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65화 : 선발대여, 아바돈을 끝장내라.
선발대여, 아바돈을 끝장내라.
파천은 아바돈이 웅크린 상공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예전의 기억 하나를 떠올리고 있었다.
현자와 했던 약속, 현자는 말했었다.
‘네가 비밀을 알았을 때……그리고 처단해야 할 존재가 네 앞에 서 있을 때 그 결과에 대해 다시 한 번만 생각해 다오.
그리고 만약 그 결과가 세상의 존폐와 맞닿아 있다면 신중해져라. 네 원수를 처단하는 일이 세상의 멸망을 부추기는 일이 된다면 넌 모든 걸 포기해야 한다. 네 복수까지. 그럴 수 있나?’
“세상의 존폐와 맞닿아 있는 원수라면 포기하라고 했던가? 최소한 아바돈의 수괴는 그런 자가 아니다. 그러니 내가 약속을 어김은 아니다.”
파천은 가능하다면 현자만은 안전하게 구해내고 싶었다. 그에게 도움을 받아서라기보다는 원래의 모습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파천에게서 빛이 나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를 가득 채워 갔다. 느린 듯 보였지만 실상은 굉장한 속도였다.
어찌 보면 띠 같기도 하고 얇고 투명한 막 같기도 한 것이 분지 전체를 둥그렇게 막아버렸다.
어느 곳을 쳐다봐도 빈틈이 없다. 하늘로 향했던 두 손이 다시 아래를 향하자 산 끝에 걸린 막이 지하로 파고들었다.
완전하게 형체를 갖추게 되자 파천은 큰 소리로 외쳤다.
“시작하라. 아바돈이여, 어둠의 잠에서 깨어나 징벌의 불화살을 맞이하라.”
파천이 막 아래쪽으로 내려가는데 아직도 광명검의 모습을 한 아그립바가 품안으로 뛰어들지 않는가?
그 뒤를 따라오고 있던 마르쿠제는 급작스런 주변의 변화에 아연 긴장했다. 더군다나 광명이 향하고 있는 곳에 예전에 본 적이 있던 금발의 사내, 파천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
“어, 어찌 그대가?”
그 순간 한꺼번에 서른 명은 족히 넘을 것 같은 인물들이 아바돈의 비밀궁성을 향해 쏘아져 가는 게 보였다. 그들 중 대부분이 날개를 지니고 있음을 보았던 것이다.
“처, 천사? 아니, 아니다. 쿠사누스다. 이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
“아직도 모르겠는가? 우리는 너희를 부수기 위해서 온 영계연합군이다.”
마르쿠제는 파천의 품안에 안긴 광명검이 한 마리 기이한 존재로 변화하는 길 똑똑히 목격했다.
“……이 모든 게……우리 위치를 알아내기 위한……함정이었나?”
“그런 셈이지.”
‘카발……라는? 물을 필요도 없겠군. 네가 여기 왔다면…… 그놈은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겠군.“
파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르쿠제는 궁성이 파괴되어 가는 걸 멀거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 또한 마지막을 예감했다. 우스운 일이었다.
‘싸워보지도 않고 이런 무기력감이라니. 왕에게서도 이런 위압감은 느껴보지 못했다. 그리고 저자들, 쿠사누스들이 저렇게도 강했던가?
그들은 아바돈의 강자들을 마치 마계 마수라도 때려잡는 것처럼 휩쓸고 있었다. 여기 있는가 하면 저기 있고 저기 있었는데 금세 사라져서 안 보인다. 날개의 돌풍에 휘말려 몸도 가누지 못하는 자들이 무슨 싸움을 하겠는가.
궁성의 부분이 깨어져 하늘로 솟구치고 이 곳 저 곳에서 하늘도 뚫어버릴 듯한 화염 기둥이 기세 좋게 솟구쳤다.
수호자는 지금 잠에서 깬 고르곤이 땅 위로 올라오길 팔짱을 낀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자신이 생각해도 한심한 노릇이었던지 신나게 싸우고 있는 쿠사누스와 라미레스를 부러운 듯 쳐다본다. 그 역시 메타트론의 본성인 싸움을 즐기는 면이 있었던 것이다.
“마령의 본주는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모습을 보이지도 않는군.”
수호자는 마령의 본주가 자기만큼이나 한심하다고 느꼈던지 혀를 끌끌 찬다.
마르쿠제는 대충 돌아가는 상황이 자신들에게 불리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기습이었는 데다가 상대들이 너무 강했다. 막 라미레스에게 절벽 중간쯤에 몸뚱이가 처박힌 바시류스 하나가 보였다.
마르쿠제는 중얼거렸다.
“이렇게 끝나는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이라 자신했던 아바돈의 전력은 절대자들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나온 소리였다. 한참이나 잘못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파천은 마령의 본주가 아직도 나타나지 않음이 이상했다.
하기오스 셋도 막 나타나 카란과 페리칸, 카포와 접전을 벌여 갔다.
“마령의 본주는?”
마르쿠제의 웃음은 허탈한 심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왕께서 뭘 하시는지 알지 못한다. 왕께서는 이곳에 안 계신다. 그 분은 때때로 우리들 곁을 떠난다.”
“그가 이곳에 없다는 말인가?”
“그걸 아고서 이곳을 기습한 것이 아니었나?”
“이런!”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수호자도 어이없어 한다.
“운이 상당히 좋은 자군.”
마르쿠제는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수호자는 더 이상 다른 곳에 한눈을 팔 수 없었다. 보기만 해도 끔찍스런 괴물 고르곤이 땅 위로 그 거대한 몸을 일으켜 세웠기 때문이다.
“크르르릉.”
고르곤은 닥치는 대로 물고 뜯고 삼킨다. 그놈의 마안은 아바돈의 강자들을 옴짝달싹못하게 했다. 그놈에게는 적도 동지도 없다. 그 거대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빠르기까지 하니 갑자기 사람들 간의 싸움이 멈춰버리고 말았다.
수호자는 머리를 짚으며 난감해했다.
“결국 죽여야겠군. 이놈아, 이쪽이다, 이쪽.”
수호자의 손에서 무엇인가가 번쩍했다.
푸악
“크아아앙.”
고르곤의 입이 쩍 벌어지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다.
제 흉폭성을 못 이겨서가 아니라 최초의 고통에 대한 예민한 반응이었다.
“이쪽이라니까.”
쉬익
푸악
“크아아앙.”
수호자의 손에서 번개의 형상과도 같은 빛의 결정체가 생겨나 고르곤의 몸통 깊숙이 박혀들었다.
“녀석, 얼마나 아플까? 그래도 어쩌겠니? 네가 살아서 해를 입힐 걸 생각하니 널 죽여주는 게 널 위한 길인 것 같으니.”
그러면서도 단숨에 죽일 방법이 없는 건지 그럴 생각이 없는 건지 장난처럼 창을 던지고만 있다. 푸른색 액체를 온몸 가득 흘리고 선 고르곤이 그제야 수호자를 발견해냈다.
“크앙.”
고르곤이 하늘을 날았다. 소군이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어울리지 않게 우아한 동작이네.”
수호자의 전신을 거대한 광채가 감싸고 있었는데 그것이 갑자기 쭉 늘어난다. 짓쳐들던 고르곤이 더 높은 하늘로 통겨졌다. 수호자가 말했다.
“이런 때엔 하늘도 눈물을 흘리는 편이 나으리라. 잘 가거라, 고르곤.”
