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2장] – 모르는 것과 미루는 것 15
데라시는 치천제가 수다로 자신의 심리적 긴장감을 완화하는 인물이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치천제에게는 그 런 습관이 없었다. 정신의 언어라고 할 수 있는 니름을 사용하는 나가들은 다른 나가의 정신 상태를 예민하게 느낄 수 있다. 정신 을 닫을 경우 그런 탐지는 불가능하지만 황제는 정신을 닫지 않 았다. 그래서 데라시는 황제의 긴장감을 잘 느낄 수 있었다. 황 제가 좀 니르기라도 하면 그 긴장감에서 주의를 돌릴 수 있겠지 만 황제는 아무 니름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벽난로 앞에 서서 불꽃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결국 데라시는 무례가 될 것을 각 오하고 닐렀다.
<시키실 일이 없으면 물러가겠습니다.>
황제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
<거기 앉아서 짐의 침묵을 견디는 것이 네가 할 일이다.>
<・・・・・・ 알겠습니다.>
데라시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벽난로 속에서 나무와 함께 시간도 불타는 것 같았다. 치천제는 동상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 다. 아무런 자극이 없자 데라시는 주의력을 잃었다. 어쩔 수 없 이 데라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치천제의 긴장감을 관찰했다. 묘한 느낌이었다. 황제는 무엇인가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그것에 대한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어려운 국면에 도달하여 장고 하는 기사 같았다. 정신적으로 굉장히 긴장해 있지만 증오나 희 열, 고통 같은 감정은 없었다. 황제를 관찰하면서 데라시는 읽을 수 없는 글자로 씌어진 책을 펼쳐 놓고 글자 수를 세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또 한 명의 치천제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데라시는 깜짝 놀라 황제를 올려다보다가 벽난로 쪽을 보았다. 벽난로 앞의 황제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당황하던 데라시는 자신이 잠시 졸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제가 닐렀다.
<피곤한가.>
<죄송합니다, 폐하. 용서하십시오.>
<방 안에서 전쟁 치르느라 힘든 모양이군.>
방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지만 데라시는 자신의 방 안에서 전쟁 을 치르고 있었다. 전쟁은 적대하는 두 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비스그라쥬 백 데라시의 전쟁은 제국 곳곳의 동정 을 파악하거나 동정을 만들어 내는 일이었다. 그래서 데라시는 비나간의 퍼스 노후작이 귀족원 임시 회의를 소집하려 애쓴다는 점, 회의가 개최되면 틀림없이 발케네 전쟁 이야기가 나올 거라 는 점, 그리고 이 전쟁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지 아직 알 수 없 었던 귀족들이 회의 개최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점 등을 알고 있었다. 그중 일부는 그가 그렇게 되도록 조작한 일이 었다. 데라시는 이 전쟁을 사람들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아 직 결정하지 못했기에 다른 사람들도 결정하지 못하도록 방해하 고 있었다. 화려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피곤한 일이기는 했다. <그래, 귀족원 임시 회의는?>
<열리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퍼스 후작이 상당한 물질 적, 정치적 영향력을 소모한다면 억지로 개최할 수도 있지만 그 경우에도 회의 전개는 그가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을 겁니다. 차 라리 퍼스 후작이 고집을 부려 주면 더 좋겠군요.>
<노후작이 원하는 것은?>
<발케네 공을 용서하기를 바란다는 귀족원 성명을 내는 것입니 다. 위기 의식을 느낄 정도의 정치 감각은 있는 모양입니다.〉
간단한 이치지만, 누군가가 힘센 말썽꾼들을 상대하고 있을 땐 작은 말썽꾼은 내버려두게 된다. 그리고 힘센 말썽꾼이 사라지면 작은 말썽꾼은 큰 말썽꾼이 되거나 사라져야 한다. 이 경우 힘센 말썽꾼은 서약 지지파의 우두머리였던 규리하 변경백과 공공연히 규리하 변경백의 딸을 원했던 발케네 공 락토 빌파다. 그들 모두 가 황제에게 무너진다면 퍼스 후작은 마음 놓고 불평을 할 수 없 다. 그는 큰 말썽꾼이 되기엔 배짱이 부족한 인물이다.
