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9장] – 불씨의 비행 3
세찬 바람에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을 가다듬던 틸러는 하마터 면 뒤쪽으로 구를 뻔했다.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예상했던 탈해 가 뒤편에 앉기를 고집했기에 다행히 추락사는 모면했다. 틸러는 도깨비의 넓은 가슴에 기대어 헐떡거렸다. 고맙다고 하고 싶었지 만 양쪽에서 들려오는 엄청난 날개 소리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냥 호의적으로 탈해의 팔을 두드리고 바람에 저 항하여 몸을 앞으로 수그렸다.
틸러가 충분히 고정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탈해는 번뜩이로 하 여금 날렵한 호선을 그리게 했다. 딱정벌레가 빈 하늘을 매끄럽 게 미끄러져 가자 앞쪽에 정우의 모습이 나타났다.
정우는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두 무릎을 끌어안아 가슴에 대고 있는 평범하기까지 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런 모습도 수백 미 터 상공에서는 평범할 수 없다. 틸러는 허공에 앉아 있는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수백 미터 아래 곤두박질칠 것만 같았다.
딱정벌레의 날개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느낀 정우가 무릎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틸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 빨리 천을 펼쳤다. 도깨비지를 썼다간 찢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틸러는 천을 선택했다. 거기엔 큼직한 글씨가 씌어져 있었다.
‘규리하 공 아가씨, 제발 내려와 주세요.’
정우는 그 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천에 고 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뒤로 스르르 미끄러졌다.
틸러는 기가 막혔다. 다른 곳을 보면서 자신이 앉아 있는 환상 구조물을 다룰 수 있다는 건가? 그런 것 같았다. 새들도 힘껏 날 개치지 않으면 그런 비행을 할 수 없겠지만, 그리고 뒤로 날 수 있는 새는 거의 없지만, 정우는 오도카니 앉은 자세로 뒤로 날아 갔다. 삽시간에 정우는 수백 미터 저편까지 날아갔다. 하늘누리 의 반대편 가슴 지느러미 상공이다.
틸러는 넌더리를 내며 아우성치는 천을 품 안에 말아 넣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정우를 가리켰고 탈해는 딱정벌레 번뜩이를 그 곳으로 날아가게 했다. 아마도 열다섯 번째나 마흔 번째의 일일 것이다. 그 이상일 수도 있고.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정우 가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은 것이 벌써 며칠째다. 틸러는 그녀가 졸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곤두박질칠 거라 예상했다. 탈해의 의견 도 마찬가지였다.
강제로라도 정우를 끌어내려야겠지만, 유수부의 가장 노련한 갑충사들도 그녀를 잡는 것보다는 독수리를 잡는 것이 쉽다고 공 언했다. 정우는 하늘에서 태어난 사람 같았다. 대개의 경우 그녀 는 한자리에 가만히 떠 있었지만 딱정벌레나 환상 계단을 이용한 누군가가 다가오면 앉은 채 또는 선 채 휙휙 날아다녔다. 실제로 는 그녀를 지탱하는 환상 구조물이 엄청난 속도로 변화하는 것이 겠지만 그 구조물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이상 날아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모습은 언제나 경이적이다. 하늘을 나는 사람을 그린 상상화 속 인물은 언제나 새의 모습을 흉내 낸다. 두 다리를 뒤로 뻗고 두 팔을 날개처럼 펼친 모습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정우는 선 채로 또는 앉은 채로 날았다. 허 공에서도 정우는 머리를 하늘로 향하고 다리를 땅으로 향하는 기 초적인 품위를 잃지 않았다. 어쨌든 그 이동 속도는 놀라웠고, 틸러와 탈해는 그녀를 강제로 끌어내리는 대신 설득하기로 했다. 사실상 선택 가능한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틸러가 하려는 짓을 제외하면.
탈해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틸러를 내려다보았다.
