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90화
[조사를 뵙습니다.]
천마에게 전음을 보내며 고개를 깊숙이 숙이는 자의얼굴은 너무나 준수했다.
달빛을 받아 더욱 신비스럽게 보이는 자는 다름 아닌옥기린 야율정혼이었다.
그는 마황검위대 16명의 소대주중 일인이기도 했고그와 함께 장내에 나타난 인물들
역시 마황검위대의 대원들이었다.한 놈만 빼고 모두 죽여라.천마의 명이 있자
옥기린도 격전 중으로 합류해 갔다.그의 입가에 매달린 미소가 더욱 진득한 살기를 느끼게 했다.
혈수천자는 다급해졌다.예상을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수하들은 정체모를
적들에게는 역부족이었다.그나마 비슷한 수준을 보이는 자들이라곤 직속수하들 삼십인 정도였고
그들 역시 힘에 벅찬지 연신 물러서기 바빴다. 적들은 잔인했고 망설임이 없었다.
일 검에 목이 달아나는가 하면 허리가 두 동강이 나 바닥에 엎어졌고
무기마저 산산이 부서져 버리는 예가 빈번했다. 마황천위대는 천마교에서도
40대 미만의 비교적 젊은 층들 중에서 가장 강하다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고 보면 지금과 같은 현상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혈수천자는 속속 쓰러져가는 수하들을 돕기 위해 몸을 솟구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생각에 불과했고 당장에 그에게 다가서고 있는
적을 경계해야만 했다. 조금전 당도한 무리들 중의 수장으로 보이는 자!
자신의 사형만큼이나 잘 생긴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고 다가서고 있다
판단한 순간 혈수천자는 두 개의 륜을 꺼내었다. 양쪽에 나누어 잡은 륜의
촉감이 서늘하게 정신을 일깨워갔다.
‘속전속결이다.’
어차피 저 뒤에 있는 놈은인정하기 싫지만 나로서도 감당할 수 없는 고수다. 그렇다면 이 놈을
최대한 빠른 순간에 죽이고 도주하는 편이 상책이다.’혈수천자는 그 짧은 순간에도
살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미 대세는 기울어가고 있었다.
수하들을 구해내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럴 바에는 자신이라도 살아남아 복수하는 편이
나으리라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옥기린은 지극히 평범한 신법으로
혈수천자가 탄 말을 향해 다가섰다. 둘의 간격은 오장!
한번의 도약으로 다가설 수 있는 거리임에도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 또한 상대가 결코 만만한 놈이 아님을 직감한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성격자체가
일을 함에 있어서 느긋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의 손에는 흔한 쇠 조각 하나
들려져 있지 않았기에 혈수천자는 상대가 육장을 주로 사용하는 자임을 간파할 수 있었다.
둘이 차차 간격을 좁히는 모습을 쳐다보던 천마는 홀로 격전을 감상하고 있었다.
여전히 그의 옆에는 처음에 나섰던 흑의 무사가 꼼짝하지 못하고 서 있는 중이었다.
천마의 시선이 슬쩍 그에게 머물자 그는 온몸을 경직시키고야 말았다.
천마의 고개가 적들을 주살하고 있는 마황천위대의 몸짓을 쫓아 움직여 갔다.
‘그럭저럭 훈련들은 되어 있는 것 같군. 저 정도면 어떤 일을 맡겨도 마음졸일 일은 없겠군.
그러나 뭔가 부족하다.’
그가 내린 판단의 의미는 무엇일까? 대체 무엇이 부족하단 말인가?
삼백삼십명대 백명의 싸움이건만 마황검위대는 거침없이 적들을 쓸어 넘기고 있었는데도
부족한 것이 있단 말인가? 옥기린과 혈수천자의 간격이 이장에 다다랐을 때였다.
혈수천자는 말 등에서 몸을 솟구치며 허공 중으로 비호같이 떠올랐고 그의 양손에서는
황홀하게까지 여겨지는 빛 무리가 충만되어갔다. 그는 양손을 교차하며 가슴 앞에서
모으는가 했더니 다가서는 옥기린을 향해 홱 뿌렸다. 륜은 빛 무리를 이끌고는
어둠을 가르며 기이한 소음과 함께 곧장 옥기린을 쪼개갔다. 지극히 평범한 직선을 택해
다가오는 두 개의 륜은 어찌 방비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강하고 빨랐다.
