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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985화


군림천하 (985)

가장 선두에는 당당한 체구에 금포를 걸친 중년인이 걸어오고 있었는데, 얼굴에는 자신만만한 미소가 떠올라 있는 데다 전신에서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을 풍기고 있어 제대로 마주 보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그 옆으로 이목구비가 수려한 청의 중년인과 다소 뚱뚱한 화의 중년인이 나란히 하고 있었고, 그들의 바로 뒤에는 백의를 입은 준수한 청년이 안대를 한 중년인과 함께 몇 명의 어린 제자들을 데리고 뒤따르고 있었다.

사람들의 소곤거림이 더욱 커졌다.

“저 앞에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철면호 노해광이야.”

“우측의 저 청의인이 무당산에서 비응검을 꺾은 무영검군이구나. 정말 겉으로 보기만 해도 절세 검객의 풍모가 느껴지는구나.”

“왼쪽에 풍채 좋은 사람은 아마 회람연에서 화산파의 장로인 철장비응과 동수(同手)를 이루었다는 하동원이라는 고수일 걸세. 온몸이 철탑 같다고 하더군.”

“대해검은 안 왔나? 화산파의 최고 고수 세 사람을 연파했다는 그의 모습을 꼭 보고 싶었는데.”

누군가가 탄성을 터뜨렸다.

“맙소사, 그 뒤를 보라고. 저 헌앙한 자세하며, 절세적인 풍모! 당대 제일권사라는 옥면신권이 아닌가? 과연 천하의 미남자로구나!”

“드디어 내가 옥면신권을 보게 되다니. 이봐, 너무 밀지 말라고. 나도 잘 안 보여!”

삽시간에 주위가 저잣거리처럼 시끌벅적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자신에게 쏠리는 것을 본 낙일방이 씁쓸한 고소를 머금었다.

“이래서 안 오려고 했었는데.”

옆에서 그와 나란히 걷고 있던 동중산이 빙글거리며 웃었다.

“사숙께서 오시지 않았으면 이 많은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했을 겁니다. 지금도 보십시오. 여인들의 눈에서 불똥이 피는 것 같군요. 사숙 옆에 자신들이 아닌 제가 있으니 말입니다.”

낙일방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동 사질의 말솜씨는 정말 감당하기 힘들군. 그나저나 응 사형은 왜 안 오신 건가? 이런 날 모처럼 만나서 술이라도 한잔 나눴으면 했는데.”

“아직 몸이 완쾌되지 않은 상태라 이렇게 사람이 많은 자리에 나오는 것이 내키지 않으신 듯합니다.’

“상처가 그리 심하다면 본 파로 모시고 가서 제갈 신의께 보여 드리는 게 좋지 않겠나?”

“제가 넌지시 권했습니다만, 이 정도 부상으로 신의를 찾아가면 오히려 꾸중만 들을 거라며 그냥 있겠다고 하시더군요.”

낙일방은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고집하고는. 오늘 저녁에라도 찾아가야겠군.”

“제가 모시겠습니다.”

“고맙네. 그보다 손가전장은 별일이 없나?”

낙일방이 단순히 손가전장이 궁금해서 물은 게 아니라 응계성이 잘 지내고 있는지를 확인하려는 것임을 알아차린 동중산은 목소리를 한층 낮추었다. 

“응 사숙께서는 잘 지내고 계신 듯합니다. 손가장의 사람들이 응 사숙을 대할 때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이 역력한 걸 봐서는 대우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불만스럽거나 부족한 점은 없어 보이나?”

“제가 슬쩍 여쭈어봤는데, 쓸데없이 자기한테 관심 갖지 말고 본 파의 일에나 더 신경 쓰라는 꾸지람만 들었습니다.”

동중산이 웃으며 말하자 낙일방은 고개를 내저으며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정말 성격은 예전 그대로라니까.”

“회람연의 비무에서 부상이 심하셨다고 해서 저도 계속 살펴보았는데,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자네가 애썼네.”

“아닙니다. 저도 모처럼 응 사숙을 뵐 수 있어서 반가웠습니다.”

낙일방의 시선이 뒤쪽에서 따라오고 있는 손풍을 슬쩍 스치듯 지나갔다. 손풍은 평소의 모습과는 달리 조금은 침울한 얼굴에 말도 거의 없었다.

“손 사질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은데, 특별한 일이라도 있었나?”

동중산은 한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에게 손풍의 일을 말해 주었다.

묵묵히 듣고 있던 낙일방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손 사질은 자신을 생각해 주는 친구들이 있군. 나는 어린 나이부터 고향을 떠나와서 그런지 친구가 별로 없네.”