한 덩이 불꽃같았다. 그렇지만 그건 단지 불꽃이라고만 할 수 없는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오색영롱한 빛의 결정체를 전신에 두른 채 수호자의 신형이 그대로 고르곤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쾅
귀가 멍멍할 정도의 큰 소음이 먼저였다. 하늘이 새파래졌다. 푸른 비가 갑자기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고르곤이 흘린 피는 수호자의 염원처럼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되어 땅을 적셔갔다.
수호자는 자신이 할 일을 마쳤으니 더 이상 수고할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고르곤이 폭발하던 그 높이에서 물끄러미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상대로 도주하는 자들이 속출했지만 아무도 그곳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파천이 쳐놓은 막은 장담처럼 뚫을 수 없는 것이었음이 증명되었다.
심지어 페리칸과 싸우던 하기오스 하나가 도주하다 퉁겨 져 나오기 까지 했으니 다른 이들이야 오죽할까! 수호자는 궁금했다.
‘나도 뚫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수호자는 시험해보지 않았다. 궁금한 건 궁금한 대로 그냥 두기로 했다.
소멸을 부정해버린 이단자들의 집단. 누구나 두려워마지 않는 광적이 천재들의 집단, 대적자들의 실험정신은 오늘도 쉬지 않고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들이 사로잡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갖가지 생체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다.
자르고 꿰매고 다시 잘라내기를 반복하는가 하면 그들이 만들어 낸 생명체를 이식해보기도 했다.
이들의 실험이 추구하는 최후의 목표에 부작용이 없는 소멸극복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소멸극복은 여러 가지 부작용들을 낳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육체의 소실이었다.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점차 약화되는가 싶더니 부패했다. 그리고는 얼마 가지 않아 한줌씩 몸에서 떨어져 나간다. 이들의 연구가 벽에 부딪힌 것이다.
그러던 차에 아바돈에게서 건네받은 보물은 그야말로 마른 땅에 그토록 기다리던 단비나 마찬가지였다.
이후로 대적자 들은 외부와 차단한 채 연구에만 매달려 왔다. 그들은 소멸극복뿐만 아니라 한 단계 더 나아가 아바돈이 추진해 오던 마신보다 더 월등한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일에 착수하게 된다.
대적자 들의 지도부는 그것이 성공하면 영계의 판도가 자신들을 중심으로 해서 뒤바뀔 것이라 확신했다.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생명체는 지금껏 그들이 겪어봤던 어떤 성질의 힘으로도 소멸시킬 수 없다고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하고 있었다.
“육신의 견고함은 최 극에 다다라 있습니다. 그 기능까지도 최상입니다. 마신들과 견주어 보아도 나으면 나았지 결코 못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의 지적 수준입니다. 적을 구분하거나 명령을 이행할 최소한의 판단력조차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른 이가 말을 받았다.
“그럼 실패네요.”
“아닙니다.”
대적자의 일곱 수뇌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의 손에는 저마다 홀이 들려 있었다. 그들 중에는 플로렌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플로렌서가 지금 다른 견해를 피력하였다.
“최근에 우리 연구의 핵심은 바로 그 부분이었습니다.
그동안 우리들은 세력 간의 균형 가운데서 여러 이득을 챙겨 왔습니다. 마계와 제왕, 아바돈은 말할 것 없고 수호자에게서도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지요.
여러 존재들은 우리의 실험을 예의 주시해 왔었고, 그 동안 많은 이들을 소멸 극복시키는 이 위대한 일에 알게 모르게 동참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서 건네받은 보물들은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만……얼마 전 우리로서도 기대하지 않았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번 연구의 실질적인 책임자인 플로렌서가 기대에 찬 수뇌들의 호기심을 한껏 자극시켰다.
“그게 대체 뭐요?”
“옛 용이 만든 알파이온에 대해서 들어보셨을 겁니다. 알파이온은 원령을 결집시키고 통과시키는 일종의 출구 역할을 하는 보물입니다.
공간 중에 가득한 여러 성질의 힘 중 특정한 성질만을 추출해낼 수 있다는 이런 류의 보물은 지금껏 초대제왕과 옛 용만이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옛 용이 알파이온을 만들었다면 초대제왕은 바로 이것을 만들었지요.”
플로렌서의 손 안에는 푸른 기운이 도는 주먹 크기의 구슬이 들려 있었다.
“이건 제왕에게서 메타트론에게로 갔다가 다시 제왕 마르시온에게 건네진 것이었습니다. 제왕의 검들 중 한 자루에 박혀 있던 장식용 구슬에 지나지 않았지요.
아무도 이것의 가치를 몰랐었습니다. 저희들에게 다시 왔지만 저희 역시 얼마 전까지 이 구슬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모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정말 우연이었습니다. 실험 도중 생명체가 과도한 힘을 이기지 못해 파괴되었을 때 순간적이나마 복원되는 현상이 일어났었습니다. 보고서도 믿기 힘든 장면이었죠.
저희들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려 무던히도 애썼지만 결국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낡은 검 집에서 저절로 떨어진 구슬이 우연찮게 폐기된 생명체에 떨어졌고 그 순간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습니다. 들어와라.”
플로렌서가 밖을 향해 외치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수하들이 폐기된 지 꽤 지난 듯 보이는 부패한 생명체를 안으로 들였다.
플로렌서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구슬을 생명체의 머리 부분에 올려두었다. 수뇌들의 관심은 이 순간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포르르릉
기이한 소리가 먼저 났다. 푸른 구슬이 더욱 진해지며 그 표면을 타고 물기가 번져 나왔다. 그 액체는 곧 생명체의 머리 부분에 떨어졌고 그 순간 정말이지 신기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새살이 돋고 윤기가 흐르며 팽팽해져 갔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쩍쩍 갈라지고 떨어졌던 부분이 저절로 다물어지며 매끈해졌다.
좀더 지나자 피부가 파르스름한 윤기가 돌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괴 생명체가 두 눈을 번쩍 뜨는 것이었다.
“헉.”
“저, 저럴 수가.”
“믿기 힘든 일이야.”
저마다 지금의 곤혹스런 심정을 토로하고 있는데 플로렌서의 눈이 차갑게 빛을 발했다.
“크악.”
괴 생명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급기야 수뇌들을 향해 살기를 번뜩였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번쩍
괴 생명체는 도약함과 동시에 한 명을 발기발기 찢어놓고 있었다.
“아니 저, 저놈이.”
실내는 놀람과 공포가 뒤범벅이 되어 극심한 혼란에 잠겨버렸다.
괴 생명체의 공격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차례대로 수뇌들을 죽여 갔다. 그것은 오로지 살해의 몸짓만을 내보였고 조금도 동작을 쉬지 않았다.
수뇌의 시체들이 아무데나 처박히면서 어떻게 손 써볼 수도 없는 밀폐의 공포가 실내를 순식간에 채워 나갔다. 나머지도 누구 하나 그것으로부터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프……플로렌서, 어서 저놈을……”
플로렌서는 웃었다. 하얀 이를 드러내놓고 고개를 젖히며 웃었다.
“하하하하.”
여자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호쾌한 웃음이 그의 심중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마지막 수뇌마저 허무하게 괴 생명체의 희생물이 되었다.
더 이상 공격할 대상을 찾지 못한 괴 생명체가 플로렌서를 발견했다. 하지만 좀 전까지와는 눈빛부터가 달랐다. 플로렌서의 앞에서는 얌전하게 고개를 조아리지 않는가.
“어리석은 자들. 이것이 발견된 건 오래 전의 일. 내게 필요한 건 시간과 원형체에 버금가는 강인한 육체였다. 너희들이 눈치 채기 전에 전력을 갖춰놓을 시간과 이 신비한 힘을 견뎌낼 육체 말이야.
