고 왔네. 전사평의회가 특사를 암살했다는 게 사실인가?”
그걸 메덴이 접한 게 얼마 되지 않았건만 그가 이미 알고 있다는 게 좀 의외였다.
그때 바소름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가 다시 감긴다.
“네, 사실입니다.”
“흐음, 그런 일이 벌어지다니. 한심한 일이야. 메덴의 꼴이 말이 아니게 되었어.”
“송구할 따름입니다. 제가 불민하여 이런 일이 발생했습니다.”
“어디 그게 자네 탓이겠는가. 그래, 지금 그 얘기를 하고 있었던가?”
“그렇습니다.”
“카포, 자네 생각은 어떤가?”
그는 먼저 카포에게 의견을 물었다.
“나야……. 전사평의회와 전쟁을 해서라도 실추된 명예를 찾자는 쪽이지.”
“흐음. 그럼 바소름……. 자네는?”
바소름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긴 물어 본 내가 어리석지. 자네야 언제나 신중론자이지 않은가? 의장.”
“네, 말씀하십니오.”
치앙마의 목소리에 생기가 가득했다. 그는 바소름의 후광을 입고 이 자리까지 올랐다. 바소름과 벵골은 대립하던 사이다. 그렇게 따지면 치앙마는 벵골에게 적대적이어야 자연스럽다. 그런데 현재의 모습만으로는 그런 점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내 의견을 말해도 되겠는가? 그럴 자격이야 있겠지.”
“당연하지요. 벵골 님은 여전히 수련자의 신분이신걸요.”
“고맙네. 모든 동지들, 참으로 오랜만이오. 내 욕심을 좇아 메덴을 돌보지 않고 각지를 떠돌던 내가 디시 돌아온 건 이 얘기를 하고자 함이었소.
난 그 동안 무한계 내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적들의 동태를 조사하고 살펴보았소.”
장내의 수련자들이 동요한다. 그가 그런 목적으로 메덴을 떠났을 줄은 아무도 몰랐던 부분이었다.
“마계의 흔적은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소. 이로 미루어 보아 마계는 아직까지 직접적으로 무한계에 침투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오. 허나…… 그들보다 더 심각한 적들이 대거 암약하고 있소이다.
잠자는 대지의 제왕이 수하들을 파견했고, 대적자들이 남부권을 완전하게 장악했소. 뿐만 아니라 중부권에도 아바돈의 3군이 곳곳에서 출몰한 흔적을 발견했소. 게다가 마신이라 자처하는 자들까지 갖가지 패악을 일삼고 있소.”
그는 잠시 말을 끊고 수련자들의 반응을 살폈다. 장내가 술렁거렸다.
벵골은 현 무한계의 상황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었으며, 거의 흔적조차 잡히지 않던 무리들까지 언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하룬의 일은 시작에 불과하오. 그들이 어느 정도로 무한계를 잠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단언하건대 이곳 메덴을 제외하고는 그 어느 곳도 안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소이다.”
모두는 상황의 심각성이 예상보다 더하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무한계의 전력은 크게 우리 메덴과 칠대부족 그리고 전사들이오. 세 힘이 결집되어야 함은 당연하오. 그런 연후 천상계와 선계와 연계해 적들을 섬멸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 것이오. 전사평의회도, 칠대부족도 지금으로서는 안심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이오. 그들이 적과 내통하거나 적에게 장악되었다고 말하고자 함은 아니오. 아직은 그 정도는 아니겠지요. 그렇지만 그런 징후가 여러 곳에서 보이고 있다는 거요.
결국 우리는 우리 이외에도 그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되게 되었소이다. 참으로 통탄을 금치 못할 일이오. 이번 하룬의 사건은 그런 관점에서 다뤄져야 한다고 생각하오.
그들과의 전쟁을 억지하고, 할 수 있다면 연계를 하더라도, 연합만은 신중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메덴의 순수성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결정이오.“
치앙마는 벵골의 말을 듣다 보니 자신의 계획에 도움을 줄 것인지 아닐 것인지를 헤아리기 쉽지 않았다.
치앙마는 잠시의 시간을 두고 회의를 다시 속개하겠다고 선언했다. 서로간 충분한 대화를 통해 의견을 조율할 시간을 주자는 뜻이었다.
바소름은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고, 세네카도 곁을 지켰다. 카포와 벵골이 어딘가로 곧 이어 치앙마도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세네카는 가슴이 답답했다.
