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1000화
군림천하 (1000)
제404장 본산행로(本山行)
종남산으로 떠나는 일행은 당초 예상보다 훨씬 늘어났다.
정소소는 마차를 구해왔을 뿐 아니라 스스로 이번 여정에 동참하겠다고 밝혔다.
진산월은 임영옥의 간호를 위해서도 그녀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정소소뿐 아니라 두 명의 여인이 더 끼어들었다.
그녀들은 남봉 엄쌍쌍과 옥봉 누산산이었다.
엄쌍쌍은 이번 기회에 종남산으로 간 연인 낙일방을 만나기 위해 어렵게 용기를 내어 참여한 것이지만, 누산산은 특별한 이유가 없음에도 자신도 가겠다며 앞으로 나섰다.
“일전에 손풍이란 막돼먹은 놈을 구해 주느라 고생했으니, 이번에 그 보답을 받아야겠어요. 설마 종남파의 장문인이 은혜를 잊고 거절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누산산이 쌍심지를 곤두세우며 하는 말에 진산월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소저의 뜻대로 하시오.”
어차피 정소소 한 명이 늘어나나 두 명의 선자들이 더 끼어드나 마찬가지였다.
진산월로서는 자신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게 뻔한 백모란이 선뜻 그녀들의 동행을 허락했다는 것이 놀랍게 생각되었으나, 그렇다고 그녀들의 청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임영옥이 혼자의 힘으로 제대로 거동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녀들의 가세는 커다란 힘이 될 것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전흠은 부쩍 늘어난 일행에 다소 당황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기꺼이 마부를 자처하며 마차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네 명의 여인과 두 명의 남자.
도합 여섯 명으로 늘어난 일행은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종남산으로 향하는 긴 여정에 돌입했다.
그들이 있는 의양에서 종남산으로 가려면 낙수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가장 무난했다. 낙수 강변을 따라서 펼쳐진 관도가 상당히 잘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정소소가 구해온 마차는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사두마차로, 상당히 크고 튼튼해서 임영옥을 위한 침상이 자리하고도 한 두 사람은 더 머무를 수 있었다.
정소소와 엄쌍쌍은 마차 안으로 들어가고, 누산산이 전흠의 말을 끌고 진산월과 나란히 여정을 시작했다.
전흠은 제법 마차를 모는 솜씨가 좋아서 아주 안정적인 자세로 마차를 운영했다.
그는 수시로 마차 안을 확인해서 임영옥이 불편하지 않은지 확인하는 한편으로, 자신의 말을 몰고 마차 옆을 따라오는 누산산을 힐끔거렸다.
누산산은 몇 차례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도도한 표정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왜 그렇게 자꾸 사람을 훔쳐보는 거예요?”
전흠은 흠칫 놀라더니 정색을 했다.
“내가 언제 소저를 훔쳐봤다는 거요? 난 그저 소저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궁금했을 뿐이오.”
“말이라면 소싯적부터 줄곧 타고 다녀서 당신보다 더 능숙할 테니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마차나 잘 몰아요.”
“소저가 날 몰라서 그러나 본데, 내가 해남에서 말 타고 해변을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알면 놀랄 거요.”
“별게 다 놀랄 일이군요.”
누산산의 냉랭한 반응에 전흠은 거친 숨만 몇 차례 몰아쉬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흥, 해남? 스스로 바닷가 무지렁이라고 저렇게 자랑스레 떠벌이는 사람은 처음 보겠네.”
그녀의 조잘대는 소리에 전흠의 가뜩이나 검붉은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되었으나 끝내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건 그녀의 입에서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것도 강호를 행도하면서 전흠이 쌓은 경험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말 많은 여자와는 가급적 말을 섞지 않는 게 이롭다는 건 현명한 남자라면 누구나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나 사람 마음이 어디 그렇게 단순한가?
자신과 나이 차이가 크지 않은 미모의 여인이 멀지 않은 곳에서 알짱거리고 있으니 전흠으로서는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전흠은 몇 차례나 고개가 돌려지려는 걸 간신히 억누르며 말을 모는 것에만 신경을 집중하려고 했다.
‘나는 마부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마차를 최대한 안정적으로 몰아 사저에게 조금의 불편함도 없게 하는 것이다.’
