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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검 – 96화


봄이 떠나간 땅에 여름이 오고 그 위에 가을이 덧입혀진다면, 겨울은 그 하나하나를 빼앗으며 제 색깔을 보여 준다. 무채색. 슬픔이라고 단정 짓기도 애매한 서글픔과 울적함. 그런 것들이 그의 날을 겨울날의 삭풍처럼 할퀴고 간 자리엔 언제나 아쉬움이 남았다.
한 평생 무엇을 위해 살았던가 되뇌어 보아도 그의 두 손은 여전히 비어 있기만 했다. 아니 달라진 거 분명히 있었다. 주름과 검버섯. 가문의 굴레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잊고 분투하고 노력했지만 남은 건 쉰내 나는 몸뚱이뿐이었다. 야림주의 아침은 오늘도 회색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야림의 그 많은 식구들이 죽어갈 때 그는 스스로 입을 닫아걸었다. 손자를 비롯한 충성스런 가신들이 한 목소리로 우리 갈 길을 가자고 했을 때도 기다리라 말했다. 지금도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만큼 사람이 지치게 하는 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노인은 현재도 늙어가고 있었다.
“명이냐?”
늙수그레한 노인의 음성은 방문을 간신히 넘어설 뿐이었다.
드르륵
미닫이로 바꾼 문이 제 몸을 비비는 소리를 냈다. 야림주는 그 소리가 좋았다. 누군가 자신을 찾아온다는 것은 아직은 쓸모 있다는 걸 의미했으니까.
명은 할아버지가 부쩍 늙었다는 느낌을 근래에 자주 갖게 되었다. 지금도 그랫다. 어제와도 또 다른 느낌이었다. 외출을 삼가고 두문불출하신 지도 꽤나 되었다는 걸 상기하곤 그는 마음이 아팠다. 노인의 마음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를 잘 아는 손자는 그래서 더 슬펐다.
‘이제는 잊어야 하지 않을까요?’ 라고 여쭸다가 호되게 혼난 경험은 아무래도 좋았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희망이 이뤄졌으면, 그래서 그걸 보고 눈을 감으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수도 없이 했지만 답은 언제나 하나였다. 가망 없다는 것. 세상이 미쳐 돌아갈 때도 할아버지만은 힘을 잃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었다. 그토록 총명하고 힘이 넘치시던 분이었기에 언제까지나 자신 옆에서 나무라고 꾸짖어 주실 것이라 믿어 왔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할아버지.”
“왜 그러느냐?”
“야림은 아직 힘이 있습니다. 마지막 힘을 쓸 여력은 충분합니다.”
오늘은 ‘그래서’ 라고 묻지도 않으셨다.
“기다릴까요?”
“그래라.”
짧은 한마디. 변함없는 할아버지의 믿음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명은 궁금했다. 대체 그 자의 어떤 점이 할아버지의 마음을 송두리째 뺏어 가 버렸을까? 명은 답답했다. 웅크리고 있는 거야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대륙을 산재하는 비밀 지단들 중 요충지를 저들, 중원무림맹에게 내주고 나서 점차 야림의 운신 폭이 좁아지고 있다는 데 있었다. 이곳 낙양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비밀 지단은 저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야림의 식구들은 세상으로 내몰려서 고충을 중원과 함께 당하고 있었다. 그걸 야림주는 모르지 않았다.
“명아.”
“네.”
“떠날 채비를 하거라.”
“무슨……말씀이신지요?”
“말 그대로다. 낙양의 식구들은 비밀 지단에 숨겨라. 그리고 대륙 각지에 남아 있는 비밀 지단에 핵심 고수들을 숨겨라. 마지막 싸움에 우리 야림이 빠진다면 죽어서도 조상들을 뵐 수 없을 거다.”
“할……아버지.”
“때는 사람들이 모르는 사이에 벌써 저만큼 가까이 와 있구나. 오늘 중으로 여길 떠나라. 그리고 시기가 왔음을 네 스스로 확신하게 될 때가 아니면 절대로 이곳으로 돌아오면 안 된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의자에 상체를 묻고 창 밖을 향한 노인의 시선이 잠시 손자를 향했다.
“이리 오너라.”
명은 무릎걸음으로 다가갔다. 손자 명의 얼굴을 뚫어지듯 살피던 야림주는 거칠고 투박하지만 따뜻한 손으로 손자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마에서 콧등으로 볼로. 명의 두 눈은 불안으로 흔들렸지만 야림주의 시선은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다. 그 안에 자신을 향한 정이 흐르고 있음을 명은 가슴 저리게 느꼈다.
“이만하면 되었다. 어서 가거라. 지금 당장 짐을 챙겨 떠나거라. 장원엔 단 한 사람만 남겨도 된다.”
“할아버지 그건 아니 될…….”
“내 유언이라 생각해 다오. 부탁이다. 제발 그리 하거라. 남길 사람은 나만큼 늙은 청노인이 적당하겠지. 허허허.”
명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할아버지가 저리도 완곡하게 말씀하시니 그 뜻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걸 그는 잘 알았다.
‘왜 갑자기 저런 명을 내리신단 말인가/ 할아버지는 현명하실 뿐만 아니라 때를 잘 아시는 분이시다. 무슨 곡절이 있음일까? 아니면 그냥 하시는 말씀인가. 할아버지를 남겨 두고 어찌 호낮 떠나란 말씀이신가.’
“장차 이 땅에 두 번의 큰 진동이 있을 게다. 처음은 땅이 흔들리고 말겠지만 나중엔 하늘이 찢어진다. 너는 어떠한 경우에도 이 땅을 떠나지 마라. 많은 사람들이 서쪽으로 도망가더라도, 바다를 건너 제 살길을 찾아 떠나더라도 너는 이 땅을 지켜라. 끝까지 참고 견딘다면 좋은 날도 오겠지.”
명은 입을 열 수 없었다. 입을 벌리기만 해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뒤로 물러나 그 자리에서 절을 올렸다. 내려간 고개는 올라올 줄 몰랐다.
“울지 마라. 사내는 속으로만 울어야 한다. 삼켰다가 네 가족과 친구와 나라를 위해 터트리거라. 가슴 가득한 울분을 담아 두었다 마땅히 쓸 곳에 써야 한다. 그만 나가 봐라.”
명은 뒷걸음으로 돌아 나왔다. 미닫이문이 다시는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을 명은 염려했다. 괜한 기우에 불과했으면 좋겠단 생각도 했다.
소리 없는 이동은 낙양 전체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져 갔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왜 사라졌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늘 그렇듯이 사람들은 제 일이 아니면 극성스럽게 관심을 가지진 않았다.

낙양의 시진을 뒤흔든 사건은 그 밤에 일어났다. 무황성의 일만정병이 낙양을 말굽으로 짓밟았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부수로 불태웠다. 어둠에 잠긴 하늘에 간신히 빛을 뿌리던 달빛마저 타오르는 연기에 가려지고, 천지를 울리는 광소와 비명과 울음이 밤새도록 낙양을 떠돌았다. 아무도 집에서 나가지 않았다. 태워진 가옥만 해도 낙양 중심가의 삼분의 일이나 되었다.
천하제일가.
빛 바랜 현판은 조각나 흙구덩이 속에 처박혀 있었다. 넓은 장원 그 어디에서도 비명성은 울리지 않았다. 내밀원주와 마전주는 허탈한 표정이었다.
“야림이 고작 이런 노인네 하나뿐이란 말인가?”
“이미 도주했다고 봐야겠지. 그런데 우리가 올 줄 어떻게 알았을까?”
두 사람은 고개를 갸웃했다. 노인의 상체 옷섶은 활짝 열려 있었는데 그곳은 인두로 지진 듯 멀쩡한 곳이 없었다. 두 눈이 뽑히고 한 팔이 잘렸다. 그것도 모자라 다리에 쇠꼬챙이를 박고 있기까지 했다. 이 작고 볼품없는 노인에게 이들은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야림주가 죽기 전에 하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너희는 헛된 야망으로 인해 세상을 어지럽히지만 곧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마 어이할꼬. 너희 운명은 이미 너희의 것이 아닌 것을. 장차 이 땅에 검을 쥔 자가 일어나 너희를 가르고 너희의 내장을 온 땅에 뿌리도록 너희 영혼은 깨닫지 못하겠구나. 안타깝도다. 지옥의 겁화를 너희 영혼이 견딜 거라 믿는 오만함이 진정 안타깝도다.”
내밀원주는 야림주의 머리통을 있는 힘껏 찼다. 산산조작 나 흩어지는 파편을 보며 고함을 질렀다.
“지옥이라도 날 가두지는 못한다. 이런 망할 노인네. 그단 소리를 해서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다니……”
그에게 마음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기분만은 여간 찜찜한 게 아닌 것 같았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그만 가자.”
그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밖으로 나왔다. 마전주가 말했다.
“이제 우리 힘을 쓸 때가 왔다. 교주가 우리를 먼저 배신한 게 맛지?”
“아무렴.”
“좋아, 마전과 내밀원의 전 힘과 무황성의 힘을 집결한다. 그래서 이 땅을 쓸어 버린다.”
“혈마는 어쩌고.”
“그넘도……죽인다. 협조하지 않는다면.”
“그놈은 교주의 심복이니……우리 뜻에 따르지는 않을걸.”
“그래 봐야 제 놈이 뭘 하겠느냐?”
사실상 호교원의 혈영신과 교주의 직계 조직을 제외하고는 전 힘이 이들 두 사람에게 집결되어 있었다. 굳이 세력으로 비교하자면 상대한다는 자체가 무리가 따를 정도였다. 이들이 움직인다면 세상의 절반의 힘이 움직이는 것과 동일하다 할 정도였다. 그런 이들이 드디어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힘이 서서히 꿈틀대고 있었다.
밖을 향하던 두 사람은 그 자리에 흠칫했다.
“쥐새끼가!”

