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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991화


군림천하 (991)

손풍은 정말 원 없이 두들겨 맞고 있었다.

이렇게 많이 맞아 본 것은 몇 달 전 종남파에 끌려오기 직전 누산산에게 맞은 후 처음이었다. 그때는 정말 혼절할 때까지 두들겨 맞아서 천하의 강골인 손풍도 한동안 앓아누워야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충분히 견딜 만했다.

처음에는 손바닥으로 뺨을 치던 국일호가 그래도 물러서지 않는 손풍을 보고는 본격적으로 주먹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의 주먹에 몇 번이나 정통으로 맞았음에도 손풍은 절대로 물러서거나 회피하지 않았다.

‘내가 이런 놈이야. 이 정도로는 어림없다.’

손풍은 기세등등하게 맞섰으나 국일호의 주먹은 교묘하게 빈틈을 파고들어 와 계속 그의 얼굴과 가슴을 정확하게 가격했다.

특히 조금 전에 아래턱에 맞은 일격은 정말 강력한 것이어서 순간적으로 손풍도 정신이 아찔하여 바닥에 쓰러질 뻔했다. 하나 그는 다리를 후들거리면서도 필사적으로 버텨서 기어코 쓰러지지 않고 그 순간을 견뎌 낼 수 있었다.

국일호는 자신이 날린 흑표권(黑豹拳)을 아래턱에 정통으로 맞고도 쓰러지지 않는 손풍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주먹은 어지간한 외공의 고수라도 버티기 힘들 정도로 강한 위력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국일호 자신이라도 그런 주먹에 맞았다면 정신을 잃고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을 것이다.

예전에도 손풍은 제법 맷집이 좋은 편이었으나, 그것은 뒷골목의 드잡이질을 할 때나 통용되는 이야기였다. 지금은 제대로 무공을 수련한 고수의 일격이어서 단순히 맷집이 좋은 정도로는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손풍이 쓰러지지 않고 버티자 국일호는 당황한 가운데 불쑥 화가 치밀어 올랐다. 휘청거리면서도 투지를 잃지 않고 계속 대항해 오는 손풍의 모습이 마치 자신의 주먹 따위는 얼마든지 견딜 만하다고 조롱하는 것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이놈! 아주 턱주가리를 박살 내서 평생 죽만 먹고 살도록 만들겠다!’

국일호의 눈에 흉광이 이글거리며 손속에도 진득한 살심이 깃들기 시작했다.

손풍은 단번에 국일호의 손끝이 훨씬 더 매서워지며 주먹에 실린 힘이 달라진 것을 느끼고 이를 악물었다.

‘이 망할 놈이 끝장을 보자는 거냐? 오냐, 좋다!’

손풍은 이판사판이라 생각하고 아예 수비는 신경 쓰지 않은 채 국일호의 얼굴만을 집요하게 노리고 들어갔다. 저 밉살스러운 얼굴에 제대로 된 한 방을 먹여 주지 않고는 원통해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바람에 가뜩이나 허술하던 몸의 허점이 여기저기 드러나며 그야말로 온몸이 거의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다시피 했다.

국일호의 눈이 무섭게 번뜩였다.

‘아주 골병이 들게 해 주마!’

그는 정면으로 달려드는 손풍의 공격을 슬쩍 옆으로 움직여 피함과 동시에 오른쪽 옆구리를 세차게 가격했다.

퍽!!

“헙!”

손풍을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에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으나 몸을 숙이기는커녕 오히려 오른쪽 팔꿈치로 국일호의 콧등을 후려쳐 갔다. 거칠고 투박해 보여도 엄연히 천성탈두라는 장괘장권구식 중의 한 초식이었다.

다만 가뜩이나 날카로운 위력에 비해 단조로운 편이었던 천성탈두를 아무런 변초나 임기응변 없이 곧이곧대로 사용한 탓에 투로가 지극히 단순해졌다. 국일호는 자신의 공격에 격중당했으면서도 그대로 반격해 오는 손풍의 기세에 순간적으로 주춤거렸으나, 너무도 단순한 일직선의 공격이 눈에 들어오자 어렵지 않게 피할 수 있었다.

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손풍의 옆으로 돌아가며 훤히 드러난 왼쪽 관자놀이를 정통으로 후려쳤다.

쾅!

거의 무방비 상태에서 당한 이 공격이 너무 치명적이어서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앗?”

누가 보기에도 손풍은 이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허물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손풍은 쓰러지지 않았다. 비록 비틀거리며 뒤로 세 걸음이나 후퇴하긴 했으나, 그는 국일호의 철퇴 같은 공격에 관자놀이를 정통으로 맞고도 정신을 잃지 않고 버텨 낸 것이다.

