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군림천하 : 999화


군림천하 (999)

밤이 깊어지며 창문으로 흘러 들어오는 달빛이 점점 더 많아졌다.

이제는 완연하게 방 안을 밝히는 달빛이 너무 밝은 것 같아서 진산월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닫으려 했다. 그때 그녀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창문을 닫지 마세요.”

진산월이 돌아보니 언제 깨어났는지 그녀의 아름다운 눈이 그를 향해 있었다.

“몸은 좀 어때?”

진산월은 자신의 음성이 떨리지 않기를 바랐다. 임영옥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며칠 동안 이렇게 몸이 개운한 적이 없었던 것 같네요. 정신이 맑아져서인지 사형 얼굴을 좀 더 제대로 보고 싶군요.”

진산월은 재빨리 그녀의 옆자리로 돌아갔다.

임영옥은 그를 빤히 보고 있다가 손을 내밀었다.

“아까처럼 일으켜 줘요.”

진산월이 그녀를 안아 들자 그녀는 그의 목을 꼬옥 끌어안았다.

“잠시만…… 잠시만 이대로 있어 줘요.”

진산월은 말없이 그녀의 몸을 안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몸은 여전히 부드러웠으나, 몸에서 풍겨 나오는 한기 때문에 마치 얼음으로 만든 사람처럼 차갑기 그지없었다. 사람의 몸에서 이렇게 온기를 거의 느낄 수 없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한동안 두 남녀는 서로를 끌어안은 채 하염없이 침상 위에 앉아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가 문득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따라 달빛이 너무 곱네요.”

그녀는 창백한 손을 내밀어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달빛에 이리저리 비춰 보았다. 마치 달빛을 손에 잡으려는 듯 오므리기도 하고 손등에 달빛을 얹은 채 가만히 바라보기도 했다. 

진산월은 그녀가 편하게 달빛을 볼 수 있게끔 그녀의 몸을 가슴에 돌려 안았다.

그의 단단한 가슴에 등을 기댄 채 그녀는 한동안 달빛을 손으로 이리저리 희롱했다. 그러다 손동작을 멈추고 물끄러미 창문 너머로 보이는 둥근 달을 올려다보았다. 달을 응시하는 임영옥의 눈빛은 더할 수 없이 영롱했고, 달빛을 받은 그녀의 뺨은 어느 때보다 찬란하게 반짝거렸다.

“달빛은 천 년을 간다고 하지요. 천 년 전의 달빛도 지금처럼 고왔겠지요?”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천 년 후에도 지금 같겠지요?”

“그럴 거야.”

“나도 그처럼 영원히 있고 싶었는데…………….”

진산월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을 열기만 하면 무언가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넘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는 말없이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달빛에 닿은 그녀의 몸이 영원히 기억될 수 있도록.

한참 후 그녀는 조그만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녀와 한 가지 약속을 했어요.”

임영옥은 그녀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았으나, 진산월은 쉽게 알아들었다.

“그녀의 정체는 언제부터 알게 되었던 거야?”

그의 물음에 임영옥의 얼굴에 처음으로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처음 볼 때부터 알았어요. 사형은?”

진산월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예전에는 자주 했던 행동이었으나 언제부터인지 하지 않은 습관이었다. 그런데 그녀와 함께 있으니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예전의 모습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전혀 몰랐어. 최근에 철혈홍안에게서 말을 듣고서야 단봉공주가 백 년 전의 그 사람인 걸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지.”

“바보, 틀림없이 그녀의 미색에 눈이 멀어 알아보지 못했을 거예요.”

“그럴지도. 나름 사람 보는 눈은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렇지도 않은가 봐.

“그런 면에서는 여자가 훨씬 빠르지요. 나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가 외모와는 달리 나이가 무척 많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몇 마디 말을 나누고 나서는 바로 그녀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지요.”