뒤로 돌아선 마전주의 한 손에서 거대한 혈광이 터져 나왔다. 지름 일장이 넘을 빛의 기둥은 곧장 뒤쪽을 향해 쏟아졌다.
콰콰쾅
우르르릉
전각이 통째로 무너졌다. 둘은 빠르게 무너진 전각의 위를 처단했다.
“바보같이 무너지게 하면 어찌하겠다는 거냐?”
“빌어먹을……나도 모르게 그만.”
두 사람은 허공을 떠서 사방을 살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대체 어떤 놈이 우리 눈을 피해 달아날 수 있단 말이냐?”
“혹시…….”
“혹시 뭐?”
“천마가 말한 중원무림맹주가 아닐까? 그놈이 아니고서는 이 정도로 대단한 놈은 없을 텐데.”
“모르지. 가능성이 있는 놈은 또 있으니까.”
“설마.”
두 사람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동굴 바닥이 전해 주는 차가움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쿨럭 쿨럭
기침을 토할 때마다 피가 솟구쳤다.
“이런 바보 같은 자. 흐음, 이것 상처가 심한데.”
은의인은 고민했다. 사내를 구해서 나오긴 했지만 상처가 치명적이라 할 정도였다. 사내는 무의식중에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죽은 자의 혈육이라도 되는가 보군. 할 수 없다. 이 자를 일단 살리고 보는 수밖에.”
그는 먼저 사내의 옷을 모두 벗겼다. 그리고 가져온 장작에 불을 붙이고 그 옆에서 사내의 전신을 깨끗한 물로 닦아내었다. 외상도 외상이지만 내상이 심한 것 같았다.
그는 추궁과혈로 전신혈도를 통해 진기를 불어 넣었다. 한 시진 가량을 그러고 있자니 온몸에서 땀이 솟아나며 검은 피가 빠져 나왔다. 은의인은 때를 놓치지 않고 사내를 앉혔다. 그의 등 뒤 명문혈을 통해 자신의 진기를 불어 넣고 사내의 단전에 있는 내공을 자극시켰다. 이어 경맥을 통해 이끌어 나가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난 뒤에 은의인은 긴 한숨을 쉬었다.
‘이제 간신히 맥은 잡았군. 이 자 어지간히 생명력이 강한 자야 살고자 하는 의지가 대단해.’
그는 누워 있는 자의 얼굴을 살피며 운기를 했다. 그는 그런 와중에도 정작을 불 쪽으로 던져 넣었다. 운기조식중에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건 이미 형식에 구애됨이 없을 정도의 고수라는 얘기였다.

제갈초홍은 도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일월교와 무황성은 별개의 세력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일월교주가 무황성의 실세가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그건 아닙니다.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원래 마전주와 내밀원주는 친구 사이입니다. 그들은 중원과 세상을 자기 힘으로 바꿔 놓으려는 야심을 지닌 자들이었죠. 그들은 그럴 만한 힘이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일월교주가 접근한 겁니다. 당시에 그는 교주의 신분이 아니었죠. 단지 일월교의 촉망받는 기재 중에 하나였을 뿐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두 사람과 우정을 쌓아 가게 된다. 세 명은 의기투합하여 세상을 말아먹자고 결의한다. 그들은 아주 작은 것부터 준비를 해간다. 힘을 기르고 세력을 확장하고 전략을 수립한다. 그러기를 자그마치 백 년.
그 동안에도 그들간의 우정엔 변함이 없었다. 차츰 자신감을 가져 가던 일월교주는 두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성장한다. 이미 그들간에 암묵적으로 일월교주는 지도자로 추대되는 분위기였다. 공식적으로 주종간이 되기로 두 친구는 결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던 그들에게 시련이 찾아 왔다. 일월교 내부의 파벌 싸움에 교주가 관계를 맺은 것이다. 일월교에는 두 개의 파벌이 있었다. 세상을 피로 물들이고 멸망시키자는 쪽과 개혁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자는 쪽이었다.
두 파벌은 첨예하게 대립해 가지만 어느 쪽이 더 우세하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이때 교주는 두 친구들을 끌어들인다. 당시 ‘달이 뜨는 대지’의 후계자였던 교주를 도와 두 친구는 ‘태양이 지는 대지’의 원로들을 살해하낟. 이로써 두 친구의 도움으로 교주가 될 수 있었다.
일월교주는 그 이후에도 반대파의 항쟁을 진압하느라 친구들을 돌아볼 여력이 없었다. 이와는 반대로 두 친구는 교주에게 힘을 보태고자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힘을 집약하여 내밀원과 마전을 만들고 새외의 세력들을 하나 둘씩 제압해 나간다.
뿐만 아니라 중원 정벌의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직접 시행할 만반의 준비를 끝내 놓기에 이르렀다. 여기까지 말한 사내는 침통한 표정이 되어 갔다.
“그들이 옆에 있는 한 그 누구도 교주를 시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지닌 힘은 전 일월교의 힘과 맞먹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 힘을 우려해서인지 일월교주 또한 두 친구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죠. 그게 바로 일월교의 진정한 실체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이 정도쯤 짐작 못할 바도 아니었지만 친구에게서 직접 듣지 못했다는 것이 주는 의미는 다른 것이었죠. 이러하던 차에 혈마가 환생하고 유명무실했던 호교원이 제 힘을 갖추어 나가게 됩니다.
또한 완전한 동의를 갖출 수 없어 교주의 가장 큰 권한이라 할 수 있는 혼세령을 발동하지 못하던 것이 우리 일족의 전멸로 가능하게 되었죠. 지금 일월교는 세상을 향해 혼세령을 발동해 놓고 있는 셈입니다. 곧 머지 않아 혼세마인들 전부가 세상에 쏟아져 나온다면 과연 누가 그들을 막을 수 있을지 두렵기만 합니다.”
“그럼 교주와 내밀원주와 마전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거죠?”
“그건 알 수 없습니다. 내밀원주와 마전주가 정말로 일월교와 등을 돌릴 가능성은 지금으로서는 그다지 크지 않을 겁니다만 어느 한쪽이 배신을 할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어느 정도는 힘을 약화시킬 수 있을 겁니다.”
“더욱 혼란스럽기만 하군요. 한 가지 의문이 있어요. 귀 공은 ‘태양을 지는 대지’ 의 일쪽이라 하지 않았어요?”
“맞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그들이 교주의 명을 듣는 거죠?”
“그게 바로 혼세령의 위력입니다. 엄밀히 말해 일월교에도 엄연히 신분 차이가 있습니다. 원로들과 지정된 사람들이 사는 곳이 일월교이고, 나머지는 태양이 지는 대지와 달이 뜨는 대지에 모여 살고 있죠.
결국 혼세마인이란 그들 두 부족에서 키워낸 파괴자들을 일컫습니다. 혼세령이 발동하면 두 대지는 문을 닫아겁니다. 아무도 출입할 수 없는 곳이 되고 말죠. 이에 혼세마인이 세상을 향해 내보내집니다. 이미 몇몇은 들어와 있을 겁니다. 현재의 일월교란 교주와 호교원과 교주를 보좌하는 몇몇의 인물이 전부인 셈이죠.”
“그런데도 그들을 당해낼 수 없다니…….”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땅엔 일월교와 내밀원, 마전을 견제할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문제는 그들이 현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거죠.”
“그건 무슨 뜻인가요? 그리고 그들이란 누구를 말하는 거죠?”
“흔히 천외천이라 불리는 자들인데 선계의 일맥을 일컫죠. 저도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은자천과 환상천 그리고 또 한 곳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가장 큰 곳이 바로 은자천이죠. 장삼봉 진인을 아시죠?”
“네, 물론이죠.”
“바로 그 분이 실제적인 그 곳의 지도자죠.”
제갈초홍은 계속해서 놀라고만 있었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사실 그 분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그 자신도 모를 겁니다. 하하하.”
그게 뭐 그리 우스운지에 대해서 제갈초홍은 고민했다.
“은자천의 사람들은 세상 곳곳에 흩어져 삽니다. 크게 동천(東天)과 서천(西天)으로 나누는데 그들이 한꺼번에 움직일 일이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제갈초홍은 긴장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세상이 멸망할 위기에 처해야만 세상으로 나올 겁니다. 과연 지금의 위기가 그 정도로 심각하다면 그들은 부르지 않아도 세상에 나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그들을 불러낼 수는 없는 거죠.”
“그럼 차라리 그들이 나오지 않길 바라는 게 낫겠군요.”
“하하하, 딴엔 그렇군요.”
제갈초홍은 상대가 참 웃음이 많은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했다. 별일 아닌 것 가지고도 웃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순수하단 말과도 일맥상통했다.
‘이런 사람이 일월교의 사람이었다니. 일월교는 모조리 악마 같은 사람만 있는 줄 알았더니.’
“어쨌든 점점 더 멀어지는군요.”
“무슨 말씀이시죠?”
“적은 점점 더 신비해지고 강해지는 것 같은데…… 우리는 여전하거든요. 이번 정도사령대의 일만 해도 그렇더군요. 단 세 사람을 이백의 사령들이 당해내지 못해 도망가야 할 형편이니.”
“그건 어쩔 수 없을 겁니다. 마전이나 내밀원의 상위 고수들만 해도 중원에 내놓으면 최고 고수라 불릴 테니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무슨 수로 당하죠?”
“그렇지만 승산이 없는 건 아니죠. 일단 그런 고수들이라고 해 봐야 소수에 불과하고 무황성의 일반 고수들은 이쪽에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요? 그 괴물 같은 자들은 어쩌죠?”
“흐음, 잠상봉 진인이 나서거나 저번에 나타나 도와 줬다는 그런 신비인들의 힘을 기대하는 수밖에는…….”
“최소한 이것 한 가지만은 분명해요.”
“뭐죠?”
“지존만은 그들 중 누구와 붙어도 안 질거라는 것. 호호호호.”
이번엔 제갈초홍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러자 사내가 그런 그녀를 멍청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가장 큰 변수는 천마와 적루아입니다. 그들 둘이 어떤 행동을 취하느냐에 따라 대세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를 겁니다.”
“왜 그런 거죠?”
“아직은 확실한 게 아니기 때문에 말씀드리고 싶지 않군요.”
제갈초홍은 맥을 놓았다.
‘하긴 무엇 하나 확실한 게 없지. 천마님이야 때를 기다리시는 거니 언제가는 큰 힘이 될 거야. 그나저나 지존께서는 언제나 오실지…….’
그녀는 멀리 신수궁이 보이기라도 하는지 꿈꾸는 표정이 되어 갔다.

