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6장] – 바람 속의 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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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6장] – 바람 속의 돌 2


백화각의 냉동실에서 사체의 이름표를 확인하던 부냐 헨로는 갑작스러운 현기증을 느꼈다.

부냐의 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염사 보조인들 사이에서는 냉 동실에서 발견된 얼어죽은 염사의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홀 로 일하던 염사가 냉동실 안에서 그만 길을 잃고 방황하다가 추 위 때문에 얼어죽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에는 여러 변형판이 있었다. 염사가 죽은 곳이 출입구 바로 옆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고 자신이 염한 시체 옆이었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동사한 염사의 이름 또한 각양각색이니 신빙성이 떨어져야 마땅할 것이 다. 하지만 부냐를 포함하여 냉동실을 들락거려야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 이야기를 믿었다. 백화각의 냉동실은 어둡고 광활하 며, 산 자의 편의를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니다. 그런 악조건에 죽은 자들 사이를 거닐어야 하는 심리적 압박감까지 더해지면 정신이 말짱한 사람도 자칫하면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게 된다.

겁을 집어먹은 부냐는 황급히 출입구의 위치를 확인했다. 냉동 실의 구조는 전체적으로 서가를 지나치게 많이 집어넣은 도서관 과 오래된 술저장고, 쥐딤 대학 기숙사 창고를 뒤섞어 놓은 것과 비슷하다. 줄을 지어 늘어서 있는 선반들 사이에서 자신이 걸어 야 할 길을 빈틈없이 확인한 부냐는 그제야 안도할 수 있었다. 부냐는 이마를 짚었다. 장갑의 차가운 느낌이 머리를 시원하게 했다.

현기증을 느낀 것은 피로 때문일 것이다. 끝이 없을 것 같은 사망자의 행렬이 끝난 것이 불과 반나절 전이었다. 백화각에서 취급하는 시체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매장될 귀족이나 하늘 누리의 냉동실 이용료를 지불할 수 있는 부유한 이들의 시체뿐인 데도 그 숫자는 막대했다. 부냐는 평판이 좋지 않은 동료가 툭 던지듯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렇게 많이 죽었는데 대장군이 대승했다고? 대장군의 대승은 부하를 얼마나 죽였느냐로 결정되나 보지?

부냐는 엘시를 변호할 수 있었다. 하늘누리에는 상주인구가 많 은 편이 아니고 구성원 대부분이 일할 수 있는 나이이기 때문에 사망 사건은 드문 편이다. 염사 보조인들이 갑자기 격무에 시달 리게 된 것은 평소에 일이 적어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 뿐, 이건 수만 명이 싸운 전쟁터에서 발생한 사망자 숫자로는 많은 편이 아니다…………. 부냐는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입을 다물고 그 자리를 피했다. 부냐가 보기에 그 염사 보조인은 시비 를 걸어 싸움을 일으키는 것이 목적인 것처럼 보였다. 상대의 목적이 싸움이라면 설득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홀로 냉동실에 있는 지금, 부냐는 자신의 침묵에 다른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엘시를 변호하고 싶지 않았다.

부냐는 그 생각을 계속하기가 두려웠다. 사망자의 이름표를 확 인한 부냐는 조금 전 확인해 두었던 길을 향했다. 사망자의 운구 계획표를 짜는 것과 그것을 하늘누리의 이동을 책임지는 천경유 수에게 제출하는 것은 그녀의 일이 아니다. 사망자 기록에 이상 이 없음을 확인한 부냐는 이제 돌아가 쉴 수 있다. 부냐는 출입 구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걸어가야 할 길 양쪽에는 커다란 선반들이 줄지어 있었 고 그 선반 위에는 관들이 무겁게 자리하고 있었다. 좀 오래된 관들에는 예외 없이 고드름과 하얀 성에가 뒤덮여 있었다. 운반 에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만 남겨 두었기에 선반 사이의 길은 좁 았다. 팔을 양쪽으로 벌리면 관을 치게 될 정도로 부냐는 팔짱 을 꼈다. 두꺼운 방한복 때문에 동작이 여의치 않았다. 그저 가 슴 쪽으로 팔을 구부린 것에 불과했다. 부냐는 어쩐지 눈이 가물 거리는 것을 느꼈다.

걷고 싶지 않았다.

왜? 부냐는 의아했다. 가물거리는 눈 때문에 똑바로 걸을 수 없을까 봐? 그래서 선반에 놓인 관을 칠까 봐? 얼어붙은 관뚜껑 이 부서지며 그 안에서 꽁꽁 얼어붙은 시체가 불쑥 튀어나올까 봐? 죽은 자의 바스러질 듯한 차가운 손가락들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을까 봐?

부냐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자 열 걸음은 물러난 것처럼 출입구가 멀어졌다.

