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993화
군림천하 (993)
낙양성의 남문대로를 나와 낙수(洛水)를 따라 계속 가다 보면 고색창연한 성곽이 나타난다.
이곳이 바로 의양성(宜陽城)이었다.
진산월이 낙양을 떠나 의양성으로 온 것은 얼마 전에 오촌 낙빈루의 후원에서 보았던 <춘행기흥>이라는 글자 때문이었다.
임영옥의 머리띠와 함께 남겨진 <춘행기흥>이라는 네 개의 글자!
사실 <춘행기흥>은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인 이화(李華)가 지은 시의 제목이었다.
의양성하초처처(宜陽城下草萎萎).
간수동류복향서(澗水東流復向西).
방수무인화자락(芳樹無人花自落).
춘산일로조공제(春山一路鳥空啼).
의양성 아래에는 풀이 무성하게 우거져있고.
골짜기의 물은 동으로 흐르다 다시 서로 흐른다.
꽃이 핀 나무 주위에 사람이 없어 꽃 홀로 지고 있으니.
봄 산의 외로운 길에 새들만 홀로 울고 있구나.
봄날의 의양성을 지나며 느끼는 정취와 고독 그리고 그 무상함을 읊고 있어 시인묵객들이 유독 좋아하는 시였다. 그 글자를 남긴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의 의도만큼은 분명했다.
진산월로 하여금 의양성으로 오게 하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진산월로서는 오지 않을 수 없었다.
낙수를 끼고 우뚝 서 있는 의양성의 성벽은 낙양성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 운치가 있었다. 성벽을 돌아가니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왔다.
계단 위에 성루(城樓) 하나가 서 있었는데, 진산월의 발걸음은 자신도 모르게 그 성루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성루로 올라가면 임영옥을 찾기 위한 무언가 실마리를 발견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성루 위에 올라서니 탁 트인 전망과 함께 멀리 굽이치는 낙수의 강물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지금은 봄이 아니었기에 시구처럼 꽃이 만발한 모습은 아니었으나, 군데군데 나 있는 이름 모를 풀꽃들과 어우러진 강변의 풍광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묘한 마력이 있었다.
하나 진산월의 시선은 강변 쪽으로 향해 있지 않았다.
한 사람이 성루의 중앙에서 성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산월의 발걸음이 그 사람에게로 향했다.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옷, 옷보다 더욱 하얀 얼굴의 그 사람은 문득 고개를 돌려 진산월을 보고는 살짝 미소 지었다.
“오셨군요.”
진산월은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정소소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춘행기흥>이란 글자를 남긴 사람이 백봉 정소소였을까?
만약 그녀였다면 왜 직접 낙빈루의 후원으로 진산월을 찾아오지 않고 그런 이상한 일을 벌인 것일까?
그리고 그 글을 남긴 사람이 그녀가 아니라면, 지금 이 자리에 그녀가 와 있는 것은 무슨 연유에서일까?
마치 자신이 올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 자연스럽게 자신을 대하는 그녀의 모습에 진산월은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정소소는 그런 그의 마음을 짐작한 듯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곳에 오면 진 장문인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말에 며칠 전부터 계속 나와 있었어요. 좀 더 오래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사흘 만에 진 장문인을 볼 수 있게 되었군요.”
진산월로서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그런 말을 한 거요?”
미소 짓고 있던 정소소의 눈가에 한 줄기 근심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공주님이세요.”
“단봉공주 말이오?”
“그래요.”
“그녀가 무어라고 했소?”
진산월이 마치 추궁하듯 계속 질문을 던지자 정소소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조만간 진 장문인이 올 테니, 모시고 오라고 했어요.”
“내가 언제 올 줄 알고 무작정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한 거요?”
“칠일. 공주님께서는 칠 일 안에 올 거라고 했어요. 만약 그 시기가 지나도 오지 않으면…….”
“오지 않으면?”
“영원히 오지 않을 테니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하셨어요.”
차분하고 조용한 음성이었으나, 그 말을 할 때의 정소소의 얼굴에는 어느새 미소가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다.
진산월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복잡한 상념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정소소는 그의 말을 재촉하거나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묵묵히 그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분하면서도 신중한 그 모습은 그녀 특유의 분위기와 너무도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진산월은 문득 물었다.
“내 사매가 어떻게 귀 궁의 사람들과 같이 있게 된 거요?”
악산대전이 끝난 후 임영옥은 낙일방과 성락중 등의 종남파 고수들과 함께 본산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이라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녀를 충분히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진산월은 과감히 자신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 길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종남파로 돌아가 있을 줄 알았던 그녀의 머리띠가 진산월에게 돌아왔고, 지금은 그녀가 단봉공주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진산월로서는 그간의 내막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소소는 자신이 아는 바를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종남파로 귀환하는 도중 그들은 쾌의당의 습격을 받았어요. 운중용왕과 화중용왕이 수하들을 이끌고 공격을 해 왔는데, 그 때문에 그녀는 위중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어요.”
“성 사숙과 낙일방이 함께했는데도 그랬단 말이오?”
“당시 운중용왕과 화중용왕은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최고의 전력을 끌어모았어요. 그래서 무영검군과 옥면신권이 최선을 다했어도 그녀를 지킬 수 없었어요. 그녀로서는 그들의 추격을 뿌리치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야만 했어요.”