³≪¾c¿¡¼­ AI¾i³­ ≫cAA´A °¡¶aAI³ª Aß¿i °U¿iA≫ ´o¿i ¾o¾iºU°O ¸¸μe¾u´U.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제 세상이 멸망할 거라 쑤군대기 일쑤였고, 언제나 그렇듯이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아 가는 소수의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오늘도 어김없이 해는 빛 무리를 끌고 떠올랐으니 신기한 일이었다.
제갈초홍은 좋아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구분이 명확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현재 그녀의 위치가 그런 거로 확고하게 표현하며 살도록 방치해 두지 않았을 뿐이다. 조금은 거북한 자리라도 그녀는 거부할 수 없었고, 필요하다면 아주 대면하기 싫은 사람과도 즐겁게 담소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 경우엔 대부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게 보통이었지만 이런 게 성가신 건 사실이었다. 전혀 예정에 없던 일을 갑자기 처리하거나 계획에 없던 일이 급작스럽게 돌출되는 상황을 지금껏 그녀는 잘 견뎌 왔고 대부분 현명하게 처리했다. 지금의 상황이 그런 경우였다.
그녀가 대하는 이런 급작스러운 대면은 대부분이 개방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녀와 만나기로 작정했거나 중원무림맹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점을 얻고 싶어하는 자들은 거지들의 소굴인 개방을 찾았다. 몇 가지의 복잡한 절차를 거쳐 중원무림맹 인물들에게 인계되고 수면제를 먹인 상태에서 혈도까지 짚여 총단을 찾게 된다. 물론 나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언제까지나 이곳은 적에게 알려지면 안되는 금역이어야 했다.
낙양의 소식을 접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개방으로부터 이런 접촉자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다. 그 내용은 제갈초홍으로 하여금 직접 뛰어가게끔 할 정도로 긴박하고도 중한 사안이었지만 그녀는 대리자를 보냈다. 그리고 그 또한 이런 복잡한 절차를 거쳐 그녀 앞까지 올 것이었다. 그녀는 초조한 심정으로 그를 기다렸다.
벌컥
“그가 도착했습니다.”
“상태는?”
그녀는 밖으로 향하며 급하게 질문했다.
“고비는 넘긴 것 같습니다.”
“누가 데려 왔지?”
“그것이…….”
우뚝 멈추어 선 그녀의 시선이 소식을 전하러 온 자의 얼굴에 화살같이 꽂힌다.
“저번 정도사령대의 은인이라는 신비인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어- 이를 테면 이름 같은 것을 알지 못하기에 그는 황송하다는 표정이었다.
“뜻밖이군.”
그녀가 걸음을 다시 딛으며 하는 말이었다. 뜻밖이긴 했다. 어찌 또 그 자가 이 일 에 결부되어 있을까? 평상시에 어떤 상황에도 의심을 하고 보는 그녀의 성미가 또다시 발동했다.
‘우연이라면……너무 공교롭군.’
솔직한 심정이었다.

야림주의 손자 명은 침상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그 앞엔 남궁혁련과 몇 명의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었고, 그 가운데 한 사람!
‘저 자가 그 사람인가?’
제갈초홍이 들어서자 모두들 한쪽으로 비켜섰다. 그녀는 야림의 유일한 후계자인 명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녀는 부러 그러는 건지 명을 데려온 사내를 일별도 하지 않았다.
“모두 회의장으로 소집시키세요.”
“알겠습니다.”
남궁혁련 이하 사령들이 우르르 실내에서 사라져 가자 제갈초홍은 그제야 사내를 찬찬히 살펴 갔다.
“이 분을 구해 오셨다니 뭐라고 감사함을 드려야 할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때로 그 당연한 일이 생명을 걸어야 할 일이라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요.”
뼈가 잇는 말인 것도 같았다.
“듣기로 마전주와 내밀원주가 함께 있었다 했는데…… 그들의 눈을 속이시다니……대단하신 분이시군요.”
“운이 좋았지요.”
“운만으로는 그런 일을 해낼 수가 없지요. 저번의 일도 그렇고 머리 숙여 감사함을 드립니다.”
“별 것 아니니 그리 부담을 주진 마십시오. 제가 오히려 감사하다고 해야겠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진작부터 중원무림맹의 총단에 오고 싶었는데 이렇게나마 오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 또한 의미가 가볍지 않은 말이었다. 저번의 일을 나무라는 건지 진정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호했다.
“왜 그리 이곳에 오고 싶었다는 건지…….”
두 사람의 대화는 어찌 보면 사람을 구해 온, 더군다나 중원무림맹으로서는 아주 중요한 인물을 구해 온 자와 나누기엔 좀 딱딱하고도 집요한 질문이었다. 그렇지만 은의인은 개의치 않고 활짝 갠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
“중원인이라면 누구나 동경하는 곳이지요. 더군다나 무를 아는 자로서 현 중원의 위기를 나 몰라라 할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저도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어 이곳에 오고 싶었습니다.”
그의 말은 한 점 거짓 없는 진실 같아 보였다. 적어도 표정만으로는.
제갈초홍은 그와 몇 마디의 말을 더 나누고는 회의장으로 그를 안내했다. 그를 회의장으로 데려 간다는 건 어느 정도 그에 대한 일종의 심사를 거쳤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회의장엔 여러 사람이 모여서 담론을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제갈초홍이 들어섰음에도 그들은 하던 애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번 낙양의 사태만 놓고 본다면 저들의 의도가 단순히 무림에만 국한되어 있다고 볼 수 없다는 겁니다.”
마도8문의 하나인 태양성주 태양존자의 말이었다. 그 말을 받은 이는 남도맹의 장로 출신인 패천광도 진자량이었다.
“그건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잖습니까?”
“그건 그렇죠. 우리가 논의해야 할 것은 그런 게 아닙니다. 야림이 저렇게 풍비박산 났으니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단 겁니다. 더군다나 그들이 어떻게 야림의 근거지를 알아냈는지도 알아야 하고. 만약 여기도 알려질 가능성이 있다면 하루 빨리 옮겨야 한다는 것이지요.”
사실은 그게 가장 급한 일이었다. 여기서 적들이 세상을 멸망시키려 한다고 종일 떠들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제갈초홍이 정리해 가기 시작했다.
“당문주님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정황을 종합해 본 제 생각을 먼저 말씀드리자면 그들이 알아낸 곳은 단지 천하제일세가주의 장원뿐이란 사실입니다. 그들이 낙양 시내를 불바다로 만든 것은 숨어 있는 야림의 전력을 끌어내고자 했던 이유로 추측됩니다.
결국 그들이 알아낸 건 드러나 있는 천하제일세가의 건물뿐이고 비밀 지단에 대해서는 전혀 알아내지 못했다는 거죠. 만약 그들이 알아냈다면 이미 동시적인 공격이 몇 곳인가는 있었어야 정상입니다. 그리고 듣기로 천하제일세가에서 발견된 시체는 한두 구뿐이라 합니다. 미리……대피했다고 여겨집니다.
제가 지금 회의를 연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앞으로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지존께서 돌아올 때까지 무기한 활동을 정지하고 외부 출입을 금지시키겠습니다.”
“으음.”
“하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그렇게 하시오, 군사.”
“그게 좋겠어.”
모두들 동조하는 눈치였다. 그들 역시나 불안하기는 매 한가지였던 것이다.
“그럼 그 안건은 그렇게 결정된 걸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소개시킬 분이 한 분 계십니다. 대산장의 쾌거와 저번 정도사령대의 위기, 그리고 이번 명공자의 생명을 구하신 분입니다. 명호는…… 저도 모릅니다.”
“오오.”
“그 신비인이…….”
“으음.”
모두의 관심은 지극했다. 몇몇 사령들은 존경의 염으로 쳐다보기까지 했다. 그걸 발견한 제갈초홍은 내심으로 고개를 저었다.
“명호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저는 원래 이름이 없습니다. 굳이 부르시려면……천(天)이라 부르십시오.”
“천?”
“호오.”
“천……공자님. 잠시 물어 볼 것이 있습니다만…….”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천 공자님의 출신이 어딘지 물어도 될까요?”
모두들 궁금해하는 것이기도 했다. 대체 어디 출신이기에 그 정도의 무공을 이렇게 젊은 나이에 익히고 있단 말인가, 라는 의문이었다.
“저……그것이 말씀드리기가 상당히 곤란하군요.”
“왜죠?”
제갈초홍의 음성이 갑자기 냉랭해졌다. 자애에 있던 모든 사람들도 그걸 느꼈다. 그녀가 그러는 이유를 짐작한 사람들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의심을 받는다는 건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는 걸 의미했기 때문이다.
“말한다 해도 여러분이 모르는 곳일 겁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여기 있는 사람이 모르는 곳이 어디 있단 말이요? 혹시 새외요?”
은의인은 한참 동안이나 우물쭈물하며 망설였다. 그러자 의혹은 점차 커져 갔다.
“후유, 할 수 없군요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출신은 굳이 말하자면……은자천이란 곳입니다.”
“뭐요? 은자천?”
“은자천이라고?”
“그곳이 어디요?”
“중원에 그런 문파도 있었나?”
한꺼번에 터져 나온 의문과는 달리 제갈초홍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한편으로 그녀는 반가운 마음마저 살짝 일어났다.
“정말 은자천에서 오신 건가요?”
제갈초홍이 들뜬 음성으로 묻자,
“은자천을 아시오?”
라고 은의인이 되려 물었다.
“잘 아는 건 아니고…….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그녀는 밖으로 부리나케 나가는 것이었다. 모두들 무슨 일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해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태양이 지는 대지’에서 온 사내를 데려 왔다. 그가 안으로 들어서자 모두들 고개를 갸웃했다.
“군사, 이 사람입니까?”
“네.”
“귀 공의이름이 어떻게 된다고 하셨습니까?”
“천이라 합니다만.”
“으음……은자천 중 어디 출신이십니까?”
“동천입니다.”
“은자처의 천주는 누구지요?”
갑자기 심문하는 분위기가 되고 말았음에도 천이라 자는 별로 싫은 기색이 아니었다. 당연히 거쳐야 할 과정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천주라고 할 수는 없고 지도자라 하면……삼풍진인입니다.”
“오, 잠상풍 진인이 천주란 말인가?”
“은자천이 뭐 하는 곳이기에…….”
여기저기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이건 정말 은자천 출신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럼 귀하는 모르는 걸 묻는다는 겁니까?”
“저는 우연히 알게 된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은자천 출신이라면 모두 알고 있지요.’
모두 긴장하기 시작했다.
“질문하세요.”
“은자천에서 삼십 년 간 한 번씩 정례적인 모임을 갖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회의의 명칭이 무엇입니까?”
듣고 있던 제갈초홍도 그 질문이라면 진정하게 그의 신분을 가릴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모두들 천이란 사람의 입만을 주시했다. 침 넘어가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장내는 고요하기만 했다.
“이것 실망을 드려서 죄송하군요. 금시초문이군요. 언제부터 은자천에 그런 모임이 있었다는 건지…… 저는 당연히 모릅니다. 제가 있던 은자천은 그런 모임이 없습니다.”
모두의 시선에 경악이 넘실거리는 순간…….
“하하하하, 은자천에서 오신 분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제가 실례를 했다면 용서하십시오.”
모두들 멍청히 굳어 있었다. 몇몇은 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있었다.
제갈초홍은 생긋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중원무림맹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천 공자님.’
분위기는 금세 부드러워져 갔다. 다들 다시 자리에 앉은 이후 제갈초홍이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이후 총단의 전력에 대해서도 각 지단별로 이동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리고 대외적인 활동은 정도사령대에만 국한시키겠습니다. 천 공자님께서 정도사령대를 이끌어 주셨으면 합니다만……해주시겠죠?”
제갈초홍의 부탁이 아니라도 무엇이든 하고자 했던 그였고, 더군다나 미인의 마력적인 미소 앞에 거절할 만큼 그의 담량은 크지 않았음에야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는 쾌히 승낙했다.

