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7장] – 삶을 이용하는 태도 7
“머리 숙여요!”
아실이 비명을 질렀다. 황급히 머리를 숙인 지멘의 위쪽으로 가문비나무가 황급하게 지나쳤다. 곧고 길게 자라지만 목질이 튼 튼한 편은 아니라서 건축용으로는 별로 호평받지 않는 나무지만 레콘의 힘은 그 나무를 대규모 파괴 병기로 바꿔 놓았다. 지멘 을 놓친 가문비나무는 앞쪽의 숲에 부딪혀 나무 몇 그루를 쓰러 뜨렸다.
황급히 머리를 숙이는 바람에 몇 번 비틀거리던 지멘은 앞으로 발을 내뻗었다. 그 발끝에 있던 바위가 놀란 새처럼 떠올랐다. 지멘은 땅을 박차고 그 바위를 향해 도약했다. 공중에서 바위를 움켜쥔 지멘은 허리를 뒤틀었다. 지멘은 그것을 뒤편으로 집어던 졌다.
“먹어라!”
바위는 나뭇가지 몇 개를 박살 낸 후에도 속도가 전혀 줄지 않 은 채 날아갔다. 지멘을 따라 달리던 레콘은 주먹을 끌어당겼다.
“안 좋아하는 거야!”
달리는 힘에 주먹을 보태어 레콘은 바위를 후려쳤다. 바위가 세 쪽이 나며 주위의 숲이 돌벼락을 맞았다. 나뭇잎이 구름처럼 튀어오르고 부서진 나뭇조각들이 사방으로 날았다. 인간이라면 주먹과 팔과 어깨가 한꺼번에 부서질 무모한 짓이었고 레콘도 편 해 보이지는 않았다. 레콘은 바위를 후려친 주먹을 흔들며 투덜 거렸다.
“힘 더럽게 좋네!”
속도가 조금 줄었지만 레콘은 땅에 떨어지는 지멘을 포착할 만 큼은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위로 뜨다니, 멍청한 짓이다. 레콘은 신이 나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두 번째 걸음은 내딛지 못했다. 지멘이 어느새 그의 머리 앞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왜 나는 거냐!”
고함을 지르면서도 레콘은 저 멀리서 부러지는 가문비나무 첨 단부를 보며 상황을 이해했다. 지멘은 땅에 내려서는 대신 나무 를 박차고 그에게 날아든 것이다. 뒤로 당겨진 지멘의 주먹을 본 레콘은 두 팔로 얼굴과 상체를 틀어막았다. 실수였다. 지멘은 주 먹이 아닌 손바닥으로 땅을 긁듯이 휘둘렀다. 그 손바닥 끝에 걸 린 것은 레콘의 정강이였다.
앞으로 공중제비를 넘은 레콘은 산사태 같은 소리를 내며 쓰러 졌다.
지멘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레콘이 땅에 쓰러지자마자 일어설 것이 뻔하기 때문에 거꾸로 그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격분하며 몸을 튕긴 레콘은 기다리고 있던 지멘의 손아귀에 발목을 내주게 되었다. 레콘의 눈에 불신감이 떠올랐다.
“제기랄!”
지멘은 두 손으로 레콘의 오른쪽 발목을 쥔 다음 빙글 돌았다. 두 바퀴를 돈 지멘은 맹렬한 기세로 레콘을 집어던졌다. 날아간 레콘은 소음을 듣고 그쪽으로 달려오던 세 명의 레콘들에게 명중 했다. 네 명의 레콘들이 한꺼번에 사방으로 튀며 숲을 상당히 훼 손시켰다. 뿌리가 얕은 가문비나무들은 그런 충격을 이기지 못했 다.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그들 위로 나무들이 우수수 넘어졌다. 작은 언덕을 이룰 만큼 쌓인 나무 그루터기 사이에서 레콘들이 빠져나왔을 때 이미 지멘은 사라진 후였다. 레콘들은 흥분하여 투덜거리며 사방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약간 절뚝거리고 비틀거리 긴 했지만 잠시뿐 그들은 곧 질풍 같은 속도로 능선을 치달렸다.
그로부터 반 시간 후 아실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있는 곳은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구름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높은 산의 콧등 부분이었다. 가까운 산들보다 훨씬 높 은 산이었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는 구름으로 이마를 덮은 고봉 들이 띄엄띄엄 보였다. 이 땅의 산들은 고독을 사랑하는 늙은 은자가 아니다. 한데 모여 산의 언어로 활기차게 토론하는 젊은 산들이다.
그런 들뜨는 인상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것은 여기저기 벼룩 처럼 뛰어다니는 점들이었다. 거리 때문에 그렇게 보이지만 그 벼룩들은 구릉과 산봉우리들을 마음껏 뛰어다니는 레콘들이었다. 눈이 하나라 거리 감각은 시원찮지만 아실은 괜찮은 계산 감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가 가늠해 본 레콘들의 실제 움직임은 현기증 나는 수준이었다. 비슷한 인상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 법은 별비나 마루나래의 직계손쯤 되는 대호 수천 마리를 모아 수백 평방킬로미터의 산악 지대에 풀어놓는 것뿐이다. 그러면 아 마 지금 아실이 보고 있는 광경의 근사치 정도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지금 아실이 보고 있는 것과 비슷한 모습 은 지상에 없다.
바위를 깨고 하늘을 나는 레콘의 모습. 희열이 아실의 몸을 떨 리게 만들었다.
