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99화 : 무림의 변수, 회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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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검 – 99화 : 무림의 변수, 회천문


무림의 변수, 회천문

슈앙
“헉.”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의 실체를 느낀 검황은 순간 다급하게 몸
을 빼내었다.
콰앙
아슬아슬한 간발의 차이로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은 방금 전까지 자
신이 서 있던 곳을 점령하고 있었다. 다급함과 의문이 가득한 눈길로
전면을 확인한 검황은 스스로의 눈을 의심했다.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듯 너른 대지를 가르고 박혀 있는 것은 한 자루 검에 불과했
다. 얼마나 강한 힘을 싣고 왔는지 검 자루만 땅 위로 솟아 있었다.
“그의 생명은 내 것이다.”
초량도 검황도 살아 남은 장로들도 만 명에 육박할 듯한 대상벌의
고수들도 소리가 들린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그 누구도 내 허락 없이는 그를 죽이지 못한다. 너희들에게는 그
만한 자격이 없다.”
오만함이 하늘에 미쳐 있다는 검황조차 자신의 귀를 의심하게 하
는 말이었다.
“너, 너는 대체 누구냐?”
공중에서 천천히 하강하는 인물을 향해 검황은 간신히 이 말을 뱉
어 놓았을 뿐이었다. 그가 말을 더듬는 것은 상대의 절대적인 신위
때문이 아니었다.
‘저 무식하게 강한 자를 수하로 두고 있다는 말인가? 서, 설
마…….’
그는 믿을 수 없었다. 자신과 태공이 함께 덤벼들어야만 상대가 되
었던 극강의 고수를 수하로 두고 있다는 것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
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완전히 땅에 내려선 신비인은 젊디젊었다. 검황은 그를 보며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어 입을 달싹거리다 그만두고 만다. 대신 그는 움직
였다. 바닥에 눕혀 두었던 천향옥봉을 다시 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그의 검은 다시 그녀의 가녀린 목에 대어졌다. 떼어지지 않는
발을 떼려고 안간힘을 쓰던 광마존은 자신의 눈앞을 가리고 선 사내
를 쳐다본다. 잘 잡히지 않는 초점을 간신히 맞추었는지 그의 동공은
활짝 열리고 있었다.
“지, 지존…….”
장내에 나타난 이는 파천이었다. 그가 직접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광마존을 내려다보는 파천의 시선에는 따뜻한 정감과 함께 안타까
움이 물결치고 있었다.
턱썩
서 있기가 더 이상 힘에 겨워서인지는 모르지만 광마존의 무릎이
주저앉았다. 파천은 그런 광마존의 어깨에 손을 갖다댔다.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되었다.”
그는 광마존의 상태가 위급함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는 손을 내
밀어 그를 품 안에 안았다. 그 순간 광마존의 의식은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 갔다. 그것을 본 검황은 고함을 질렀다.
“꼼짝하지 마라. 움직이는 순간 이 년의 생명은 구천을 맴돌 것이
다.”
파천은 물끄러미 검황을 응시했다. 그의 입에서는 나직한 한마디
가 토해졌을 뿐이다.
“마음대로 해라.”
그리고는 더 이상은 이곳에 볼일이 없다는 듯 천천히 걸음을 떼어
가지 않는가. 땅바닥에 깊숙히 박혀 있던 검이 저절로 뽑혀지더니 허
공에 둥둥 뜬 채 그 뒤를 따랐다. 그가 걸음을 딛자 포위망은 급속히
뒤로 넓혀져 갔다.
“저놈을 죽여라.”
검황이 질러대는 소리에 뒤이어 다급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만두시오, 검황.”
초량의 고함소리에 막 움직여 가려던 대상벌 고수들이 멈칫거리며
동작을 정지한다.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파천은 앞으로 전진해 갈 뿐
이었다. 그러던 그가 할 말이 있는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오늘은 이만 가겠다. 그렇지만 다시 올 것이다. 그때는 너희들도
생명을 걸어야 한다. 지금 나를 막는다면 너희들은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저벅저벅
또다시 앞으로 전진해 가는 그에게 덤벼드는 자들은 하나도 없었
다. 특별한 명이 없기 때문일까…….
[저 자가 이곳에 혼자 오지는 않았을 것이오. 분명 지원 병력이 있
다고 판단해야 하오. 더군다나 당장 싸움이 벌어진다면 우리 둘의 생
명 또한 장담하지 못하오.]
초량의 전음에 검황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있었지만 그의 눈동자에
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또다시 온다지 않는가? 그런데 그냥 보내야
하다니……. 그는 살아 남은 장로들을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꼈
기 때문일까, 장로들은 움찔하면서 떼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옮
겨야만 했다. 그들은 검황의 시선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혼신의 힘을 다 기울여 공력을 끌어 모았
고 곧장 무방비 상태인 파천의 너른 등을 향하여 공격해 갔다. 그 순
간 파천의 뒤를 말없이 따르던 검이 빛을 발했으며 그의 주위로 거대
한 막이 쳐졌다.
콰앙
“커억.”
“꺽.”
파천이 펼친 검막의 반탄력은 그들의 상상을 뛰어넘었고, 그 충격
으로 그들의 내부는 진탕되어 격퇴되고 말았다. 그들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바닥을 기어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검황과 초량의 표
정은 순간 싸늘하게 굳어 버렸다. 검황의 내심은 바짝바짝 타들어 갔
다. 그가 돌아서서 무자비한 살수를 펼칠 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렇지만 파천은 검황의 염려와는 달리 땅을 박차고 대상벌 고수
들의 머리 위를 날아갔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 전에 그의 말이 대
상벌 전체를 떨어 올렸다.
