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64화 : 제왕에게 약속한 마지막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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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검 – 164화 : 제왕에게 약속한 마지막 선물


제왕에게 약속한 마지막 선물

연합군에 속한 자들이라면 누구나 현재 상태가 상당히 불안정하다는 걸 인정한다. 수뇌들은 되도록 모이기를 꺼려했고 서로를 은연 중 경계하는 기색들이 역력하다.
수뇌들 중 무한계측의 인물들은 로메로만 쳐다보고 있는 실정이었고, 천상계와 선계는 제각각 어떤 입장도 표명하기를 극도로 자제하는 분위기였다.
이런 전체적인 상황에 맞물려 무한계 강자들이 표면에 나선 것은 어떤 기대감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어떤 식으로든 결정 나겠구나. 이런 분위기를 대변하듯 파천의 행동 하나하나에 집중되어 있던 시선이 일제히 그들에게로 몰려갔다.
파천은 선발대와 함께 하는 시간이 빈번해졌다.
그들만의 비밀스런 모임은 영자들에게 새로운 관심거리였다. 그들이 무엇을 도모하는지 어떤 얘기들이 오가는지 궁금해 하는 자들이 많았지만 결코 외부에 알려지지 않는다.
로메로는 파천을 찾아왔다가 묘한 분위기에 동화되어 자신이 왜 왔는지조차 잊어먹고 있었다.
선발대원들은 파천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아 있었으며 그들의 중심에서 파천의 신비스런 분위기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라미레스와 설란과 대덕만이 대열 가운데서 이탈하여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라미레스가 로메로의 곁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무슨 일로 왔나?”
경계함은 없었지만 왠지 찾아와서는 안 될 곳을 무단으로 침범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로메로는 그런 자신의 감정이 놀랍게도 이질감이란 것을 깨닫고는 소스라쳐 놀랐다. 그들과 자신 사이에 이처럼 확연하게 구분될 이질감 따위가 존재할 리가 없음에도 본능은 그렇게 외치고 있었으니 신기한 일이었다.
“다른 게 아니라…… 메테우스님이 파천님을 청하셨네.”
봉인을 풀고 나타난 무한계의 지도자들이 제석, 노군과 먼저 대면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라미레스는 올 것이 왔구나, 라는 표정이 된다. 모든 건 파천의 말 한마디에 달렸다는 걸 직감했다. 파천도 로메로의 말을 들었다.
“곧 가겠다.”
로메로는 물러갔다. 파천은 하던 말을 계속했다.
“선택은 그대들의 것이다. 잠시의 시간을 주겠다. 결정은 신중하게 하되 결코 후회함이 없어야 한다. 잊지 마라. 삶의 주인은 자기 자신임을,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이 순간만이 존재한다.
그대들의 지난 의지가 과거였다면 현재의 새로운 결단이 미래의 모습임을. 그대들이 예전 어떤 존재였던가는 중요치 않다.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대들 스스로 자신을 얽매지 마라. 새롭고자 한다면 스스로 그리 되어야 한다.
먼저 인정하라.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자가 남을 사랑할 수 없다. 가능성을 제한하는 자가 무한한 세계를 엿볼 수 없다. 그대들의 안에 완전한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라. 잊혀진 그 의지야말로 바로 그대들의 참모습이다……“
파천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는 선발대원들은 진지했다. 치열한 고민과 갈등이 얼굴 가득 떠올라 있음이 동일했다. 그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그 선택 이후는 광명히 길을 열어줄 것이라 했다.
광명의 능력 중 하나를 파천은 선발대를 대상으로 사용하려 하고 있었다. 소멸된 기억을 되살리는 것. 그것이 가져올 혼란이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파천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겪을 내심의 고통이 어느 정도가 될지를 잘 알았다.
그 대가로 잃어버릴지도 모를 현재가 지금의 그들에겐 더 소중한지도 모른다. 강요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파천은 그들을 두고서 라미레스와 함께 떠났다.
라미레스는 파천에게 물었었다.
“나는 왜 제외돼야 하지?”
“너와 설란, 대덕은 그럴 필요가 없다. 저들과 너는 다르다. 저들은 억제되어 있다. 네게 감춰진 기억을 되살림은 무의하나 저들은 그렇지 않다.”
지금 라미레스는 그 대답을 다시 짚어보고 있었다.
‘억제되어 있다. 억제되어…..있다? 흠, 두고 보면 알 일이겠지.’

파천을 기다리고 있는 인물은 로메로를 포함한 세 명이 전부였다. 메테우스와 카란. 그들이 나란히 앉은 채 내실로 들어선 파천을 올려다보았다.
파천과 라미레스는 말없이 그들 앞에 앉았다. 카란과 메테우스 중 누구도 먼저 입을 열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들은 이 순간 오직 파천을 살피는 일에만 열중해 있었다.
파천에게서 자연스럽게 뻗치는 신위는 빛나는 보석과도 같이 모든 이들 가운데서 두드러졌다. 보는 이를 위축시킬 만 했다. 둘은 감탄했다. 하지만 그들이 감탄한 이유는 다른 관점에서 기인했다.
‘저 눈은 너무도 맑고 깨끗하구나.’
‘아름다운 눈이군.’
둘은 동시에 생각을 고쳐먹었다. 지금껏 가졌던 어떠한 편견도 이 순간 버리기로 한 것이다. 새롭게 판단하고 선택할 각오를 다졌다. 그러나 어떤 선입견도 없이 있는 그대로 듣고 본다는 것이 정말로 가능한 일일까?
입을 열어야 할 당사자들이 끝끝내 입을 다물고만 있자 엉뚱하게도 답답함을 견디지 못한 라메레스가 운을 뗐다.
“계속 그러고만 있을 참인가?”
로메로는 카란이 저렇게도 웃을 수 있는 인물이었던가를 생각해 보았다. 단연코 없었던 것 같았다. 카란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으며 말했다.
“반갑군. 세속적인 예의 따위는 접어두자고.”
“그러지.”
“네 생각을 들었다. 다시 듣고 싶다. 네 입으로 나오는 말을 가감 없이 직접 듣고 싶다.”
“두 가지다. 하나는 돌이키는 것. 어긋난 길을 새롭게 열어놓는 것. 소멸극복을 결정했던 자들. 그들을 자극한 건 스스로를 되돌아 볼 계기를 던져 주기 위함이었다. 잘못된 것을 알았다면 용기만 있으면 된다. 그 결단은 힘들지만 그들을 새롭게 할 것이다.”
“그렇군. 그런 결정엔 도울 복안도 있다는 것이겠지?”
“물론.”
메테우스가 두 번째 의도를 재촉했다.
“다른 하나는?”
“상처가 치유되기 전에 다시 상처가 덧나면 배의 시간이 필요하다. 희생을 최소화시키기 위해서다. 이면에 도사린 채 현 국면을 조장한 자들만으로도 충분하다. 연결고리를 끊어놓을 작정이다.
파장의 전달은 없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보았다. 그에 걸 맞는 대책 또한 수립돼 있다. 의문이 들겠지. 그대들이 걱정하는 것이 무언지 안다. 그대들이 예상하는 모든 결점은 보완될 것이다.
이 결심이면 되겠는가? 그가 꺾고자 한다면 내 몸을 내어주더라도 막을 것이다.”
카란은 마지막 확인을 서둘렀다. 그는 굳이 이 물음이 필요할까를 생각했다.
“결국은 네 능력이 어느 정도인가에 달렸다. 메타트론을 이길 수 있는가?”
“모른다.”
“솔직하군.”
“그가 나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이 나 또한 그의 끝을 보지 못했다.”
메테우스가 궁금해 하는 핵심은 이것이었다.
“그를 이기려 하는가?”
“천만에”
“그럼?”
“내 목적은 그를 이기는 것이 아니다. 이 세계를 다시 사람들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그에게 져서 그리 될 수 있다면 그리 할 것이다.”
“흐음.”
“그에게 비장의 수가 있듯이 나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가지려 하고 나는 버리려 한다. 그 차이를 좁힐 만한 변수란 생겨나지 않는다.”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서……결행하는 행보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겠군.
사실……널 보는 순간 결심을 굳혔다. 널 끝까지 신뢰하마. 우리가…. 뭘 해주면 되지?”
라미레스외 로메로는 예상과는 달리 너무도 매끄럽게 원하던 상황으로 전개되자 오히려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파천은 간략하게 말했다.
“후에 알려주마.”
파천에 대한 메테우스와 카란의 전폭적인 지지 선언은 천상계나 선계의 입지를 더 좁혀놓는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양상에 지나지 않는다. 파천의 계획은 이 모든 그림이 그려지고 난 후 세워진 것이었다.
파천과 라미레스가 선발대에게로 돌아간 뒤, 남은 3인의 앞에 수호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야 확신이 생기나?”
메테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결과는 아직 장담할 수 없지요. 단지……”
“단지?”
“그를 신뢰하는 것이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입니다. 그런 눈빛이란 도대체가……”
카란도 같은 말을 한다.
“자네도 그랬나? 도무지 그 눈을 보면서 따져 묻기가 참 난감했어. 거 참.”
“이런, 고작 그런 이유로 고집을 꺾었단 말인가?”
메테우스는 과장된 모습으로 항변했다.
“고작 그런 이유라니요? 그것보다 중요한 게 또 있습니까? 신뢰는 머리가 아닌 가슴에서부터 뿌리를 내립니다. 진실과 불굴의 의지와 순수한 신념을 가슴으로 느낀 이상 뭘 더 주저하겠습니까?
파천의 능력에 대해서는 수호자님께서 보장하셨으니 책임지실 테고. 그러니 우린들 꼬투리 잡을 게 있어야지요.”
수호자는 메테우스의 그 말을 몇 번이고 다시 되뇌어 보았다.
‘신뢰는 가슴에서 뿌리를 내린다고? 가슴, 가슴……가슴?’

