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5장] – 깨어난 불씨 3
아실이 헤치카의 처소에서 타이모의 사상과 분리주의 운동에 대해 설명하던 시각, 지멘은 최후의 대장장이를 만나고 있었다. 지멘 또한 아실이 헤치카에게 던졌던 것과 같은 질문을 최후의 대장장이에게 던졌고 그 대답에 대해 생각하며 최후의 대장장이 를 관찰했다.
모든 레콘에게 무기를 주는 자이며 별빛로의 주인이자 타이모 의 어머니인 여인은, 이곳의 다른 대장장이들과 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최후의 대장장이는 부리의 빛깔이나 팔의 깃털 등 이 온전했다. 그것은 그녀가 별빛로의 주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별빛로는 별빛을 모아 철을 용해시키기 때문에 그 주위에는 대장 장이들의 깃털을 상하게 하고 부리의 빛깔을 변색시키는 살인적 인 열기가 별로 없다. 그래서 최후의 대장장이에게 나타난 노쇠 의 증거는 순전히 시간적인 것뿐이었다.
그 늙은 모습이 최후의 대장장이의 두 번째 특징이었다.
대장장이라는 말에서는 강인함이 느껴진다. 레콘에게서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다른 레콘 대장장이들과 달리 최후의 대장장이는 그저 늙은 생명체일 뿐이었다. 그녀의 몸가짐은 꼿꼿하고 자신의 사지를 통제하는 것에도 아무런 무리가 없어 보였다. 하 지만 지멘은 그녀에게서 어떤 강인함도 느낄 수 없었다.
지멘은 혹 타이모의 죽음이 최후의 대장장이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것이 아닌가 의심해 보았다. 물론 아들을 때려죽인 사람에게 태연하게 농담을 걸었던 즈라더의 경우가 정상적인 레 콘의 태도다. 하지만 즈라더의 아들과 타이모의 경우는 죽음의 방식이 다르다…………..
지멘은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최후의 대장간은 지멘이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지멘은 최후의 대장장이도 그가 알던 레콘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지멘은 방 안에 있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았다.
지멘은 왜 그 사람이 최후의 대장장이의 방에 있는지 알 수 없 었다.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 사람 앞에는 커다란 바둑판이 놓여 있었고 바둑판 반대편은 조금 전까지 최후 의 대장장이가 앉아 있던 자리였다. 지멘이 찾아갔을 때 그들은 바둑을 두고 있었다. 지멘은 그 사실이 좀 기묘했다. 언젠가 지 멘은 국수가 되는 것을 숙원으로 삼은 레콘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그 이야기는 농담을 나누는 상황에서 나온 것 이었다. 레콘과 바둑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지멘의 생각이었 다. 하지만 그곳에 놓여 있는 바둑판은 레콘이나 씀 직한 거대한 것이었고 돌 또한 육중해 보였다. 지멘은 좀 지나치게 육중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지금 바둑판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인간이 었으니까.
오십 대쯤 되어 보이는 인간 남자의 머리는 뒤쪽이 희끗희끗하지만 다른 부분은 아직 새카맸다. 그리고 눈도 놀랄 정도로 짙은 검은색이었다. 하지만 남자의 검은색은 거기까지였다. 피부는 새 하얗고 위아래 옷 또한 새하얀 색깔이었다. 탁자 아래에 있어 보 이지 않았지만 신발도 하얀색일 것 같았다. 좀 관계가 없을지 모 르지만 남자가 쥐고 있는 돌도 백돌이었다. 흰색에 대한 광적인 애호를 가진 것 같은 인간은 바둑판만 뚫어지게 바라볼 뿐 최후 의 대장장이와 지멘에겐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지멘이 하얀 인간에 대한 관찰을 대충 끝냈을 때 최후의 대장 장이가 고개를 들었다.
“이 도끼는 일단 내가 보관할 걸세.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할 때까지.”
“보통 어떻게 처리됩니까?”
“일반적으로는 녹여서 새로운 무기를 만드는 데 쓰이지. 주인 이 놓아준 무기는 더 이상 무기가 아니니까. 하지만 가끔은 남겨 두는 무기도 있어. 승천한 티나한의 철창 같은 경우가 그렇지.”
전설적인 이름을 들은 지멘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별빛로의 주인은 박물관 안내인의 즐거움을 느끼고 싶은 것 같았다.