“나는 반드시 다시 오겠다. 그때까지 그녀를 잘 보살펴라.”
귀가 멍멍해질 정도의 큰 소리를 들으며 그들은 파천이 사라져 간
곳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대상벌을 빠져 나온 파천은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 품 속에 있는
광마존의 상태를 살폈다.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심각하다.’
그는 동작을 멈추고 광마존을 바닥에 눕혔다. 그는 다급하게 품 속
을 뒤져 작은 옥병 하나를 꺼냈다. 마개를 열자 청량한 기운이 피어
올랐다.
‘과연 속성대환단이 어느 정도의 치유력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지
금으로서는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구나.’
광마존의 입을 벌려 엄지손가락 한 마디 정도 크기의 환단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혈도를 쳐서 목 안으로 넘어가도록 도왔다. 이어
손바닥을 펼쳐 그의 몸 이곳 저곳을 주므르거나 두드렸다.
‘죽으면 안 된다. 이대로 간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내가 너를
천마비고에서 끌어내었으니 너의 생명은 끝까지 내가 책임진다. 우
리가 원했던 결말은 이것이 아니다. 정신 차려라. 제발  .’
그의 손은 쉬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간절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제는 망설이지 않는다. 전면적으로 가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
도 먼저 두들기겠다. 어차피 몰아칠 피 바람이라면 일찍 맞이하는 것
도 나쁘지 않겠지.’
광마존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파천은 긴 호흡을 하며 움직
이던 손을 멈추었다.
“후우……. 다행이다. 미미하나마 혈색이 돌아오고 있으니.”
그는 다시 광마존을 품 속으로 끌어 들였다.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처음에 파천은 낙양의 근처에 포진하고 있는 마황검위대 5
개대 5백 명을 움직이려 했었다. 그러나 결국엔 그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미덥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거처에서 광마
존의 안위를 염려하고만 있기에는 그에 대한 애정이 지극했기 때문
이다. 그를 잃을 수 없다는 생각에 아무런 계획도 없이 무작정 움직
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흡족한 마무리가 되었지만 상당한 위험을
안고 있는 위험천만한 방법이었다. 물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마황
검위대를 근처에 잠복시켜 놓기는 했다. 아직은 그들이 노출되어서
는 곤란했기에 최악의 상황이 아닌 한 움직이지 말 것을 명해 놓았었
다. 그는 다시 발을 굴러 허공으로 도약해 갰다.
‘아직은 그가 도착하지 않았을 텐데……. 의노가 올 때까지만이라
도 살아 있어라.’
그는 무림맹 낙양 지부가 아닌 외곽 지역에 위치하는 현천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가 움직여 가는 주위로 언뜻언뜻 그림자들이 보이
는 것 같았다.

[지존, 대상벌 주위를 감시하던 놈들이 있었습니다. 그놈들이 지
금 뒤를 쫓고 있습니다. 어찌할까요?]
광마존의 상태에 정신을 빼앗기던 파천이었는지라 미처 주변을 살
피지 못했었다. 수하가 보내는 전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따라 오게 해서는 안 된다. 놈들을 유인하든지, 저지하든지 해라.
그리고 대상벌에 대한 감시를 늦추지 마라.]
[존명.]
쐐애애액
순식간에 파천은 바람이 되어 시야에서 벗어나 버렸다. 그가 사라
졌던 장내에 일단의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마황검위
대 16대 중 하나였다. 대주는 12마공자 중 둘째인 귀랑 야율혼경이
었다. 그의 뒤로 포진한 백여 명의 마황검위대 대원들은 귀랑이 손
짓을 하자 주변의 숲 속으로 신속하게 모습을 감추었다. 그 또한 몸
을 움직여 노송의 가지 위로 몸을 숨겼다. 그들이 모습을 감추자마
자 저 멀리서 인영들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그들은 야음을 틈타
교묘하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으며, 흔적도 남지 않을 정도로 신법에
탁월했다.
그들을 포착해 낸 귀랑 역시 대단하다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앞에
일단의 인물들이 잠복해 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마황검
위대가 숨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순간 십여 명 밖에 안 되는 그들
이 동시에 멈추어 섰다. 제일 선두에 서 있는 거한이 손을 들어 제지
한 것이다.
[왜 그러십니까?]
[할아버님의 전음이다. 돌아가야겠다.]
[대형,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추적을 여기서 포기하자는 말씀
이십니까? 그들의 정체가…….]
[할아버님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지. 모두 철수한다.]
그들은 곧장 오던 길을 되짚어 사라져 갔다. 그들이 사라지고 난
뒤 장내에 나타난 귀랑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 놈들이군. 이곳까지 따라 와서 되돌아간단 말인가?”
“대장, 저들을 처치하지 않아도 됩니까?”
“그럴 필요는 없겠지. 우리도 복귀한다. 어서 서둘러라.”
