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984화
군림천하 (984)
노해광은 재미있는 걸 본다는 얼굴로 가만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인물들을 바라보았다.
십대 후반의 싱싱한 젊음을 자랑하는 미소년과 미소녀, 그리고 그들 사이에 서 있는 열 살이 조금 넘은 어린아이 하나.
본 파의 제자들 중 그래도 가장 똑똑하고 장래가 촉망된다고 기대하고 있던 세 명이 서안에 내려오자마자 커다란 사고를 쳐 버린 것이다.
최근 서안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사건의 주인공들을 앞에 두고 노해광은 한편으로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가 나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부모의 원수를 스스로의 힘으로 처단한 무림인다운 단호함에 찬사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서안 사람들의 반응은 의외로 그리 나쁘지 않았다.
죽은 노아삼수가 평소에 평판이 극도로 안 좋았을 뿐 아니라, 그들을 해친 유소응과 방화, 서문연상이 하나같이 인물됨이 준수하고 행동거지가 명문정파의 제자로서 모자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사건이 벌어졌던 취화성에서도 특별히 불만을 토로하거나 항의를 해 오지 않았기에 노해광도 대충 전후 사정만 보고받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하려 했다.
그럼에도 그들을 자신의 앞에 불러 모은 것은 그들에게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이었다.
노해광의 시선을 받자, 세 사람은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노해광은 사문 내에서는 그들의 사숙조였고, 사문 밖에서는 서안을 막후에서 지배하는 최고의 실력자였다. 이제 겨우 종남파에 입문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기본적인 무공을 배우고 있는 세 사람으로서는 지위로나 실력으로나 제대로 쳐다보기도 힘든 하늘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더구나 노해광의 성정 또한 절대로 다정다감하지 않기에 아랫사람으로서는 더욱 대하기 어려웠다.
노해광은 날카로운 눈으로 세 명의 사형제를 차례로 보고 있다가 불쑥 물었다.
“누가 가장 서열이 높으냐?”
유소응이 주저하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접니다.”
노해광의 칼날같이 예리한 시선이 유소응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그러고 보니 네가 장문사질의 직전제자로구나. 네 나이가 몇 살이냐?”
“열두 살입니다.”
“그 나이에 거칠기로 소문난 노아삼수 중 하나를 쓰러뜨렸다니 장문사질이 잘 가르친 모양이구나.”
유소응은 조금도 뻐기거나 자랑스러워하는 기색 없이 담담한 모습이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그 말에 노해광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말 운이 좋았지. 이번에는 운이 좋았지만, 만약 운이 나빴다면 어땠을 것 같으냐?”
유소응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노해광은 살짝 붉어진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묵직한 음성을 내뱉었다.
“운이 나빴다면 너는 노아삼수에게 패해 크게 다쳤을 것이고, 높은 확률로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냉정한 말에 정작 당사자인 유소응은 별반 반응이 없는데, 방화와 서문연상이 움찔 놀라 무어라고 입을 열려 했다. 하나 노해광은 엄격한 눈으로 그들을 제지한 후 계속 유소응을 무서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네 사제와 사매가 그들을 물리쳤다 할지라도 네가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본 파는 장문인의 직전제자를 잃게 되는 것이고, 너는 부모의 복수를 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목숨만 원수에게 넘겨준 꼴이 되는 것이다.”
유소응의 작은 고개가 아래로 떨구어졌다.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 같은지 힘껏 움켜쥔 두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노해광은 냉엄한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이제 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겠느냐?”
유소응은 머리를 더욱 깊게 숙였다.
“예.”
“말해 보거라.”
유소응은 한 차례 호흡을 가다듬은 후 숙였던 고개를 들고 한결 침착해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우선 가까운 사문의 어른을 찾아 사정을 고하고 도움을 청했어야 했습니다.”
“그러고는?”
“보다 완벽하게 준비를 갖춘 후 그들을 찾아가야 했습니다. 그래야 그들이 도주하거나, 그들을 놓치는 일 없이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을 겁니다.”
그제야 노해광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래. 그게 순서다. 너는 본 파의 제자이며, 네 뒤에는 본 파가 있다는 걸 잊지 마라. 너의 원수는 곧 우리의 원수이며, 네가 피를 흘린다면 우리 또한 피 흘리는 걸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노해광은 방화와 서문연상에게도 엄격한 다짐을 보내는 걸 잊지 않았다.