하나 쓰러지지만 않았을 뿐, 손풍은 머리통이 부서지는 듯한 충격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의 뇌리에 처음으로 이러다가 국일호에게 손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패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그런 생각을 하자 그의 마음속에 묘한 감정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겪어 보는 두려움이란 감정이었다.

국일호의 주먹이 두려운 게 아니었다. 자칫 국일호의 몸에 손도 못 대어 보고 일방적으로 패해 종남파의 제자도 별수 없다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 두려워진 것이다.

그때 문득 얼마 전에 들었던 하동원 사숙조의 말이 뇌리에 떠올랐다.

-두려움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평생 안고 가야 할 동반자다.

왜 갑자기 그 말이 떠올랐는지는 손풍도 알지 못했다.

다만 두려움이란 것이 단순히 상대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더욱 크고 거대한 무언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때 하동원이 했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순간적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손풍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기가 패하는 게 두려웠다.

자신의 패배로 종남파가 치욕을 당하는 것이 두려웠다.

자신 때문에 국일호 같은 놈에게 종남파가 조롱을 당하게 되는 상황이 다른 무엇보다 두려웠던 것이다.

그제야 손풍은 과거 무당산에서 형산파 비성흔과의 싸움을 코앞에 두고 자신의 입으로 출전을 포기하겠다고 말한 전흠 사숙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그가 왜 스스로 물러났는지, 그리고 악산대전이 끝난 후에도 왜 그렇게 고통스러워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나는 두렵다. 저런 놈에게 패해서 본 파에 누를 끼치는 게 정말 두렵다. 앞으로도 계속 두렵겠지. 나 때문에 본 파가 오욕을 당할지 모른다는 게 끝없이 나를 두렵게 할 거다.’

손풍은 피가 나도록 이를 악물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나는 손풍이다. 절대로 꺾이거나 물러서지 않는 남자다!’

손풍은 두 눈을 부릅뜨며 오히려 국일호의 앞으로 쏜살같이 뛰쳐나갔다. 수비는 도외시한 채 곧장 달려드는 그의 모습은 사납고 맹렬한 것이었으나, 국일호의 눈에는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무모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한심한 놈! 역시 네놈은 이런 수준밖에 안 되는 놈이었어!’

국일호는 이번에야말로 아예 끝장을 내겠다는 생각에 얼마 전에 배웠던 묵룡강기(墨龍罡氣)를 끌어 올렸다. 이 무공은 철혈수사 국조린의 최고 절예 중 하나로, 금석을 두부처럼 가르고 호신기공을 파괴하는 살인적인 위력을 지니고 있어서 반드시 제거해야 할 상대가 아니면 절대로 사용하지 말라는 신신당부 끝에 전수받은 비전절학이었다.

후려쳐 갔다. 하나 국일호는 부친의 당부도 잊은 채 두 눈에 살광을 번뜩이며 양손 가득 끌어올린 묵룡강기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손풍의 앞가슴을 정확하게

손풍의 눈에 거무스름한 빛을 띤 채 무서운 속도로 자신의 가슴으로 날아드는 국일호의 손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 주먹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무언가 가공할 위력이 담겨 있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손풍은 전혀 거리낌없이 오히려 그 손을 항해 달려들었다.

‘난 두렵지 않다. 저런 솜방망이 같은 손에는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손풍은 소리 없는 아우성을 외치며 양손을 세차게 휘둘렀다.

‘상대의 공격을 비껴 흘리며 맞받아친다! 격류처럼 빠르게, 봉황처럼 우아하게, 그리고 아침 햇살처럼 강력하게…………!

얼마 전에야 낙 사숙에게 간신히 배운 장괘장권구식의 최절초 단봉조양을 머리에 가득 떠올리며 손풍은 국일호의 검은 손에 주저 없이 맞부딪혔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동중산이 경악성을 터뜨렸다.

“저런 바보 같은……!”

그것은 누가 보기에도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자신의 가슴을 그대로 상대에게 내어 주고 단 한 번의 반격을 노린다는 건 무림인들의 결투에서는 금기시되는 것이었다. 더구나 생사(生死)를 가르는 혈전도 아니고 단순히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비무에서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선택이었다.

묵룡강기를 담은 국일호의 손은 손풍의 왼쪽 가슴을 정확하게 노리고 들어왔다. 마지막 순간에 손풍의 왼손에 살짝 스치며 경로가 조금 틀어져 왼쪽 옆구리에 틀어박히기는 했으나, 치명적인 일격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뿌드득!

