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9장] – 불씨의 비행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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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9장] – 불씨의 비행 9


비스그라쥬 백 데라시 또한 다가오는 봄에 대해 발케네 공락 토 빌파와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다가오는 새해로 이월시킬 걱정거리가 거의 없었다. 올해의 문 제는 이미 대부분 매듭지어졌다. 규리하 전쟁도 순식간이라 할 만큼 빠르게 끝났다. 서약 지지파는 지하로 숨었거나 고사했다.

엘시 에더리를 규리하 공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황제의 뜻에 방해 되는 인물은 한데 묶어서 발케네로 보냈다. 엘시는 자동으로 파 혼한 셈이며 엘시의 강력한 경쟁자가 될 수 있는 스카리는 경쟁 에서 물러났다. 부냐와 스카리가 발케네로 도망치게 함으로써 두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한 것이다. 데라시는 스스로에게 치하라도 보내고 싶었다. 하늘누리의 이동 계획을 설명하는 비스그라쥬 백 의 니름은 그래서 활기찼다.

<새해에는 시구리아트 산맥 동쪽을 순방하기로 결정되어 있습 니다. 유수부에서는 새해 1월 1일에 출발하면 4월 20일쯤 시구리 아트 산맥을 넘을 수 있을 것이라 확인해 주었습니다. 전사자들 의 유해를 이송하는 것 때문에 속도가 조금 느린 셈입니다. 5월 에 잠바이에 도달하면 나로드, 바랄누리, 아제, 휘포리,로세이 즈를 거쳐 연말쯤이면 메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 에는 한계선 남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만, 그것은 내년의 상황을 봐서 결정해야겠지요. 여기 상세 계획표입니다.〉 황제가 그 계획표를 승인해 주면 그것은 즉각 뱀단지를 통해 해당 도시로 전달될 것이다. 올해 계획표는 이미 조금 늦었다. 규리하 전쟁 때문에 지체되었기 때문이다. 제국의 각 지역에서는 손꼽아 계획표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황제의 뜻은 뱀단지를 통해 순식간에 전달되지만 반대 방향의 의사 전달에는 뱀단지가 이용되기 어렵다. 정신 억압으로 뱀을 조종하는 대신 손으로 뱀을 집어 뱀단지에 넣거나 빼는 것으로도 약간의 의사 전달은 할 수 있지만 그 방법으로는 매우 축약된 의 미조차도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다. 역시 황제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려면 황제의 대전에 나가 접견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지방 행정관들이나 영주들의 입장에서는 언제나 광대한 제국을 가 로질러 사람을 보낼 수 없기 때문에 조금 덜 급하거나 덜 중요한 사안들은 제국 수도가 자신에게 오는 시기까지 미루는 것을 선택 한다. 따라서 그들이 새해 계획을 세우려면 먼저 제국 수도의 이 동 계획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데라시는 황제가 어서 그것을 보 고 승인해 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치천제는 계획표를 보지 않 았다.

<짐의 생각과는 조금 다르군.〉

<혹 따로 염두에 두신 곳이 있습니까? 시구리아트 산맥 동쪽이 라면 조정은 가능합니다. 그리고 서쪽일 경우라도 4월 안에 도달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역시 가능합니다. 계획표를 보시면 아시겠 지만 4월 이전에도 꽤 넓은 지역을 방문하게 되어 있습니다.>

치천제는 여전히 계획표를 보지 않았다. 황제는 아예 몸을 돌 려 벽난로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한계선 이남으로 내려가기 전까지는 일 년 내내 타는 불꽃이 활활 타고 있었다. 치천제가 닐렀다.

<발케네로 간다.〉

데라시는 비늘을 부딪쳤다. 비스그라쥬 백은 갑자기 숨이 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커다란 멧돼지를 통째로 삼키기라도 한 것 같았다.

<뭐라고 니르셨습니까, 폐하?>

<새해에는 발케네로 간다. 규리하 점령군을 그대로 나나본 쪽 으로 이동시키도록 해라. 엘시가 없으니 그것에 관해서는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과 의논하도록.〉

데라시는 규리하 지역 치안 유지 병력만 남겨 두고 회군할 준비를 하고 있던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이 이 소식을 들으면 놀랄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조금 후 자신도 놀라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충격이 너무 컸던 탓이다.