‘치앙마, 여러 번의 내 진언에도 불구하고 바소름 님께서는 아직도 널 믿고 계시다. 네 욕심으로 메덴을 더럽히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널 용서하지 않는다.’
회의장을 빠져하온 벵골과 카포 그리고 치앙마가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치앙마는 조바심을 냈다.
“전쟁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해야 합니다. 이대로 물러선다면 주도권을 뺏길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바소름 님이 반대한다는 것인데…….”
카포가 못마땅한 표정을 했다.
“그놈의 고집은. 전사들을 이대로 놔뒀다가는 정말이지 나중에는 통제불능이 되고 말 거야. 마계와의 전쟁 이후에 무한계가 그들의 차지가 될지도 모른단 말이지.”
그는 벌써부터 마계 침략을 이겨낸 이후를 얘기하고 있었다.
벵골은 치앙마를 직시했다.
“자네 뜻은 그러니까 전쟁을 하되 국지전으로 몰고 가며 시간을 끌다가 우리 쪽을 지지하는 인물들로 지도부를 구성하자는 얘기인가?”
“그렇습니다. 그것이 가장 현실적으로 합당한 계책이지요.”
“흐음, 그럴 듯하긴 하지만……. 전면전의 양상으로 흐르면 그땐 어쩔 건가?”
카포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우리가 그들을 무서워해서야 말이 안 되지. 전면전이면 또 어떤가. 전사들의 수가 아무리 많다해도 고만고만한 실력들. 오래 가지 않을 거야.”
벵골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잠시 후 벵골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대로 간다면 어느 쪽의 견해가 우세할 것 같은가?”
“지금으로서는 반반일 겁니다. 벵골 님의 경고가 있기 전만 해도 거수를 해볼 필요도 없을 정도였지요. 좀더 자극적인 내용이 필요한 시점인데 말입니다.”
카포가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나한테 맡겨 둬. 이럴 줄 알고 준비해 놓은 게 있지.”
벵골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좋은 수라도 있나?”
“있지. 아암 있고 말고. 자, 다시 회의를 속개하게.”
회의는 다시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또 다른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후룬을 떠나 급하게 달려온 라미레스와 파천이었다. 그들이 회의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파천에 대해서는 호기심 어린 시선이, 라미레스에게는 왠지 모를 껄끄러움과 부담감을 지닌 시선들이 일제히 둘을 향해 집중되었다.
그때까지 눈을 감고 묵상에 잠겨 있던 바소름까지 파천을 살피고 있었다.
치앙마는 정말이지 라미레스를 죽으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네가 날 멋대로 가지고 놀고서도 뻔뻔스럽게 이 자리에 나타나다니.’
치앙마의 어조가 전에 없이 강경해졌다.
“라미레스, 당신은 이 자리에 참석할 자격이 없소. 나가 주시오.”
“무슨 말인가. 나 또한 수련자이거늘 자격이 없다니?”
“하룬에서 전사평의회를 지지한 자가, 그 자리에 있으면서 특사의 죽음을 방관한 그대가 어찌 이 자리에 있을 수가 있나?”
“말이 심하군, 의장. 다른 이들이 들으면 정말인 줄 알겠군.”
“정말이지 않은가?”
“천만에. 내가 하루에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특사를 만나 보기도 했지만 그가 죽은 건 나와는 무관하다. 또한 내가 알았으면 막았겠지 지켜보고만 있었겠는가? 방관했다니 가당치도 않다.”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는 건가, 라미레스? 그대의 능력이라면 흉수가 누구였든 간에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내 능력을 믿어 주는 건 기분 좋은 일이나, 난 전능한 신이 아니야. 몰래 숨어들어 죽이고 나간 걸 날더러 어쩌란 말인가? 그렇지 않소, 동지들?”
둘간의 팽팽한 설전은 한참을 더 이어질 듯했다.
“의장의 직권으로 그대에게 명한다. 그대가 수련자라고 생각한다면 이 자리에서 나가라.”
초강수였다. 라미레스는 난처해졌다.
‘까짓 이렇게 된 것.’
라미레스 또한 치앙마의 초강수에 지지 않고 맞대응했다.
[치앙마, 이렇게 몰아붙이면 너한테 좋을 것 하나도 없다. 우리의 밀월 관계는 아직까지 여지가 많이 남아 있거늘. 네가 정녕 끝장을 볼 셈이냐? 적당히 양보하는 선에서 마무리 짓지.]
치앙마는 속으로 뜨끔했다.
