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2장] – 돌과 바람 1
돌과 바람
이레 달비는 격분했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 지 알 수 없었다.
만물의 지배자인 황제는 도깨비들이 연초를 피우는 일에 아무 런 제지도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식물을 태워 쾌 감을 얻는 일이며 예의 바른 도깨비라면 나가 앞에서 그런 일을 삼가는 법이다. 그리고 즈믄누리의 무사장 탈해 머리돌은, 다른 이들이 흔히 그렇듯 특정 악우들에겐 예의를 베풀지도 얻지도 못 하고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예의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도깨비였 다. 하지만 탈해가 뻐끔이라는 이름을 붙인 곰방대를 빨다가 이 레에게 목격된 직후 그는 뻐끔이를 황급히 치우지도 자결하고 싶 다는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겸연쩍은 표정을 지어 보 이고는 다시 뻐끔이를 입으로 가져갔다.
이레 달비는 자신을 억누르려 애썼다. 그는 시모그라쥬에서 태 어난 인간이 나가들처럼 연초를 태우는 도깨비에게 불쾌감을 느 껴야 되는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가들조차도 불쾌감 이상의 감정은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연초는 불법이 아니니까. 하지만 탈해가 왜 거기 서 있느냐는 표정으로 멀뚱히 바라보자 이레는 더 자제하지 못했다. 이레는 가져온 술동이를 툇마루에 내려놓고 술잔과 안줏거리들을 늘어놓으며 말했다.
“어찌 그리 평안하십니까, 무사장님?”
“무슨 말이지요. 이레? 연초를 피우는 것이 괴롭다면 왜 피우겠습니까?”
“그것 때문에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거짓말 하나가 늘어났다.
“지금 가주님께서 겪고 계신 고충을 아신다면 위로의 말씀이라도 드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어찌 그리 유유자적하 십니까?”
탈해는 이레가 예상한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멍한 얼굴로 말했다.
“고충이라니요? 각하가 무슨 고충을 겪는다는 말입니까?”
“그럼 부냐 아가씨의 일에 대해 가주님이 즐거워하셔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연초 한 대를 다 피운 탈해는 뻐끔이의 누름쇠를 누르려다가 이레의 살벌한 시선을 받고는 그것을 포기했다. 그는 백작의 유명한 몸종이 연초 때문에 화난 것이라 짐작하고 투덜거렸다.
“물론 즐겁지 않으시겠지만 이젠 다 잘 해결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축하할 겸 한잔하자고 모신 것이고.”
이번엔 이레가 멍한 표정을 지을 차례였다.
“해결되다니, 뭐가 해결되었다는 말씀입니까? 부냐 아가씨는 여전히 그곳에 계신데.”
“예? 엊그제 각하께서 백화각에 가셨잖습니까. 그건 부냐를 데 리러 간 것이 아닙니까?”
이레는 뭐가 잘못되었는지 깨달았다. 그는 참담한 심정으로 부 냐가 여전히 백화각에 있으며 백작이 그곳에 간 것은 면회를 위 한 것임을 탈해에게 알려 주었다. 엘시가 부냐의 석방 허가를 받고 백화각으로 달려간 거라 넘겨짚었던 탈해는 크게 당황했다.
그때 탈해의 초청을 받았던 엘시 백작이 탈해가 앉아 있던 뒤 뜰 툇마루 쪽으로 걸어왔다. 이레는 백작에게 목례한 다음 탈해 를 한 번 째려보고 물러났다. 엘시는 그 태도에 조금 놀랐지만 아마 뻐끔이 때문이리라 생각하며 탈해의 맞은편에 걸터앉았다.
“좋은 꿈 꾸셨습니까, 각하.”
“어젯밤 꿈은 기억이 안 나는군. 많이 늦진 않았겠지?”
탈해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술동이를 바라보았다. 그 동작을 오해한 엘시는 부드럽게 웃었다.
“몽화각의 술만큼 좋지는 않을 거야. 칼리도의 집엔 괜찮은 술 이 있지만 여기엔 그런 것이 없어. 이레가 쿠스의 술도가에 가서 급히 한 동이 사 온 거야. 하지만 쿠스의 술도가와 몽화각은 같은 누룩을 쓴다고 알고 있어. 그러니 그렇게 수상하다는 표정으 로 바라보지 않아도 될 거야.”