이제 그 두 가지가 모두 갖춰진 이상 너희들과 함게 할 이유가 없다. 나는 드디어 최고가 된 거야. 아깝군. 이것들을 다시 살려낼 수족으로 부리고 싶지만 아쉽게도……그럴 만한 시간이 없구나.”
죽은 수뇌들의 시체를 강하게 만들 수는 있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소모될 것이었다.
플로렌서가 한참 득의에 차 있을 때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메르센느와 딜타이였다. 메르센느가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모두 처치했습니다.”
“이제 이곳을 떠나 종적을 감추기만 하면 되는 건가?”
딜타이의 얼굴에 희색이 가득했다.
“그렇습니다. 영계대전쟁의 서막이 오른 이상 우리들은 숨죽이고 마지막을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현재 확보된 전사들은 얼마나 되나?”
“완성된 것은 백 명에 불과하지만 남은 실험 대상은 천 명이 넘습니다.”
“흐음, 좀더 기다리며 전력을 채울 걸 그랬나?”
“아닙니다. 더 지체하다가는 다른 세력의 정보망에 걸려들 수도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적기라고 판단됩니다.”
“천 명을 다 데리고 가는 건 무리야.”
메르센느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서 지금 그들 중 최상의 상태인 자들만 가려내고 있는 중입니다. 곧 작업이 완료될 것입니다. 나머지는……어쩔 가요?”
“그걸 몰라서 붇나? 모조리 처치해버려. 그라고 완벽하게 우리의 종적을 지워야 한다. 수하들에게 맡겨두지 말고 가서 너희들이 직접 지휘해라.”
“네.”
“네.”
메르센느와 딜타이가 사라지고 나자 플로렌서는 흡족한 나머지 구슬을 손 안에 쥐고 이리저리 굴리며 의자에 않았다. 그녀는 지금 한 사람을 떠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라치오, 네 결행이 조금만 더 빨랐거나, 늦었어도 네게는 좋을 뻔 했는데……넌 시기를 잘못 택했어. 알아낸 것은 너였으나 누리는 건 나다. 네 운이 부족함이니 누구를 탓할 것인가?’
대적자 들을 찾아 나섰던 리치오와 쿤사가 플로렌서에게 억류되어 있었다. 라치오가 무한계를 떠돌며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무엇인가를 찾아다니는 데엔 특별한 사연이 있었다.
대적자들이 영체복제와 영혼전이에 성공해 어느 정도 소멸을 극복하게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대적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무한계의 메덴이 중심이 되어 영계 전체를 선동한 결과였다. 그리고 대적자들을 무한계 밖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하게 된다. 그 이면에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은밀한 사건이 숨어 있었다. 대적자들이 이단이 된 배경도 라치로와 관련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영계에 기억소멸을 극복한 이는 꽤 되었지만 육체의 죽음 까지 극복한 이는 없었다. 하지 이들의 등장과 아바돈의 개입으로 인해 그런 자들이 늘어 가기 시작했다. 그런 흐름이 본격화되기 전의 초기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각 차원계의 장자들이 소멸극복을 위해 대적자들을 접촉했다. 대적자들은 소멸극복의 요구를 처음엔 묵살했다. 천재들의 자존심이 그렇듯 완벽하지 않은 것을 세상에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이 진정한 이유였다. 사지만 이것이 결국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마로 그때 대적자들의 진영 쪽에서 꽤 영향력 있는 인물이 무한계에 동조해 온다. 그의 증언은 대적자들을 이단으로 몰아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배신은 대적자들이 방비할 시회를 상실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 배신자가 다름 아닌 라치오였다.
그가 자신의 동류들을 배신하게 된 결정적인 발단이 바로 현재 플로렌서의 손에 쥐어진 제왕의 보물이었다.
그 신비한 효능을 최초로 알아낸 라치오는 더 큰 욕심을 가지고 만다. 잘만 이용하면 절대자로 군림하는 건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문제는 자신이 조직에 속해 있고 그 조직은 다른 곳들과 달리 지극히 폐쇄적이라는 것. 변심이나 이탈을 용납하지 않는 철저란 감시 체제가 문제였다.
혼란을 틈 타 그는 일을 벌였고, 대적자들의 무리 줄에서 자연스럽게 이탈할 심산이었다. 그런데 그가 막 자신의 의도를 성공시키려는 찰나에 그는 위험에 처하게 되고, 제왕의 구슬은 이미 수중에서 사라진 뒤였다.
일단 그는 몸을 피하는 데 급급해야 했다. 무한계로 잠입해 전사의 신분으로 또는 사냥꾼으로, 떠돌이로 지내며 기나긴 시간이 흘러갔다. 그는 그때까지도 제왕의 구슬을 강탈 해 간 이가 누구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처음엔 대적자들의 수뇌 중 하나일 것이라 예상하다가 후에 그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바돈이 대적자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초조함을 억누르고 기회를 엿보았다.
‘그 신비한 능력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초대제왕과 같은 원령체거나 그 정도로 견고한 육체의 소유자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진정한 효력을 발휘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그걸 알고 있었기에 나는 참고 기다릴 수 있었다. 대적자들이 다시 세상에 나오길.
그리고 아바돈과 제왕들까지 들썩이는 걸 보고 드디어 기회가 왔음을 알았다. 문제는 그것을 누가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내지 못했다는 것.‘
그러던 라치오가 대적자들 중 하나일 것이라 확신하게 된 것은 아바돈이 만들어 낸 마신들의 신체가 훼손되는 걸 보고 나서였다. 더군다나 대적자들을 가장 먼저 음지로 숨어들었었다. 이런 이유로 라치다나 대적자들은 가장 먼저 음지로 숨어들었다. 이런 이유로 라치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하필미면 플로렌서에게 걸려들다니.’
쿤사와 라치오가 대적자들을 찾아 낸 것까지는 좋았다.
그리고 마신들을 능가하는 새로운 생명체가 완성되어 있음도 확인했다. 잠입해서 이 곳 저 곳을 조사하던 중 이 모든 일을 책임지고 추진하고 있던 플로렌서에게 덜미를 잡히고 만다.
그는 사로잡히고 나서야 그녀의 손에서 제왕의 구슬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음을 보았던 것이다. 모든 염원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기도 했다.
‘플로렌서……설마하니 너였을 줄이야.’
플로렌서가 라치오와 쿤사가 억류되어 있는 곳으로 왔다.
그녀는 모든 일을 만족스럽게 끝낸 포만감으로 기분이 매우 홉족해 있는 상태였다. 라치오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억울한가?”
“퉤.”
가까이 다가온 플로렌서의 얼굴에 라치오의 침이 가 들러붙었다.
손으로 쓱 닦아낸 플로렌서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이 구슬의 이름을 아직 정하지 못했단 말야. 플로렌서? 아니면 라치오로 할까?
네가 바로 내가 그토록 찾았던 그 라치오일 줄이야. 하하하하, 내 손 안으로 자진해서 굴러 들어와 주니 너무 고맙군.“
쿤사는 체념한 듯 두 눈을 질끈 내리 감았다.
‘모든 게 끝났다. 욕망의 종점이 이런 신세라니.’
“그 구슬은 제왕의 능력으로 만들어진 것. 대적자들 중에서도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네가 과연 그 구슬을 완전하게 제어할 수 있을까?”