라미레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치앙마는 잠깐 동안이지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여기서 또 물러서면 언제까지나 저놈에게 끌려 다닐 수밖에 없다.’
치앙마의 결론이었다. 이때 파천이 말했다.
“우리는 전사평의회 특사 자격으로 이곳에 왔습니다. 전사평의회의 뜻을 전달하고자 왔단 말입니다. 회의가 공개되어 곤란한 부분이 있다면 물러나겠소만 그렇지 않다면 굳이 이렇게까지 내몰 이유는 없어 보이는구려.”
치앙마는 코웃음쳤다.
“이제는 별별……. 전사평의회의 특사라고? 잘됐군. 너희들이 우리가 보낸 특사를 죽였으니 우리 또한 똑가티 갚아 주면 되겠구나.”
카포가 벌던 일어나며 술렁거리는 분위기에 불을 붙였다.
“전사들이 그동안 우리와의 전쟁을 준비해 왔음을 입증할 만한 증거가 있소.”
바소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카포의 발언에 라미레스의 얼굴도 찌푸려졌다.
‘저놈이 미쳤나? 그 따위 증거가 있을 턱이 있나? 있지도 않은 일을 꾸며대다니…… 한심한.’
그렇지만 불안하긴 했다. 금방 들통날 거짓을 꾸며낼 위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미레스, 그대는 수련자에서 곧 제명당할 것이다. 그쯤 각오하고 있었겠지. 하긴 자네야 그런 걸로 위축될 위인은 아니지.”
“증거가 있다고 했나? 카포, 만약 네가 괜한 짓을 꾸민 것으로 드러난다면 넌 각오해야 할 거다.”
역시나 라미레스는 무법자였다. 다른 수련자들이 모두 지켜보는 자리에서 카포에게 협박을 하고 있지 않은가.
라미레스의 으름장에 카포는 웃기만 했다. 그렇지만 그의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들어와라.”
카포의 자신감 넘치는 소리가 회의장을 들썩거리게 했다.
누군가 안으로 접어들었다. 그는 전사였다. 하룬에 있어야 할 전사가 엉뚱한 메덴에 나타난 것이다.
‘이건 조작하려는 음모다.’
라미레스는 돌아가는 상황이 어떠한 지를 알게 되었다.
이때 바소름의 영언이 라미레스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라미레스, 당황하지 말고 잘 대처해 주기 바라네. 자네에게 모든 게 달렸어. 전쟁은 막아야지 않겠나?]
라미레스는 바소름을 쳐다보았다. 바소름은 다시 눈을 감고 있었다.
‘좋아, 하는 짓들을 내 끝까지 보아 주마. 바소름, 네 말처럼 전쟁은 막아야지.’
[앞은 내가 막지. 뒤를 부탁하네.]
라미레스가 바소름에게 한 영언의 내용이었다. 바소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사라진다.
회의장에 나타난 전사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저는 슐탄 단주의 직계 수하입니다. 사실대로 모든 걸 불겠습니다.”
파쳔은 머리가 복잡하게 엉키기 시작했다. 전혀 예상 밖으로 그는 슐탄의 수하라 하지 않는가?
‘이건 뭐지? 뭔가?’
“슐탄 님은 오래 전부터 전사단주들을 포섭해 왔습니다. 이번 전사평의회에 두 분의 후보가 나서게 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제가 섬기던 슐탄 님이셨죠. 그 분의 뒤에는 정확히는 모르나 분명 배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래 전부터 그들과 교류를 해왔으며 그들 지시를 이행하는 것 같았습니다.
슐탄 님은 이번에 전사평의회를 통해 메덴과 전쟁을 치러 반드시 승리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전사평의회의 전력이 메덴에 비해 뒤떨어지는 건 사실이지만 조력자가 있으니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잠깐.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 보거라.”
카포가 약간 얼이 빠져 있는 전사의 입을 막아 버리고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케로이를 죽인 이유는?”
“특사를 전사평의회 본부 내에서 죽여 자연스럽게 전쟁을 일으키려고 그랬던 겁니다.
케로이를 죽인 게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너는 분명 조금 전 전사들이 전쟁을 원하고 있다고 했다. 맞나?”
“그렇습니다.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네 생각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웃기는군.”
라미레스가 코방귀를 뀌며 참견했다.
“전쟁을 원하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놈이 이 자리에 버젓이 나타나 그딴 얘기나 하고 있다니…… 나의 머리로서는 이해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부분이야.”