정도사령대에게 맡겨진 임무는 적들의 단위 조직에 대한 간헐적인 공격이었으며, 이는 적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것이었다. 어찌 보면 무모하기 그지없었다. 오백의 사령들이 감당할 수 있는 단위 조직이라 해봐야 무왕부의 지부 정도였으며, 거점을 마련하지 못하고 대륙을 떠돌며 기습을 펼치는 것이기에 퇴로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적뿐인 곳에서 이들의 안전은 그 누구도 보장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무리한 작전을 수행하게 된 데는 시선을 끌어 조금이라도 민간의 희생을 줄여 보자는 데 있었다. 작전대로만 진행되어 각 직역에 산재해 있는 비밀 지단을 적절히 활용할 수만 있다면 생각보다 더 큰 효과를 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에게 뭔가 희망이라도 줄 수 있기를 바라는 심정들뿐이었다.
사령들은 각오를 다지고 결전에 임했다. 그들이 첫 번째 목표로 한 곳은 사천이었다. 사천 중경에서의 거사를 기린다는 의미였다. 중경에 머물고 있는 적의 수는 겨우 삼백에 불과했다.
이들을 치기 위해 사령들은 비밀리에 사천 땅으로 들어섰다. 한 조에 다섯 내외로 움직였다. 모두의 심정은 동일했다. 이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이 아니다. 단지 마지막 결전에 참여하고 싶다는 여망을 위해 끝까지 살아남고 싶을 뿐이었다.
사천에 모이기까지 삼 일이 걸렸다. 이들이 이동하는 중에도 각지에서 들려 온 소식들은 마음을 아프게 했다. 광동에서 또 한 번의 대참사가 일어나 삼천이 넘는 생명이 헛되이 낙화했다.
그런가 하면 대륙 곳곳에서 괴인들이 출몰해 이유 없는 살행들을 펼쳐 갔다. 아무도 그들이 죽음을 당해야 했는지에 대해 당대의 현자라 불리는 자들도 답을 주지 못했다. 보태지는 슬픔들은 점차 커져 갔지만 나눌 기쁨의 소리들은 들려 오지 않는다.
중원은 이제 끝장이다. 라는 분위기는 중원 도처에서 동시적으로 번져 가고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희망을 보려 하는 자들은 끊임없이 나왔다. 아무런 힘도 없지만, 적들의 심장에 도달하지도 못하고 꺾여 버리기 일쑤였지만 무황성의 무사들은 그 어디에서도 안심할 수 없었다. 농부의 낫이 무슨 위협이 될까마는 무황성의 무사들은 심정적으로나마 항시 쫓기는 마음들이었다.
중경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한산했다. 나그네들도 이곳에 들기를 피하고, 그나마 살아 남은 사람들도 모두 떠났기 때문이었다. 거기엔 어둠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이런 곳에 혈마천이 왜 수하들을 남겨 두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지리적인 요충지라는 이유만으로는 납득되지 않았다. 어둠을 몸에 두르고 움직이는 자들은 한 곳을 향해 전진했다. 혹시 소음이라도 날까 싶어 조심하는 모습들이었다.
쉬쉬쉭
경신술을 발휘해 빠르게 달려가는 자들의 얼굴은 살의로 가득했다. 중경에 단 한 곳, 그곳만은 대낮처럼 한하다. 불을 있는 대로 켜놓고 아침을 재촉하는 건지. 여기저기 보이는 경비 무사들은 밤만 되면 불어대는 기분 나쁜 바람 소리에 귀기울이고 있었다.
“겨울밤은 길기도 하지.”
“어서 교대를 해야지. 이거야 원,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분위기이니.”
“내일 총단으로 떠나는 놈들은 좋겠어.”
“그러게 말야. 이 죽음의 땅에 뭐가 있다고 여길 지키게 하는지 원.”
“윗분들이 다 생각이 있어서겠지.”
무사들은 저마다 볼을 실룩이며 입을 열었다. 그들의 입김이 여러 형태를 만들어 가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긴긴 겨울밤을 이렇게 서 있으려면 어지간한 인내심이 없이는 안 된다. 물론 체력도 필요하다. 이들은 그걸 대신 할 방법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한 사람이 품속에 감춰 온 독주를 꺼내 입 안으로 들이켰다. 그걸 본 다른 무사가 손을 내밀자 그는 군소리 없이 내어 준다. 서로 돌려 가며 한 모금씩 마신 그들은 뱃속에서부터 시작된 뜨거운 기운이 몸 전체를 퍼져 나가는 거러 기분 좋게 음미했다.
야간 경비조가 되면 누구나 술을 준비하기 마련이었고, 상층부에서도 웬만하면 모른 척 해주었다. 그들 역시 예전에 이런 경험들이 있었기에 이해하는 것이다.
“어? 저게 뭐지?”
한 모금으로는 양에 차지 않았던지 입맛을 다시던 무사 하나가 눈을 끔벅이며 하는 말이었다.
“뭔데 그래?”
“저, 저, 적……커억.”
고함 치려 한껏 벌린 입 사이로 무엇인가가 틀어 박혔다.
꾸럭
쓰러지는 무사는 그 하나가 아니었다.
쉬쉬쉭
날아온 것은 단검이나 표창이나 도끼 등이었다. 그것들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경비 무사들의 이마나 목을 관통했다.
후루루룩
정도사령대 오백 사령들이 담을 훌쩍 넘어 안으로 들어선 시간은 축시를 갓 넘긴 시점이었다. 웬만한 자들은 잠에 곯아떨어져 있을 시간이었다. 그들은 제지 없이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부수며 눈에 띄는 자들을 죽였다. 그 태도에 망설임은 단연코 없었다.
“크악.”
“적이다. 침입자다.”
때늦은 적의 침입을 알리는 소리는 연이어 비명으로 바뀌고, 늘어나는 시체를 밟고 사령들이 안으로,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전각 앞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서 있는 자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뒷짐가지 진 사내는 밤하늘에서 무엇을 찾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중원의 하늘은……아름답지만……슬프군.”
천 공자였다. 그는 굳이 격전에 참가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사령들의 실력으로 이 정도의 무황성 무사들을 해치우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 보였다. 경쟁이라도 하듯 들려 오던 비명성이 점차 잦아지는 것 같았다. 전각 안에서 걸어 나오는 이는 남궁혁련이었다. 그의 빼든 검에서도, 옷자락에서도, 심지어 머리칼까지 피가 묻어 있었다.
“거의 마무리되었습니다.’
“다음 지역으로 이동시키세요.”
“존명.”
남궁혁련은 힘차게 대답한 뒤 전각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등을 바라보던 천 공자 입에서 나직한 말이 흘러 나왔다.
“시작은……화려하군.”