그 모습은 레콘만이 보여 줄 수 있는 모습이기에 레콘다웠다. 아실은 타이모가 꿈꾸었고 이제는 자신의 꿈이 된 광경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실은 그들이 바로 자신들을 추적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틀림없이 가짜 레콘들이겠지.”
지멘이 고개를 돌려 아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정상 바로 아 랫부분의 갈라진 절벽 틈에 앉아 있었다. 태양은 산 반대편을 비 추고 있었고 지멘의 검은 깃털은 절벽 사이의 어둠 속에 잘 녹아 있었다. 그리고 아실은 그의 깃털 속에 파묻히다시피한 채 아래 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멘이 아실의 말을 놓칠 리가 없다. 자 신의 중얼거림을 조금 늦게 깨달은 아실은 설명하듯 말했다. “그 나루터에서 우리를 막았던 건 황제 쪽 사람들이 발케네에 들어올 빌미를 주지 않으려는 거였어요. 저걸 감추기 위해, 암살 공은 도대체 언제부터 저런 걸 만들어 온 걸까요? 하긴 그의 땅 은 다른 곳보다 유리하지요. 최후의 대장간으로 가는 레콘은 언 젠가 한 번은 이곳을 지나쳐야 하니까. 사실 대단한 발상도 아니 에요. 이미 레콘 여단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어쩌면 타이모의 철 학에서도 착상을 좀 얻었는지 모르고. 그래도 놀랐다는 것은 인정해야겠네요.”
지멘은 제이어 솔한의 말을 떠올렸다. 살인 기사는 레콘들이 집단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천재적이라고 평가했 다. 지금 그런 광경을 본 지멘은 그것이 왜 천재적인지 알 것 같 았다. 지멘은 살인 기사가 지금의 광경을 보면 좋아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멘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아실이 말했다.
“살인 기사가 보면 당장 암살공에게 자신이 아는 제국의 모든 약점을 털어놓고 싶겠군요. 그래 놓고는 어쩌면 이번에는 자기가 성공할지도 모르겠다고 걱정할 테지요.”
푸념하듯 말하던 아실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잠깐. 살인 기사는 누군가의 특사로 마지막 대장간에 왔다고 했지요. 그런데 마지막 대장간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레콘의 무기…………….?”
아실은 입을 틀어막았다. 아실의 긴장감은 그대로 지멘에게도 전달되었다. 아실에게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멘은 아실의 말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지멘은 아실의 생각을 놓치지 않을 것 이다. 지멘은 아실의 목숨을………..
“암살공은 마지막 대장간을 살 생각이야!”
아실에 대한 지멘의 사고가 헝클어졌다. 지멘은 아실이 말한 내용에 놀라 깃털을 부풀렸다. 하마터면 앞으로 나동그라질 뻔한 아실은 지멘이 재빨리 받쳐 주었기에 그런 곤경을 모면했다. 지멘의 손가락을 붙잡으며 아실은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랬어! 지멘, 제 말에 화내지 마요.”
지멘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성급한 생각이었다. “마지막 대장간은 당신이나 타이모가 알던 장소가 아니에요. 이제 그곳은 보통의 대장간과 다름없어요. 돈을 받고 물건을 만 들어 주죠. 그곳에서 만드는 물건이 레콘용이라는 것만 다를 뿐 이에요.”
틀린 말처럼 들리지는 않았기에 지멘은 화가 나려는 것을 꾹 참았다. 아실의 말이 계속되었다.
“마지막 대장간은 발케네 북부에 있어요. 발케네를 거치지 않 고는 아무도 그곳으로 갈 수 없죠. 얼마나 안전해요? 아, 이런. 건너뛰었네. 안전하다는 것은 조병창으로서 그렇다는 거예요. 저 레콘들을 보세요. 저건 암살공의 병사예요. 그리고 병사들을 부 리려면 조병창이 필요하지요. 무기를 공급해야 한다고요. 암살공 은, 예, 마지막 대장간을 자기 조병창으로 쓸 생각이에요. 그것을 논의하기 위해 살인 기사를 특사로 파견한 거였어요! 스카리 요새라는 것은 어차피 존재하지도 않을 테고, 그 돈으로 최후의 대장간을 사겠지요!”
지멘은 그 추리에 놀랐지만 한 가지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 다. 레콘이 병사일 경우 조병창은 필요 없다. 유명한 엉겅퀴여 단만 해도 병사들의 무기를 공급하는 곳은커녕 그 무기를 손질하 는 부서도 가지고 있지 않다. 모든 레콘은 무기를 가지고 있으며 최후의 대장간에서 제작된 무기들은 소유자가 죽을 때까지 써도 무뎌지거나 부러지지 않는다. 지멘은 그 사실을 혼잣말로 알려 주려 했다. 그러나 아실이 먼저 말했다.
“그리고 제대로 된 무기들을 공급하겠지요. 왜냐하면, 어, 만 약 저 레콘들이 뭄토가 가지고 있던 접칼이나 당신이 부순 단검 들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쓸모가 많겠지만 전투엔 부적 합해요. 병기가 아니라 도구니까.”
지멘은 이해했다. 아실은 두 손으로 자기 뺨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그리고 군대를 만들려면 여러 가지 무기가 필요해요. 장검, 단검, 투창…… 오뢰사수의 활? 어쩌면 마지막 대장간에서 방패 나 갑옷 같은 것을 만들지도 모르겠군요. 세상에. 생각만 해도 무시무시하네.”