카포는 개의치 않았다.
“현재 평의회 의장은 누가 되었지?”
“에이어가 의장이 되었습니다.”
“에이어는 어떤 인물인가?”
“전사단들 중 가장 핵심적인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오대전사단의 중추적인 인물이지요. 그 동안 중부권 전사들의 움직임을 암중 조종해 온자로 야망이 크고 욕심이 많은 자……”
“더 이상은 듣고 있을 수가 없군. 의장! 이걸 지금 끝까지 듣고 있어야 할 필요가 있나? 대체 무슨 짓들을 하고 있는 건 줄이나 아나? 지금 맛이 간 놈 하나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얼토당토않은 말 몇 마디에 무한계의 운명을 걸어야 한단 말인가?
이게 수련자들의 성지라는 원탁의 선택이라면…… 참 어처구니가 없군. 내가 수련자라는 게 이렇게도 부끄러워 본적이 없었다.”
“꽤나 시끄럽군.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나?”
전사는 카포를 똑바로 쳐다보다가 라미레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슐탄 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라미레스 때문에 모든 게 틀어졌지만 그 역시 에어어를 통해 메덴을 칠 것이 분명하다고…… 그래서 의장이 되지는 못했지만 장로직이라도 거절하지 않고 기꺼이 맡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결국엔 의도대로 모든 걸 얻게 될 것이라 하셨죠.”
라미레스는 자신에게로 향하는 수련자들의 시선을 대하며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바소름의 영언이 다시 전해졌다.
[흥분하지 말게. 모든 걸 망쳐 버릴 셈인가!]
그건 효과가 있었다.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정신이 번쩍 났다.
라미레스가 특유의 그 유들유들한 미소를 입가에 매달았다.
“아주 멋지군. 그럴 듯해. 슐탄 그놈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치고는 꽤나 설득력이 있어. 설마 카포 너도 연관이 되어 있는 건 아니겠지. 제발이지 네가 이용당했길 바란다. 그런 게 아니고 같은 부류라면 내 분노는 꽤 큰 것일 거야.”
“모두 밝혀졌는데도 시치미를 뗄 건가!”
“뭐가? 뭐가 밝혀졌다는 말인가? 하하하하, 그런 저놈의 입에서 바소름의 이름이 거명되면 그가 모든 일을 암중에서 조종한 흉수가 되는 건가? 내가 저런 놈 하나를 데리고 와 카포, 네가 모든 일을 꾸몄노라고 말하게 한다면 그걸 순순히 인정할 건가? 대체 뭐가 밝혀졌다는 건가? 이해할 수 없군.”
라미레스의 말대로였다. 신분조차 명확하지 않은 전사의 몇 마디 말로 확정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카포와 치앙마의 얼굴이 한결 편해 보이는 건 이것으로 어느 정도는 분위기를 자기들 쪽으로 끌어왔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벵골은 내심 고개를 젓고 있었다.
‘겨우 이런 걸로 그렇게 자신 있어 하다니. 역시 카포는 믿을 수가 없어.’
그의 진단은 정확했다. 라미레스가 반격을 시작했다.
“좋아. 그렇게 내가 수련자 신분인 게 못마땅하면 내 지금 이 자리에서 수련자를 포기하겠다. 좋아, 그러면 되는거지?
그럼 지금부터는 전사평의회 특사 자격으로만 말하겠다. 내 말이 끝나기 전에 누구라도 나서는 놈이 있다면 그가 누구라도…… 머리를 바수어 버리겠다. 저놈의 말을 들었으니 이제 내 말을 들어라. 전사평의회 의장 에이어가 메덴의 원탁에 전하는 말이다.
전사평의회는 메덴이 언하기만 하면 언제든 명령을 이행할 준비가 되어있다. 전사평의회는 메덴의 하부 조직이며, 메덴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인정한다. 이후 마계와의 전쟁에 메덴을 도와 분골쇄신할 준비가 되어있다.
전사평의회에 속한 모든 전사들은 이후 메덴의 특별한 명이 있기 전에는 하룬을 절대 떠나지 않는다. 메덴이 원할 시에는 내부 감사뿐만 아니라 지도부의 개편 요구에도 따른다.
자, 이게 전사평의회의 공식적인 입장이다.”
“그게…… 정말인가?”
치앙마가 놀라 입을 딱 벌렸다. 그만이 아니었다. 벵골도 의외였던지 미심쩍은 표정을 했다. 의장의 뜻이긴 했지만 좀 과장시킨 면도 없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렇게 해서라도 급한 불부터 끄고 봐야 했다.