“너희도 조심해야 한다. 이번에는 공개된 자리인 데다 보는 시선이 많아서 그놈들이 별반 수를 쓰지 못한 것 같은데, 강호의 낭인들 중에는 정말 상상도 못 할 만큼 변칙적이고 괴이한 수법을 쓰는 자들이 적지 않다. 특히 무림인들이라면 누구나가 비장의 구명절초 하나씩은 가지고 있으니, 상대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는 절대로 방심해서는 안 된다.”
방화와 서문연상은 나란히 머리를 조아렸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숙조님.’
노해광은 다시 유소응과 방화, 서문연상을 차례로 둘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모두 고생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악적들을 해치웠으니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맛있는 걸 먹으러 가도록 하자.”
서문연상이 언제 주눅이 들었느냐는 듯 눈을 반짝이며 신이 나서 입을 조잘거렸다.
“사숙조님께서 사시는 겁니까? 일전에는 대왕루에서 먹었으니까, 이번에는 산해루에서
노해광은 그녀의 넉살 좋은 모습이 싫지 않은 듯 피식 웃었다.
“아쉽게도 이번에는 아니다. 마침 금륜장의 장주가 생일연에 우리를 초대했더구나. 그러니 오늘은 그곳으로 가자.”
서문연상은 산해루에서 산해진미를 먹을 기대에 차 있다가 조금 실망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금륜장주의 생일잔치에 우리가 가도 될까요?”
그녀의 말 속에는 그런 노인네의 생일잔치에는 그다지 가고 싶지 않다는 의미가 담겨 있으나, 노해광은 모른 척하고 그들을 이끌었다.
“금륜장주는 한때 서안의 최고 고수로 불리던 인물이니 그의 생일연에는 서안의 유력한 인물들이 많이 모일 것이다. 너희로서는 안계를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니 피하지 마라.”
“그래도 이번에는 정말 모처럼 온 나들이인데…………. 그곳에 가 봤자 구닥다리 노인네들만 가득할 텐데.. 텐데………….”
서문연상은 계속 투덜거렸으나, 노해광은 오히려 가볍게 웃었다.
“하하.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서문연상은 귀가 번쩍 뜨이는지 버릇도 없이 노해광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예? 그곳에 귀공자들이라도 몰려온답니까?”
“금륜장주의 손자가 얼마 전에 본 파의 제자가 된 것은 알고 있겠지?”
“예, 고성한(固成)이라는 녀석인데, 제법 똘똘해 보이더군요.”
“좀처럼 문호를 개방하지 않았던 본 파가 제자를 받은 것을 알게 된 서안 일대의 고수들이 눈도장이라도 받으려고 모두 자기 자제들을 데리고 온다고 하니 아마 제법 눈요기가 될 것이다.”
서문연상의 봉목이 동그랗게 뜨여졌다.
“그런 자리에 우리가 가도 되나요? 사숙조나 사문 어른들이 가셔야 하는 것은 아니고요?”
“물론 나도 가고 성 사제나 낙 사질도 올 것이다. 고소명이 우리를 초대한 것도 이번 기회에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종남파의 고수들과 안면을 넓히고 자신의 위세가 아직 건재함을 과시하려는 것이니, 가급적이면 본 파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참석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것이다.”
“에이. 결국 우리는 곁들이에 불과하네요.”
“그래서 가지 않을 셈이냐?”
의외로 서문연상은 냉큼 대답하는 것이었다.
“사숙조께서 일부러 데려다주신다는 데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요. 기꺼이 참석해서 서안 유력자들의 자제들이 얼마나 쓸 만한 인물들인지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노해광은 그녀의 의중을 훤히 알고 있다는 듯 묘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너의 그 낙 사숙이 온다는 말에 솔깃한 건 아니고?”
서문연상은 새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머. 낙 사숙도 오신다고 했나요? 사문의 어른을 서안에서 뵙는 것도 재미있겠네요. 그분처럼 좀처럼 얼굴 보기 힘든 분이라면 더욱 그렇지요.”