“티나한이 승천하기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온갖 이야기를 들어 봤겠지만 그 이야기는 잊도록 하게. 내 이야기가 가장 정확 한 거니까. 티나한의 승천에 관한 정확한 사실은 무슨 일이 있었 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야.”
최후의 대장장이는 지멘이 웃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멘은 웃지 않은 채 그저 다음 말을 기다렸다. 바둑판을 응시하 던 인간 역시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것처럼 미동이 없었다. 소박한 희망의 좌절에 머쓱해하며 최후의 대장장이가 말했다.
“그날 밤 티나한도 취해 있었지만 다른 참석자들도 모두 대취 해 있었어. 티나한이 자기 철창에 대해 뭔가 감상적인 이야기를 했던 것은 분명한 것 같아. 하지만 그것이 납병례인지는 확신할 수 없어. 당시의 참석자들 모두가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했으니. 어쨌든 티나한은 뭔가 장황한 이야기를 끝낸 다음 일어섰어. 그 런 상황 알지? 오래 계속된 술자리의 마지막 장면 말이야. 참석 자 모두가 완전히 취한 상태. 몇몇은 이미 잠들어 있고 깨어 있 는 사람들도 더 이상 떠들썩하게 굴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못한 채 잠긴 목소리로 두런두런 잡담을 나누는 때 말이야. 그럴 땐 꼭 누군가가 어이없는 짓을 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저 빙긋이 웃 으며 바라보지. 티나한이 허공으로 걸어 올라갈 때도 사람들은 그저 미소 지은 채 바라보고 있었을 거야. 환호나 비명에 대한 말은 꾸미기 좋아하는 인간들이 한 말일걸. 걸어 올라가는 티나 한도,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사람들도 그저 꿈처럼 느끼고 있었 을 테지.”
지멘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그 일이 일어난 하늘치가 어떤 하 늘치인지 아무도 모르지만 어쨌든 티나한과 그의 지우들은 어떤 하늘치의 등 위에 모였다. 보름달이 시리도록 밝게 비치는 밤이 었고 그들 외에 사람은커녕 동식물도 없는 하늘치의 등 위는 고 요했다고 한다. 최후의 대장장이가 한 말처럼 모든 것은 꿈속의 일처럼 일어났을 것이다. 티나한이 상상한 것이 달로 향하는 계 단인지 하늘의 끝까지 향하는 계단인지는 그가 돌아와서 알려 주 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다. 그리고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모든 것이 모호한 그런 상황에서 납병례가 확실하게 치러졌다 고 말할 수는 없지. 물론 티나한이 철창을 손에서 놓은 것 자체가 확실한 납병의 증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납병례를 그렇 게 추측으로 처리할 수는 없어. 어쨌든 그건 티나한의 철창이고 티나한 외에 다른 사람은 그것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으니까. 그래서 그 철창은 보관되고 있어.”
“티나한이 돌아올 때를 대비해서 말입니까?”
“나도 들었어. 재미있는 이야기더군.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우 리가 그것을 보관하는 것은 그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야.”
“즈라더의 도끼에는 그런 의혹이 없습니다. 그는 명백하게 납 병례를 치렀습니다.”
“맞아. 그러니까 그 도끼는 곧 녹일 거야.”
“별빛로에서 녹입니까?”
“그래. 아마 곧 결정이 날 테니 원한다면 여기 머물렀다가 용해식에 참가하게.”
“용해식? 의식이 있습니까?”
“대단한 것은 아니야. 바쁘지 않은 대장장이들이 모인 가운데 무기를 녹이지. 납병을 치른 무기는 좋은 무기야. 그 주인을 잘 지켜서 장수하게 했다는 의미니까. 그래서 한자리에 모여 그런 무기를 또 만들자는 다짐을 다지는 거야. 그냥 이곳의 대장장이 들에게만 의미 있는 것이지만 그 도끼를 가져온 자네가 그것이 확실히 처리되는 것을 보고 싶다면 참관해도 좋아.”