사천 중경을 시작으로 사천성 일곱 개 지역의 지부에서 닷새 동안 3200명이나 해치운 정도사령대는 이후 섬서로 넘어간다. 낮이면 비밀지단에 은신하고 밤이면 움직이는 그들의 신출귀몰한 공격에 혈마천 고수들은 변변한 대항 한 번 못해 보고 전멸한다. 그렇다고 그들의 꼬리를 잡은 것도 아니어서 항상 뒤만 쫓는 꼴이었다.
정도사령대의 피해는 사망 스물세 명에 중상 서른일곱이었다. 중경 이후로는 천 공자도 가담을 했기 때문에 좀더 쉽게 끝나긴 했지만 사상자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일이 이쯤에 이르자 개봉의 하남무왕부에서 3천의 정예를 파병했으나 그들이 하는 일이라곤 이미 폐허가 된 곳을 뒤적이고 다니는 꼴이었다. 섬서로 넘어가 사령대에 천 공자의 명이 하달되었다.
“앞으로 이틀 간 휴식을 취하도록 하세요. 이후 장기간의 작전이 계속될 것 같으니 충분히 재충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랜만에 흡족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쉬는 것이 가시방석에 앉은 것 마냥 불편하기 그지없었는데 지금의 휴식은 달콤하기만 했다. 천 공자는 몇 사람의 인원만 데리고 섬서성 성도인 서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¼­¾EAC ºÐA§±a´A ºn±³Au A¶¿eCß´U. 사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기도 모르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김없이 그 얘기가 오가는 건 다르지 않았다.
천 공자를 비롯한 세 사람이 객잔을 들어선 때는 점심시간이었던 지라 사람들이 많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일층과 이층을 합해서 쉰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이 정도 시진에 중심가에 객잔이라면 사람들도 미어져야 정상인데 아무래도 근래 중원의 사정 때문인 듯 했다. 어디를 가도 안심이 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사람들의 심리가 밖으로 나다니지 않게 하는 것 같았다.
이층 창가에 자리잡은 세 사람은 천 공자와 남궁혁련, 그리고 팽정후였다. 그들 삼 인은 정도사령대의 실질적인 수뇌들이었기에 며칠 뒤에 있을 혈마천 서안지부에 대한 공격에 대비하여 조사를 겸해서 나온 것이었다. 서안은 섬서성의 성도라는 점과 혈마천의 주력이 포진되어 있는 하남성과 사천의 연결점이라는 요충지였기 때문에 상당한 수의 무사들이 주둔할 것이라 생각되는 곳이기도 했다.
세 명은 점소이가 가져온 술과 안주를 들며 전음으로만 대화를 나우었다.
[식수 후에 곧 바로 조사를 시작하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남궁 사령께서는 지부의 인근 지형을 조사해 주시고 팽 사령께서는 서안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특이한 것은 없나를 조사해 주세요.]
결국은 혼자 지부 내부를 조사하겠다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만류하지 않았다. 그라면 아무런 뒤탈 없이 일을 마무리 할 수 있을 만큼 안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모처럼 여유 있는 식사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언제 꼬리를 밟힐지 모른다는 부담감으로 식산들 제대 한 적이 있었던가. 흐트러짐 없는 천 공자의 모습을 보며 남궁혁련은 내심으로 생각했다.
‘꼭 대령사를 대하는 것 같구나. 실력도 실력이지만 위급함으로 판단하는 치밀함, 거기다 단호함과 너그러움을 함께 겸비한 것까지…….지도자로서는 손색이 없는 분이시다. 대령사께서 돌아오시고 두 분이 힘을 합한다면…… 중원은 든든한 반석을 얻는 셈이 되겠구나.’
남궁혁련은 그를 다시 올려다보다 그의 시선이 한 곳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을 보고는 의아해졌다. 남궁혁련과 팽정후가 고개를 돌려 객잔 안을 살피는데…… 그들은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은 충격을 경험한다.
‘저 분은 바로.;
두 사람의 얼굴은 묘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아는 얼굴이오?]
천 공자의 질문에 남궁혁련은 고개를 끄억였다.
[그렇습니다.]
이들 일행이 앉은 곳에서 반대쪽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중 한 명은 분명 두 사람이 잘 아는 얼굴이었다. 천향옥봉 자운! 광마존과 그 절절한 사랑을 중원무림맹 사람 치고 모르는 이는 얼마되지 않았다. 특히 파천의 측근이라 할 수 있었던 사령들이고 보면 그 간의 사정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지금 그들이 느끼는 감저은 참으로 미묘한 것이었다.
현재의 그녀가 어떤 상태인지는 그들도 아는 바가 없었다. 단지 광동무왕인 초량에게 납치되어 있었다는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를 광동이 아닌 섬서에서 보게 되었다는 점이 조금은 의아롭기만 했지만 반갑기 그지없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말을 건네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 그들의 심정을 알았는지 천 공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궁혁련과 팽정후도 함께 일어섰다. 그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천 공자는 곧장 자운에게로 가더니 포권을 취해 보였다.
“잠시 합석해도 되겠습니까?”
단아한 모습에 품위 있는 음성의 소유자를 자운은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 또한 식사중이었다. 그녀 주변에 앉은 여자들은 현천마녀들이었다. 대답 없이 물끄러미 쳐다보던 자운은 짤막하게 답했다.
“귀찮게 하지마.”
남궁혁련과 팽정후는 얼굴에 놀람을 담았다. 그들이 알고 있던 천향옥봉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소저, 저희들을 모르시겠습니까?”
남궁혁련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한 말이었다.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던 자운은 고개를 갸웃했다.
“너희들은 누구지? 날 아나?”
거짓으로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에서 남궁혁련은 그걸 읽을 수 있었다.
“잠시 합석해도 되겠습니까?”
천 공자는 또다시 그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자 자운의 얼굴에 짜증이 묻어난다.
“끈질긴 작자들이군. 합석해서 뭘 어쩌자는 거야? 귀찮으니 그만 사라져라. 괜히 나중에 억울하다고 하지 말고…….”
그 말을 하고는 시선마저 돌려 버리는 천향옥봉!
“잠시 합석을 해도…….”
“이것들이 정말!”

탁자를 내리치자 산산 조각나 흩어졌다. 미처 다 먹지 못한 음식들이 허공 중으로 튀어 올랐다. 현천마녀들은 자운이 화를 내자 곧바로 세 사람을 공격해 갔다. 천 공자는 슬쩍 몸을 흔들며 그녀들 중 하나의 완맥을 낚아챘다. 남궁혁련과 팽정후는 어느새 멀찌감치 물러서 있었다. 자운은 은의인의 수법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신기막측해서 자신조차 채 알아보지 못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호기심이 일었다.
“대단하군. 어떻게 한 거지?”
“합석을 해도 되겠지요?”
“호호호호, 재미있는 사내군. 좋아, 그렇게 소원이라며 그 정도쯤이야 못 들어 줄가. 여긴 탁자가 부서졌으니 너희들 자리로 가자.”
그러고는 성큼성큼 먼저 앞장서 걸었다. 천 공자는 싱긋 미소지으며 현처마녀의 팔을 풀어주었다. 그리고는 자운의 옆에 바짝 붙어서서 자리를 가리켰다.
“저곳입니다.”
남궁혁련과 팽정후는 아직도 어찌 된 상황인지를 몰라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자운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는 점소이를 불러 요리를 시켰다. 그 모습을 보는 천 공자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그래, 왜 합석하자고 한 거지? 목적이 뭐야?”
“별 것 아닙니다. 그냥 알아 두면 좋을 것 같아서 말이죠.”
“그대는 이상한 사내군. 내 미모에 반한 건가?”
“그럴 리가요?”
천 공자의 대답은 듣기에 따라 다른 해석이 가능했기에 천향옥봉의 얼굴이 순간 기묘해졌다.
“물론 소저가 보기 드문 미인이라는 건 인정합니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천 공자가 얼른 이렇게 말했다.
“보기 드문 정도밖엔 안 되나 보지?”
“정정하죠. 만에 하나 있을까 말까한 미인이십니다.”
“뭐, 그런대로 들을 만하군. 당신들! 중원무림맹 소속인가?”
그녀는 별 의미 없이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객잔 내 사람들의 표정은 그게 아니었다. 벌건 대낮에 스스로 중원무림맹의 무사라고 떠들고 다니다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세상이었다. 이곳 서안 역시나 곳곳에 혈마천의 개들이 두 눈 벌개서 설치고 다닌 곳이 아니었던가.
“그렇소.”
천 공자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남궁혁련과 팽정후까지 놀란 표정이 되었다.
[어찌하시려고 그러십니까?]
“흐음, 용기가 있군. 나야 뭐 소속 같은 건 어찌 되든 상관없긴 하지만……. 그렇다고 중원무림맹을 인정하는 건 아냐. 나는 말야. 당신들을 겁쟁이라고 생각해.”
“그건 왜죠?”
“왜긴, 몰라서 물어? 쥐새끼처럼 꼭꼭 숨어서 제 목숨이나 지키고 있는 꼴이 그렇잖아. 왜? 내 말이 틀렸어?”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니까……. 그건 그렇고 소저는 원래 그렇게 누구에게나 반말을 하시오?”
“왜? 기분 나빠?”
“좋을 리야 없지요.”
“호호호호”
그녀는 한참동안이나 호들갑스럽게 웃어젖히고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난 나보다 강한 사람만 인정해.”
“내가 소저보다 약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보죠?”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그녀의 눈빛이 야릇해지기 시작했다. 승부욕이 동하는 것 같았다.
“어때? 나와 한 번 붙어 볼까?”
“자시이 없군요.”
“이것 뭐 이래. 그렇게 쉽게 꽁지를 내릴 줄은 몰랐는데.”
“후후후, 내 말은 여자를 두들겨 팰 자신이 없다는 말이었소.”
“나가지.”
“원한다면…….”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남궁혁련 등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렇게 해서 이들 일행은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다짜고짜 혈마천 서안 지부로 들어섰고 천 공자 등은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이렇게 들어가도 되는 겁니까?]
[죽기야 하겠습니까?]
[어쩌자고 이런 일을 벌이시는지……]
[그냥 그러고 싶어서요.]
그냥 그러고 싶었다는 말을 남궁혁련은 되씹어 보았다.
‘저 분이 저럴 때도 있구나.’
남궁혁련과 팽정후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물론 자신들의 용모를 이들이 알아볼 일은 없겠지만 적의 심장 속으로 들어온 것이 영 꺼림칙한 건 사실이었다.
천향옥봉이 안으로 들어서자 지부장격인 책임자가 머리를 땅에 닿을 듯이 허리를 굽히고는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혈마천주의 제자가 왔으니 그야 당연했지만 그것보다 그녀에 대한 무지막지한 소문을 귀따갑게 들어 왔기 때문이다.
연무장에 두 사람은 마주하고 섰다.
“소저를 이기면 내게 어떤 이로움이 있소?”
“그야 이겼다는 만족감을 얻을 수 있겠지.”
“그것 외는 없는 거요?”
“흐음……. 무얼 원하지?”
“소저부터 말해보시오.”
“자신 있나 보군. 좋아, 내가 이기면 넌 내 종이 되는 거야. 어때?”
“좋소.”
“너는 뭘 원하는데?”
“난 이기면 말하겠소.”
“좋아, 시작하지.”
지켜 보는 사람은 많았다. 천 공자가 이길 거란 걸 남궁혁련과 팽정후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천향옥봉 자운의 무공이 뛰어난 건 사실이지만 천 공자에 비하면 한참이나 낮은 수준이란 걸 알고 있는 두 사람은 비두의 결과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주변을 둘러보며 건물의 배치와 구조에 관심을 기울였다.
자운의 눈 깊은 곳에서 흘러 나온 기운은 흥분이었다. 진정한 강자를 만나게 되었다는 본능적인 기쁨이 그녀의 전신 곳곳을 누볐다. 자신의 사부인 혈마천주를 마주 대하고서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다.
“당신……강한 사내군.”
그 말이 모든 걸 대변하는 듯했다. 자운의 말에 천 공자는 피식 웃었다.
“먼저 공격하시오.”
“좋다, 자존심을 내세울 필요는 없겠어.”
그만큼 상대를 인정한다는 말이리라. 자운은 들고양이가 웅크린 듯 신중하기만 했다. 근래 누구에게도 이 정도로 자신을 끌어당기는 흡입력을 느껴 보지 못했다. 그녀는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투지가 일어났다. 그래서 강자만이 지니는 그 오만한 미소를 처참하게 뭉개 버릴 때 진정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지만……오늘은 힘들지도 모르겠는데.’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그저 강한 상대라고만 느꼈는데 마주 대하고 보니 이건 커도 너무 컸다. 허점은 전무했고 자신의 몸을 옭아매는 위압감은 태산을 대한 듯했다. 그렇다고 상대가 의도적으로 기운을 뿜어내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자운의 허리가 뻐근해지도록 상체를 뒤로 젖혔다. 심호흡을 한 것이다.
“간다.”
피슝
“인간의 몸놀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쾌속으로 움직였다. 한 발을 앞으로 쭉 뻗으며 적의 턱을 차려는 의도였다.
스스스스
그렇지만 적의 모습은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지고.
자운은 이미 예상하고 있던 터라 뒤로 돌며 장력을 뿜었다.
파앙
가죽 북이 터지는 소리가 나며 그녀의 손에서 뿜어진 장력이 고스란히 허공을 때릴 줄은 그녀 자신도 몰랐다.
‘없다.’
핑그르르
그녀는 허공으로 신속하게 몸을 뽑아 올리며 회전했다.
‘어디 갔지? 어디에…….”
그녀는 회전하며 사방을 살폈지만 그 어디에서도 상대를 발견하지 못하자 순간 당황했다. 관전하고 있던 사람들은 입을 쩌억 벌리고 그 모습을 지켜 보는데 그들의 눈동자가 향하는 곳은 자신 쪽이 아닌 위쪽이었다.
‘이런’
그녀는 몸을 뒤집으며 허공으로 장력을 발출했다. 그러나 이미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하앗”
그녀는 허공을 차면서 재차 도약해 훌쩍 뒤로 물러섰다. 사방을 경계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대단한 공격이었소.”
그 자는 처음 그 자리에 그림처럼 서 있었다. 자운은 망연자실했다. 혼자 춤을 춘 꼴이 되었으니 부끄럽기도 했다.
“그렇게 빠른 이형환위는 처음이야.”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형환휘를 펼칠 수 있는 고수들이라고 하더라도 그걸 연속적으로 펼치는 건 무리가 따랐다. 공격 소모가 지대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위급한 경우가 아니면 그다지 펼칠 필요성이 없는 신법이기도 했다.
‘그런데 저 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연속적으로 펼치고 있으니…….”
그녀는 새삼 상대가 대단하단 생각마저 들었다.
“혹시……혈마천의 삼대마공을 익혔소? 알고 있다면 그걸 펼쳐 보시오.”
자운은 상대의 자신감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삼대마공은 가히 그 짝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패도적인 무공이다. 사부 역시 아직까지 완전하게 펼치지 못한다고 고백할 정도였지. 좋다, 이것마저 네가 막아낸다면 인정해 주지.”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검을 다오.”
자운은 옆에서 관전하고 있던 지부장에게서 검을 건네받고는 신중하게 검을 뽑았다. 신비의 삼대마공 중 세상에 공개된 건 단 하나에 불과했다. 혈마환살검! 천마 시대에 존재했던 혈마교의 삼대마공 중 최하위의 무공이었다.
천마의 말을 빌리면 대성하면 무형검의 수준에 이른다는 검법! 그것을 자운은 펼치려 하고 있었다. 한 손으로 검 자루를 잡고 허공을 향해 꼿꼿이 세웠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을 펼쳐 아래에 받친다. 시꺼먼 기류가 순식간에 자운의 몸을 덮어씌우기 시작했다.
바닥에서 시작된 기류는 점차 위로 차 오르며 자운의 전신을 가렸고 검극만 조금 보일 뿐이었다. 천 공자는 무심한 시선으로 주시하고만 있었다. 점차 검극이 움직이며 환영을 만들어 갔다. 아래에서 위로, 좌에서 우로 움직일 때마다 수십 개의 환영이 물결을 이루며 넘실대었다. 그러던 검극이 빛을 발하며 그 형체마저 온전히 숨겨 버린 순간이었다.
번쩍
빛의 폭풍인가……. 묵(墨)기류는 여전했는데 그 안에서 터져 나온 밝은 빛은 수십 줄기에 이르렀다. 먹구름 속에서 갑자기 드러나기 시작한 태양이 저러할까 싶었다.
천 공자의 손바닥 하나가 앞을 향해 활짝 펼쳐졌다. 또 하나의 손은 펼쳐진 손바닥 아래쪽을 감쌌다. 그러자 그에게서도 신비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하나에 불과했던 손바닥이 점점 늘어나며 허공을 가득 메우는가 했는데, 그 하나 하나의 손 그림자들이 푸르스름한 빛에 쌓여 있는 것이었다.
콰콰콰쾅
“으윽”
주위에 관전하고 있던 자들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픽픽 쓰러지는가 하면 청강석 바닥이 터져 올랐다. 뿐만 아니라 갑자기 돌개바람이 형성되어 허공으로 먼지를 말아 올리기까지 했다. 남궁혁련과 팽정후는 사정권 밖으로 물러서 있었는데 힘에 겨운지 비틀거렸다./
먼지가 가라앉고 난 뒤의 광경은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분명 허공 중에서 격돌했는데도 불구하고 바닥에 깊이 한 자, 넓이가 일장에 달하는 구덩이가 움푹 패여 있었디/
자운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것도 받아 봐라.”
자운의 검은 곧장 천 공자의 전면으로 날아갔다.
‘이기어검인가?’
천 공자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려는 찰나였다.
“어림없다.”
콰앙
검에서 폭발이 일었다. 검이 터진 것이다. 수백 개의 조각들이 사방을 향해 일순간에 퍼져 나갔다.
“이런 지독한…….”
천 공자는 자신이 피하는 순간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이 위험함을 깹랑았다. 그의 두 손이 빠르게 원을 그렸다.
번쩍
하나의 원이 완성되는 순간, 눈을 뜨지 못할 만큼 강렬한 빛 무리가 허공을 향해 치솟았다. 그러자 깨어진 검편들이 빛 무리를 따라 함께 허공으로 솟아올라 갔다.
그 때를 자운은 놓치지 않았다. 이미 모든 건 계산된 행동이었다. 그녀는 검지와 중지만으로 이마에 살짝 댔다가 앞으로 뻗었다.