전흠은 속으로 이 말만을 되뇌며 앞을 주시하려고 최대한 애를 썼다.
그 덕분에 그는 멀리서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일단의 무리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노소(老少)가 뒤섞인 대여섯 명의 남자들이었는데, 중앙의 한 사람을 호위하듯 에워싼 채 신중한 모습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차를 보았는지 잠시 이동을 멈춘 채 자신들끼리 무어라고 소곤거리다가 이내 한 사람이 마차 앞으로 다가왔다.
이목구비가 단정한 이십 대 중반의 청년이었다.
청년은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잠시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전흠은 마부석에 있는지라 일행 중 가장 앞에서 말을 몰던 누산산이 앞에 나서서 그를 상대했다.
“말해요. 무슨 일로 우리 앞을 막아선 거죠?”
청년은 누산산의 날카로운 반응에 전혀 화를 내지 않고 정중한 표정을 유지했다.
“혹시 종남파의 장문인인 신검무적 진 대협의 일행이 아닌지요?”
누산산의 태도는 여전히 냉랭했다.
“당신은 누군데 그걸 묻는 거죠?”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이천(伊川)에 있는 서가보(徐家堡)의 소가주인 서인걸(徐仁傑)이라 합니다.”
서가보라면 이곳에서 멀지 않은 이천 일대에서 가장 거대한 무림 가문이었다. 세가(世家)라고 할 정도의 위세를 지닌 것은 아니었으나, 수십 년간 이천과 의양 일대에서 가장 큰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소가주인 서인걸 또한 전궁검수(電劍秀)라는 별호로 최근에 상당한 명성을 쌓아 가고 있는 기재로, 특히 검법에 관해서는 하남성의 신진 고수들중에서 열 손가락 안에 능히 든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누산산도 그의 이름은 들었는지 조금 전보다는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물었다.
“이제 보니 서 소협이었군요. 그런데 우리에겐 무슨 일이지요?”
“불쑥 앞을 막아서게 된 것에 사과드립니다. 다름 아니라, 진 장문인께서 이 근처를 지나간다는 소문을 듣고 혹시나 하여 찾아온 것입니다. 진짜 진 장문인께서 이곳에 계신지요?”
말을 하면서도 일행을 빠르게 훑고 있던 서인걸의 시선이 이내 한 사람에게 고정되었다.
말을 타고 있어서 더욱 커 보이는 키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유한 눈빛, 그리고 왼쪽 뺨의 흉터가 유난히 돋보이는 한 사람을 보자 그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혹시 저분이…….”
시선이 마주치자 진산월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진 모요.”
그 말을 듣자 서인걸은 재빨리 말에서 내려 황급히 그를 향해 더할 수 없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정말 진 장문인이시군요. 불초말학 서인걸이 진 장문인을 뵙습니다.”
그의 태도가 마치 돌아가신 집안 어른을 대하듯 공경하기 이를 데 없어서 받는 사람이 오히려 무안할 정도였다. 당당한 한 가문의 소가주가 취하기에는 다소 과한 인사에 진산월 또한 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 소협의 이름은 나도 들은 적이 있소. 이렇게 만나니 반갑기는 한데, 달리 나를 찾아온 이유라도 있소?”
서인걸은 설렘과 흥분이 뒤섞인 얼굴로 진산월을 바라보다가 이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부친께서 진 장문인을 꼭 뵙고 드릴 말씀이 있다며 찾으셨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진 장문인께서 부친께 잠시만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신지요.”
진산월은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서 보주께서 직접 찾아오셨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서인걸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니 과연 비단 장포를 입은 백발의 노인 한 사람이 세 명의 남자들을 이끌고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인걸아, 혹시……”
백발노인이 조심스레 묻자 서인걸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버님. 진 장문인께서 이곳에 계십니다.”
백발노인의 표정이 눈에 띄게 환해지며 절로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말 다행이구나. 진 장문인께서 어디…….”
백발노인은 주위를 둘러보다 이내 진산월을 발견하고는 눈을 부릅뜨더니 빠른 속도로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진 장문인. 이 서 모가 진 장문인을 뵙소. 인사를 받아 주시오.”
백발이 성성한 그가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를 하자 진산월은 잠시 난처한 표정이 되었으나, 이내 정중하게 답례를 했다.
