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8장] – 아는 것과 우는 것 2
자유무역당 잔하일 사무소.
보통 자유무역당의 지부 사무소는 그리 눈에 뜨이지 않는 건물 이다. 자유무역당은 그 당원들에게 재력을 뽐내는 것을 강력하게 금하고 있다. 자유무역당이 취급하는 상품들을 보관하는 커다란 창고는 보통 도시 바깥에 따로 두기 때문에 지부 사무소가 작아 도 불편할 것은 없다. 중소 도시의 경우에는 아예 상품 창고 구 석에 지부 사무소를 차리기도 한다. 잔하일의 경우엔 시내에 사 무소를 두었지만 그것은 당의 지침을 철저히 따르는 아담한 건물이었다. 레콘인 쵸지의 견해로는 약간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작은 건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건물 바깥으로 나와 마당에 서서 당원이 건네준 서신을 읽었다.
서신을 다 읽은 쵸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떠돌아다니는 레콘을 수배하기 위한 가장 간단한 방법은 두 가지다. 우선 유료도로당 에 협조를 구하는 방법이 있다. 대단한 속도로 움직이는 레콘들 은 다른 종족보다 유료도로를 더 자주 맞닥뜨리니 합리적인 방법 이다. 다른 한 가지 방법은 쵸지의 경우처럼 전역금을 받기 위해 자유무역당 지부를 찾아왔을 때 전언을 전달하는 방법이다. 밑천 이 많이 필요한 숙원 사업을 계획하고 있는 레콘 전역병은 전역 금을 일시불로 받지만 신부 탐색자나 당장 돈이 필요 없는 경우 에는 분할해서 받기도 한다. 이 경우 그들은 자유무역당에 가서 원하는 만큼의 돈을 지급받을 수 있다. 자유무역당은 제국군에게 약간의 수수료를 받고 그런 지급 업무를 대행해 준다.
하지만 유료도로당이든 자유무역당이든 연락 업무까지 대행할 의무는 없으므로 엘시는 그들을 수배하기 위해 유료도로당과 자 유무역당에 약간의 비용을 지불했을 것이다. 쵸지는 엘시가 자신 이 빨리 와 주길 바란다고 추측했다. 다른 레콘보다 훨씬 커서 평소에는 얼굴 옆으로 늘어지는 벼슬을 만지작거리며 쵸지는 생 각에 잠겼다.
엘시는 하루라도 빨리 지멘을 잡을 계획이었다. 쵸지는 그 이 유에 대해 생각했다. 황제의 대장군이 일개 수배자를 잡으러 나 설 이유가 무엇인가? 그 상황의 의외성이 쵸지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마당의 축담에 걸터앉아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반 시간쯤 생각한 후, 쵸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쵸지가 한 일은 장부를 꺼내는 것이었다. 자신의 전역금 장부 를 꺼내 남은 금액을 확인한 후 그는 일어섰다. 건물 안으로 들 어서려다가 생각을 바꿔 당원을 불러내기로 했다. 그가 건물 안 으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인간이 밖으로 나오는 쪽이 덜 위험할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자유무역당원들도 자신들의 아담한 건 물을 또 위험에 노출시키고 싶은 생각은 없는 듯 황급히 사환인 듯한 소녀 한 명을 마당으로 내보냈다. 쵸지는 사환에게 장부를 건네며 말했다.
“남은 돈 전부 다 찾고 싶다.”
“전액 출금. 확인 부탁합니다.”
“그래. 전액 출금이다. 됐냐?”
사환은 왜 갑자기 전역금을 전부 찾고 싶은 것인지 설명해 줬 으면 좋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쵸지는 그 질문에 답하는 대신 사환이 당장 뛰어 들어가게 만들었다.
“돈이 없냐?”
