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1장] – 분쟁을 음미하는 태도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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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1장] – 분쟁을 음미하는 태도 9


니어엘 헨로는 조용히 벽에 걸린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군사용 으로 사용될 만한 지도는 아니다. 넓은 제국 영토를 한 장에 담 고 있으니 축척이 너무 큰 편이다. 바늘 끝에 먹물을 묻혀 지도 에 살짝 찍는다 해도 니어엘이 있는 중대 본부보다 몇 십 배나 넓은 지역을 가릴 것이다.

바깥은 아직 캄캄했다. 하지만 제국 지도를 들여다보면서 니어 엘은 해가 이미 뜬 지역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간을 대충 가늠해 본 니어엘은 지금쯤 일출이 일어나고 있을 지역들을 북에 서 남으로 죽 읽어 내려갔다. 라지프, 구룬, 휘포리나 카라보라 는 조금 더 기다려야 할 테고, 비스그라쥬도 마찬가지. 소리그라 쥬에서는 일출이 이미 끝났을 테고, 하텐그라쥬. 하텐그라쥬에서 는 지금 일출이 시작되고 있을 것이다.

니어엘은 재미있는 생각을 떠올렸다. 책상 위에 놓인 촛불을 끌어당겨 그 앞에 왼손을 가져갔다. 그녀의 손바닥이 드리우는 그림자가 벽에 있는 제국 지도를 덮었다. 니어엘은 손과 초의 위 치를 조절하여 지도 위에 주야 경계선을 만들었다. 그림자가 덮 고 있는 곳은 밤이다. 니어엘은 천천히 손을 움직여 하텐그라쥬 의 일출을 재현했다.

지도는 너무 작고 제국은 너무 넓다. 손을 충분히 느리게 움직 이지 못한 니어엘은 순식간에 시모그라쥬의 일출까지 만들어 버 렸다. 원래는 반 시간쯤 후에 일어날 일이다. 니어엘은 씩 웃으 며 손을 내렸다.

‘밤을 치우는 것도 손바닥을 움직이는 것처럼 쉬우면 좋을 테지.’

니어엘 헨로는 칼을 허리에 찼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옆구리 에 투구를 낀 채 문밖으로 나갔다. 집무실 바깥에는 중대 행보관 이 기다리고 있었다.

행보관 커레이야 만스 교위의 거무죽죽한 얼굴은 요즘 들어 더 욱 초췌해져 환자 수준에 가까웠다. 30년 근속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속칭 장군급 교위지만 그의 장구한 복무 기간 동안에도 요즘과 같은 나날은 처음일 것이다. 만스 교위의 얼굴을 보는 것만 으로도 니어엘은 부위의 시간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병 들에겐 장교라고 따돌림 당하고 장교들에겐 사병 아니냐는 의혹 의 눈초리를 받는, 하지만 결코 기죽지 않는 군대 계급의 이단아 들의 시간인 것이다. 만스 교위의 경례를 받은 니어엘이 말했다.. 

“수고했어, 만스 교위.”

집중력이 떨어져 있던 커레이야 만스 교위는 중대장의 말을 이 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커레이야 만스는 새벽부터 자신 이 뭘 수고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조금 후 중대장이 며칠 동안의 일을 한꺼번에 말한 것임을 깨닫고 미소를 지었다.

그때 건물 밖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거대한 함성과 욕설들, 웃 음소리가 들려왔다. 니어엘은 그쪽을 보고 빙긋 웃었다. 부위들 이 뭔가 사납고 난폭한 이야기로 사병들을 흥분시키고 있는 듯했 다. 그것은 또한 자신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부위들은 그들의 시간이 온 것을 그런 식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니어엘은 웃음 띤 얼굴로 만스를 바라보았다. 만스는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만스, 왜 그러지?”

“예? 아, 아닙니다. 중대장님.”

“여긴 우리 둘밖에 없어. 걱정하지 말고 말해.”

“참 어린 애들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니어엘은 동감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커레이야 만스는 그녀의 아버지보다도 나이가 많다. 인생을 값있게 살아온 사람으로서 그 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만스는 또한 군인이다.

“하지만 이런 시기에 수교위님이 저희 중대를 맡고 계신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북부에는 온통 연공서열로 계급 받아먹은 장교들뿐입니다.”