부냐는 어쩔 줄 몰라하며 눈을 감았다. 어디선가 기묘한 소리 가 들려왔다. 관 속의 시체가 부푸는 소리 같은. 부냐는 질겁하 며 다시 눈을 떴다. 길이 흔들렸다. 믿을 수 없지만 부냐가 걸어 가야 하는 길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냐, 저건 내 입김이야. 하얀 입김 때문에.. 그럴까?

‘저 여기 있어요.’

부냐는 몸을 더욱 옹송그렸다. 방한복이 얼어서 버석거리는 소리를 냈다. 허기에 미친 옷이 그녀를 잡아먹으려 하는 것 같 았다.

‘엘시, 도와줘요. 언니, 나 좀 꺼내줘. 아버지, 저를 잊으셨어요?”

부냐의 주위엔 벌목장의 목재처럼 쌓여 있는 시체들뿐이다. 그 리고 그녀 또한 얼어죽은 시체가 될 것이다. 그렇다 해서 바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도르 헨로는 산지니를 팔뚝에 얹은 채 산야 를 달릴 것이며 엘시와 니어엘은 바둑을 둘 것이다. 부냐는 그 어렵고 따분한 놀이를 재미있어 하는 언니와 약혼자를 언제나 이 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잘 이해하는 것 같았다. 바둑을 두며 두 사람은 죽은 부냐에 대해 말할 것이다. 죽은 부 냐는 씁쓸한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다. 죽은 부냐는 아무것도 아 니다. 이곳에 가득한 시체들처럼.

절망감 속에서 부냐는 자신의 왼쪽 팔목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익숙하지 않은 느낌이 팔목을 누르는 것을 느꼈다. 그 느낌에 질 겁한 부냐는 반사적으로 달렸다.

버석거리는 옷소리가 부냐를 괴롭혔다. 거대한 냉동실에서 울리는 그녀의 발소리가 부냐를 난타했다. 쿵쿵, 쿵쿵.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 때문에 선반에 얹혀 있던 관들이 우르르 쏟아질 것 같았다. 시체가 부푸는 것 같은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자신이 쓰러지리라 확신한 순간, 부냐는 냉동실 입구에 도달했 다. 냉기가 빠져나갈 수 없도록 삼중으로 되어 있는 냉동실 문을 빠져나오는 동안 부냐는 문과 통로 벽에 몇 번이나 부딪혔다. 밖 으로 나온 부냐는 등으로 세 번째 문을 밀어붙였다.

부냐는 문을 등지며 벽에 기대어섰다. 몸 왼편을 벽에 붙인 채 헐떡였다. 차가운 피부 위로 땀이 흐르는 느낌은 기묘했다. 부냐는 거칠게 모자를 어깨 너머로 넘겼다. 그리고 몸을 돌려 돌 벽에 이마를 가져다 대었다. 차가운 돌벽 때문에 머릿속에 폭발 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대로 이마가 돌벽에 달라붙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지만 부냐는 이마를 떼지 않았다.

‘저를 잊으셨어요?

부냐는 자신이 다시 왼쪽 팔목을 움켜쥐고 있음을 깨달았다. 도대체 누가 서류철에 그런 것을 끼워 둔 것일까. 부냐는 서류철 에 끼여 있는 기묘한 서신을 읽었지만, 그 내용보다 죄수인 자신 에게 서신이 전해졌다는 사실에 더 놀라 엉겁결에 그것을 소매 속에 쑤셔 넣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군가가 그녀에게 보낸 접촉 이었다. 부냐는 그 서신을 꺼내어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헨로?”

부냐는 소스라치듯 놀라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염사장 두이만 길토가 어정쩡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목이 메어 말을 할 수 없 었던 부냐는 눈으로 대답했다. 두이만은 부냐의 모습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 때문에 자신의 무뚝뚝한 성품을 누그러 뜨려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두이만은 단순하게 용건만 말했다.

“면회다.”

부냐는 두이만의 말을 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 두이만이 한 번 더 말할 것인지 귀가 먹었냐고 야단쳐야 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 할 때 부냐의 입이 무의식적으로 열렸다.

“누구죠?”

두이만의 눈초리가 씰룩였다. 잠깐 동안 염사장은 부냐가 무례 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조금 후 두이만은 염사 보조인에게 질문이 금지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잠시 라도 바깥의 사람을 볼 수 있고 바깥의 소식을 들을 수 있기에 면회를 거절하는 죄수는 거의 없으며, 따라서 누가 온 거냐고 묻 는 죄수도 없다. 두이만이 맞닥뜨린 것은 무례가 아닌 낯설음이 었다. 어색한 기분 속에서 두이만은 자기 대답이 어떻게 받아들 여질지 궁금해하며 말했다.

“칼리도 백.”

두이만은 부냐의 반응에서 낯설음을 느껴야 할지 익숙함을 느 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시체를 처음 본 염사 보조인이 졸도하 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다. 하지만 두이만은 면회인의 이름을 듣 고 졸도한 염사 보조인을 처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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