<발케네로…………… 발케네에…………… 폐하. 발케네로 병력과 함께 가신다는 니름이십니까? 무엇 때문이신지 닐러 주십시오.〉

<물론 전쟁이지.>

<전쟁이오?>

〈그래.〉

데라시의 몸에서 일어선 비늘이 옷을 거세게 찔렀다. 그 때문 에 데라시의 옷은 바람에 펄럭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여전히 벽 난로를 들여다보는 황제의 옆얼굴을 보며 데라시는 두 손을 마주 쥐었다. 침착해야 한다. 불가능한 명령을 자신에게 부여하면서 데라시는 슬픔마저 느꼈다. 내가 왜 이런 꼴을 겪어야 하나. 몇 분 전까지도 참 즐거웠는데.

<폐하, 무슨 연유로 발케네 공과 전쟁을 한다는 니름이십니까?> 

<짐의 죄수를 훔쳐 간 것을 벌하기 위해서다.>

데라시는 그것이 공개적인 이유임을 깨달았다.

<다른 이유는 없는지요?>

<아이저 규리하를 붙잡는다는 이유까지는 공개해도 되겠지. 그 러나 『천경비록』을 되찾는다는 이유는 공개할 수 없는 것이다.> 

<폐하, 일전에 폐하께서는 제게 암살공이 폐하를 자신의 땅으 로 불러들이고자 애쓰고 있다는 내용의 니름을 해 주신 적이 있 습니다. 그런데 발케네로 가신다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은 일 같 습니다. 더군다나 엘시 백작도 없는 상태에서…>

데라시는 화들짝 놀랐다. 어떤 치명적인 단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함정이다.’ 데라시는 합리적인 설명을 떠올릴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함정이다. 태위 레이첼 라보도 없고 대장군 엘시 에더리도 없는 상태에서 하늘누리가 발케네로 가는 것은 함정에 빠지는 일이다. 데라시는 닐렀다.

<절대로 불가합니다, 폐하!〉

〈데라시, 누가 네게 짐의 뜻을 통제할 권한을 주었느냐?>

격정 때문에 해서는 안 될 니름을 했다. 데라시는 머리를 조아 렸다.

<용서하십시오, 폐하. 제가 혼란에 빠져 커다란 무례를 범했습 니다. 그러나 저의 니름 대신 제 뜻을 살펴 주십시오. 폐하의 뜻 을 재고해 주시길 간곡하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너무나도 수상합 니다. 발케네 공은 오랫동안 폐하의 관심을 자신의 영지로 끌어 들이려 애썼습니다. 바로 그러한 때에 레이헬 라보 태위와 엘시 에더리 대장군 모두가 폐하의 곁에 없습니다. 우연치고는 너무도 기이합니다. 엘시 에더리 대장군의 경우엔 그나마 이유가 뚜렷합 니다만 레이헬 라보 태위가 사라진 것은 아직도 그 이유가 뚜렷 하지 않습니다. 살피고 살피고 또 살펴 주십시오. 두 사람 중 한 명이라도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엘시는 있어도 데려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예?>

<이 전쟁은 그 수행자에게 큰 빚을 남길 전쟁이 될 것이다. 엘 시에게 그런 것을 주지는 않는다. 그가 지멘을 추적하고자 했을 때 짐이 그를 보낸 것도 그 때문이다.〉

데라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경애하는 황제를 바라보 았다. 큰 빚을 남기는 전쟁? 전쟁은 진 자에게도 이긴 자에게도 씻을 수 없는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다. 황제가 특별히 큰 빚이라고 표현한다면…… 그 순간 데라시는 죽음과 같은 공포를 느꼈다.

살육전이다.

황제는 승자에게 절대로 씻을 수 없는 피비린내를 남기는 전쟁 을 수행할 생각이다. 발케네를 완전히 도륙하는 것이다.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다 죽이고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후손을 남길 능 력을 박탈하는 전쟁. 단종시키는 전쟁.

