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3장] – 기적을 감상하는 태도 5
지멘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광경이 황혼 녘에 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풍경이라고 단정했다.
지멘이 보고 있는 것은 넓은 선상지였다. 선상지 위쪽, 무슨 수를 써도 지멘이 단숨에 접근하기 힘든 암석 지대에는 두 대의 소화차가 서로를 엄호하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 모습도 꽤 많 은 우려를 불러일으키는 모습이었지만 정작 지멘으로 하여금 부 리를 떨게 만드는 모습은 선상지 아래쪽에 있었다. 그곳에서는 많은 수의 제국병들이 넓게 펼쳐져 땅을 파고 있었다.
그들이 만들고 있는 것은 함정이었다. 하지만 함정이라는 거창 한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제국병들이 만들고 있는 것은 겨우 무 릎이나 빠질까 싶은 구덩이에 불과했다. 가벼운 여흥 거리 삼아 뒷산에 허방다리를 놓는 농가의 소년이 보더라도 비웃음을 금하 기 어려운 조잡한 수준이었지만 지멘은 그럴 수 없었다. 아실이 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저런 걸로 당신 잡을 생각은 없을 테고, 아무래도 그걸 채우 겠군요.”
아실이 말한 ‘그것’은 물론 물이었다. 물구덩이 위를 흙이나 풀잎 쪼가리 등으로 위장한다면, 밝은 대낮이라면 눈으로 보면서 피할 수 있겠지만 밤에는 꼼짝없이 빠질 것이다. 실로 소름 끼치 는 함정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미는 것을 느끼면서도 지멘은 그쪽으로 다가갈 생각을 포기해 버렸다. 결과적으로 산을 넘는 것이 힘들어졌다. 지멘이 목표한 선상지는 산을 넘기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
지멘은 몸을 숨기고 있던 언덕에서 조심스럽게 뒷걸음쳤다. 그 는 언덕 아래까지 내려와 바닥에 주저앉아 한 손으로 벼슬을 움 켜쥐었다. 조금 늦게 비탈을 내려온 아실이 맥 빠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일부러 저러는 거예요. 시야가 탁 트인 곳에서 보라는 듯이.”
지멘은 부리를 완강하게 잠근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땅바 닥에 앉은 아실은 지멘의 무릎에 뒤통수를 기대었다.
“이 근처 여기저기에 저런 함정을 파 뒀다고 생각하길 바라는 거예요. 사실 하나도 안 팠을지 모르지요. 하지만 확신할 수가 없네요. 그 수교위, 니어엘 헨로라고 했지요? 엘시 에더리 외에 유념해 둬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난 것 같군요.”
지멘과 아실의 크고 작은 모습에도 비탈을 흠뻑 적신 낙조가 물들기 시작했다. 풀잎들이 검붉게 타오르고 흙냄새 풍기던 바람 은 조용히 잦아들었다. 그리고 밤을 기다리던 것들이 차가운 체 취를 뿜기 시작했다.
아실은 하루가 마감되는 우울한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추적자 들의 존재가 확인된 이상 밤을 틈타 움직여야 하겠지만 지멘은 절대로 움직이지 않으려 할 것이다. 물론 지멘은 어둠 저편에 별 보다 많은 함정들이 있을 거라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실 에게 말을 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아실은 지멘이 그렇게 생각하 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니어엘 헨로 또한 잘 알고 있을 것 이다.
아실은 지멘을 돌아보았다.
고개를 떨어뜨리고 오른손으로 벼슬을 움켜쥔 모습을 한 채 지 멘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검은 깃털 사이를 파고든 마지막 햇살 이 그의 몸을 불붙은 숯덩이처럼 바꿔 놓았다. 만약 좋은 바람을 탄다면 맹렬한 불길을 일으킬 수 있는 거대한 숯덩이. 하지만 바 람은 없고 냉혹한 물만 가득하다. 해가 졌다. 저녁이 밤으로 바 뀌는 미묘한 시각. 빛이 사라지고 지멘의 검은 몸은 어둠 속으로 잠겨들었다. 사그라지는 불잉걸을 보는 것 같은 느낌에 아실은 속이 상했다.