지멘 또한 그것이 무시무시하다고 생각했다. 최후의 대장간에 서 받은 하나의 무기가 아니라 완전무장을 한 레콘 병사들이라니. 그런 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짐작하기는 어렵다. 무엇 을 할 수 없는지를 가늠해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지멘은 뻣뻣 하게 일어선 벼슬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암살공이 서약 지지파인 것일까.”
“예? 아, 그럴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큰 싸움을 준비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요. 어, 이것 봐. 흥분해서 손끝이 다 떨려요.”
아실은 떨리는 두 손을 깍지껴 턱으로 눌렀다. 눈은 아래로 향하고 있었지만 이제 더 이상 레콘들을 보지 않으며 아실은 중 얼거렸다.
“그런데 왜 살인 기사는 우리에게 하텐그라쥬를 주목하라고 한 것일까? 살인 기사가 암살공의 특사라면 살인 기사는 이것을 알 고 있었겠지. 그렇다면 우리가 하텐그라쥬로 가는 것이 그 싸움 에 도움이 된다는 걸까? 하지만 어떻게? 어떤 일을 하라는 말도 없었어. 단지 우리가 하텐그라쥬로 가는 것만으로 무슨 도움이 될까? 제이어, 망할 놈. 좀 똑바로 설명해 줄 것이지!”
아실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그 생각은 지멘이 그녀를 들어 올려 배낭에 집어넣었을 때도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지멘이 산 등성이를 따라 올라오는 레콘들을 피해 반대편으로 도망치는 동 안에도 아실은 계속 살인 기사의 전언에 대해 고민했다.
하늘을 나는 새가 부럽지 않은 속도로 험준한 산지를 치달릴 수 있는 레콘 수천 명에게 쫓기는 것치곤 지멘의 도피행은 꽤 긴 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물론 지멘은 몹시 지쳤지만 막다른 길에 봉착하지는 않았다. 지멘은 눈에 보이는 모든 레콘을 피하면 그 만이지만 힌치오의 레콘들은 앞의 레콘이 자기 동료인지 지멘인 지 먼저 구분해야 했다.
힌치오는 추적 이틀째가 되는 시점에도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 했다는 사실에 초조해했다. 밤의 어둠 속에서는 피아 식별이 더 욱 어렵다. 태양이 기우는 것을 본 힌치오는 더욱 초조해졌고 그 초조함은 빠르게 분노로 변모해 갔다. 힌치오는 검은 레콘을 닥 치는 대로 거꾸러뜨려 놓고 볼까 하는 생각마저 떠올렸다. 얼마 후 말을 탄 팔리탐 지소어가 물어물어 그를 찾아왔을 때 힌치오 는 그런 심정을 고백하고 말았다. 하지만 팔리탐은 그의 괴로움 을 이해해 주는 대신 ‘그렇다면 검은 레콘들을 수색대에 포함시 킨 거냐?”고 물었다. 힌치오는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아래에 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
일몰이 두 시간도 채 남지 않은 시간에 검은 레콘들은 모두 스 카리 요새로 돌아가라는 내용의 메아리들이 산봉우리 사이로 퍼 져 나갔다. 계명성을 통해 수십 킬로미터 저편까지 전달되는 명 령을 들으며 팔리탐은 명령 전달의 속도만큼은 뱀단지가 부럽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팔리탐이 속도에만 높은 점수를 준 것은 그 수용성을 의심했기 때문이다. 그 의심은 곧 사실로 밝혀졌다. 불 과 몇 분도 지나지 않아 힌치오와 팔리탐은 추적열을 불태우고 있는 검은 레콘을 발견했다. 목을 비틀어 버릴 기세로 다가서던 힌치오는 그가 지멘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흉측한 욕설을 퍼부었다.
뒤틀린 표정으로 물러가는 검은 레콘을 보며 팔리탐은 그런 레 콘이 한 명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명령이 무시되고 있었다. 힌치오의 레콘들에게는 흥분한 상태에서도 명령을 정확히 수행하 는 세련된 자세를 아직 기대할 수 없다. 검은 레콘이 물러간 후 에도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는 힌치오에게 팔리탐은 같은 명 령을 다시 내리라고 했다. 이번에는 내용을 조금 바꿔서. ‘아직 도 추적에 열중하고 있는 검은 레콘들은 들어라. 다른 레콘들이 실수로 너희들을 때려죽일지도 모른다! 빨리 돌아가!’에 해당하는 계명성들이 다시 주위의 산야를 뒤덮었다. 태양의 위치를 본 힌치오는 우울하게 말했다.
“아래에 그것이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아.”
팔리탐은 힌치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가 초조해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이해했다.
“괜찮을 거요, 힌치오. 지멘은 어제부터 제대로 먹지 못했을 테고 최대 속도로 움직였다간 죽이게 될 인간 소녀도 데리고 있 소. 그런 주제에 우리 포위를 빠져나간다면 그 친구는 몸을 검게 물들이고 돌아온 티나한일 거요.”
힌치오는 부리를 탁 부딪쳤다.
“글쎄. 지멘이야 지쳤을지 모르지만 아실이 지멘의 짐이 될 것 같지는 않은데. 그 지독한 애는 기절하는 한이 있어도 그의 짐이 되지는 않을 거야.”
팔리탐은 힌치오에게 가면을 향했다. 힌치오가 말했다.
“쥐딤에서 아실의 별명은 나늬였어.”
“나늬?”
