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10장] – 바람 속에 던진 돌 4
엘시 에더리는 하텐그라쥬라는 이름에 전율했다.
하텐그라쥬. 2차 대확장 전쟁 때 철저히 파괴되기 전까지는 한 계선 이남 최대의 도시였고 모든 나가들의 성지로까지 여겨졌던 위대한 도시. 그러나 북부군의 결사적인 공격에 의해 위대한 전 설과 축적한 명예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도시 출신의 두 나가들이 북부에서 제국의 기틀을 쌓고 신생 제국을 건설했다는 사실은 역사가 사람들에게 던져 주는 고민거리이긴 하지만, 이제 그곳은 도시 연합에게 교훈을 주는 도시이며 아라짓 제국 최남단 의 도시라는 의미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햇빛에 달궈진 넝쿨 속에 잠들었다가 울부짖는 밤 짐승 들의 노랫소리에 깨어나 덩달아 호곡하는 그 폐허의 도시에는 작 은 비밀이 있다. 아라짓 제국 최고의 비밀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 비밀성의 수준은 상당히 높다. 그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은 황 제와 삼고뿐이니까. 태위가 느닷없이 도망치지 않았다면 엘시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태위가 도망친 후 락신 치올 사도 는 엘시에게 그 비밀을 알려 주었다.
‘그곳에는 그녀가 있다.’
엘시가 머릿속에서도 대명사로밖에 부를 수 없는 사람이 그곳 에 있다. 엘시는 그 사실이 비밀이어야 하는 이유를 충분히 짐작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신중하기로 소문난 사도가 왜 자신에게 그 비밀을 알려 주는 것인지도. 그것은 사도나 천경유수보다는 태위 가 알아두어야 하는 비밀이었고 엘시는 태위를 대행하고 있었다. 엘시는 아무 질문도 던지지 않았고 사도는 그 사실에 만족했다. 그리고 엘시는 자신이 그 비밀을 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려 애 썼다.
‘그런데 지멘이 그 비밀을 안다는 것인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엘시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하텐그라쥬? 뇌룡공과 아스화리탈을 보러 가기라도 하는 겁니 “까?”
말을 꺼낸 엘시는 그것이 스카리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라는 것 을 떠올리고는 불쾌감을 느꼈다. ‘뇌룡공에게 아스화리탈을 주는 거지.’ 그 말이 기억에 남아 있었던 듯하다. 엘시는 도움이 되지 않는 불쾌감을 재빨리 떨치고 지멘의 안색을 살폈다. 그리고 지 멘의 얼굴 또한 불쾌감과 비슷한 것으로 물들어 있다는 사실에 의아함을 느꼈다.
지멘은 벼슬이 찢어질 것 같은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엘시를 상대해야 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아실이었다. 지멘은 자신이 엘시 내부에 있는 무엇인가를 건드렸다는 것 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밖으로 끌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같은 것은 지멘에게 헤엄 을 치는 방법에 대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일은 아실의 것이 다. 맹세를 했다는 사실을 후회하는 지멘의 심정은 그의 좌절을 잘 나타내는 것이다. 지멘은 엘시를 구타하거나 협박해서 그것을 끌어낸다는 방법 외에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물론 그가 한 맹세가 그를 구속하고 있었다. 지멘은 최대한 아실처럼 말하려 했다.
“제기랄. 거기 간 김에 그것도 보면 좋겠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엘시를 본 지멘은 그만 벽에 머리를 찧고 싶었다. 욕설을 섞는 버릇까지 따라할 이유는 없었다. 지멘 은 자신이 저지른 말도 안 되는 실수가 엘시의 기분을 상하게 하 고 이 대화를 끝장낼 거라는 두려움 속에서 대장군을 바라보았 다. 다행히 대장군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른 이유가 있다는 말이군요.”
“어, 그래. 있지.”
“무슨 이유입니까?”
‘나도 그것이 알고 싶어.’지멘은 자기도 모르게 방 구석에 놓 여 있는 망치 쪽을 바라보았다. ‘저걸 이용해서 네 머릿속에서 그걸 끌어내고 싶단 말이야…… 아차!’ 또 다른 실수였다. 지멘 은 엘시가 당장 일어나 밖으로 나가 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지멘 이 맹세를 잊지 않았다고 외치려 했을 때 엘시가 말했다.
“그걸 쥐고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면, 그래도 됩니다.”
“응?”
“그런 레콘들도 있지요. 무기를 잠시도 손에서 못 떼는 레콘 말입니다. 당신이 맹세를 지킬 거라고 믿으니 쥐어도 됩니다.”
“그래도 되겠어?”
“무기를 쥐고 있든 그렇지 않든 당신이 위험한 건 마찬가지입 니다. 상관없습니다.”
엘시의 호의는 지멘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었지만 그것을 알 려 줄 필요도 없었다. 지멘은 망치를 집어 들었다. 어쩌면 엘시 의 오해처럼 마음이 안정될지도 모르니까. 지멘은 엘시를 배려한 다는 뜻을 보이기 위해 망치를 거꾸로 쥐어 무릎에 얹었다. 그리 고 머릿속으로는 모호한 말을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한 가지 걱정이 되는군.”
“무슨 걱정입니까?”
“내가 그 이유를 말하면 이것이 갑자기 군사 행동으로 바뀔지 도 모른다는 것.”
지멘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엘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엘시 가 미간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는 더욱 긴장했다. 엘시가 말했다.
“당신은 제국군이 동원될 만한 이유로 하텐그라쥬에 가고 있다 는 겁니까?”
엘시가 질문으로 대답한 것은 지멘을 미칠 지경으로 만들었다. 질문 대신 말을 하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빳빳하게 서려 는 벼슬을 억누르기 위해 지멘은 그냥 가려워서 그런다는 것처럼 벼슬을 내리긁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는 아실에 대해 생각했다. 아실이라면 어떻게 대답했을까.