아실은 지멘의 다리 사이로 걸어가 그의 부리를 똑똑 두드렸다. 지멘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눈만 치켜떠 아실을 바라보았다. 이미 서로의 눈을 찾기 어려운 어둠이었지만 두 사람은 정확하게 서로의 눈이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실은 지멘의 왼쪽 무 릎에 팔꿈치를 괴고 비스듬하게 기대섰다.
“지멘, 저는 아마 열여덟 살쯤 되었을 거예요. 저를 주웠을 때 타이모는 제가 다섯 살이라고 말했거든요.”
그 서두는 지멘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눈을 돌리지 않은 채 아실의 말에 집중했다.
“타이모 성격 기억나죠? 사소한 건 신경 안 쓰죠. 인간 아이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타이모는 누가 다섯 살쯤일 거라고 말하자 마자 내 나이를 다섯 살로 결정했어요. 그렇게 틀린 것 같지는 않으니 다행이지요.”
아실의 설명은 지멘이 기억하는 타이모와 정확하게 부합하는 것이다. 지멘은 추억의 상호 확인에서 느낄 수 있는 평범한 즐거 움을 느꼈다. 그리고 아실도 지멘이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을 민감하게 느꼈다. 서로를 볼 수 없었지만 그들에게 그것은 그리 큰 장애가 아니었다.
“나이야 특별히 중요할 건 없지요. 중요한 건 이 땅에 있는 모 든 열여덟 살짜리 인간들 중에 매일 제국군에게 쫓기고 한 달에 대여섯 도시를 떠돌고 반년에 한 번씩 황제의 세금 수송대를 습 격하고 3년에 한 번꼴로 지붕 밑에서 자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 다는 사실이에요.”
지멘은 벼슬을 움켜쥐었던 손을 풀었다. 오랫동안 움켜쥐었던 벼슬이 약간 저렸다. 아실이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열여덟 살짜리들은 이렇지 않아요. 사람은 열여덟 살 때 이렇게 살지 않을 거예요. 팔다리가 온전한 열여덟 살짜리가 옷 에서 자기 똥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은 정상이 아닐 거예요. 미 치지도 않은 열여덟 살짜리에게 아프면 신경 써 주고 우울한 것 같으면 농담 걸어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거라고요. 언젠가 자신을 죽일 사람 외엔 아무도 믿지 못하 면서 사는 것은 제대로 된 열여덟 살짜리의 삶이 아니에요.”
아실은 지멘의 무릎에 얹어 둔 팔꿈치를 뗐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살아요.”
분노가 아실의 목소리를 갈아 날을 세웠다. 아실이 외쳤다.
“빌어먹을, 단 한 번뿐이에요! 한 번뿐인 열여덟 살을 이따위 로 산다고요. 저는 당신처럼 해볼 거 다해보고 이 미친 짓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다른 방식으로는 살아 본 적도 없다고요!”
아실이 손을 뻗었다. 그 손은 어둠 속을 거침없이 뻗어가 지멘 의 수염볏을 할퀴듯 움켜쥐었다.
“그러니 약한 척하지 마요.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으니까! 무서워요? 물이 무서워요?”
지멘의 몸이 굳었다. 그의 몸에서 깃털이 부풀어 오르며 아실 의 볼을 때렸다. 아실은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그 깃털을 깨물었다. 아실은 지멘의 깃털을 깨문 채 속삭였다.
“좋아요.”
아실은 깃털을 잎에 문 채 급하게 몸을 뺐고 그 때문에 지멘의 깃털들이 몇 개 빠졌다. 지멘의 품에서 뛰쳐나온 아실은 어둠 속 을 더듬어 그의 등 뒤로 돌아갔다. 아실은 배낭을 뒤져 곧 밧줄 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다시 지멘의 앞쪽으로 걸어 나오며 밧줄 의 한쪽 끝을 자기의 허리에 묶었다. 밧줄을 잡아당겨 잘 묶였는 지 확인한 다음 밧줄 사리를 지멘에게 던졌다. 밧줄 사리는 지멘 의 가슴팍에 부딪혔다.