진산월의 얼굴이 무겁게 굳어졌다.
“그녀가 소저를 찾아온 거요?”
정소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무당산에서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녀에게 내가 있을 곳을 말해 준 적이 있어요. 그 뒤로 줄곧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녀는 용케도 그걸 기억해 내고는 사력을 다해 나를 찾아온 거예요. 그 후로 쭉 우리와 함께 있게 되었어요.”
진산월은 그녀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사매를 구해 주어 고맙소.”
정소소는 씁쓸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임 소저를 구하는 데 나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어요. 오히려 그녀는….”
그녀는 무어라고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진산월의 시선이 집요하게 그녀의 눈을 쫓았다.
“사매는 어떻소?”
정소소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잠시 후에 임 소저를 직접 만나 보고 진 장문인께서 판단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녀의 말에 진산월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임영옥의 상태가 괜찮았다면 정소소가 이런 식으로 말을 할 리가 없었다.
“그녀는 어디에 있소?”
“멀지 않은 곳에. 그 전에 진 장문인은 한 분을 먼저 만나 뵈어야 해요.”
진산월의 두 눈에 한 줄기 신광이 번뜩거렸다. 정소소는 순간적으로 온몸에 소름이 쭈욱 끼치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찰나에 없어지긴 했으나, 그야말로 살인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섬뜩한 무형지기의 발출이었던 것이다.
이토록 강력한 무형지기는 그녀로서도 좀처럼 겪어 보지 못한 것이었다.
‘진 장문인의 무공은 점점 더 새로운 경지로 접어드는 것 같구나. 이러니……………’
그녀는 흔들리는 마음을 추스르며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진 장문인께 조건을 걸거나 요구하는 건 아니에요. 다만 그게 더 자연스러운 순리라고 생각했어요.”
진산월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으나, 음성은 어느새 냉랭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은 단봉공주겠구려.”
정소소는 부인하지 않았다.
“그래요.”
“내가 사매를 만나기 전에 그녀를 먼저 만나는 게 순리라고 생각했단 말이오?”
칼날 같은 준엄함이 담겨 있는 음성이었으나, 정소소는 머뭇거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어요.”
진산월도 더 이상은 그녀를 추궁하지 않았다. 비록 정소소를 많이 만난 것은 아니었으나, 그동안 보아 온 그녀는 합리적이고 온화한 성품이었다. 결코 무리하게 일을 벌이거나 남에게 무언가를 강요한 적이 없었다.
진산월은 이런 상황 자체가 탐탁지 않았으나, 이번에는 정소소를 믿어 보기로 했다.
“알겠소. 공주는 어디에 있소?”
정소소의 눈이 별처럼 반짝이며 얼굴에 살짝 홍조가 어렸다. 진산월이 자신의 말을 믿어 주는 것이 그녀의 마음을 기쁘게 한 모양이었다.
“따라오세요.”
정소소는 주저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은은한 체향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으나 진산월은 의식하지 못한 듯 여전히 굳은 얼굴로 그녀의 뒤를 따라 걸음을 움직였다.
성루를 내려온 그녀가 안내한 곳은 성곽에서 멀지 않은 언덕 위에 자리한 이 층 주루였다.
그들이 주루 안으로 들어섰음에도 다가오는 점원이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제법 넓은 주루의 어디에도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며칠 이곳을 빌렸어요.”
그녀는 간단히 상황을 설명하고는 이 층으로 올라갔다.
사르륵!
옷자락 끌리는 소리와 함께 성숙한 여인의 향기가 물씬 풍겨 왔다.
그제야 진산월은 오늘따라 정소소의 몸에서 나는 향기가 조금 더 짙은 것을 알아차렸다. 아마 평소보다 향수를 조금 더 많이 사용한 모양이었다.
주루의 이 층은 모든 창문이 닫혀 있고, 오직 강변 쪽으로 나 있는 창문만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창문가의 탁자 앞에 한 사람이 그림 같은 자태로 앉아 있었다.
그 사람을 보자 진산월은 한 차례 호흡을 가다듬었다.
은은한 봉황 무늬가 수놓아진 붉은색 궁장과 두 눈만을 드러낸 면사는 예전과 변함이 없었다.
그를 응시하는 한 쌍의 봉목(鳳目) 또한 그대로였다.
하나 진산월은 어딘지 그녀가 다르게 느껴졌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를 대하는 그의 마음이 예전과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그의 마음은 커다란 파도에 흔들리는 일엽편주와 다름이 없었다. 두 번 세 번 보았을 때도 그는 제대로 마음을 가다듬지 못했고, 돌아선 마음은 늘 후회로 가득했다.
하나 몇 년 만에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흔들림이 없었고, 그녀는 단지 그의 곁을 찰싹이고 지나가는 잔잔한 물결과 다름이 없었다.
이제 다시 보게 된 그녀는 그에게는 단지 스치고 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 그녀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녀의 시선은 그에게 머물러 있지 않았고, 그녀의 마음속에 제대로 된 존재감도 심어지지 않았다.
몇 번의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그녀의 눈에 그가 조금씩 담기기 시작했고, 그의 존재감 또한 점점 커져서 풋내기 장문인에서 강호를 호령하는 절대고수로 변모해 갔다.
지금 그를 다시 보게 된 순간에야 비로소 그녀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고, 그에게서 단 한 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