“부끄럽지도 않나? 전사들은 무한계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자존심마저도 버렸다. 그에 비해 무한계의 정신적인 지도자를 자처하는 메덴은 어떤가?
이런 추잡한 음모나 만들어 되도 않은 짓거리들이나 일삼고 있으니…… 메테우스가 이 일을 알면 입에 거품을 물 일이 아닌가.
선택은 그대들이 하는 것이다. 끝까지 전사들을 궁지에 몰아 전쟁을 벌여서 이 빌어먹을 무한계를 싹 쓸어버리든가 아니면 수련자로서 조금의 양심이라도 남아 있다면 전사평의회의 제안을 받아들여 협정을 하든가. 어떻게 할 건가?
치앙마, 네 놈의 말을 먼저 들어보자. 이놈 저놈 하니 왜 기분 나쁘냐? 이제 난 수련자도 아니니 네놈을 원택의 의장으로 예우해 줘야 할 일도 없어. 그러니 내 언사가 좀 거칠더라도 아량 넓은 네가 이해해라.
자, 네놈의 생각을 먼저 말해 봐라. 그 잘나신 낯짝을 내가 잘 보이게 하고서 얘기해라. 끝까지 엉뚱한 말을 해대면 내가 이 자리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네 놈만은 내 용서하지 않겠다.”
예전 라미레스는 원탁을 한번 뒤집어엎은 적이 있었다. 그때도 다른 수련자들은 참아야 했다. 바소름과 벵골이 나서서 수습하지 않았다 해도별일 없었을 것이다. 라미레스는 한 번 결정한 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인물임을 수련자들은 잘 알고 있었다.
치앙마가 기세에 눌려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그들이…… 그렇게 한다면…… 우리도 받아들여야지.”
“좋아. 그러면 회의를 진행해. 전사평의회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인다, 말 것인가를 물어 봐.”
졸지에 전쟁을 하느냐, 마느냐의 얘기는 자취를 감춰 버린 것이다.
벵골이 막 입을 열려다 그만둔다. 이제는 그 어떤 얘기도 수련자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을 수 없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전사평의회의 제안은 그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여기다 라미레스의 으름장이 또 한 번 효력을 발휘한다.
“손 잘들 들어. 반대하는 놈들 기억해 두었다 나중에 따로 한 번씩 보자고. 몇 번의 생을 되풀이해서라도 말야.”
치앙마가 수련자들에게 말했다.
“전사평의회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쪽에 가표를 던지실 분은 거수해 주십시오.”
수련자들이 너도나도 손을 번쩍번쩍 드는 모습에 파천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바소름 옆에 있던 세네카도 활짝 웃고 있었다.
라미레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뭐, 세어 볼 것도 없군. 끝났어. 더 이상 전사들과 전쟁 운운하는 놈들이 있다면…… 말 안 해도 알거야.”
라미레스의 불끈 쥔 주먹이 오늘 따라 유난히 커 보이는 건 왜일까?
치앙마는 왠지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따져 보면 그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 저렇게까지 전사들이 저자세로 나올 줄은 몰랐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조건을 내건 것이다. 목적을 이뤘으니 된 건데도 속이 찜찜한 건 왜일까?
벵골과 카포가 밖으로 나가는 뒷모습을 라미레스는 놓치지 않고 노려보았다.
‘저놈들 뒤에서 뭔가 구린내가 난단 말야. 좋아, 너희들 나한테 찍혔어. 벵골, 네 놈은 그래도 쓸 만한 수련자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게 아닐지도 모른단 말이지?’
수련자들은 모두 허탈한 표정이었다. 강하고 급한 태풍에 휩쓸려 숨도 쉬지 못한 채 먼 데까지 날려 온 듯한 기분이었다.
원탁을 휩쓴 건 라미레스라는 무법자의 바람이었다. 바소름이 평소 잘 짓지 않는 환한 미소를 라미레스에게로 보냈다. 라미레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놈은 또 갑자기 왜 저래. 안 하던 짓을 다하고?’
메덴은 전사평의회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재정리했다. 세부적인 항목에 대해서는 차후 논의토록 했으며 조직 편제는 현 상태대로 유지하는 것으로 했다.
지금 단계에서 굳이 단일 세력으로 조정할 필요성은 요구되지 않으며, 비효율적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마계의 대대적인 침략이 발발하면 자연히 하나로 모아지게 마련이라는 점이 기초한 판단이었다.
