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88화 : 괴이한 사공
- 괴이한 사공
중원의 도처에서 거의 동시라 할 만큼 일어난 사건은 일파만파로 전 중원을 휩쓸어
버렸다. 몇 가지 점에서 이 사건은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먼저 그 하나는
이 사건의 중심에 금와전장과 대하표국이라는 당대의 거대세력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금와전장에서 무슨 이유인지 모르나 스물 네 곳의 분국에 동시에 표행을
의뢰했고 그 대가는 동일하게 황금 천냥짜리들이었으며 그 모두는 한곳만 제외하
고 탈취 당했다. 다섯 대의 마차를 운송하는 것도 동일했고 대가도 동일했으며 탈
취 당한 것도 동일했다.
탈취의 수법이나 사용한 무공은 제각각이었지만 살아 남은 증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은 무림맹이나 마도련의 고수들이었다고 하니 이것이 또한 무림에 큰 충격을
던져 주었다. 단 한곳 실패한 곳은 산동성 제남분국에서 출발한 표행으로 그들을
공격했던 자들 역시 무림맹의 고수들로 추측된다고 했다. 마차는 그들의 공격에 부
서졌고 이로 인해 안의 내용물이 공개되고야 말았다. 사람들의 예상대로 그 안에는
마차를 가득 메울 정도의 금괴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소식은 금세 전
무림에 떠돌았고 저마다 구구한 억측을 낳으며 각기 다른 입장에 있을 무림세력들
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거나 때로는 의미심장한 시선을 던지게 만들고야 말았으니
과연 이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지 아직은 모를 일이었다.
“태공.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저로서는 난감할 따름입니다.”
대하표국의 총국주인 청룡검객 구기자는 천무태공 초량의 처소에 와서는 죽을상을
하며 아뢰었다. 그가 이곳에 온 지는 벌써 한 시진이 지나고 있었지만 말하는 사람
은 오직 그 뿐이었고 초량은 여전히 난초를 바라보거나 때로는 난초의 잎을 마른
수건으로 닦아내는 일에만 몰두했다. 구기자는 그런 그를 보며 작금의 일이 난초를
돌보는 일보다 더 가치가 없는 일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부아가 치밀어 올랐지만
아무 소리도 못하고 입만 나불대고 있었다.
“태공. 이 일은 많은 점에서 의문을 낳게 합니다. 이것은 우리 대하표국의 사활을
걸고 치밀하게 조사를 해야 할 중요사안일 것 같습니다.”
그가 뭐라 그러던 말든 초량은 그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난초만을 바라보고 있었
다.
“태공. 뭐라고 말씀을……”
“한심한 작자.”
처음으로 초량의 입에서 나온 말은 구기자의 체면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이
었다. 구기자는 어이가 없었다. 물론 그의 생애를 통 털어 스스로 한번도 한심하다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한 시진만에 들은 말이 겨우 그 한마디라는 것이
너무 억울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 무엇이 의문이 간다는 건가?”
역시나 그는 돌아서지 않고 있었다. 마치 그 모습은 자신은 마주보며 대화를 나눌
가치도 없다는 태도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구기자는 그의 물음에 대한 대답
을 준비해야만 했다.
“먼저 금와전장이 한꺼번에 표물을 맡겼다는 것과 그럴 것이면 총국에다 의뢰하지
않고 분국단위로 의뢰를 했다는 것이 첫 번째 의문입니다. 두 번째는 무림맹과 마
도련이 우리를 동시에 공격했다는 점입니다. 저는 지금도 이것을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립니다. 도저히 연결점이 없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입
니다. 세 번째는 그들의 시체입니다. 마도련과 무림맹의 인물들이라 여겨지는 자들
의 시체입니다. 대부분 표물을 탈취 당한 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되
었습니다. 네 번째는 그들의 시체에 나 있는 무공들의 흔적입니다. 중원 마도, 정
도의 각 문파의 무공과 심지어 새외의 무공들이 총망라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되었다. 그대의 의문은 홀로 풀어라.”