새파란 강기가 일직선으로 쭉 뻗어 왔다.
“겨우 이런 걸로는 안 되지.”
천 공자는 또다시 손바닥으로 원을 그렸다.
번쩍
콰콰쾅
연거푸 폭발음이 울렸다.
“그것뿐인 줄 알았더냐!”
다시 앞으로 뻗은 손가락! 좀 전과 다른 것이 없어 천 공자 역시 손바닥을 내밀었다.
“저, 저건…….”
파앗
일직선으로 오던 강기가 수십 가닥으로 분리된다. 그 중의 일부는 확 휘어져서 허공으로 치솟고 일부는 땅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일직선으로 뻗어 왔다. 이번에도 천 공자는 피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피한다면 뒤에 있는 사람들이 죽음을 당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그로서는 어떻게든 견뎌야만 했다. 그러나 워낙에 창졸간에 벌어진 변화인지라 미처 방비하지 못했다.
“타앗.”
그의 모공에서 치솟은 강기가 순식간에 전신을 감싼다. 한 겹, 두 겹…….
두꺼운 호신강기를 자운의 강기가 파고들기 시작했다.
“으음.”
그는 뒤로 물러서며 더욱 호신강기를 끌어 올렸다.
허공 중에서 내리 꽂히는 강기와 땅 속에서 치솟은 강기가 그의 몸에서 만났다.
콰쾅
“헉.”
순간 그는 호신강기를 풀지 않은 채 몸을 제자리에서 회전했다.
핑그르르
그의 몸은 허공 중으로 급속하게 떠올랐다.
“마지막이다.”
화아아악
그녀의 몸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땅속에서 몰아치기 시작하는 바람인 듯 싶기도 했다. 그녀의 옷과 머리털이 허공으로 치솟고, 몸의 중심선을 타고 혈광이 꿈틀대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온 소리에 살아 있는 사람들은 귀를 털어 막았다.
[두 분은 어서 이 자리에서 피하세요.]
다급한 천 공자의 전음에 남궁혁련과 팽정후는 전력을 다해 몸을 솟구쳤다. 그들은 도무지 눈앞의 일을 믿을 수 없었다. 아무리 그녀가 혈마천주의 제자라고는 하지마 어찌 저렇게 강할 수 있단 말인가. 의문이 두 눈에 가득했다.
‘저건 무형검의 일종이다. 무형이 다시 유형으로 회귀하는 것이니 검의 극의를 보았구나. 그렇다면 나도 이에 상응하는 대접을 해 줘야겠다.’
그는 두 손을 모으고 머리 위로 올린 뒤에 허리를 뒤로 힘껏 제쳤다. 그 때 그녀의 몸을 타고 오르던 혈광이 그녀의 두 손과 두 눈과 벌린 입 사이로 빠져 나오기 시작하더니 점차로 그녀의 모공 전 부분을 통해 치솟기 시작했다.
번쩍
천 공자를 향해 진격하는 강기들은 단지 붉은 빛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게 어떤 위력인지 천 공자는 잘 아는 듯했다. 그 순간 그의 휘어졌던 허리가 앞으로 접히며 한데 모은 두 손을 아래로 향해 힘껏 뿌렸다.
콰아아아
그 끝이 어디에 닿아 있는가. 거대한 빛 무리가 그의 손과 허공 어딘가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반월을 그으며 힘차게 내리꽂힌다. 두 미증유의 거력이 한 점에서 격돌했다.
고오오오
슈유
번쩍
콰콰콰쾅
태풍이 몰아치는가, 낙뢰가 내리 꽂혔는가. 그도 아니면 산같이 모아들인 폭탄을 터트렸는가.
인간의 몸으로 일으킨 힘이 부딪쳤을 뿐이건만 방원 이십 장 내가 갈가리 찢어져 갔다. 아직도 미처 피하지 못하고 있던 혈마천 서안 지부의 무사들은 그 충돌의 세력권 내에 있었다. 그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조각나 흩어졌다. 공포에 물든 눈,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채 이해하지 못한 얼굴, 그 상태로 그들의 몸은 산산이 산화해 버렸다.
“헉, 헉, 대단……하구나. 이기리라 믿었는데……너……아주……멋있어.”
자운은 그 말을 끝으로 혼절하고야 말았다.
쓰러지는 자운의 몸을 천 공자의 팔이 안아들었다. 현천마녀들이 다가온다.
“그녀는 괜찮을 거요.”
천 공자의 환한 미소가 그녀들을 안심시켰다.