“내가 그런 의심을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엘시의 정신 상태에 대해 지멘이 안다면 그는 세상에 공정함이 있다는 확신을 얻을 것이다. 엘시의 머릿속은 지멘의 머릿속만큼 이나 분주했다. 엘시는 순간적으로 무수한 가능성을 떠올렸고 그 것들을 재빨리 폐기했다. 확실한 사실은 두 가지뿐이다. 지멘은 황제를 죽이고자 한다. 하텐그라쥬에는 그녀가 있다. 그런데 그 두 가지 사실을 연결하는 다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낭패감 속에 서 엘시는 엉뚱한 생각마저 떠올렸다. ‘이곳의 유료도로당에 부 탁해서 그 사실들 사이에 유료 수도라도 뚫어 달라고 해야 하 나.’ 자신의 엉뚱함에 책망을 보내던 엘시는 갑자기 어떤 관념이 번개처럼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엘시가 본 것은 그 관념의 잔광 이었다. 엘시는 다급하게 그것을 역추적했다. 유료 수도-그리 미 유료 수도-첫 번째 고객은 남부로 이동하던 제국군-치천 제의 심장 적출 적국에 보관되고 있는 치천제의 심장병.
치천제의 심장병.
지멘의 숙원은 황제 살해.
엘시는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지멘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조금 벌린 대장군의 모습을 놓칠 만큼 눈이 나쁘지도 않았 다. 자신의 감정이 이미 노출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엘시는 더 이 상 그것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는 노여움과 불안을 여과 없이 드러내었다. 지멘은 그 급격한 변화에 당황했다.
“잘못 생각한 겁니다. 지멘.”
사실대로 말하면 아무 생각이 없는데. 지멘은 무표정을 애써 유지했다. 엘시가 말했다.
“시련이 당신을 도와줄 것 같습니까? 나가들은 이성적인 사람 입니다. 시련이 그 작은 일 때문에 아라짓 제국과 전쟁을 벌일지 도 모르는 일을 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왜 갑자기 도시 연합이 언급되는 것인지 알 리 없는 지멘은 무표정을 유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 무표정은 엘시를 초조하게 했다.
“만에 하나 시련의 가장 극렬한 회고주의자를 당신이 만날 수 도 있겠지요. 세상에는 온갖 사람이 다 있으니 시련에도 그런 사 람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당신은 여전히 폐하의 심장병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들도 모르니까.” 지멘은 펄쩍 뛸 뻔했다. 무릎 위에 망치를 얹어 두지 않았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지멘은 불과 얼마 전 황제의 심장병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참여한 대화는 아니었지만 지멘은 그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최후의 대장간에서 아실과 살인 기사가 나눈 대화에서 심장병이 거론되었다. 당시 살인 기사는 알려진 바와 달리 황제 의 심장병은 지도그라쥬에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남 겨 둔 쪽지에는 하텐그라쥬를 주목하라는 내용이 있었다.
그런데 황제의 대장군이 지금 심장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지멘은 더 이상 의식적인 방법으로 침착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가 여전히 침착했던 것은 충격 때문이다.
“그렇다면 너는 무엇을 걱정하고 있나.”
“내가 걱정하는 것은 당신의 불가능한 소망 때문에 그분이 다치는 것입니다.”
‘그분은 또 누구야, 빌어먹을!’
꺼낼 수 없는 말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지멘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엘시가 먼저 말했다. 그는 지멘에게 경고를 보냈다.
“지멘, 나는 당신의 숙원에 절대로 찬성할 수 없습니다. 하지 만 숙원을 추구하는 행위 자체는 레콘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 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반대하지만 당신을 경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당신을 경멸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의혹을 느낍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그분은 아무 관련이 없습니 다. 당신은 불가능한 소망을 품고 있습니다. 폐하의 심장병과 그 분을 교환할 수는 없습니다. 시련에서 교환에 응할 수 없기 때문 입니다. 그들도 모릅니다. 그것은 거짓 없는 사실입니다.”
지멘은 가까스로 꺼내도 무방한 말을 떠올렸다.
“두고 보지.”
“두고 봅시다!”
엘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 가지 감사해야겠군요. 나는 조금 전 이 추적행을 계속해야 하나 의문을 느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신과 관련 없습니다. 하지 만 이제 그 의문은 사라졌습니다. 나는 당신을 저지할 겁니다.” 이번에야말로 두고 보자는 말이 어울리겠지만 그것은 이미 했 던 말이다. 그래서 지멘은 말없이 엘시를 노려보았다. 엘시가 밖 으로 나갈 때까지.
엘시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지멘은 뒤로 쓰러지듯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아서 엘시를 만나기로 한 것은 잘한 일 같았다. 긴장감이 탁 풀리면서 지멘은 쏟아지는 졸음을 느꼈다. 바깥에 네 명의 레콘 추적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간단히 무시하며 지멘은 잠들었다.
지멘의 방을 나온 엘시가 본 것은 복도에서 분개한 얼굴로서 있는 자신의 몸종이었다. 이레는 엘시를 보자마자 말했다.
“가주님, 저는 붙잡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하려고 했습니다. 네 명이라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문제는 레콘 네 명이라는 것이지요. 저는 도저히 그 무신경한 자들을 붙잡아 둘 수 없었습 니다.”
“무슨…… 지금 레콘들을 여기 붙잡아 둘 수 없었던 것에 대 해 사과하는 거냐?”
“예. 그렇습니다. 가주님께서 그런 위기에 처해 계신데 어떻게 가서 술이나 마시자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저는 도무지 이해 할 수 없었습니다.”
엘시는 따라오라는 듯 앞서 걸어가며 말했다.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없구나, 이레. 그들이 왜 복도에 할 일 없이 서 있어야 하느냐. 지멘은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에 걸고 맹세했다.”
이레는 황급히 주인의 뒤를 따라가며 자신의 정당성을 피력했다.
“가주님, 그자가 존엄하신 폐하를 두려워하지 않는데 어떻게 여신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자기 여신의 신전이 어디 있는지도 모 르는 것이 레콘이잖습니까.”