“그땐 눈 하나가 없어지기 전이었고 그럭저럭 예쁘장했어. 하지만 그것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은 것은 아니야. 도대체 말을 안 들을 수가 없었거든. 인간은 물론이고 상대가 자기 열 배는 되어 보이는 레콘에게도 타이모가 이랬어요, 타이모가 그러지 말 랬어요 하면서 바락바락 대들었지. 손가락으로 좀 세게 튕겨도 죽을 것 같은 꼬맹이에게 어떻게 할 수 있나. 그냥 예쁘게 구는 구나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지. 예쁘다, 예쁘다 하다 보니 별 명이 나늬가 되었고.”
거목 같은 레콘들 사이를 활기차게 돌아다니는 조그마한 소녀를 상상해 본 팔리탐은 힌치오가 느꼈을 정서를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힌치오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실과 지멘이 왜 그렇게 잔인해졌는지 모르겠군. 죽은 병사 들 봤어? 레콘이라면 모를까, 인간을 그렇게 죽일 필요는 없어. 그냥 겁만 줘서 쫓아 보내도 그만이야. 제국병이라면 어떻게 이 해해 볼 수도 있지만 그렇지도 않잖아. 6년 동안 쫓겨 다니다 보 니미쳐버렸나 봐.”
팔리탐은 그것이 락토의 소행이라는 것을 가르쳐 줄까 고려해 보았다. 락토의 계획대로라면 힌치오는 오랫동안 레콘들을 지휘 하며 공작을 모셔야 한다. 락토가 어떤 인물인지 아는 것이 힌치오에겐 좋을 것이다. 하지만 팔리탐은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생 각했다. 락토도 아마 동의할 것이다. 힌치오가 발을 뺄 수 없는 시점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팔리탐은 말의 목을 쓸어 주며 말했다.
“지멘을 붙잡으면 그가 미쳤는지 미치지 않았는지 확인할 수 있을 거요. 서두릅시다.”
힌치오는 무거운 표정으로 팔리탐을 바라보다가 그가 타고 있 는 말을 가리켰다. 그 다음에 귀를 덮는 시늉을 해 보였다. 힌치 오의 손짓을 이해한 팔리탐은 주위를 살펴 말이 놀라더라도 위험 하지 않은 지형으로 움직였다. 팔리탐이 말고삐를 나무에 묶는 것을 본 힌치오는 두어 걸음 훌쩍 뛰었다. 절벽 끄트머리에 서서 힌치오는 가슴을 부풀렸다.
“내 목소리 기억하지? 나 힌치오다-!”
강력한 계명성이 암벽을 할퀴는 벼락처럼 산봉우리들을 스쳐지나갔다.
지멘은 외침이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그의 뒤편에서 아실이 벼슬을 끌어당겼다.
“대답하지 마요, 지멘. 우리 위치를 알아내려고 저러는 걸지도 몰라요.”
애초에 대답할 생각이 없었던 지멘은 아실의 목소리에 기운이 없다는 것에 주의했다. 아실은 그날 하루 종일 자기 발로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수십 미터씩 도약하거나 추락해야 했고 빙글빙글 돌고 뒤집히고 옆으로 날아야 했다. 그리 고 그 모든 움직임은 그녀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기에 미리 대 비할 수 없어 더 고된 것이었다. 아실은 안간힘을 다해 말했다.
“무슨 소리 하는지 들어 봐요.”
힌치오의 계명성에는 특기할 만한 내용이 없었다. 그렇게 도망 치다간 나늬를 죽일 테니 순순히 투항하라는 내용이었다. 내용보 다는 그것을 말하고 있는 사람 때문에 인상적인 외침이었다. 아 실은 참으로 오래간만에 들은 과거의 별명에 실소했다.
그런데 웃음과 함께 눈물도 흘러나왔다. 아실은 당황하여 눈가 를 훔쳤다.
“기억나네요. 기둥 같은 양손검을 쓰던 아저씨였지요. 절망도 에 들어가 있을 줄 알았는데, 다행이에요. 암살공이 거둬 줬나 봐요.”
아실의 목소리에 콧소리가 섞인 것을 느낀 지멘은 심란해졌다. 힌치오의 지적은 옳았다. 레콘들로부터의 도피행이 더 길어지면 아실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지멘은 주위를 살피며 되 도록 아실에게 충격이 가지 않도록 부드럽게 걸었다.
“그러고 보니 전부 절망도에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니겠군요. 쥐딤에서 도망쳤던 다른 사람들은 지금도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예요. 우리 신세가 이러니 만날 수는 없지만.”
아실은 지멘의 목 뒤에 얼굴을 파묻었다.
“물론 저 녀석들은 가짜 레콘들일 거예요. 하지만 주위에 많은 레콘들이 있으니 꼭 그때로 돌아온 것 같아요.”
지멘은 그때를 생각했다. 쥐딤. 여름이었다. 수많은 레콘들. 어디를 보아도 레콘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 중 쟁룡해에 호의를 가진 레콘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모두 좋 아했다. 들끓는 분위기. 많은 술. 물론 쥐딤 시민들에겐 악몽 같 은 나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무슨 피해를 입은 것은 아 니다. 그저 너무도 많은 레콘들이 내키면 지형을 변경시킬 수 있는 힘이 그들의 교외에 있다는 것에서 오는 불안감뿐이다. 쥐 딤은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았다. 타이모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 다. 그리고 타이모가 끝까지 관철한 것도 그것뿐이다. 타이모는 학술 토론회가 대규모 집회로 바뀌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리고 대규모 집회가 분리주의 무장 투쟁으로 변모되는 것도 막지 못했 다. 괴상한 여름이었다. 쟁룡해의 바람은 신비했다. 만질 수 있 는 모든 것과 만질 수 없는 모든 것이 한꺼번에 마법에 걸린 것 같은 짧고 감미로운 시기였다. 그리고 마법의 마지막 주문을 외 우는 것처럼 황제가 그것에 이름을 붙였다. 분리주의자들의 난. 축약도 가능하다. 반역.