졸지에 정도사령대가 할 일이 없어져 버렸다. 서안지부를 치려 했었는데 천 공자와 천향옥봉의 싸움으로 떼죽음을 당하고야 만 것이다. 이 일은 서안을 지나 섬서성을 넘어 중원 대륙 전체로 퍼져 나갔다.
폐허가 된 곳을 둘러 본 사람들과 멀리서나마 목격한 사람들은 인간과 인간이 대결한 거라고는 믿을 수 없다 했다. 그렇지만 어찌해서 퍼져 나갔는지 중원 전체엔 대 격돌을 벌인 두 사람의 신원이 비교적 정확하게 공개되었다. 천 공자라 불리는 인물과 혈마천주의 제자인 천향옥봉!
둘이 싸운 여파에 혈마천 서안지부가 괴멸되었다는, 이 믿을 수 없는 소식은 곧장 열화와 같은 환호성으로 뒤바뀌고 말았다. 천 공자가 동정호 대산장의 쾌거와 최근 사천성의 혈마천 지부들을 괴멸케 한 주인공이란 소식이 더해진 결과였다. 일약 그는 중원의 대영웅으로 찬란한 태양처럼 떠받들어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그의 이름을 신화의 주인공과 동일시했고, 중원 모든 처녀들의 방심은 그 이름 앞에 흔들렸다. 중원을 구하소서! 이런 외침이 천지 사방에 메아리쳐 갔다. 중천에 떠 오른 태양도 이 이름처럼 위대하지는 않았다.
점차 중원인들은 그를 난세에 홀연히 나타난 구성(救星)으로, 힘없는 민초들의 영원한 친구로까지 부르게 되었다. 소문은 부풀려지고 그의 이름은 신성시되기 시작했다. 기다림에 지친 자들이 붙잡은 것은 더 이상 위대할 수 없는 거인의 옷자락이었다. 그것이면 족했다. 시간이 흐르고 세원은 제 옷을 성급하게 갈아입어도 그 이름은 식을 줄 몰랐으며, 이와는 반대로 점차 중원무림맹주 파천의 이름은 잊혀져 가기만 했다. 더 이상 그를 기다리지 않아도 좋을 사람들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희망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나는 태양이 지는 대지에서 왔다.”
“나는 달이 뜨는 대지에서 왔다.”
이 말이면 되었다. 그 외에는 무엇인가를 물으려고도, 요구하지도 않았다. 죽였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살아 숨쉬는 인간을 그들은 죽여 갔다. 그들을 피해 달아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처럼 믿어졌다. 생긴 모양이나 쓰는 무공은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한 가지였다. 사람을 죽이는 것.
배고프면 먹고 잠이 오면 아무데서나 잤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았다. 한쪽은 해가 지면 가서 쉬었고, 또 다른 쪽은 달이 사라지면 어딘가로 떠났다. 그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았지만 워낙에 행동 반경이 넓어 정확한 수를 측정하기도 힘들었다. 상대가 무황성이건 중원의 무사건 대항할 히도 없는 어린아이건 구별함이 없었다. 그들은 살인하기 전에 먼저 말했다.
“나는 태양이 지는 대지에서 왔다.
“나는 달이 뜨는 대지에서 왔다.”
그리고 예외 없이 모두 죽었다.

“여기가 우리의 새로운 출발점인가? 참 초라한데.”
“그렇군.”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면 웃었다. 어깨를 당당히 펴고 두 손을 맞잡은 그들은 초량과 상여락이었다. 일월교주의 명으로 사라졌던 두 사람이 다시 중원에 나타난 것이다. 그들이 무얼 얻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풍기는 기운만은 예전과 달랐다. 광동성 광주의 어느 허름한 장원이었다./ 그들은 한 곳으로 가 목함을 열었다. 그 안엔 서찰이 한 통 있었을 뿐이다.

먼저 너희들의 세력을 일으켜라. 만약 너희의 사부와 사형을 설득시키기ㅣ 곤란하거든 죽여도 무방하다. 그 힘으르 완전히 얻은 뒤 새외 세력으르 하나로 통일하고 연 이어 마전주와 내밀원주를 죽이는데 주력하라. 혈마와 힘을 합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고 천마는 끝까지 적대하지 마라. 그를 잃으면 모든 걸 잃는다. 명심해라. 천마는 동지를 만들지 못하더라도 적으로 삼지는 마라. 너희가 먼저 치지 않는 한은 그가 너희를 치지는 않을 테니.
(후략)

일월교주가 그들에게 남긴 서찰이었다. 그들은 조금은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마전주와 내밀원주를 죽이라는 건가?”
“흐음, 재미있겠군.”
“그 오만하 놈들은 죽이지 말래도 죽일 생각이었는데…….”
“어떤가? 자넨 누굴 맡을 건지?”
“내가 내밀원주를 맡지.”
초량이 하는 말에 상여락이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마전주는 내 차지군.”
“사부를 죽여도 무방하다고…….크크크크, 교주가 너무 흥미로운 제안을 하는군.”
“사형을 죽일 필요는 없는데 말야. 설득되지 않는다면 병신이라도 만들어 어디 구석에 처박아 둬야겠어.”
두 사람은 서찰의 내용을 하나하나 짚어 가며 킬킬거렸다.
“천마가 그렇게 대단한가?”
“현재 우리의 힘이 어떨지 미리 알고 있었을 교주야. 그가 이렇게k 말하는 걸 보니……무서운 놈인가 봐. 좋아, 아주 좋아. 모조리 죽여 주마. 우리의 힘이 최고임을 보여 주고 말겠다. 크하하하.”
두 사람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아니, 정신은 멀쩡한데 성격이 포악해진 것도 같았다. 어쨌든 두 사람은 돌아왔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중원에 비수를 꽂기 위해 그들이 돌아온 것이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야비하고 잔인한 두 사람이 앞으로의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무도 몰랐다. 심지어 그 자신들조차.

뇌령은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마전주에게 불려 가 혼나는 거야 어제 오늘 일도 아니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하지만 오늘은 정도가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전주는 자신에게 절대적인 신앙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일월교에 편입되었을 때도, 자신이 섬기는 주군이 누군가의 수하가 되었단 걸 알았을 때도 그는 믿고 기다렸다. 무슨 생각이 있으시겠지. 그 믿음 하나면 되었다.
최근에 혼세마인들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그 칼날을 무황성으로까지 돌려 세워도 별일 아니라며 웃은 기억이 있었다. 그런데 방금 그는 마전주에게 불려가 호된 꾸지람을 들어야만 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무림에 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그놈들을 한놈식 요절을 내주고 싶었지만 명령이 없으니 그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쥐새끼 같은 놈들! 그놈들을 잡아다 갈기갈기 찢어 죽이리라. 누구냐?”
뇌령은 밖을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속하입니다.”
“무슨 일이냐?”
“빙화라는 계집이 혈마를 찾아 왔습니다만…….”
“그래서?”
“잘못 알고 이곳으로 들어왔기에 잡아 두었습니다.”
“그래?”
뇌령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빙화라면 천황부주의 제자르르 말하는 거였다.
‘고년이 혈마는 무슨 일로……?”
“지금 어디 있느냐?”
“내실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흐흠…… 알았다. 내 곧 가마.”
“네.”
뇌령은 밖으로 나가며 수하를 쳐다보았다. 얍삽하게 생긴 노인은 그보다는 한참이나 서열이 아래였지만 그가 신임하는 자였다.
“너 말고 또 누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느냐?”
작은 소리로 묻는 뇌령에게 수하는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아무도 없습니다.”
“입을 다물어라.”
“당연하지요.”
뇌령은 조금 전까지의 좋지 않던 기분이 씻은 듯 사라지는 걸 느꼈다.

내실에서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빙화는 밖에서 들려 온 인기척에 몸을 일으켰다.
“강서무왕부에 있어야 할 빙화 소저가 여긴 어인 일이시오?”
빙화는 사형인 혈수천자를 찾아 왔다. 그가 들어올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이 들어오자 내심 긴장했다.
“전…… 혈마님을 뵈러 왔습니다.”
“자, 그 자리에 앉아서 차근차근 얘기해 보시오.”
생긴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따뜻한 미소를 내보이는 뇌령! 그의 앞자리에 빙화는 다소곳하게 앉았다.
“혈마님은 왜 찾는 거요?”
“저, 그것이……직접 만나서 할 얘기인지라.”
‘요년이.’
“하하하, 내가 괜히 참견을 한 거라면 죄송하군려. 혈마님은 지금 출타중이시오. 멀리 나가신 걸로 아는데…… 기다리겠소?”
“네.”
“언제 오실지 모르니 그 이유나 한 번 말해 보구려. 그 분을 아무나 만나게 할 수는 없지 않겠소?”
“…….”
고개를 숙이고 있는 빙화의 하얀 목덜미를 뇌령은 음침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말하기 곤란하면 하지 않는 건 소저의 자유지만…… 이것 한 가지만은 알아 둬야 할 거요. 그 분이 아무나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분은 아니란 거지요.”
“말씀……드리겠습니다.”
‘진작에 그러지.’
“사실 혈마님은…… 제 사형이십니다.”
‘이건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란 말인가?’
그가 혈수천자임을 아는 사람은 총군사와 내밀원의 몇 명뿐이었다. 그가 완전한 각성을 한 지금 그 사실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이었다.
“호오, 그랬소?”
“네에. 그 분을 만나 할 말이 있어서요.”
“내게 먼저 해보시오.”
빙화는 고개를 들고 뇌령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둠이 머물러 있는 눈동자는 한편으론 맑기도 했다.
“죄송합니다. 그 분이 아니면…… 할 수 없어요.”
“흐음, 그럼 할 수 없구려. 여기서 기다리시오.”
뇌령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밖으로 나가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뭔가 사연이 있나 보군. 혈마의 사매라……. 아주 좋아.’
그가 밖으로 나가고 나자 그제야 빙화는 등을 기대고 편하게 앉았다. 방 안을 살펴 가던 빙화의 눈에 구석을 차지하고 길게 드러누운 침상이 들어왔다. 분명 집무실이라고 했는데 왜 침상이 놓여 있는지 의아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휴식을 위해 갖다 놓은 거겠지, 생각하고 말았다.
시간은 자꾸 흘러 갔다. 그녀는 목이 말라 다시 찻잔을 손에 쥐었다. 하 모금 마시고자 들어 보니 안은 비어 있었다. 일어나 주전자를 손에 쥐었다.
“아.”
갑자기 빙화는 현기증이 났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는 걸 느끼고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팔을 들어올리려 애썼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그녀는 밖을 향해 큰소리를 질러야겠다 생각했다. 그렇지만 목은 열리지 않았다.
‘왜, 왜 이러는 걸까?’
그녀는 자신의 몸이 한없이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는다고 느꼈다.
‘아, 몸이 무겁기만 해.’
귀가 멍멍해졌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옆에서 천둥이 친다고 해도 들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온전한 건 시력뿐이었고 생각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혹시 마취약 같은 걸 먹은 건가? 왜? 그럼!’
그녀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몰려오는 두려움!
“네가 혈마의 사매란 말이지. 좋아, 아주 좋아.”
무슨 소린가 들리는 것 같았는데 명확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그녀의 눈앞으로 누군가의 얼굴이 불쑥 솟아올랐다. 조금전의 그 사람이었다.
‘도와 주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애 쓰지 마라. 편안해질 거다.”
그의 입이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들리지는 않았다. 눈앞이 빙그르 돌아갔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을 만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뇌령이 빙화를 안아든 것이다. 그리고 침상에 그녀를 반듯하게 눕혔다. 갑자기 그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내 옷이 벗겨지고 있어.’
빙화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기억하기도 싫은 옛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사내가 눈앞에서 옷을 벗고 있었다. 눈물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았다.
빙화는 혼절하고 말았다.