“붙잡아요.”
지멘은 몸을 부풀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실은 볼에 깃털 을 붙인 채 발을 쾅쾅 굴렀다. 소녀는 자신의 허리에서 밧줄을 잡아채어 지멘에게 내밀었다.
“붙잡아요! 그 줄을 붙잡고 따라와요! 저 앞에 있는 건 쟁룡해 도 아니고 엘시 에더리도 아니에요. 물구덩이일 뿐이라고요. 그 러니 저를 따라와요! 제가 물에 빠지지 않으면 당신도 빠지지 않 아요. 당신이 그랬죠? 레콘은 거기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잘난 척 하며 떠들었죠? 부리로만 떠드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어요. 몸으로 보여요!”
지멘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실은 밧줄을 움켜쥔 손끝이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긴장한 근육들이 팔 속에서 뒤틀리는 것 같았다. 자신의 목에서 흘러나오는 기괴한 흐느낌에 놀라 아실은 황급히 팔을 끌어당겼다. 좌절감이 그녀의 팔을 훔쳤고 아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손가 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밧줄을 느꼈다. 손바닥이 아팠다.
아실은 무릎을 꿇었다. 의지의 매듭이 풀렸고, 아실은 자신의 주의력이 아무렇게나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었다.
방기된 시간들이 소녀와 거인 주위를 흘러갔다.
그리고 무엇인가가 아실을 불렀다.
아실은 고개를 들었다. 캄캄한 밤. 달은 지평선 이쪽에 도달하지 못했고 자폐적으로 번득이는 별빛들은 땅에 아무런 빛도 보내 지 않았다. 아실을 자극한 것은 시각이 아니었다. 그녀의 피부를 쓸어 만진 것은 거대한 공기의 움직임이었다. 크고 육중한 것의 움직임에 휘말려 든 공기가 내뿜는 불평이 그녀의 주의를 끈 것 이다.
아실은 밧줄이 당겨지는 것을 느꼈다. 믿을 수 없는 기분을 느 끼며 그녀는 황급히 일어섰다.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애를 따라가야겠어.”
아실은 보이지 않는 지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 애가 나를 이끌어 준다면.”
아실은 두 주먹으로 눈을 눌렀다. 눈꺼풀 속에서 빛이 폭발하 고 그 잔영이 그을음에 뒤덮일 때까지 그렇게 누르던 아실은 손을 뗐다. 그리고 코 먹은 소리로 말했다.
“함정들 사이를 돌파해서 산을 넘겠어요.”
무거운 신음이 들려왔다. 그것을 동의로 받아들이기로 한 아실 은 주저 없이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줄이 잠깐 팽팽해졌다가 곧 느슨해졌다.
인간과 레콘은 산을 향해 걸어갔다.
사람은 낮에 기대어 사는 동물이다. 밤을 낮처럼 볼 수 있는 나가도, 불을 마음대로 부리는 도깨비들도 그 사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고 인간인 아실과 레콘인 지멘에게는 다른 두 부류 의 사람과 달리 밤의 어둠에 대항할 수 있는 수단도 없었다. 주 의력을 앗아 가는 암흑 속에서 아실은 불빛을 목표 삼아 걸었다. 함정을 파던 제국군들은 밤이 다가오자 횃불 같은 것을 피워 두 고 있었다. 아실은 제국군과 접촉을 피하고 싶었지만 그 외에는 목표로 삼을 만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아실에겐 걷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할 여유 가 없었는데, 걷는 것이 지나치게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지멘의 발에 걷어차일까 봐 아실은 감히 밧줄을 느슨해지게 만 들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아실은 지멘의 몸을 끌듯 움직이고 있 었다. 그것은 무익한 고행이었고 아실도 자신이 바보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아실은 지멘의 발길질이 무슨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도 잘 알았다.