라치오의 말처럼 플로렌서도 그런 근심을 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사용해 본 결과 구슬을 사용하는 데 별다른 능력이 필요치 않음을 알게 되었다. 구슬에서 흘러나온 액체를 흡수하여 새롭게 회복한 존재는 구슬을 지닌 자의 노예가 된다. 그걸 누가 지니고 있는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걱정이 되기도 했다.
“네가 과연 그걸 지킬 능력이 있을까? 구슬에 그런 효능이 있음이 알려지면 너는 바로 죽은 목숨이다. 절대강자들이 널 내버려 둘 리가 없지. 그것만 있으면 세상을 지배하는 것쯤 쉬운 일이니까.”
“그래, 맞아. 네 말대로다. 이것으로 난 세상을 지배한다. 그렇게 될 거야. 이제 곧 큰 전쟁이 시작된다. 그럼 내 노예들은, 막강한 노예들은 지천에 가득해지겠지. 물론 제대로 만들어진 전사들에는 비할 수 없겠지만 잠시 써먹기에는 그만한 자들도 없지.
자신이 있을 때 세상에 나올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말 야.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네 우려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이 사실을 아는 이는 너희들까지 포함해서 단지 다성 불과하다. 그 숫자 역시 곧 줄어들겠지만 말 야, 하하하하.”
라치오는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결국은 그 모두를 죽일 것이라 여겼다. 충성을 다 바치는 수하들까지.
“그 구슬의 비밀을 하나 더 알려줄까?”
라치오의 입가에 진득하게 매달린 미소의 의미는 아리송했다.
“비밀? 그런 게 또 있을 리가 없다.”
“아니! 있다.”
“흠, 그게 뭐지?”
“그냥은 말해 줄 수 없다.”
“하, 어이없군. 네 노력이 가상하다만 내가 네 말을 믿을 거라 여기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술수치고는 너무 유치하군.”
“과연 그럴까? 그 구슬을 너처럼 그런 식으로 계속 사용하다간 얼마 가지 않아 치명적인 상태가 될 텐데도……관심이 없나보군.”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플로렌서의 내심은 한참이나 치열하게 갈등하고 있었다. 뻔히 보이는 수작질인데도 넘겨버리기엔 찜찜했다.
“자, 이제 그만 죽여라.”
프로렌서는 라치오의 뻔한 수법에 그만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건 그녀 역시 아직 구슬에 대해 아는 것이 지극히 적다는 것 때문이다.
“내가 널……살려줄 거라 믿나?”
‘넘어올 수밖에 없지.’
“살려 줄 리가 있나? 내가 살아나게 되면 널 노릴 텐데……그런 위험을 감수하려 할까?”
라치오의 배짱은 정말 대단했다. 자신의 생명을 가지고 도박을 감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플로렌서도 대단하긴 마찬가지였다.
“널 살려주지. 대신 널 충실한 내 노예로 만들어 주겠다. 넌 영원히 사는 게 아니라 죽었다 살아나기를 끊임없이 반복하게 될 것이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그보다 더 저주스런 일도 없었다.
“이, 이……지독한 것!”
“네가 자초한 거야.”
플로렌서의 의도는 간단했다. 라치오를 일단 먼저 죽인 다음 제왕의 구슬로 살려낸다. 그러면 플로렌서의 충실한 노예가 된다.
하지만 라치오는 그 강력한 힘을 견디지 못하고 또 죽게 될 것이다. 그러면 또 살리고…… 이 짓을 반복하겠다는 의미였다.
바로 그때였다. 실내에 라치오와 쿤사, 프로렌서가 아닌 다른 음성이 흘러들어와 모두를 얼어붙게 했다.
“그게 그런 효능이 있단 말이지? 의외의 수확이로군.”
플로렌서는 말할 것도 없고 라치오와 쿤사의 표정까지 놀람으로 굳어버렸다. 실내에 나타난 이가 누구인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악한 기운. 뼛골까지 스미는 한기는 몇 번인가 겪어 본 적이 있는 마령의 기운이었다. 이 정도로 강력한 기운이라면 마령의 본주 이외에는 없다.
그 순간 플로렌서는 거의 본능적으로 밖을 향해 뛰쳐나갔다. 그렇게 빠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신속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마령의 본주 앞에서는 재롱에 불과했다.
“커억.“
어느새 플로렌서의 목 줄기는 마령의 본주 케풀러의 손아귀에 움켜져 있었다.
“이러면 곤란하지. 내 앞에서 도아가게 하면 내 체면이 뭐가 되겠나? 안 그래?”
플로렌서는 재빨리 염두를 굴렸다.
‘이 자의 손에서 살아나기는 틀렸다. 그렇다면?’
이때 케플러는 플로렌서의 꽉 움켜 쥔 손 안의 푸른 구슬을 주시했다.
“흐음, 확실히 대단해 보이기는 해. 이것만 있으면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다는 말인데……그러니 너 같은 하찮은 것까지 영계경략의 야심을 갖지.
좋아, 이런 귀중한 선물을 해준 애가로 네 목숨을 더 연장시켜주겠다.”
그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대적자들 중 핵심의 수뇌는 모두 죽고 살아 있는 단 하나, 프로렌서를 이런 식으로 잃는 건 손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플로렌서를 살려두면 여러 가지 이득을 기대할 수 있었다. 특히 제왕의 구슬을 견딜 만한 전사들을 제조하는 일은 이제 그녀가 아니면 누구도 해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런 내심을 모를 리 없는 플로렌서는 좀 전보다 한층 침착해져 있었다.
“이것부터 놓고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이제야 여자다운 부드러움이 표현되는 건 왜일까? 케풀러는 과장된 몸짓을 하며 그녀를 억제하고 있던 손을 풀었다.
“아, 이런 실례를. 괜찮은가?”
플로렌서는 어디다 그런 화려한 웃음을 숨겨 두고 있었던지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제왕의 구슬을 손에 꽉 움켜쥐고 있었다.
“괜찮아요. 그런데…..여긴 어쩐 일이시죠?”
“그 구슬……이제는 내 손에 쥐어져 있어야 마땅할 것 같은데. 그대도 물론 동의하겠지?”
케플러의 관심은 오직 그 것뿐이었다. 플로렌서는 샐쭉 웃으며 손안의 구슬을 들어 보였다.
“이걸 가지시려 구요?”
“당연하지 않느냐? 나 말고 또 누가 그것 소유할 자격이 있을까.”
“흐음, 전 생각이 좀 다른데 말이죠.”
“음?”
“이걸 가지려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셔야 해요.”
“뭘 원하지? 무엇이든 말만해. 그 희한한 구슬과 널 한꺼번에 얻는 거라면 세상인들 두 쪽으로 나누지 못할까?”
마음먹었다면 벌써 구슬은 그의 손 안에 쥐어져 있었을 것이다. 케플러는 서둘지 않았다. 수하로 거두어야 할 자에게 강자의 여유를 보이는 것도 멋스런 일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은 두 쪽으로 나눌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이건 하나일 때 의미가 있어서……말이지. 가지려면 가져봐.”
위익
돌발적인 행동이었다. 플로렌서는 구슬을 출굴ㄹ 향해 있는 힘껏 내던졌다. 하지만 구슬은 빠르게 멀어지다 더 빠르게 다시 되돌아오고 있었다.
케플러는 여전히 웃음을 띤 얼굴로 플로렌서를 바라보고 있다.
“허허, 이런 식으로, 기발한 방법으로 줄줄은 몰랐군.”
플로렌서는 절망했다.
‘이 자 앞에서 난 처분만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약자였다. 하지만!’