“네?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다. 그대의 의문을 풀어주는 것 따위는 우리에게 하등 유익이 없기 때문
이지. 이미 일은 벌어졌고 그대는 이후 수습책을 마련하기도 벅찰 것이야. 그래.
자네의 생각은 누구의 짓이라 생각하나?”
구기자는 칠십노구를 빳빳이 세우며 자신 있게 말했다.
“무림맹과 마도련의 합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현실 가능성은 없지만 정황으로
봐서는 그것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금와전장의 자작극이 아
닐까 하는 의문을 가져 보았지만 그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
“그것이 무엇이지?”
“네? 네…… 그것은 이 모든 것이 그들의 짓이라면 그들이 이렇게 복잡한 절차를
통해서까지 우리 표국에 손해를 입혀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이런 일을
해봤자 금와전장에는 아무런 이득이 없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현장에서 금와전
장에서 파견된 인물들은 대부분 살해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그들에게 무림맹과 마
도련의 고수들을 제거할 만한 세력이나 고수들이 있다고는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
다. 마지막으로 그것을 모두 인정한다고 해도 마도련과 무림맹을 한꺼번에 움직일
만한 권한이 금와전장에 있지는 않습니다. 아니 무림의 그 어떤 세력도 그들을 한
꺼번에 움직이게 하기엔 벅찹니다.”
구기자는 습관적으로 손가락으로 심중의 생각을 정리하는 버릇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려진 결론이 무림맹과 마도련의 결탁이라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지금으로서는 가장 무리가 없는 판단으로 사료됩니다.”
“참 신기하군.”
구기자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뭐가 말입니까?”
“그 정도의 머리로 어떻게 대하표국을 중원제일로 만들었는지 신기하단 말일세.”
‘정말 밥맛 떨어지는 놈이야. 상관만 아니라면 저걸 그냥……’
“왜. 내 말에 기분이 나쁜가?”
구기자는 두 손을 쳐들어 황급히 휘저었다.
“아닙니다. 그럴리가요.”
초량은 난초에 머물러 있던 시선을 돌려 구기자를 쳐다보았다. 습관처럼 입가에 머
물던 미소를 거두고 그는 지겹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상황을 정리해보면 이렇군. 금와전장에서 24개분국에 동시에 표물의뢰를 했다. 그
표물을 강남에서는 마도련이, 강북에서는 무림맹으로 보이는 고수들에게 강탈당했
고 그들은 얼마 가지도 못하고 전원 살해되었다. 물론 그 전에 금와전장의 인물들
역시 무림맹이나 마도련의 고수들에게 죽음을 당했고 그들 중에 살아 남은 사람은
극소수다. 유일하게 탈취 당하지 않은 곳이 한군데며 그곳에는 마차가 파손되어 금
괴가 들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그곳에는 정체불명의 신비인들도
나타나지 않았고 말이야. 후후. 참 재미있군. 누군지 모르지만 여러 가지 목적을
지닌 자군.”
“무슨 말씀이신지……”
“몰라도 된다. 자네는 그것이 무림맹과 마도련의 짓이라는 건가본데 내 생각은 전
혀 달라. 금와전장의 인물이 죽었다는 것은 오히려 그들의 짓일 가능성이 더욱 짙
다는 것을 반증하는거로 볼 수도 있고, 단 한곳에서 드러난 금괴, 그리고 그곳만
탈취 당하지 않았다는 것 역시나 금와전장이 의심 가는 대목이며 무엇보다 이 일의
발단이 그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그들의 소행이라는 것을 힘주어
증명하고 있어. 중요한 것은 누구의 짓이냐가 아니라 그들이 무엇을 노리는가 하
는 거겠지. 그리고 우리들은 금전적인 손해와 여태껏 쌓아온 신용에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는 거고 당분간 표국 운영에 차질이 빚어질 거야. 이것만해도 우리 쪽에서
본다면 대단한 손실이지.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는 아닐 거야. 우리는 이번
사건에서 아주 중요한 점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의 경제적인 손실을 만회하고
도 남을 만큼 큰 것이지.”
