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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1010화


군림천하 (1010)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강호의 세가가 아니라 관계(官界)의 명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복필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니 말하기 편하겠구려. 그렇소. 관중제일가란 바로 두 명의 대장군과 세 명의 상서(尙書)를 배출한 산양화가(山陽華家)를 가리키는 이름이오.” 

산양화가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산양에 자리한 섬서성 제일의 명문으로, 예로부터 뛰어난 문인(文人)과 학자, 관인들을 배출해 온 유구한 전통의 가문이었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웬만한 강호의 명문세가보다 더욱 널리 알려져 있기도 했다. 그들 중에는 한 지역을 통괄하는 순무(巡撫)나 지부대인(知府大人)이 된 자들도 적지 않기에 실생활에서 느껴지는 체감이 강호의 세가들보다 훨씬 더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관중에서 제일가는 가문이라는 명칭도 무림인들보다는 일반 사람들에게 더 회자되는 이름이었다.

복필이 갑자기 무림의 세가도 아닌 산양화가를 거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복필은 그 연유를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내가 잠시 종남파에 몸을 담은 시절에 내 선배가 한 분 계셨소. 입문도 나보다 몇 해나 빠르고 나이도 대여섯 살쯤 많았지만, 성격이 비슷하고 외가가 같은 하북성 한단(邯鄲)이어서 서로 친하게 지냈지. 그러다 그분은 진로를 바꾸라는 가문의 요구에 못 이겨 종남파를 떠나게 되었는데, 나도 그때 그분을 따라 나오게 되었던 것이오.”

복필은 당시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듯 잠시 아련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 후로 그분과는 가끔 연락을 주고받긴 했지만, 내가 외가가 있는 하북성 쪽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자연스레 멀어지게 되었소. 그러다 몇 달 전에 종남파가 다시 일어섰다는 소식에 섬서성으로 왔다가 그분과 다시 소식이 닿아서 만날 수 있었소.”

진산월은 묵묵히 복필의 말을 듣고 있다가 신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화의숭(華)이란 분이오.”

진산월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분이 관중제일가에 속한 분이십니까?”

복필의 얼굴에 언뜻 한 줄기 미소가 떠올랐다. 흐뭇함과 야릇함이 뒤섞인 묘한 미소였다.

“그분의 형님이 산양화가의 전대가주이셨던 화예숭(華禮崇) 대인이시오.”

그 이름도 진산월로서는 알지 못하는 이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산양화가는 무가(武家)가 아니라서 관심이 덜했을 뿐 아니라 전대라면 워낙 오래전이라 당시의 가주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대 가주의 동생분이시라면 상당한 고령이시겠군요.”

“내가 알기로는 그분 연세가 올해 여든셋이시오.”

그 나이라면 언제 무덤 속으로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노령(老齡)이었다.

그리고 복필 또한 칠십 대 후반의 고령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런 나이에도 복필은 과거의 인연 때문에 노구를 이끌고 이른 아침부터 땀을 흘리며 뛰어다녔던 것이다.

“그분이 저를 만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진산월로서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짐작 가는 것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런 일일수록 확실히 확인해 두는 것이 좋았다.

“그분은 종남파로의 귀문을 원하시오.”

예상했던 답변이 나오자 진산월로서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노인이 수십 년 전의 인연을 다시 잇고자 하니 그 의중이 무엇인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에 대해 좀 더 정확하게 알고 싶군요.”

“자세한 건 나를 통하기보다는 그분을 만나서 직접 듣는 게 더 정확하지 않겠소?”

당연한 말이었다. 하나 진산월은 막연히 산양화가의 전대가주의 동생이라는 말만 듣고 가던 길을 돌리고 싶지 않았다. 산양이 이곳에서 먼 곳은 아니었지만, 종남산으로 직접 향하는 것과는 다소 방향이 달라서 적지 않은 거리를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임영옥의 몸 상태가 언제 다시 악화될지 몰라 노심초사하고 있는 진산월로서는 가급적이면 한시라도 빨리 종남산으로 향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망설이고 있던 진산월을 보며 복필은 엉뚱한 말을 꺼냈다.