“그래도 한 분 있지 않습니까? 개방의 그 젊은 거지 말입니다.”

동중산의 말에 낙일방의 두 눈이 별처럼 반짝거렸다.

“그래, 소풍자, 그 빌어먹을 녀석이 있었지. 그 녀석 안 본 지도 몇 달 되었군. 낙양에서 모처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총단에 수련하러 들어간다고 소식이 끊겼는데, 잘 있나 모르겠군.”

소풍자는 낙일방에게는 유일한 친구라 할 수 있는 위적풍의 어렸을 적 별호였다. 그는 낙일방의 고향 친구로, 고향을 등질 때부터 서로를 의지한 채 험난한 강호행을 시작했기에 형제보다 더한 우의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개방에 들어간 지 몇 년 만에 삼결제자까지 올라섰는데, 그 뒤로는 통 소식을 몰라 낙일방의 애를 태우고 있었다.

동중산은 좋은 말로 낙일방을 위로해 주었다.

“총단에서 불러들인 걸 보면 중한 직책을 맡기려는 게 분명합니다. 아마 곧 좋은 자리로 영전했다는 소식이 들릴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위 소협의 성격이나 능력으로 보아 큰 위험을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긴. 그 녀석이 겁이 좀 많아서 그런지 어렸을 때부터 위험한 자리는 용케도 잘 피해 다니고는 했지. 발도 빠르고 눈치도 비상하니 맥없이 험한 꼴을 당하지 않을 거 같긴 하군. 그래도 강호인의 삶이란 게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으니…….”

고생이라곤 전혀 모를 것 같은 곱상한 낙일방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모르는 사람들은 실소를 흘릴지 몰라도, 동중산은 그가 겉모습과는 달리 그동안 얼마나 험하고 위태로운 인생을 살아왔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비단 낙일방뿐이겠는가?

동중산 자신은 물론이고 소지산과 응계성, 방취아, 전풍개 등 모든 종남파의 고수들은 정말 실오라기 같은 밧줄에 몸을 의지한 채 천길 낭떠러지를 헤치고 온 듯한 아슬아슬한 상황을 셀 수 없이 겪어 오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들의 앞에는 늘 한 사람이 그들을 이끌어 왔다.

굳건한 그의 등이 얼마나 넓고 의지가 됐는지, 그의 낮게 가라앉은 음성과 침착한 눈빛이 얼마나 용기를 주고 가슴을 뜨겁게 했는지 동중산은 결코 잊은 적이 없었다.

문득 장문인의 모습을 떠올리자 못 견디게 그리워져서 동중산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디에 계십니까, 장문인? 어서 본산으로 돌아오십시오. 모두 장문인이 오시기만을 정말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중인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활짝 열린 금륜장의 화려한 대문을 지나면서도 동중산은 험한 강호의 어딘가를 주유하고 있을 진산월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끝없이 염원하고 있었다.

연회는 예상대로였다.

연회장 안은 호화로웠고, 줄지어 나오는 요리들은 온 천하의 산해진미를 모두 모은 듯했으며, 귓전을 울리는 악인(樂人)들의 연주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금륜장주 고소명이 오래전부터 공언한 대로 금륜장의 모든 돈을 퍼부은 듯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연회의 절정은 서안 최고의 악사인 기효인(仁)의 등장이었다.

기효인은 비파 연주의 최고수로, 최근 서안에서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악사였다. 찾는 사람도 많고 그만큼 부르는 가격도 비쌌지만, 당연한 듯 이 자리에 불려 나오게 된 것이다.

기효인 외에도 명창(名唱)으로 유명한 탁진군(卓眞君)과 피리의 달인인 오종심(心) 같은 유명한 악인들이 대거 참여해서 그야말로 한바탕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넓은 대청 안을 가득 메우던 풍악 소리가 잦아들고 이어 비파를 안은 기효인이 무대에 오르자 모든 사람들이 입을 다문 채 그의 연주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기효인의 비파 연주는 그야말로 서안뿐 아니라 섬서성에서도 최고라 할 만큼 뛰어나서 절로 듣는 사람의 넋을 빼앗는 듯했다. 조금 전만 해도 저잣거리보다 더욱 시끄러웠던 장내가 삽시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지고 모두들 비파 연주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은 정말 인상적인 광경이었다.

지금까지 말없이 술잔만 기울이고 있던 노해광이 문득 옆을 돌아보았다.

“어떤가? 솜씨가 제법이지 않나?”

성락중은 연주에 몰입하고 있는 기효인을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조용히 웃었다.