그런 전쟁이 엘시의 지휘 하에 이루어질 수는 없다.

엘시는 차기 황제가 될 테니까.

데라시는 벼락 같은 속도로 모든 것을 이해했다. 발케네는 독 립적인 도둑의 땅이다. 그 땅에 유사 이래로 처음 지배 구조라는 것을 심어 놓은 것은 도깨비감투를 가진 냉혹한 사내들이었다. 그 땅은 새 황제에게도 쉽게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날이 올지조차 의심스럽다. 치천제는 그런 귀찮은 자들을 아예 지상에 서 없애 버릴 작정을 한 것이다. 그리고 영원한 반역의 증거가 될 도깨비감투 또한 파괴할 것이다. 그 일은 또한 제국의 모든 사람에게 나가 황제에 대한 환멸과 증오, 공포도 줄 것이다.

그 감정들은 인간 황제에 대한 폭발적인 애정으로 바뀔 것이다. 

“엘시 백작을 적이 없는 황제로 만들고 싶으신 겁니까? 그래서 분리주의자를 격파하고 서약 지지파를 격파하고 암살공을 격파하 시려는 겁니까? 엘시 백작을 사랑받는 황제로 만들고 싶으신 겁니까? 그래서 직접 아킨스로우 협곡과 페시론 섬의 일을 재현하시려는 겁니까?”

그렇다. 차기 황제다. 엘시에겐 모든 것이 주어졌다. 대장군, 제국 만병장, 규리하 공. 그 다음은 당연히 황위다. 데라시는 자신이 왜 진작 그런 결론을 내리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 다. 아니, 그런 결론을 내리기 싫었던 것이리라. 대다수 사람들 과 마찬가지로 데라시는 심장을 적출한 황제가 오랫동안 제국을 다스릴 것이라 믿었고 차기 황제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것은 그가 사랑하는 제국의 안정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현 지배자가 아직 젊은데 차기 지배자를 고민해야 한다면 그것은 안 정적인 지배 구조라 할 수 없다. 그래서 데라시는 차기 황제에 대한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거부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황제는 데라시의 무의식적 소망에 관심이 없었다. 사실상 오래전부터 그에게 알려 주고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다. 데라시는 화를 낼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하 나하나 설명하지 않았을 뿐 황제는 전부 알려 주고 있었다. 데라 시는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눈가를 훔쳤다. 그의 손이 은빛으로 빛났다.

나가들은 거의 울지 않는다. 그리고 일생에 몇 번 흔치 않은 기회로 울게 될 때 그들은 어떤 종족도, 어떤 생물도 흘리지 않 는 특이한 눈물을 흘린다. 그 눈물은 은빛으로 빛나기 때문에 은 루(銀)라고 불린다. 자신의 눈물이지만 데라시에게 그것은 낯 설고 놀랍게만 보였다. ‘내 몸에서 이런 것이 흘러나온 건가? 놀라워하며 데라시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닦아 내었다. 황제는 그를 보지 않았다.

<폐하…….>

<가서 새 계획표를 준비해 오너라.>

아니다. 더 나은 방법이 있을 것이다. 더 온건하고 더 부드러 운 방법이 있을 것이다. 엘시 에더리만이 유일한 차기 황제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렇다. 황제 는 지상에 대한 그녀의 특별한 거부감 때문에 지상의 지배자 자 리를 빨리 다른 이에게 넘겨주려고 무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데라시는 애타게 닐렀다.

<폐하, 부디 잠시만 니르게 해 주십시오.>

<듣지 않겠다. 가라.>

<폐하.>

<가라.>

더 니를 수 없었다. 데라시는 자신이 일어날 수 있을 거라 믿 지 않았지만 그의 몸은 데라시를 놀라게 했다. 그의 몸은 반사적 으로 일어나 보온복을 집어 들고는 데라시를 문가로 데려갔다. 보온복을 입고 문손잡이를 쥐었을 때 데라시는 겨우 뒤를 돌아볼 정도의 여유를 되찾았다. 그는 황제를 돌아보았다.

황제는 벽난로 속의 불꽃만 바라보고 있었다. 데라시는 절망감 속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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