틸러는 밧줄 끝을 자신의 허리와 상체에 묶고 있었다. 그것은 날아오르기 전 될 수 있는 한 자제하자고 약속한 짓을 틸러가 할 것이라는 증거였다. 탈해는 틸러의 어깨를 두드렸다. 틸러가 뒤를 돌아보았다.
‘정말 할 겁니까?
탈해는 입 모양으로 말했다. 딱정벌레가 비행 중일 때 탑승자 는 대화가 불가능하다. 틸러도 입을 벙긋거려 자신의 의사를 전 달했다.
‘해야 합니다.’
‘당신이나 정우 둘 중 한 명이, 또는 두 사람 모두 크게 다칠 수 있습니다.’
틸러는 손을 신경질적으로 펼쳐 보였다가 다시 손가락 하나를 펼쳤다.
‘제기랄, 엿새째입니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잠 한숨 자지 않고 엿새째 저러고 계십니다. 인간은 저럴 수 없어요. 규리하 공 아가씨를 죽일 작정입니까?”
물론 탈해는 정우가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어르신이 되는 도깨비와 다르니까. 탈해는 결단이 필요한 시기라는 점에 동의 했다.
‘좋습니다. 해 봅시다.’
탈해는 번뜩이에게 몇 가지 명령을 전달했다. 번뜩이는 정우에 게 날아가는 대신 하늘의 높은 쪽, 별들의 산책로로 날아올랐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지만 틸러는 옆에서 내려앉는 구 름을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래쪽 땅에는 봄 냄새가 가득 했지만 이곳, 구름이 태어나는 높이는 아직 겨울을 독백 중이었 다. 아마 일 년 내내 그럴 것이다. 틸러는 갑충사에게 빌려 입은 비행복이 아니었다면 얼어 죽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상당한 고도까지 치솟아오른 번뜩이는 갑자기 몸을 뒤집으며 속날개를 접었다. 날개 소리가 멈췄기에 탈해의 외침은 틸러의 귀에 똑똑히 들어왔다.
“시작합시다!”
틸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밧줄 사리를 옆으로 힘껏 집 어던졌다. 호흡을 빠르게 내쉰 틸러는 눈을 질끈 감고 옆으로 몸 을 기울였다. 속날개가 요동치고 있을 때 그런 짓을 했다면 틸러는 크게 다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속날개는 안으로 접혀 있기 때문에 틸러는 미끄러지며 딱정벌레의 옆으로 굴러떨어졌다.
중력이 번뜩이로부터 틸러를 인계받았다.
틸러의 등뼈가 부러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에 탈해는 번뜩이 를 조금 하강하게 했다. 그렇게 배려했는데도 틸러를 덮친 충격 은 엄청났다. 온몸의 뼈가 한꺼번에 몸 안쪽으로 쇄도하는 기분 을 느끼며 틸러는 비명을 질렀다. 위아래로 거칠게 출렁이던 몸 이 곧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틸러는 귀 안쪽에 모래가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토하면 안 돼. 이런 바람 속에 서 토했다간 숨이 막혀 죽을지도 몰라. 틸러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눈도 뜨지 않았다. 아직 시각을 감당할 여유가 없었다. 세찬 바람이 그를 허공에 굴렸다. 회전은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 다. 이 회전을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 틸 러는 눈을 뜨기로 했다.
‘오, 멍청이. 왜 눈을 뜬 거지? 그 빌어먹을 빛을 내 눈 앞에 서 치워! 나를 고문하려는 거야? 잠깐. 저건 태양인가? 와, 며칠 이 순식간에 지나가는군.’
세계가 무섭게 회전하고 있었다. 세상의 동서남북이 순식간에 틸러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틸러는 이것이 자신이 저지른 최 악의 실수이기만을 애타게 원했다. 이보다 더 큰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면 살 맛이 안 날 테니까. 그리고 틸러는 정우를 지나쳐 버리지 않기 위해 몸의 회전을 멈추려고 애썼다.