아닌 게 아니라 낙일방은 진산월과 함께 중원으로 갔다가 몇 달 만에 돌아와서는 노해광을 돕기 위해 바로 성낙중과 함께 서안으로 내려가 버리는 바람에 그녀는 그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지금도 임풍옥수 같은 그의 준수한 모습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기는 했으나,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하나 이 눈치가 귀신같은 사숙조는 이미 그녀의 속을 훤해 꿰뚫고 있는지 그녀를 향해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재미있는 일이겠지. 나도 기대가 되는구나.”
서문연상은 멀뚱하게 서 있는 방화와 유소응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서 가지요. 갑자기 배가 고파지네요.”
금륜장은 서안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쌍하보가 대대로 서안의 명문으로 군림해 온 데 비해, 금륜장은 십여 년 전에 고소명이 단신으로 서안에 와서 세운 문파였다. 전통이나 역사는 비교가 되지 않았으나, 고소명의 무공이 워낙 뛰어나서 불과 십 년 만에 쌍하보와 함께 서안에서 쌍벽을 이루는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하나 초가보의 등장으로 철퇴를 맞아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고, 특히 고소명이 초가보주인 초관에게 패하면서 쇠퇴일로를 겪는 듯했다. 때마침 종남파가 다시 일어서면서 초가보를 꺾지 않았다면 금륜장은 예전의 위세를 모두 잃고 영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더구나 초가보를 물리친 진산월이 초가보에 빼앗겼던 금륜장의 이권 대부분을 찾아 주었기에 그들은 종남파에 절대적으로 호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종남파가 완전히 예전의 성세를 되찾은 후, 고소명은 자신이 아끼던 큰 손자를 어렵사리 종남파에 입문시켰다. 장문인인 진산월이 자리를 비웠기에 당분간 제자를 받을 수 없다는 소지산의 거절에도 몇 번이나 직접 종남파를 찾아간 끝에 마침내 손자의 입문을 허락받은 것이다.
그것은 종남파의 위세가 갈수록 커져서 진산월이 돌아온 후에는 입문하기가 더욱 쉽지 않을 거라는 선견지명 때문이기도 했지만, 하루라도 빨리 손자에게 종남파의 절학을 배우게 하고 싶은 개인적인 욕심이 더 크게 작용했다.
손자인 고성한은 열다섯 살에 불과했으나, 어려서부터 무학에 관해서는 뛰어난 실력을 발휘해서 고소명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인재였다. 고소명은 고성한이 제대로 된 스승 밑에서 잘 수련받는다면 자신을 능가하는 고수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고소명은 이번 생일연에 상당한 심혈을 기울였다.
초가보에게 밀려 쇠퇴해 가고 있던 금륜장이 다시 일어섰을 뿐 아니라, 당금 천하의 제일고수로 군림하는 신검무적의 종남파에 손자를 입문시킨 것은 정말 큰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이번 생일연을 금륜장이 다시 예전의 모습을 회복했음을 알리는 기회로 삼고자 한 것이다.
아침부터 금륜장에는 수많은 인파들로 북적였고, 호화로운 마차와 말들이 쉴 새 없이 들락거렸다. 초청장을 받은 사람들만 들여보냈음에도 제법 넓은 금륜장은 사람들로 가득 차서 발 디딜 틈도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금륜장의 모든 식솔들은 얼굴에 미소를 그치지 않은 채 손님맞이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로서는 자칫 이대로 망하는 줄 알았던 금륜장이 성대하게 재기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그들을 응대하느라 정신이 없어도 모두들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고 있는 것이다.
금륜장의 중앙에 있는 커다란 대청은 초대받은 하객들로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대문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이 꾸역꾸역 들어서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의 커다란 음성이 들려왔다.
“종남파다! 종남파의 고수들이 왔다!”
그 소리를 듣자, 장내가 그야말로 터져 나갈 듯한 함성과 고함으로 가득 차 버렸다.
“드디어 종남파의 고수들을 볼 수 있게 되었구나.”
“누구야? 종남파에서 누가 온 거야?”
인파로 가득 찬 정문 일대가 소란스러워지더니 사람들이 억지로 만든 통로를 따라 일단의 인물들이 금륜장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