“그분도 나만큼이나 무공에 대한 소질은 별로 없는 분이시오. 강호에서의 뜻을 꺾은 것도 그 이유가 가장 클 것이오. 하지만 그분이 나보다 나은 점이 한 가지 분명하게 있소.”

진산월은 복필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하여 물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자식을 잘 보았다는 거요.”

뜻밖의 말에 진산월은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식을 잘 보았다니요?”

“말 그대로요. 그분은 모두 사남삼녀를 낳았는데, 사남 중 한 사람은 대장군, 또 한 사람은 이부시랑(吏部侍郞)이 되었고, 막내는 한림원 학사가 되었소. 그리고 세 명의 사위는 모두 고관으로, 그중 큰 사위는 현재 하남성의 순무요.”

시랑은 상서 바로 아래의 지위로, 실질적으로 부를 다스리는 높은 자리였다. 그리고 순무는 힌 지역의 민정과 군정을 모두 감찰하는 최고의 관직이니 그야말로 아들과 사위들이 모두 엄청난 고관대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진산월은 군이나 관계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으나, 한 사람의 후손에 이토록 많은 고관들이 즐비한 것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물었다.

“아들 중 다른 한 사람은 거론되지 않았는데…………….”

복필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분의 큰아들이 바로 당대 산양화가의 가주요.”

그 말에 비로소 진산월은 복필이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당대 관중제일가의 가주의 아버지가 종남파에 귀문하려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의미하는 바도 적지 않지만, 이루어질 수만 있다면 종남파에는 정말 커다란 힘이 된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화의숭은 단순히 수십 년 전에 종남파를 나왔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희망하는 고령의 노인이 아니라 고관대작들을 즐비하게 거느린 섬서성 제일 가문의 최고 어른이었다. 복필이 팔십을 바라보는 노구를 이끌고 이른 아침부터 간절히 진산월을 찾아서 객잔을 뒤지고 다녔던 것도 화의숭의 가세가 종남파에 큰 힘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진산월로서는 그런 복필의 노고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분을 뵙도록 하지요.”

복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하셨소. 그분은 너무 연로하여 거동이 불편하니, 진 장문인이 조금 번거롭더라도 찾아뵙는 게 순리일 것 같소.”

진산월은 몸이 성치 않은 임영옥과 다른 선자들을 당분간 왕흥루에 계속 머물게 하고 자신은 전흠만을 대동한 채 복필을 따라 산양으로 향했다. 세 명의 선자와 서인걸이 있으니 믿고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왕흥루에서 산양까지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단지 방향이 종남파가 있는 서쪽이 아니라 남쪽이었기에 임영옥을 대동하고 갈 수는 없었다. 마음이 급한 진산월로서는 왕복으로 꼬박 하루가 걸리는 길을 돌아간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선택이었다.

오전에 길을 떠난 진산월 일행이 산양에 도착한 것은 주위가 이미 어둑어둑해진 저녁 무렵이었다.

중간에 식사와 차를 마시기 위해 각기 주루와 다관에 한 번씩 들린 것을 제외하고는 쉬지 않고 말을 몰았기에 세 사람의 머리와 어깨 위에는 먼지가 수북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저곳이 바로 산양화가의 본가요.”

복필이 산양의 중앙대로 끝 쪽에 있는 커다란 대문을 가리켰다.

대로 한쪽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그 거대한 솟을대문은 웅장하면서도 화려하기 그지없어서 어지간한 담력의 사람이라도 그 앞에 서면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할 것 같았다.

<산양화씨가문(山陽華氏家門).>

대문의 크기만큼이나 커다란 현판이 시선을 끌었다.

하나 진산월은 그 현판보다는 복필을 먼저 돌아보았다.