수련자들이 하나같이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전사평의회 내에 메덴의 감찰기구를 상주시키자는 것이었다. 평소 전사들과의 관계가 그리 원만하지 못했던 수련자 카포가자임해 그 일을 담당하겠다고 한 것은 모두에게 뜻밖이었다.
역량으로 보나 위치로 보나 그만한 적격 인물이 없겠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메덴의 입장에서야 카포 정도의 거물이 나서 주니 손을 들어 환영할 일이겠지만 전사들은 전혀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사사건건 참견하며 목을 조일 것이 분명하니 오히려 좋아지려던 관계마저 악화될 우려가 있었다.
이런 점을 감안한 바소름이 극구 반대했지만 결국엔 카포의 고집에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 보여지는 부분만 따지면 무한계의 가장 거대한 두 세력이 하나로 합일된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안을 들여다보면 문제는 심각할 수도 있었다. 내부적인 갈등 요소는 여전히 드러나지 않은 채 내포되어 있었다.
이걸 모르는 이가 있을까? 그럼에도 전체적인 구도를 그려 볼때 마계를 비롯한 적대 세력들과 자웅을 겨우러도 마음이 놓일만큼 최소한의 전력을 갖추었다. 이점에서 진일보한 구체적인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여섯명이 치앙마의 거처로 쓰는 내실에 모여 있었다. 바소름과 벵골, 카포, 치앙마, 라미레스, 그리고 파천이었다.
막 새로운 특사 파견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끝난 시점이었다. 전부분에 걸쳐 카포는 고압적이며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으며, 이와 정반대로 바소름은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는 식의 다소 융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다른 이들은 간간이 참견하며 각자 지닌 생각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만 견제하는 정도였다. 벵골은 속을 알 수 없는 말을 자주 하곤 했는데, 그의 그런 태도만으로 어떤 성향의 영자라는 판단을 섣불리 내리기엔 심히 곤란한 일이었다.
파천은 의견들이 오가는 사이 다른 이들에 대해서는 웬만큼 파악을 할 수 있었지만 벵골만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알 수 없다는 느낌을 가졌다.
카포가 새로운 대화 주제를 이끌어냈다.
“대적자들이 남부권을 장악했다면 이대로 두고 보아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치앙마 역시 대적자들을 먼저 정리했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마계와 연계할 가능성이 많은 세력입니다. 그러니 그 전에 먼저 척결하는 게 뒤를 보아 낫겠지요. 여유를 주면 골치 아플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닐 겁니다. 제 생각에는 전사평의회에 자체 전력만으로도 상대함이 가능하니 그들에게 처리하도록 유도하는 게 나을 듯싶습니다.”
파천은 전사평의회가 대적자들과 불가침협정을 맺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말해야 할지 아니면 잠자코 모른 척하고 있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벵골이 새로운 사실을 언급해 다른 이들을 놀라게 한다.
“대적자들은 칠대부족이 처리할걸세.”
“무슨 뜻입니까?”
“두고 보면 알아. 서로 씻지 못할 원한을 주고받았으니 내버려 둬도 될 게야.”
더 이상의 자세한 내용은 별로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였다.
다른 생각에 골몰해 있던 라미레스가 뜬금없이 메테우스의 석탑에 대한 화제를 입에 올린다.
“메테우스의 석탑에 사용되는 구슬들을 지금 누가 가지고 있지?”
“그건 왜?”
카포의 질문에 라미레스는 대충 얼버무렸다.
“잠시 들렀다 가려고.”
“별일일세. 자네는 그 곳에 발을 들이길 꺼려하지 않았나? 무슨 바람이 불어 그곳에 들리려는지 당최 모르겠군. 다른 꿍꿍이속이 있을 리는 없고…… 하긴 뭐, 거기야 수련자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곳이긴 하지.”
메테우스의 석탑은 수련자들이 특별한 수련을 쌓을 때나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자주 애용되는 곳이었다.
메테우스의 마지막 자취가 남겨진 유서 깊은 터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집중력을 고도로 향상시켜 주는 신비한 힘을 일으키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벵골이나 바소름 역시 가끔 머무르곤 했다.