지멘은 자신이 그 일을 원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숙원에 도전 중인 레콘들이 그러하듯 지멘은 외도에 관심이 없었으므로 병 을 마치면 곧장 원래의 노정으로 복귀할 계획이었다. 용해식이 대장장이들에게만 의미 있는 일이라면 지멘은 거기에 참가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원래 노정, 즉 황제 사냥의 다음 단계 는 현재로선 개관도 세부 사항도 없는 상태였다. 아이저 규리하 의 협조 요청을 잊은 것은 아니지만 진지하게 그 제안을 고려하 지는 않았다. 전 규리하 변경백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못하거 니와 지멘은 도망자 신세인 아이저에게 기대할 만한 것이 있다고 믿기 어려웠다. 그가 가슴에 품은 비수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지 멘은 자신에게 그 칼날을 버릴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 다. 따라서 그에겐 아무 계획이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머무는 것에는 많은 위험이 있었다. 여기 있는 젊은 레콘들은 아직 숙원이나 신부 탐색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 다. 바로 옆을 지나가는 금편 삼백 닢짜리 현상범을 무시한 채 숙 원 사업이나 신부 탐색에만 정진하는 일반적인 레콘과 좀 다른 것 이다. 아실은 돈이 있는 한 두려움이 없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그 돈이 바로 젊은 레콘들을 유혹할 수 있다는 말을 아실이 고의적으 로 생략했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선 굳이 학자가 될 필요도……………. 어떤 착상이 지멘을 주춤하게 했다.
대답을 기다리던 최후의 대장장이는 지멘의 동요를 깨닫지 못 했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최후의 대장장이나 납병례, 즈라더의 도끼 같은 것은 지멘의 의식에서 사라졌다. 지멘은 자신의 생각 에 골몰했다.
‘나에겐 황제의 세금 수송대를 습격하여 획득한 많은 금편이 있다. 그 돈으로 젊은 레콘들로 구성된 군대를 만들 수 없을까?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늘누리에 침입한다면?
어떤 이에겐 닳고닳은 것처럼 느껴질 개념이 레콘인 지멘에겐 대단히 놀랍고 창의적인 것으로 느껴졌다. 지멘은 그 생각에 골몰하고 싶었다. 그러나 더 기다리지 못한 최후의 대장장이가 부리를 열었다.
“어떻게 할 건가, 지멘?”
지멘은 재빨리 생각을 정리했다.
“이곳까지의 여정이 짧은 것은 아니었으니, 잠깐 쉬도록 하겠 습니다. 그 용해식이 곧 이루어진다면 참석할 수도 있겠군요.”
“좋도록 하게. 여숙 시설은 많이 있네.”
“여숙 시설이오?”
“그래. 옛날에는 무기를 받을 때까지 젊은 레콘들이 그냥 머물 수 있었지. 하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아. 사람들이 워낙 많아야 지. 게다가 이곳에서 장사 중인 인간들도 있고 말이야. 그래서 여숙업을 하는 이들도 들였네.”
지멘은 자신이 북극의 땅에 와 있는지 시모그라쥬 한복판에 있 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하나뿐인 위대한 병기들을 만 들어 내던 대장장이들은 이제 조그마하고 쓸모 많은 도구들을 만 들어 팔고 있었다. 자신의 평생 반려가 될 무기를 기다리던 젊은 레콘들이 초조함을 가라앉히기 위해 담소하던 장소에는 여숙업자 들이 들어섰다. 그가 아는 최후의 대장간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지멘은 착잡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이곳에서 제 안전이 보장됩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아실 겁니다. 제게는 현상금이 걸려 있습니다. 누군가가 저를 공격하지 않는다면 저도 지불할 것은 지불하고 요청받은 것은 따 르며 얌전히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제 현상금을 노린 누군가가 덤벼든다면 그럴 수 없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 다면, 저는 이 방을 나서자마자 그대로 최후의 대장간을 떠나겠 습니다. 최후의 대장간에서 소란을 부리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최후의 대장장이는 수염볏을 쓸어내렸다.
“하지 않은 말이 무엇인지 알겠군. 이곳의 현재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군.”
지멘은 말없이 최후의 대장장이를 응시했다. 최후의 대장장이가 말했다.
“최후의 대장간은 언제나 무기를 원하는 레콘에게 그것을 주었 어. 그가 바깥에서 혐오스러운 범죄자로 취급된다 해도 우리는 신경 쓰지 않았지. 물론 그가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어서 무기를 쥐자마자 당장 달려가 누군가를 살해할 거라 해도 신경 쓰지 않 았어. 이곳에는 무기를 원하는 레콘과 그것을 만들어 주는 대장 장이가 있을 뿐이야. 그리고 아무리 이곳의 모습이 바뀌었다 해 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네. 깃털은 빠진 곳에 남아 있을 거야. 그곳에서 빠진 깃털은 그곳에, 그리고 이곳에서 빠진 깃털은 이 곳에 남을 걸세.”
