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6장] – 바람 속의 돌 4
레콘 즈라더의 사망 때문에 현재 구성원은 스물한 명이지만, 관례에 따라 여전히 이십이금군이라 불리는 황제의 직속 전사들 중 한 명인 구레는 긴장한 얼굴로 비스그라쥬 백 데라시를 내려 다보았다.
오래전에 입실 절차를 포기했기에 구레는 데라시가 자기 앞에 멈춰 서자마자 비켜섰다. 속으로 투덜거리며 데라시가 통과하기 를 기다리던, 그래서 황제의 집무실을 지키는 위엄 있는 감시자 의 위치로 빨리 복귀할 수 있기를 기대하던 구레는 데라시가 미 동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가는 귀가 어둡지만 눈이 어둡지는 않다. 또한 보온복의 물이 식을지도 모르기 때문 에 데라시는 보온이 되지 않는 장소에서 꾸물거리지 않는다. 다 른 종족이라도 그렇게 서 있는 것은 이상한 광경이겠지만 데라시 의 경우엔 황당하기까지 했다.
당황 때문에 데라시에게 말을 걸려던 구레는 문득 그것이 어떤 시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럴 법한 일이었다. 혹 백작은 입실 절차를 태만히 하고 있는 구레를 말없이 꾸짖고 있는 것이 아닐까? 구레는 비스그라쥬 백이 황제의 집무실 앞에서 지체할 만한 다른 이유를 떠올릴 수 없었다.
그렇게 판단한 구레는 분노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젠장, 항 상 폐하께 미리 니르고 찾아와서 사람 맥 빠지게 했던 것이 누군 데? 구레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구레는 만약 데라시가 근무 태 만에 대한 이야기를 한마디만 한다면 백작의 보온복을 벗긴 다음 엉덩이를 걷어차 주리라 결심했다. 위대한 갈바마리 이래 금군에 겐 필요하다면 공작의 엉덩이라도 걷어찰 권한이, 그리고 그 행 동에 대해 변명하거나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권리가 있다. 그리 고 구레는 두억시니였던 갈바마리에게는 애초부터 변명이나 설명 을 할 언어 능력이 없었다는 사실에 연연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갈바마리는 설명하지 않았고, 그러니 나도 안 한다. 떠들어 봐, 백작.
구레는 자신에게 니름의 능력이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결심하자마자 데라시가 황제의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으니까. 놀람과 기쁨 속에서 데라시의 모습을 보던 구레는 문이 닫히는 것을 보고 황급히 정신을 집중해서 닐러 보았다. 재수 좋았어, 백작.
당연하지만 구레는 침묵왕의 비원을 달성하지 못했다. 구레가 어떻게 생각하건 인간인 그에게는 니를 능력이 없다. 그것은 데 라시가 자신의 재수가 아주 나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 해 입증된다. 데라시의 견해로는 제국 정부 전체의 재수가 바닥 을 때린 날이다.
치천제는 문 안으로 들어서는 데라시를 보며 잠시 니름을 멈췄다. 데라시는 벽난로 옆에 보온복을 벗어 둘 때까지 기다려 주는 황제를 고맙게 생각했다. 마침내 데라시가 준비를 끝내자 황제는 닐렀다.
<이제 설명해 봐. 도대체 신부 절도가 뭐지? 레콘들의 신부 탐 색과 비슷한 건가?>
먼 곳에서 닐러 봐야 황제는 전혀 납득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 서 데라시는 직접 배알한 채 설명해야겠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황제를 마주한 지금 자신이 왜 그런 멍청한 판단을 내렸는지 궁 금했다. 존경하는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런 바보 같은 설명 을 해야 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폐하, 그룸 빌파가 발케네의 공작이 되기 전에도 발케네는 독 특한 지방색으로 제국에 그 이름을 널리 알려 왔습니다.>
<그래, 도둑놈들의 땅이지. 그래서?>
데라시는 한숨을 쉬고 싶었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발케네가 형 성해 온 특징은 황제가 사용한 짧은 설명 이상이다. 발케네는 속 이고 빼앗고 훔치는 일을 사내의 덕목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땅이며, 어쩌면 세상의 모든 악덕이 태어나는 땅인지도 모른다. 발케네 사람들이 강하고 거칠고 교활하며 최악의 환경에서도 자 기 조절 능력을 유지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살아 남기 위해 체득한 능력이다. 발케네 인들의 우수한 능력 때문에 그들을 중용한 자들은 언제나 호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닌 지역 중 하나지만 발케네는 끝없는 배반과 암살, 부족 전쟁 때문에 십 년 이상 계속된 지배 구조를 한번도 가진 적이 없었다. 그 역사 를 바꾼 것이 락토 빌파의 아버지인 그룸 빌파다. 그룸 빌파는 저주받은 도깨비감투를 받은 세 명의 빌파 남자들 중 하나였고, 다른 두 명의 빌파와 함께 유사 이래 처음으로 발케네에 안정된 지배 구조를 확립시켰다. 그것이 그룹 빌파의 놀라운 지도력 때 문이라고 오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절대로 포착되지 않는 도깨비감투의 능력 때문에 그룸 빌파는 모든 적수를 간단히 무덤 으로 안내할 수 있었다.