장군급 교위라면 이 정도 품평은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교위님은 다르십니다.”

니어엘은 빙긋 웃었다.

“타이모 사건? 나는 좋은 교위님을 모시고 있던 부위였을 뿐이야. 내 가치는 지금부터 증명하게 되겠지.”

“금은 변하지 않습니다.”

“고맙군. 그러면 나가서 저 바보들을 중대장의 말 한마디 들을 수 있을 만큼만 진정시켜 놔.”

만스 교위는 경례하고 밖으로 나갔다. 짧은 함성이 몇 번 들리 고 곧 고요해졌다. 니어엘은 싱긋 웃으며 투구를 썼다. 그리고 문을 열고 연병장으로 나갔다.

연병장에는 중대원 천 명이 도열해 있었다. 개인 무장은 모두 완비했고 게다가 한결같이 질 좋은 것들이다. 보이는 것이 그 정 도이니, 원래 잘 보이지 않는 노고를 하게 되어 있는 행보관의 업무 특성상 그의 노고를 짐작할 만하다. 니어엘이 단상에 오르 는 동안 중대원들은 투구 아래에서 예리하게 빛나는 눈으로 그녀 의 일거수일투족을 쫓았다.

아직은 밤이었다. 하늘 어디에도 푸른 기운은 보이지 않았고 까불거리는 것은 연병장 이곳저곳에 피워 놓은 화톳불과 선임 반 장들이 들고 있는 횃불뿐이다. 천 명이 내쉬는 숨소리는 분명치 않지만 그 열기는 뚜렷하다. 니어엘은 칼자루 끝에 왼손을 올려 놓은 채 중대원들을 죽 둘러보았다.

“밥 잘 먹었냐?”

횃불 몇 개가 흔들렸다. 병사들 대부분이 시루에서 막 쪄낸 떡같은 얼굴로 중대장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자랑스러운 중대장이 다시 질문했다.

“밥 잘 먹었냐고.”

우레 같은 함성이 대답했다.

“자, 잘 먹었습니다!”

“응. 그럼 배 좀 꺼트리자. 1소대 1분대부터 출발.”

1소대 1분대장 도라 머시튼 수전사는 1소대장 다미갈 카루스 부위의 엄한 눈빛을 받은 후에야 겨우 자신의 분대를 출발시킬 수 있었다.

물론 그녀의 머릿속은 다른 중대원 전부의 머릿속과 비슷한 생 각으로 꽉 차 있었다. 도대체 전우애와 조국, 불굴의 투쟁심, 폐 하께 바치는 위대한 승리 따위는 다 어디로 간 거지? 설마 중대 장은 싸울 생각이 없는 건가?

머시튼 수전사와 중대원들 전부의 의문은 다섯 시간 후에 해소 되었다.

다섯 시간의 행군 끝에 니어엘 헨로의 중대는 경비대 본부 앞 쪽에 나와 진을 치고 있는 텡 마바노 조장의 발케네 국경 수비 대와 조우했다. 니어엘 헨로와 텡 마바노 사이에 벌어진 전투는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어어이! 뭐 하러 왔습니까!”

“그쪽 경비대 접수하러 왔습니다!”

“꼭 그래야겠습니까?”

“까라면 까야지 뭐 별 수 있나요.”

“젠장. 이틀만 더 있다 오면 좋았을 텐데요.

“왜지요?”

“내일까지 지켜야 한 달로 쳐 준단 말입니다. 오늘 도망치면 반급이지요. 그래서 말인데, 물러갔다가 모레 다시 와 주면 안 되겠습니까?”

“월급 반 주면 고려해 보지요.”

“쳇.”

텡 마바노 조장은 엄숙하게 퇴각을 명령했다. 총 전투 시간 30초였다. 발케네 국경 경비대는 본부 쪽이 아닌 엉뚱한 방향으 로 퇴각했다. 그쪽에는 이미 먼지를 일으키며 멀어지고 있는 수 레들이 보였다. 니어엘 헨로 수교위는 다시 시루에 들어가 있는 부하 장교들과 사병들에게 말했다.

“그러면 경비대 건물 접수하고 밥 지어 먹자. 점심 먹을 때가 됐네.”

“추…… 추적하여 섬멸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 수레에 는 필시 중요한 것들이 있을 텐데요.”