콰쾅
벽이 터져 나가고 사방에서 플로렌서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걸작품들이 무더기로 튀어나왔다. 플로렌선 케플러의 손아귀에 목줄이 잡혔을 때에 이미 그들을 준비시켰고 구슬을 던지기 직전 케플러를 공격할 것과 제왕의 구슬을 지키라는 명령을 내려두었다.
케플러는 마령의 본주답게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여유가 넘쳤다.
“재미있는 성격이군. 이렇게 거창하게 해야 이 순간이 더욱 의미 있나보군. 좋아, 아주 재치 있는 수하를 두게 되었으니 이 정도 수고쯤이야 해야겠지.”
케플러의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강풍이 휘몰아치며 몰려드는 자들을 떠밀어버린다. 그것만이 아니다. 바람결 속에는 무엇이든 잘라버릴 수 있는 예리함이 숨어 있었다. 하지만.
“이런!”
퍼퍼퍼퍽
잠시 퉁겨나는 가 싶더니 더 기세가 올라 달려든다. 뿐만 아니라 중간에서 구슬마저 한 놈이 가로챘다. 곧바로 몇 놈인가가 그 주위를 보호하고 눈을 부릅뜨며 사방을 경계한다. 그걸 목격한 케플러는 기가 막혔다.
“정말로……단단한 놈들이군. 마신들과는 비교도 안 되겠는데? 그렇다면!”
케플러의 비장의 무기가 등장했다. 아무렇게나 대충 손을 흔들고 있었지만, 그 동작이 마치 허공에다 젖은 손을 터는 것 같았지만 그 위력은 좀 전과 비교할 수 없었다.
투명검!
마령을 근원으로 삼은 투명검은 다가오던 몇 놈의 눈 사이를 흔적도 없이 관통해버렸다.
브르르
투명검에 적중당한 전사들의 한결같은 반응이었다. 전신을 떨다가 서서히 그 자리에 주저앉아 갔다. 그렇지만 그들의 육체는 여전히 그 상태 그대로였다.
“흐음, 이대로 없애긴 너무 아까운데.”
그는 구슬을 쥔 놈에게로 빠르게 접근했다. 구슬만 손에 넣으면 굳이 이런 짓을 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놈은 다른 동료들의 보호를 받으며 밖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케플러는 막 밖으로 뛰쳐나가다 아직까지 그 자리에 얼이 빠져 서 있는 플로렌서를 잠시 쳐다보았다.
그 순간 플로렌서는 저항하지 못하고 마령에 감염되었고, 그 자리에 맥없이 픽 쓰러지고 말았다. 케플러는 구슬을 가지고 도주한 놈을 따라 밖으로 뛰쳐나갔다.
라치오가 다급하게 쿤사를 바라본다.
“어서 서둘러.”
“제왕의 구슬은 이대로 포기할 거야?”
“어쩔 수 없다. 저놈이 나타난 이상 살아남는 것만도 천행이다.”
쿤사와 라치오는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감시의 눈길이 없는 바로 이 순간을.
쿤사가 술사임을 간과한 플로렌서의 실수가 살아날 길을 열어준 것이다. 쿤사의 몸이 갑자기 희미한 연기처럼 변하더니 묶어놓은 사슬에서 빠져나온다. 그리고는 바로 라치오의 사슬마저 분리시켰다.
쿤사는 라치오의 손을 잡고 빠르게 술법을 전개했다. 둘의 모습은 투명해지더니 급기야 그 자리에서 퍽 하고 사라져버렸다.
얼마 안 있어 케플러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손에는 푸른 구슬이 하나 들려 있었다. 뒤를 따라 전사들이 한결 얌전한 태도로 조용하게 걸어 들어왔다. 대적자의 생존한 무리들을 하나 남김없이 소멸시킨 이후였다.
그의 관심은 쓰러져 있는 플로렌서에게로 향했다.
“네가 있으니 이런 놈들을 얼마든지 만들어내겠구나. 이곳의 동태를 살피러 왔다가 생각지도 못한 소득을 올리는구나.”
잠시 주변을 두러보던 케플러가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가 허전했던 것이다. 자신이 꼭 했어야 할 일 중 하나를 빠트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의 시선이 벽면을 메우고 늘어져 있는 사슬에 가 멎었다.
“그러고 보니 이놈들이! 내 손을 빠져나갈 수 있다고 믿다니. 순진한 놈들이군.”
무엇이든 뒤끝이 깨끗해야 함을 주장하는 케플러로서는 이런 식으로 미적지근한 마무리는 원하지 않는다. 손을 대지 않았으면 모를까, 한 번 댄 이상엔 눈앞에서 얼쩡거리는 것들을
모조리 쓸어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이런 그의 관행이 모처럼 만에 지켜지지 않게 되었다. 마령의 급한 떨림을 감지한 것이다. 그는 즉각 닫아두었던 마령 인을 열었다. 그 순간 케플러는 등줄기가 쭈뼛해지며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이런 죽일 놈들이!”
아바돈의 군대가 맥없이 무너지고 고르곤이 피 떡이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그는 침울했다.”
“하나를 얻는 순간 다른 하나를 잃었단 말인가? 안 돼. 그럴 수 없다.”
그는 더 이사 망설이지 않고 그곳을 벗어났다. 그의 머릿속에는 더 이상 라치오와 쿤사에 대한 관심은 존재하지 않았다.
라치오와 쿤사는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숨어 있었다. 술법으로 결계를 치고서 무너진 벽 사이에 숨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도주해봤자 멀리 벗어나긴 틀렸고 이 방법이 그나마 살아남을 확률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들은 케플러가 사라졌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그러고 있을 참이었다.
파천과 마르쿠제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아니 그건 싸움이라고 불리기도 부적절했다. 단지 마르쿠제만의 싸움일 뿐이었다.
마르쿠제는 자신이 지닌 전력을 다 기울이고 있었지만 우위는커녕 어떤 위협도 가하지 못했다. 이처럼 무기력할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못해본 일이었다.
마령이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시켰음을 마르쿠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마령을 할 수 있는 한 폭주시켰다. 의도적인 이런 시도는 안정되지 못하고 불안하기 마련인 법. 이 상태가 지속될수록 마령화 되어간다는 걸 알면서도 마르쿠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여기서 무너져서는 안 되었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치른 대가를 생각하자. 어떻게 해서라도 이 위기를 모면하고 봐야 한다. 그래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마르쿠제는 아직까지 자신을 잡고 있는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나리, 더 힘주어 움켜쥐고 있었다. 그 집착을 끊어버리는 순간 자신의 존재는 무의미해진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
“지지 않는다.”
붉은 용이 마르쿠제의 전신을 휘감고 불길을 토했다. 불기둥은 몇 개로 나눠지며 천지 사방을 휘감아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생명체 같았다.
파천이 이채를 띤다. 너무도 눈에 익은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이 수법은!’
붉은 용이 불을 뿜는 것은 동일했지만 파천이 익히 알고 있는 위력과는 너무도 판이했다. 파천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는 어느새 마르쿠제의 뒤에 바짝 붙어서 있었다.
“이걸 누구에게서 전수받았나?”
마르쿠제의 전면에서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로 화려한 연출을 해대던 용이 한순간에 사라진다. 마르쿠제는 등줄기가 오싹한 느낌에 전율했다.
“으아아아.”
마르쿠제는 거의 발광 직전까지 다다라 있었다. 더 이상 두면 좋지 않다. 파천은 즉시 마르쿠제를 제압해 들어갔다.
