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5장] – 깨어난 불씨 6
아실은 자기 팔이 분노한다고 느꼈다. 자신의 다리가 분노한다 고 느꼈다. 자신의 심장이, 머리가, 발가락이, 거추장스럽게 부 푼 가슴이, 고양이 발톱이 긁어 내리는 것 같은 자궁이 분노한다 고 느꼈다.
자신이 그대로 산산조각 날 것만 같은 기분에 아실은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벽에 손을 짚고 세차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 계절의 극지에서 하루는 밤과 낮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잠깐씩 밝아지는 밤일 뿐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낮과 밤의 세 력이 보다 대등한 지방의 습관을 이곳에서도 유지하고 있었다. 아 실이 서 있는 곳은 그녀가 처음 보았던 실내 시장이었다. 장막과 매대, 좌판 등은 그대로였지만 서로에게 고성을 지르고 팔이 닿지 않는 거리는 무조건 달리던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몇몇 사람들은 남아 있었다. 아실은 매장 뒤편 같은 곳에 옹색 한 잠자리를 만들어 놓고 잠든 상인들을 볼 수 있었다. 어깨에 담요를 쓴 채 앉아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그들도 아실을 발견했 지만 그녀가 뭔가를 사지는 않을 거라 판단했는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사람들이 잠든 틈에 찾아올 레콘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아니면 여숙에 묵을 돈이 없는 걸까? 아실은 그들이 왜 그곳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묘하게 죄인처럼 보이는 그들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실은 기지개를 켰다. 자다가 가위에 눌린 것 때문에 뛰쳐나 왔다는 듯이, 갑자기 바뀐 잠자리 때문에 나타난 불면증을 토로 하듯이. 사람들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실은 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갑자기 그녀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아실은 주머니 속의 손으로 허리를 세게 눌렀다. 자신의 몸이 아 닌 것 같은 그 부분을 눌러 확인해야 했다. 반응은 신통찮았다. 아실은 억울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지붕이 있는 곳에 쉬게 된 날 미치광이에게 헛소리를 듣고 동료는 배신감을 선사했고 그녀 의 아랫배는 제멋대로 통증에 빠져 들었다. 제기랄!
아실은 걸었다.
잘 다듬은 포석들은 아무런 발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온갖 얼 룩으로 지저분한 모습이었지만 원래 레콘들을 대상으로 놓인 것 들이기에 포석들은 육중하고 튼튼했으며 들썩거리는 부분이나 깨 진 부분,이가 맞지 않는 부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세상 어느 곳의 시장에도 이렇게 반반한 바닥은 없다. 조금도 미끄럽지 않 았지만 아실은 빙판을 걷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그것은 그렇 지 않아도 혼란스러운 아실을 더욱 불편하게 했다. 그녀의 눈길이 이리저리 표류했다. 그러다가 낯익은 기분을 느꼈다.
아실은 헤치카의 가게 앞에 서 있었다. 돔과 그의 자랑거리인 칼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실은 헤치카의 장막을 바라보았다. 헤치카의 만년검, 일인일인.
아실은 만년검이라는 말이 상품의 내구성을 자랑하는 말이라 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일인일인이라는 운율이 잘 맞는 말이 의 미하는 것은 알 수 없었다. 아실은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그 문구를 바라보았다.
“일인일인이라는 건, 음, 한 사람에게 하나의 칼날이라는 의미야.”
아실은 고개를 돌렸다. 그녀에게 말을 건 것은 레콘 남자였다. 그 레콘은 헤치카의 장막을 바라보며 말했다.
“헤치카라는 사람이 말하고 싶은 건 그거야. 그러니까, 목숨이 하나라면, 목숨은 하나잖아, 그렇다면 그걸 위해 필요한 도구도 하나여야 한다는 말이야. 엄청나게 큰 창고에 온갖 도구를 다 갖 춰 놓는다 해도 등에 창고를 지고 다니지 못할 바에야 무슨 소용 이 있나? 가지고 다닐 수 있는 도구가 하나라면, 그 하나의 도구 가 모든 도구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미지. 도끼도 되고 톱도 되고 송곳도 되는 칼 말이야.”
아실은 이곳에서 판매되는 칼들이 왜 그렇게 온갖 도구가 뒤섞 여 있는 듯한 모양인지 깨달았다. 레콘이 계속 말했다.