그들은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지위에 도취되어 분 수를 모르고 날뛰는 황제를 희롱하는 온갖 농담이 만들어졌다. 재미없는 것도 많았지만 어쨌든 수는 많았다. 그들은 가소로워했 다. 건드릴 필요가 없어 무시해 주었더니 레콘도 마음대로 겁줄 수 있다고 믿게 된 황제가, 그들의 눈에는 불쌍하게 보였다. 괜 한 피를 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그들은 타이모가 데리고 다 니는 어린 소녀가 내놓은 계책을 받아들였다. 창피를 줘서 돌려 보낼 생각이었다. 스카리 빌파가 만취했을 때까지도 그들은 반역 자라기보다는 장난을 치는 악동에 가까웠다.
그리고 엘시 에더리가 나타났다.
여름도 끝났고 그들의 기이한 시간도 끝났다. 그 여름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은 것 같다. 아실의 얼굴 위에 그 여름의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 있지 않았다면 지멘은 그것이 현실이라고 믿기 어 려웠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지멘의 오른쪽 팔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지멘은 오른쪽을 돌아보았다. 오른팔 상완에 단검이 꽂혀 있었 다. 지멘은 시선을 옮겼다. 칼날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깊숙하 게 들어온 단검을 더 비틀어 밀어넣으려 애쓰고 있는 손이 보였 다. 지멘은 그 손 뒤편을 보았다. 태양이 녹아내린 것 같은 석양 속에서 부풀어 오른 레콘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지멘의 손에서 망치가 떨어졌다.
그 동작에 놀란 레콘이 단검을 확 떠밀었다. 지멘은 왼쪽으로 휘청하다가 뒤로 넘어질 뻔했다. 그러면 아실이 크게 다친다. 지 멘은 왼손으로 가까운 나무를 움켜쥐었다. 겨우 똑바로 서자 지멘은 레콘을 바라보았다.
“뭄토.”
지멘의 이상한 목소리를 들은 아실은 배낭에서 황급히 빠져나 왔다. 그녀가 지멘의 어깨 너머로 앞을 보았을 때 아실과 뭄토의 눈길이 맞부딪쳤다. 당황하고 있던 뭄토의 눈에 뜨거운 희열 같은 것이 흘렀다. 아실은 뭄토를 보곤 얼굴을 찡그렸다. 그때 그녀의 눈이 바닥에 떨어진 망치를 보았다.
아실은 깜짝 놀랐다. 배낭 아래로 떨어질 뻔한 위기를 무릅쓰 며 지멘의 오른팔을 확인한 아실은 그곳에 있는 단검 칼자루를 보곤 눈을 확 불태웠다.
“오른팔을 못 써.”
뭄토는 스스로에게 확신을 주려는 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것은 성공했다. 뭄토는 자신감에 찬 얼굴로 지멘과 아실을 바라보 았다.
“많이 바쁜 것 같군, 지멘. 좀 쉬어야지.”
팔뚝에서 흘러내린 피가 지멘의 깃털을 적셨다. 검은 깃털과 황혼의 붉은 물결 때문에 그 피는 별로 두드러지지 않았다. 하지 만 가까이에서 훅 풍겨 오는 피냄새는 아실을 아찔하게 했다. 축 적된 피로와 자극적인 냄새에 아실의 현실 감각이 위축되었다. 뭄토가 말했다.
“배낭을 벗어. 난 그 애만 데려가면 돼. 그러지 않으면 지멘이 여기 있다고 고함치겠어. 당신, 저 사람들과 사이가 안 좋은 것 같더군.”
지멘은 물끄러미 뭄토를 바라보다가 배낭끈을 붙잡았다. 아실 은 무의식중에 그의 어깨를 부여잡았지만 지멘은 그녀를 억지로 떼내어 배낭째 내려놓았다. 왼손만 사용하는 어색한 동작으로 아 실과 배낭을 내려놓은 지멘은 허리를 폈다. 똑바로 선 지멘을 본 뭄토는 조금 긴장했다. 뭄토는 자신을 독려했다. 무기도 없고 팔 도 하나를 못 쓰는 레콘이 두려울 것은 없다. 뭄토는 주먹을 움 켜쥐었다. 먼 곳에서 계속된 추적에 성이 난 레콘의 계명성이 들려왔다.
“나와! 나오라고! 넌 나가와 인간만 잡냐-!”
지멘은 뭄토에게 달려들었다.
왼손을 앞으로 펼친 채 지멘은 뭄토에게 돌진했다. 어떤 고려 도 없는 순수한 돌진이었다. 뭄토는 벼슬을 곤두세우며 주먹을 빠르게 휘둘렀다. 잠깐 사이에 지멘의 상체에 세 번의 타격이 꽂 혔다. 그런데 지멘의 속도가 줄지 않았다.
네 번째 주먹을 뻗으려던 뭄토도 자신의 예상보다 지멘이 너무 가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멘은 철판이라도 뚫을 듯한 주 먹을 맞으면서 그냥 달려들고 있었다. 뭄토는 당황했다. 그는 지 멘을 떠밀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뭄토의 세상이 암흑으로 뒤덮 였다.