광명이 마령을 억제하기 시작했다. 막 기세 좋게 피어오르던 마령이 순식간에 약화되고 마르쿠제의 주변에 만개한 꽃잎 같은 형상이 나타났다. 꽃잎이 봉우리를 다물기 시작했다.
“으어억.”
빛의 폭렬이 이어지고 마르쿠제의 전신을 따라 얇고도 투명한 막이 생겨났다. 그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파천이 다시 물었다.
“누구에게서 배웠나?”
“……”
마르쿠제는 이처럼 무참하게 꺾였다는 것이 너무도 분했던지 입을 앙 다물고만 있었다.
“말할 기분이 아닌가보군.”
수호자가 가까이 오며 물었다.
“왜 그래? 그게 뭔데 그러나?”
파천은 밝힐 수가 없었다. 연유를 말하고자 하면 자신의 연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냐, 눈에 익은 수법이어서 그랬네.”
수호자는 쿠사누스 등이 싸우는 것을 가리키며 파천에게 관여하지 않을 거냐고 물었다. 필요성을 못 느낀 파천이 고개를 끄덕인 순간이었다. 하기오스들과 싸우고 있는 셋 중에서 카포가 유난히 두드러져 보였다. 그가 특별한 활약을 해서가 아니라 그 반대의 상황이라서 그랬다.
“많이 벅차 하는군.”
파천의 지적처럼 지금 카포는 아주 죽을 맛이었다. 슬쩍 주변을 살펴보니 자신만이 밀리고 있는 것 같았다.
‘괜히 내 주제도 모르고 벅찬 상대를 골랐어.’
이제 와서 이런 후회를 해봐야 소용이 없었다. 싸우다 꽁무니를 빼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지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그는 주변을 슬쩍 돌아보다 라미레스가 눈에 번쩍 뜨였다. 더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이대로 가면 당할 건 뻔했다. 그렇다고 누구 하나 도움을 줄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그는 살기등등한 하기오스를 발견하고는 기겁하며 냅다 도주했다. 라미레스가 목표였다. 막 그노시스들 여럿을 한 번에 제압한 라미레스가 무엇인가 다가오고 있는 기세를 느끼고는 빠르게 돌아섰다.
“카포!”
뒤에서 맹렬하게 추격하고 있는 하기오스를 발견하지 못했다 해도 카포의 표정만으로도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갔다.
“크.”
라미레스는 마치 우연이라도 되는 양 하기오스의 전면을 막아섰다. 그걸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수호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제 몸 하나는 지켜낼 줄 아는군.”
하지만 수호자가 어찌 알았으랴. 한숨 돌리며 만만한 하기오스들의 수호자들에게 분풀이를 해내던 카포에게 또 다시 위기가 닥칠 줄은.
마신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어디 그렇게 꽁꽁 숨어있다 나타난 건지 한꺼번에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들이 나타나자 분위기는 일시에 반전되었다.
쿠사누스들 중 최강이라는 유스티안, 즉 아난다의 강력한 공격력도 견고한 마신체에게 손상을 주지 못했다. 예전보다 더 완성된 마신체는 아바돈이 심혈을 기울인 걸작품이었다.
마신들이 가세한 아바돈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마신들은 쿠사누스들을 위협하며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고 있었다. 하필이면 제일 약한 카포가 마신들의 가운데에 포위되고 말았으니 이를 어쩐단 말인가?“
카포는 이제 더 이상 살아날 길이 없음을 깨달았는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무려 열 명이 넘는 마신들이 물샐틈없는 포위망을 유지한 채, 그렇지 않아도 험악한 인상을 있는 대로 일그러뜨리며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호자가 다급하게 말했다.
“어, 저것 내버려두면 위험하……”
그 말이 끝맺어지기도 전에 파천의 한 손이 슬쩍 흔들렸다.
“……겠는데……으음, 무사하군.”
어이없게도 그 순간 아직까지도 눈을 질끈 감고 있는 카포가 자신의 앞에 긴장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수호자는 파천의 가공한 능력에 또다시 혀를 내둘렀다. 그 또한 타인을 공간 이동 시킬 수 있다. 하지만 저렇게 짧은 순간에 강제적으로 데려오는 건 자신 없었다. 자신이 다른 이를 특정한 공간으로 불러들이기 위해서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고, 더불어 상대의 동의가 있어야 했다.
헌데 파천은 이런 상식을 완전히 허물어버리고 있었다. 카포는 아무리 기다려도 별다른 변화가 없자 실눈을 뜨고 주변을 살핀다. 수호자가 빙긋 웃었다.
“자네는 여기 있는 게 아무래도 좋을 것 같은데……내 생각이 어떠냐?”
“흐으, 매우 합리적인 판단이시군요.”
카포는 이렇게 해서 또 한 번 죽음 앞에서 살길로 들어선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목을 슬쩍 만져보고서는 허탈한 표정이 되었다.
‘이처럼 살벌할 줄이야. 이거야 웬만한 강자들을 이름도 못 내밀겠군.’
카포는 파천이 왜 저들만을 대동하고 여길 왔는지 이제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여유를 찾은 하기오스들이 뒤로 물러났다.
아바돈의 정예들도 마신들을 앞세우고 의기양양해져 있었다.
마신들은 하기오스의 명령에 따라 진형을 유지한 채 서서히 압박해 들어왔다.
라미레스는 하기오스를 놓친 것이 아쉬웠던지 입맛을 쩍쩍 다시고 있었다. 그는 예전 마신들과의 일전을 경험해봤던지라 그들이 어느 정도로 질긴지를 알고 있었다. 쉽게 제거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쿠사누스들 중 아레나와 바로크 전사들의 표정이 급변에 급변을 거듭했다. 마신들 중 실종되었던 팡과 바로크가 보였기 때문이다.
“팡, 나야, 아레나. 날 알아보겠어?”
그래봐야 소용이 없었다. 그는 이지를 상실한 마신이었다.
바로크도 마찬가지. 바로크 전사들도 안타까움을 얼굴 가득 실어 보는 게 고작이었다.
한편 가름은 마신들 가운데서 실종된 단짝 두름을 찾느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만 보이지 않았다. 가름은 몇 번이나 찬찬히 살펴보다 끝내 낙심한 채 고개를 떨구었다.
쿠사누스들과 라미레스, 카란은 마신들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땅한 수를 찾아내기 전에는 함부로 뛰어들 일이 아니었다. 마신들의 수가 만만찮을 정도로 많은데다 아차 하는 순간 치명적인 상태가 될 수도 있었다. 신중해 질 수 밖에 없었다.
마령의 본주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리고 기습이 아닌 정면 대결이었다면 오히려 연합군측이 낭패를 볼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하던 수호자가 그 생각을 다시 정정했다.
‘파천이 마령에 영향을 받지 않은데다 투명검도 소용이 없으니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겠군.’
투명검의 이점을 살릴 수 없는 한 마령의 본주라도 파천에게는 힘들 거라는 분석은 수호자로서도 상당히 객관적이 기준에 근거하고 있었다. 이제는 파천이 나서야 할 때였다.
마르쿠제를 수호자에게 맡겨둔 채 파천이 앞으로 나섰다. 그가 전면을 차지하고 서자 마신들이 긴장한다. 그들은 하기오스의 심령적인 압박 가운데서도 주춤거리며 앞으로 나서길 꺼려했다. 파천이 한 걸음 내딛으면 마신들과 딱 그만큼의 거리만큼 뒤로 물러난다.