“많은 사람들이 서안일절(西安-絶)이라기에 긴가민가했는데, 정말 대단한 실력이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 왔는지 짐작이 가는구려.”

노해광의 입가에도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자네가 알아볼 줄 알았지.”

“어떻게 몰라보겠소, 몇 안 되는 젊은 시절의 인연을?”

기효인을 보는 성락중의 눈에는 반가움과 흐뭇함, 그리고 한 줄기 착잡함이 담겨 있었다.

사부인 전풍개를 따라 종남파를 떠나기 전의 성락중은 종남파는 물론이고 서안에서도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로 제법 주목을 받았었다. 천성이 온유하고 차분할 뿐 아니라 배려심이 깊었기에 교우 범위도 넓었고, 세인들의 평가도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성락중이 어울리던 무리 중 특이한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그가 바로 기효인이었다. 당시 기효인은 뛰어난 검객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아버지 때문에 상당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무림인이 되기보다는 예인(藝人)의 길을 걷기를 더 원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아버지에게 쫓겨나다시피 의절을 당한 기효인은 서슴없이 예도(禮道)를 걸었고, 결국 섬서성 전체에 널리 알려진 비파의 최고 고수가 되었다.

성락중은 아버지와 의절한 그를 달래려고 찾아갔다가, 자신은 무림에 뜻이 없으니 앞으로는 찾아오지 말라는 기효인의 말에 씁쓸한 얼굴로 돌아서야만 했다. 그 뒤로 기산취악이 벌어졌고, 사부인 전풍개를 따라 종남파를 등지게 되면서 서안을 떠나야 했던 성락중은 오늘 이 자리에 온 후에야 비로소 기효인을 보게 된 것이다.

성락중은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비파 연주에 몰두하고 있는 기효인의 모습을 정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가 나직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행복해 보이는구나. 네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증거겠지.”

아닌 게 아니라 중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비파를 타고 있는 기효인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고, 두 뺨에는 엷은 홍조가 어려 있어 그가 지금 자신의 연주에 심취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연주를 마친 기효인이 만장의 환호와 박수를 받으며 사방으로 허리를 숙여 답례를 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시선이 성락중이 앉아 있는 자리를 향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스치고 지나갔으나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성락중은 여전히 담담한 모습이었으며, 기효인 또한 그를 알아보았다거나 웃음을 보내는 기색 따위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기효인이 물러난 후 노해광이 낮은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자네를 알아본 모양이군. 자네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 같았네.”

“그럴 리가 있소? 이미 서로 안 본지 이십 년이 훌쩍 넘었소. 그가 지금까지도 나를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지.”

“그래도 자네는 한눈에 그를 알아보지 않았나?”

“그건 오늘 이곳에 기효인이 온다는 말을 사전에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오. 다른 곳에서라면 나도 그를 못 알아봤을 거요.”

노해광은 성락중의 얼굴을 빤히 보고 있다가 그답지 않게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그렇다고 해 두지. 아무래도 내가 잘못 본 모양이군.”

성락중은 그에 대해서는 더 말하고 싶지 않은지 자연스레 말머리를 돌렸다.

“그런데 이런 자리에 젊은 제자들을 참석시키다니 노 사형답지 않구려. 다른 뜻이라도 있소?”

노해광은 불필요한 일로 본 산의 제자들을 불러들이는 것을 극도로 자제해왔다. 심지어 소마 신지림과의 살 떨리는 싸움을 앞에 두고도 본 산에 도움을 청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일에 본 산을 개입시키는 것을 엄격히 피해 왔다.

평상시였다면 아무리 고소명이 서안의 유력한 고수라고 해도 그의 생일연에 유소응과 방화, 서문연상 등 젊은 제자들을 모두 참석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노해광이 이런 행동을 한 것에는 나름의 뜻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성락중의 생각이었다.

노해광은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보았네. 저 녀석들에게 한 가지 알려주고 싶은 것이 있어서 일부러 모두 오라고 한 걸세.”

“그게 무엇이오?”

노해광의 얼굴은 여느 때보다 진지했다.

“제자 녀석들에게 대접받는 법을 가르쳐 주고 싶네.”

“대접받는 법?”

“본 파가 예전의 성세를 회복한 후 많은 사람들이 본 파의 제자들을 보려고 하네. 평생을 본 산에만 틀어박혀 있을 게 아닌 다음에야 사람들을 만날 수밖에 없을 테고, 그러다 보면 자연히 그들과 어울리지 않을 수 없네. 그럴 때 그들에게 잘 대접받는 법을 가르쳐 주려고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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