원래 두 발이 바닥에서 떨어져 밧줄 하나에 의지하여 매달린 사람은 자신의 회전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다. 하지만 틸러를 매단 딱정벌레 번뜩이는 고속으로 활강하고 있었다. 그 속도가 틸 러를 도와주었다. 틸러는 몸을 넓게 펼쳤고 그러자 바람을 안은 연이 회전하지 않는 것처럼 틸러의 몸도 고정되었다. 줄의 방향 이 정반대일 뿐 틸러의 모습은 연과 비슷했다.
그렇게 틸러는 번뜩이의 배 아래 5미터쯤 되는 높이에 매달린 채 정우를 향해 날아들었다.
날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정우가 날개 소리를 듣고 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들은 정우의 뒤쪽 상공에서 활강해 내려가 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틸러는 펄럭거리는 자신의 옷소리를 들으 며 도대체 그게 무슨 소용인가 하는 회의에 빠졌다. 몸에 잘 달 라붙는 갑충사의 비행복도 틸러에겐 고막이 상하지나 않을까 걱 정되는 소음의 원천이었다. 그는 정우가 그 소리를 들었나 궁금 해하며 그녀의 모습을 찾았다.
정우는 그의 앞쪽에 있었다. 딱정벌레가 비스듬하게 하강하고 있었기 때문에 틸러는 정우의 모습과 하늘누리의 모습, 그리고 그 아래쪽 넓은 규리하 땅을 한꺼번에 볼 수 있었다. 기가 확꺾 이는 광경이었다. 틸러는 자신이 그대로 땅으로 곤두박질칠 거라 는 두려움을 떨치기 어려웠다. ‘왜 제국군 훈련 과정엔 딱정벌레 에 매달린 채 활강하는 부위를 위한 특별 과정이 없을까?’ 자신 이 발견해 낸 제국 군사 교육의 치명적 맹점에 애석해하며 틸러 는 정우와의 거리를 가늠했다. 사실 결정적인 순간이 오기 전까 지 틸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아래에 매달린 틸러를 정확하게 정우에게 충돌시키는 일은 탈해의 몫이었다.
탈해는 자신이 떠올린 충돌이라는 용어에 두려움을 느꼈다. 속날개를 이용하면 딱정벌레는 훨씬 부드러운 방식으로 틸러를 정우에게 접근시킬 수 있다. 하지만 겉날개만 펼친 채 활강할 때는 속도를 조절하는 일이 굉장히 어렵다.
그리고 틸러는 탈해를 별로 도와주지 않았다. 정우에 대한 걱 정밖에 할 수 없었던 틸러는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도깨비의 심 리에 입힐 영향은 고려하지도 않은 채 자신은 정우의 목뼈를 부 러뜨리고 싶은 생각은 없노라고 말했다. 가능한 일이다. 레콘이 아닌 인간이라도 지상에서 두 발로 달리는 것만으로 인간의 목뼈 를 부러뜨릴 힘 정도는 낼 수 있다. 그리고 딱정벌레의 활강 속 도는 인간의 주력보다 월등히 높다. 그 때문에 계획은 아주 복잡 한 것이 되었다.
적당한 지점에 도달했을 때 번뜩이는 갑자기 속날개를 펼치며 공중에 멈춰야 한다. 그러면 틸러는 날아가던 관성에 의해 진자 처럼 앞으로 날아가다가 속도가 떨어질 때쯤 정우와 만나게 된 다. 그리고 안전하게 정우를 붙드는 것이다. 당연히 몹시 어려운 일이고 연습은 해 볼 수 없는 일이다. 사실상 미친 짓에 가깝지 만, 두 사람은 정우를 이대로 놔두는 것이 더 미친 짓이라는 것 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실패할 거야. 절대로 실패하면 안 돼!’
전망과 소망 사이의 모순은 탈해 머리돌에게도 낯설지 않았다. 번뜩이의 활강 속도와 각도, 정우의 위치를 세심히 관찰하던 탈 해가 결단을 내렸다. 순간 번뜩이는 활강을 중단하고 속날개를 확 펼쳤다.