지멘은 뭄토의 머리를 왼손으로 움켜쥐었다.
뭄토는 쇳소리를 내며 지멘의 왼팔을 움켜쥐었다. 억지로 그 손을 뜯어내려 했지만 지멘의 손은 달라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 았다. 뭄토는 버둥거렸다. 그는 지멘의 다리를 걷어찼다. 하지만 지멘은 조금 전 주먹을 무시한 것처럼 뭄토의 발길질도 무시했 다. 뭄토는 지멘의 왼팔을 비틀었다. 무익한 시도였다. 지멘의 완력이 대단할 거라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뭄토가 느낀 지멘의 완력과 악력은 깃털이 빠질 수준이었다. 그때 뭄토는 끔찍한 사실을 깨달았다.
“레콘은 잡을 줄 모르냐, 이 자식아!”
지멘은 뭄토의 머리를 터뜨리려 하고 있었다.
바위에서 물을 짜내는 짓과 비슷하다. 하지만 지멘은 정말 그
것을 시도하고 있었다. 공포 때문에 뭄토는 괴력을 발휘했다. 그는 머리가 붙잡힌 채 뛰어올랐다. 지멘의 몸이 따라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왼손을 풀지 않았다. 허공에서도 지멘의 손가락은 여전히 뭄토의 머리를 파고들었다. 뭄토는 비명을 지르려 했다. 그러나 지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아래로 떨어지며 지멘은 뭄토의 몸을 휘둘렀다.
뭄토의 몸이 채찍처럼 바닥을 때렸다.
말도 안 되는 장면에 아실은 혀를 깨물 뻔했다. 뭄토의 목뼈가 부러지지 않은 것은 지멘의 왼팔에 결사적으로 매달렸기 때문인 것 같다. 마찰 때문에 뭄토의 피부가 찢어졌다. 뭄토의 머리를 찌르고 있는 지멘의 손가락 아래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지멘은 왼손을 들어 올렸다. 뭄토는 다리를 버둥거리며 그 손 을 따라 올라갔다. 지멘의 손가락은 찢어진 뭄토의 피부 안을 파 고들었다. 뭄토는 피에 젖은 지멘의 손가락이 자신의 두개골에 닿았다고 느꼈다. 뼈에는 감각이 없으니 그런 느낌이 사실일 리 없다. 하지만 뭄토는 그렇게 느꼈다. 온몸이 부서지는 아픔 속에 서 뭄토는 헐떡였다.
“놔…… 놔.”
“저 애는 줄 수 없어.”
아실은 위화감을 느꼈다. 지멘의 말투는 경고나 협박이 아니었 다. 지멘의 어조는 내게 소중한 것이라서 내줄 수가 없다고 말하 는 어조였다. 지멘도 자신의 말투가 좀 어색하다고 느낀 듯 다시 말했다.
“절대로 줄 수 없다.”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 말이다. 지멘은 말하는 것을 포기하고 뭄토의 의견을 구했다.
“알겠어?”
“제발…… 놔줘요. 키컥! 놔줘.”
“알겠어?”
“알았어요. 확실히… 알았어요!”
지멘은 왼팔을 끌어당겼다. 뭄토는 더럭 겁을 집어먹었다. 지 멘은 놓아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지멘은 계속해서 뭄토의 머리를 짓누를 것이다. 뭄토의 머리뼈를 부수고 뇌를 헤집고 마침내 그 것들이 뭉개져 지멘의 주먹 안에서 죽처럼 변할 때까지 손가락에 서 힘을 빼지 않을 것이다.
지멘은 뭄토를 앞으로 던졌다.
뭄토는 피투성이 얼굴로 힘없이 나동그라졌다. 벼슬과 깃털에 엉겨붙은 핏덩이가 끔찍하다. 지멘은 손가락이 저린 듯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했다. 그리고 오른팔에 꽂힌 단검을 움켜쥐었다. 지멘은 오른쪽 어깨를 뒤로 당기면서 왼팔을 잡아당겼다. 지멘의 팔뚝에서 핏줄기가 뿜어져 나와 바닥을 더럽혔다. 짙은 피 냄새가 목향과 초향, 토향 같은 것을 완전히 지워 버렸다. 아 실은 질식할 것 같았다. 지멘은 단검을 한 번 휘둘러 피를 뿌려 낸 다음 뭄토에게 던졌다. 뭄토는 가슴에 떨어진 단검을 내버려 둔 채 헐떡거리며 지멘을 바라보았다.
“가.”
뭄토는 불신에 찬 눈으로 지멘을 바라볼 뿐 움직이지 않았다. 지멘은 짜증 섞인 눈으로 뭄토를 바라보다가 왼손을 불쑥 내밀 었다.
매의 발톱처럼 구부린 지멘의 손가락들을 본 뭄토는 기겁하며 일어섰다. 단검을 움켜쥔 뭄토는 벼슬이 찢어져라 도망쳤다. 쿵쾅거리는 소리가 꽤 오랫동안 들려왔다.
지멘은 오른팔을 내려다보았다.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천천히 손가락부터 움직여 보았다. 손가락이 제대로 움직이는 것을 확인 한 지멘은 통증을 참으며 팔 전체를 움직였다. 혈관이나 신경이 크게 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오른팔이 회복될 수 있다고 판단한 지멘은 배낭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실은 이미 배낭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형 겊과 주머니를 본 지멘은 천천히 바닥에 앉았다. 그녀는 지멘의 오른팔 옆으로 돌아가 상처를 살폈다. 흩어진 깃털들을 대충 뽑 고 정리한 아실은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어 상처에 치덕치덕 발랐 다. 기둥 같은 지멘의 팔에 헝겊을 감는 것은 쉽지 않았다. 지멘 의 왼손이 고전하는 그녀를 도와주었다.