엘시는 걸음을 멈췄다.
그는 약간 낯설은 얼굴로 몸종을 바라보았다. 백작은 황제와 신 사이에 계급이 있다는 식의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둘은 서로 무관한 존재다. 하지만 이레의 논리에는 그런 관념이 담겨 있었다. 만물의 지배자인 황제를 무서워하지 않는데 레콘을 보살피는 여신을 무서워하랴? 신전이 어디 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 은 여신인 것을. 엘시는 그것을 당장 반박할 수 없다는 사실이 기묘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보다 탓하기 쉬운 잘못을 지적했다.
“나는 가주가 아니다. 이레.”
“죄송합니다, 주인님.”
“유념해 두는 것이 좋겠다. 네가 가주니 뭐니 하면 두억시니 장군이 혼동을 일으킬지도 모르니까.”
이레는 눈을 크게 떴다.
“예? 두억시니 장군…… 토프탈 상장군님 말씀입니까?”
“그래. 서신을 써 줄 테니 베로시 토프탈 상장군에게 가서 전 해라. 그리고 너는 그곳에 있도록 해라. 다음 연락은 아마 뱀단지로 보낼 것이다.”
이레는 얼굴 가득히 거부감을 담아 보였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의 몸종입니다. 주인님의 곁을 그렇게 오 래 떠나 있을 수는 없습니다. 꼭 그래야만 합니까?”
“꼭 그래야만 한다.”
더 이상의 대답은 있을 수 없었다. 이레는 방으로 향하는 엘시 를 말없이 따랐다.
그 시각, 쵸지는 약간 취기가 오른 주테카로부터 정의의 고귀 함에 대한 연설을 듣고 있었다. 그는 조용한 술자리를 좋아하는 편이었기에 주테카에게 부리 좀 닫아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 지만 그가 정말 원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쵸지는 론솔피가 감개 무량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더 보고 있기 힘들 었다. 하지만 론솔피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난 몰랐어.”라고 말하자 쵸지는 그만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
술이나 마시자는 심정으로 약간 떨어져 있는 주전자를 끌어 오 던 쵸지는 고개를 숙인 채 상념에 잠겨 있는 준람을 보았다. 쵸 지는 준람마저 론솔피와 같은 증세를 보이는 것인가 하는 걱정 속에서 그를 바라보았다. 준람은 그 시선을 알아차렸다.
“응?”
“정의는 중요하지.”
“뭐? 무슨 소리야?”
“감사합니다.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이여. 아니야. 신경 쓰지마. 무슨 생각을 골똘하게 하고 있는 것 같군.”
“지멘.”
“지멘, 뭐?”
“아냐.”
쵸지는 부리를 슬쩍 부딪치고는 잔에 술을 따랐다. 준람도 자 기가 한 짓이 머쓱했는지 괜히 수염볏을 주물럭거리며 주테카와 론솔피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대화를 잠시 경청한 준람은 쵸지가 왜 정의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는지 알았다. 술잔을 비운 쵸지가 말했다.
“준람, 뭐 하나 물어보자. 다섯 명이 전부 좋아? 그러니까 부인 말이야.”
준람은 갑자기 벼슬을 경직시켰다. 쵸지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뺏을 생각 같은 건 조금도 없으니까 벼슬 풀어. 이거야 원, 누가 기혼자 아니랄까 봐. 그냥 물어보는 거야.”
“너도 결혼한 다음에 신부 탐색자에게 그런 말 들어 봐라. 그 커다란 벼슬로 천장을 찌르게 될 테니. 다섯 명이 전부 좋냐니. 그건 무슨 뜻이야? 좋으니까 결혼했지.”
“그거야 그렇겠지. 하지만 다섯 명이 똑같이 좋은 건 아닐 텐 데. 거, 왜 사계절에도 좋아하는 계절이 따로 있는 법이잖아.”
“그런 법 없어.”
“응?”
“그런 법 없다고. 겨울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부리에 고드름 맺힐 지경이 되면 빌어먹을 겨울은 꺼지고 빨리 봄이 오라고 말 할걸. 여름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더위 때문에 깃털 다 뽑아 버리고 싶은 지경이 되면 도대체 올해 가을은 오지 않을 작정이 냐고 투덜거릴 테고.”
“그렇지.”
“난 내 아내들이 전부 좋아. 모든 계절을 한꺼번에 가지고 있는 셈이지.”
쵸지는 부리 옆을 긁적거리며 준람의 말에 대해 생각했다.
“그럼 아내들은 너를 좋아해?”
“이거 점점 불쾌해지는데.”
“사과하지. 아무 뜻 없어. 난 그냥 아내들은 가지고 있는 계절 이 하나뿐이라는 점이 이상해서.”
준람은 어린 레콘하고는 말 못하겠다는 기분을 느꼈다. 쵸지의 나이가 특별히 어린 것은 아니지만 나발칸의 레콘이 보기에 숙원 추구자도 아닌 주제에 아직 결혼 생활을 해 보지 않았다면 그것
은 어린 레콘이다. 준람은 타이르듯 설명했다.
“그 대신 아내들에게는 언제나 더 좋은 계절이 오잖아.”
“더 좋은 계절?”
“그래. 나는 언제든 지거나 죽을 수 있어.”
“아아, 신부 탐색자.”
“맞아. 능력 있는 남자는 모든 계절을 가질 수 있고 능력 있는 여자에게는 언제나 더 좋은 계절이 오게 되어 있는 거야. 그게 남자하고 여자의 차이야. 그리고 그것이 자연스럽지.”
“자연스럽다고?”
“자연스럽지. 더 강하고 더 빠른 수컷은 지금을 다루기 좋게 되어 있어. 그리고 새끼를 낳는 암컷은 미래를 다루기 좋게 되어 있지. 그러니 수컷에겐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암컷에겐 점점 더 좋은 것이 찾아오게 하는 우리 결혼이 좋은 거야. 인간들에게 참 견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 녀석들의 결혼은 좀 이해하기 어려워. 인간들의 결혼에서는 수컷은 만족할 수 없고 암컷에겐 미래가 없 어. 바람을 피운다는 말 알아?”