“끽해야 냄새 나는 속옷 정도일 거다.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하 는 장병들은 가도 좋다.”

니어엘은 그런 대답으로 부위들의 입을 틀어막아 놓고는 말을 몰아 발케네 국경 경비대 본부 건물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중대원들은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다 가 중대장의 뒤를 따랐다.

니어엘 헨로의 중대가 본부 건물을 접수하고 나서 사흘 뒤, 경 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은 정체가 불분명한 군대의 출현을 알려 왔다. 부위들은 즉각 소대원들에게 전투 준비를 외쳤다. 그러나 뒤늦게 나타난 니어엘 헨로가 한가로운 태도로 말했다.

“몇 명이야?”

“서른 명쯤 됩니다.”

“알았어. 말을 가져와.”

말이 대령되었다. 니어엘은 당직 사관에게 지휘권도 반환받지 않은 채 몇 명의 병사를 골라 진지 밖으로 나갔다. 장병들은 다 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니어엘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접근하고 있던 부대는 달려오는 니어엘과 병사들을 보고 재빨 리 방어진을 구축했다. 니어엘은 충분히 먼 거리에서 말을 멈춰 세우고 외쳤다.

“여, 날씨 좋지요? 저는 제국군 수전사 히어엘 넨로입니다.” 

방어진 가운데서 늙수그레한 무사가 걸어 나왔다. 조금 낡았지 만 손질이 잘된 무구들로 몸을 감싼 무사는 니어엘 헨로가 지휘 하는 병사들을 죽 둘러보고 나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나는 바질튼의 남작 친 피타오다. 그래, 좋은 날씨군.”

“오늘 밤은 보름달이 뜰 겁니다.”

“응.”

“그럼 수고하십시오.”

“그쪽도.”

니어엘은 말을 돌렸다. 니어엘을 호위하던 병사들은 울상이 된 얼굴을 적군에게 보여 주느니 표정 없는 엉덩이를 보여 주는 것 이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니어엘은 병사들과 함께 진지로 돌 아왔고 친 피타오 남작은 진지를 한참 우회하여 사라졌다.

그날 밤에는 니어엘의 말처럼 환한 보름달이 떴다. 석식이 끝 난 다음 니어엘은 당직사관을 제외한 장교들을 전부 불러들였 다. 장교들은 전부 자신이 뜻하지 않게 반역자의 일원이 된 듯한 얼굴을 하고 모여들었다. 니어엘은 빙긋 웃고 나서 화두 같은 질문으로 회의 시작을 알렸다.

“군인은 뭐 하는 사람인가.”

중대장이 화두 같은 말로 시작한 탓인지 장교들은 회의실을 선 방 같은 분위기로 바꿔 버렸다. 모든 장교들이 동시에 참선 수행 에 들어가자 분위기가 자못 경건했다. 그러나 군대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 정신 세계의 비경을 탐구할 권한도 서열순으로 주어지 는 것은 분명하다. 서열 최하위자인 가리아 릿폴 부위가 마지 못 해 손을 드는 것을 본 니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릿폴 부위가 말했다.

“군인은 황제 폐하와 제국을 위해 싸우는 자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겐 그렇게 말해. 나한테는 그러지 말고.”

“……모르겠습니다.”

니어엘은 웃으며 1소대장 다미갈 카루스 부위를 바라보았다. 카루스 부위는 중대장님이 말씀하시죠 하는 눈빛을 되돌려주었 다. 니어엘은 말했다.

“군인은 걷는 사람이다.”

장교들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사병들이 나 할 말이 중대장의 입에서 나오고 있으니 그럴 법도 했다. 

“군인은 지겹게 걷지. 비가 와도 걷고 눈이 와도 걷고 진흙탕 이든 늪이든 가리지 않고 걷지. 뚜벅뚜벅 걸어다녀. 그러다가 가 끔 기분 전환할 일이 생기지. 전투 말이야. 하지만 대부분의 시 간 동안은 그냥 이리저리 걸어다니는 것이 군인의 일이야.”

니어엘은 자신의 이론을 현실적 예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텡 마바노 조장은 전투력을 보존하기 위해 퇴각을 결심하고 있었고 그래서 주저 없이 퇴각했다. 이 지역은 전술적 요충지는 아니야. 나 또한 전투력을 보존해야 하기에 친 피타오 남작을 두드려 잡지 않았어. 지금쯤 남작은 졸린 얼굴로 걸어가고 있겠지. 내가 이 근처에서 야영하지 말라고 경고했으니까.”