로메로를 통해서 제석과 노군에게 무한계의 입장이 전달되었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파천의 지시를 수행하겠다는 의지를 전한 것이다.
파천에 대한 무한계의 지지 선언은 제석과 노군을 더 압박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연합군에서 이탈해 독자 노선을 결을지 아니면 수모를 감수하면서 연합군의 일원으로 남을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그들에게는 어떠한 순간보다도 더 초조한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런 차에 생존한 제왕들이 하룬을 찾았다.
생존한 열둘 중 다섯은 반역한 쿠사누스 들에게 제압당해 포로가 되었다. 간신히 도주했을 정도로 갖은 치욕을 다 당했었다.
제왕들이 하룬에 온 건 장렬하게 산화하기 위함이지, 무엇을 얻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 따위를 품은 건 아니었다.
그들은 하룬에 와서 연합군의 내부에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 의아해했다. 그들은 제석과 노군,로메로 등을 차례로 만났으며 무한계의 지도자인 메테우스와 카란과도 담소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들이 마지막으로 찾은 것은 파천이었다.
원령체를 완성한 파천은 제왕들에게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예전 제왕들 중 가장 강했던 판드아의 제왕만이 원령체였다. 그도 원령체를 완성하지 못하고 실종되었다. 그런데 영자들에게조차 천시 받는 생령이 원령체를 완성한 것이다. 판드아의 제왕을 기억하는 그들에게 완성된 원령체는 외경의 대상이기도 했다.
파천은 제왕들의 심신이 극도로 지쳐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들이 죽고자 영계에 발을 들였음을 알아본 것이다. 그동안 좌절과 상실의 창날이 쉼 없이 그들의 정신을 헤집고 찢고 잘라냈지만 더 깊숙한 곳, 내밀하고 은밀한 심처에서 발원된 의지마저 꺾어놓지는 못했다. 살아 있는 그 생명은 여전히 생동감 있게 퍼덕대며 비상을 꿈꾸고 있었다.
지금 그들은 파천을 대하면서 터무니없게도 새로운 소망을 지피고 있었다. 잊고 있었던 감정이 생경하게 발견됨은 그간의 고초가 컸기 때문이리라. 파천은 잘라 말했다.
“얻고자 한다면 버려야 한다. 내 요구가 무리할지도 모른다. 돌이킴이 먼저다.”
제왕들이 힘을 보태겠다고 한 연후에 바로 나온 말이 그랬다. 제왕 중 하나가 입술을 깨물어 뜯으며 결연함을 보였다.
“어떤 대가든 치를 수 있다. 이 생명을 원하는가? 영자들에게 머리 숙여 사죄하기를 바라나? 가장 비천한 자로 모든 이들을 영원토록 섬길 수도 있다.”
다른 제왕들도 덧붙이기 시작했다.
“어떤 요구든 수용하겠다.”
“죽으러 온 자들이 아까울 게 있겠는가!”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왔다.”
더 타진해볼 필요도 없었다. 그들의 각오는 대단했다. 하지만 파천의 이어진 말은 그런 그들조차 입을 다물게 했다.
“힘을 잃어도 좋은가? 그대들은 가장 나약한 자들로 전락할 것이다. 육체는 점차 약해져서 결국 소멸하게 될 것이다. 소멸에 이르기까지 참기 힘든 고통이 따른다 해도 좋은가? 그 모든 걸 감수하고 견디겠는가?”
파천의 의도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소멸을 극복한 자들이 치러야 할 대가는 생각보다도 더 큰 것이었다. 고통은 두 번째였다. 힘을 잃는다. 가장 약한 자로 곤두박질친다. 그것만큼 견디기 힘든 게 또 있을까?
제왕들 중 단 하나도 시원스레 대답을 못했다. 파천도 알고 있었다.
“어려운 일이다. 광명으로 그대들을 원상태로 돌릴 수 있지만 그 대가는 이처럼 큰 것이다. 그래도 하겠는가?…… 하지 않는다 해도 아무도 탓하지 않는다. 허나……그대들은 제외된다. 원하는 걸 그대들 스스로 얻어라.”
망설임이 길어지자 파천은 일어났다. 그는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었다. 제왕들에게 향한 관심을 거둬야만 했다.
제왕 중 하나가 다급하게 뱉어낸 애원이 파천의 발걸음을 묶어버렸다.
“선, 후가 바뀌면 안 되나? 동참한 연후에 그 길을 걷겠다고…… 영혼에 맹세해도 안 되나? 저들의 응보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동참하게 해다오. 그런 뒤에……그대의 뜻에 기쁨으로 참여하겠다.”
다른 제왕들도 같은 말을 했다. 이제 결정은 다시 파천에게로 넘어왔다.
‘저들의 약속은 영혼에 새긴 맹세다.’
파천의 망설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저들을 향한 목적이 무엇인가에 생각이 머물렀다. 처음의 자리로 이끄는 것. 원래의 위치로 돌이키는 것. 상실한 그 길을 찾아 주는 것이 파천의 목적이다. 그렇다면 선, 후가 뒤바뀐다 해도 문제 될 건 없었다. 대신 조건을 내걸었다.
“능력은 그대로이나 고통은 시작될 것이다.”
제왕들의 한번 굳어진 결심은 이후 다시는 허물어지지 않을 터였다. 파천은 그들이 들으면 반길 만한 기쁜 소식을 선물로 주었다.
“잃어버린 쿠사누스들을 곧 찾게 될 것이다.”
제왕들은 감격했다. 마지막까지 충정을 버리지 않았던 쿠사누스들을 찾게 된다지 않는가! 이들에겐 그 이상이 없을 최고의 선물이었다.

파천은 선발대를 쭉 둘러보며 마지막 한 사람까지 확인했다. 소군의 차례였다.
“사부님, 하겠어요. 각오는 되어 있어요.”
당찬 대답이었다. 대체 어떤 얘기들이 오갔던 것인가?
라미레스와 충선과 설란과 대덕의 얼굴에 만에 하나란 우려가 가득하다. 파천은 지금 위험한 도박을 감행하려 했다. 광명으로 소멸된 기억을 되살린다. 광명이라는 안전장치가 있다지만 위험성을 여전했다. 모든 건 본인의 의지여하에 달렸다. 이겨내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파천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부정은 심각한 상태로 몰아갈 수 있었고, 잠재되어 있던 기억이 살아남은 극심한 혼란을 야기한다.
자기 정체성을 의심하는 존재란 언제나 불안한 법이다. 그 시도는 새로운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었다. 굳이 이런 위험한 모험을 감수하려는 파천을 라미레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실패한다면 선발대 전원을 잃는다. 그 이상의 의미로 자리 잡고 있는 아난다와 소군과 카이로와 페리칸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라미레스는 더 한층 께름칙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양자는 결심을 굳힌 뒤였다. 이젠 성공하길 비는 것 이외에는 그가 할 일이라고는 없었다.
광명은 순리의 능력이다. 질서의 힘이다. 조화시키는 동인(動因)이다. 그래서 광명은 순리에 역행하는 의지를 거부한다.
파천이 광명을 얻었다는 것은 스스로를 규정하는 의지에 역행할 수 없다는 말과도 같았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지금 파천이 시도하는 기억회복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들이나 메타트론의 방법과는 본질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기억회복을 한다 해서 육체소멸마저 극복한 건 아니다. 더군다나 현재 파천은 어떤 한 시점을 기준으로 그들의 기억을 되돌려놓을 생각이었다.
기억이 돌아온다 해서 그들이 지금의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된다는 보장은 없다. 본인의 의지와 광명의 도움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다면 파천의 시도는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파천은 재차 당부했다. 굳은 의지가 수반되지 않고서는 되려 역효과를 불러온다. 고통을 감내해내지 못하면 분열은 비극을 초래한다. 자신에 대한 절대적이 신뢰가 따르지 않고서는 성공을 기대할 수 없었다.
몇 번의 주의가 더해지고 나서야 파천은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파천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앉은 선발대원들은 모두 스물아홉 명이었다. 그 면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난다를 vlfe로 카이로와 페리칸, 소군, 아레나, 너울, 각시, 무초, 무령, 대오, 마고,미타,찬다마나, 이레네, 야다, 헵슬론, 도나투스, 권터, 페드로, 브라함, 앙샹뜨가 있었고, 라치오의남은 친구들인 밴살렛, 뢰, 그렌달, 베붓이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또한 가름을 잃어버리고 실의에 빠져 있는 두름과 바로크를 찾을 길 없어 애태우는 바로크의 3인의 전사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까지의 그들 삶의 여정이 어떠했든 간에 이 순간의 그들은 예전과 완전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그들의 결단은 기회에 대한 부응일 수도 있었고 새로움에 대한 갈망일지도 몰랐다.
누구에게나 존중받아 마땅한 대의명분 같은 건 없어도 좋았다. 결단의 동기는 제각각이었지만 임하는 각오는 동일했다.
파천은 마지막으로 지켜보고 있는 네 명에게 마지막 당부를 잊지 않는다.
“어떤 일이 있어도 개입하지 마라. 그리고 다른 이들의 접근을 차단시켜다오.”
접근을 차단시킴은 그들의 안전을 위한 조치였다. 파천이 광명의 힘으로 기억회복을 시키는 동안 일정 권역 안은 그 어떤 성질의 힘도 침투할 수 없게 된다.
만약 누군가가 억지로 그 안으로 뛰어들고자 한다면 그는 처참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그런 사태가 빚어짐을 우려한 당부였다.
파천은 모두가 좌정하고 있는 정 중앙의 빈 공간에 앉은 채 엄숙한 표정을 짓는다. 지켜보는 이들은 숨을 죽이고 주시했다. 파천에게서 곧 처음의 변화가 나타났다. 정수리 부분에서 지금껏 볼 수 없었던 강렬한 금빛의 광채가 뿜어져 나왔던 것이다.
이내 스물아홉을 포함시킨 광채는 더욱 짙어져 가기만 했다. 약간은 투명해서 안을 관찰할 수 있었던 라미레스도 곧 상황을 감지할 수 없게 되었다. 두터운 막과도 같이 시야를 차단해 버렸다. 라미레스 등이 한 걸음 물러섰다. 타원형의 금빛 구체가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실내의 천장까지 다다랐음에도 멈추지 않는다.
“저, 저것?”
놀랍게도 타원형의 금빛 구체는 전혀 저항을 받지 않은 채 천장으로 스며들며 실내에서 사라져버렸다. 라미레스 등은 궁성 밖으로 뛰쳐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하룬의 영자들이 저마다 하늘을 가리키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하룬을 보호하고 있던 거대한 막의 경계까지 다다른 구체는 더 이상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얼마 있지 않아 연합군의 주요 인물들까지 소식을 듣고 달려 나왔다. 라미레스를 발견한 로메로가 어찌된 연유인지를 알고자 가까이 와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저건 또 뭐야?”
“요즘 파천이 하는 일 치고 이해되는 게 있던가?”
“그럼 파천님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양이 로메로도 짐작 가는 바가 없기는 마찬가지인 듯했다.
제석과 노군 등의 천상계와 선계의 주요 인물들도 호기심을 담아 지켜보고 있었다.
라미레스는 파천의 당부를 기억해내고 지혜전사들을 곳곳에 배치시켰으며,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안 되었던지 궁성의 지붕으로 올라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현재의 소생은 과거를 끊어 낸 자리에서 피어난다. 피어남은 고통을 수반했다. 영상으로 비쳐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확고한 상태로 동일시시켜 가는 과정은 비유할 수 없는 정신과 육체의 고통을 지폈다.
그 가운데 안식의 초대자가 있었다. 추억들이 갇힌 곳을 향해 끊임없이 손짓하는 광명의 빛이 있었다.
그 인도함을 선발대원들은 거부함이 없이 따라갔다. 이 지독한 고통을 면하고 싶었다.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이런 극통이 이 작은 육신 어디에 숨어 있었던 가 의심스러웠다.
시린 뼈의 신음이 흔들리는 정신의 분열을 재촉했다. 목 타는 그리움이 불특정한 상대에 대한 원망을 낳았다.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가파름은 영혼의 통곡과도 같았다. 눈물이 그들의 볼을 적셨다. 산산이 부셔버리고 싶은 충동으로부터 갖가지 불안정한 감정들이 생겨났다.
누군가에게서부터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이내 그 흐느낌은 그들 모두의 상실과 부정의 변주가 되고야 만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들은 평안을 갈구하고 호소한다.
“크으으으, 아아아아아!”
일제히 터져 나오는 신음과 괴성은 지켜보던 하룬의 영자들의 얼굴에 짙은 그늘을 두리웠다. 그리고 곧바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가 하면 불안의 공포에 사로잡힌 자도 속출한다.
제석과 노군을 비롯한 천상계와 선계의 지도자들이 먼저 경계의 태도를 보였다. 그건 이 상황을 주도하고 있는 라미레스에게로 일제히 쏟아졌다.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요? 당장 멈추게 하시오.”
“이런 해괴한 짓을 하다니.”
“당장 중단하라.”
라미레스도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렇지만 그는 곧바로 평정을 회복했다. 이어 그의 입에서 하룬 전역을 울릴 정도로 큰 소리가 나왔다.
“경고하겠소. 지켜보기만 하시오. 접근하면 해를 입을 것이니 아무도 참견하지 말길 당부 드리오.”
로메로가 라미레스의 옆으로 다가오더니 같은 말을 했다.
“동요하지 마세요. 라미레스님의 경고는 그냥 하는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봅시다. 광명을 얻은 파천님이 우리를 해롭게 할 분은 아닙니다. 자, 자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들 자기 자리를 지켜 주세요.”
생사군단의 움직임이 기민해졌다. 그들은 적재적소에 자리를 잡고 모든 이들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고통의 신음은 더 커져만 갔다. 잠시라면 모를까,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그 소리는 듣고 있는 이들의 신경을 극도로 불안하게 했다.
‘이런…… 저 소리를 언제까지 듣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라미레스도 같은 심정이 되어 갔다. 귀를 틀어막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다. 동일한 소리가 반복되며 작용하는 심리적 압박감은 그 상태로 동화되고자 하는 마음을 부추겼다.
“제기랄.”
라미레스도 참기 힘들었던지 불만을 털어놓고 있었다.
‘파천, 빨리 끝내라. 정말이지 기분 더럽네.’
뒤숭숭하게 뒤섞인 과거와 현재의 연은 의지의 견인력에 따라 새로운 모양을 갖춰 갔다. 흐느낌은 잦아졌지만 끝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안의 상태를 확인할 수만 있어도 지켜보는 이들을 안심시킬 수 있을 텐데 그렇지 않은 것이 더 큰 불안으로 이어졌다.
파아앗
푸아아악
화려한 빛의 폭발이 연이어 하룬의 상공을 물들인다. 군중들에게서 절로 감탄이 뱉어졌다.
“우아야.”
“이야.”
연이어 폭죽을 쏘아 올린 듯한 전경은 좀 전과는 달리 아름답게 비쳐졌다.