그러나 그곳을 누구나 갈 수 있는 건 아니다. 반드시 원탁의 허락을 얻어야 하면 그 사유를 밝혀야 한다. 웬만한 경우엔 거절되는 예가 없었다. 그만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굳이 라미레스가 이 자리에서 그걸 밝히는 이유는 개폐를 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세 개의 구슬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원탁을 주재하는 의장이 지니고 있지만 때로 다른 이가 지니고 있는 적도 있었다. 그것 없이는 석탑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내가 두 개를 가지고 있고 나머지 하나를 바소름 님이 지니고 계시지.”
라미레스는 그걸 달라고 했다. 그러자 치앙마는 형식적이지만 사유를 밝혀 줄 것을 요구했다.
“별 이유는 없어. 파천을 위해서다. 그 동안 많이 적응했다고는 하지만 내가 볼 때 모자란 점이 많은 것 같아서…… 수련을 시키기 위함이다.”
라미레스의 간략한 설명에 모두의 얼굴에 뜻밖이라는 감정이 실린다.
라미레스가 누군가를 수련시키기 위해 시간을 투자했다는 소리는 들어 본적이 없었다. 무한계의 영자 치고 그에게 가르침을 받기를 거부할 이가 있을까? 솔직하게 말해 치앙마조차 조금 자존심이 상하긴 해도 가능하다면 그런 기회를 가졌으면 할 것이다.
‘영격이야 모르겠지만 실력만은 경이롭지.’
치앙마는 파천이 갑자기 부러워졌다. 바소름의 입가에 머물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허허, 자네는 좋겠군. 지는 능력의 끝이 어디인지 모를 라미레스로부터 직접 지도라…… 체면불구하고서라도 부탁하는 그 자리에 나도 끼면 안 될까?“
괜히 하는 소리였다. 바소름 역시 라미레스에 그다지 크게 뒤떨어진다 할 수 없는 능력자였다. 라미레스가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그럴 텐가? 그러지 뭐. 그럼 내가 자네의 스승이 되는 것이니 치앙마가 내 제자가 되는 건가? 거 잘됐구먼. 그렇지 않아도 의장이랍시고 목에 힘주는 꼴이 영 거슬렸는데 이 기회에 버르장머리를 고쳐놔야겠어.”
불똥이 자기에게로 튀자 치앙마의 얼굴이 곱지 않게 징그려진다.
그걸 본 카포가 한술 더 떴따.
“이제 의장은 큰일났군, 큰일났어. 평소 라미레스의 고약한 심보를 감안하면 자네는 그야말로 살아 있어도 산목숨이 아닌게지, 하하하.”
치앙마는 얼른 구슬을 품속에서 꺼내 던지듯 라미레스의 손에 쥐어준다.
바소름도 품속을 뒤지며 파천에게 당부를 잊지 않는다.
“잘만 이용하면 자네에게 큰 도움이 될 거야. 생령의 한계라는 게 있겠지만 여러모로 도움이 되겠지. 아무쪼록 수련을 잘 거쳐서 원하는 걸 이루길 바라네. 큰 전쟁에 몸을 담고 지켜봐야 할 테니 최선을 다하게나. 자, 여기 있네.”
파천은 얼떨결에 바소름이 내민 구슬을 손에 받아 쥐었다. 푸른 빛 영롱함에 눈길을 빼앗길 정도로 예쁘고 신비한 구슬이었다.
라미레스가 바소름에게 반문했다.
“누가 그러던가, 생력에 한계가 있다고?” “그야 상식이지 않은가?”
“으음,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지금 파천을 보게. 우리가 알고 있는 한계를 뛰어넘은 것 같지 않은가? 이걸 무엇으로 설명할텐가?”
“듣고…… 보니 그렇군. 하긴 생령이 영계에 이렇게 장시간 머문 예가 없었으니…… 우리 모두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벵골이 둘의 대화에 흥미를 보였따.
“라미레스, 자네 말은 생력이라 해서 특별한 약점은 없다는 말인가?”
“그럴 리가 있나? 분명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하지. 신체가 강건하지 못해서 쉬 쇠약해진다는 것도 문제고, 프리즈마를 사용하는 양에도 치명적인 결함이 존재하네.
무엇보다도 시간의 제약이 크지. 수명이 짧다는 점. 그런데도 그걸 뛰어넘을 수 있는 강점 역시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요즘 하고 있던 참이었네.”
“그런 게 있단 말인가?”
“벵골, 자네는 인간세에 영자의 몸으로 들어가 본 적이 있나?”
“아니, 없네. 그건 금지되어 있지 않은가?”
“마계가 인간세를 침략했을 때 난 그들을 자세히 살필 기회가 있었네.”
“그래서?”
“확실히 차이가 나더군.”