“빌어먹을, 늦은 것 같구나.”
그는 침상에 누워 있는 빙화를 슬쩍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사라라고 하던 얘보다는 못하군.”
그는 그 말을 남기고는 밖으로 사라졌다. 대전에 도착해 보니 이미 마전주와 내밀원주 그리고 혈마와 천마의 모습이 보였고, 내밀원과 마전의 상위 고수들도 착석해 있었다.
“왜 이리 늦었느냐?”
“죄송합니다.”
“에잉, 때가 어느 땐데 어디다 정신을 팔고 다니는 거냐?”
마전주의 힐책에도 그의 표정은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다,. 자신을 쳐다보던 혈마와 눈이 마주쳤다. 뇌령은 혈마를 향해 히죽 웃어 보였다.
‘저놈이 왜 저러지? 마전주에게 매일 혼나다 보니 정신이 나갔나 보군.’
혈마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때 내밀원주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혼세마인들을 제지해야겠다. 더 이상 둔다는 건 우리측 피해도 피해지만…… 자존심이 허락질 않는다. 혈마.”
이제 그는 혈마를 향해 호교대법사란 공식적인 호징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 의미는 분명했다.
“그대와 혈영신이 그들을 척결해 주었으면 좋겠소만…….”
“그 일이 오늘 안건의 전부요?”
“그렇소.”
“그럼 난 이만 가보겠소. 교주께서 말씀하신 걸 기억하지 못하오? 나는 중립을 지킬 참이오. 난 그럼 이만 가보겠소. 좋은 대책이 나왔으면 좋겠구려.”
그는 그 말만 남겨 두고는 정말로 대전을 나가 버렸다. 마전주와 내밀원주의 눈에서 불똥이 터진 건 당연했다. 천마는 희미한 웃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천마, 그대는 어쩌겠나?”
“나 또한 집안 싸움에 끼어들 생각은 없어. 난 내 의지대로만 할 셈이야. 너희들이 알아서 해.”
“흐음, 그 놈의 고집은.”
내밀원주는 천마 또한 이 일에 관여하지 않으려 한다는 걸 알고는 내밀원과 마전의 고수를 쳐다보았다.
“좋다. 이 일은 우리들 힘만으로 한다. 어차피 무황성의 일반 고수들을 동원해봐야 소용이 없고……. 너희들이 직접 해치워라. 이 일은……뇌령.”
“네. 내밀원주님.”
“네가 맡아 줬으면 좋겠다. 마전의 고수들을 모두 동원해도 좋다.”
“주군께서 직접 명을 내리신다면……당연히 할 것입니다만.”
“어이구, 융통성이라곤 쥐뿔도 없는 놈! 이놈의 명이나 내 명이나 마찬가지지, 이놈아!”
“그래도…….”
마전주도 피식 웃고야 말았다.
“알았다. 내가 말하마. 네가 알아서 해라.”
“존명.”
뇌령은 그렇지 않아도 혼세마인들을 쳐죽이고 싶었는데 잘 되었다 싶었다. 이 기회에 그 동안 억눌러 왔던 감정을 한꺼번에 폭발시키려고 하니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뇌령이었다.

혈마는 창 밖으로 마전의 고수들이 출정하는 장면을 묵묵히 쳐다보았다.
‘저들의 실력이라면……충분히 혼세마인과 상대가 될 것이다. 더군다나 뇌령 저 자식은 혼세마인 중 그 누구도 당해내지 못한다. 결국 교주의 예견대로 모든 상황이 벌어지는 구나. 그럼 머지않아 내가 할 일도 생기겠군.’
뇌령 이하 마전의 고수들이 떠나는 걸 보고 나서 그는 권태로운 표정을 지으며 창가에 돌아섰다.
“혈마시여! 혈영 13호입니다.”
그의 충실한 수하들인 혈영신의 음성이었다.
“무슨 일이냐?”
“빙화 소자가 오셨습니다.”
“빙화가…….”
혈마는 내심 가운데 있는 의자에 가서 앉고서는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여 보내라.”
빙화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무슨 일을 당했는지 상의자락 여기저기 조금씩 찢어져 있는 게 눈에 띄었다. 혈마는 고개를 갸웃하며 근엄하게 말했다.
“네가 여긴 무슨 일이냐?”
“사형…….”
빙화의 음성은 차갑기만 했다.
“무슨 소리냐? 사형이라니……”
“제게까지 거짓말하지 않아도 돼요. 염려 마세요. 더 이상은 사형을 찾지 않을 테니까. 이 말 한마디만 하려고 왔어요.”
“…….”
“이제 더 이상 저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아도 돼요. 앞으로 사형을 찾을 일은 없을 거예요. 사형은 예전과는 분명 달라졌어요. 따뜻하고 자상하던…… 내가 알고 있던 사형은 사라지고 없죠. 무엇이 사형으로 하여금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이젠……상관 없겠네요. 사실은 하고 싶은 말이 하나 더 있었는데……이젠 소용없게 되었어요. 그럼……안녕히 계세요. 빙화는 이만 가……볼게요.”
그녀는 그 말을 하고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돌아섰다. 나가는 발걸음이 무거웠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그녀가 내실 밖으로 사라졌을 때 혈마는 벌떡 일어나서 고함을 질렀다.
“난 네 사헝이 아니란 말이다. 미친 년! 뭐라고 지껄이고……가는 거냐?”
그는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 앉았다. 그는 고개를 힘없이 꺾였다.
“난 네 사형이 아냐. 난 혈마라구.”
중얼거리던 혈마의 고개가 번쩍 치켜졌다.
“13호, 저 아이가 왜 저런 모습인지 아는 게 있느냐?”
“잘은 모르겠습니다. 단…… 마전에서 나온 것가지는 압니다만…….”
“마……전에서?”
“네, 그렇습니다.”
그 순간 혈마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누군가의 비웃음이었다.
‘그놈이 내게 그런 웃음을 보낸 것이 그럼……?’
“으아아아.”
그는 하나밖에 없는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고함을 질렀다. 호교원이 사용하고 있던 전각이 그의 고함소리에 부르르 진저리를 쳐댔다.
“빌어 먹을 놈! 그놈이, 그놈이 감히……. 찢어 죽이리라. 내, 네 놈을 찢어서 자근자근 씹어먹고야 말리라. 혈영1호!”
“존명.”
“무황성을 떠날 채비를 해라.”
“전원이 모두 떠나는 겁니까?”
“그렇다. 혈영신 전부를 대기시켜라.”
“존명.”
혈마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기억을 잃지 않았다. 그가 빙화의 사부를 모른 척한 데는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법했지만 그게 뭔지는 그만이 알 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혈마와 혈영신들이 무황성을 벗어났다는 소식이 내밀원주와 마전주에게 전해졌다;.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을 뿐이다.

‘내 처소를 찾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 오늘은 좀 다른 분위기군.’
천마는 적루아를 쳐다보며 그런 생각이 언뜻 들었다. 그들 둘의 사이는 좀 각별했다. 이성간의 사랑이나 애정의 관계라기보다는 서로에게 그리움 같은 걸 느꼈다. 무엇에 대한 그리움인지는 그들 역시나 몰랐다. 단지 서로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했고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도 서로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은 부탁이 있어서 왔어요.]
“그런 것 같았소.”
[제가 무슨 부탁을 할지 아시죠?]
“대충은…….”
[안 되나요?]
“모르겠소.”
[언제쯤 알게 되나요?]
“그것도 모르오”
[불쌍한 분들이에요.]
“세상에 그들만큼 불쌍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소.”
[그런가요?]
“그렇소.”
둘의 대화는 단조로웠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을 충분히 전하고 읽을 수 있었다.
[전 요즘 꿈을 꿔요.]
“……”
[이상한 꿈이에요. 두 마리 용이 서로를 물어뜯다가 지친 한 마리의 용이 땅으로 내려왔죠. 그 용은 배가 고팠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는 모르지만……사람들을 먹어 치우더군요. 그 용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지 온 세상의 모든 생명체를 삼켰고 이어 불을 뿜어 모든 것을 태웠어요. 그때 다른 용이 내려왔어요.
그는 지쳐 있는 용을 단 한 번에 제압하고는 그 용의 배를 갈라 사람과 생물을 꺼냈어요. 그리고 나서 그 용은 자신을 타는 불길 속에 던졌어요. 그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죠. 불에 타서 새카맣게 변했던 세상이 다시 회복하기 시작했어요. 사람들도 새영들도 그 용을 찬양했어요. 그렇지만 그 용은 죽은 용을 보며 슬퍼하며 울더군요.]
그녀는 시무룩해졌다.
“무슨 꿈이 그렇소? 그건 개꿈이라고 하는 거요. 아니군. 용이 나왔으니 용꿈이군.”
적루아는 웃지 않았다.
[가볼게요. 언제일지 모르지만…… 그 시기가 정해지면 제게 알려 주실 수 있나요?]
“그러도록 해보겠소.”
[고마워요.]
그제야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름다운 사람. 그대만은 지켜주고 싶지만……나도 아직은 모르는 게 많구려.’
천마는 걸어가는 적루아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사라지고도 한참 동안이나 그는 미동도 없이 그녀를 느끼고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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