현재 발케네를 다스리고 있는 락토 빌파는 아버지 그룹이 만들 어 놓은 지배 구조를 안정적으로 계승했고, 아버지보다 더 혹독 한 사람으로 비춰지는 것을 평생의 야망으로 삼은 듯한 남자다. 그러나 그룸 빌파도, 락토 빌파도 제국에 널리 알려진 발케네의 특징에 근본적인 변경을 가하지는 않았다. 발케네 인들은 여전히 속이고 빼앗고 훔친다. 그리고 그 대가를 치르는 일을 두려워하 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폐하. 신부 절도는 그런 발케네의 지방색에 어울 리는 풍습입니다. 간단히 닐러 드리자면, 그들은 신붓감을 훔칩 니다.〉
<레콘과 같나?>
<다릅니다. 신부 탐색 중인 레콘 도전자는 여자의 남편에게 정 면으로 도전하지요. 만약 남편이 없는 여자라면 싸움 같은 것은 일어날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있어서 싸움이 성립된다 해도 아내 쪽에서 확고하게 남편을 편들면 도전자는 대충 싸우다 가 싸움을 그만두는 일도 있습니다. 물론 레콘 여자들은 더 강한 남자를 고르고 싶은 충동 때문에 주로 싸움을 부추기는 편입니다 만. 어쨌든 레콘의 경우엔 싸웁니다. 그에 비해 발케네 인들의 신부 절도는 훔치는 것입니다. 처녀라면 그 여인의 가족들에게서 훔칩니다. 남편이 있는 여자라면 남편에게서 훔칩니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엔 레콘과 비슷합니다.>
<왜 비슷하지?>
<모의 절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의 절도? 가짜로 훔친다는 건가? 안 되겠군. 기억을 보내.〉
데라시는 이번에는 진짜로 한숨을 쉬었다.
<별로 추천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폐하. 저와 비슷한 처지가 되실 가능성이 높습니다.>
치천제는 그것이 무슨 니름인가 하다가 곧 비늘을 조금 부딪쳤다.
<이해 못하고 있나?>
<예. 발자국 없는 여신께 맹세코 그건 지독하게 복잡하고 이해 하기 짜증스러운 풍습인 것 같습니다. 발케네 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명쾌함과 합리성이 있겠지만, 저는 그것을 찾아내지 못 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폐하께 닐러 드리면서 저도 그것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해.〉
데라시는 감사를 표하며 신부 절도에 대해 자신이 아는 것을 전부 닐렀다. 그리고 치천제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가 될 거라는 데라시의 니름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신부 절도는 신랑 측에서 먼저 신부 측으로 절도 통고를 보내 는 것으로 시작한다. 통고가 접수되면 신부 측은 신부를 지켜줄 ‘수비자’들을 모집하고 그에 발맞추어 신랑 측 또한 ‘공격자’들 을 모집한다. 모집 기준은 다양한데 혈족이나 동맹 협정 대상, 친구 등이 포함되며 빚을 갚기 위해 수비나 공격에 합류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 빚이라는 것은 당연히 세상의 다른 지역에서 쓰 이는 것과 다른 의미를 가진다. 훔치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의 빚 이라는 것이 다른 이들의 빛과 같을 리가 없다. 어쨌든 수비자와 공격자들이 모두 모이면 공격 측의 공격으로 신부 절도가 시작된 다. 그들은 수비 측의 저항을 뚫고 신부를 훔쳐내려 시도한다. 물론 수비 측은 공격자들을 패퇴시키려 시도한다.