“반갑습니다. 종남의 진산월입니다.”
“나는 서해원(徐海遠)이라 하오. 이천에서 조그만 가문 하나를 이끌고 있소.”
말과는 달리 서가보는 이 일대에서는 가장 강력한 세력일 뿐 아니라 하남의 서 씨는 이천과 의양을 넘어 섬서성 경계의 웅이산(熊耳山) 부근까지 명성이 자자한 명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당대의 가주인 섬전추풍검(閃電追風劍) 서해원은 하남십검(河南劍) 중 한 사람으로 꼽힐 만큼 유명한 무림의 명숙이었다.
진산월은 한 가문의 주인인 서해원이 스스로의 허리를 굽혀 자신을 찾아온 것에 몇 가지 의혹을 느끼고 있었다.
“서 보주께서는 제가 이곳을 지나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고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진 장문인께서 낙양의 송가장에서 당금 무림의 최절정고수인 무림맹주 위지립과 사효심 등을 격파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서 낙양은 물론이고 중원 전체가 크게 술렁이고 있소. 나는 그 소식을 듣고 진 장문인이 종남산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이 일대를 지나칠 거라는 생각에 어제부터 이 관도 주위를 서성이고 있었소.”
말을 하는 서해원은 물론이고 그의 뒤에 서 있는 사람들도 모두 얼굴 가득 흥분과 경외에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심지어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진산월을 뚫어지게 바라본 채 숨을 몰아쉬는 소년도 있었다.
서해원과는 일면식도 없는 진산월로서는 그가 자신의 아들까지 대동하고 낙수 근처의 관도까지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가 지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 이틀 동안이나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다니 진산월로서는 그 의도를 알기 어려워 머리가 복잡해질
대체 한 가문을 이끌고 있는 그가 무슨 이유로 그토록 애타게 진산월을 찾아 헤맨 것일까?
“서 보주께서 저를 찾아 주신 건 반갑고 고마운 일이지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궁금하군요. 달리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서해원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음을 작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 진 장문인께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 초면에도 불구하고 꼭 뵙고자 했소. 바쁘지 않다면 잠시 이 사람을 위해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소?”
진산월은 솔직히 하루라도 빨리 종남산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나 이토록 예의를 지켜 정중하게 자신을 초대하는 서해원의 부탁을 무작정 거절할 수도 없었다.
“제가 길이 바빠서 오래 머무르지는 못합니다. 다만 마침 목이 마르니 함께 차 한잔 마시면서 대화를 나눌 시간은 있을 듯하군요. 그것으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듣기에 따라서는 상당히 모욕적인 말이 될 수도 있었으나, 서해원은 오히려 다소 긴장했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물론이오. 마침 이곳에서 멀지 않은 강변에 전망이 좋고 차 맛도 괜찮은 다관(茶)이 있으니 거기서 끽차를 하도록 합시다. 기꺼이 모시겠소.”
“감사합니다.”
서해원은 기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서인걸을 돌아보았다.
“걸아. 네가 먼저 가서…………….”
서해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인걸이 재빨리 말을 몰아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제가 좋은 자리를 잡아 놓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연신 진산월을 훔쳐보던 어린 소년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
“저도 함께 가서 주문을 해 놓겠습니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말을 몰아 강변 저쪽으로 달려갔다.
서해원이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헛. 저 녀석은 내 둘째 아들인데, 진 장문인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제부터 잔뜩 들떠 있더니 막상 진 장문인을 보게 되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저리 설치는구려.”
멀어지는 두 형제를 보는 서해원의 눈에는 흐뭇함과 대견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표정만 보아도 서해원이 자신의 자식들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여실히 짐작할 수 있었다.
“눈빛이 또렷하고 자세가 잘 잡힌 걸 보니 기초를 잘 닦은 모양이군요. 이대로 성장하면 무림의 신성(新星)이 될 수 있을 듯합니다.”
진산월이 자식을 띄워주는 말을 하자 서해원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흥분하거나 가슴이 뛰면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이들 서 씨 부자들의 특성인 모양이었다.
“고맙소. 천하의 신검무적이 자신을 칭찬했다는 걸 알게 되면 그 녀석은 너무 기뻐 말 위에서 한바탕 춤을 출지도 모르겠소.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