“아, 그래. 알아.”
“인간들이 바람을 피우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야. 잘 보면 알 수 있어. 인간 남자는 자기 아내보다 훨씬 모자란 여자하고도 바 람을 피우지. 그냥 다른 계절이 그립기 때문이야. 하지만 인간 여자는 보통 자기 남편보다 훨씬 괜찮은 남자하고만 바람을 피우 지. 더 나은 계절을 원하기 때문이야.”
“그렇게 되는 건가. 흐음.”
쵸지는 멍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어쩐지 론솔피 처럼 행동한다고 생각하면서 주위를 둘러본 쵸지는 휴게실에 있 는 인간들이 준람의 말에 한마디 참견하고 싶다는 듯이 꿈틀거리 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 레콘과 언쟁을 벌일 만 큼 절실한 사람은 없었다. 준람이 말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야?”
“글쎄. 나는 정말 좋은 것은 하나뿐이라고 생각해.”
“나늬 같은 여자를 찾느라 아직까지 결혼하지 않았다고 했지?”
“그래, 맞아.”
“참견하고 싶지는 않지만, 네가 남자라면 그건 불가능한 소망 이야, 왕벼슬 어떤 여자를 고르든 다른 여자가 그리워질 때가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나늬는…………….”
“전설이지.”
쵸지는 할 말이 없었다. 나늬에 대한 설명은 그녀가 모든 선민 종족에게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뿐이다. 그녀가 마침내 발견되었 다는 이야기 같은 것은 없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쵸지도 아마 웃어 버릴 것이다. 준람의 말대로 그것은 전설이다.
“네 인생 네 것이지만, 쓸데없는 전설이나 막연한 기대로 인생 낭비하는 거 나는 별로 찬성하고 싶지 않아. 조금이라도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결혼해 달라고 요청해. 옆에 남편이 있으면 싸워. 그녀를 얻었으면 목숨 걸고 그녀를 지키고. 그러다가 죽으 면 그게 제대로 산 거야. 나늬? 글쎄. 나는 그런 맹랑한 이야기 에는 별로 관심이 없지만, 만약 나늬 같은 여자를 찾았는데 그 곁에 남편이 있으면 어쩔 테지?”
“남편?”
“그래. 그 남편은 나늬 같은 아내 지키느라 엄청나게 싸웠을 걸. 그렇게 강하지 못하다면 더 강한 남편에게 뺏겼을 테고. 그 러니 네가 찾은 나늬 곁에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편이 있을 거야. 그런데 그때까지 그 여자 찾느라 제대로 싸우지도 않은 네가 어떻게 이기겠어?”
쵸지는 신음을 흘릴 뻔했다.
“음. 그 생각은 못해 봤군.”
벼슬 찢어지는 지적이었다. 불과 한나절 전 쵸지는 지멘 앞에 서 자신을 무력하게 만드는 실수를 범했다. 그것은 기술이나 힘 과 무관한 순간이었다. 단지 지멘이 그보다 더 노련했다는 사실 이 그런 순간을 만들어 내었다. 쵸지는 조금 다급하게 질문했다.
“나늬를 찾을 때를 대비해서라도 싸우라는 거지. 하지만 끝내 나늬를 찾지 못한다면? 아니면 나늬를 찾기 전에 내가 죽으면?”
“누구는 안 그래?”
“무슨 소리야?”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건 다 마찬가지라고. 너만 그런 것이 아냐. 아무도 모르는 거야.”
쵸지는 납득할 수밖에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어쩐지 여기저 기서 많이 들어본 말의 변형처럼 들렸지만 진부성이 진실성을 훼손한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고개를 끄덕이려던 쵸지는 갑자기 어떤 이름을 떠올렸다.
“지멘은 안 그렇잖아.”
지멘의 이름은 준람을 불쾌하게 했다. 하지만 조금 전 지멘과 술 한 잔을 나눈 그가 지멘의 이름 때문에 화를 내는 것도 어울 리지 않는 일 같았다. 준람은 냉정하려 애쓰며 말했다.
“왕벼슬, 지멘이 어쨌다는 거지?”
“타이모가 죽자 지멘은 부인들을 버렸어. 지멘은 부인들을 얻 고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생각한 것 아닐까?”
더 참기 어려웠다. 쵸지가 그에 대한 별다른 반감 없이 말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지만 준람은 지멘이 버린 고라이를 생각하지 않 을 수 없었다. 준람은 탁자를 내리치고 싶은 것을 억눌렀다. 그 가 싸움을 벌이기라도 한다면, 그렇게까지 하지 않더라도 추적대 의 분위기를 어지럽힌다면 엘시에게 폐가 될 것이다. 심지어 지 멘에게 역공의 기회를 허락할 수도 있다.
“왕벼슬, 내가 알기로 현명한 사람은 조언이라는 게 받는 사람 에게도 하는 사람에게도 고통임을 아는 사람이야. 하지만 나는 내가 아는 대로, 내가 겪은 대로, 내가 믿는 대로 말했어. 네게 친절을 베풀기 위해서였어. 하지만 네가 조금 전 거론한 지멘의 과거사는 내게 의미가 큰 일이야. 게다가 좋은 의미도 아니지. 몰라서 그랬던 것이겠지만 사과는 받아야겠군.”
쵸지는 아뿔싸 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사과하겠어. 내가 생각이 짧았어.”
“알았다면 됐어.”