그토록 단단했던 손풍의 갈비뼈 몇 개가 그대로 부서지는 음향이 터져 나오며 손풍의 허리가 반으로 꺾였다.

하나 그 순간, 허공을 가르고 지나갈 듯하던 손풍의 오른손이 기이하게 꺾이며 국일호의 콧등으로 떨어져 내렸다. 국일호는 맞는 순간까지도 손풍의 주먹이 어떻게 허공에서 변화를 일으켜 자신의 콧등을 가격했는지를 알지 못했다.

쾅!

“크악!”

코뼈가 으스러지는 통증에 국일호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정신을 잃기 전 국일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입으로 시커먼 피를 꾸역꾸역 흘리면서도 피 묻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손풍의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흐흐, 내가 이겼다! 나 손풍이 승리자다!”

손풍은 갈비뼈가 부러지는 통증에 허리를 부여잡으면서도 거친 외침을 토해 냈다.

기분 같아서는 양손을 번쩍 쳐들고 무대 위를 뛰어다니고 싶었으나, 손을 쳐들기는커녕 허리를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어서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싶었다.

‘이거 옆구리 통증이 심상치 않은데, 큰일 나는 건 아니겠지?’

폭발하는 분노를 밑거름 삼아 밉살스럽기 그지없던 국일호를 단숨에 쓰러뜨리기는 했으나, 옆구리가 너무 아파서 손풍은 웃지도 못하고 오히려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때마침 동중산이 달려와 그의 상세를 살폈다.

“어디 보게.”

동중산의 손이 옆구리 쪽에 닿자 손풍은 있는 대로 인상을 찡그렸다.

“윽. 살살 좀 해요.”

동중산은 그의 옆구리를 조심스레 만져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갈비뼈 서너 개가 부러지기는 했지만, 다행히 내장은 상하지 않은 것 같네. 정말 자네는 이런 몸뚱이를 타고 난 걸 천운(天運)으로 여겨야 하네.”

“그런데 왜 이렇게 아프죠?”

“부러진 갈비뼈가 장기를 찔러서 그런 거니까 심하게 움직이지 말고 당분간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조심하도록 하게.”

“제길. 국일호 따위를 상대하는 데 이런 부상을 당하다니.”

손풍이 통증을 참느라 비 오듯 땀을 흘리면서도 큰소리를 치자 동중산은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무공을 수련한 세월만도 십 년은 족히 넘었을 걸세. 저런 상대를 아직 무공에 입문한 지 서너 달도 안 된 자네가 쓰러뜨린 거니까 자부심을 가져도 되네.”

국일호는 코뼈가 완전히 주저앉고 얼굴 반쪽이 형편없게 변한 채 아직도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동중산은 그런 국일호를 힐끗 쳐다보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서안 제일을 다투던 쌍하보의 아들을 저런 꼴로 만들어 놨으니 앞으로 쌍하보와 사이가 좋아지기는 틀렸군.”

“맞기는 내가 더 맞았소. 어차피 비무인데, 이런 걸로 뭐라고 한다면 그런 졸장부들과는 굳이 상대할 필요 없소.”

“그건 자네가 결정할 일이 아니네.”

동중산이 끙끙거리는 손풍을 데리고 돌아오자 노해광이 손풍의 몸을 빠르게 살펴보았다.

손풍은 통증을 억누르며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제자가 이기고 돌아왔습니다.”

노해광은 그 와중에도 자신의 승리를 잊지 않고 챙기는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손풍을 빤히 쳐다보았다.

“상처가 제법 심한 듯한데 큰소리를 치는 걸 보니 참을 만한 모양이구나.”

“이 정도 상처는 침만 바르면 낫습니다.”

손풍의 허풍스러운 말에 노해광은 피식 웃었다.

“남들은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데, 네놈은 뼈를 주고 코를 취했구나. 왜 그렇게 집요하게 상대의 코만 노린 거냐?”

손풍의 태도는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그놈은 늘 자신의 코를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래서 언제고 그 잘난 콧대를 꼭 부러뜨리고 싶었습니다.”

좀처럼 활짝 웃는 법이 없던 노해광은 참지 못하고 오늘 두 번째로 껄껄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하. 기개 하나는 그럴듯하군. 이제 조금 본 파의 제자다워졌구나.”

손풍은 금륜장주의 생일연에서 뜻하지 않게 비무에 출전하여 난전 끝에 쌍하보주의 아들을 격퇴하여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훗날 패기와 배짱만큼은 능히 강호제일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화북제일권(華北第一拳)으로 군림했던 패왕권(王拳) 손풍이 처음으로 세상에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게 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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