틸러는 밧줄에 매달려 날아가던 자신의 몸이 거대한 호를 그리 는 것을 느꼈다. 창자가 뒤집히는 충격을 애써 참으며 틸러는 진 폭의 정점에 정우가 있기를 애원했다.
그리고 홀연히 정우의 모습이 나타났다.
정우는 갑자기 들려온 날개 소리에 놀라 위를 보고 있었고, 아 래에서 날아드는 틸러의 모습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틸러는 손을 죽 내밀었다. 각도는 훌륭했다. 가장 이상적인 각도는 아니 지만 틸러의 팔로 정우를 붙잡을 정도는 되었다. 틸러는 희열에 차서 정우의 허리를 향해 두 팔을 휘둘렀다.
그리고 틸러는 허공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때 정우도 아래에서 날아드는 틸러를 발견했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틸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정우 를 보고 있었다. 정우의 몸 앞 50센티미터도 되지 않을 지점에서 진동이 끝나 버린 것이다. 틸러는 발을 버둥거리고 손을 휘저었 다. 그러니까 헤엄을 치는 것과 유사한 짓을 한 것이다. 하지만 진자 운동의 냉엄한 법칙은 틸러의 안쓰러운 노력을 무시하며 그의 몸을 반대 방향으로 이끌기 시작했다. 틸러는 고함을 빽 질렀다.
“앞으로! 앞으로!”
뒤로, 뒤로,
틸러의 몸은 속절없이 뒤로 날아갔다. ‘으아, 두 뼘 거리인 데!’ 물론 진자 운동은 반복 운동이니 뒤로 흔들린 다음 다시 앞 으로 흔들릴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탈해와 틸러의 계획을 알아 챈 정우가 도망쳐 버릴 것이다. 틸러는 울상을 지은 채 정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정우의 얼굴에 나타난 병색을 본 틸러는 가 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제 가까이서 보게 된 정우의 얼굴은 벌 겋게 열이 올라 당장이라도…………….
정우는 폭소를 터뜨렸다.
뒤로 거대하게 흔들리며 틸러는 어리둥절한 기분을 느꼈다. 정우는 허리를 꺾으며 웃었다. 아예 발을 구르고 싶은 눈치였다. 결국 그녀는 쭈그리고 앉았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 어깨 를 바르르 경련하며 웃었다.
뒤로 진동했던 틸러는 정점에서 잠깐 멈췄다가 다시 앞으로 흔 들렸다. 긴장감이 사라진 자리에 반갑잖은 메스꺼움이 냉큼 뛰어 들었고 틸러는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앞으로, 뒤로, 다시 앞 으로, 결국 틸러는 진동을 멈추고 허공에 매달려 뱅글뱅글 돌았 다. 지상 수백 미터 상공에서 펼쳐진 박진감 있는 활극의 매우 품위 없는 결말이다. 틸러는 언뜻언뜻 시야에 들어오는 정우를 보려 애썼다. 그때 정우가 눈물이 그렁한 얼굴을 들어 올렸다. 정우는 숨이 막혀 콜록거리다가 간신히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짓을 본 틸러는 환호했다.
‘아래로 가요.’
위쪽에서 번뜩이를 몰고 있던 탈해도 정우의 손짓을 보았다. 정우는 똑바로 일어서더니 스르르 내려갔다. 그녀의 몸이 규리하 성을 향하고 있음을 확인한 탈해는 환호를 지르며 번뜩이를 아래 로 이동시켰다. 물론 탈해는 아래쪽에 매달려 있는 틸러 달비의 존재를 잊지는 않았다. 급강하를 시도했다간 틸러의 몸에 충돌할 지도 모르고 그런 사고를 피할 수 있다 해도 틸러는 대단히 불쾌 한 경험을 할 것이다. 그래서 탈해는 조바심을 억누르며 최대한 부드럽게 하강했다. 그 때문에 정우는 두 사람보다 한참 앞서 규 리하 성에 내려섰다. 정우가 내려선 곳은 얼마 전 엘시를 만나기 위해 떠올랐던 장소였다.