준람은 화를 가라앉혔다. 그는 쵸지에게 다시는 해당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않을 거라 믿었다. 그 믿음은 틀리지 않았다. 쵸지는 준람 대신 지멘에게 질문해야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탐욕의 안개와 위선의 그림자에 뒤덮여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이 어두운 세상을 밝혀 주는 유일한 등불인 정의에게 연 거푸 건배를 바치던 주테카와 론솔피가 나가떨어지고 준람이 잠 을 청하기 위해 물러간 후에도 지멘은 나타나지 않았다. 휴게실 의 마지막이자 제정신인 손님이 되어 기다리던 쵸지는 결국 지멘 을 만나는 것을 다음 날로 미루기로 했다. 쵸지는 바닥에 쓰러진 론솔피와 주테카를 못 본 척하며 떠남으로써 휴게실 담당 당원에 게 깊은 배신감과 좌절감을 안겨 주었다. 홀로 남은 당원은 우선 레콘들의 몸을 흔들어 보기로 했다. 건물을 흔드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당원은 죽을 힘을 다해 주테카의 벼슬을 잡아당겼다. 하 지만 주테카가 귀찮다는 듯이 휘두른 손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당 원은 자신이 수명 단축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음을 깨달았 다. 물동이를 이용하는 전통적인 기상법은 이 경우 도저히 적용 할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당원은 그냥 두 사람을 휴게실에 새 로 생긴 장식품으로 간주하기로 했다. 현명한 결정이었다.
주테카와 론솔피가 다시 일어난 것은 다음 날 새벽이었다. 휴 게실을 청소하기 위해 일찍 일어난 휴게실 담당 당원이 바닥에 누워 있는 두 레콘을 답답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준람이 성큼 걸어 들어왔다. 준람이 주테카에게 곧바로 걸어가는 것을 본 당원은 기어코 저들이 일어나겠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의 기대대로 되었지만, 그 방식은 예상외였다. 준람은 레콘의 무지막지한 힘을 이용하여 주정뱅이들을 깨우지 않았다.
“호리병!”
그 후 오랫동안 당원은 준람이 마법사라는 가설을 포기하지 못 했다. 곤드레만드레 취한 레콘들을 말 한마디로 깨울 수 있다는 것은 마법 외엔 설명이 안 된다.
벌떡 일어나긴 했지만 아직 정상적인 상태라고 할 수 없는 주 테카와 론솔피는 여숙 앞의 마당까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끌 려 갔다.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던 쵸지는 그들의 배낭을 던져 주 었다. 얼떨결에 배낭을 받아 든 주테카는 그것을 먹으려 했다. 쵸지가 만류했다.
“먹지 마. 지멘이 출발했다.”
“이런 잔인무도한 놈. 해장할 틈도 안 주다니.”
론솔피 또한 지멘을 붙잡으면 술을 잔뜩 먹이고 숙취에 고통스 러워 하게 해 주겠다는 협박이 맞는 것인지 의심스러운 다짐을 스스로에게 하고 있었다. 제정신이 아닌 두 사람 때문에 아침이 번거롭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준람은 두 손으로 솥을 들고 걸 어오는 엘시를 보았다. 엘시는 꽤 먼 곳에서부터 말했다. “솥에 든 것은 국입니다.”
긴장하던 레콘들은 그 말에 안도했다. 엘시는 주테카와 론솔피 앞에 솥을 내려놓았다. 그곳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 다. 구수한 냄새에 두 레콘은 만족했다.
“속 풀고 출발합시다.”
론솔피와 주테카가 번갈아 솥을 비우는 모습을 보던 쵸지는 의 아해하며 말했다.
“그런데 왜 네가 이걸 들고 온 거지? 몸종은 어디 갔어? 지멘을 추적하러 갔나?”
“아닙니다. 내 몸종은 급히 전달할 서신을 가지고 어제 오후에 떠났습니다.”
“곧 돌아오나? 딱정벌레가 한 마리면 정찰하기가 힘들 텐데.”
“빨리 돌아오지는 않겠지만 문제는 없을 겁니다. 지멘도 천천히 걸어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알아?”
“보이니까.”
엘시는 손을 들어 산 아래쪽을 가리켰다. 어둑어둑한 산 아래 를 본 쵸지는 황야를 따라 걸어가고 있는 일군의 사람들을 발견 했다. 가운데 걷고 있는 것은 검은색이 두드러지는 지멘이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 말을 탄 유료도로당원들이 있었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 그들은 횃불을 들고 있었고 그래서 모습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같은 방향을 보던 준람이 말했다.
“서두르지 않는군.”
“예. 힘을 비축하는 것 같습니다.”
“왜 힘을 비축하지?”
“내 생각이 맞다면 포텐 사막까지 휴식 없이 달려가려고 그러는 겁니다.”
“포텐 사막? 사막에 무슨 볼일이 있다고.”
“거기가 목적지가 아닙니다. 지멘은 사막을 지나쳐 계속 남하 할 겁니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데?”
“하텐그라쥬.”
준람은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지멘 쪽을 바라보았다. 국솥을 주 테카에게 건네던 론솔피 또한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허! 잘하면 제국 종단하겠네. 한계선 남쪽으로 가는 거라면 나가도 볼 수 있겠군. 나가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데. 지멘에게 고맙다고 해야겠어.”
엘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론솔피. 당신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되도록이면 나가는 구경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왜? 나가들은 레콘을 싫어하나?”
“아니요. 그 전에 지멘을 잡았으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되도록이면 오늘 내에 지멘을 잡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 에라도 지멘이 한계선을 넘는 것은 허락할 수 없습니다.”
“한계선을?”
“예. 만일 지멘이 한계선을 넘는다면 나는 제국군을 출동시킬 겁니다. 내 몸종이 떠난 것도 그런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겁 니다.”
론솔피는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설마 군단이 움직이는 거야?”
론솔피의 말을 들은 세 명의 레콘은 심각한 얼굴로 엘시를 바 라보았다. 그들 모두는 한때 군대에 몸을 담았고 따라서 제국 위 기상황이나 그에 준하는 사태가 아니라면 군단이 움직이지 않는 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군단이 움직인다는 것은 한마디로 전 쟁이다. 엘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독립 중대 몇 개 정도는 움직 여야 할 겁니다.”
“왜? 지멘이 도시 연합으로 도망칠까 봐?”