“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구기자를 초량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표정만으로는 도무지 그가 무슨 생각을 지
니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금와전장의 소행이라고 단정할 경우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거대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세력이지만 이제 모든 세력들
의 시선은 금와전장을 주시하고 있을거야. 만약 그들의 짓이 아니고 다른 세력이
움직인거라면 일은 더 복잡해지지. 그도 아니고 금와전장의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
면 그것은 더 복잡해지고…… 어쨌든 어둠 속의 인물은 대단한 자임에는 틀림이
없군. 이 한번의 사건으로 현 국면을 자신이 의도하는 바대로 이끌어가게 되었으니
말이야. 만약…… 만약에 금와전장에 배후가 있고 그 세력이 무림맹과 마도련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면 우리의 계획은 처음부터 재수정 되어야
한다. 또 하나 무림맹이나 마도련이 공개적으로 우리의 표물을 노리고 더군다나 살
인멸구를 하지 않은 것은 공개적으로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지. 어둠 속에서
한 대씩 주고받던 것으로는 양에 차지 않는다는 말인 게야. 거기다 무림맹과 마도
련의 고수들을 모두 죽였다는 대목에서 이 일을 주도한 자와 그들의 관계를 판단할
단서가 발생하는 거지.”
그가 혼잣말을 하듯이 토해내는 내용 중에 구기자가 이해한 부분은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속시원하게 심중의 생각을 털어놓으면 시원하겠건만 눈앞의 사내는 그리하
지도 않았고 그렇게 할 생각도 없는 듯 했다.
‘그래. 너는 난 놈이고. 나는 그런 네놈의 발바닥이나 핥아야 할 놈이다. 빌어먹을
…… 천황의 대제자라고는 하나 나한테 이래도 되는거야?’
“그럼,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별로 기대도 하지 않는다는 듯이 아무렇게나 뱉어내는 말이었다.
“그걸 몰라서 묻나? 금와전장에 배상을 해 주면 그만이다.”
“네? 그들의 짓일지도 모르는데…… 조사도 안 해보고 배상을 해주라는 말입니까
?”
“그들이 원하는대로 움직여야 한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줄 것은 주고 얻을 것은
얻는다. 자네는 아무것도 생각지 말고 표국운영에만 신경 쓰도록 하게나. 아마 당
분간은 이런 일이 없겠지. 자네가 하고 싶어하는 일은 할 사람이 이미 정해져 있어
. 그러니 자네는 가서 애첩의 엉덩이라도 두들기고 있으면 돼.”
구기자의 얼굴은 심각하게 구겨졌다. 주름진 노안 사이로 벌겋게 충혈된 두 눈이
비치고 있는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내심으로 격동하고 있는지를 알게 해 준다. 초
량의 몸이 다시 난초로 돌아서자 구기자는 그것이 방에서 나가라는 의미임을 깨닫
고는 입가를 씰룩이며 돌아섰다. 아무소리도 않고 인사조차 하지 않고 문을 나서는
그의 심경은 참혹한 것이었다.
“후후 금와전장! 그들의 실체는 뭘까? 그리고 진정으로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일
까? 항상 사건의 배후에는 그 일이 발생함으로써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사람이 연관
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는 분명 무림맹이 되겠지만 이것은 그리 단순하
게 생각할 성질이 아니다. 여기에는 먼저 마도련이 함께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결
정적으로 이 단순논리를 뒤집어 버린다. 그들은 어쨌든 현재까지는 적대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다. 그렇다면 단순히 우리를 곤경에 빠뜨리
거나 그도 아니면 현 국면에 혼란을 주기 위해서? 으음…… 무림맹과 마도련은
단지 배후세력에 이용당한 것인가?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연결이 되어 있는가? 아
무래도 전자 겠군. 어쨌든 지금 시점으로서는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다. 내가 쥔
패는 최악이로군. 그러나 이것 한가지만은 분명하다. 항상 판은 끝나봐야 결과를
알 수 있고 승리는 언제나 힘이 있는 자에게 돌아간다는 것.”