그의 명에 따라 백여 명의 마황검위대는 유령처럼 장내에서 사라
져 갔다. 그들이 사라지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또 한 명의 인물이 장
내에 등장했다. 그는 작은 체구를 지닌 위인이었다. 달빛에 드러난
그의 용모는 특이했다. 오척단구에 훌렁 벗겨진 대머리. 그는 얼마
전 낙양의 다루에 모습을 보였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대체 저들은 누구지? 이 중원에 내가 모르는 세력이 있었던가? 아
주 흥미롭군. 재미있어. 어쨌든 그 자! 바라보고만 있어도 숨이 막힐
정도의 곳였어.”
조용히 뇌까리던 노인은 손가락을 턱에 갖다대고 깊은 생각에 잠
겨들었따. 그 상태로 몸을 돌린 노인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며 한
마디 흘리는 걸 잊지 않았다.
“그가 누구이든 상관은 없겠지. 그래 봐여 낙양에 날아든 한 마리
불나방에 불과할 테니…….”

현천장의 주위는 숨막히는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나 아는 사
람은 안다. 주위에는 수백 명에 달하는 절정 고수들이 촉각을 곤두세
우고 잠복해 있다는 것을. 파천은 정문을 이용하지 않고 담을 넘어
들어갔다.
쇄애애액
그가 안으로 들어서자 동시에 수십명의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내
는 것이 아닌가. 살기 등등한 그들은 풍기는 기운만으로도 대단한 위
압감을 주었다. 그러나 곧 나타난 상대가 누구인지를 깨닫고는 자신
이 있던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나타난 것도 순식간이었지만 사
라지는 것도 빨랐다. 이것만으로도 무공의 고하는 차치하고라도 그
들의 훈련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의노! 의노 왔는가?”
파천은 전청으로 들어서며 큰 소리를 질렀다. 그의 목소리가 어찌
나 컸던지 담장을 넘어서까지 울려 나갔다. 그의 외치는 고함소리에
나타난 이는 단장화였다.
“지존! 의노께서는 아직 당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녀또한 파천의 품에 안겨 있는 광마존을 보았으므로 내심으로
놀라고 있었다. 마황검위대 총대주이자 지존과 조사를 제외하고는
천마교 최고 고수라 할 수 있는 그가 저렇게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광마존의 등에서 나온 피는 파천이 지혈을 했음에
도 상처가 워낙 컸던지라 파천의 몸을 함께 적시고 있었다. 그것도
부족해 바닥으로 저점이 떨어져 내렸다. 그는 단장화에게 간단한 지
시를 내렸다.
“소독약과 붕대를 가져 오라. 그리고 지혈제도.”
“존명.”
파천은 단장화가 뛰어가는 것을 바라보다가는 내실로 다급히 들어
섰다. 침상에 엎드리게 하고는 너덜거리는 상의 자락을 부욱 소리나
게 찢었다. 오른쪽 어깨에서 시작된 상처는 왼쪽 옆구리까지 이어져
있었다. 도저히 회생 불가능한 상처로 보였다. 그는 손목과 목에 손
을 대어 맥박이 뛰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아직은 살아 있었다. 그것
을 확인한 파천은 내심 안도의 숨을 토했지만 조급하기는 마찬가지
였다. 단장화가 열린문을 통해 내실로 들어섰다.
“지존, 여기 가져 왔습니다.”
내미는 붕태를 파천은 빼앗듯이 받아 쥐고는 소독약을 상처에 부
었다. 부글거리며 거품이 일어났다. 이어 파천은 붕대의 일부를 잘라
내 상처 부위를 천천히 닦아 내었다. 그러나 금세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도저히 회생 불가능한 상처로 보였다. 그는 손목과 목에 손
을 대어 맥박이 뛰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아직은 살아 있었다. 그것
을 확인한 파천은 내심 안도의 숨을 토했지만 조급하기는 마찬가지
였다. 단장화가 열린 문을 통해 내실로 들어섰다.
“지존, 여기 가져 왔습니다.”
내미는 붕대를 파천은 빼앗듯이 받아 쥐고는 소독약을 상처에 부
었다. 부글거리며 거품이 일어났다. 이어 파천은 붕대의 일부를 잘라
내 상처 부위를 천천히 닦아 내었다. 그러나 금세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그는 상처 부위에 하얀 분말로 된 지혈제를 뿌렸다. 누런 고
름과 같은 색으로 변하는 것을 본 뒤 손에 쥔 붕대의 일부를 돌돌돌
말아서 갖다대었다. 그리고는 단장화의 도움을 받으며 그의 상체를
붕대로 동여매기 시작했다. 광마존의 상체를 고정시키고 있던 단장
화는 정성껏 붕대를 감는 파천의 모습을 힐끗 쳐다본다. 붕대가 광마
존의 상체를 완전히 가리고 나자 파천은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이었
지만 여전히 불안감이 내비쳤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의노가 빠른 시간 내에 당도하지 않는다
면 방법은 없다.’
그는 피에 젖은 자신의 상의는 신경도 쓰지 않고 의자를 끌어당겨
침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잠시 소강 상태에 돌입했던 무림이 또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모든 강호인들의 시선이 사천에 몰려 있는 사이 전혀 의외의 인물들
에 의해 늦추어져 있던 긴장감이 일시에 끌어 올려졌다.
현재의 무림은 크게 보면 강남은 마도련이 강북은 무림맹이 장악
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단지 겉으로 드러난 세력 판도에 지
나지 않았다. 그 틈새로 혈마천과 천황부가 내륙 깊은 곳을 차지하고
앉았고, 사황성은 사천을 제집으로 삼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이런
세력들간의 배치는 묘하게도 자연스럽게 서로를 침범하지 않았고 분
리되어 있었고, 이런 이유로 그다지 큰 충돌은 없었다. 이런 긴장감
을 일시에 깨버리는 일은 강남에 위치한 장사(長沙)에서 일어났다.
