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983화
군림천하 (983)
진산월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때 조여홍이 예의 서늘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기 때문이다.
“너는 조만간 백모란을 만나게 될 것이다. 네가 원하든, 그녀가 원하든 반드시 그렇게 되겠지.”
진산월도 그 점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를 둘러싼 주위의 모든 상황이 그와 백모란의 만남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심지어 모용단죽은 백모란과 진산월이 힘을 합쳐 음양쌍반진을 완성해야만 조익현과 승부를 겨루어 볼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야율척은 석동을 찾기 위해서라도 백모란을 만나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백모란은 어떤 여인입니까?”
진산월의 물음에 조여홍은 단정적인 음성으로 말했다.
“남자에게는 최고의 여인이지.”
진산월은 백모란에 대한 조여홍의 감정이 결코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기에, 그녀를 극찬한 조여홍의 반응이 언뜻 이해되지 않았다.
“무슨 의미입니까?”
“말 그대로다. 남자들이 꿈꾸는 모든 걸 갖춘 완벽한 여인상이지. 단순히 용모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녀는 남자들이 원하는 것을 꿈꿀 수 있도록 해주는 재주가 있지. 조익현이나 석동이 단순히 그녀의 외모에 홀려 빠지게 된 것이 아니다.”
조여홍의 표정은 여전히 차분했으나, 음성 속에는 싸늘한 냉기가 담겨 있었다.
“조익현과 석동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조익현은 집안을 일으켜 제대로 된 가문을 만들고자 했다. 아버지 때부터 이루고자 했던 오랜 소원이었지. 조익현은 그녀와 함께라면 강호제일의 가문을 만드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믿었고, 그래서 기꺼이 그녀에게 칠음진기와 다른 비급들을 건네준 거지.”
진산월은 잠시 침음하다가 다시 물었다.
“석둥은 어떻습니까?”
조여홍은 꺼리거나 망설이지 않고 주저 없이 대답했다.
“석동의 소원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것이다.”
“그게 무엇입니까?”
“최고의 무공을 익혀 최고의 고수가 되는 것이지.”
“그녀가 그것을 이루어 줄 수 있습니까?”
조여홍은 냉소를 날렸다.
“그는 그렇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그녀의 품속에서 수십 년을 묻혀 있지 않았을 테니까.”
진산월은 선뜻 납득이 되지 않아 다시 물음을 던졌다.
“그녀가 비록 태음신맥을 타고 난 일대재녀라 해도 그런 건 불가능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조여홍은 진산월의 얼굴을 똑바로 주시하며 단호하면서도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중요한 건 그녀가 가능하냐 불가능하냐 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그렇다고 믿느냐 안 믿느냐는 것이지. 그는 그녀라면 자신을 도와 최고의 무공을 익힐 수 있게 해 줄 거라고 믿었다. 단지 그뿐이다.”
진산월은 아직도 의문이 풀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그게 그녀의 가장 큰 재주인 거지. 남자로 하여금 그녀만 있으면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힘. 그녀의 늙지 않는 외모와 태음신맥으로 인한 무공 실력은 부수적인 것이다.”
조여홍의 말대로라면 백모란은 가히 최고의 여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천하제일의 미모에, 무공에 대한 천부적인 재질을 타고난 데다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마력을 지닌 여인!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다.
“여자에게는 최악의 여인이겠군요.”
언뜻 조여홍의 입가에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잘 아는구나.”
“제가 그녀를 만날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을까요?”
조여홍은 한동안 진산월의 두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래라면 너에게 가급적 그녀를 만나지 말라고 권했을 것이다. 하나 내 정심안에도 흔들리지 않는 너라면 다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드는구나. 그래도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그게 무엇입니까?”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녀가 알게 하지 마라.”
그 말을 할 때 그녀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해서 진산월도 일시지간 별다른 대꾸를 하지 못했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걸 그녀가 알도록 하지 말라는 그녀의 말은 대체 무슨 뜻일까?
그리고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막상 이런 질문을 마음속으로 던지자, 진산월도 쉽게 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필시 너를 자기 뜻대로 움직이게 하려 할 것이다. 그녀의 뜻대로 된다면 너는 조익현이나 석동 같은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고. 그리고 만약 “네가 그녀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조여홍의 시선이 칼날같이 예리하게 변했다.
“그녀는 네가 가장 원하는 것을 결코 이루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섬뜩한 말에 진산월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가 풀어졌다.
“그녀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둘 일은 없을 겁니다.”
“너무 자신하지 마라. 조익현이나 석동이 한심한 자들이라 그녀에게 넘어간 것이 아니다. 너는 사 년 전에 봉황금시 때문에 고생한 적이 있지?”
진산월은 그녀가 대뜸 과거의 일을 꺼내자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습니다.”
“그 봉황금시가 왜 갑자기 무림에 등장했는지 아느냐?”
그 점은 진산월도 많은 의혹을 느끼고 있었으나, 정확한 내막은 알지 못했다.
“모용 대협이 조익현에게 위협받는 와중에 유출된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게 아니다. 그것은 백모란이 고의로 유출한 거지.”
“그녀가 왜 그런 일을 한 것입니까?”