옥기린은 두 손을 펼쳐 벽이라도 문지르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쾅허공 중에 있던
혈수천자는 공간이 터져 나가는 압력에 더욱 위로 떠올라 갔고
옥기린은 곧장 땅으로 떨어져 버렸다. 어느새 새하얀 소수를 지닌 옥기린은
좀 전의 격돌에도 아무런 상처도 없이 멀쩡했다. 그는 땅위에 지천으로 널린 풀잎을
지르밟고 또 다시 몸을 솟구쳤다. 여전히 그의 손은 새하얗게 변색되어 있었는데
핏줄이라도 비칠 듯이 점차로 투명해지기까지 했다. 옥기린의 수강과 부딪힌 륜은
다시금 혈수천자의 손안으로 회수되었다가 공간을 찢으며 재차 날아왔다.
순간 옥기린은 열 개의 길고 가늘기까지 한- 어찌 보면 여자의 것 같은 손가락을
바닥 쪽으로 오므리며 손바닥의 중심을 돌출 시켜 내밀었다. 그리고는 곧장 하늘을
떠받들기라도 하려는 자세로 허공에 무수한 원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윙윙대는 소리와 함께 손 그림자들이 불어나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순식간에 삼십여개로 불어난 듯한 손바닥이 아까 와는 달리 새끼줄이라도 꼬는 듯
기이한 궤적을 그리며 짓 쳐드는 두 개의 륜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저, 저 수법은 대체 뭐냐?’
아무리 촘촘한 채라도 물을 담아낼 수는 없는 법이다.
그것은 마치 물과도 같았다. 수 십 개나 되는 환영을 끌고 쏘아지는 손 그림자들은
그냥 내버려두어도 전혀 타격을 주지 않을 것이란 생각마저 들 정도로 실체를 비껴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목표점이 분명한 몸뚱이마저 회전을 일으키며 희미해져버리자 두 개의 륜은
공간만을 긁어대며 땅위를 낮게 스쳐가야만 했다. 두 개의 륜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곧장 방향을 꺾어 혈수천자의 곁으로 다가오기 위해 선회했다. 그러나 그 전에 그는
자신에게 다가서고 있는 손 그림자를 해결해야만 했다. 이럴 때는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이다.
그는 곧장 허리를 비틀며 좌로 이장이나 몸을 이동했고 그것도 모자라 두 발을 휘두르며
위로 일장이나 더 떠올랐다.
‘이, 이놈이’
여전히 자신에게 다가서던 손 그림자는멈춤이 없이 전진해오고 있었다.
그 뒤를 두 개의 륜이 따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무의식 중으로 두 손을 뻗쳐 장력을 발출 했다.펑가죽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발출된 장력은 당연히 눈앞의 손 그림자를 잔가지 치듯이 꺾어버려야 했다.
`팡’
`억’
혈수천자의 몸이 동그랗게 말리더니 허공 중에서 연속적으로 맴돌고 만다.
그는 자신의 장력이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자 몸을 웅크리며 두 팔을 오므려
상대의 공격을 호신강기를 일으켜 막으려 했던 것이다. 어차피 자신을 공격하는
그 순간 상대 역시나 륜의 공격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계산에서 살을 주고 뼈를
가르겠다는 나름대로의 회심의 계산이 깔린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가 받은 타격은
호신강기를 일으키고 거기다가 두 팔로 막았음에도 적다 할 수 없는 것이었고
타격 당하는 순간, 충격의 여파로 회전을 한 것이다. 그는 오장이나 뒤로 날려가며
땅에 간신히 내려섰다. 착그의 양손으로 돌아온 륜을 주의 깊게 쳐다보던
그는 상대에게 아무런 상처조차 주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정말이지 그가 이런 경우까지 당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예전부터 중원의 무공을 은근히 깔보는 버릇이 있었다.
비록 천황부내에서는 10위 내에 간신히 들어가는 실력이지만 중원에 나가기만 하면
감히 자신의 앞을 막아 설 수 있는 자는 없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저 눈앞의 인간 같지도 않은 괴물도 아닌 그의 수하쯤으로 여겨지는 놈에게조차
자신이 밀린다고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빨리 이곳에서 도망가야겠다는
애초의 계획은 벌써 잊어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해서든 지금 당한 치욕을 상대에게
돌려주지 않고서는 이곳에서 살아난다고 해도 전혀 기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는 빠르게 상대를 살펴갔다. 역시나 상대는 아무런 상처도 없이 멀쩡하게 서 있었고
그를 주시하고 있었는데 그 시선에는 일말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왠지 스스로가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뒤에 있던 괴인이 입을 열었다.
`지루하군.너 지금 뭐 하는 거지?’
자신의 수하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옥기린은 천마조사가
하는 말 뜻을 알고서는 고개를 숙였다.
` 죄송합니다. 빨리 끝내겠습니다.’
하긴 오랜만의 실전을 싱겁게 끝내긴 싫겠지. 그렇지만 이건 비무가 아니다. 전력을 사용하면 오 초식 안에 끝낼 수 있는 놈에게 너의 그런 행동은 오히려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빨리 끝내거라.