치료를 끝낸 아실은 손수건을 꺼내어 피에 젖은 손을 닦았다. 하지만 마음에 묻은 불안은 닦아 낼 방법이 없었다. 아실은 흐려 진 눈으로 지멘을 바라보았다. 태양이 이울어 그녀의 시야는 더 욱 가무레했다.
지멘은 아실의 표정에 담긴 근심을 읽었다. 주위에 적대적인 레콘들이 가득한 상황에서 한쪽 팔이 부자유스럽다는 것은 치명 적이다. 지멘의 깃털 색깔을 닮은 밤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그 나마 위안거리였다. 지멘은 해가 지기를 기다려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하며 무릎을 아실의 뒤쪽으로 폈다.
아실은 그 다리에 걸터앉았다.
고개를 떨어뜨린 아실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조금 전 일어났던 일이 그녀를 동요시키고 있었다. 뭄토의 집념 때문 에 놀란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아실은 그렇게 자신을 속일 수 없었다. 아실의 마음에 파문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지멘의 대답이었다.
‘저 애는 줄 수 없어.’
그것은 동료를 뺏길 수 없다는 의미의 말이 아니었다. 그 말의 얇은 껍질 안쪽에는 쉽게 비치는 의미가 있다. 그들이 통제할 수 없기에 무시하고 있었던 것. 그들이 서로의 유일한 친구이고 가 족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말이었다.
물론 세상에 죽음을 약속한 친구나 가족은 없다.
아실은 지멘의 손에 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친구의 손에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지멘으로 하여금 가족을 죽이게 하고 싶 지도 않았다.
“너는 여자만 죽이냐!”
하늘에 포돗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지멘과 아실은 일어섰다. 숲은 밤의 차가운 호흡을 하고 있었다. 지멘은 부자유스러운 오 른팔 때문에 배낭을 메는 것에 애를 먹었다. 배낭이 출렁거릴 때 마다 아실이 신음했다. 지멘은 좀 더 조심스럽게 움직이려 했고, 아실을 편하게 해 주는 대신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가까스 로 배낭을 멘 다음 지멘은 자신의 멍청함을 저주했다. 좀 더 주 위가 밝을 때 망치를 주워 두었어야 했다. 숲의 발치에는 이미 어둠이 두껍게 깔려 있었다. 지멘은 망치가 있음 직한 곳을 발끝 의 감각으로 더듬었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장소에서 낮과 밤 의 공간을 일치시키는 것은 매우 힘들다. 지멘은 짧지 않은 시간 을 허비한 끝에 망치를 걷어찰 수 있었다. 부딪힌 발보다 화가 난 머리가 더 아팠다. 지멘은 투덜거리지 않으려 애쓰며 망치를 집어 들었다.
지멘은 숲을 걸었다.
밤은 잠과 꿈의 시간이라 믿는 도깨비들이 보았다면 슬퍼했을 것이다. 그 밤은 잠과 꿈의 시간이 아니었다. 레콘들은 암흑 속 에 숨은 지멘을 찾기 어렵자 메아리로 그를 괴롭히기로 결정했 다. 사방에서 계명성이 들려왔다. 켜켜이 쌓여 있는 산들은 그 메아리를 왜곡시켰다. 소리의 방향을 찾을 수 없었다. 만약 소리 가 들려올 때마다 방향을 바꿨다면 지멘은 밤새도록 쳇바퀴 돌듯 돌아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수색대의 바람이었다. 하지 만 지멘은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한쪽 팔을 못 쓰는 상태에서도 지멘은 앞을 막는 것은 무엇이든 때려눕히겠다는 기세로 걸었다. 아실은 분명히 백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소리가 들려왔는 데도 태연하게 그 옆을 지나치는 지멘의 모습에 당황했다. 도저 히 희망을 떠올리기 어려운 조건이었지만 아실은 밤이 보내는 은닉의 축복이 끝나기 전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아실을 주춤하게 했다.
위아래로 흔들리는 배낭 속에 파묻힌 채 아실은 자신의 상실감 을 직시했다. 무엇이 그녀를 아쉽고 안타깝게 하는지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불굴의 소녀를 두렵게 했다. 어처구니없는 유혹. 아실은 잠을 자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낯선 느낌이 그녀의 안면을 방해했다. 그녀를 괴롭힌 느낌은 하늘누리 의 유수부원들에게 자주 발병하는 직업병과 비슷한 것이었다. 지멘이 멈춰 서 있었다.
아실은 꿈틀거리며 배낭 바깥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밀생한 가문비나무들 때문에 별빛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밤과 가문비나무는 검은빛 깃털의 도망자에겐 바랄 수 있는 최선의 조건들이다. 하지만 중상을 입은 부상자가 걷기엔 최악의 조건이다. 지멘 의 호흡은 불규칙했다. 그는 조금씩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쉬어야겠군.”
지멘은 소경처럼 주위를 더듬다가 겨우 적당한 자리를 찾았다. 배낭을 벗어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지멘은 천천히 허물어졌다. 땅 은 차가웠다. 지멘은 뜨거운 몸을 가문비나무 밑동에 기대었다. 아실은 지멘이 일어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배낭에서 빠져나왔다. 자기 손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암흑 때문에 지멘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아실은 지멘을 부르 려 했다. 그러나 지멘은 그녀에게 말할 수 없다. 아실은 지멘의 숨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찾았다.