파천은 마신들의 상태를 다시 살폈다. 마신은 이지가 제압되어 있어 마령의 영향을 되려 상대적으로 적게 받고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쉽게 풀리겠군.”
파천은 그들 중 팡과 바로크에게 특별히 집중했다.
“너희들이 설 자리는 그곳이 아니다.”
제일 뒤에 처져 있던 하기오스들 중 하나가 소리쳤다.
“왕께서 안 계신 틈을 타서 기습을 하다니. 이러고도 네가 광명을 얻었다 자처할 수 있겠느냐!”
“오해하고 있군. 너희들을 멸할 것이었으면 굳이 다른 이들을 대동할 이유도 없었다. 마령의 본주는 내 몫이지만 너희들은 이들의 몫이다. 내가 할 바가 있고 이들이 할 일이 따로 있다.
그의 운이 다하지 않았으니 어찌하겠는가마는 그가 숨을 곳은 어디에도 없다.
너희에게는 마침이 결정되지 않았으나 그는 소멸을 면치 못하리라.”
“큰 소리 칠 것 없다. 마신들만으로도 너희들 정도는 끝내버릴 수 있다는 것 보여주겠다.”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대치 상황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카포에게 수호자가 물었다.
“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러지?”
“마신들이……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네요.”
“저 사람도, 짐승도 아닌 것들이 말이냐?”
“네? 아네.”
“흠, 참나 너나 저 허풍쟁이 하기오스나 같은 수준이군.”
“네?”
“보기엔 그럴 듯하지만 마신들은 고르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
“그런 수호자님은 저들을 쉽게 제압할 방도라도 있으신가요?”
“방도나 마나 내게 그럴 기회조차 오지 않을 것 같으니 쓸 데 없는 호기심은 버려라. 어찌 된 게 그렇게 보고도 파천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모르다니 참 한심한 일이야.”
“……”
파천은 마신들을 한 차례 쓸어보고는 다시 하기오스들을 주시했다.
“네가 먼저 당하여야겠으나 이들이 먼저다. 잠시 기다리고 있어라.”
“닥쳐라. 마신들이여. 어서 그놈을 깔아뭉개지 않고 뭘 하고 있느냐? 너희의 강한 팔로 놈을 잘게 부수어 버려라.”
마신들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
한 번도 이런 일리 없었던지라 하기오스는 당황했다. 그는 다시 소리쳤다.
“마신들이여. 내 명령을 들어라. 너희의 적이 눈앞에 있다. 이때를 위해 너희가 태어났음이니 가진 힘을 모조리 쏟아 부어라.”
여전하다. 통제할 수 없는 마신들은 가치가 없다. 그냥 특별하게 몸뚱이만 단단한 구조물과 다름없다.
하기오스는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다른 하기오스들을 쳐다보았다. 우라노스의 하기오스가 모든 일이 틀어졌다고 판단하고서는 체념하며 말했다.
“마신들이 저자를 두려워하고 있소. 심령이 제압당한 자들이 더 큰 두려움을 주는 상대를 만났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 역시 광명은 마령의 천적이 틀리 없는가 보오.”
조금 전 까지 기세등등하던 프뉴마의 하기오스가 이 모든 일이 그의 책임이라도 되는 양 쏘아붙였다.
“그럼 어쩌자는 말이오? 투항이라도 하자는 말이오?”
그들의 대화 중에 파천이 끼어들었다.
“너희들에게는 그런 자비가 허용되지 않는다. 너희가 선택할 것은 소멸뿐이다.”
단호했다. 에레츠의 하기오스가 발악하듯 외쳤다.
“투항은 무슨. 죽더라도 아바돈의 총수답게 장렬하게 산화합시다. 아바돈이 이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모두 전멸한다 해도 지금의 희생은 영원토록 기억될 것이오.”
그들은 정말 이런 순간까지도 저런 대사를 남발하고 싶은 걸까? 라미레스가 코끝을 찡긋했다.
“정말이지 못 봐주겠군. 말귀도 어쩌면 저렇게 못 알아듣고, 상황 판단은 왜 저리 느린지 모르겠어. 저런 자들을 부려먹어야 하는 비밀차원도 속 깨나 썩었겠어. 그러니 마령의 본주인가 하는 자를 내 세웠겠지만.
파천의 말을 모르겠나? 전부가 아니라 너희만 소멸시킨다고. 알겠어? 다른 놈들은 투항하면 살려주고 그렇지 않다 해도 제압만 할 거라고……아직도 모르겠나?
때려 죽여도 시원치 않지만 너희를 살리라는 명령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생고생하고 있건만 아직도 그것조차 모르다니 정말 오늘 기분 더럽군. 파천, 지금이라도 명령 바꿀 생각은 없나?”
라미레스는 아바돈이라면 치가 떨리는 이 중의 하나였다. 살려두면 나중에 또 무슨 짓을 벌일지 장담할 수 없는 족속들이었다.
“아니, 달라지는 건 없다. 저들은 돌아갈 곳도 더 이상 기댈 곳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자연스럽게 전체와 동화되게 되어있다. 그럴 기회는 저들에게도 주어져야 마땅하고.”
라미레스는 속으로 툴툴거렸다.
‘너는 이놈들 용서하는 게 속이 편한지 몰라도 난 그렇지가 않단 말이다. 에잉, 정말 못해 먹겠군.’
파천이 얻은 광명이 이럴 때는 원망스럽기 그지없었다. 파천의 의지가 마신들을 제압해갔다.
그렇지 않아도 두려움에 전신을 꼼짝 못하고 있던 마신들은 별 저항 없이 얌전하게 모든 걸 받아들이고 있었다.
“뭣들 멀거니 부고 있는 거야! 당장 놈들을 쓸어버려.”
뭔가 찜찜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음을 간파한 우라노스의 하기오스가 즉각 아바돈의 군대에 다시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때 파천의 적극적인 개입이 시작되었다. 하늘에서 두루마기를 펼쳤는가? 마신들을 한꺼번에 가두고도 남을 거대한 장막이 아바돈의 눈앞을 어지럽혔다.
그들은 아무리 전진해 보아도 일보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힘만 쓰고 있었다. 그 상태로 새로운 일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마신들의 정수리 부분에서 시커먼 묵연이 한꺼번에 뿜어져 나오며 하늘을 새카맣게 뒤덮었다.
털썩
털썩
저처럼 맥없이 쓰러지는 자들이 조금 전까지 그리도 완강하게 저항하던 마신들이라고 주군들 믿을 수 있으랴!
정말이지 제왕의 보물을 주고서도 볼 수 없는 기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마신들은 원래부터 대지와 하나였던 것처럼 얌전하게 드러누워 버렸다. 그들의 얼굴은 너무도 평온해보였다. 그간의 시달림을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잠시나마 안식의 달콤함을 누렸다.
찬 서리 맺힌 듯한 파천의 얼굴이 하기오스들을 직시했다.
아바돈의 군대는 이 순간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한 채 낙담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어떤 짓을 해본들 눈앞의 절대자를 범접치 못한다는 걸 깨달은 자들은 거부하지 않고 지금의 결과를 받아들였다.
하기오스들도 더 이상 달리 도망할 길도, 피할 방법도 없다는 걸 피부로 절감했다. 때가 온 것이다.
자신들의 무능하지만 충성스런 수하들을 훌쩍 타넘고 파천의 정면에 버티고 섰다. 우라노스의 하기오스가 패배를 시인했다.
“우리가 졌다. 하지만……우리의 신념이 진 것은 아니다. 옳은 길이라 해서 항상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힘이 네게 미치지 못해서, 하필이며 너 같은 이가 이런 시점에 나온 것이 저들의 복이겠지.”