아난다가 딛고 선 것은 진실의 실체였다. 자신의 기억이 맞닿아 있는 최초의 시간은 아니었다. 파천이 의도한 특정한 시간대인 셈이었다.
아난다는 그 시간까지 거슬러 올라왔다. 지치고 곤하여 무엇인가에 기대고 싶은 맘만 간절했으나 그는 홀로 우뚝 서 있어야만 했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이 있다면 눈앞을 환하게 비춰주는 광명의 인도함이었다.
허무의 공간 속으로 자꾸만 흩어지려는 의식을 한 곳으로 집중케 해주었으며, 스치며 보고 느낀 것들을 거듭 관조하게끔 도와준다. 또 하나의 본질적으로 너무도 경계가 뚜렷했다. 같은 고통과 슬픔과 아픔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타자임을 고백하고야 만다.
부정하면 할수록 아려오는 상처만 더욱 커지고 분명해졌다. 등 뒤에서 잡아끄는 유혹은 자기파탄을 선언하라는 것. 타협은 이런 고통을 감내해 얻어야 할 가치란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그곳에선 악취가 났다. 어둠이 묻어났다. 눈을 감을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진실을 아나다는 직시했다. 그리고 인정하려 애썼다. 지난 생애들 가운데서 특별하게 구분되어 가슴을 저리게 하거나 끊임없이 추억하게 만드는 것들도 있었다. 광명은 그런 감정마저 기어이 접어두라고 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딛고선 대지는 제왕이 다스리는 곳이었다. 자신은 그곳에서 존귀한 위치에 있었고 모두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는 진정으로 애쓰며 영자들을 위로하고 보살폈다. 제사장이며 군대사령관이기도 한 쿠사누스의 지위는 제왕까지도 존중해주었다.
그 자신은 크사누스들 중에서도 특별하게 강한 자로 구분되고 있었다. 루잔의 철인 유스티안! 그와 비견되는 이는 제왕 중에서도 몇 되지 않았고, 쿠사누스들 중에서는 단지 하나에 불과했다.

나는 마르시온의 경계함을 알고 있었지만 별로 개의치는 않았다. 제왕보다 강한 쿠사누스의 존재는 제왕들에게도 껄끄러울 텐데 내가 섬기는 제왕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나는 현재의 삶에 지극히 만족한다.
마르시온과 몇 명의 동류들은 틈만 나면 날 찾아 루잔으로 왔다. 서로의 왕래를 제왕들이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번연히 알면서도 드러내 놓고 이런 행동을 한다. 그의 속삭임은 뜻을 담고 있었지만 내 마음이 기울지 않음을 알고 뜻을 바꾼 듯 말했다.
내 고민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마르시온은 야심을 접을만한 자가 아니다. 그는 제왕이 되고 싶어 한다. 지금의 위치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의 반역은 그에게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어찌해야 하는가? 제왕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방비해야 하나? 아니면 입을 다물고 이곳 루잔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는 것만 막으면 되나?
판드아의 제왕이 나와 제왕을 초대했다. 평소에도 존경해마지 않던 제왕이었던지라 무척이나 유쾌한 기다림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찾아왔다. 아름다운 자! 그는 메타트론이었다. 그라 마르시온과 함께 찾아온 것이다. 타락한 천사들의 지도자가 날 찾아온 것이다. 그는 약속했다.
“제왕이 되게 해주겠노라. 날 따르면 모든 영광이 영원토록 함께 할 것이다.”
난 거절했다. 내 단호함을 메타트론이 비웃는다. 후에 메타트론은 홀로 날 찾았다.
“저들을 지배함이 마땅한가? 자유로운 존재들을 억압함이 신을 섬기는 제사장이 할 도리인가? 그들을 자유케 하라. 그들에게 제왕은 필요치 않다.”
나는 반박하지 못했다. 그런 생각이 깃드는 때가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있어 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지배를 원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의 평화를 반겼으며 진심으로 만족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저들의 감은 눈을 뜨게 하겠다.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도 저들이 과연 현재의 상태에 만족할까?”
나는 자신 할 수 없었다. 그는 사람들의 힘만으로 제왕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겠다고 장담했다.
“그들은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설 것이다. 예비 된 세계는 완전하다. 제왕과 쿠사누스와 군대만이 대지에 남아 오랫동안 잠들게 되리라. 사람들에게 잊혀지게 되었을 때 무엇이 옳았던가는 드러나리라.”
나는 제왕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그분의 다스림은 완전하지는 않으나 충분하다. 더군다나 사람들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메타트론을 믿을 수가 없다. 난 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판드아의 제왕과 만났을 때 이 모든 얘기를 꺼내리라 마음먹었다.

나는 어리석었다. 메타트론의 준비는 철저했다. 내가 다시 잠에서 깨어났을 때 모든 상황은 종료된 이후였다. 나처럼 메타트론의 제안을 거절했던 쿠사누스 서른 세 명이 사람들의 포로로 잡혀왔다.
메타트론은 사람들을 새로운 대지로 이끌어 들였고 그들 중에서 지도자를 세웠다. 우리의 후회는 늦어도 너무 늦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패했다.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메타트론은 사람들에게서 우리를 인도받았다. 그리고 어딘 가로 끌고 갔다. 그의 회유는 끈질겼다. 그는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음에도 그럴 마음조차 없는 듯 했다. 자신의 뜻들 충실히 이행해 사람들을 감시하고 지배할 자들로 우리를 선택했다고 한다. 우리는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가 화가 나 소리쳤다.
“영원히 너희 자신을 찾을 수 없게 하겠다. 너희가 사람 중에 존귀했던 쿠사누스였음을 기억하는 이가 단 하나도 없게 하겠다. 비참함 중에서 영원토록 지배받게 하리라.”
그는 우리 모두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쿠사누스들을 하나씩 잠재웠다. 그의 마력으로 우리의 의식을 영원토록 봉인시켜 가는 것이리라. 그의 능력이라면 가능하겠지. 기나긴 세월이 지난다 해도 우리의 과거는 드러나지 않겠지.
이제 내 차례가 왔다. 서른둘의 쿠사누스가 나란히 누워 잠들어 있다. 나도 곧 그 옆에 눕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그에게 물었다.
“제왕들은?”
“그들은 사람들을 내어달라는 내 제안을 묵살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장 신뢰하는 자들에게 배신당하는 아픔을 겪고서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랬던가? 나머지……쿠사누스들은 너의 뜻에 동조했나?”
“그만 잠들라.”
그랬었어. 내가 어리석었어. 마르시온과 그를 따르는 쿠사누스들을 진작에 견제하고 감시했어야 하거늘. 미리 방비만 할 수 있었어도 이처럼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아난다처럼 선발대원 모두는 자신의 실종된 과거를 격고 있었다. 파천은 그들의 상태를 면밀히 관찰했다. 그들의 기억이 회복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파천은 그들을 예전의 경지를 넘어서서 할 수 있는 한 끌어올려 볼 생각이었다. 파천이 이 세계에 개입하기로 작정한 순간부터 지금의 계획은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처음과 같은 관심과 열기는 없었다. 하룬의 상공을 주시하던 눈길들이 하나 둘씩 이탈해 갔다. 지친 것이다.
라미레스는 궁성의 지붕에 좌정하고 있었다.
‘결과가 생겨나는 것이 이리도 힘든 일인가?’
그의 옆에는 설란과 대덕, 선계에서 사실상 빠져나온 듯이 행동하는 충선이 함께 하고 있었다.
그들은 초조함을 버리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그동안 천상계의 제석롸 선계의 노군이 몇 번이나 메테우스와 카란을 찾았다. 그들이 연합군을 빠져나갈 명분도, 그에 따른 실리도 확보되지 않은 상태였던지라 조급함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언제라도 하룬을 빠져나갈 수 있게끔 준비를 해둔 상태였다. 선계와 천상계에 남아 있는 선인과 천인들 모두를 대동하고 독자적으로 전쟁 준비를 하려면 그들의 터전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마계와 제왕의 군대가 당분간은 별 움직임이 없을 것이라고 가정했을 때 지금이야말로 대비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메테우스와 카란은 그들의 이탈을 한사코 막기만 할 뿐 아무 것도 보장해주는 것이 없었다.
제석이 원하는 건 무한계가 파천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들과 합세하는 것이었다. 파천의 지시에 따르지 않겠다는 한마디만으로도 하룬에 남을 명분은 뚜렷해진다. 그걸 메테우스와 카란이 모를 리 없다.
제석은 이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더 이상 머뭇거려 무한계의 영자들에게까지 웃음거리로 전락할 수는 없었다. 그가 마지막 최종 결정을 내리기 위해 노군과 함께 메테우스를 만나고 있었다. 메테우스의 뜻은 확고했다.
“파천에게 모든 걸 맡기기로 했습니다. 그가 결정하면……우리는 따를 뿐입니다..”
더 이상 더 물을 필요도, 들을 필요도 없었다. 확인은 끝났다. 제석과 노군은 참담한 심정이었다. 자신들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한다는 현실이 서글플 따름이었다.
제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렇게 내몰리니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정은 하나뿐이군요. 전쟁에서 살아남는다면……그때나 볼 수 있겠군요. 그럼……저희들은 속리 하룬을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메테우스도 그런 결정이 달가울 리는 없었다.
“다시 한 번 숙고해보지요. 파천의 진의는 여러분들을 배척함이 아닙니다. 영계의 단합을 원치 않는 이는 적들뿐입니다. 힘을 하나라도 더 모아야 할 시점에 분리시킴은 적을 이롭게 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만든 장본인을 설득해보시지요. 저희는 드러나 있는 그대로 보고 판단합니다. 그 진의가 어떤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우리들 천상계와 선계를 전면적으로 부정했다는 것. 우리가 지닌 최소한의 권위마저 무시당한 채로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우리 생존을 위해서도 적들과의 싸움에 최선을 다해야겠지요. 비록 함께 하지 못하지만 마음은 같으리라 여깁니다.“
제석과 노군이 씁쓸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수련자 하나가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지, 지금 밖에 나가 보십시오.”
“무슨 일이냐?”
“지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져 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리 호들갑을 떠는 거냐? 찬찬히 설명해봐.”
“그, 그게 그러니까. 파천님과 선발대의 모습을 가리고 있던 막이 깨졌는데…….놀랍게도……믿을 수 없게도……그곳에 스물아홉 명의……쿠사누스들이.”
메테우스와 제석과 노군은 이미 그 자리에서 가라진 뒤였다. 남은 수련자는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다가 자신도 밖으로 뛰쳐나갔다.
오, 이럴 수가!
쿠사누스들이 날개를 활짝 펼친 채 허공에 둥실 떠 있었다. 스물아홉의 쿠사누스들이 한꺼번에 뿌려내는 위압감에 하룬은 숨을 죽였다. 그것보다는 그들의 모습이 선발대원들이라는 점이 너무도 놀라웠던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일. 이것을 어찌 현실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모두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는 이때에 태연한 단 하나의 존재가 있었다.
수호자!
그는 하룬이 멀리 보이는 지점에서 그 장면을 감동을 담고서 주시하고 있었다.
‘한 고비를 넘겼어. 의미 있는 힘이 더해진 거야.’
수호자에 의해 안배되었다는 선발대.
그 이면에 이런 진실이 태동하고 있었을 줄 그 누가 알았으리요. 메타트론에 의해 폴로 잡혀 왔던 서른셋의 쿠사누스.
자신들조차 알 수 없는 그 사실을 오롯이 밝혀낼 능력자는 영계를 통틀어도 몇 되지 않는다.
수호자와 메타트론, 옛 용, 대덕 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그들이라도 주목해서 집중하지 않는 한 즉시로 알아낼 수는 없다.
수호자는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을 추적해 왔고 마침내는 그들 전부를 찾아내기에 이르렀었다. 그는 그 중에 일부를 처음부터 선발대로 묶어놓았다.
하지만 몇 명은 그러 수가 없었다. 그들의 위치를 확보하고 자연스럽게 선발대에 포함시킬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마치 누군가의 이끌림에 인도되듯 선발대 곁을 찾아왔고 그들과 함께 했다. 수호자는 나중에 그들이 모여 있고 어떤 식으로든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서는 무척이나 안도했었다.
‘이것을 단지 우연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메타트론, 대답해봐라. 이것이 우연이더냐? 이 모든 일이 저절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더냐?
메타트론이 수호자의 옆에서 불쑥 솟아나듯 생겨났다. 그도 하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이제야 알아챈 것이다.
“한 방 맞았군.”
허탈해하는 목소리였다. 쿠사누스들이 파천에게 더해졌다고 해서 메타트론이 긴장할 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기분 나쁜 건 사실이었다.
“물론……네 짓이겠지?”
“나는 시작했을 뿐이야. 그 이후의 완성은 내 뜻과는 무관하다.”
“그럴 듯하군. 쿠사누스들 서른 셋 중에 스물여덟 명이 새롭게, 그것도 한꺼번에 등장했다는 말이지? 후후, 제왕 마르시온이 무척이나 당황하겠군. 더군다나 지금 하룬엔 제왕들까지 와 있지 않은가?”
“모든 게 제자리를 잡아 가는 과정이지.”
“제자리? 그런 게 있었던가?”
“너도 알다시피 저들은 쿠사누스들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능력자들이었다. 정예 중 정예라 할 수 있다. 마르시온을 지지하는 쿠사누사들과는 격이 다르다. 더군다나 다른 쿠사누스들 역시 소멸극복을 이룬 뒤에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지.
지금 네 눈에 비치는 저들은 어떤 것 같은가?“
확실히 마르시온을 따르는 쿠사누스들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그래서?”
“저들의 위력을 마르시온이 겪게 된다면 어떤 선택을 하리라 생각하는가?”
“으음, 그건 좀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듯싶구나.”
“그래, 변수는 적으면 적을수록 좋은 거니까.”
“이미 그것까지 예상해두고 있었더냐?”
“내 예측이 아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 중에서 파천의 예상을 벗어날 것이 있을까가 의문이야.”
“……”