“그런데 저 말이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해 준 사람이 있었어. 일인일인이라는 건, 그러니까 어떤 사람에게든 칼날 하 나는 있다는 말이라는 거야.”
레콘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통제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동요를 드러내며 레콘은 한숨 쉬듯 말했다.
“사람이라면 말이야. 누구나 평생 한 번쯤, 한 번쯤은 흐르는 시간을 찔러 멈추게 하거나 떨어지는 벼락을 두 동강 낼 수 있다 고 하더라고. 가지고 태어난 칼날 하나가 있으니까.”
아실의 목 뒤가 갑자기 서늘해졌다. 아실은 옷깃을 추슬렀다.
“재미있는 말이네요, 뭄토. 그래서?”
“나도 할 수 있어.”
“뭘요?”
뭄토는 왜 이해하지 못하냐는 듯한 눈으로 아실을 바라보았다. 그는 말을 할 듯 두 손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하지만 말이 시작 된 것은 조금 후의 일이었다.
“지멘은, 어, 지멘은, 그걸, 젠장. 배를 탔어. 배. 그래. 그걸 탔어. 나는 그걸 봤어. 이 눈으로 직접 봤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그래서 알게 되었어. 알게 됐다고. 나는 알아차렸어. 지멘 에겐 불가능이 없고 무엇이든 될 수 있어.”
뭄토는 자신의 말에 압도된 것 같았다.
“사람들은 이것이 되겠다. 또는 저것이 되겠다라고 말하지. 그 중 어떤 건 시시하고 어떤 건 굉장해. 하지만 사실은 그것들과 비교도 안 되는 것이 있어.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것이 되는 거 야. 그건 정말 굉장한 거야.”
아실은 그 표현이 바로 제이어에 대한 자신의 평가임을 떠올렸 다. 아실은 제이어의 패배자 근성이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한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뭄토의 진단은 달랐다.
“왜 지멘이 그런 것이 되었는지 생각해 봤어. 정말 벼슬이 익 을 정도로 생각해 봤어. 기어코 알아냈지. 그건 너 때문이야.”
“나요?”
아실은 왜 추위를 느꼈는지 깨달았다. 그것은 공포의 예감이었 다. 뭄토는 부리 부딪치는 소리를 심하게 내며 말했다.
“왜 지멘과 함께 다니는지 알아. 들은 적이 있어. 황제를 죽이 려는 거지? 좋아. 하지만 꼭 지멘이어야 하는 건 아니지? 네 목 적은 결국 황제니까, 도와줄 수만 있다면 동료가 누구든 상관없 지? 그렇다면 나라도 되지? 나도 그럴 수 있어. 나한테도 칼날 하나가 있을 테니까. 나도 그럴 수 있다고. 지멘만 가능하다고 하려는 건 아니지? 몇 년 동안 성공하지 못했잖아. 나는 할 수 있어. 그러니까, 황제를 죽여 주겠어. 죽이겠어. 그러면 되는 거지?”
아실은 몸을 완전히 돌려 뭄토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호리호 리하고 왜소한 모습의 뭄토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같은 레콘에 비교했을 때 그렇다는 말일 뿐 조그마한 인간 소녀인 아실에 게 그는 탑처럼 거대했다. 아실은 속삭였다.
“뭄토, 왜 우리를 따라왔죠?”
뭄토는 어리둥절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눈이 서 서히 흐려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몸을 부풀리며 그는 빠르게 말 했다.
“너를 뺏으려고.”
“뭐에 쓰려고?”
“너와 지멘을 보기 전에는 몰랐어. 아니, 그 배에 타는 지멘을 보기 전까지도 몰랐어. 내 숙원이 뭔지 말이야. 내가 뭔가를 바 라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는데, 그게 뭔지 말로 정리할 수 없었 어. 하지만 이젠 난 내 숙원을 알아. 나는 뭐든지 될 수 있는 것 이 되길 원해. 그것이 내 숙원이야. 그러기 위해선 네가 필요 해.”
갑자기 아실의 아랫배에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실 은 숨을 급히 들이쉬었다. 다시 숨을 내쉬었을 때 소녀는 자신을 향해 뻗어 오는 커다란 손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