그날 낮 니어엘과 피타오 남작 사이에 있었던 대담은 이미 중 대 전체에 퍼져 있었지만 장교들은 이제야 보름달이 무슨 의미 인지 알게 되었다. 2소대장 맥키 네미는 어정쩡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중대장님, 저 남작을 공격하여 물리치면 그만큼 적의 세력이 약화되는 것이잖습니까.”

“친 피타오 남작이 발케네 공의 소환에 응한 것은 그러지 않을 능력이 없기 때문이야. 그는 빨리 전쟁터에 도달하고 싶은 생각 뿐이겠지. 그러면 자기 의무는 다한 셈이니까. 그때부터는 고향 이 걱정되니 빨리 돌아가게 해 달라고 조르는 것이 남작의 주된 전투 행동이 될 거야. 그런 인물쯤 발케네 공의 전력에 포함되어 도 문제될 것은 없어. 그자에게 군량이 전혀 없는 것을 보지 못 했나? 가서 발케네 공의 군량이나 축내게 놔두는 편이 나아.” 맥키 네미는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중대장님, 죄송합니다만 우리와 친 피타오 남작의 행동이 뭐 가 다른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적당히 징계받지 않을 만큼만 의무를 다하려는 거냐고 묻고 싶은 거지?”

“무례를 범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맥키 네미의 표정은 제발 무례로 해석해 달라고 말하는 것 같 았다. 니어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장한 장교들의 시선 속에 서 니어엘은 벽에 붙여 놓은 지도로 다가갔다. 발케네 지역의 상세 지도였다.

“우리 중대의 목표는 펜스터다. 레드마 브릭 자작이 이곳을 지키고 있지. 이 친구는 한동안 펜스터를 빠져나올 수 없다. 발케네 동쪽의 소영주들이 암살공의 소환에 응할 수 있도록 길을 열 어 주는 일을 해야 하니까. 마지막 소영주가 지나간 후에야 레드 마는 암살공의 본진에 합류하려 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차단 해야 한다. 당장 그곳으로 달려가지 않는 이유는 짐작하겠지? 그 래. 브릭과 싸우면서 동시에 동쪽에서 오는 소영주들과도 싸울 수는 없기 때문이야. 우리 또한 마지막 소영주가 지나간 다음에 펜스터를 압박해야 한다. 우리는 그때까지 전투력을 보존해야 한다.”

장교들은 재빨리 지도를 살피면서 니어엘의 설명을 따져 보았 다. 3소대장 가리아 릿폴이 다시 발언을 요청했다.

“중대장님, 하지만 왜 상부에서는 우리들만 이곳으로 보내는 겁니까? 아예 처음부터 대규모 군사를 투입하여 펜스터를 점령하 면 펜스터 동쪽 지역을 고립시킬 수 있을 텐데요. 제 생각에 펜 스터 동쪽의 병력이 모두 암살공의 휘하에 집결한 후에 싸우는 것보다는 그것이 낫습니다.”

“상부에서는 아마도 부위가 알 필요 없는 이야기라고 하겠지.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니 말해 주겠어. 그런 식으로 이동하는 소영주들의 병력은 대단치 않아. 하지만 레드마 브릭은 나오면 안 돼. 브릭이 참전할 경우에만 움직이는 병력들이 있는데 이곳, 군스, 미차도, 노바일의 병력이다. 대충 합쳐서 일만 정도. 이곳 의 지배자들은 암살공에게 충성 서약을 하지 않았어. 이들은 브 릭에게 서약했지. 따라서 브릭이 움직이지 않는 한 이들은 암살공을 도와줄 의무가 없어.”

릿폴은 아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맥키 네미가 약간 긴장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브릭을 도울 의무는 있는 것이군요. 우리가 브릭을 압박하면 그들은 우리들을 공격하겠군요.”