바닥을 두 발로 단단히 디딘 정우는 번뜩이가 뒤따라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딱정벌레의 날개 바람이 쇠약해진 정우를 날려 버 릴까 두려웠던 탈해는 조금 떨어진 위치에 번뜩이를 착륙시켰다. 물론 그 착륙은 순탄치 않았다. 탈해는 먼저 딱정벌레가 4미터쯤 되는 높이에 머물게 했다. 그러자 앞서 바닥에 발을 디딘 틸러는 밧줄을 풀려고 애썼다. 서두름을 경계하는 온갖 조언들은 이 경 우 틸러에게 정확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황급히 밧줄을 풀 려던 틸러는 그만 밧줄에 엉켜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틸러는 얼굴을 빨갛게 부풀린 채 스스로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 꼴을 보다 못한 탈해가 딱정벌레 쪽에서 밧줄을 풀어 주었다. 밧줄이 아래로 떨어져 고함을 지르고 있는 틸러의 볼을 찰싹 때렸다. 틸 러는 꽤 한심한 기분을 느꼈지만 구속에서 해방된 것은 반가웠 다. 그는 일어섰고 밧줄을 질질 끌며 정우에게 달려갔다.
정우는 위아래 입술을 깨문 채 웃음 가득한 얼굴로 틸러를 보 았다. 하지만 틸러는 헐떡거림 때문에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래 서 정우가 먼저 말했다.
“오늘이 며칠이죠?”
“규리하 공 아가씨! 엿새입니다. 맙소사, 엿새라고요!”
“엿새? 아아. 그렇다면 12월 25일이겠군요.”
“예? 예. 그렇지요. 그게 그렇습니다. 규리하 공 아가씨께서는 엿새 동안이나 하늘에 계셨단 말입니다. 괜찮으십니까? 젠장, 괜찮으실 리가 없지. 이런 멍청한 질문이라니!”
인간은 엿새 동안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버틸 수 없다. 틸 러는 정우가 당장 실신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황을 좀 수습하고 정우를 관찰한 틸러는 뭔가가 좀 이상했다. 정우는 바람에 흩어진 머릿결과 약간 창백한 볼빛을 하고 있을 뿐 건강상의 문제는 없어 보였다. 불가능한 일이다. 틸러는 허둥 거렸다.
“어떻게…… 규리하 공 아가씨, 의사를 대기시키겠습니다. 아 니, 식당을, 잠자리를, 혹시 화장실을………… 아뇨, 그러니까…….”
“틸러, 진정해요. 저는 괜찮아요.”
틸러는 진정하지 못했고 흥분은 곧 두 배로 늘어났다. 번뜩이 를 착륙시킨 탈해가 성큼성큼 달려와 동참했기 때문이다.
“괜찮을 리 없어! 정우, 업어 줄까? 괜히 버티지 마. 어서 안 으로……”
정우는 입 앞에 손가락을 세웠다. 두 사람이 불만족스러운 기 분 속에 침묵하자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저는 괜찮아요.”
틸러는 두 팔을 내밀려고 했다. 하지만 팔들은 아직도 밧줄에 엉켜 있었다. 그래서 그는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어떻게 괜찮다는 겁니까? 엿새 동안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셨 고 잠 한숨 주무시지 않으셨습니다. 규리하 공 아가씨, 인간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허공을 걸을 수도 없죠.”
“예?”
“환상 계단 말이에요.”
무슨 말인가 생각하던 틸러는 조금 후 소스라치는 기분을 느꼈 다. 두려움 때문에 뒷걸음치고 싶은 것을 억누르며 틸러는 정우 의 얼굴과 몸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물론 틸러가 보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었지만 용인의 감각을 가지고 있지 않은 틸러에겐 정우의 내부를 볼 능력이 없었다.