“그녀는 조익현이 오랜 부상에서 벗어나 몸을 완치시키고 조만간 중원에 들어올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녀는 혹시라도 조익현이 자신을 찾아올까봐 봉황금시를 고의로 강호에 내보낸 것이다.”
봉황금시는 원래 석동의 물건으로, 취와미인상이 담긴 천룡궤를 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열쇠였다. 석동은 조익현과의 싸움에서 얻은 부상을 치유하기 위해 그녀의 도움이 필요했는데, 그녀는 그 대가로 그에게 봉황금시를 요구했고 석동은 그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조익현의 중원 진출에 맞춰 봉황금시를 유출시킨 것은 그의 시선을 돌리기 위함도 있지만 자신이 석동과 함께 있으니 함부로 찾지 말라는 말았지.”
신호를 보낸 것이기도 했다. 나는 뒤늦게 봉황금시가 중원에 나온 것을 알고 신목령의 사자들을 불러 물건을 회수하게 했는데, 결국 실패하고
그녀의 말에 진산월은 씁쓸한 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집요하게 봉황금시를 노리던 운자추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때 진산월은 봉황금시의 원주인이라 할 수 있는 천봉궁의 인물들이 봉황금시를 되찾는 일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은 것에 의문을 품었는데, 조여홍의 말대로라면 그녀들에게 백모란의 은밀한 지시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결국 봉황금시는 진산월의 손을 거쳐 모용봉에게 돌아갔고, 모용봉은 사 년 동안 잘 숨기고 있던 봉황금시를 천룡궤가 구궁보에 오기 직전에 진산월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모용봉은 천룡궤의 취와미인상이 조익현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최대한 막으려고 그런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그런 모용봉도 결국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취와미인상을 조익현에게 내주고 말았으니, 그가 그 때문에 얼마나 고초를 겪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원래 봉황금시가 네 수중에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네가 다시 중원에 나왔을 때 봉황금시를 가지고 있지 않은 걸 알고 천룡궤를 내보낼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그때는 이미 조익현의 위협이 너무 거세어서 나로서는 석가장 안에서 천룡궤를 계속 보관하고 있기 힘들었고, 어떤 식으로든 봉황금시를 가진 자의 행적을 드러나게 할 필요성이 있었다.”
조여홍은 자신이 진산월로 하여금 천룡궤를 운반하게 한 연유를 설명해 주었다. 그 천룡궤를 구궁보까지 가지고 가는 동안 진산월은 끊임없는 공격을 받아야 했고, 습격을 해 온 자들 중에는 강호무림의 최정상을 달리는 고수들도 적지 않았다.
지금 되짚어 생각해 보면 참으로 험난하기 짝이 없는 여정이었다.
“그 때문에 네가 상당한 고초를 겪었다는 말을 들었다. 너는 네게 그런 무거운 짐을 지우게 한 나를 원망하지 않느냐?”
“그 일은 조대랑께 대가를 받고 행한 것이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당시 진산월이 그녀에게서 받은 것이 바로 무염보 십팔요결 중 전반부와 중반부의 열두 걸음이었다. 그로서는 그렇게라도 과거에 절전되었던 종남파의 무공을 되찾을 수 있게 된 것이 오히려 기꺼울 뿐이었다.
조여홍은 진산월의 심정을 파악하려는지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다가 그가 특별히 격동하거나 흥분하는 기색이 없자, 그제야 한결 차분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염보를 비롯한 비선의 절학은 우리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전(家傳) 무공이지만, 종남파가 원류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나머지 무공들도 조만간 정리해서 보내 줄 테니 그 점에 대해서는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취와미인상은. …..”
조여홍은 잠시 말을 고르는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비선이 출산한 아이는 태을검선의 자식이었다. 아버지와 조익현이 태을검선의 유진을 수습하는 걸 거리껴 하지 않은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원래 종남파의 무공도 아니고, 선조인 태을검선이 남긴 것이니 우리 조씨 가문의 무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 그 점에 대해서는 내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진산월은 특별히 반대하거나 이견을 내보이지 않았다.
이미 태을검선의 유진은 조일화와 그 자식들에게 전해진 지 오래였고, 특히 취와미인상은 종남파가 존재조차 몰랐던 데 비해 이들은 백 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것을 연구하여 완성된 무공을 이루어 냈으니 무작정 종남파의 무공이라고 주장할 수만은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손을 놓아 버리기에는 마음 한구석이 석연치 않았다.
그런 그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지 조여홍은 다시 말을 이었다.
“대신 너에게 다른 보상을 하려 한다. 아마 그것이라면 너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종남파 사상 최강의 고수였던 태을검선의 유진을 대신할 수 있는 보상이 과연 존재할 수 있겠는가?
진산월의 그런 의구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조여홍은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비선은 죽기 전에 비망록을 남겼다. 그 비망록의 제일 마지막에는 열여섯 글자로 이루어진 구결 하나가 적혀 있다.”
진산월로서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음요현청(陰玄淸), 양고천단(陽鼓天檀), 확진치(擴乙), 저재귀진(歸眞)>. 너는 이 구결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겠느냐?”
진산월은 그녀의 입에서 구결이 흘러나오는 순간부터 이미 표정이 변해 있었다. 좀처럼 냉정을 잃지 않고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던 그로서는 드물게 보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육합.
조여홍은 힘주어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그것이 바로 육합귀진신공을 이루는 요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