장사는 호광성 성도인 무창과 강서성 성도인 남창과 비슷한 거리로,
삼각형 꼴의 꼭지점에 자리잡고 있었다. 전통적인 대 시진이기도 한
장사에는 특별한 무림 세력은 없었다. 그런 이고에서 벌어진 일은 전
무림을 들끓게 하였으니.

개파대전!
머저리들이 아닌 한 지금과 같은 시기에 개파대전을 하겠노라고 전
무림에 공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시류를 모르는
한심한 작자들이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무림인들은 저마다 그들을
비웃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리 간단치가 않았다. 개파를 선언한 곳의
문파명은 회천문(回天門)이라 했다. 문파 인원99명! 규모만으로 따지
자면 대문파의 일개 지부의 인원보다도 적을 수 있는 숫자였다. 그런
데 무슨 배짱으로 전 무림에 개파대전을 공표하고 초대정을 보냈단
말인가. 심지어 그들은초대장을 각 문파에 보낼 인원도 없어 개방에
부탁을 했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들은 사람 치고 비웃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렇지만 그들은 비웃을 수 없었다. 문파를 이루고 있
는 인물들의 면면을 들은 순간 그들은 모두 놀라 부르짖었다고 한다.
‘그들이 아직도 살아 있었는가?’ 라고. 그들은 은거했거나 실종된 전
대의 거마들이었다. 한두 사람이 나타나도 무림을 들썩거리게 할 만
한 마두들이 자그마치 99명이나 한꺼번에 등장한 것이다.
그들의 출현은 전 무림에 가볍지 않은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무림맹은 그들의 출현이 알려지자 신경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그
렇지 않아도 사처에 침입한 사황성의 일로 골치를 썩이고 있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무림맹의 입장에서 보면 앞으로 적이 될 것
이 분명한 마두들의 떼거지 등장이었으니.
마도련은 미묘한 입장을 보였다. 회천문의 마두들이 마도인인 것
은 분명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들 대부분은 마도의 입장에서도 이단
아들이었다. 마도련의 권위 따위는 인정하지도 않고, 자신들의 마음
이 내키는 대로 홀로 무림을 뒤집고 다니던 인물들이고 보면 그들로
서도 여간 부담스러운 존재들이 아니었다. 그들이 어떻게 한자리에
모여서 문파를 설립하게 되었는지도 궁금했다.
이런 차에 그들에 대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는 그
들이 장사성 북쪽 삼십 리 위치에 호화로운 장원을 짓고 수하들을 모
으기 시작했다는 것이었고, 그 다음은 장사(長沙)에서 한다 하는 장
사치들이나 명사들을 초청해 기부금을 거둬드였으며, 이후 근처에
자리잡고 있던 몇 개의 문파를 합병하는 등의 행사를 발빠르게 진행
시켜 나갔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들이 앞으로 어떤 노선을 걸을
건지는 분명해졌다.
그들은 개괓너선과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그럴 용의도 없었고
가만히 웅크리고 있을 성질 좋은 인물들도 못되었다. 그러니 지금과
같은 혼란기의 무림에 거창하게 등장하여 한자리 얻어먹겠다는 뜻
이 분명히 보였다. 그도 아니면 마지막 가는 길에 인세에 영화를 마
음껏 누리다 가겠다는 것인지…….
무림인들은 이 일에 대해 말이 많았다. 무림맹이야 강북에 있으니
회천문이 그곳까지 세력을 넓히지 않는 한은 부딪칠 일이 없을 터이
지만 마도련은 그들과는 사정이 확연히 달랐다. 가만히 두고 보자니
마도의 종주라는 체면이 서지 않고, 힘으로 누르자니 껄끄럽기 그지
없었다. 어쨌든 그들 또한 마도인이고 보면 지금과 같은 때에 한 손
이라도 모아 두는 것이 여러 모로 유리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아
니면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를 알아 보기 위함인지 개파대전에 대표
를 파견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무림에 은밀하게 나돌기도 했다.

“여러 가지를 고려할 때 대상벌에 함께 머무시는 것이 나을 듯합니
다. 따로 장소를 마련하여 병력을 이동한다는 것도 다른 세력들의 시
선을 끌게 되니 좋지 않을 듯하구요.”
초량은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상대에게 전달했다. 그 말을 들은 혈
마천의 이총사 상여락은 고개를 끄덕이긴 했으나 어딘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야 그렇지만 모양새가 영…….”
“왜 그러십니까?”
초량의 질문에 상여락은 헛기침을 하며 입을 뗀다.
“생각해 보시오. 이곳 대상벌은 귀 부의 주원 본거지이지 않소? 우
리가 귀 측에 얹혀 있는 듯해서 그렇소. 그리고 이곳은 낙양이오. 무
림맹을 지척에 두고 있어 그들에 대한 견제는 모르지만 마도련에 대
해서는 어려움이 많을 듯 하오만.”
상여락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검황이 그 말을 이었다.
“하하, 이총사의 말씀은 충분히 알아듣겠습니다만 아무 기반 세력
도 없는 형주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느라 시간을 소진할 바에여 이
곳을 사용하는 것이 여러 모로 좋을 듯하군요. 그리고 거리야 별 문
제가 되겠습니까?”