그렇게 말하며 엘시는 소매를 걷어쥐고 술잔을 동이에 담갔다. 백작은 크게 술 한 잔을 퍼서 탈해 앞에 내려놓고 자신의 잔을 집어 들었다. 그때 탈해가 말했다.
“각하, 부냐 헨로가 왜 아직도 백화각에 있는 겁니까?”
엘시의 손이 잠깐 멈췄다. 하지만 곧 자신의 술잔을 채워 입가 로 가져갔다. 술 한 모금을 비운 엘시는 잔을 내려놓고 입가를 닦았다.
“내 생각엔 몽화각의 술에 비해도 그다지 떨어지지 않는 것 같아.”
“저는 여태까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부냐가 왜 풀려나지 않은 겁니까? 폐하께서는 어떻게 대승을 거둔 대장군의 연인을 풀어주지 않는 겁니까? 너무하잖습니까.”
“비록 술자리의 허물은 탓하지 않는다지만 말을 조심해, 탈해.”
탈해는 뚱한 표정으로 술잔을 들어 올리더니 벌컥벌컥 들이켰 다. 그는 탁 소리 나게 술잔을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이건 대장군의 품위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도저히 만병장에 대한 예우가 아닙니다. 하물며 그런 대승을 거두었는데…………. 부 나는 겨우 편지 한 장을 전했을 뿐입니다.”
“간자의 서신이었어.”
“부냐는 몰랐습니다.”
“몰랐다 해도 검열받지 않은 서신을 반출시킨 죄는 남아.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대비하기 위해 검열이 있는 거야. 자네가 그걸 모르지는 않을 것 아닌가.”
“저도 그 서신의 내용은 알고 있습니다. 규리하로 진군 중인 토벌군의 규모에 대한 것이었지요. 대단한 정보인 것 같지만, 사 실 별것 아닙니다. 토벌군의 규모가 규리하에 알려진다 해서 전 황이 바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누구든 짐작할 수 있는 거 니까요. 게다가 그 서신은 규리하에 도달하지도 못했잖습니까. 그런데 왜 폐하께서 각하의 계정을 거부하셨는지 저는 이해가 되 지 않습니다.”
“계청이라니? 난 그러지 않았어.”
탈해는 넘겨짚길 좋아하는 자신의 버릇에 대한 무수한 지적이나 질책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다만 어처구니없어 했다.
“계청하지 않으셨다고요? 왜죠?”
“바르지 못한 일이니까. 부냐의 죄는 명명백백해.”
“죄라니요!”
엘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묵묵히 술잔만 비우는 백작을 보며 탈해는 답답한 기분을 느꼈다.
“부냐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실 작정입니까?”
잔을 내려놓은 엘시는 약간 풀죽은 어투로 부냐에게 들려주었던 말을 반복했다.
“어쩌면 폐하께서 승전을 축하하기 위해 대사면을 명하실지도 모르지.”
“그건 불확실하잖습니까. 좀 더 적극적인 일을 해 볼 생각은 없으십니까? 그렇게 폐하께 계청드리기 싫으시다면 제가 대신하 면 어떻겠습니까?”
엘시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탈해는 그만 가슴을 쾅쾅 두드리고 싶어졌다.
“좋습니다. 제가 하지요. 정우의 일엔 아직 손쓸 수 없으니 부냐부터 나서야겠군요. 세상에, 저는 각하께서 당연히 손을 쓰셨 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러지 마, 탈해.”
“예? 왜 하지 말라시는 겁니까?”
“하지 마.”
탈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못마땅한 심정이 뚝뚝 떨어 지는 얼굴로 엘시를 바라보다가 갑작스럽게 질문했다.
“부냐 헨로를 사랑하지 않으십니까?”