쿠사누스들의 등장을 의외라고 여긴 이는 비단 지금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자들만이 아니었다. 파천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라미레스조차 마찬가지였다.
‘아난다야 확인되었다지만……다른 대원들까지 쿠사누스였다니. 정말이지……어이가 없네. 그런데 의문이야. 페리칸만 해도 화신이 장기인데 극품의 화신체가 되면 나타난다는 쿠사누스의 날개가 왜 그동안 나타나지 않은 거지?”
그러고 보니 그랬다. 페리칸만이 아니었다. 극품의 화신을 할 수 있는 자들은 대원들 중에 꽤 되지 않던가? 그런데도 그들 중 유독 아난다만이 쿠사누스였음이 알려진 이유가 궁금했다.
거기엔 아나다의 전신인 루잔의 철인 유스티안을 주목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메타트론은 쿠사누스가 글품의 화신을 하면 날개가 돋아난다는 것을 알고 그에 마땅한 대비책을 세워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난다가 쿠사누스의 날개를 확인하게 된 데는 그의 능력이 다른 쿠사누스들에 비해 월등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르시온과 함께 쿠사누스들 중 최강자였으며 제왕들보다도 강했다. 물론 판드아의 제왕은 예외다.
어쨌든 선발대원들이 쿠사누스였음이 드러난 현장은 흥분이 점차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그들이 왜 선발대였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동안 관심권 밖에 떠밀려 있던 선발대가 일약 중심으로 우뚝 서는 순간이었다. 파천이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너희들이 쿠산누스였음이 밝혀졌음에도 날 따르겠는가?”
아난다가 모두를 대표해서 말했다.
“물론입니다. 저희들이 선발대원임은 온 세상이 아는 일. 선발 대장이신 파천님을 따르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제왕들이 이곳 하룬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테지? 그들이 예전의 관계를 원해 온다면……그때는?”
이번엔 페리칸이 말했다.
“저희가 쿠사누스였음이 밝혀졌다 해서 현재의 우리마저 사라진 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최근의 기억이 더 선명하게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제왕을 존중합니다. 그분들은 여전히 제왕이십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극복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 또한 사실입니다. 그들을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종속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우리 의지로 선발대의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파천은 흐뭇해했다. 수고가 헛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그의 판단은 정확했던 것이다. 서른셋의 쿠사누스들은 죽음으로도 제압할 수 없었던 고집쟁이들이었다. 자신의 의지를 외부 환경에 순응해 꺾어 버리는 나약한 비겁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파천은 잘 알고 있었다. 쿠사누스들의 마음에 제왕들에 대한 충정 역시 비중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왕들 역시 영자들의 눈에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이 장면을 또렷하게 목도하고 있었다.
그렇게도 찾길 원했던 쿠사누스. 파천은 약속대로 그들에게 최고의 선물을 먼저 준 것이다. 제왕들은 각오를 새롭게 했다. 더 이상 집착해야 할 소유도 없었다. 마지막 순간만은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으리라 다짐해본다.

누가 광명을 훔쳤는가

파천은 이제 더 이상 불 것도 없다는 듯이 전격적으로 움직여 갔다.
호응하는 자들로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얹은 집의 골격은 점차 제 모습을 갖춰 가고 있었다. 그의 내심에 정리된 우선순위는 세 가지였다.
하룬을 안정시키고 아바돈과 대적자들을 말끔히 처리하는 것.
역시나 지금의 불안정한 하룬을 정비하는 것이 우선일 수밖에 없었다. 파천은 수호자와 무한계의 지도자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영계 연합군의 총사령관직에 오르기로 결심한다.
수뇌를 소집시켰음에도 참석치 않은 천상계와 선계 측의 인물들을 파천은 일일이 찾아다녀야만 했다. 그는 한 명씩 따로 만났다. 그리고 그들에게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게 했다.

‘역시 그것은 걸림돌이었던가? 광명이 소멸극복을 돌이킬 수 있다고 했다. 오랫동안 원해 오던 일이었다. 하지만……’
제석의 고민은 너무도 깊어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천주들과 7선 그리고 노군도 이 시간 같은 고민에 빠져 있을 터였다.
‘버리면 얻는다고 했던가? 현재의 지위와 능력을 버리라는 말인가? 그럴 수 있을까?’
제왕들에게 했던 파천의 제안이 이들에게도 던져진 것이다. 가지고 있는 게 많으니 미련이 크다. 그냥 이대로 살아가도 별 아쉬움이 없기에 뻔히 잘못된 길임을 알면서도 돌이키기가 만만치 않다.
제석의 관심은 과정상의 고통 따위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런 건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도 원하던 일이지 않던가?”
버린다는 게 이리도 어려운 일이라는 걸 예전엔 미처 몰랐었다. 손 안에 움켜쥐고 있는 걸 놓아버리는 일. 생각만으로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쪽을 선택하면 제외된다. 그것보다도 다시는 이런 기회를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룬을 당장 떠나야 하고, 어떤 도움의 손길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부딪침의 과정에서 모든 걸 잃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 그렇게 될 가능성이 더 높았다.
운이 좋아 설사 아무 일 없이 넘어갔다 해도 영자들은 더 이상 천상계와 선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선인들이나 천인들도 무한계로 이탈할 것은 당연했다. 쥐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허공을 움켜쥔 꼴인 것이다. 쥐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허공을 움켜쥔 꼴인 것이다. 그런 결과까지도 생각해보니 달리 선택이 없었다.
‘그래, 다시 시작하자. 여기서 물러나면 앞으로도 영원히 이 고통을 지고 가야 한다. 이런 괴로움을 견디느니 지금 용단을 내리자. 처음의 마음을 회복하고 영격매진에 노력하자.
이 따위 지위나 권력, 힘이 행복을 준 적이 있던가? 벗어버리자. 모든 걸 내던지고 홀가분하게 벌거벗은 상태로 세상과 부딪치는 거야.’
제석은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러자 잃어버렸던 미소가 먼저 찾아왔다.
그의 입가에서 비롯된 미소는 점차 얼굴 전체로 확대되더니 급기야 시원스런 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제석의 이런 결정이 도화선이었다. 갈등이 꽤 오래 갈 것이라 여겼던 파천은 기쁨을 금치 못했다.
‘되었다. 이제는 내 차례다. 이들이 모처럼 얻은 기회를 내 무능력함으로 날려 보낼 수는 없다.’

대회의장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이 밝다. 서로를 인정하고 마음을 합친 자들은 서로를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웠다. 제석과 노군, 메테우스와 카란, 라미레스, 아난다, 로메로라 제일 앞줄에 나란히 앉아있다.
그들은 하룬에 모여 있는 여러 성향의 계통을 대표하는 자격을 갖고 있었다. 천상계, 선계, 지혜 전사단, 선발대, 연합군 사령부가 그것이었다.
그들 이외에도 각 계통의 수뇌들이 대거 참석하고 있었다. 그들은 파천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3장 여 앞에는 호화로운 큰 좌석이 정면 벽에 따로 마련되었다.
파천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옆에는 수호자가 동행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던 파천이 마련된 좌석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린다.
그는 내실에 모여든 수뇌들 앞에 가서 섰다.
“내가 총사령관직을 허락한 데는 저런 자리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나는 지위가 아니 한시적인 역할만을 인정했을 뿐이다. 할 일이 끝나면 나는 여러분 곁을 떠날 것이다. 저런 자리는 필요치 않다.”
파천은 자신의 계획을 일일이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앞으로 나는 여기 앞에 앉은 7인들과만 의논할 것이다. 가능하다면 싸우지 않고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싸워야 한다면 싸우겠다. 하지만 최소화시킨다. 모두가 그 싸움에 동참할 필요는 없다. 단지 성원해주고 믿어주는 것만으로도 함께 싸우는 것과 다름없다.
그대들은 생각할 것이다. 계획들이 틀어져 아무 것도 장담할 수 없게 될 때를 대비해야 하지 않느냐고. 맞다. 그대들은, 연합군은 그때만 대비하면 된다. 내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소멸한 뒤를 염두에 두면 된다.
하나…..나는 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긴다. 이기기 위해 왔다. 나는 질 수가 없다. 지면 내어줘야 할 대가가 너무도 크기에 결코 질 수 없다. 내 영혼이 바스러지는 한이 있어도 막아내겠다. 약속…..하겠다.
대신 그대들도 영혼에 새겨야 한다. 이번의 어려움을 앞으로도 결코 잊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해야 한다. 그것이면 된다. 이후 뜻밖의 결과가 생겨 그대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빌어본다.”
‘그러면 많은 진실을 들려줄 수 있을 텐데.’
생각만으로 그쳤다. 파천은 알고 있었다. 그가 사람들과 함께 할 시간이 영원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이번 생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끝은 영계의 평화가 정착되는 것과 함께 마칠 것이라는 것을.
파천의 손이 수뇌들을 향해 뻗었다.
“이것이 여러분들이 보길 원하는 광명을 형상화한 검이다. 자, 보라.”
사람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파천의 손 안에 검이 하나 들려 있었다. 금빛 충만한 검을 파천은 손잡이 부분만을 남겨둔 채 바닥 깊숙이 내리꽂았다.
“내가 이 검을 다시 뽑을 때 싸움은 시작된다.”
파천은 마지막 정리를 위해 잠시의 시간을 갖겠노라 했다. 그리고 몇 가지 당부를 더 하고는 모두를 해산시켰다.
파천과 수호자도 얼마 안 가 회의장을 떠났다. 이제 그곳엔 광명의 검만이 덩그러니 꽂혀 있을 뿐이었다.