상여락은 또다시 고개를 끄덕거리고야 말았다. 처음부터 상대에
게 꿀리고 들어가는 듯도 생각되었지만 괜히 낯을 붉혀 가며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켜야 할 명분이 없었다. 또한 상대방의 말을 듣고 보니
그 말도 일리는 있었다. 이래저래 그는 수긍하고야 만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그럼 이곳에 저희들의 본진을 두고 바로 작
전에 돌입하도록 하겠습니다.”
“작전이라 하시면…….”
초량은 의문을 드러내었다. 자신들과 사전에 상의한 바 없는 작전
운운하는 상여락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태공은 모르시는가 보군요. 귀 부에서 저희들에게 요구하기를 무
림5천 중 하나를 처리해 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여 동맹을
맺겠다고……. 그 말씀을 드린 겁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랬군요. 찬마서생 파천이라면 마도의 하늘로
떠오른 절대 고수이거늘 어찌 그를 처리할 방도는 서셨습니까?”
‘이놈이 속 뒤집는 소리만 골라서 하고 있군. 본거지에 틀어박혀
있다면 마도련을 뒤집어 놓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거늘, 그걸 몰
라 물어 본다는 말이냐?’
“저희들이라고 뾰족한 방도가 있겠습니까? 그저 그 자가 마도련을
박차고 유람이라도 나오길 학수고대하는 수밖에요.”
상여락의 말투에는 은연중 내심이 반영되어서인지 그리 곱게 들리
지가 않았다.
“그런데 이곳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왜 그러시죠?”
검황의 물음에 상여락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들어오다 보니 이곳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말입니다. 그리고
금방 잘라낸 듯한 거목도 그렇고, 여기저기 패여 있는 땅도 그렇고
말입니다. 마치 한바탕 격전이라도 치른 듯한 모습인지라…….”
상여락은 검황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끝말을 슬쩍 흐렸다. 검
황의 얼굴에는 다소 흥분된 기색이 빠르게 스쳐 갔다. 지난 일을 생
각하자니 또다시 부아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왜
자신이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시 초량이 제지하
고 나서자 그 또한 그의 의견에 동조하긴 했으나 생각할수록 뭔가 찜
찜한 구석이 남았다. 상대가 아무리 강하기로서니 부상당한 수하를
품에 안고서야 자신들의 합공을 당해낼 수 있었겠는가? 물론 지금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워낙에 경황중이었던지라, 또한 상
대의 신위에 이미 기선을 젱바당하고 있었던지라 그런 결정을 하고
야 만 것입니다.
“별일 아닙니다.”
퉁명스럽게 뱉어내는 검황을 보며 상여락은 자신의 심증을 확신하
는 듯했다.
‘호, 이것 봐라. 호랑이 굴에 누군가 들어와서 한바탕 소동을 일으
켰다는 것인가? 이제 보니 이것들도 별 볼일 없겠군.’
“그나저나 상대인께서는 이번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번 일이라면?”
“회천문 말입니다.”
“아, 그 천둥벌거숭이들 말입니까? 그 망나니들이야 신경 쓸 일이
있습니까?”
“그렇지가 않습니다.”
초량이 정색을 하며 말하자 상여락은 의아한 듯 얼굴을 굳힌다.
“그들이 어디 보통의 인물들입니까? 한 명, 한 명이 하나의 문파를
이끌 만한 실력들인데다 그들의 포학함은 전 무림에 알려져 있을 정
도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십여 명도 아니고 아흔아홉 명이나 되
니……. 이게 어디 보통 일입니까? 우리들도 뭔가 대책을 세워 둬야
할 것 같습니가.”
“그래 보았자 소수에 불과하거늘 너무 과민한 반응이 아니시오?
그들이 대단한 인물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절대 고수들은 아니고 또
한 많다고 하지만 세력이 보잘것없습니다. 그런 그들이 무림 정세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이란 대수롭지 않을 겁니다.”
“제 생각도 그렇군요.”
검황이 상여락의 말에 동조하고 나섰다. 그러자 초량은 검황을 일
별하며 자신의 생각을 소상하게 털어 놓기 시작했다.
“그들만으로는 그렇죠. 문제는 그들이 다른 세력과 연계했을 경우
입니다. 만약에 마도련과 힘을 합하기로 한다면 그때는 무시할 수 없
는 장애물이 될 겁니다.”
그 생각은 미처 못했는지 상여락은 뜨끔한 표정이었다.
“그건…… 그렇군요. 그들의 자존심이나 지난 행적을 고려할 때
마도련의 수하로 들어가지는 않겠지만 그들과 연합의 형식을 빈다
고 해도……. 상당한 난제군요. 그렇다면 태공께서는 무슨 대책이라
도 있으신지.”
“별수 없지요. 다른 쪽에서 손을 뻗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손짓을
해보는 겁니다. 그들을 끌어들여 무림맹과 마도련을 치는 데 선봉을
세울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 그것 좋은 생각이군요. 그렇지만 그들이 우리와 힘을 합하려
하겠습니까? 씨도 안 먹힐 것 같은데 말이죠.”