엘시의 호흡이 일순 멎었다. 그의 눈꺼풀도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그렇게 엘시는 미동도 없이 조각처럼 앉아 있었다. 바라 보던 탈해가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걱정하여 몸을 일으키려 했을 때 엘시의 눈꺼풀이 움직였다. 엘시는 눈을 감으며 긴 숨 내쉬었다.
“그랬다면 이토록 괴롭진 않겠지.”
“죄송합니다. 각하.”.
“아니, 탈해. 자네 사과는 받지 않겠어. 그 사과는 내 제국이 부냐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듣도록 하지. 그때까지는 나를 병신 이라 부르든 가식 덩어리라 부르든 부냐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든 반대하지 않겠어.”
탈해는 ‘내 제국이 부냐를 사랑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말에 대해 질문하려 했을 때 엘시는 갑자기 잔을 비우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루 위 시렁에 얹힌 목검을 보지 도 않고 집어 들고는 마당으로 내려갔다.
“탈해, 내 주사로 자네 눈을 좀 어지럽혀도 되겠나?”
탈해가 무사였다면 반가워했을 것이다. 즈믄누리의 무사장이 지만 무사는 아닌 탈해는 아쉬워하며 말했다.
“각하, 아시겠지만 저는 검에 대한 식견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나가 앞에 명창일 것 같군요.”
“다행이군. 덜 부끄러울 테니.”
엘시는 그렇게 말하며 검을 서서히 끌어당겼다. 탈해가 자신에 게 갑자기 검술에 대한 조예가 생겨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바 라보는 가운데 엘시는 몸을 던졌다. 탈해가 보기에도 그것은 기 묘한 시작이었다. 검이 아닌 몸으로 상대를 베는 것 같은 동작을 보며 탈해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곧 그보다 더 기이한 움직 임들이 뒤를 이었다.
그 후 반 시간 동안 탈해는 백작의 취검을 감상했다.
나비가 미칠 수 있을까? 아마도 어려울 것이다. 그 작디작은 머리에 미칠 정도로 고급한 지성이 있다고는 여기기 어렵다. 그 러나 만약 나비가 미친다면 그 날갯짓은 백작의 취검을 닮았을 것이다. 완전히 쓸모없어 보이는 동작이지만 6년 전 군단 하나의 명령 체계가 완전히 붕괴된 상황에서 무명 교위가 휘두른 취검은 군단 셋의 와해를 막았다. 엘시는 진중에서 취해 있던 일을 씻을 수 없는 불명예로 생각하며 당대에 이미 전설이 되어 버린 그 이 야기가 거론될 때마다 안색을 바꾸지만, 탈해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해도 군단장이 강권하는 술을 엘시가 거절하기는 어려 울 거라 생각했다.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지만 탈해는 그 장면을 어렵잖게 상상할 수 있었다. 스카리 빌파와 엘시 에더리를 모두 알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로 스카리 빌파와 엘시 에더리의 운명 은 완전히 바뀌었고 스카리가 마흔 살이 되기 전에 가지리라 공 언했던 대장군의 자리마저 엘시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탈해는, 스카리와 암살공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듯 그것이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상념에 잠겨 있던 탈해는 백작의 취검이 멈춘 것을 조금 늦게깨달았다.
엘시는 두 손으로 목검을 짚은 채 꼿꼿이 서서 광대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옷은 땀으로 젖어 있고 얼굴은 취기와 열 때문 에 약간 상기되어 있었지만 백작의 서 있는 모습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구름들이 훨씬 낮게 떠 있는 하늘누리의 하늘은 지독하 게 푸르렀다. 탈해는 이유 모를 허탈감을 느꼈다.
이레 달비가 손에 수건을 든 채 나타났다. 이레는 엘시 곁에 서서 수건을 내밀며 말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가주님.”
엘시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이레를 돌아보다가 조금 후 수건을 집어 들었다.
“나는 가주가 아니야, 이레, 누가 온 거지?”
“아, 죄송합니다. 주인님.”
호칭을 시정한 이레는 곧 찾아온 손에 대해 말했다. 엘시는 탈해에게 양해를 구하고 말했다.
“이곳으로 모셔 와.”
