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992화
군림천하 (992)
제401장 의양성루(宜陽樓)
무더위가 한풀 꺾이고 하늘 한쪽에서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어 내리고 있었다.
가을이 저 멀리 다가오는 것이 물씬 느껴지는 날씨였다.
같았다. 전흠은 푸르도록 시린 하늘을 올려보다가 한차례 심호흡을 했다. 신선한 공기가 가슴 가득 밀려오며 조금은 답답했던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
“흐음. 좋은 날씨로군.”
그는 한결 또렷해진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생각난 듯 뒤를 힐끔거렸다.
멀리 낙양성의 높은 성곽이 희미하게 보이자 알 수 없는 감흥에 한동안 그 광경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전흠은 자신도 모르게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언제 또 다시 낙양에 올 수 있을지.”
낙양은 보면 볼수록 나그네의 마음을 흔드는 묘한 매력이 있는 도시였다. 웅장하면서도 낭만적인 형태의 높다란 성벽도 그러했고, 처처히 늘어선 고루거각과 도처에 널려 있는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화원들 그리고 넓게 뻗은 대로와 거기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외지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특히 이번 낙양의 여정은 물 흐르듯 조용하게 시작했다가 피비린내 나는 혈전으로 마무리되어 더더욱 잊을 수가 없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쓰러질 것 같지 않던 장문사형이 남의 손에 들려 석가장에 왔을 때 전흠은 정말 너무나 놀라고 당황해서 손발이 떨려 왔을 정도였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만에 하나 장문사형이 잘못되기라도 했다면………..
전흠은 감히 더 이상은 생각하지 않았다.
다행히 장문사형은 며칠 만에 훌훌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건강한 모습을 되찾은 듯했다.
전흠은 시선이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도 계속 진산월을 살펴보았다. 혹시라도 부상의 후유증이 있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다행히 겉으로 보아서는 예전의 모습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진산월의 혈색을 훔쳐보려던 전흠은 진산월과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진산월은 그를 빤히 보고 있다가 나직하면서도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냐?”
전흠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낙양을 이렇게 떠나는 게 왠지 아쉬워서 말입니다.”
확실히 이번의 낙양행은 여러모로 예측을 벗어난 일의 연속이었다. 뜻하지 않은 쾌의당주의 등장과 그로 인한 이정문의 위기, 그리고 공가장에서의 혈전과 진산월의 부상은 낙양에 오기 전만 해도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이었다.
전흠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
낙양성에 들어설 때만 해도 전흠은 고도(古都)의 정취를 마음껏 느낄 기대감에 가슴이 부풀었으나, 이후 진산월의 지시를 수행하느라 바쁘게 돌아다닌 데다 이정문을 구하기 위해서 마씨 형제들과 치열한 격전까지 벌이느라 그야말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정문을 구출하여 석가장으로 간 후에는 의식을 잃은 진산월의 모습에 놀라 노심초사해야 했고, 그로부터 며칠 후에는 다시 낙양을 떠나야 했으니 그로서는 낙양의 정취를 느끼기는커녕 바쁘고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내다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다시 길을 떠나게 된 셈이었다.
진산월도 그 점에 대해서는 전흠에게 미안한 감이 없지 않았다.
“이번에 이 공자를 구하느라 수고가 많았다. 이 공자가 너에게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해 달라고 신신당부하더구나.”
전흠은 모처럼의 칭찬이 어색한지 어깨를 으쓱거렸다.