“복 대협께서 고생하셨습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일각이 여삼추 같은 진산월이 빨리 말을 몰아오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하루 종일 말을 달린 복필의 몸 상태가 좋을 리 없었다.

진산월과 전흠은 한창 나이에 무공도 높아서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지만, 복필은 얼마 전부터 힘들어 하는 모습이 몇 차례나 보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복필은 쉬어 가자는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진산월의 뒤를 따라왔다.

이제 산양화가의 대문을 눈앞에 두고 나니 진산월은 자신이 복필의 나이를 생각하지 않고 너무 무리를 한 것 같아 진심으로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평상시의 진산월이라면 이러한 실수를 하지 않았을 테지만, 다시 또 사매를 두고 길을 떠나야 했던 진산월은 머릿속이 복잡하고 마음이 급해서 미처 타인에 대한 배려를 염두에 두지 못했다.

그럼에도 복필은 전혀 화를 내거나 힘들어하는 기색이 없이 주름진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허허. 이래봬도 아직은 쓸 만한 몸뚱이요. 견딜 만하오.

“제가 마음이 급해 미처 복 대협을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진산월이 정중하게 포권을 하자 복필은 손을 내저었다.

“이런 식으로라도 종남파에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게 되어 나로서는 오히려 기껍기 그지없소. 그러니 진 장문인께서는 걱정하지 마시오.”

세 사람은 몸에 묻은 먼지를 털고 의관을 정제한 후 산양화가의 대문 쪽으로 다가갔다.

대문 앞에는 네 명의 무사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눈빛이 매섭고 신체가 다부진 것으로 보아 산양화가의 당대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쉽게 짐직할 수 있었다.

복필은 그들에게 다가가 품에서 작은 옥패 하나를 내밀었다.

그 옥패를 본 무사들은 모두 표정이 변하더니 이내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노(老) 태상(上)의 손님이시군요. 안쪽으로 드시지요.”

화의숭은 비록 당대 가주를 아들로 두었으나, 그 자신은 전대 가주도 아니고 특별한 신분도 없었기에 화가에서의 지위가 약간 애매했다. 그래서 화가 내에서는 그에게 태상장로(太上長老)의 지위를 부여했고, 워낙 고령인 점을 감안해 노태상이라고 불렀다.

진산월 일행이 무사들의 안내를 받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이미 어둠이 짙게 드리워져 사방에 등(燈)이 내걸렸다.

흔들리는 등 너머로 보이는 산양화가의 건물은 몽환적인 아름다움이 있었다. 무가의 건물과는 조금 다른 오래된 명문 특유의 고풍스럽고 우아한 색채가 진하게 배어 나왔던 것이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배치도 그러했고, 특히 건물 하나를 지날 때마다 잘 손질된 정원이 계속 나타나서 그런 느낌을 더욱 강하게 불러일으켰다.

어지간한 정성이 아니라면 이렇게 많은 정원을 이토록 깨끗하게 관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세 개의 건물을 지나고 세 개의 정원을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그들은 한 채의 고색창연한 건물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망연각(望緣閣).>

해서체로 쓰인 그리 크지 않은 현판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곳까지 그들을 안내한 무사가 건물 한쪽을 살짝 두드리자 안에서 문사 차림의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문사 청년은 한쪽에 서 있는 복필을 보고는 이내 무슨 사정인지 짐작했는지 무사를 돌려보내고는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복 대협, 무사히 다녀오셨습니까?”

복필은 청년과 안면이 있는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행히 형님의 지시를 수행할 수 있었네.”

“지시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조부께서는 엄연히 부탁을 하신 겁니다.”

“그래, 부탁이라고 해 두세.”

청년은 무어라고 다시 말하려다 복필의 웃는 얼굴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 진산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다면 저분이 바로…………….”

“그래. 그가 바로 종남파의 당대 장문인인 신검무적 진 장문인이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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