지멘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과의 말도 할까 하는 충동을 느꼈지만 관두기로 했다. 그는 인사를 남기고 일어섰다.
그때 바둑판만 들여다보던 인간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괜찮다면 제가 머무는 곳에 당신을 초대하겠습니다.”
지멘과 최후의 대장장이는 하얀 남자를 돌아보았다. 하얀 남자 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지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깨끗한 미소 를 지었다. 쉰은 넘겼을 것 같은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게도 속된 구석이 없는 맑은 웃음이었다. 그때 남자의 손이 움직였다. 얼굴을 여전히 이쪽으로 향한 채 남자는 백돌을 바둑판 위에 내려놓았다.
바둑판을 보지도 않고 돌을 내려놓는 기묘한 동작에 지멘과 최 후의 대장장이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인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멘에게 다가온 인간은 갑자기 환한 표정을 지으며 최후의 대장 장이를 돌아보았다.
“나란히 서 있으니 바둑판 같지 않습니까?”
최후의 대장장이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인간의 말대로 온통 하얀 옷을 입고 있는 그와 검은 깃털의 지멘이 나란히 서 있으니 그렇게 보였다. 인간은 지멘에게 말했다.
“저도 이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곳의 여숙 주인들은 강도나 다름없지요. 가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밖에 빈터는 많으니 노 숙하라고 말하는 놈들입니다. 물론 최후의 대장장이께서 엄히 단 속하십니다만 물정 모르고 찾아간 레콘은 깃털이 모조리 뽑혀 나 올 지경이지요. 저와 함께 가신다면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 초대를 받아들이시고, 그곳이 마음에 드신다면 머무시지요.”
“나는 너를 처음 보는데.”
“지금 그 말 하셔야지요. 다음번에는 그렇게 말씀하실 수 없을 테니까.”
물론 두 번째 봤을 때는 처음 본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 하 지만 지멘이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내가 왜 처음 보는 사람의 호의를 받아야 하지?”
“저는 당신과 아실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지멘은 자신이 방어적으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뭄토도 자신과 아실의 정체를 곧장 알아본 만큼 다른 사람이 그렇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하지만 그것을 면전에 대고 말하는 것은 성격이 다르다. 지멘은 보다 심도 깊게 하얀 남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떻게 보아도 위협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인간 기준 으로는 후리후리한 체격이었지만 레콘 기준으로는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다. 무기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고 물통 같은 것을 차고 있지도 않았다. 어쨌든 겉으로 드러나는 위험성은 없었다. 지멘 은 조금 전 최후의 대장장이가 안전 보장을 해 주었다는 것을 떠 올리고 다시 최후의 대장장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최후의 대장 장이는 지멘을 도와주지 않았다.
“이봐, 두던 바둑은 어쩌고?”
지멘은 김빠지는 기분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손으로 바둑판을 가리켰고 최후의 대장장이는 남자가 조금 전 내려놓은 돌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조금 후 최후의 대장장이의 벼슬이 뻣뻣해졌다.
“어떻게!”
비명 같은 외침을 들은 지멘은 승부가 났나 보다 싶었다. 하얀 남자는 겸손하게 말했다.
“두 분이 대화를 나누시는 동안 생각할 시간이 많았습니다. 간신히 찾아냈지요.”
최후의 대장장이는 그 말에 별로 고무되지 않았다. 그는 깃털 을 세웠다 눕혔다 하며 알 수 없는 신음을 흘렸다. 조금 후 최후 의 대장장이는 포기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젠장. 좋아. 가 봐. 아, 지멘, 그 친구 조심해. 미쳤거든.”
지멘은 그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남자는
그 말에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고, 그래서 지멘은 최후의 대장장이에게 질문했다.
“어떻게 미쳤습니까?”
“잘”
그 짧은 부사어를 미쳤다는 말 앞에 붙여 봐야 이해가 넓어지 는 것은 아니었다. 지멘은 이해를 포기하고 대신 감각에 의존했 다. 지멘이 가진 수배자의 감각은 남자를 멀리하라고 말하고 있 었다. 결국 지멘은 최후의 대장장이를 불쾌하게 하더라도 남자의 동행을 거절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때 남자가 말했다.