“다행히 마씨 형제가 방심하고 있었기에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의 추격이 상당히 끈질겨서 곤혹스럽더군요. 누군가를 지키면서 싸운다는 게 이토록 번잡하고 힘든 일인지 이번에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진산월은 처음부터 이정문이 사로잡혔다면 그건 쾌의당주 감종간보다는 위지립의 짓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 이정문은 감종간을 잔뜩 경계하고 있었기에 그의 술수에는 쉽게 당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오히려 쌍수사겁이라는 부하들까지 대동한 위지립이 이정문의 눈을 피해 행동하기 수월했을 것이고, 이를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이정문이 그들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이 더 가능성이 농후한 일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의 짐작대로 이정문은 만화루의 별실에서 위지립의 수하인 마씨 사형제에게 사로잡혀 있었고, 전흠은 그들의 경계를 뚫고 들어가 이정문을 구해 왔던 것이다.
마씨 형제들의 무공은 개개인이 전흠과 필적할 정도여서 전흠은 그들의 추격에 상당한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그나마 석가장이 멀지 않았기에 간신히 그들의 추격을 뿌리치고 석가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석가장에서 사람들이 나오자 마씨 형제는 이를 갈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고, 전흠은 이정문을 그들에게 인계하고는 진산월이 미리 지시한 대로 조여홍을 만나게 해 줄 것을 부탁했다. 조여홍의 이름이 전흠의 입에서 나오자 석가장 사람들의 반응은 확연하게 달라져서 그때부터 전흠은 단순한 불청객이 아니라 귀빈 대접을 받으며 지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전흠은 이정문을 석가장의 인물들에게 넘긴 후로는 전혀 얼굴을 보지 못했기에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들어 물었다.
“이 공자의 상세는 괜찮습니까?”
진산월은 석가장을 떠나기 전날 밤에 이정문을 만났기에 차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위지립의 장공에 심맥이 크게 손상되기는 했으나, 조 대랑이 손을 써서 위급한 상황은 넘긴 후였다. 조만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조여홍이 직접 손을 썼다면 어지간한 부상쯤은 어렵지 않게 완치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정문이 아직까지 일어나지 못한 것은 그만큼 그의 부상이 심각했다는 방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는 잠깐 본 것뿐이지만, 철혈홍안은 정말 말 걸기도 무서울 정도로 위압적인 분이더군요. 다른 사람의 일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았는데, 이 공자의 상세를 직접 살폈다니 뜻밖인데요.”
“이 공자의 아버지인 이북해는 조 대랑의 남편인 석동의 무기명 제자다. 다시 말해서 이 공자는 조 대랑에게는 손자뻘이나 마찬가지지. 아마 그래서 아량을 베푼 것일 게다.”
“아, 그렇군요. 그분도 결국 손자에게는 애정을 느끼는 다정한 여인이로군요.”
전흠은 무심결에 말했으나, 진산월은 씁쓸하게 웃을 뿐 따로 대꾸하지 않았다.
진산월의 친구인 손검당은 석가장주인 석담에 대한 살인 청부를 받고 석가장에 들어갔다가 팔이 잘려서 돌아왔다. 석가장에서 최고의 살수인 그의 팔을 단숨에 잘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진산월은 전후 사정으로 보아 그것이 조여홍의 솜씨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친증손자의 팔을 서슴없이 잘라 버리는 철혈의 여장부와 남편의 사손을 챙겨 주는 다정한 노부인. 둘 중 어느 것이 철혈홍안 조여홍의 진정한 모습일지는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이정문은 파리한 안색으로 침상에 누운 상태에서도 진산월과 헤어지기 전에 몇 가지 당부를 했다.
“쾌의당주와 무림맹주가 모두 진 장문인의 손에 죽었으니 이제 천하는 한바탕 소란을 피할 수 없을 거요. 특히 조익현의 행동에 주의할 필요가 있소.”
“조익현이 어떻게 나오리라고 보시오?”
“조익현은 취와미인상의 세 절초롤 모두 익힌 후 본격적으로 강호를 장악하기 위해 그동안 자신의 앞을 막았던 존재들을 치우기 시작했소. 신목령주의 제거가 바로 그것이오. 아마 내 짐작에는 천봉궁에도 상당한 살수를 썼을 거요.”