“맞아. 따라서 우리는 펜스터를 점령할 수는 없어. 브릭의 병 력만 상대한다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군스와 미차도, 노바 일의 병력 전부와 싸울 수는 없으니까. 우리는 브릭이 암살공에 게 합류하는 것만 저지하면 돼. 닷새 뒤 이 계곡으로 이동한다. 우리는 병력을 최대한 위장한 채 브릭을 겁준다. 서너 개 정도의 중대가 펜스터 주위에 틀어박혀 있다고 믿게 해야 해. 그러면 브 릭은 자기가 펜스터를 비우면 당장 제국군이 쳐들어와서 분탕질 을 칠 거라고 생각하게 되겠지. 브릭이 펜스터에 틀어박히면 다 른 세 곳의 병력도 움직이지 않아.”

장교들의 얼굴이 훨씬 밝아졌다. 니어엘이 말했다.

“아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고 말했지? 그것은 이번에만 설명 하겠다는 뜻이야. 다음에는 설명이 없어. 알겠나!”

니어엘은 책상을 쾅 내리쳤다. 방심 상태였기에 때문에 장교들 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니어엘은 그들이 진정할 틈을 주지 않고 빠르게 말했다.

“알았냐고! 귀관들이 도적을 잡고 산적을 쫓아다니고 있을 때 나는 레콘들과 싸웠다. 그래서 수교위가 되고 귀관들의 중대장이 된 거야. 나는 이제 귀관들을 진급시켜 주겠어. 전쟁 영웅이 되 게 해 주겠다고. 내가 취미 삼아 중대원들과 귀관들에게 아기살 을 가르쳤는 줄 아나? 귀관들의 상관이 적당주의에 빠진 군인이라면 그럴 것 같나! 틀렸어. 나는 귀관들과 중대원들을 폐하의 군인으로 만들어 왔어. 그리고 이제 폐하를 위해 싸울 자리로 귀 관들을 이끌어 가고 있어. 하지만 귀관들이 나를 의심하면 그럴 수 없어. 군인 정신이 빠져가지고 상관을 품평하려 든다면 그럴 수 없어! 황당하다는 표정도, 항의하고 싶다는 표정도, 체념한 듯한 표정도 짓지 마. 귀관들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안 다. 하지만 내가 준비하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준비하지 마! 귀 관들 중 벌써부터 화려하게 싸우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 소대원들 이 서로 싸우건 후장을 따먹건 신경 안 쓰는 사람이 있다는 것 알고 있다!”

가리아 릿폴 부위의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다른 장교들이 가 리아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은 것은 어린 장교에 대한 동정심 때 문이 아니다. 모두들 고개를 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니어엘이 말하고 있는 것은 정확하게 그들이 이 며칠 동안 보인 태도였다. 고개를 들면 중대장의 입에서 아기살이 날아와 눈에 꽂힐 거라 믿는 장교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

“마음의 준비 따위 집어치워! 그런 걸 해야 할 때가 오면 내가 알려 주겠다. 귀관들의 목숨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책임지고 있는 사람은 나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마. 늘 하던 대로 해! 그리고 이 시간 이후로 내가 귀관들에게 사병들도 잘 아는 이야기를 들 려주는 일이 없도록 해. 내가 걸으라고 하면 걸어! 서라고 하면 서! 자라고 하면 자! 그리고 어느 날, 진짜 귀관들의 시간이 왔 을 때 싸워! 머릿속으로 수백 명을 학살하느라 지쳐 빠져서 진짜 전투에서 도망치는 바보들은 보고 싶지 않다! 일어나!”

장교들은 황급히 일어섰다. 그중 많은 이가 탁자에 무릎이나 허벅지를 부딪힌 것이 분명하다. 탁자가 몇 번 들썩였으니까. 하지만 아무도 감히 비명이나 신음을 내지 못했다. 니어엘은 씹어 먹을 듯한 얼굴로 장교들을 노려보았다.

“소대원들에게 가라. 귀관들이 화려하게 죽을 장소까지 데려다 주고 곁에서 함께 싸울 사람들에게 가라. 가서 보살펴라! 해산!” 

장교들은 황급히 경례하고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마지막에 빠 져나간 것은 역시 가리아 릿폴 부위였는데 앞에 있는 사람을 떠 밀고 싶어하는 것이 역력하게 보였다. 니어엘은 그녀를 실망시키 고 싶지 않았기에 험악한 표정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릿폴은 감히 뒤를 돌아보지 못했고 그래서 니어엘의 행동은 과잉 친절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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