“지친 놈하고 싸우기 싫다. 당장 나와!”
아실은 지지러졌다. 바로 곁에서 천둥처럼 힌치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이 아실의 몸을 때리는 것 같았다. 지멘의 호흡 도 딱 멈췄다.
“빌어먹을 자식. 벌써 내뺀거 아냐?”
두려운 일이었다. 힌치오의 투덜거림은 계명성이 아니었다. 그 런데도 그 목소리가 아실의 귀에 뚜렷하게 들렸다. 아실은 힌치 오가 어디쯤 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걸음으로도 몇 십 걸음 되지 않을 것이다. 레콘에게는 악수하는 거리나 다름없다. 아실은 입을 틀어막은 채 힌치오가 떠나길 기다렸다. 그런데 힌 치오는 떠나지 않았다.
“이게 무슨 냄새야? 어이, 팔리탐. 무슨 냄새 안 나?”
“뭐라 했소? 제발 부탁이니 화가 난다고 무턱대고 계명성을 지르지 마시오. 좀 대비해야 할 거 아니오. 이거야 원. 고막이 상 하지 않았나 싶군.”
“무슨 냄새 맡지 못했냐고 물었어. 이거 꼭 피 냄새 같은데.”
아실은 코를 발름거렸다. 하지만 지멘과 함께 있던 그녀는 피 냄새를 맡을 수 없었다. 헝겊으로 단단히 묶어 두었지만 지멘의 상처에서는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안정을 취하는 대신 계속 걸었기 때문이다. 힌치오가 다시 외쳤다.
“케무륵! 살보-! 이리 와 봐! 혹시 근처에서 사냥질하 고 있는 녀석 있으면 대답해!”
지멘은 배낭을 내려놓은 곳으로 손을 뻗었다. 배낭을 끌어당기 던 지멘은 그것이 가볍다는 것을 알고 가슴이 철렁했다. 아실이 배낭 밖에 있었다. 다른 레콘들이 힌치오에게 합류하기 위해 달 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한시라도 빨리 도망쳐야 한다. 그런데 아 실은 배낭 안에 있지 않았다.
지멘의 부리가 열렸다.
“어디 있어?”
아실의 몸이 뻣뻣해졌다. 지멘의 속삭임은 힌치오의 외침보다. 그리고 달려오는 여러 명의 발소리보다 그녀를 더 경악시켰다. 저것이 혼잣말인가? 그렇지 않으면 나를 부르는 건가? 지멘이 다시 말했다.
“어디 있을까?”
혼잣말처럼 꾸며진 말이다.아실은 정신을 차렸다. 달려오는 레콘들의 발소리에 숲이 진동했다. 케무륵과 살보 외에 다른 레 콘들도 외침을 듣고 달려오는 것 같았다. 아실은 결심했다.
“충분한 난폭함을 가지고 있다면, 네 삶을 시련으로 만들어라.”
지멘은 깃털을 조금 부풀렸다. 아실이 계속 속삭였다.
“레콘 독립국에는 레콘이 필요하지요. 여기엔 많은 레콘이 있 어요. 하텐그라쥬로 가요. 그게 저를 돕는 길이에요.”
그리고 아실은 다급하게 짧은 단어 하나를 더 말했다. 지멘은 그 말을 들었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전혀 맥 락에 맞지 않는 엉뚱한 단어였다. 다급함과 흥분 때문에 또다시 지멘은 혼잣말처럼 꾸미지 않은 채 말했다.
“가위?”
아실은 진저리쳤다. 조금만 더 있으면 아예 대화가 이루어질 지경이다. 아실은 다급하게 속삭였다.
“아마 그것이 답일 거예요. 이제 알겠어요. 가위. 당신도 알게 될 거예요…… 하텐그라쥬로 꼭 가요.”
아실은 가라고 말했다. 함께 가겠다는 뜻이 아니다. 레콘 독립 국에는 레콘이 필요하다. 이곳에는 많은 레콘이 있다. 아실은 이 곳에 남을 것이다. 암살공이 어떻게 레콘들을 모았는지, 그리고 이곳에 분리주의의 희망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그리고 지멘을 탈출시키기 위해.
“알겠어요? 제 말대로 할 거죠?”
보낼 수 없다. 지멘은 결코 아실을 보낼 수 없었다. 그는 약간 난폭하게 손을 흔들었다. 아실을 붙잡아 배낭에 집어넣을 생각이 었다. 아실은 지멘의 손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레콘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서로의 위치를 확 인하는 고함도 들려왔다.
“제발, 지멘. 그렇게 해야 해요.”
아실은 그대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멘을 알고 있다. 이대로 달려가 버리면 지멘은 그녀를 뒤따라올 것이다. 아 니, 고함을 질러 버릴지도 모른다. 레콘들을 자신에게 오도록 유 인하여 아실이 도망칠 수 있도록. 아실은 확신에 가까운 느낌으 로 그것을 깨달았다.
“부탁이에요, 지멘…….”
지멘의 손이 땅을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실 주변의 땅을 만 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온 지멘의 손이 곧 아실을 붙잡을 것 같았다. 아실은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지 멘의 집게손가락이 마침내 아실의 발목을 살짝 건드렸다. 아실은 주먹을 깨물었다.
“타이모의 이름으로 부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