진산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아마 남자는 여자를 볼 때 겉으로 드러난 외모에 많은 비중을 두지만, 여자는 그녀의 내면을 좀 더 신경 쓰기 때문일 거예요. 쳐다보는 눈빛이나 은연중 드러나는 사소한 동작, 말속에 담긴 감정의 편린이나 사람을 대하는 태도 같은 거 말이죠. 그녀는 모든 사람을 자신의 아래로 보고 있어요. 남자를 대하는 모습은 직접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같은 여자를 대할 때는 그런 행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죠. 그래서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어요.”

“그런가? 지금 생각해 봐도 잘 모르겠군.”

그녀는 다시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니 어디 가서 사람 볼 줄 안다고 자신하지 말아요. 아직 멀었으니까.”

“명심하지. 그런데 그녀와 무슨 약속을 했다는 거야?”

임영옥의 미소를 그치고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러다 한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형도 짐작했을 거예요. 나는 사형을 놓아주겠다고 했어요.”

진산월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그는 이내 다시 몸의 긴장을 풀며 그녀의 어깨를 습관적으로 어루만졌다.

“그래? 나도 모르게 내 처신이 정해진 거였군.”

“모르는 척하지 말아요. 그녀를 만났다면 그녀의 태도에서 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사형을 자신의 소유처럼 대한다는 걸 느꼈을 거예요. 사형처럼 예민한 사람이 그런 태도를 보고 상황을 짐작하지 못했을 리가 없죠.”

“내가 예민하다고?”

“예민하고 섬세하죠. 그래서 가끔 내 마음을 몰라줄 때면 오히려 더 답답하고 한심한 생각이 들기도 하죠.”

진산월은 짐짓 고개를 모로 세우며 기우뚱거렸다.

“그런가? 내가 한심한 놈인 건 인정하겠는데, 예민하고 섬세하다는 말은 믿을 수가 없는걸.”

“사형은 그런 사람이에요. 거기에 겉으로는 유순한 것 같지만 사실은 고집이 무척 세고 자존심도 높아서 남의 말은 잘 들으려고 하지 않죠. 그녀는 그걸 모르고 자신의 의도대로 사형을 좌지우지하려 했을 테지만, 그건 사형의 역린을 건드리는 일이죠.”

“확실히 그녀와 이야기하는 건 별로 즐겁지 않았어. 그녀는 세상 모든 남자는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 같더군. 단봉공주의 신분으로 만났을 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 정체를 드러내면서부터는 너무 노골적이라 절로 거부감이 들더라구.”

“아마 그래서 더 단봉공주라는 가면이 필요했을 거예요. 그녀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인정하기 싫었겠죠.”

“무엇을?”

“세월이 너무 많이 흐르고 시대가 변해 버렸다는걸. 그녀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끝이 났어요. 그녀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을 거예요.” 

백 년 전이었다면 세상의 어떤 남자라도 백모란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천하의 기재들인 석동과 조익현이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나 백 년은 한 사람이 거치기에는 너무도 장구한 세월이었다.

이제는 누구도 백모란이란 이름을 알고 있지 않으며, 그녀를 만나도 예전처럼 쉽게 매혹당하지 않는다. 그녀의 남자를 대하는 태도는 그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예전과 달라졌으며, 그녀를 보는 남자들의 시선 또한 그러했다. 

“그녀는 내가 물러나면 사형을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내가 아는 사형이라면 그녀의 뜻대로 행동할 리가 없죠.”

진산월은 솔직하게 시인을 했다. 

“그녀에게 분명한 거절 의사를 밝혔어.”

“그녀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겠군요.”

“굳이 그녀의 반응을 확인해 보지 않고 그냥 돌아서 나왔어. 더 이상 그녀에게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거든.”

“자신의 제안이 거절당할 수 있다는 건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했을 거예요. 그때의 얼굴을 꼭 보고 싶었는데.”

진산월은 평소와 다른 임영옥의 말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매가 이런 성격인 줄 몰랐군. 그녀에게 맺힌 게 많았던 모양이네.”

“솔직히 좀 얄미웠거든요. 백 살이 넘은 노파가 젊은 여인 흉내를 내면서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게. 그래서 그녀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았을 때 어떤 표정을 하게 될지 너무 궁금했어요.”