그의 시선은 난초에 머물고 있었지만 그의 생각은 복잡하게 얽혀진 현 상황을 풀어
가느라 분주했다.
혈수천자가 사형 초량의 부름을 받고 그의 처소로 들어갔다 나온
뒤, 일단의 무리들을 이끌고 장원을 나선 시각은 중천에 떠 있던 해가 가파르게 서
녘으로 기울어가던 시점이었다.
★
파천은 수행인 하나 대동하지 않고 무림맹을 비밀리에 빠져나왔다. 그는 조금전의
태의전의 상황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았다.
“대하표국의 대규모 표행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곳은 12군데 였습니다. 이번이 그
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적기라 판단되어 신안전주와 더불어 의논했고 곧 바로
대령사의 재가를 얻어 표행을 탈취케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11군데에서 표물을
탈취하는데 성공했지만 아쉽게도 신비인들에게 전원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이와
동일한 상황이 강남의 12군데에서도 일어났으며 놀랍게도 그들은 마도련이었습니다
.”
백호전주는 아직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그다지 조리있다 할 수 없는 상
황보고를 했다. 그의 말을 신안전주가 이었다.
“우리가 정보를 얻어 낸 출처는 대하표국에 심어 놓은 첩자로부터입니다. 그가 준
정보는 정확한 것이었지만 한군데만은 표행의 규모가 정보와는 달리 그 두 배에 이
른 것으로 여겨집니다. 문제는 우리들을 친자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대하표
국이 표물을 노리고 자작극을 벌였다고는 보기 힘들고 그렇다고 금와전장이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제 생각에는 혈마천을 비롯한 새
외의 세력 중 한곳으로 추정됩니다. 이번 일로 그들의 정보력이 이미 중원 곳곳에
뻗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에는 각별한 주의가 요망되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우리에게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한 대비책을 세
워 둬야 할 것 같습니다.”
파천은 삼안천뇌 소천악의 말을 떠올리며 실낱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가 움직여 가
는 방향은 개방이었다. 공중을 갈라가는 그의 움직임은 어둠에 가려 분간이 가지
않았다.
★
“역시 지존의 예상대로 대상벌에서 사람이 나왔습니다. 이미 천마님께 연락을 취해
두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생애 가장 지독한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개왕 풍천호는 생각만 해도 신난다는 표정이었다.
“좋아. 이제는 하군표에게 연락을 하게. 행동개시하라고…… 그리고 쌍노!”
“네. 지존.”
“이제 자네들도 움직일 때가 온 것 같군. 준비한 세력을 움직여도 될 것 같아. 그
리고 이후의 지시는 풍노를 통해 할테니 그렇게 알도록 하고.”
“존명.”
“이제 중원은 한바탕 악몽을 꾸게 될 것이다. 새외의 세력들 역시 더 이상 기회만
을 보고 있지만은 않을 거다. 그렇다고 전면전으로 가는 것도 아니지. 모두 어쩔
수 없이 싸움판에 끼어 들게 만들어야 한다. 서로를 경계하느라 전면전으로 나오지
는 못하고 그렇다고 손놓고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 사이를 비집고 흙탕물을
일으켜 놓으면 우리가 얻을 것은 많을 거야.”
파천의 미소를 대한 쌍노와 개왕은 내심으로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고야 말았다.
마치 함정을 파 놓고 앞으로 닥칠 상황을 즐기고자 하는 악동의 만족한 모습을 보
는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파천은 화제를 돌렸다.
“소군이랑 소왕은 잘 있나?”
“네. 지존. 소군은 지금 지하연무관에 폐관수련중입니다. 역시 그녀의 재질은 천에
하나 있을 정도로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무공에 대한 집
념이 보기 드물 정도로 탁월합니다. 내 지금까지 이렇게 지독한 계집아이는 처음
봅니다.”
의노의 말에 파천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럴테지…… 그 녀석의 집념은 나조차 감탄한 것이야. 앞으로 빠른 성장을 보
일 거야. 이후 이 시대를 호령하는 여제가 탄생할지도 모르겠군.”