`존명.’
`저, 저놈들이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나를 오 초식 안에 끝낼 수 있다고? 이런 똥물에 튀겨 죽일……’
혈수천자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자신이 자부하기를 천하제일 방파인
천황부에서도 자신보다 강한 인물은 일곱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저 놈들이
지껄이는 말들은 자신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 오만방자한 말이지 않는가?
물론 좀전의 격돌로 상대가 자신에 뒤떨어지지 않는 실력자라는 것은 인정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스스로 전력을 기울인다면 결코 상대가 자신을 능가하지 못할것이라
자신하고 있었기에 자부심에 상처 입은 그의 분노는 금세 주체하지 못할 살기로
화해 이성을 마비시키고야 말았다.
아니다. 물러서거라. 지켜보기도 지루하니내가 손을 써야겠다.
막 앞으로 돌진해 가려던 혈수천자는 괴인의 그 말에 등줄기가
싸늘해짐을 느꼈다. 이제야 상황판단이 선 것이다. 그가 잠시나마 잊고 있었던
두려움의 원천인 괴인이 직접 나선다는 말은 그에게 현 상황을 새롭게 인식케 하기에
부족하지 않았고 여기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절망감을 빠르게 그에게 요구하고 나섰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도망가도 모자란 판에……
‘그는 그제야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삼백이 넘던 수하들 중에 살아
남아 있는 자들은 백 명도 채 안되었다. 그 짧은 시간동안 그 많은 수의 수하들이 죽음을
맞았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오금이 저려왔다. 적들은 그의 예상보다도 훨씬 강했던 것이다.
모두 뒤로 물러서라.천마는 내공을 실어 큰 소리를 발했다. 그의 외침소리가 있자
마황검위대 일 백 검사들은 순식간에 뒤로 물러서며 공간을 벌리고 섰다.
그들의 일사분란한 퇴각에 살아 남은 천황부 백여명의 무사들은 어찌된 영문인지를 몰라
어안이 벙벙해 있는가 하면 지금까지 스스로가 살아 있음에 감격해 하는 놈들도 보이는 것 같았다.
대체로 살아 있다고는 하나 여기저기 입은 가볍지 않은 상처로
두 발로 땅을 딛고 서 있는 것조차 버거운 상태들이 태반이었다.
천마의 시선이 옆에 있는 흑의무사에게 고정되었다.
그의 하나밖에 없는 손이 상대의 어깨에 다시 슬그머니 자리를 잡자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놈의 전율이 느껴졌다. 온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어대는 사내를 향해
그는 나직한 음성을 토했다.
너는 이미 죽었다. 무사로서의 자부심은 어디 가고 이리 처량한 모습을 보인단 말인가? 살아 있어도 가치가 없으니 차라리 죽거라.
죽음에 대해 이리도 가벼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그 말이 한 사람에게만은 그 무엇보다 절실한 박탈감을 줄 것이지만 이 또한
다른 사람에게는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일상의 흔한 일처럼 여겨지는 듯 했다.
천마의 손이 순간적으로 붉어진다 여겨지고 빛은 천마의 손을 통해 흑의무사의
어깨와 가슴과 옆구리를 직단으로 가로지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푸확사내의 반대쪽 옆구리가 몸 속의 내용물을 남김없이 쏟아내며 터져 나갔다.
피와 살과 조각난 뼈…… 한 사람의 삶이 지닌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애처롭게 허물어지고 있었다.
천마는 자신에게 무슨 권한을 부여받고 이런 살행을 저지르는지를
설명할 생각 따위는 애초에 없는 인간! 그가 하는 일은 언제나 정당하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기준이야말로 세상을 움직이는 질서의 유일한 근거라고
믿는 사람이지 않은가? 그것으로 족했다. 그는 자신의 뒤로 물러서 있는
마황천위대의 기대에 찬 시선의 배웅을 받으며 지독하다 싶을 정도의 잔인한 살수 앞에
기가 죽어 있던 살아남은 천황부 인물들을 향해 죽음의 집전을 행하고자 발길을 떼어갔다.
세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다. 죽음을 도외시하고 끝까지 투쟁하다
죽는 것과 조롱과 멸시가운데서도 살아날 가능성은 없지만 도주를 취해보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모든 희망을 접고 조용히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어느 것 하나 그들에게 충분한 만족감을 주지는 못하지만 그들은 이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그것을 결정할 사람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저 자는 인간이 아니다.
도저히 측정조차 하지 못할 정도의 극강한 고수가 분명하다.
더군다나 저 잔인함은 인간의 심성이라 여겨지지 않을 정도이다. 빌어먹을……
여기서 내 인생이 끝나야 한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