처음 얼마 동안은 참을 수 있었지만 결국 아실의 입에서 고통스 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일단 시작된 신음을 멈추기는 어려웠다. 문득 아실은 자신의 신음이 이중주처럼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 다. 아실은 자신이 내뱉지 않은 신음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것이 지멘의 신음임을 알고는 놀랐다.
지멘 또한 힘겨워하고 있었다. 그는 물에 대한 원초적 공포와 싸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다리와도 싸우고 있었다. 지멘 또한 지나치게 빨리 걸으면 아실을 걷어찰 테고 느리게 걸으면 아실이 뒤로 나동그라질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지멘은 자신의 걸음을 통제하려 애썼다. 걷거나 숨쉬는 것과 같은 일은 통제하려 하면 더 힘들어지는 법이다.
지난 6년 동안 아실이 본 지멘은 멈춰 서 있는 시간보다 달리 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들이 아침과 점심, 저녁을 각기 다른 도 시에서 맞이한 횟수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그런 지멘이 걷는 행 위에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실로 하여금 기묘한 기분 에 젖어들게 했다. 살갗이 부풀어 오르면서 동시에 몸의 중심은 잔뜩 비틀려 짜여지는 느낌. 아실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아실은 울고 싶었다.
그러나 아실은 눈물로 볼을 적시는 감미로움을 즐길 수 없었 다. 그녀가 걷고 있는 삶의 형태는 다른 가능성들을 단호하게 배 제한 끝에 얻어진 유일한 것이고 후회나 절망의 무게를 짊어진 채 그 가느다란 경로 위를 걷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멈춰 서서 우는 대신 아실은 또다시 몸을 앞으로 내던졌다. 밧줄이 팽 팽해졌다. 자신이 해가 뜨기 전에 기절할 것을 확신했지만 그래도 걸어야 했다.
불빛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을 때 아실은 헛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아실은 몇 번이나 의심해 보았지만 그 광경은 압박 감에 지친 정신이 제공하는 만화경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횃불들 은 분명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실은 황혼 녘에 보았던 제국군들의 모습에서 야영 장비가 있었는지 떠올려 보려고 애썼다. 그때 지멘이 말했다.
“야영지로 복귀하는 모양이군.”
지멘의 목소리에 흠칫했던 아실은 다시 멀어져 가는 횃불들을 바라보았다. 아실은 이런 행운을 믿을 수 없었다. 지금껏 표적이 되어 주던 횃불이 접촉할 만큼 가까워지자 스스로 떠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아실은 더 큰 행운에 직면했다. 본격적 으로 함정 지대에 들어섰기에 긴장하고 있던 아실은 그만 실소하 고 말았다. 땅을 파헤친 흔적들이 뚜렷하게 보였다. 주위를 둘러 보고 아실은 새파란 밤하늘과 지평선을 박차고 솟아오른 달을 발 견했다. 상현에서 조금 더 부푼 달은 아실에게 상당한 시야를 확 보해 주었다. 뒤를 돌아보니 지멘의 검은 모습과 달빛 속에 드러 난 윤곽도 알아볼 수 있었다. 아실은 지멘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 리고 지멘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는 것을 보고 기쁨의 탄성을 내 질렀다. 지멘에게도 아실의 모습이 잘 보였던 것이다.
더 교묘하게 숨겨진 함정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아실은 그것들 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발을 적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혹 몸이 통째로 빠질 함정이 있다 해도 지멘과 연결된 밧 줄이 있었기에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아실은 기쁨 속에서 외쳤 다.
“빨리 걸어요!”
그리고 달려갔다. 지멘은 보조를 맞춰 걷는 속도를 높였다. 아실은 지금껏 겪었던 고통과 불쾌한 감정들을 모두 잊었다.
“수문을 열어라!”
메아리를 동반한 고함소리가 들려왔을 때 아실은 앞으로 달려 가는 중이었으므로 갑자기 팽팽해진 밧줄에 대응할 수 없었다. 몸이 붕 떠올랐을 때도 아실의 얼굴에선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 다.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것은 뒤통수에 지독한 통증이 느껴졌을 때였다.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아실은 지멘의 이름을 연거푸 불렀다.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주를 퍼붓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