“미안하지만 그 이유는 알려 줄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지멘이 하텐그라쥬에 절대로 도달해서는 안 된다는 것뿐입니다.”
예비역들인 추적자들은 그것이 군사 기밀일 거라 짐작하고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주테카는 남은 국을 황급히 들이켜고 나 서 솥을 아무 곳에나 내려놓았다.
“됐어. 가자.”
엘시는 고개를 끄덕이고 딱정벌레에 올랐다. 다섯 명의 추적자
들은 도로와 하늘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달려 나갔다.
그러나 출발의 박력은 반 시간도 계속되지 않았다.
추적자들은 곧 지멘의 뒤편에 도달했고 지멘과 유료도로당원 들은 속도를 높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추적자들은 어제의 일을 재현해야 했다. 그들은 터벅터벅 걸어서 지멘과 유료도로당원들을 따랐다. 물론 엘시 또한 땅으로 내려와 딱정벌레를 걷게 해야했다.
엘시는 딱정벌레의 등 위에 꼿꼿하게 앉아서 참을성 있게 앞쪽 을 바라보았지만 준람은 짜증스러워 했고 쵸지는 초조해했으며 주테카와 론솔피는 아주 정나미가 떨어진다는 표정으로 지멘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네 명의 레콘들은 거의 비슷한 시각에 똑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공격은 못하더라도 지멘이 신나게 달려 주면 좋겠다고. 하지만 지멘은 해가 떠오르고 봄의 오전이 부드 럽게 흘러갈 동안 한결같이 느긋한 속도로 걸어갔다. 참다 못한 주테카가 도로 옆의 들판을 통해 지멘을 앞질러 가서는 매우 건 전하지 못한 손짓과 욕설을 퍼부으며 도발했을 때도, 뒤를 이어 받은 론솔피가 “이놈의 도로, 확 없애 버린다!” 같은 기괴한 협 박을 할 때도 지멘의 걸음걸이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격분을 참 지 못한 론솔피는 지멘의 앞쪽으로 부리나케 달려가서 도로 옆의 흙을 도끼창으로 퍼다가 도로 위에 뿌리기 시작했다. 보기 딱한 광경이었다. 유료도로당원들은 엘시에게 성난 어조로 도로를 훼 손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항의했고 엘시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엘 시에게 원상 복구를 명령받은 론솔피는 으르릉거리며 흙을 치웠 다. 그가 흙을 치운 자리를 지멘이 통과하는 모습을 보던 론솔피 는 그만 발작을 일으킬 뻔했다.
정오가 다가오자 운동량이 별로 없었는데도 네 명의 레콘들은 제 분을 참지 못해 지쳐 버리고 말았다. 유료도로당원들은 분노 한 레콘들이 유료도로당의 규칙을 무시하기로 결심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빠졌고 그 걱정은 곧 공포로 바뀌었다. 참다 못한 그들은 지멘에게 빨리 걸으면 안 되겠냐고 제안했지만 지멘은 그 것을 무시했다. 결국 모든 사람이 지멘을 미워하게 되었다. 지멘 에 대한 공분에 휩쓸리지 않은 것은 말들과 딱정벌레, 엘시뿐인 것 같았다. 엘시는 그럴 줄 알았다는 태도였고 정오가 되자 태양 의 높이를 살펴보고는 도로 옆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추적자들 에게 식사하고 따라가자고 말했다. 레콘들은 당황했다. 그들은 식사하는 동안 지멘이 갑자기 달려가면 어쩌냐는 눈으로 엘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조금 후 그들은 더욱 당황했는데, 엘시가 딱 정벌레에서 내리는 순간 지멘도 도로 가장자리 쪽에 앉아 배낭에 서 먹을 것을 꺼냈기 때문이다. 유료도로당원들과 레콘들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각자 지멘과 엘시를 바라보았다. 결국 두 무리 는 30미터쯤의 거리를 둔 채 점심을 먹었다.
식사를 끝낸 후에도 지멘은 서둘러 출발하지 않았다. 그는 추 적자들을 흘끔 바라보고는 오전과 똑같은 속도로 걸었다. 레콘들 은 빨리 지멘을 따라가자고 성화를 부렸지만 엘시는 이레가 남겨 놓고 간 짐 속에서 조그마한 바둑판과 작은 돌통을 꺼낸 후에야 딱정벌레를 도로 위에 올렸다. 그리고 레콘들이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엘시는 딱정벌레의 넓은 등 위에 바둑 둘 준비를 갖추었다. 딱정벌레가 도로를 따라 걸어가는 동안 엘 시는 혼자서 바둑을 두었다.
주테카는 약간 겁먹은 얼굴로 “바둑을 혼자서도 두냐?”고 다른 레콘들에게 질문했는데 그 어조가 마치 엘시의 정신병을 발견했 다는 듯한 투였다. 다행히 준람은 건축업 때문에 인간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기에 바둑이라는 놀이에 대해서도 피상적으로나마 알 고 있었다. 준람은 언젠가 다른 사람과 두었던 바둑을 혼자서 복기하고 있다고 설명하여 주테카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준람도 엘 시가 왜 그러고 있는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날 안에 지멘을 잡아야 한다고 말했던 것은 엘시였다. 론솔피는 못 볼 광경이나 되는 것처럼 엘시를 외면했고 쵸지는 바둑판을 기웃거렸다. 혼자 둬도 즐거울 만큼 바둑이 재미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에서 시작한 행동이지만 움직이는 바둑판에 놓인 검고 흰 돌을 보고 있으니 재미는커녕 멀미가 날 것 같은 당혹스러운 느낌만 들었다. 쵸지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더 이상 바둑판을 바라보지 않았다.
태양이 남쪽보다는 서쪽에 있다고 느껴지기 시작하는 시각, 엘 시는 바둑판 위에 있는 돌들을 돌통에 쓸어담았다. 돌통의 마개 를 단단히 닫은 그는 바둑판과 돌통을 도로 짐 속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준비합시다.”
주테카가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대관식?”
“all?”