수호자가 말했다.
“걸려들까?”
“그러길 바라야지.”
“걸려들지 않는다면?”
“할 수 없지. 비밀차원이 그때까지 기다려준다는 보장이 없으니 먼저 움직여야겠지.”
언제나 파천의 곁에 있던 아그립바가 웬일인지 보이지 않는다. 파천은 어깨가 비어 있음이 허전했던지 슬쩍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예전 하룬의 노예 거상이었던 벤하민의 궁성을 전사들이 접수하고 연이어 연합군 사령부로 쓰게 되었다.
궁서에 회의장으로 쓰이는 곳은 여러 개가 있었다. 그중에 대회의장은 지하 맨 아래층에 자리 잡고 있다. 그곳은 평소에도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다 할 정도로 조용한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파천이 광명검을 꽂아 둔 일로 경비가 삼엄해졌다. 그 일은 로메로의 지시에 다라 수련자들이 주축이 되어 담당하고 있었다. 파천이 의도한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로메로의 판단을 달랐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래서 혹시나 있을지 모를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믿을만한 수련자들을 몇 개조로 나눠 경비 상태를 직접 챙기고 나선 것이다.
라미레스로부터 이 일을 전해들은 파천은 쓸데없는 일을 한다는 식으로 말했다.
“괜한 짓을 하는군.”
라미레스에게 보고할 일이 있어 비행매소에서 하룬으로 온 홀딘은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만에 하나 광명검을 분실하면 어찌 되는 겁니까?”
그게 궁금했나보다. 보고 해야 할 사안이 있음에도 그것부터 물었다.
“내 능력이 감소되는 가를 묻는 건가?”
“……네.”
“그렇지는 않아.”
“그럼 그걸 가져봐야 소용이 없는 것인가요?”
“왜, 가지고 싶은가?”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런 건 아냐. 그 광명이 엉뚱한 자의 손에 들어가 악용된다면……좀 골치 아프긴 하겠지.”
라미레스가 핀잔을 준다.
“보고할 게 있다더니 헛소리였군. 그게 궁금해서 온 거냐?”
“아 네, 내 정신 좀 봐. 비행매소의 현자가 요즘 심상치 않습니다. 평정심을 잃고 허둥대는가 하면 정신을 잃은 것처럼 멍해져 있는 때가 잦습니다.
미스바와 대화를 나눌 때도 기운이 급작스럽게 광폭해지고 하니……아무래도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 듯싶습니다.”
“그런데도 거길 비우다니 제정신이야? 당장 돌아가서 감시를 계속해.”
홀딘은 계속되는 라미레스의 질책에 불만을 표했다.
“염려 마십시오. 지혜 전사 다섯 명이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고 있으니까요.”
“어서 가봐. 내 곧 가볼 테니.”
“네, 알겠습니다.”
홀딘이 물러가고 나자 파천이 물었다.
“그자에 대해서 아는 게 있나?”
“조금은……”
예전 파천에게 원령에 대한 최초로 던져줬던 자이기도 했다. 그의 도움을 파천은 지금도 잊지 않고 있었다.
“어떤 자였지?”
“아레나의 스승이었던 대 수련자 메사 알지?”
“보진 못했지만 알지.”
“메사가 대 수련자가 되기까지 많은 영향을 줬던 인물이야. 그레고스와 비슷한 성향의 인물이지. 강하지만 그 강함을 결코 드러내지 않고 무한계를 떠돌면서 수련을 하되 수련자의 이름조차 갖지 않는……
벵골, 카포와도 막역한 사이지만 그런 관계조차 아는 이가 드물지. 나도 몇 번인가 보긴 했지만 깊은 대화를 나눠본 건 아니고, 이름이 뭐였더라? 여러 개의 이름을 갖고 있었던 걸로 아는데……“
“그런 자도 유혹을 이기지는 못했군.”
“어디 한 둘이어야지.”
“그자의 상태를 들어보니 마령의 폭주가 곧 시작될 것 같은데…… 홀딘과 지혜전사들만으로는 벅찰 수도 있겠는걸.”
라미레스는 설마 하는 심정이었다. 그레고스가 길러낸 홀딘의 강함은 라미레스도 인정한다. 그런 그가 현자를 막아내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물론 홀딘이 더 강하겠지. 하지만 마령의 폭주는 원령의 폭주처럼 평상시와는 비교할 수 없는 힘을 일시에 일으키거든. 아무래도 내가 가서 봐야겠다.”
라미레스와 파천은 곧장 비행매소를 찾았다.
미스바의 안내로 현자의 처소를 찾은 파천이 빙긋 웃었다.
“속았군.”
“무슨 소리야?”
라미레스의 되물음에 파천이 현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건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허상이다. 멀리서 원격으로 허상은 만들어 보내고 있는 것에 불과해.”
“뭐?”
라미레스가 뛰어가 손으로 현자를 훑었다.
“이, 이런!”
파천의 말 대로였다.
“홀딘!” 은면탈을 뒤집어쓰고 있던 홀딘과 지혜전사 다섯이 부리나케 등장했다.
홀딘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탈을 손에 들고서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봐.”
라미레스의 질책에 홀딘이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가까이 다가가면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되도록 멀리서 관찰한 것이 이런 실수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홀딘 정도의 능력자를 속일 수 있다니 그것만도 대단한 일이었다.
‘하긴 나도 파천의 지적이 있고 나서야 눈치를 챘을 정도니……무리는 아니겠군.’
현자의 탈출에 직면하자 미스바도 당황했다. 라미레스의 시선이 그녀를 찾았다.
“그와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눴던 적이 언제였소?”
“그러니까……”
미스바의 이야기를 통해 추측하기로는 현자가 이곳 비행매소를 벗어난 게 최근이라는 점이었다. 파천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지만 실상은 다른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현자가 남겨둔 허상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 허상이 있는 한 그의 위치를 파악해내는 건 어렵지 않다. 저자는 이곳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마령의 폭주가 시작되어 이지를 완전하게 제압당했을 가능성이 농후하군.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첩자를 색출해내는 건 의미가 없다. 그때까지만 참아라. 그대를 원래대로 돌려놓을 테니.’
라미레스는 홀딘을 통해 지혜 전사단에 일급 경계령을 발령했다. 그러자 파천이 영언으로 라미레스를 제지했다.
[라미레스, 듣기만 해라. 지금 현자의 허상을 통해 첩자들이 이곳을 주시하고 있다. 일급 경계령을 철회하고 주변을 수색하는 것에서 마무리 해. 내게 다 생각이 있으니 걱정 말고]
라미레스는 심중의 말을 급하게 쏟아 놓다가 뜨끔한 표정이었다. 그는 말하다 말고 곰곰이 생각하는 듯싶더니 다시 명령을 철회했다.
“홀딘, 네게 속한 전사만으로 하룬의 주변부를 조사해라. 아직 빠져나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네.”
홀딘과 지혜전사들이 밖으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파천의 느긋함과는 달리 라미레스와 미스바는 속이 바짝바짝 타 들어가는 심정이었다.
현자가 어떤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불미스런 사건이라도 저지른다면 둘 다 책임을 면치 못한다.
라미레스는 파천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라미레스는 이렇게 되자 미스바를 비행매소에 남겨두기도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파천과 라미레스를 뒤따르는 미스바의 얼굴이 어두운 건 당연했다.

파천은 수호자와 함께 페이룬트 산의 정상에 서 있었다.
그들은 하룬을 내려다보다 저 멀리 제왕의 군대와 마계 진영을 살핀다.
그것도 잠시 수호자의 시선은 사나운 짐승이 웅크리고 숨을 고르고 있은 듯한 하룬을 응시한다.
“쉽게 움직일 것 같지 않은데?”
“신중한 자들이야. 하룬을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 한 함부로 행동할 자들이 아냐.”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도 없고, 이러다 비밀차원이 먼저 움직이면 곤란한데.”
파천이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비밀차원은 단일한 세력이 아니다.”
“그래?”
“그들을 이끄는 지도자는 하나가 아니다. 그들은 단 한 번도 일치를 이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견제해 왔다.
지금 아바돈과 연결된 배후는 그들 중 하나에서 비롯된 것. 그들의 대립이 시간을 벌어줄 것이다.“
수호자는 파천이 비밀차원에 대해 자세하게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해 그다지 큰 의문을 지니지는 않았다. 광명을 얻은 그에 대해 수호자도 판단 내릴 근거는 없었다. 도무지 깊이와 넓이를 측정한다는 것이 무리였던 것이다.
“하지만 광명의 출현은 그들을 처음으로 하나로 묶어놓을 공산도 크겠군.”
“아니. 그럴 수 없다. 급진파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건 사실이겠지만 그들도 다른 계파의 눈치를 봐야 하지. 설득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우리와의 싸움이 만만치 않다는 걸 그들 역시 모를 리 없다.
승리를 낚아채기 위해서라도 일치된 힘을 결집시키려 할 것이다. 그때까지 아바돈을 찾아낼 수만 있으면 된다.”

파천과 수호자의 바람처럼 하룬 내에서 작고 은밀한 움직임이 태동했다.
어떤 촉수에도 걸리지 않을 만큼 느끼기 힘든 움직임은 아직은 분명하지는 않았다.
로메로는 막 대회의장을 빠져나오는 길이었다.
광명의 검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닌 듯싶었다. 파천의 손으로 다시 검이 돌아갈 때까지는 그 누구의 근접도 허락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로메로의 이런 관심을 아는 수련자들도 경비하는 데 결코 소홀할 수 없었다. 막 교대하려고 들어오던 수련자들이 로메로를 발견하고 예를 취했다. 그들을 이끄는 이는 의외로 대 수련자 카포였다.
로메로의 특별 지시가 하필이면 메덴의 수련자들에게 떨어진 것이다. 바소름과 벵골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은 3교대로 조를 편성해 감시의 눈길을 번뜩이고 있었다. 로메로가 카포에게 말했다.
“바소름과 교대하기 위해 왔나?”
“네.”
“실수는 용납하지 않는다.”
“염려 마십시오. 이렇게 경비가 삼엄한데 감히 누가 이 근처로 접근이나 하겠습니까?”
카포는 로메로가 지나치게 염려한다고 생각했다.
‘설사 광명을 손에 넣는 데 성공한다 해도 하룬을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지.’
그럴 만도 한 것이 외곽의 경비는 더 삼엄했다. 연합군이 정비되고 나서 하룬의 곳곳은 철통을 방불케 할 정도로 철저한 검무니 이뤄지고 있었다.
특히 사령부로 쓰이고 있는 궁성은 보보마다 감시의 눈길이 번뜩일 정도다.
“그래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돼.”
“네, 명심하겠습니다.”
카포와 일행들이 바소름과 교대했다. 카포는 다시 한 번 수련자들의 위치를 지정해주고 자신도 모습을 숨겼다.
대회의장은 금세 침묵이 지배했다. 작은 소음도 없는 곳에서 온 신경을 한곳에 집중하고 있기란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었다. 카포는 다른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저게 그렇게나 대단하단 말이지? 하긴 생령을 절대잘 만들 정도이니……누구라도 욕심낼 만하지. 거 참, 저렇게 중요한 것을 몸에서 떼놓는 배포란 또 뭐란 말인가? 나 같으면 신경 쓰여서 잠시도 내버려둘 수 없겠는데.’