“그건 해보기 전에는 누구도 모릅니다. 단지 그들이 무림 제패를
원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는지를 먼저 알아 봐야겠지요. 그
들의 목적이 단순히 무림 제패에 있다면 연합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들이 원하는 바를 최대한 수용한다면 말이죠. 어차피 그들
은 소모용이니……. 우리들한테도 손해 볼 일은 전혀 없습니다.”

“듣고 보니 그렇군요. 하하, 역시 태공의 머리는 못 당하겠습니다.
그래 어떻게 추진하실 생각이십니까?”
한껏 초량을 추켜세워 주는 사여여락을 보며 검황은 떨떠름한 표정
이었다.
“이번 개파대전에 참가해 볼 생각입니다. 그들의 진의를 파악해
보고 할 수 있다면 우리 쪽으로 끌어들여야죠.”
“흐음, 그들을 끌어들일 수 없다면 먼저 쳐야겠군요.”
검황의 말에 초량과 상여락은 그를 멀뚱거리며 쳐다본다. 두 사람
의 생각은 동일했다.
‘어떻게 저 머리로 야심을 꿈 꿀 생각을 했을까?’
‘저런 머저리가 오황 중 가장 경계해여 될 사람이란 말인가?’
“왜들 그러시오.”
“험험, 아닙니다. 그들을 끌어들이지 못한다 하더라도 굳이 우리
힘을 쓸 필요는 없겠지요. 어차피 가만 내버려 두어도 무림에 평지풍
파를 일으킬 것이고 그것 또한 우리 일을 도와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
까? 자기들끼리 치고 받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좋겠지요.”
상여락의 말이 진행되는 동안 검황의 얼굴은 점차 시뻘겋게 달아
올랐다.
‘요즘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중원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이렇게 된
것 같은데……. 이런 빌어먹을, 이게 무슨 망신인가 그래.’
그들은 이후 여러 가지를 더 상의했는데 회의 내내 검황은 입도 뻥
긋하지 못했다. 그런 그를 두 사람은 내심으로 마음껏 비웃었다.

“그래 좀 어떤가?”
파천은 의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지존, 아무래도 광마존께서는 당분간 거동하실 수 없을 겁니다.
상태가 호전되긴 했지만 최소한 한 달 간은 정양해야만 합니다.”
“한 달씩이나?”
“네, 그렇습니다.”
현천장의 내실 중 한 곳에서 주고받는 내용은 광마존의 상태에 관
한 것이었다. 파천은 의노의 말에 낯을 찌푸리고 만다.
“그래? 하긴 다시 회생한 것만 해도 어디인가? 한 달이라면 그리
긴 시간도 아니니……. 차라리 이 기회에 푹 쉬게 하는 것도 괜찮겠
군.”
“지존.”
“왜 그러나?”
“마도련은 어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게 문제지. 광마존에게 마도련을 맡겨 두었는데……. 그가 이
런 상태니. 그렇다고 내가 그곳 일에만 전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
“지금은 그를 대체할 마땅한 인물도 없고.”
“천마께서는 어디 계신지요? 그 분이시라면.”
“그는 다른 일로 바빠서 안 되지. 하군표에게 가 있네.”
“아, 그럼 회천문에 말입니까?”
“환노는 어떻게 잘하고 있는가?”
“아이들을 이끌고 중원으로 나오고 있을 겁니다. 자리를 잡은 뒤
에 연락을 취하기로 했습니다.”
“이제 밑그림은 그려지고 있는 건가? 한 축을 담당해야 할 광마존
이 저 상태인 것만 빼고는 별 문제가 없겠군.”
“마도련은 군사의 능력만으로도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지 않습니
까? 그렇다면 그리 심려하실 일이 아닐 듯합니다.”
“그건 그렇지가 않아. 조직 장악력은 아무나 발휘할 수 있는 게 아
니거든. 군사는 전체를 조율하고 움직여 나가는 데 능할 뿐이지 그들
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순종하게 하는 힘은 없어. 그들이 생각하는 바
와 일치하지 않을 때는 반발도 예상되고. 그래서 문제인 거야.”
아무리 머리를 짜내 봐야 지금으로서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이미
벌어진 일에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심력만 낭비할 뿐이었다. 파천
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문을 밀치고 밖으로 나가는 파천의 뒤를 의
노도 따랐다.
침상에 누워 있는 광마존의 상태는 척 보기에도 그다지 심각해 보
이지 않았다. 그의 현 상태는 등에 입은 큰 상처로 인한 과다 출혈로
몸의 저항력이 현저하게 떨어져 있는 것뿐이었다. 이것보다 내상이
더 치명적이었지만 생명에 위협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 당시의
광마존의 상태만으로는 파천도 그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 장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의노는 역시 그를 아무렇지 않게 소생시켰다. 그가
말하길 파천이 먹인 속성대환단의 역할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만약 환단을 먹이지 않았거나 시기를 놓쳤다면 자신으로서
도 그를 화회생시킬 수 없었다고 하여 그 말을 들은 파천의 심정을 아
찔하게 만들었다.
광마존은 등에 입은 상처 때문에 침상에 엎드려 있었다. 파천과 의
노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는지 몸을 움찔거리며 고개를 들려 애를
쓴다. 그것을 본 파천이 그를 말렸다.
“되었다. 그냥 편한 대로 있어라. 이제 살 만은 한가?”
“지…… 존, 죄송합니다. 이런 꼴을 보여 심려를 끼쳐드렸으
니…….”