“옛날 이야기를 들으니 인간들은 그런 병에 걸린다던데.”
“제왕병자 말이군요.”
“그래. 제왕병. 나는 네가 자신을 바둑왕이라고 부를까 봐 걱 정하고 있었어.”
엘시는 그 내용의 불충을 꾸짖어야 하는지 그냥 농담으로 받아 들여야 하는지 잠깐 고민했다. 결국 농담으로 받아들이기로 했 다. 따질 시간이 별로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낮은 목 소리로 속삭였다.
“지금까지와 똑같이 행동하십시오. 지멘이 곧 도로 밖으로 뛰쳐나갈 겁니다.”
말을 끝낸 엘시는 자신이 너무 큰 소망을 품었다고 생각했다. 잔뜩 늘어져 있던 네 명의 레콘들이 일제히 깃털을 일으켰던 것 이다. 서로의 모습을 확인한 네 사람은 당혹하여 엘시를 쳐다보 았다. 엘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지점에서 뛰쳐나가면 밤이 올 때 아픽스 산지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밤새도록 산속을 달린 다음 새벽에 몸을 숨기고 잠을 청할 테지요. 그리고 우리들의 추적을 피해 포텐 사막 쪽으로 치 달릴 겁니다. 지멘의 계획은 대충 그런 것… 출발!”
엘시의 외침과 지멘의 거대한 도약 소리는 동시에 들렸다. 네 사람이 고개를 돌렸을 때 지멘은 이미 도로 남쪽으로 수백 미터 는 떨어진 곳에서 화살처럼 달리고 있었다. 네 사람은 각자 괴성 을 지르며 그 뒤를 향해 질주했다. 그리고 엘시도 살아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안도하는 유료도로당원들을 뒤로 한 채 하늘로 날아올랐다.
열두 시간 뒤, 지멘은 아픽스 산지의 남단에서 바위틈에 몸을 숨긴 채 헐떡거렸다.
해가 남아 있는 동안 추적자들은 미친 듯이 지멘을 따라왔다. 딱정벌레가 머리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기에 지멘은 감히 몸 을 숨길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는 태양이 떠 있는 동안 줄곧 달 렸다. 몇 번 잡힐 뻔한 위기가 있었지만 호리병과 행운의 도움으 로 일몰까지 버틸 수 있었다. 지멘은 그것으로 한숨 돌릴 수 있 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곧 당황했다. 그가 보인다는 듯이 똑바로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해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지멘은 주저 없이 달렸다. 그 발소리를 들은 추적자들은 다시 맹렬하게 따라왔다. 밤의 어둠 때문에 그와 추적자 모두 속도가 느려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숨가쁜 속도였다.
새벽이 두어 시간 남았을 무렵 지멘은 겨우 상황을 이해했다. 그는 시험 삼아 몸을 숨겼다. 망치와 호리병을 꽉 쥔채.
지멘의 예상과 바람대로 추적자들은 그를 지나쳐 달려갔다. 지멘은 발소리가 멀어진 후에야 꾹 참았던 호흡을 거칠게 몰아 쉬었다. 지멘을 보고 쫓아온 것이 아니다. 그가 어디로 갈지 알 고 있었던 것뿐이다. 지멘이 하텐그라쥬로 간다는 것을 알고 있 는 엘시는 지멘이 선택할 길을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지 멘은 자신의 부주의함에 화가 났다. 엘시에게 목적지를 가르쳐 준 덕분에 몇 가지 심상치 않은 정보들을 들을 수 있긴 했지만 그것을 정리하여 사실을 가르쳐 줄 아실이 없는 이상 지멘에겐 쓸모 없는 정보였다. 따라서 엘시에게 목적지를 가르쳐 준 덕분 에 얻게 된 것은 골칫거리뿐이다.
그럴 가능성은 적지만, 지멘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추적자들이 다시 되돌아올지도 모른다. 지멘은 바위틈에 서 몸을 빼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 주의하며 어둠 속을 조심스 럽게 걸었다. 산릉을 몇 개 넘은 다음 그는 외지고 어두운 계곡 에 몸을 눕혔다.
지멘이 잠을 깬 것은 오후 무렵이었다. 그는 산을 따라 조금 더 움직인 다음 평야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멈췄다. 남쪽 어딘가 에서 방황하고 있을 추적자들은 두렵지 않았지만 하늘에서 내려 다보고 있을 딱정벌레는 귀찮았다. 그는 숲 속에 몸을 숨긴 채 요기를 끝냈다. 그가 식사를 마칠 때쯤 갑자기 저편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지멘은 하늘을 살펴보고 황급히 몸을 숨겼다. 먼 남쪽 하늘에서 딱정벌레가 배회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엘시 는 지멘이 뒤쪽에 있을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었다. 먼 곳에서 검 은 점이 되어 움직이는 딱정벌레를 보면서 지멘은 오직 밤에만 움직이겠다는 원래의 결심을 되새겼다.