사환은 그보다 더 큰 모욕이 어디 있냐는 투로 분개하여 달려 들어갔다. 아무래도 재력에 대한 당의 철학을 체화하기엔 좀 어 린 탓이다. 사환은 곧 묵직한 금편 주머니와 장부, 필기구 등을 얹은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사환은 그것을 가벼워 보이게끔 애 썼는데, 아무래도 쵸지의 남은 전역금이 얼마 되지도 않는다고 주장하고 싶은 듯했다. 하지만 그런 시도를 하기엔 주머니의 무 게가 만만찮았다. 사환의 팔목에 무리가 가기 전 쵸지는 주머니 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쟁반 위에 놓인 장부에 서명하려 했다. 사환은 장부를 끌어당겼다.
“서명 전 확인 필수.”
쵸지는 피식 웃었다. 철학은 배우지 않았어도 규칙은 확실히 익힌 모양이다. 하긴 어떤 규칙이든 일단 익힌 후에야 거기서 철 학을 발견할 수 있는 법이니까. 그러고 보니 말투도 상당히 자유 무역당스러웠다.
“이걸 다 세려면 나는 짜증 날 텐데, 꼬마야. 그리고 경험상 사람들은 내가 짜증 내는 것을 싫어해.”
사환 소녀는 쟁반을 내려놓고 손을 불쑥 내밀었다. 쵸지는 어 쩌나 보려고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사환은 주머니를 열어 금편들 을 쏟았다. 그녀의 손이 몇 번 꿈지럭거린 후 금편들은 열 개씩 쌓여서 열과 행을 맞춰 좍 배열되었다. 쵸지가 보기엔 계가를 하 는 국수만큼이나 날렵한 솜씨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확인했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주머니 속에 금편을 다시 쏟아 부었 다. 그러고 나서야 소녀는 쵸지가 서명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쵸 지는 서명을 끝낸 장부를 다시 쟁반 위에 얹어 놓았다.
“장부는 폐기해줘. 한 가지 더. 이 도시에서 술맛이 제일 찮은 곳이 어디냐?”
“주점?”
“그래. 레콘 손님도 잘 받는 곳으로.”
소녀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그러나 소녀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쵸지가 말했다.
“자유무역당은 특정 업체를 후원하지 않습니다. 알아, 안다고. 가까운 순서대로 부르면 되잖아. 고객 편의를 위해 그 정도는 괜찮아.”
사환은 쵸지가 꽤 오랫동안 자유무역당을 겪었다는 것을 알았다. 하긴 장부에 찍혀 있는 자유무역당의 도장은 한두 개가 아니 었다. 결정을 내린 사환은 자신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도록 수십 군데의 상호를 댔다.
그리고 사환은 기절할 만큼 놀랐다. 쵸지가 금편을 꺼내어 던 져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환은 그 일을 자랑할 수 없었다. 그것은 사환만의 경험이 아니었으므로.
그날 잔하일의 거지들은 인생 최고의 날을 경험했다. 어떤 정 신 나간 레콘이 금편을 뿌리고 다닌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잔하일 전체로 퍼져 나갔다. 쵸지가 주점에서 술을 마시는 동안 온갖 사 람들이 그를 찾아왔다. 가족이 아프다. 빚쟁이 때문에 죽을 지경 이다. 공부하고 싶은데 학자금이 필요하다. 끗발이 서는 것 같으 니 한판만 제대로 먹으면 된다. 쵸지는 돈을 뭉텅뭉텅 나눠 주 었다. 조건은 한 가지뿐이었다.
“갚겠다는 소리는 하지 마. 그럼 안 줘.”
꿈속에서나 들을 법한 조건이었지만 사람들은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다음 날 아침 쵸지는 자신이 남은 전역금을 깡그리 썼다는 것 을 알았다. 상쾌했다.
“남은 것도 없고, 받을 것도 없고. 세상에 나늬 같은 여자도 없고. 흠. 사나이가 죽기 좋은 조건이다.”
술기운에 머리가 약간 아팠지만 쵸지는 가볍게 나나본을 향해 뛰었다. 커다란 벼슬이 바람에 나부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