카포와 그의 조가 경비를 담당한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지겨운 정적은 여전했다.
‘올 때가 되었는데.’
“카포.”
벵골이 들어서는 걸 확인한 카포와 수련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교대해야지.”
“그러지. 지겨워서 혼났어.”
“그래도 어쩌겠나.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니 참고 견뎌야지.”
둘은 마주서서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카포는 그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던게 억울했던지 한참이나 떠들어댔다.
“그럼 난 이만 가볼 테니 수고들 해.”
“수고했네. 물론 광명은 안전하겠지?”
“그걸 말이라고 하나? 어떤 간 큰 놈이 이 카포님이 지키고 있는데 겁 없이 여길 들어오겠나!”
벵골의 시선이 광명을 향한다. 슬쩍 스쳐보던 그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진다. 그리고 경악을 지우지 않은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벵골의 표정에서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낀 카포가 물었다.
“왜……그러나?”
“저, 저것……”
카포는 혹시나 싶어 광명의 행방을 찾았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카포의 입에서도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서, 설마?”
카포가 진정이 안 됐던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광명검에 손을 댔다.
휘휙
편 손이 허공을 휘저으며 펄럭거렸다.
“빌어먹을!”
“어서, 어서 사령부에 알려. 광명검이 사라졌다!”

하룬을 향했던 파천과 수호자가 동시에 감응했다.
“걸려들었다.”
“굉장한 속도로군. 역시 네 생각대로 지하로 도주할 셈인가 보다.”
하룬을 감싸고 있는 대지의 일부분도 허공으로 뽑아질 때 따라 왔다. 하루의 지하에는 아바돈이 예전부터 만들어놓은 통로가 거미줄처럼 뒤엉켜 있었다. 그 길을 따라 빠르게 달려가는 자가 포착된 것이다.
그 기운은 외곽 지역으로 빠져나가는 듯싶더니 지하 쪽으로 직하했다.
그리고 반대쪽으로 해서 하룬을 빠져나갔다.
마령의 기운이 느껴지는 그 움직임은 하룬을 벗어나자 곧바로 무한계 북부로 방향을 잡고서는 상상하기 힘든 속도로 사라져 갔다.
“우리도 움직여야지.”
파천이 하룬의 사령부로 향한 것과 달리 수호자는 정체불명의 그 기운을 따라갔다.