“아실도 저를 보면 좋아할 겁니다. 지멘.”
지멘은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에서는 거짓을 찾을 수 없었다.
“좋다. 이름이 뭐지?”
“제이어 솔한.”
지멘은 그 이름이 어쩐지 낯익었다. 하지만 누군지는 알 수 없 었다. 지멘은 최후의 대장장이가 혹 제이어의 정신 상태에 관한 정보 외에 다른 정보를 주지 않을까 생각하며 그녀를 바라보았 다. 하지만 최후의 대장장이는 바둑판을 내려다보며 혼자 복기에 빠져 있었다.
다시 맥 빠지는 기분을 느끼려는 찰나, 문득 지멘은 고마움을 느꼈다.
최후의 대장장이는 딸에 대한 이야기를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 다. 딸의 끔찍한 죽음도, 지멘이 딸의 복수를 하려는 것도 잘 알 고 있었지만 그것에 관해 어떤 논평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방금 끝난 바둑을 검토하고 있었다. 그것은 즈라더가 보여 주었던 레콘의 모습이었다. 오만한 개인주의자. 그녀에겐 바둑판이 있고, 지멘은 그것을 방해할 수 없다.
지멘은 살짝 목례했다. 그녀가 보지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지멘도 개인주의자였으니까.
물론 지멘은 자신의 의문을 풀어줄 사람을 알고 있었다. 그가 헤치카의 가게로 돌아가 아실에게 제이어를 소개하자 아실은 놀 란 표정으로 말했다.
“살인 기사?”
제이어는 한숨을 내쉬었고 지멘은 그제야 당대의 유명한 기사 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사람들이 그를 살인 기사라 부르는 것은 제이어와 바둑을 둔 사람 중 네 명이 대국 직후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중 두 명은 오늘내일하는 노인이었고 한 명은 대국을 끝내고 귀가하다가 강도를 만나 죽었으며 심장마비를 일으켜 바둑판에 코를 박고 죽은 한 사람은 원래 심장이 튼튼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건조한 설 명은 사람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사람들은 두 명의 노기사가 제이어와 대국했기 때문에 수명이 단축되었으며 세 번째 기사는 패배의 충격 때문에 혼이 빠진 채 밤거리를 배회하다가 절명했으 며 오만한 태도로 유명했던 마지막 기사의 경우는 제이어가 심장 이 멎을 수밖에 없는 무서운 행마로 손수 살해한 거라 믿었다. 바둑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는 지멘이었지만 사람을 넷이나 죽인, 말 그대로 살인적인 기사의 이야기는 듣지 않을 수 없었 다. 제이어 본인은 그 호칭이 달갑지 않은 것 같았다.
“아실, 별 의미 없이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따라하는 것이 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말을 듣는 사람의 기분을 생각해 봐.”
“어, 미안해요. 레콘이라면 그런 별명을 좋아할 텐데. 강하고 거칠어 보이잖아요.”
“나는 레콘이 아니야. 그리고 바둑을 살인 기술로 생각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러면 왜 상복을 입고 있죠?”
제이어가 약간 동요했다. 아실은 씩 웃었다.
“그 하얀 옷, 죽은 네 기사를 복상하기 위해 입고 다닌다고 하 더군요. 하지만 그 옷은 아저씨가 바둑 두다가 사람을 넷 죽였다 고 광고하는 의미도 될 텐데요? 미안하지만 좀 유치하지 않아요?”
제이어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보여도 할 말은 없겠지. 하지만 내 의도는 순수해, 내 가 그분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냥 잊어 버리는 것도 예가 아니겠지. 나는 그분들을 기억하기 위해 이렇 게 입고 다니는 거야. 자,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내가 머무는 곳 으로 안내하지.”
아실은 묻는 눈으로 지멘을 바라보았지만 지멘의 대답은 그녀 를 집어 배낭 속에 넣는 것이었다. 배낭 속에서 아실은 처음본 사람을 어떻게 따라가는 건지 궁금하게 여겼지만 별다른 반대는 하지 않았다. 제이어와 아이저의 관계를 고려한 아실은 그가 황 제에게 유리한 일을 하지는 않을 거라고 추측했다. 물론 알려진 풍문의 반만 사실이라도 제이어 솔한은 예측이 불가능한 사람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