“뭐가 말인가?”
“실제의 진력중 상당 부분을 제한받는 것 같더군. 인간들이 영계에 와서 적응하기 힘든거나 우리가 인간세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거나 마찬가지더라는 거야.
그런데 파천을 보게. 마계의 마신들이 적응하는 속도보다도 훨씬 빨라. 놀라운 일이지. 간접 비교를 해본 결과 어쩌면 인간인 상태의 잠재력은 영자들보다 월등할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했네.”
“허 그럴 리가……”
벵골은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카포 역시나 받아들이기 힘든지 삐딱한 시선이었다. 그러나 바소름은 달랐다.
“그럴 수도 있겠군. 완전자가 인간세를 거치는 이유도 그 점과 무관하지 않겠지? 그리고 영자들의 영체는 잠재력이란 게 거의 없지. 모두 사용한다는 게 맞는 말이야. 그렇지만 인간들은 전혀 다르지. 잠재력의 극히 일부분만을 사용하지.”
라미레스가 희망에 들떠 말했다.
“마계를 상대함에 있어 중요한 전략으로 적용될 수도 있어.”
“그건 무슨 뜻인가?”
“우리 중 메타트론은 제외하고라도 루시퍼를 상대해 이길 수 있다 자신하는 이가 있나? 무한계 뿐만 아니라 천상계의 천주들도 그건 힘들어.”
“루시퍼는…… 누구라도 감당하기 벅차지. 그래서?”
“바로 그 점이야. 파천이 만약 나 정도의 능력만 갖출 수 있어도 이곳 영계가 아닌 인간세에서라면 루시퍼도 당해낼 수 있을 거란 점이야.”
“오, 그렇게 되는 거군.”
카포도 그제야 이해가 가는지 무릎을 손바닥으로 치며 반가워했다.
벵골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말이 쉽지. 어느 세월에 생령을 자네 수준으로 올려놓을 수 있겠나? 자네는 우리 쪽 진영에서 견줄 자가 얼마 되지 않는 최강자이거늘.”
“듣고 보니 그렇네.”
카포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쓸려 다녔다.
“다 내게 생각이 있으니 그 부분은 맡겨 둬. 메테우스의 석탑에 들어가는 것도 그걸 위해서야. 긴 안목으로 봤을 때 결국에 s마계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을 거야. 대마신들 정도는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 꽤 있지만, 문제는 루시퍼야. 그는 자네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네.”
“그 정도인가? 하긴 자네가 가장 잘 알겠군.”
“치가 떨릴 정도야. 그가 어느 정도로 용의주도한 인물인지는 겪어보지 않고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지. 자신의 실체를 다 드러내 보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 심지어 대마신이었던 내 앞에서도 말야.
그럼에도 그는 충분히 두려움을 주었네. 이번 전쟁의 승패를 그는 꺾을 수 있을만한 자가 우리 쪽에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닐 거야. 그 부분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미안한 얘기지만 마계와의 전쟁결과에 대해 나는 상당히 부정적이야.”
벵골이 다시 물었다.
“메타트론은?”
“으음, 그는…… 이번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지도 몰라. 그가 만약 전면이 나선다면……”
“나선다면?”
“이길 수 없어. 우리가 아무리 막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해도.”
“천궁이 개입해 준다면?”
“그럼 얘기할 것도 없지. 그때는 천궁과 메타트론과의 싸움이니 우리는 빠지면 그만이고. 그렇지만 돌아가는 상황으로 볼때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 단언해도 될거야.”
“하긴.”
“그렇겠지. 천궁이 개입할 거면 벌써 했겠지.”
어느 정도 상황에 대해서는 짐작하고 있는 수련자들이기에 라미레스의 진단에 충분히 공감이 갔다.
천궁이 개입해 주길 바라지 않는 영자들이 있을까? 모두가 원한다. 그렇지만 천궁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 침묵이 언제 깨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영원히 깨어지지 않은 수도 있음을 이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우리들은 이만 가보겠네. 카포, 자네는 언제 하룬으로 갈 건가?”
“특사가 갔다 오는 즉시 떠날걸세.”
“그럼 한 가지 주의할게 있어. 그곳은 이미 아바돈의 프뉴마가 깊이 개입하고 있어. 그러니 그 점을 염두해 두고 미리 진용을 갖추는 게 좋을 거야.”
“걱정 말게나. 그들이 전력을 퍼붓지 않는 한 하룬은 내가 있음으로 안전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