연합군 사령부가 발칵 뒤집혔다.
광명검을 도난당했다.
이 어이없는 사태 앞에 로미로도, 라미레스도 허둥댔다. 외곽지역을 차단시킴은 물론 경비를 담당했던 수련자들도 감시를 받아야만 했다.
광명의 분실은 비단 이들 선에서 해결될 사건이 아니었다. 소식을 들은 수뇌들이 대회장 안으로 허겁지겁 뛰어들었고 제일 마지막으로 파천이 당도했다.
평소의 자신만만하던 로메로의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잃어버린 광명을 찾을 길은 고사하고 원흉이 누구인지조차 알려지지 않은 상태. 최악이었다.
‘어찌 이런 일이 사령부 심처에서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경비를 담당했던 바소름과 카포, 벵골의 얼굴도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
파천이 그들에게서 들은 얘기 중에 특별하게 주목할 만한 건 없었다. 파천이 물었다.
“최초로 발견한 자가 누군가?”
“저와 카포입니다.”
벵골의 발에 파천이 그들을 주목해 바라본다.
“그렇다면 교대 중이었나?”
“네.”
“감시의 눈길을 잠시나마 거두었겠군.”
“……!”
“……!”
로메로는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왔다. 그래도 그렇지 카포와 벵골 정도의 대 수련자를 지척에 두고서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별다른 이상은 발견하지 못했었나?”
“……네.”
파천은 광명이 꽂혀 있던 자리를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살폈다. 광명은 여전히 그곳에 얌전하게 꽂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허상이었다.
‘역시 마령의 기운이로군. 현자의 짓인가? 자, 이제 내부 동조자가 누군지 가려볼까?
광명의 검에서는 은은한 마령의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현자의 허상처럼 외부에서 원격으로 조정하는 것이 아니, 그 상태로 고착화시켜 놓은 것이라면 시전자를 찾아내기 힘들어진다.
파천은 좀 전에 하룬 외곽으로 빠져나가던 움직임을 확인한 상태였다. 그자가 허상을 만든 장본인이라면 내부 동조자는 다른 방법으로 찾아내야 한다.
로메로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내놓는다.
“아무래도……원흉을 찾기란 힘들 것 같습니다. 달리 방법이 있으신지요?”
파천은 너무도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메로가 한시름 놓으며 반갑게 말했다.
“그럼 광명을 찾을 수 있겠군요.”
“아니. 광명은 하룬을 멀리 벗어난 것 같다.”
“이런……”
“말도 안 돼.”
“허참.”
“흐음.”
모두가 동시에 한숨을 토해내자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조사를 해봐야겠어. 모두들 내 지시에 따라줬으며 좋겠군.”
파천은 이어 대회의장 안에 있는 인물들을 밖에서 대기하도록 하고 라미레스와 로메로를 먼저 불렀다.
지은 죄가 없음에도 로메로는 속이 뜨끔했던지 헛기침을 했다.
파천은 광명검과 상당히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마주보고 있었다. 파천의 곁으로 가까이 온 라미레스와 로메로는 광명검을 등지고 있었다. 파천이 말했다.
“내 옆에 와서 들 서. 지금부터 재미있는 상황이 연출될 거야.”
‘재미, 재미라고? 속도 편하군. 이런 위기상황 앞에서 태평이로군.’
라미레스는 파천에게 한마디 쏘아붙이려다가 그만둔다. 파천은 이내 한 명씩 회의장 안으로 불러들였다. 안으로 들어서는 이는 누구 할 것 없이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것만으로는 모두가 범인으로 지목될 만도 했다.
그걸 위식했던지 야마천주는 괜히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다 되려 라미레스 등에게 오해를 사기도 했다.
파천의 재미있는 놀이는 계속되고 있었다. 이제 경비를 책임졌던 인물들만이 남게 되었다. 그들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아니, 어찌 보면 제일 먼저 혐의를 받을 수 있는 입장이었다.
바소름은 평소와 다름없는 비교적 안정된 얼굴 표정이었다. 대단한 심력이었다. 파천만이 아닌 여러 사람의 따가운 주시를 저렇게 태연스럽게 받아넘기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그가 가까이 와 서자 다른 이들은 곧장 파천을 주목했다.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다음.”
바소름도 혐의를 벗었다. 라미레스는 궁금했다.
“대체 어떤 방법으로 원흉을 찾아낸단 말인가? 우리 중에 있다는 것도 믿기 힘든 일이지만 설사 있다 해도 마령의 기운을 이처럼 완벽하게 차단시킬 수 있다면 자진해서 나서기 전에는 가려낼 수 없을 텐데?”
라미레스가 궁금해 하든 말든 파천은 조사를 계속해 갔다.
“다음.”
“다음.”
이제 카포와 벵골 만이 남게 되었다. 광명의 실종을 최초로 발견한 이와 책임을 져야 할 두 사람만이 남은 것이다.
카포는 죽을죄를 진 걸 아는지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며 들어온다. 로메로의 쏘아보는 눈빛이 따갑다.
‘저 덜렁거리는 위인을 어찌해야 할꼬.’
이제 두 명만이 남아서인지 지켜보는 이들의 긴장감이 더해졌다.
“카포.”
파천이 최초로 ‘다음’을 외치지 않았다. 모두는 놀라 두 사람을 주시했다. 설마 카포가 범인이란 말인가? 메덴의 대 수련자 카포가 그런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왜? 무슨 이유로? 단지 욕심으로? 모두의 궁금증은 증폭돼 갔다.
“왜 그렇게 다리를 떨지?”
“네?”
화들짝 놀란 카포가 오른발을 앞으로 살짝 내밀었다. 자세를 바꿨음에도 후들거리는 다리는 여전했다, 그를 지켜보던 이들의 의심스런 눈초리가 확신을 담아 가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걸 느꼈음인지 카포가 필사적으로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더 떨린다. 카포의 좌,우 발이 연달아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파천이 말했다.
“다음!”
“휘유.”
카포가 그제야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어찌나 긴장했던지 얼굴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그가 긴장할 만도 한 것이 파천이 작정하고 아무나 지명하면 그가 실제로 범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혐의를 벗을 수가 없게 된다. 범인이라 단정 지을 증거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반박할 증거 따위도 없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지금의 파천이 어떤 해괴한 논리로 자신이 지목한 자가 범인이라고 증거를 삼기라도 한다면 그걸 논박할 만한 자도 없었다. 그런 상황임을 알기에 모두는 지나치게 긴장하는 것이었다.
파천의 다음 소리에 안으로 들어서는 벵골은 바소름 보다도 더 태연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파천 앞으로 와서 똑바로 섰다. 그 순간 파천은 웃으며 물었다.
“긴장되지 않나?”
“지은 죄가 없으니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당당하군.”
대 수련자 벵골을 털끝만큼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의 말처럼 양심의 가책을 느낄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런 듯했다.
파천의 눈길을 여전히 벵골의 잔잔한 눈을 주시하고 있었다.
“저, 저것.”
라미레스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라미레스만이 아니었다. 파천을 제외한 모두의 눈이 벵골과 파천이 아닌 다른 쪽을 향했다.
광명검! 허상이 잠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 것이다.
벵골은 무슨 일인가 싶어 뒤로 고개를 돌렸다. 별다른 이상이 없다. 그는 광명검이 사라졌다 나타났음을 보지 못한 것이다. 파천이 다시 물었다.
“범인이 누구라고 생각하나?”
“모르겠습니다.”
스스스
다시 광명검이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모두는 그걸 분명하게 확인했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별다르게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범인은 어느 쪽의 인물일까? 자네 짐작은?”
“아마도……아바돈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됐지?”
“얼마 전 생사군단에서 아바돈의 첩자를 대거 색출한 적이 있었습니다. 최후까지 밝혀지지 않은 자가 있다 들었습니다. 그자의 소행이라고 봅니다.”
“흐음, 그럴 듯하군.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름은 카발라. 아바돈의 마령의 본주를 따르는 최측근이기도 하지.”
벵골은 여전히 태연하기만 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대 수련자 벵골.”
“네.”
“그동안 영자들을 위해 참 많은 일을 해왔었던 걸로 들었다.”
“과찬이십니다.”
‘대 수련자 벵골.“
“네.”
파천의 질문이 길어지자 여러 사람들은 무슨 영문인가 싶어 어리둥절한 심정이 되어갔다.
“날 어떻게 생각하나?”
라미레스와 로메로, 메테우스와 카란 등은 이제야 뭔가 짚이는 게 있었던지 파천의 질문이 점차 엉뚱해져 감을 주의 깊게 살폈다.
“무슨 뜻으로 물으시는 건지?”
“질문이 잘 못 됐나 보군. 다시 묻지. 내가 얻은 광명을 어떻게 생각하나?”
“그야……측정할 수 없는 힘과 능력의 상징이지요.”
“그렇다면……그대의 추측처럼 광명이라면 마령의 기운을 안에 갈무리하고 있는 아바돈의 수족쯤은 쉽게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자네 이름이 카발라라고 했던가?”
“네?”
벵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파천은 벵골을 카발라로 단정 지어 부르고 있었다. 너무도 황당했던 나머지 모두는 벵골과 샅은 표정이 되어 갔다.
“참으로 기가 막힌 방법이었어. 알고 있었다 해도 방비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야. 광명은 지하에서 빼내어 갔다.
덧씌워놓은 허상이 그 빈자리를 메웠고. 그렇지만 감시자들의 눈길이 머물러 있을 때는 곤란했겠지. 교대하는 시간이야말로 잠시일지언정 감시의 눈길이 느슨해진다. 그때 지하에 대기하고 있던 또 다른 한 명이 광명을 빼돌리고 도주했다.
그가 하룬을 완전하게 빠져나갈 시간은 네가 벌어줬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나서 교대가 완전하게 이루어지기 전에 광명이 사라졌음을 밝힌다.
너는 가장 먼저 의심을 받을 수 있음에도 자신했겠지. 아무도 네 실체를 밝혀내지 못할 것이라고. 그런데 넌 나를 너무 과소평가했더군. 큰 실수를 저질렀어.”
벵골은 아직도 인정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자신이 카발라임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인지, 자신의 계획에 틈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인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었다.
“광명을 가지고 도주한 자가 허상을 만들어냈다면 아마도 널 찾아내는 데 좀도 많은 시간이 걸렸을 거야.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허상을 만들어낸 건 너였다. 아마도 적절한 순간을 결정하기에 제가 더 적당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겠지. 아직도 인정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니……가증스런 자.”
“심하시군요. 그런 끼워 맞추기 식이 억측만으로 절 범인으로 몰아가다니.”
“수긍할 수 없다는 말인가?”
“절대로!”
저 단호한 표정을 보고 누가 그가 범인이라고 생각하겠는가. 파천은 한 손을 뻗어 벵골의 뒤를 가리켰다.
“그럼 원하는 걸 내보여야겠군. 저기를 봐.”
벵골은 한 걸음 물러서며 뒤를 쳐다 보았다. 광명검이 깜빡깜빡 빛을 내고 있었다.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직도 어떤 현상인지를 모르겠나?”
“저 현상과……내가 범인인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겁니까?”
파천을 쳐다보는 벵골의 눈길이 강력해지기 시작했다. 반발인가?“
‘상관이 있지. 내가 회의장 안으로 한 사람씩 들어오게 한 것도 바로 저걸 보기 위해서였으니까. 현재 저 광명검은 마령의 기운으로 고착화되어 있다. 현재 너와의 연결점은 전혀 없다고 보아도 된다. 하지만……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도 아니다.
저 형상은 네 존재가 사라지면 동시에 자취를 감춘다. 마치 마령의 본주가 사라지면 마령의 지배 하에 있던 자들이 본래의 자신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다. 너와 심령 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다.
내가 네 주변을 광명의 기운으로 완벽하게 차단시킬 때마다 저 광명검은 네가 범인임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래도 이해가 안 되나?”
“말도 안 되오. 그런 억지고 날 범인으로 몰다니……인정할 수 없소.”
“후후, 착각하지 마라. 이제 더 이상 네 수긍은 필요 없다. 네가 범인임은 내가 알고 있고 네 스스로 알고 있다. 그런데도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있나?”
벵골, 아니 카발라의 눈빛이 갑자기 흉폭 해졌다.
“광명을 얻은 자가 억지를 부리는가? 이런 식으로 날 범인으로 몬다면 아무도 널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 좋다. 얼마든지 범인이 되어 주지. 네가 원한다면, 희생양으로 날 지목했다면 순순히 응해주마.”
끝가지 부정한다.
“지독하군. 마령의 본주가 신임할 만한 자야. 좋다, 그럼 네 본래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도 좀도 그럴 듯한 대접을 해주마. 광명이 마령의 상극임은 너도 알 것이다. 네가 내 주시를 받고 있는 이상 네 진면목을 드러나게 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제야 카발라도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이제 아무도 그를 더 이상 대 수련자 벵골로 보지 않는다. 지켜보던 모두가 확신을 한 것이다.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충격이었다. 그를 가까이서 대해 왔던 이들은 도무지 지금의 사태를 믿을 수가 없었다.
메덴의 대 수련자 벵골. 그의 지난 행적이 모두 위선이었다니 참으로 경악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사실 카발라는 그동안 대 수련자 벵골의 신분으로 많은 활동을 해왔었다. 아바돈의 영광과 새로운 제국 건설을 위해 전력을 다해 왔던 것이다.
칠대부족의 사건에도, 카이로의 일에도 그는 관련되어 있었고, 그가 가진 아바돈에 대한 정보 기여는 단연 수련자들 중 최고였다.
메사가 카이로에게 죽음을 당한 것도 자신에 대해 미심쩍어 한다는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칠대부족장들을 한자리에 모이게끔 유도한 것도 카발라였다. 전사들 간에 분열을 부추기고 무한계에 오랜 갈등을 심어 온 것 역시 그의 작품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가 지금껏 한 일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했다. 그럼에도 가장 가까이서 그를 살폈던 라미레스와 치앙마, 바소름, 카포 등에게 단 한 번도 의심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치밀한지를 알게 해주었다. 의심은커녕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대 수련자로 행세해오지 않았던가!
모든 것이 밝혀졌음에도 카발라는 도무지 수긍하려 들지 않았다. 자신 안에 안주하고 있는 마려의 기운을 파천이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체념하지 않는다.
파천은 행동으로 들어갔다. 손가락 하나를 내밀어 작은 원을 그렸다. 허공에 그려진 원은 실체가 되었고 금세 커져 카발라를 포박했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고통을 참아내는 데는 익숙할 거야. 마령의 폭주를 시시때때로 참아왔을 테니 말야.”
“흐으으으윽.”
파천의 손가락이 이번엔 허공에다 기묘한 기호를 그려 놓는다. 허공에 가득한 형상들은 점차 빠른 속도로 카발라를 압박해들었다.
카발라의 표정이 흉측하게 일그러진다. 그토록 수려하고 인자하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고 상처 입은 짐승이 그 자리에서 울부짖고 있는 듯했다. 파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마령이 완전하게 깨어나면 그자도 이곳의 상황을 알게 된다. 아직은 기다려야 한다.’
파천은 즉각 카발라에게 가하던 금제를 풀어버렸다. 포박만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러자 그토록 미쳐 울부짖던 카발라가 잠잠해졌다.
“크으.”
카발라는 지쳐 보였다. 무척이나 힘들어했다. 그는 이제야 말로 체념한 듯 보였다. 파천은 계속 말을 시켰다.
“광명을 훔친 자는 어디로 갔나?”
“흐흐, 내가 말할 것 같은가? 아무리 너라도 왕의 금제를 깨트릴 수는 없다. 우리의 본진이 어디에 웅크리고 있는지를 알아내지는 못할 것이다.”
“네가 말해줄 것 같은데?”
“크하하하하, 날 만만하게 보지 마라. 비록 내 힘이 네게 미치지 못해 이런 꼴을 당하고 있지만 결코 고통 따위에 승복해 내 입으로 발설하지는 않는다. 이보다 더한 고통도 이겨낸 나다.”
“그런가? 존경스럽군. 마령의 본주가 네게 어떤 약속을 했는지 모르지만 과연 그가 그걸 지켜줄 수 있을 거라 믿는가?”
“비록…… 나는 소멸하겠지만 왕께서는 이룰 것이다. 제국을 건설해서 너희들처럼 나약하고 이기적인 존재들을 모조리 섬멸시킬 것이다. 새로운 질서. 영원한 낙원이 건설된다. 절대자의 힘은 신에게서 모든 존재들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
“철저하게 병들었군. 네 신념은 영혼에 깊이 각인되어 있구나.”
“네가 그렇게도 자랑하던 광명마저 왕께서 가지시면 그때 가서도 큰 소리를 칠 수 있을까?
“궁금한가?”
“그래, 궁금해 미칠 지경이다. 벌레처럼 짓밟히는 네 모습을 보지 못해 원통할 따름이다.”
“염려하지 마라. 그런 일은 없을 테니.”
“왕께서 말씀하셨지. 광명을 네가 얻음이 당장은 유익한 상황으로 이끌겠지만 장차 우리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그런데……흐흐흐흐, 내가 광명을 네게서 훔친 거야. 왕의 심려를 한번에 날려버린 거지.
왕께서는 날 기억해 주실 것이다. 영원토록 지금의 내 업적을 기려 주실 것이다. 내가 지금 소멸당하지만 그런 건 두렵지도 않다.”
파천은 카발라가 마음껏 지껄일 수 있도록 내버려두었다. 그가 기다리는 건 수호자의 전언이었다. 그때까지만 견디면 되는 것이다.
“내가 널 소멸시킬 거라 생각하는가 보군?”
“아닌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네게 기회가 있다면 다시 원래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다면 어쩌겠는가?”
“크, 웃기지 마라. 그런 걸 원할 리가 없잖느냐? 저런 나약한 놈들과 같은 모습이 싫어서 지금의 날 선택했다. 그런데 또 다시 돌아가라고? 크하하하하, 객쩍은 소리 집어 치우고 어서 소멸시켜라.”
‘네 소멸이 섬기는 왕께 불충이지는 않을까?”
“할 수 없지. 끝까지 남아서 충성을 다하고 싶었지만 이렇게 되었으니. 하지만 후회는 없다. 단지 제국이 건설되는 것을 보지 못함이 아쉽구나.”
파천은 광명으로도 카발라을 원래의 대 수련자 벵골로 돌려놓을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의 말처럼 소멸만이 유일한 선택이라는 것도. 마령에 씌웠다 해서 어찌 두려움이 없겠는가. 그 결과가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해도 어찌 후회가 없겠는가? 소멸의 길에 어찌 외로움이 없겠는가.
카발라의 눈 속 깊은 곳에서 작으나마 반짝이는 후회의 빛을 파천은 감지할 수 있었다.
‘안타깝구나. 이 자를 지금의 이 모습으로 소멸시켜야 하다니. 그 과(果)를 어찌 다 감당하려는가? 어리석은 자여, 어찌 그대만의 잘못일까? 그대를 이 길로 이끈 자들의 죄를 그대 홀로 져야 하다니.’
“약속하겠다. 널 이 길로 이끈 자들을 곧 뒤따르게 해 주겠다.”
이제 대꾸할 힘도 없는지 카발라의 고개가 천천히 숙여지고 있었다. 파천은 카발라의 고통을 최소화시켜 주기 위해 애썼다. 그의 가벼운 손동작에 카발라가 움찔 전신을 떨었다.
“쿨럭.”
“많이……힘든가?”
“그래, 힘이……든다. 괴롭다. 생겨나지 않았다면……이런 고통도 없었을 텐데.”
“마음만이라도 돌이켜라.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러도 돌이키는 순간 용서받을 자격이 생긴다.
너는 사람으로 살아감이 헛되다 하지만 이 길을 간절하게 원하는 이들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알게 되리라. 집 안에 있을 때는 집이 주는 평안함을 느끼지 못하지만 비바람이 몰아치는 벌판에 홀로 선다면 당장 그 집이 그리운 것처럼 지금의 네 삶이 얼마나 가치 있고 소중했었던가를.
그리고 기억해라. 다시는 이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지금 이 순간을 영혼에 새겨라. 그리하여 같은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불현듯 살아나게 하라.
너는 후에 기회를 얻기 위해 백만 번을 원하고서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모두는 숙연해 있었다. 조금 전까지 동료였던 수련자 벵골이 아바돈의 주구로서 최후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걸 지켜봄이 어찌 괴롭지 않겠는가. 바로 그때 그렇게도 기다렸던 수호자의 영언이 파천에게로 왔다
[파천, 찾아냈다.]
수호자가 아바돈이 웅크리고 있는 위치를 찾아낸 것이다. 파천이 즉시 응답했다.
[마무리 짓는 대로 가겠다. 내 의도를 읽게 되면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할지도 모른다.]
[내 눈에 잡힌 이상 어디라도 숨을 데가 없음을 잊었느냐.]
파천은 카발라에게로 다시 관심을 기울였다.
“네 고통을 잠재워주겠다. 마지막으로……할 말은 없는가?”
카발라는 고개를 드는 것조차 힘이 드는지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의 동공은 벌써 어느 정도 풀려 있는 상태였다. 억지로 초점을 맞추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파천은 그가 모든 사물을 확연하게 살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카발라가 찾은 것은 의외로 카포였다. 카발라가 말했다.
“저놈은 내 친구요. 예전엔 몰랐는데,,,,,,내가 저 놈을 꽤나 좋아 했었던가 보오. 크크, 한 가지만 부탁해도 되겠소?”
카발라의 마령이 상당히 약화되어 있었다. 파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발라는 눈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주시하지 못하는 자들을 하나하나 담아갔다.
“모두……실망시켜서 미안하다. 아쉬움도 크지만…… 어쩌겠는가. 남을 자는 남고 갈 자는 가야겠지. 크크, 걱정 하나는 줄어들었군. 너희들과 싸워야 할 걸 생각하니……골이 지끈거렸는데……말야.”
그것이 끝이었다. 더 이상 지속시킴은 카발라를 더 힘들게 한다. 그렇지만 카발라가 지고 갈 마음의 짐 하나쯤은 덜어주고 싶었다.
“광명검은 애초에 없었다. 광명은 검이 아니다. 그러니……네 행동으로 다른 결과가 생기지은 않을 것이다.”
“그런가? 멋지게……당했군.”
“잘 가라. 대 수련자 벵골.”
파천의 손이 활짝 펼쳐졌다.
화아아악
광명의 빛이 이리도 아름답던가? 카발라는 자신이 한 무더기 불꽃 속으로 들어간다고 착각했다. 그 불꽃은 뜨겁지도 차지도 않았고 따뜻했다. 그의 잠재의식 속에 언젠가 있었던 것 같은 기억 하나가 갑자기 떠올랐다. 인간계의 사람으로 태어나기 위해 웅크리고 있는 작은 생명의 꿈틀거림.
‘어머니의 자궁……’
그랬다. 그에게도 그런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그의 형체는 서서히 빛을 잃어 갔다. 말갛게 투명해진 카발라는 자유롭게 움직였다. 그리고 씁쓸하게나마 웃고 있었다.
카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는 벵골의 마지막을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어느새 자신의 눈길은 다시금 벵골을 찾고 있었다.
‘잘 가라. 다시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내가 기원하마.’
벵골은 지금껏 살아온 무수한 시간들이 자신에게서 빠르게 빠져 나간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는 사라졌다. 모두의 시야에서, 존재계에서 그는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파천은 즉시 데려갈 자들을 추렸다. 선발대는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고 나머지는 자원을 받을 참이었다. 하룬을 비워 둘 수도 없기에 최소한의 인원만 대동할 참이었다. 파천은 간략하게 설명했다.
파천이 만들어 낸 광명검은 아그립바의 변신한 모습이었다. 그것이 광명검이 아님을 마령의 본주는 즉시 알아챌 것이었다.
그리고 아그립바의 안위를 위해서도 그가 마령의 본주 앞까지 가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수호자를 딸려 보낸 것이다. 그 계획의 이면에는 아바돈이 다른 곳으로 자취를 감춘다 해도 수호자의 감시를 완전하게 따돌릴 수 없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지금 수호자는 파천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파천은 수호자의 기운을 감지해 가기 시작했다. 그가 아무리 멀리 있다 해도 특별한 방해가 없다면 파악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위치에 대한 확신이 서자 파천은 모두를 이끌고 공간이동을 감행했다.
나타난 파천에게 수호자가 말했다.
“빨리도 오는군.”
늦게 왔다고 책망하는 것이었다. 수호자는 즉각 자신이 파악한 상태를 모두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더불어 계획까지 밝혔다.
“보다시피 이곳은 무한계 북부다. 저기 보이는 것이 자갈로의 언덕이다. 대충 어딘지를 다 알겠지?”
모두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스물아홉 명의 쿠사누스와 라미레스, 카란, 카포만이 온 것이다. 아바돈을 치기 위한 인원이라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소수였다.
원래 파천은 선발대와 라미레스만을 데리고 올 참이었다. 헌데 카란과 카포가 한사코 함께 갈 것을 원하는 바람에 같이 데려왔다. 수호자의 설명이 이어졌다.
“대충 살펴본 결과 이곳의 지형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지하는 암반으로 되어 있다. 이곳 역시나 지하통로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아바돈의 핵심 전력답게 꽤나 대단한 자들이 많다.
뭐……위험해지지는 않을 것 같다만 그래도 조심들 하도록. 특히 하기오스들과 마신들을 조심해라. 아 참, 그리고 고르곤 한 마리가 지하에 웅크리고 있으니 되도록 피해라.”
파천이 자기 생각을 덧붙였다.
“우리 목표는 아바돈을 전멸시키는 것이 아니다. 마령의 본주는 내가 맡도록 하겠다. 그리고 고르곤은 수호자 네가 맡고.”
“내가?”
“흠, 그 징그러운 놈을 때려잡아야 하다니.”
“다시 한 번 말해두는데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 한 살생은 금물이다. 제압하는 선에서 멈추도록. 도주하는 자들은 굳이 막지 않아도 좋다.”
라미레스가 지적했다.
“혹시 수뇌들 중 도주하는 자가 생기면?”
“흠,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이곳 전체를 막으로 감쌀 테니 그것이 신호다. 막의 강도는 하룬과의 비교조차 안 되니 누구도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파천의 자신감을 수호자가 거들었다.
“어련할까.”
긴장을 풀어주려고 했던 말인데 다시 살펴보니 그런 기색들이 없다.
‘파천이 제대로 골라 왔군.’
살생이 아닌 제압은 배나 힘이 든다. 그런 이유로 파천이 추려서 데려온 것이었다.