이레는 곧 앞마당 쪽으로 갔다. 잠시 후 남자가 뒤뜰 쪽으로 걸어왔다. 남자의 덩치가 얼마나 좋은지 탈해는 잠깐 동안 동족 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었 고, 이십이금군의 일원인 구레였다.
“안녕하십니까, 각하. 전승을 축하드립니다.”
“고맙군, 구레.”
“안녕하세요, 구레?”
탈해는 반갑게 손을 들어 보였고 구레는 거기에 대해 목례했다.
그리고 구레는 품속에 손을 집어넣어 서신 봉투 하나를 꺼냈다.
“비스그라쥬 백 데라시의 서신입니다.”
엘시는 봉투를 받아 들며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왜 자네가 비스그라쥬 백의 편지를 가져온 거지?”
“예? 나가인 백작님은 이런 날씨엔 밖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알고 있어. 나는 왜 자네냐고 물은 건데.”
구레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엘시를 마주 보았다. 엘시는 부드럽게 말했다.
“구레, 내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 애먹은 적은 별로 없지만 앞으로는 좀 더 주의해야겠군. 나는 왜 폐하께 봉사해야 하는 금군이 비스그라쥬 백의 편지 심부름을 하는지 물었던 것이야.”
구레의 얼굴에 당혹한 표정이 떠올랐다.
“네….. 맞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음. 폐하께서는 백작 의 말씀, 아니, 니름입니까? 어쨌든 그걸 잘 들으시니까………… 폐하의 뜻에 맞는 일이라 생각하기에……… 폐하께서도 그걸 원하시 는 것 같고…….”
엘시는 봉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구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군. 자네와 자네 동료들은 폐하의 안위만 신경 쓰면 돼. 백작의 편지 심부름 같은 걸 하기 위해 자네의 의무를 소홀히하는 것은 바르지 못한 일이야.”
구레는 이제 완전히 당황한 모습이었다. 그 덩치 큰 인간이 당 혹하는 모습은 탈해에게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다. 엘시 또한 더 이상 금군의 처신에 대한 구레의 생각을 추궁할 생각이 없는 듯 가볍게 말했다.
“백작이 답을 받아 오라고 했나?”
“아닙니다.”
“알겠어. 수고했네.”
구레는 황망히 고개를 숙인 다음 탈해에게도 인사하고서 물러 났다. 탈해는 따뜻하게 그를 전송한 다음 엘시를 쳐다보았다.
“음. 그때 비스그라쥬 백을 만나 보셨냐는 질문에 왜 지체하 셨는지 알겠군요. 각하께선 데라시 백작이 건방지다고 생각하십 니까?”
“나는 백작이 건방지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조금 전에는 데라시 백작이 폐하의 권위를 함부로 침범하는 것처럼 말씀하셨는데요.”
“봉사의 영역을 침범한 거지.”
“그게 무슨 말씀이지요?”
“자기 주인에게 좋은 음식을 드리기 위해 마부에게 요리를 하 라고 요청하는 하인을 생각해 봐. 자네는 그 하인이 건방지다고 는 생각하지 않을 거야.”
탈해는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상상력은 언제 나처럼 자신을 가속시켰다.
“혹 각하께선 자신의 일이 폐하의 적을 토벌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폐하의 사법에 관여하는 것은 자신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내 대장군 임명장을 보여 줄까?”
“아니요. 제국 만병장의 권검을 보고 싶군요.”
엘시는 입을 다물었다. 탈해는 타이르듯 말했다.
“각하, 각하께선 만병장입니다. 순전히 원칙대로 말한다면, 만 약 각하께서 백화각을 습격해서 부냐 헨로를 구출한다 해도 동원 된 인력이 만 명을 넘지 않는다면 그건 위법이 아닙니다. 그렇잖 습니까? 그렇다면 바꿔 말해서 각하께서는 병사 만 명이 필요한 일 이내의 일이라면 폐하께 무엇을 요청하든 상관없습니다. 절대 로 주제넘은 일이 아닙니다.”
‘그 이야기는 그만하지.”