★
혈수천자는 말을 몰아가며 사형인 천무태공이 한 말을 떠 올렸다.
“배후를 캐 보아라. 그리고 이후 너는 각지에 흩어져 있는 우리 세력들을 적절히
이용하여 닥치는 대로 휘저어라. 무림맹이든 마도련이든 이곳 중원의 모든 무림인
들은 어차피 우리의 적이다. 현재 우리의 동지는 혈마천 외에는 없다고 생각해라.
무림맹의 조직을 중심으로 두드리되 전면전이 될 소지는 없애야 한다. 이를테면 무
림맹 각 지부의 산하조직들은 치되 그들을 직접 치는 행동 따위는 안 된다는 말이
다. 알겠나?”
‘빌어먹을 새끼! 그래 지금은 네가 내게 큰 소리를 치지만 언제까지 가나 보자. 사
부님의 명이라니 일단은 내가 참는다. 그렇지만 내 언젠가는 네 놈의 그 시커먼 속
을 낱낱이 드러내게 하고야 만다. 빙화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이미 내 륜은 네 목을
갈라놓았을 것이다.’
그가 거느린 기마대의 수는 삼백기에 불과했지만 그들의 기세는 만만치 않았다. 그
의 바로 뒤에는 항상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서른명의 검수가 함께 했다. 그
들은 현재 황하를 따라 동진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의 최종목적지는 제남이었다.
유일하게 탈취당하지 않은 대하표국의 제남분국을 찾아가기 위함이었다. 황하를
따라 가다보면 무림맹의 총단이 있는 무림맹에 맞닥뜨리게 되기에 함포에서 황하를
건널 생각이었다.
두두두두
기마대의 속도는 상당히 빨랐다. 선두에서 휘날리는 말갈기와 짝을 이루며 바람결
에 춤을 추는 옷자락은 휘영청 솟은 달의 비추임을 따라 멋진 광경을 연출했다.
함포에 도착한 일행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작은 나루였고 밤이었기에 사공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의 생각과 달리 저 멀리 어렴풋이 인영이 보였다. 그는 강 쪽으
로 돌아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중이었다.
히히히힝
‘팔자 편한 놈이군. 이 야심한 밤에 홀로 낚시나 하고 있으니……’
큰 삿갓을 눌러쓴 사람은 삼백기의 기마대가 자신의 뒤에 요란스럽게 당도했는데도
뒤조차 돌아보지 않았다. 혈수천자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봐. 너 이곳의 사공인가? 돈은 원하는 만큼 줄 테니 우리 모두 강을 건너게 해
라.”
명령조였다. 혈수천자에 의해 사공이라 단정지어진 인물은 넓은 등판에 달빛을 적
시고 미동도 없이 낚싯대에만 시선을 주고 있었다. 그가 여전히 반응이 없자 혈수
천자에게서 살기가 뿜어졌다.
“이런 촌 무지렁이 놈이 감히 이 어르신이 말씀하시는데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단
말인가?”
그가 살기 어린 음성을 토해내며 위협해 보았지만 그 사공은 역시나 석상이라도 된
양 꼼짝하지 않는다. 혈수천자는 기이함을 느꼈다. 그는 주위를 빠르게 살펴갔다.
자신들 일행과 귀머거리일지도 모를 사공 외에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이 분명했
다. 그는 자신의 느낌을 확신했다. 혈수천자는 뒤를 돌아보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 그의 신호에 따라 한 명의 수하가 사공에게로 다가섰다. 지척까지 다다른 흑의사
내는 돌아앉은 사공을 향해 입을 열었다.
“죽고 싶은가? 당장 일어나서 배를 대지 않으면 너를 죽이겠다.”
의도적으로 내공을 실어 상대에게 전하고는 의기양양해서 그 반응을 살폈다. 그러
나 그는 곧 어찌 된 영문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해지고야 마니, 사공은 그의 기대와
는 달리 멀쩡했으며 오히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서 뒤
돌아서지 않는가? 달빛에 드러난 그의 용모를 대하는 순간 흑의무사는 흠칫 놀라며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서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