환상 계단은 상상한 사람에게만 영향을 줄 뿐 다른 사람에겐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런데 상상한 본인에게 주는 영향은 어디 까지인가? 가장 널리 알려진 용도, 즉 그것을 밟고 하늘누리를 오르내릴 수 있다는 것이 환상 계단의 모든 것일까? 틸러는 혼란 스러웠다. 정우는 졸린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굶주린 것처럼 보 이지도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 한 꺼풀 덮여 있는 것은 낯설음에 대한 놀라움처럼 보였다. 마치 이 세상을 처음 보는 것처럼, 다 른 세상에서 온 방문자처럼.
충격에 빠진 틸러와 달리 탈해는 어렵지 않게 자신의 입장을 정리했다. 정우가 괜찮은 것처럼 보였고 탈해에게 그것은 만족의 충분조건이었다. 탈해는 정우의 어깨를 가볍게 붙잡으며 웃었다.
“너, 사람 걱정하게 했어.”
“미안해. 생각 좀 정리하고 곧 내려올 생각이었어. 엿새나 흐 른 줄은 몰랐네.”
탈해는 엿새나 흐른 줄 몰랐다는 말을 깊은 상념과 시간적 간 격의 반비례 관계쯤으로 생각하고 대수롭잖게 웃었다. 하지만 틸 러는 새로운 의혹을 느꼈다. 그의 얼굴을 본 정우가 고개를 꾸벅 했다.
“웃은 것 미안해요. 당신을 비웃은 것은 절대로 아니에요. 몹 시 놀라서 그랬던 거예요. 틸러. 어쩌려고 그렇게 위험한 짓을 한 거죠? 물가와 높은 곳을 조심하라고 자당께서 말씀해 주지 않 으셨어요?”
“어, 저, 그 점에 있어서 제 어머니는 단순한 방식의 신봉자입 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조심하라고만 하셨지요.”
“예?”
“그래서 저는 아버지에게 꾸중 들을 일을 피했습니다.”
“아아…… 하하하.”
정우의 웃음은 탈해를 행복하게 했다. 하지만 틸러는 찔끔 놀 랐다. 틸러는 의혹과 경외감, 그 밖에도 명명하기 어려운 몇 가 지 감정을 더 느끼며 정우를 바라보았다. 틸러의 눈길은 정우의 웃음을 잘 건조시켜 표본을 만든 다음 두고두고 연구해 보고 싶 다는 눈길이었다. 탈해가 말했다.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나는 너를 좋은 음식으로 꽉꽉 채워 잠 자리에 눕혀 놓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어. 가자고.”
정우는 자신의 소매와 바짓단을 살펴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음. 씻는 것 먼저. 내 꼴 좀 봐. 엉망이야. 엿새라더니 정말 그런가 봐.”
“씻는다고? 어, 물에 들어가지. 잠깐. 쇠약한 킴이 뜨거운 물 에 들어가도 되던가? 달비 부위, 괜찮겠습니까?”
틸러가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정우는 까치발을 하며, 그래도 탈해의 명치 근처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말했다.
“나 쇠약하지 않아, 탈해.”
“네가 그렇다면, 알았어. 하지만 씻을 준비를 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니까 일단은 간단하게라도 뭐 좀 먹도록 하자. 달비 부위! 정우를 방으로 좀 데려가 주겠습니까? 저는 번뜩이를 마구 간에 데려다 놓고 곧 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틸러는 그 요구에 당황했다. 하지만 탈해는 이미 번뜩이를 향 해 뛰어가고 있었다. 틸러는 주춤거리지 않기로 했다. 그는 성큼 성큼 정우에게 걸어갔다. 그러자 정우가 놀란 눈으로 틸러를 바라보았다.
“틸러? 화났어요?”
“예? 아뇨. 천만에요. 화가 날 리 있겠습니까. 아가씨가 마침 내 내려오셔서 정말 기쁩니다. 크게 웃을 수도 있습니다.하, 하, 하. 죄송합니다. 설득력이 별로 없죠?”
“감투 정신은 높이 살게요.”
“규리하 공 아가씨, 도대체 하늘누리의 환상 계단이 아가씨에 게 무슨 일을 한 것입니까? 아가씨의 지난 엿새는 인간이 견딜 수 없는 시간입니다.”