그러나 발케네 인들의 주된 관심사는 수비자와 공격자의 용맹 과 지략이 아니다. 그들은 주로 ‘배신자’들의 활약에 깊은 관심 을 두고 신부 절도를 감상한다. 수비 측과 공격 측에는 반드시 배신자들이 섞여 있게 마련이다. 그 때문에 공격 측은 수비 측에 공격 일시를 직접 통고하지 않는다. 배신자들이 전해 줄 것이 뻔 하기 때문이다. 수비 측에서 공격 측으로 배신자를 잠입시키지 못해 공격 일시를 알지 못했다면, 그것은 수비 측의 잘못이고 불 명예이지 공격 일시를 가르쳐 주지 않은 공격 측의 잘못은 아니 다. 이렇듯 신부 절도에서는 일반적으로 ‘반칙’이라 불릴 만한 온갖 전술이 다 허용된다. 한편 수비 측의 악명 높은 전술 중에 는 신부 바꿔치기라는 것도 있다. 결혼하기 어려운 결함을 가진 여인을 고의적으로 신부와 바꿔 신랑 측에 떠넘기는 이 전술 때 문에 죽도록 고생하고 엉뚱한 신부를 데려가는 신랑도 있다. 물 론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것은 공격 측의 잘못이고 불명예다. ‘교환’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잘못 훔쳤으니 바꿔 달라고 말할 수 없는 법이고, 또한 잘못 훔쳤음을 고백하는 것은 자신의 불명 예를 인정하는 것이니까.
이런 다양한 전술 때문에 신부 절도는 거대하고 현기증 날 만
큼 복잡한 놀이에 가깝다. 이 모든 상황에서 수비측과 공격 측이 지켜야 할 묵시적 규칙은 한없이 많지만, 그것은 언제나 비틀 리고 곡해되고 깨트려지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야 할 명명백백한 규칙은 단 하나뿐이다. 치명적인 무기는 사용하면 안 된다.
<목검이나 몽둥이, 올가미, 그물 등은 괜찮지만 단검은 안 된 다는 식입니다. 그 외에는 온갖 일이 허용되는 것 같습니다. 특 히 배신자의 활약 부분에는 어떤 제한도 없는 것 같습니다. 상대 편을 몽땅 배신자로 채워서 신부 절도가 시작되자마자 결판이 나 버리는 기막힌 상황을 연출하는 것은 발케네 인들의 야망인 것 같습니다. 물론 서로 그런 것을 꿈꾸니 성취 불가능한 야망일 테 지요. 이 외에도 온갖 전술과 규칙이 있습니다. 상대편을 속이기 위한 이중 배신자, 공격 측이 두 개인 삼각 절도, 그것의 변형판 으로 예비 신부가 두 명인 복합 절도, 간혹 일어나는 신랑 절도, 배신자 비밀 교환, 공개 배신자∙∙∙∙∙∙.>
<그만. 그런데 그것들은 결혼할 때마다 그 짓거리를 하나?> <그렇지 않습니다. 평범한 방식으로 결혼하는 경우도 꽤 많습 니다. 하지만 양가에서 자신의 세력을 자랑해 보이고 싶을 경우 묵시적 협의 하에 신부 절도를 시도합니다. 모아들인 사람의 숫 자로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는 것이지요. 이 경우엔 전체적으로 거대한 잔치에 가깝고 공격과 수비는 상당히 부드러운 분위기에 서 진행됩니다. 그리고 양자가 결혼에 합의하지 못했을 때 신부 절도나 신랑 절도가 시작되기도 합니다. 이때는 비록 모의전 비 슷합니다만 분위기가 험악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치명적인 무기 를 쓰지 않는데도 인명사고가 비일비재합니다. 인간은 목검이나 몽둥이로도 죽일 수 있으니까요.>
치천제는 목 주위의 비늘이 일어나려는 것을 느끼고 손바닥으로 그것을 눌렀다.
<짐이 정확한 인상을 받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절도가 아니라 떼강도, 아니, 전투에 가까운 것 같군. 그러니까 락토 빌파는 비셀스 규리하를 훔치겠다는 건가?>
그것이 비스그라쥬 백 데라시로 하여금 황제의 집무실 밖에서 한참 동안이나 주저하게 만든 비보였다. 데라시는 마지못한 기분 으로 닐렀다.