그는 정말이지 그 무엇으로도 바꿔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고집불통이었다. 파천은 나무랄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른 하기오스가 말했다.
“지금의 현실이 서글플 뿐이다. 낙원에 돌아가 안식하고 싶었거늘 뜻을 이루지 못해 안타깝다. 정면대결을 포기했을 때부터 이 순간을 예감했었다.”
그가 말하는 낙원은 비밀차원을 이름이었다.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무엇도 부족하지 않고 그 누구도 억압하지 않으며 영원한 생명과 평안이 있는 곳. 그곳이야말로 하기오스에게는 낙원의 표상과도 같았다.
파천도 하기오스의 그런 심상을 어느 정도는 인정하고 있었다.
‘신이 없었다면……사랑의 충격이 없다면…… 그곳이야말로 낙원이라 불릴 만하지. 나도 예전엔 그렇게 생각했던 때가 있었느니.’
파천의 시선이 마지막 하나 남은 하기오스에게서 멈췄다. ‘너는 할 말이 없느냐? 라는 의미였다.
그는 교활한 눈빛을 한 채 아까부터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간사한 표정을 지으며 파천에게 제안했다.
“한번 더 기회를 줄 수는 없겠는가? 너는 어차피 비밀차원을 넘어서야만 뜻을 펼칠 수 있다. 우리 따위를 소멸시킨다 해서 얻을 이득이란 아주 적은 것이지. 어떤가, 내 제안이?”
다른 하기오스들은 에레츠의 하기오스가 한 말을 상당히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단 안 번도 불러서거나 뜻을 꺾어보지 않은 자신들이었다. 저런 비굴한 태도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쿠사누스와 싸우다 도주하려던 좀 전의 행동도 마침 이때 떠올라버렸다. 둘의 생각은 일치했다. 행동도 동시였다.
“네 마지막이 우리를 비참하게 하는 구나.”
“먼저 가서 기다려다, 곧 뒤따를 테니.”
두 명의 하기오스가 급작스럽게 펼친 공격을 나머지 하기오스는 감히 맞받지 못했다. 아니 그럴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퍼퍼퍼퍽
하기오스의 네 개의 팔이 허공으로 튀어 오르고 골육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너무도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파천은 그런 그들의 잔인한 살육을 담담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막을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파천이 말했다.
“시작하라.”
이제 둘만 남은 하기오스들은 이를 악물고 마지막 힘을 뽑아냈다.
최앙
슈슈슈슈
네 개의 팔이 허공을 기묘하게 휘저어 놓는 순간 그들의 전신을 둘러싸고 거대한 빛의 기둥이 땅에서부터 하늘을 향해 뻗어갔다.
“우우우우.”
장소성과 함께 그들은 파천에게로 힘을 집중했다. 온 하늘이 그들이 뿌려놓은 빛의 파편에 가려졌다. 파천은 그 전경을 느긋하게 감상하고 있었다.
‘아름답군.’
파천의 신형이 빛 무리에 감싸였다. 그를 압박해 오던 힘의 근원이 저절로 소멸한다. 자신들이 뿜어낸 대의 힘이 마치 그러기로 약속이라도 한 듯 자취를 감춰버리자 망연자실해 있는 두 명의 하기오스.
파천의 손바닥이 정면으로 날을 세우고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손장난이라도 하는 듯 무의미한 그 동작 뒤엔 가공할 힘의 작용이 숨어 있었다. 하기오스들의 주변 공간이 쩌억 갈라지며 그들을 삼켜버렸다.
“크아아악.”
“으어어억.”
뜨거운 열에 엿가락이 녹아들 듯 그들의 신형은 길쭉해지며 그 공간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여덟 개의 손이 허공을 휘저으며 안간힘을 쓴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움킨 것은 역시나 아무 것도 없었다. 사방이 고요했다. 전의를 잃은 아바돈도 쿠사누스들도 이 순간 절대자의 신위에 숨을 죽였다. 파천은 허허로운 눈길을 하늘 향해 하달되었다.
“대적자들을 정리한다.”
쿠사누스들과 라미레스와는 달리 카란의 얼굴엔 아까부터 어둠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붉은 용! 분명 그건 붉은 용이었다. 옛 용의 예언에 나왔던 바로 그 붉은 용.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언젠가 불칸이 메소 라훔에서 바쉬라는 현자의 신분으로 위장한 채 숨어 있을 때 그에게 로메로의 말을 전했던 수련자도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붉은 용이 불을 뿜으면 세상은 끝이 난다. 푸른 용이 춤추면 세상은 빛을 보리라.’
실상은 로메로가 한 말이 아니라 옛 용이 어느 때에 영력이 충만하여 예언을 하며 했던 말이었다. 그걸 카란은 기억해내고 있었다.
파천은 현자와 마신들을 원래의 상태로 회복시켰고 아바돈을 해산시켰다.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 갔다. 파천의 말처럼 그들이 다시 해악이 될 가능성은 적었다. 그들은 돌아갈 곳도 의지할 것도 없었기에 천상 무한 계에 뿌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케플러는 아바돈의 군대 앞에 끝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너무 늦었다는 판단과 파천을 이길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렇게 된 바에야 차라리 더 깊이 숨어들어 때를 기다리기로 작심한 것이다.
‘잠시의 승리에 도취해 있어라. 끝내는 내가 모두를 누르고 이길 것이니.’
손에 쥔 구슬에 강한 힘이 들어갔다. 그는 파천이 대적자들을 치러 떠난 것을 알고는 곧장 다른 방향을 택해 사라져버렸다.
옆구리엔 플로렌서가 끼어 있고 등 뒤에서는 전사들이 따르고 있다. 그 정도면 초라하지 않은 수확이었다.
대적자의 무리들이 숨어 있는 곳은 벌써부터 어둠의 천사들이 파악해 두고 있었고, 메타트론에 의해 수호자에게 알려졌다.
파천과 선발대는 루하스 강 최북단에 자리 잡은 고요의 땅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폐허. 그곳은 한바탕 혈전이 벌어진 흔적을 속을 뒤집어놓고 내보이고 있었다.
파천과 수호자는 군데군데 파괴된 흔적들 가운데서 비교적 깨끗하게 보전된 곳을 먼저 뒤졌다. 쿠사누스들도 각자 흩어져서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얻어낸 건 그다지 많지 않았다. 흔적만으로는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짐작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파천은 결국 모든 걸 알게 되었다. 라치오와 쿤사가 그들의 친구이기도 한 밴살렛에 의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파천은 그들에게서 이곳에서 있었던 정황을 상세하게 듣게 되었다. 가장 큰 관심을 끈 건 역시나 제왕의 구슬이었다.
라치오의 입에서 나오는 사실들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제왕의 구슬이 마령의 본주에게 갔으니 장차 큰 근심거리가 될 것이라며 라미레스가 한탄했다. 수호자도 그의 운이 이리고 기세를 올리는 걸 보니 앞으로 쉽지 않은 상대가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들은 다시 하룬으로 돌아갔다.
하룬으로 돌아온 파천은 이번 출행의 결과를 수뇌들에게 알리고 몇 가지 당부를 잊지 않았다. 그리고는 곧장 팡과 바로크, 라치오와 쿤사를 불렀다. 그들 역시 쿠사누스라는 것이 곧 밝혀졌다.
그들까지 포함해서 이제 서른셋의 실종됐던 쿠사누스들이 모두 채워졌다. 선발대의 진용이 제대로 갖춰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