그 뒤로 며칠 동안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지멘은 낮에는 몸 을 숨긴 채 잠을 자거나 끼니를 때웠고 밤에는 소리로 이루어지 는 술래잡기를 벌였다. 간간이 나타나는 엘시의 딱정벌레와 밤중 에 근처로 다가오는 발소리를 통해 지멘은 엘시와 추적자들의 움 직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엘시는 추적자들을 지멘과 마찬가지로 낮에 자고 밤에 움직이도록 해 놓고 자신은 낮 동안 지멘의 모습 을 찾아다녔다. 낮 동안에는 엘시가 레콘들과 떨어져 있다는 것 을 알게 된 지멘은 그 시간을 틈타 엘시를 붙잡으면 어떨까 하는 유혹을 느꼈다. 하지만 엘시는 높은 고도에 떠 있었다. 그리고 네 명의 추적자들을 두 개조로 나눠 한 조를 대기시켜 놓았을지 도 모른다. 지멘은 끝까지 같은 방식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그것은 의례 같은 것이 되었다. 밤은 소리와 활력의 시간이었 다. 지멘이 힘껏 달리면 어느새 그 발소리를 따라 다른 발소리들 이 다가온다. 오늘 밤엔 발소리가 나타나지 않나 생각했을 때 그 발소리들은 어김없이 따라붙었다. 그 발소리를 듣다가 마음속으 로 정해 둔 것 이상으로 소리가 커지면 지멘은 달리기를 멈추거 나 몸을 숨겼다. 그러면 그 발소리들은 당황하거나 혼란스러워 하다가 사라졌다. 때론 발소리 자체가 뚝 멈춘 채 지멘이 다시 움직이기를 기다릴 때도 있었다. 지형이 유리할 경우 지멘은 최 대한 소리를 죽여 걸었지만 조금이라도 위험하면 아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면 실망과 격분에 찬 외침이 들려오곤 했다. 물론 지멘은 거기에 마주 대답하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다. 지멘은 조 용히 듣기만 했으며 곧 네 사람의 성격을 대충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얼마 후 지멘은 발소리를 통해서도 네 사람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낮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지멘은 몸을 숨긴 채 움직이지 않았 다. 그는 봄의 따스한 기운 속에서 마음껏 잠을 자거나 한가롭게 빈둥거렸다. 추적자들의 존재를 알려 주는 것은 가끔 하늘 한쪽 에 나타나는 검은 점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상의 어떤 것도 알려 주지 않았다. 네 명의 레콘들에 대한 이해 가 늘어나는 것과 반비례하여 지멘은 점점 엘시를 알 수 없게 되 었다. 그에게 엘시 에더리는 하늘에서 빙글빙글 도는 검은 점이 었다. 낮 동안 잠을 자면서 지멘은 가끔 꿈속에서도 엘시를 보았 다. 그때도 엘시는 허공에서 빙글빙글 도는 점이었다. 그 때문에 지멘은 자신이 실제로 엘시를 본 것인지 꿈속에서 엘시를 본 것 인지 혼동하곤 했다.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었기에 봄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지멘에 게 다가왔다. 혼란스러운 봄빛과 비상식적인 박탈감으로 가득한 시간이었다. 지멘의 몸에 눌린 꽃에서 훔쳐 온 화향이 그의 깃털 에 배었다. 낮과 밤은 너무 다르다. 지멘은 두 세계를 번갈아 오 가는 것 같은 혼란을 느꼈다. 소리들이 폭주하는 밤, 검은 점이 날아다니는 낮 그리고 갑자기 낮과 밤이 하나가 되었다.
봄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밤은 기묘하게 탈색된 채 주 위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지멘은 자신도 모르게 최후의 대장간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남쪽으로 가고 있던 그를 세상이 제멋대로 북쪽으로 돌려놓은 것이다. 그 공포스러운 순간, 갑자기 지멘은 자신이 푼텐 사막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는 하얀 것은 눈이 아니라 모래였 다. 다만 그 모래들은 누른빛 대신 눈처럼 하얀빛이었다. 그 백 색이 어찌나 짙은지 푸르게 보일 지경이었다. 지멘은 밤이 왜 이 토록 창백한지 의아하게 여겼다. 하늘을 올려다보고서 그 이유를 깨달았다. 보름달이 사막과 그를 관조하고 있었다. 차갑고 둥근 달이 아니었다. 이글거리는 달이었다. 밤은 광란하는 달빛에 타 들어가고 있었다. 모래는 달빛에 하얗게 녹아내렸다. 폭발하는 달빛 아래 별들은 바스러졌다. 지멘은 한없는 생경함으로 달을 바라보았다.
문득 검은 점이 달의 얼굴을 스쳤다. 동시에 발소리가 들려왔 다. 지멘은 고개를 내렸고 그를 향해 달려오는 네 개의 모래 구 름을 발견했다. 그 구름 앞쪽에는 각자의 무기를 뽑아 든 네 명 의 레콘이 있었다. 오늘 밤에도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와 똑같은 밤이었다. 타 들어가는 달빛 때문에 그 모습이 하얗게 빛나는 것만 제외하면.
지멘이 그들을 볼 수 있다면 그들 또한 지멘을 볼 수 있다. 지멘은 몸을 부풀렸다. 그는 다시 달을 바라보았다. 검은 점은 엘시였다. 지멘은 네 명의 레콘을 보았다. 준람, 주테카, 쵸지, 론솔피. 그들은 화가 난 채 지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성난 눈 들이 보였다. 지멘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여덟 개의 눈. 지멘 은 그들의 눈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런 일이 가능하지 않은 거리였는데도.
그리고 갑자기 그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세상이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다가 후퇴했다. 지멘은 자신이 달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무의식중에 지멘은 몸을 돌려 도망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 은 순간, 그 자각 때문에 지멘은 멈춰 설 뻔했다. 지멘은 속도를 늦추려는 다리를 억지로 끌어당겼다. 도망쳐야 한다. 달이 저지 경이니 도망쳐야 마땅하지 않은가.
모래가 발목을 잡아챈다. 바람이 뒤로 떠민다. 지평선은 자꾸 만 도망친다. 하얀 세상이 계속된다. 달빛이 어깨를 잡아당긴다. 사구의 정상에서 날아오른다. 허공을 걷는다. 저 아래에서 거대 하게 솟아오르는 괴물은 무엇인가! 부리다. 부리라고? 지멘은 자 신의 부리를 보고 있다.모래가 그의 발을 게걸스럽게 삼킨다. 놔. 모래 속에 입이 있다니. 그 입을 찢어발기며 지멘은 다시 도약했다.
분노한 모래가 자라난다. 하얀 모래가 미친 듯이 자라난다. 그 를 삼키고 싶어한다. 그를 통째로 삼키고 싶어하는 저 갈망에 찬 모래. 불타는 달. 달? 아니, 태양이다. 무슨 상관인가. 모래가 푸르게 부풀어 그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는데.
아라짓력 31년 1월 28일. 레콘 지멘은 키보렌의 밀림에 뛰어들 었다. 그는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