<암살공은 그것이 납치가 아니라 발케네의 전래 풍습임을 인정 해 달라는 내용의 서한을 율형부에 보냈습니다. 발케네식 구혼법 이라는 거지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암살공은 신부 절도의 규칙들 전부를 완전히 공개하고 그중 외부인들이 납득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조정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규칙은 한 가지뿐이라고 들었는데.〉
<사실 그렇습니다.그러니 규칙을 공개하겠다는 선언에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발케네의 전래 풍습이라는 주장이 중요합니다.> <락토는 그것이 구혼임을 부각시킬 작정인가?>
<아마 그럴 것입니다. 발케네 식으로 구혼하는 것이니 거절하 고 싶다면 발케네 식으로 거절하라고 주장하겠지요.>
<인간들은 이 경우 어떻게 행동하지? 결혼은 그들의 풍습이 잖나.〉
<보통 같은 지역에서는 같은 예법을 따르기 때문에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예법이 조금 다른 타지역 사람들끼리 결혼할 때는 여러 가지 해결 방안이 있습니다. 신랑 측의 예법을 따르는 경우 도 있고 신부 측의 예법을 따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혹은 절충안 을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규리하 지역의 경우엔 주로 신랑 측의 예법을 따르는 경향이 큰 것 같습니다. 아이저 규리하의 결혼식은 규리하 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굴도하 남작 부인의 결혼은 판사이 식으로 이루어졌지요.>
<칼리도에서는?〉
데라시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런 질문이 있을 것을 예상했고, 그래서 칼리도의 결혼 예법에 대해서도 조사해 두었다. 하지만 심 적 동요까지 억누를 수는 없었다. 황제는 돌려 니르지도 않았다. 데라시가 닐렀다.
<칼리도에서는 주로 신부 측의 예법을 존중하는 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엘시는 결혼이 규리하 식으로 이루어져야 된다고 생 각할 가능성이 높겠군.>
<폐하, 외람되지만 백작이 그렇게 판단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정우의 결혼을 주관하기로 한 백작은 먼저 정우에게 결혼할 의사 가 있는지부터 확인할 것입니다. 즈믄누리로 간 서신의 대답이 돌아오기 전까지 백작은 모든 혼담을 일단 보류해 둘 겁니다. 그 리고 즈믄누리에서 온 대답이 부정적이라면 백작은 정우의 결혼 을 반대할 것입니다.>
<짐의 생각은 조금 다른데. 즈믄누리에서 온 대답이 무엇이건 아이저의 딸은 결혼해야 해. 그리고 그 상대는 엘시고.>
데라시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그리고 정신적으로는 바닥에 엎 드렸다.
치천제는 자신이 니른 대로 이루어지길 원하며 데라시 또한 그 렇게 되도록 애써 왔다. 데라시는 엘시와 정우가 결혼하는 것이 기정 사실인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했고, 적당한 때를 기다려 엘시가 거부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요청할 작정이었다. 만약 암살공 의 터무니없는 구혼이 없었다면 데라시는 며칠 내로 엘시를 불렀 을 것이다. 하지만 암살공의 서신이 도착한 지금 데라시의 사전 공작은 의미가 퇴색했다. 암살공의 구혼은 사람들이 기정 사실이 라 여겼던 것을 수정하게 할 만큼 강력한 의미가 있다. 어쩌면 암살공이 이렇게 다급하게 발케네 식 구혼을 결심한 것은 데라시 의 공작이 지나치게 효과적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암살공 또 한 엘시와 정우가 결혼할 거라고 받아들였기에 선수를 친 것이다. 데라시는 아무런 방안도 제시하지 않는 치천제에 약간의 서운 함을 느꼈다. 데라시가 보기에 치천제가 해야 할 일은 집무실에 서 첩과 대책을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세 번째 벽난로 방을 통해 그런 구혼 따위 집어치우라는 황제의 권고를 발케네로 보내는 것 이었다. 충성서약이라는 강력한 관습을 간단히 무시한 치천제가 발케네 지방의 특화된 관습에, 그것도 다른 이들에겐 괴이하게 보일 관습에 연연하는 것은 이상했다.
발케네의 강대함 때문에? 규리하의 강대함은 그에 못지않다. 하물며 데라시의 안배가 없었다면 규리하는 서약 지지파를 규합 하여 그 세력을 몇 배로 불릴 수도 있었다. 규리하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황제가 발케네만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비록 데라시에게 모든 것을 일임했지만, 지금은 황제가 나설 차례다.
‘불 속에 손을 집어넣으면 안 돼.’
하지만 데라시는 희망을 약 간 품어 보았다.
<니르신 대로 이루어지려면 암살공이 자신의 그릇된 야욕을 포기해야 합니다. 타인에게 자신의 관습을 강요하지 말라는 내용의 권고를 발케네로 보내시면 어떻겠습니까?>
<데라시.>
<예, 폐하.>
<그는 강요할 수 있다.>
<예?>
치천제는 엄격한 얼굴로 비스그라쥬 백을 바라보았다. 그 표정 의 단호함은 데라시를 약간 두렵게 했다.