정우는 틸러를 말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틸러,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틸러는 정우가 왜 갑자기 남자가 여자에게 가장 듣고 싶지 않 은 말을 꺼내는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틸러를 보며 정우가 말했다.
“가끔 잘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버릇이 있긴 하지만,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사과하지도 않지만, 그건 아마도 당신이 사과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겠지요.”
낯익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틸러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꺼 낸 것은 질문이었다. 그는 환상 계단에 대해 전문가연한 적은 없 었다. 틸러는 정우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모르고 하는 일에 화를 낼 순 없겠지요. 저는 화를 내면 안 돼요. 예, 화내지 않겠어요. 게다가 그때 당신은 술에 취해 있었 으니까.”
틸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보름 전의 일이었지만 틸러는 생생 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맙소사. 그날 밤’ 취기와 흥분 속에서 정우에게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한 밤이었다.
“게다가 그것은 저를 걱정해서 한 말이니 화를 내는 건 배은망 덕한 일이겠지요. 당신은 제게 잘해 줘요. 당신이 없었다면 저는 이곳에서 버틸 수 없었을지도 몰라요. 고마워요. 하지만, 아니, 어쩌면 그래서 저는 그게 싫은 건지도 모르겠어요. 당신에게 저 는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고 싶어요. 간단하게 ‘정우는 이런 사 람이야.’라고 말하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그만인 사람이고 싶진 않아요. 친구는 그런 거잖아요? 오래 사귈수록 더 서로를 잘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는 사람. 그리고 그 사실에 감사하는 것. 그것은 참 멋진 일이지요.”
“죄송합니다, 규리하 공 아가씨.”
“어머, 사과하지 마요. 사과를 받아내려고 한 말처럼 되니까 싫어요. 그냥 약속만 해 줘요.”
“무슨 약속을 바라십니까?”
“앞으로 저를 위해 무슨 일을 하려면, 음, 깜짝 선물을 할 때 만 빼고 저와 상의해 줬으면 좋겠어요. 틸러. 당신이 무슨 판단 을 했는지 알아요. 제가 다른 사람이 다치는 것이 싫어서 자신을 지키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저를 잘 모르 고 내린 판단이에요. 저는 물론 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다치는 것이 싫어요. 하지만 자신을 포기한 것은 아니에요. 저는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고 저를 지킬 수 있어요. 그날 봤지요? 당신 부하 들은 괜히 다쳤어요. 당신이 저를 제멋대로 판단한 것 때문에 그 런 불필요한 고통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아냐, 이러면 안 돼. 정우, 이러지 마. 미안해요, 틸러. 그날 제 눈앞에서 일어났던 싸움을 생각하니 마음이 흐려져서.”
틸러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극심한 부상자는 없었다. 원래가 치명적인 무기를 사용할 수 없는 풍습인 만큼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틸러는 그것들이 변명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앞으론 규리하 공 아가씨와 상의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게도 약속 한 가지만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뭘 약속하면 되죠?”
“앞으로 제가 잘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면 즉시 지적해 주십시오.”
정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미소였다.
“그렇게 하죠. 그리고 지난 엿새 동안의 일을 질문했죠?”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겠네요. 이것이 적절한 비유가 될지. 처녀에게 애 낳는 일을 설명하기는 어렵겠지요. 그런 것처럼 저의 지난 엿새는 비 슷한 엿새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에겐 설명하는 것이 어려운, 그 런 시간이었어요. 당신이 저를 염려하는 거라면 그러지 않아도 돼요. 불쾌하거나 괴로운 일은 없었어요. 당신이 호기심에서 질 문하는 것이라면 이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네요.”
정우는 갸웃거림을 멈추고 틸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정 우의 눈 안에 담겨 있는 것에 매혹적인 두려움을 느꼈다. 자신이 정우의 대답을 감당할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 가 대답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하려는 순간 정우가 말했다.
“저는 용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