탈해는 더 말하겠다는 듯한 동작을 취했지만 엘시는 도깨비를 완강하게 외면하며 툇마루에 걸터앉아 봉투에서 편지를 꺼냈다. 자신을 달래야겠다고 생각한 탈해는 방법을 모색했고 술잔을 집 어 드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탈해는 서신이 그렇게 길지 않을 거라 짐작했다. 서신은 도깨 비지 한 장뿐이었고 나가들은 글씨를 크게 쓰므로 엘시가 읽고 있는 편지에 담길 수 있는 내용은 그렇게 많을 수 없었다. 탈해 의 예상대로 엘시는 금방 편지를 다 읽고는 그것을 접어 피봉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곧 생각이 바뀐 듯 편지를 다시 빼 탈해에게 내밀었다. 탈해는 손을 닦고 의아해하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왜 이걸 제게?”
“비셀스, 그러니까 정우 규리하에 대한 이야기야.”
탈해는 긴장하며 도깨비지를 펼쳤다. 역시 큼직큼직한 글씨들 이 보기 좋게 적혀 있었다. 엘시가 그것을 이미 읽었는데도 탈해 는 소리 내어 또박또박 읽었다.
“근계. 나 비스그라쥬 백 데라시는 고금에 짝을 찾기 어려운 영용한 지혜와 불굴의 기상으로 압도적이며 완벽한 승리를 거두 신 황제의 대장군 엘시 에더리에게 진심으로 감탄과 경애의 마음 을 느끼며…….”
“건너뛰면 좋겠군.”
“처우를 결정하기 위해 그녀를 면담하라는 폐하의 하교에 따라 비셀스 규리하를 만나 보려 합니다. 그녀의 신분에 걸맞은 대우가 있어야 하니 백작께서 그녀를 호위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지요?”
“나가들의 관습이야. 여인이 집 밖으로 나올 땐 남자가 호위해 야 하지. 호위자가 없으면 여인의 품위가 깎인다고 생각하지.”
“그 관습은 저도 들어 봤습니다. 하지만 정우는 나가가 아닌데 요. 그리고 왜 각하지요?”
“정우는 나가가 아니지만 데라시 백작은 나가지. 그리고 왜 나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나가들이라면 그것은 방문자들 중 몇 명이 나서야 하는 일인데 지금 규리하 성에는 방문자 같은 것이 없군. 그렇다면 최근에 그곳을 방문한 것은 나로군.”
탈해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방문자가 아니라 점령자 아닙니까?”
“내 생각에도 그래.”
“그런데 왜 각하지요? 그냥 호위라면 병사들이 해도 무방할 텐데.”
“데라시 백작은 그녀의 신분에 걸맞은 호위자가 나라고 말했 지. 그렇다면 백작이 그녀를 좋게 보는 거라고 추측해도 되겠지. 그걸 알려 주고 싶어서 편지를 보여 준 거야.”
탈해는 환한 얼굴이 되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폐하께서도 그럴까요?”
“폐하의 의중이야 아직 알 수 없지. 백작이 정우를 만난 후에 그녀에 대한 인상을 폐하께 보고하지 않겠나?”
“아아, 예. 그렇겠군요. 어쨌든 잘된 일입니다. 데라시 백작에 게 정우를 해칠 생각은 없다는 것이 분명하니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 그건 그렇고 이제 자리를 슬슬 작파해야겠 군. 나는 다시 내려갈 생각이네.”
“아, 이런 전후 처리로 바쁘신데 제가 괜히 불렀군요.”
“좀 바쁘긴 하지만 보다시피 자네와 담소 나눌 시간도 못 내는 것은 아니야. 나는 내려가서 정우에게 준비하라고 말할 생각인 데, 혹 정우에게 전할 말이라도 있나?”
“할 말이 아주 많은데요. 죄송합니다만 편지 한 장 쓸 시간이 있습니까?”
“그렇게 해.”
탈해는 지필묵을 챙기러 달려갔다. 엘시는 탈해가 두고 간 데 라시의 편지를 집어 다시 천천히 읽었다. 엘시의 얼굴에 잠깐 동 안 어두운 빛이 스쳤다. 하지만 그는 편지를 피봉 속에 집어넣으 며 동시에 어둠도 얼굴 아래로 가라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