<이 하늘 아래에 누구에게도 강요받지 않는 사람은 오직 하나 뿐이고, 그것은 짐이다. 짐 외에 아무도 그러할 수 없다. 만약 락토가 짐에게 무엇인가를 강요하는 것이라면 짐은 그것을 용납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락토는 비셀스나 엘시에게 강요할 수 있다. 그럴 능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 또한 비셀스 나 엘시는 락토의 강요를 자신들의 판단과 능력에 따라 대처할 수 있다. 짐은 그것에 관여치 않겠다.>
데라시는 충격을 받았다.
그의 예상은 그것이 아니었다. 데라시는 모든 것을 일임받은 그가 직접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는 니름을 들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치천제의 니름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모순을 가진 선언이었다.
‘폐하께서는 칼리도 백이 정우와 결혼하여 규리하의 공작이 되 기를 바라신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으신다”
이 니름도 안 되는 이야기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누군가의 방해에 상관없이 결국 자신의 바람이 관철되리라는 자신감일까? 데라시가 아는 치천제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낙관주의자가 아니었 다.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할 수 없다는 패배 의식일까? 충성 서약을 받지 않겠다는 뜻을 강력하게 관철시킨 치천제 에게는 중상으로라도 할 수 없는 니름이다. 어떻게 보아도 치천 제의 니름은 광언에 가깝다. 하지만 치천제는 미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짐이 너에게 무엇을 명령했느냐?〉
<칼리도 백과 비셀스 규리하가 결혼하게 하라 하셨습니다.>
<기억한다면 가서 최선을 다해 그것을 수행해라.>
그것은 데라시가 예상했던 대답이다. 하지만 지금 듣는 대답은 그 의미가 많이 달랐다. 데라시는 황제가 자신에게 명령한 것처 럼 발케네 공에게 명령하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데라시는 황제에게 설명을 요청할 수 없었다. 치천제의 니름에는 ‘가서’ 라는 명령이 섞여 있었다.
데라시는 자신이 확고한 동작을 취하는 것처럼 보이길 바라며 일어났다.
난롯가에 잠시 걸려 있던 보온복은 충분한 열기를 빨아들이지 못했다. 데라시는 문을 나섰고, 자신에게 이상한 눈빛을 보내는 구레를 무시하며 빠르게 걸어갔다. 달리는 것과 비슷한 속도로 황궁을 가로질러 곧 자신의 방에 도달했다.
몸이 싸늘했다. 그의 예상처럼 보온복의 온기는 빠르게 사라졌 다. 그대로 벽난로 가로 걸어가고 싶었지만 데라시는 힘없는 팔 을 움직여 보온복을 벗었다. 보온복은 방열복 역할도 할 수 있 다. 그것을 걸친 채 벽난로 가로 다가가면 열기를 쉽게 받아들이 지 못할 것이다.
백작의 어깨에서 떨어진 보온복이 바닥에서 출렁거렸다. 데라시는 보온복 무더기에서 발을 빼 쓰러질 듯 다급한 동작으로 벽난로에 다가갔다. 반가운 열기에 신음이라도 홀릴 것 같았다. 의자를 끌어 오기도 귀찮았던 데라시는 벽난로 앞에 그냥 주저앉았다.
한기는 빠르게 가셨다. 그러나 의혹은 가시지 않았다.
데라시는 황제의 니름을 이해할 수 없었다. 치천제는 그 누구 라도 황제에게 강요할 수 없지만 다른 이에게 강요하는 것은 상 관없다고 닐렀다. 하지만 락토가 정우를 신부 절도한다면 그것은 치천제에 대한 강요가 된다. 정우와 엘시가 결혼하는 것이 치천 제의 바람이니까. 그것을 모를 리 없는 황제가 왜 그런 니름도 안 되는 설명을 한 것일까?
불현듯 데라시는 어떤 사람을 떠올렸다. 백작이 아는 사람 중 에 황제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는 온갖 것이 다 주어졌다. 대장군, 제국 만병장, 그리 고 가질지도 모르는 규리하 공작위. 물론 그 사람이 받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약혼자를 뺏겼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규리하 공작위를 받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데라시는 필사적으로 엘시에 대해 생각했다. 데라시는 엘시를 대하는 황제의 태도에서 자신의 의문을 해소할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리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