진산월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별로 보고 싶지 않은걸. 상상만 해도 가슴이 떨려 오는군.”

“그녀가 두려운가요?”

진산월의 얼굴에 모처럼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두렵지는 않지. 이제 더 이상 누구를 두려워할 단계는 지난 것 같아. 다만 그녀의 분노가 엉뚱한 곳으로 향하게 되지는 않을지 우려될 뿐이야.”

“그녀가 나에게 분풀이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군요.”

“잠깐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 하지만 그러지 않을 거야.”

“왜요?”

진산월은 조용히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두 눈에서 어둠 속을 비추던 달빛이 순간적으로 흐려질 만큼 무시무시한 안광이 피어올랐다.

“그렇게 되면 나와는 되돌릴 수 없는 원한 관계가 될 테니까. 두려워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녀야.”

임영옥은 잠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차갑게 굳은 그의 얼굴을 하염없이 보고 있다가 가만히 손을 내밀어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화내지 말아요.”

“화가 난 게 아니야. 단지 사매가 이렇게 된 근본 원인이 그녀에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그건 증명할 수 없는 일이에요.”

“알아. 그래서 참고 있는 거야. 다만 그녀가 말한 대로 그녀와 나 사이의 모든 관계는 이번에 완전히 끝이 났으니, 앞으로의 상황에 따라 언제든 그녀와 적이 될 수도 있지.” 

임영옥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적이 되면 그녀에게도 손을 쓸 건가요?”

“주저 없이.”

단호한 그의 대답에 임영옥은 다시 한 차례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사형이 그런 말을 할 때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요. 내 앞에서는 살기를 드러내지 말아 줘요.”

진산월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과했다.

“미안해. 조심하도록 하지.”

그와 함께 섬뜩하도록 차가웠던 주위의 공기가 다시 따스하게 변한 것 같았다.

임영옥은 한동안 상념에 잠겨 있다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와 다시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그녀가 사매에게 구음향을 쓰도록 사주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의심만으로도 충분해. 앞으로 그녀와 친구가 되는 일은 없을 거야.”

임영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했다.

“그녀와는 어떤 관계가 되어도 괜찮지만, 천봉궁의 선자들과는 인연을 끊고 싶지 않군요.”

천봉팔선자에 대한 진산월의 생각은 다소 복잡한 것이었다. 그녀 중 일부에게는 분명한 신세를 지기도 했고, 일부에게는 도움을 주기도 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의 종남파와 가장 우호적인 세력이 바로 그들이라는 것이었다. 더구나 임영옥에 관해서는 정소소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녀들에 대해서는 사매의 마음대로 해. 나는 관여하지 않을 테니까.”

임영옥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녀의 두 눈에는 속마음을 알기 힘든 복잡하고 미묘한 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하나 진산월은 그녀를 뒤에서 안고 있기에 그녀의 그런 모습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임영옥은 진산월의 오른손을 어루만졌다. 아직도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않아 상당한 통증이 느껴질 텐데도 진산월은 그녀의 손길에 오히려 마음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거친 손등의 굴곡을 섬세하게 어루만지는 그녀의 손길은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고 따스했다. 그녀는 한동안 그의 손을 만지다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 종남산으로 돌아가는 건가요?”

“그래. 정 소저에게 마차를 부탁했어. 이번에는 둘이서 함께 돌아가는 거야.”

“본산이 너무 그리워요.”

“조금만 기다려. 이번에는 반드시 본산에 데려다줄 테니까.”

“그래요.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그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진산월은 보지 않아도 그녀가 눈을 감은 채 다시 몸을 늘어뜨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진산월은 달빛이 그녀의 몸을 흠뻑 적실 때까지 그녀를 안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숨을 고르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어도 그는 그녀를 안은 자세 그대로 꼼짝도 않고 있었다.

그의 귓전으로 조금 전 그녀가 속삭였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지워지지 않은 채 언제까지고 감돌고 있었다.

“달빛이 변하지 않을 때까지만 나를 기억해 줘요.”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