진산월은 천봉궁의 쌍무상 갈휘, 갈혁 형제가 동방촌 근처의 야산에서 살해당한 시신으로 발견된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정문의 말대로라면 아마 쌍무상 외에도 변을 당한 천봉궁의 고수들이 적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이정문은 한 차례 숨을 고른 후 다시 예의 침착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조익현도 쾌의당주와 위지립을 비롯한 용왕들의 떼죽음으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을 거요. 내 생각에는 그가 당분간 다른 행보를 자제하고 오직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오.”
“그게 무엇이오?”
이정문은 진산월의 두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진 장문인의 행적을 파악하는 것이오.”
진산월은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기에 별로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꾸했다.
“나를 본격적으로 주목할 거란 말이오?”
“그렇소. 지금까지 조익현은 진 장문인을 경계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신경 써서 지켜보아야 할 흥미로운 존재이거나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여 줄 장기판의 말로 생각했을 거요. 그런데 자신의 수하들 중 가장 유능한 자들이 모두 진 장문인에게 제거되었으니, 그로서는 진 장문인에 대한 경계심을 극도로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거요.”
“그가 자신의 적수로 생각했던 자들은 석동과 야율척뿐이었소. 하지만 이제는 진 장문인을 그들과 같은 자리에 놓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니, 그로서는 진 장문인에 대해 좀 더 상세하게 파악하려 할 거요. 진 장문인의 성격이나 행동 방식은 물론이고 장점과 약점을 모두 철저하게 조사할거요.”
진산월은 대수롭지 않은 듯 대꾸했다.
“너무 늦은 게 아니오?”
“그렇지 않소. 아마 기본적인 조사는 예전에 모두 마쳤을 거요. 다만 지금까지는 진 장문인을 반드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았기에 표면적인 조사에 그쳤을 뿐이오. 하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손을 쓰려고 작정한 이상,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진 장문인을 제거하거나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려 할 것이오.”
“그건 좀 떨리는구려.”
말과는 달리 진산월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이정문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한층 진지하고 심각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조익현은 백 년 넘는 세월 동안 강호를 암중에서 움직여 온 인물이오. 그의 수법은 교묘하고 치밀하며, 때로는 잔혹하고 기괴하오. 그가 작심했다면 진 장문인도 조심해야 하오. 모용 대협이 그를 피하기 위해 구궁보를 뛰쳐나간 것이나 모용 공자가 결국 취와미인상을 지키지 못하고 그에게 넘겨준 것이 단순히 그들이 부족한 인물들이기 때문은 아니오. 그만큼 조익현은 상대하기 두려운 자요.”
진산월도 조익현에 대해서는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야율척은 진산월이 석동을 맡는다면 조익현은 자신이 감당하겠다고 했지만, 과연 그가 조익현을 상대할 수 있을지는 누구도 확언할 수 없을 것이다.
진산월 또한 야율척의 말을 전적으로 믿고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상대가 누구든 어차피 한번은 거쳐야 할 관문일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적어도 ‘군림천하’를 꿈꾸고 있는 이상 그들은 모두 언젠가는 넘어야 할 존재들일 뿐이었다.
그래서 이정문의 간곡한 당부에도 담담하게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돌아서는 진산월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정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걱정과 우려의 기색이 가득했지만, 더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정문의 방을 나온 진산월은 바로 석가장을 떠났고, 전흠만이 그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낙양성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 전흠은 아쉬움을 참고 진산월을 향해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갑니까? 이쪽은 본산 방향이 아닌 걸 보니 달리 들러야 할 곳이 있는 것 같군요.”
진산월은 한동안 남쪽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의양(宜陽).”
전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양? 그곳에는 무슨 일이 있습니까?”
“찾아야 할 사람이 있다.”
“누군데요?”
진산월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무심코 그를 돌아본 전흠은 움찔하여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깊게 가라앉은 진산월의 두 눈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짙은 어두움이 무겁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