마령이 폭주한 현자는 더 이상 예전의 청수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광명검을 손에 움켜쥐고 이곳까지 한달음에 뛰어왔고 곧장 마령의 본주가 거하고 있는 웅장한 대전으로 향했다.
그를 제지하는 자들이 하나도 없다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그를 힐끔힐끔 살피는 자들은 보여도 도무지 막을 생각들이 없어 보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그가 누군지를 모두가 알기 때문이었다. 그가 왜 왔는지까지는 모르는 듯했다.
대전 앞에 이른 현자를 그제야 누군가가 제지한다.
“무슨 일로 왔느냐?”
현자가 말했다.
“왕을 뵈러 왔다.”
“왕께서는 출타 중이시다. 용무가 있다면 내게 말하라.”
현자는 다급하게 말했다.
“광명검을 훔쳐 왔다. 광명검을 왕께 바쳐야 한다.”
현자를 막아선 자는 마령의 본주의 최측근 중 하나인 마르쿠제, 즉 그노시스 헤이룬의 충성스런 수하였다.
그는 대전에 출입하는 자들의 용무를 분류해서 마르쿠제에게 보고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 문지기나 다름없었다.
아바돈에서의 원래 지위는 마르쿠제보다도 더 높은 바시류스였었다. 지금의 아바돈에서 예전의 직위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하기오스들이 실권을 잃은 지 오래였기에 마령의 본주에 대한 충성도로 모든 게 결정되었다.
마령의 힘이란 것이 심령의 결단과 어느 정도는 비례하기에 현재의 지위는 그대로 강하고 약하고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그노시스 헤이룬 즉 마르쿠제는 지금 아바돈에서 마령 본주 다음가는 실세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하기오스들 마저 무시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그의 수족이니 그 위세가 어느 정도이겠는가? 현자만 해도 그가 이처럼 막 대해도 좋을 인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약간은 눈 아래로 내려다보며 거만하게 굴던 자가 갑자기 놀라서 외쳤다.
“광명, 광명이라고? 파천이란 생령이 얻었다는 광명을, 광명을 가져왔다는 말이냐?”
호들갑을 떠는 문지기에게 현자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빨리 날 왕께 안내하라.”
문지기는 침을 꿀떡 삼키며 현자의 손에 들린 광명을 탐욕 가득한 눈길로 쓰윽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광명인지 아닌지 내가 먼저 살펴봐야겠다. 이리 줘봐.”
“안 된다. 이것은 왕께 드려야 한다. 왕께 드리라고 했다.”
“누가?”
“카발라!”
“흐음, 그래?”
‘이것 보통 일이 아닌데. 카발라님이 이 검을 얻어서 이놈에게 쥐어 보낸 게 맞다면……우리 마르쿠제님의 입지가 그만큼 좁아진다.
다른 것도 아니고 광명이라니…… 이놈을 왕께 데려가서는 안 된다. 왕이 돌아오시기 전에 처리해야 해.’
딴에는 충성을 하느라고 잔머리를 굴리고 있던 문지기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근엄하게 현자를 꾸짖으며 한편으로는 달래어도 본다.
“왕을 직접 배알하는 것은 정해진 인물에게만 주어지는 은총이다. 그런데 네 따위가 직접 배알하겠다니. 안 될 말이다.”
“왕께 전해야 한다!”
현자는 그 말만 계속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래, 네 말대로 왕께 전할 테니 이리 줘봐. 어서!”
“왕께 내가 직접 전해야 한다.”
“고집스런 놈. 어서 주지 못해! 마르쿠제님께서 먼저 설펴보실 것이다. 혹시 네 놈이 엉뚱한 생각을 품고 왕을 시해……”
그는 그런 말조차 불경이라고 생각했던지 얼른 입을 다물고 주변을 살폈다.
“하여간 네 놈을 믿을 수가 없으니 일단은 내게 줘봐.”
“……!‘
둘이 옥신각신하고 있는 걸 보았던지 대전 앞 복도 저쪽 끝에서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거기 무슨 일이냐?”
마르쿠제였다. 대전 문지기는 마르쿠제임을 알아보고 그 자리에 납죽 엎드렸다.
“이 자가 광명검을 가져와 왕을 뵙겠다고 하는지라.”
문지기의 입에서 광명이라는 말이 나옴과 동시에 마르쿠제는 문지기 옆에 서 있었다. 현자도 그는 알아보는 것 같았다.
“분명 광명이라 했느냐?”
문지기는 고개를 들다 다시 땅바닥에 처박으며 힘주어 말했다.
“분명히 그렇게 들었습니다.”
“너 말고.”
“네?”
마르쿠제의 차가운 눈초리가 잠시 문지기를 쓸고 지나갔다. 문지기는 더 이상 고개를 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죽은 듯 숨죽이고 귀만 활짝 열어둔다.
“그것이 광명이라고?”
현자가 경계를 풀며 말했다.
“이것이 광명이다.”
마치 으르렁거리는 듯했다.
“흠, 보자. 그것이 광명이라면 내가 왕께 직접 드려야지.”
현자는 거부하는 몸짓을 했다.
“왜 그러지? 네게 이 명령을 내린 자가 카발라가 아니더냐?”
“맞다. 카발라가 왕께 광명을 전하라고 했다.”
“카발라와 나는 친구다. 그의 명령과 내 명령은 동일한 것이다. 자, 이리 줘봐라.”
헤이룬은 더 이상 시간을 끌다가 마령의 본주가 돌아오기라도 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다고 생각했다.
‘기회다. 광명이 내게 오다니. 하필이면 이런 때 왕이 밖으로 나가셨으니. 광명이 내 손에 들어왔음을 알고 있는 놈들만 모조리 처치하면…… 이 사실은 비밀이 된다.’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현자의 눈앞에다 손을 갖다댔다. 그 빠른 손놀림을 현자는 채 알아보지도 못했다. 현자의 눈이 서서히 감겨지는 것을 확인한 마르쿠제는 엎드려 있는 문지기의 머리통에 한 발을 올려놓았다.
‘이놈은 죽이고 이놈은 아직은 써먹을 데가 있으니 일단은 살려두자.’
우지직
자신의 머리통이 박살나는 소리를 문지기는 너무도 선명하게 들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마르쿠제의 발에서 푸른 광채가 번쩍이는 순간 문지기의 전신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옆으로 쓰러지는 현자를 마르쿠제는 옆구리에 끼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처소로 빠르게 사라져 갔다.
마르쿠제가 현자의 손에서 억지로 광명을 떼어놓는 순간이었다.
휘리리릭
“어?”
광명이 저절로 살아서 빛살같이 밖을 향해 쏘아져 가는 것이 아닌가? 마르쿠제는 그 뒤를 따르며 이를 바드득 갈아 붙였다.
‘역시 광명이라는 건가? 제 의지를 지니고 있다면 제압하기가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혹시라도 광명을 훔쳐낸 걸 왕이 알게 되기라도 한다면 일이 복잡하게 된다.’
그는 아그립바가 변신한 검을 광명이라고 철썩 같이 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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