“하하, 광마존. 우리가 비고에서 나눈 말을 생각해 봐라. 허무하게
죽는다면 내가 하는 일이 가치가 없어진다. 끝까지 살아 남아라. 죽
으면 곤란하다. 더군다나 예쁜 마누라를 내버려 두고 간다면 그 죄를
어떻게 하려고?”
광마존은 할 말을 잊었다. 또다시 천향옥봉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
문일까. 그는 침묵을 지켰다. 그의 옆에 앉으며 파천은 말을 이었다.
“아무런 생각하지 말고 몸을 회복시키는 데만 신경 써라. 앞으로
한 달! 그 동안은 나 죽었소, 하고 숨죽이고 지내도록.”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대업에 차질이 빚어진다면…….”
“그럴 리가 있나? 일이 차질 없이 진행될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
다. 물론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정 안되겠다 싶으면 본교의 힘을 조
기(早期)에 끌어내 오는 수밖에.”
“…….”
파천은 될 수 있는 한 광마존에게 심적인 부담을 주지 핞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가 느끼고 있을 죄책감과 부담감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 클 것이다. 적들에게 냉혹한 그가 수하들에게 보이는 모습은 이
해할 수 없을 정도로 관대한 것이었다. 그래서 광마존은 더욱 죄스러
웠다.
“난 당분간 무림맹에 있을 거다.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으니 가끔
씩 들리도록 하지.”
“지존, 그러실 필요…….”
“아, 되었어.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만 쉬도록 해라.”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대신 몸이 완쾌되면 예전보다 두 배는 더 열심히 뛰어 다녀야 할
거야.”
한쪽 눈을 찡긋하며 장나스레 하는 말에도 광마존은 아무런 내색
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처음 중원에 들어오던 날을 생각했다. 꿈
속에서나 그리던 중원에 첫발을 디딘 광마존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
었다. 그가 존경하고 절대적 믿음을 보내던 파천의 존재와 함께라는
생각이 더욱 그를 흥분되게 만들었었다. 그와 함께라면 이 세상에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지금까지 별다른 실패
없이 일을 진행시켜 왔다. 지존의 안위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자신
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었다. 결코 짐이 되지는 않을 자신
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그에게 수치심을 줄 정도였다. 차라리
그냥 그 자리에서 죽었더라면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파천은 광마존
의 손을 힘주어 잡아 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몸이 완쾌되기 전에…… 천향옥봉은 반드시 구해내겠다. 기대해
도 좋아. 어서 잠이라도 자두라고, 그래야 빨리 몸이 완쾌될 것 아닌
가?”
파천이 밖으로 사라졌음을 안 광마존은 착찹해져 왔다.
‘지존께서 저런 말씀을 입 밖으로 내실 정도면 반드시 하실 것이
다. 그러나…… 그녀를 구해내기 위해서 치러야 할 대가는 결코 만만
치 않을 터. 그럼에도 나는 거절하지 못한다. 사랑이란 감정이…….
인간을 이기적으로 만드는 것인가? 후후, 웃기는군. 이 나이에 사랑
이라니.’

현천장을 빠져 나온 파천은 곧바로 낙양으로 들어갔다. 운경다루
이충에 자리잡은 파천은 차를 음미하며 창 밖으로 지나 다니는 사람
들을 주위 깊게 쳐다보았다. 각양각색의 사람들! 그들은 저마다 다
른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하나도 같
지 않았다. 생김새부터 하는 행동까지. 그들이 지닌 생각도 저마다
다르리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도 제각각
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짧은 삶. 인간의 삶이란 유한한 것이거늘 저들의 모
습에서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없다. 자신이 언젠가는 죽느나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인간의 욕망은 그것을 망각케 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
지. 젊음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세월은 나를 굴복시킬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무엇을 얻고자 이렇게 치열하게 싸우는가. 후우, 무림
을 제패한다고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많은 사람들의 죽음 위헤 세워
질 만큼 그것은 가치가 있는 것인가? 지금은 내가 숙부와 다를 것이
뭐가 있을까? 인간은 저마다 자신의 잣대로 가치를 판단한다. 나 또
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내 스스로 아무리 정당성을 주장한
다고 해도, 무림에 평화를 주겠다는 어줍잖은 목표로 치장한다고 해
도 과연 내 행동이 저들의 소박한 꿈을 해치면서까지 이루어야 할 고
귀한 것일까?
내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피 바람이 분다. 내가 얻은 것이 있다면,
그 이면에는 언제나 박탈당한 자의 절규가 맴돈다는 거지. 나는 악마
인가? 이런 인생으로 살게끔 미리 정해진 것이란 말인가? 광마존의
행동은 충격이었다. 사랑을 위해 맹목적으로 자신을 내던지
다니. 그래, 나도 설란을 위해서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
다. 그런데…… . 그런데 왜 그렇게 되는 것이지? 사랑이 대체 뭐길래,
그런 결단을 하게 하는가? 내 삶보다 내가 결정한 가치보다 우월하단
말인가? 내 수하들은 나를 절대적으로 믿고 있다. 그들은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는 나도 무림의 생리에 익숙해져 버려 그들의
그런 사고 구조가 낯설지 않다. 목표를 위해 단순하다 싶을 정도의
돌진. 후회 따위는 없지. 승리자가 되기 위한 몸부림들.
이제는 돌이킬 수도 없다. 돌이킬 수 있다 해도 내가 거부한다. 가
는 데까지 가보리라. 그러고 나서 후회가 된다면……. 진정 내 삶이
헛된 것이었다 여겨진다면 버리면 되는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하자.
내가 감상에 젖어드는 순간, 나 하나가 흔들리는 순간, 수천, 수만의
생명이 헛되이 사라질 수도 있다.’
[지존, 귀랑입니다.]
갑자기 들려 온 전음에 파천은 상념에 깨어났다.
[어떻게 되었나?]
귀랑은 운경다루의 이층에 올라와 있었고 파천과는 달리 구석 쪽
에 자리를 잡았다. 그의 주위에 수하 하나 대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파천은 주위에 포진하고 있는 낯익은 호흡들을 느낄 수 있었다.
[대상벌로 유입된 혈마천의 전력은 2천을 넘습니다. 상인으로 변
복(變服)했지만 속하의 눈을 속일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흐음, 혈마천과 천황부가 손을 잡은 게 확실하군. 마황검위대의
현 위치는?]
[5개대는 사천으로 파견되어 있고, 5개대는 현천장과 낙양 주위에
포진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6개대는 조사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좋다. 지금 즉시 대상벌이나 낙양 시진에 있는 마황검위대를 현천
장으로 퇴각시키고, 당분간은 숨죽이고 경비에만 신경 써라. 곧 환노
가 병력을 증원시킬 것이다. 그때 나와 함께 대상벌을 친다.]
[존명.]
이때 마침 귀랑 아픙로 차가 날라져 왔다. 그는 차를 들며 또다시
파천에게 전음을 보내었다.
[지존, 이곳 낙양에 천황부나 혈마천의 세력이 아닌 제3의 세력이
포착되고 있습니다.]
[나도 알고 있다. 그들의 인원은 얼마나 되는 것 같나?]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힘듭니다. 워낙에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어
그는 숫자가 얼마인지도 모를 정도입니다. 속하가 판단하기에는 5천
이상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5천 이상이라고? 대체 어떤 세력이지? 5천이라는 숫자를 한 지역
에 투입할 수 있는 무림 세력이라면…….]
‘무림맹, 마도련을 제외하고는 중원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세외의 세력인가?’
[귀랑.]
[존명.]
[즉시 현천장으로 복귀한다. 한 가지 주의할 것은 결코 꼬리가 잡
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그런 것 같다면 즉시 현천장을 폐쇄
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알겠나?]
[존명.]
귀랑은 절반이나 남은 찻잔을 내려놓고 빠르게 밖으로 사라져 갔
다. 귀랑이 실내에서 사라져 가는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는 파천
이었다.
‘대체 누굴까? 그들이 변수가 될지도 모르겠는데……. 이렇게 되
면 변수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 둬야 한다는 말인데.’
상념이 많아서인지 차를 마시면서도 그는 맛을 알지 못했다. 빠르
게 잔을 비우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그에게 다가서는 인물이
있었다. 평범하게 생긱 삼십대 초반의 인물이었다. 그는 파천도 포권을
취한다.
“광자를 모시라는 분부를 받았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
는지요?”
‘나를? 이 자는 누구지?’
“왜 그러시오?”
“제 주인께서 공자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 하셨습니다. 잠시면 되
오니 아무쪼록 거절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는 끝까지 정중했다. 파천은 호기심이 생겼다. 그놈의 호기심 때
문에 혈마천의 함정에 빠졌던 적이 있지만 파천의 기억 속에서 지워
진 지 오래였다.
“당신 주인이 어디 있는데 그러시오?”
“저를 따라 오시면 아실 수 있습니다. 그럼 저를 따라 오십시오.”
그 말을 하고는 파천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돌아서 나가는 것
이 아닌가. 따라 오라는 데 따라 가지 않을 파천은 아니었다.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는 성미가 그의 등을 떠밀었다. 그는 결정을 내렸는지
표정을 굳히고는 의문의 인물 뒤를 따랐다. 다루를 나온 젊은이는 마
차를 가리켰다. 이미 밖에는 마차까지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 봐라. 그럼 나를 초청한 자가 멀리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내
가 여기 있다는 것은 어찌 알았으며, 내가 누구인지 알고 초대한다는
말이지? 혹시…….’
지금 자신의 모습은 옥면신룡 문윤의 모습이었다. 자신의 모습을
아는 사람이라고는 무림맹의 인사들을 제외하고는 몇 명되지 않는
다. 그러니 자연히 전 무림맹주였던 혈마천 이총사는 알고 있을 것이
아닌가.
‘상여락이라 했던가? 그놈은 나를 알고 있다. 그럼 혈마천을 이끌
고 온 책임자가 그 자이고, 또 그놈이 나를…….’
이런 생각에 골몰해 있던 파천은 머릿속에서 울려 나오는 거절의
소리들을 깔끔하게 정리하고는 발을 열려진 마차문 안으로 성급하
게 밀어 넣고야 말았다.
‘에라, 모르겠다. 설마하니 또다시 그놈일까! 그놈이면 차라리 잘
되었다. 이번에야말로 지난번의 빛을 갚아 주마.’
누군지도 모른 자의 초청을 아무런 대책도 없이 덜컥 승낙하고
만 파천. 고대 세력을 이끄는 수장으로서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들의
수하가 이 장면을 보았다면 두 팔 걷어 부치고 말렸을 게 뻔한 일을
파천은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태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가. 간
이 큰 것인지 아니면 자신감이 지나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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