<그가 야심가라면 반황제 세력의 유일한 주도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반기겠지요.>
<글쎄. 퍼스가 귀족원을 동원하여 발케네 공을 구하면 그것은 상징적인 일이 될 테지. 그러면 자연스럽게 귀족원의 권위가 높 아질 테고, 권위가 높아진 귀족원 내에서 퍼스의 영향력도 높아 질 테고, 락토는 그에게 정치적 채무를 지게 되는 거지. 설령 실패한다 한들 별다른 피해도 입지 않고, 그에게 어울리는 방식이지.>
<그에게 시대를 읽는 눈이 없다는 것이 문제군요. 다른 때라면 그것도 나름대로 괜찮은 방식이겠지만 지금은 아니니까요.>
<지금이 어떤 시대지?>
무심히 니르던 데라시는 치천제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조금 당 황했다. 치천제를 올려다보던 데라시는 곧 반항심 같은 것을 느 꼈다.
<실력의 시대지요. 칼로 부딪혀 해결을 보는 시대입니다. 가장 안정된 것 같고 가장 번영하는 것 같지만 사실 가장 피비린내 나 는 시대입니다.〉
치천제는 빙긋 웃었다. 그녀는 자신의 책상으로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불만이 많은 것 같군, 데라시.>
<저는 폐하의 선택을 따를 겁니다. 하지만 불안은 어쩔 수 없 습니다. 엘시 에더리는 군사적 재능밖에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칼리도를 안정되게 다스리고 있는 것은 그의 모친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잘 다스리고 있지.>
<그가 자기 통제에 철저한 인물이라는 것은 부인하지 않겠습니 다. 하지만 지배자는 타인을 통제해야 하는 사람이잖습니까? 타인은 자기와 다르기 때문에 타인입니다. 외람되지만 질문하겠습 니다. 폐하께서 그의 적이 될 인물을 모두 제거하시는 것은 그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은 아닙니까?>
<데라시, 짐을 자극해서 무엇을 보고 싶은 거지?>
데라시는 정신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사람의 적을 완전히 제거해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어코 다시 생기니까. 치천제가 그것을 모를 리 없다. 데라시는 그녀의 동기일 리 없는 이유를 고의로 거론함으로써 황제를 자극해 보려 했지만 황제는 그것을 쉽게 간파했다.
<폐하께서 그를 변호하시는 것을 듣고 싶습니다.〉
<왜?>
<폐하께서는 수십 년 동안 제국을 더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 수십 년을 왜 엘시에게 주느냐는 말이군.>
<폐하보다 그가 낫기 때문에 그러시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낫습니까?>
<아무것도.>
<예?>
<그는 나보다 나은 점이 없어.>
데라시의 충격은 복합적이었다. 데라시는 황제가 니른 내용에 놀랐고 황제가 ‘나’라는 대명사를 사용했다는 것에 놀랐다. 데라 시는 갑자기 깨달았다. 그 니름은 완벽한 황제의 진심이었다. 데 라시를 속이려면 속일 수 있지만 그러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하지만 데라시는 그 내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나은 점이 없다고 하셨습니까?>
<있으면 닐러 봐.〉
<예?>
<닐러 보라고, 어서 그의 장점이 뭐지?>
데라시는 당황했다.
〈그는・・・・・・ 어, 그는 세습 황조의 시조가 될 수 있습니다. 나가
인 폐하와 달리 그는 북부에서의 활동이 자유롭습니다. 그는 좋은 배필을 얻어 안정적인 세습 체제를 만들 수 있습니다.>
<또?>
<북부인들이 갈등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북 부의 최대 적은 나가였는데, 그 나가들 중 한 명이 현재 그들을 다스리고 있다는 것은 어쨌든 제국인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일입 니다. 하지만 그들의 지배자가 인간이라면 곤혹스러움은 필요 없지요.>
<또?>
<일단 떠오르는 것은 그 두 가지뿐입니다.>
황제는 고개를 조금 갸웃했다.
<돌멩이는 안 되나?>
데라시는 넋이 빠질 것 같았다.
<무슨 니름이신지…….>
<돌. 바위 말이다. 바위도 네가 니른 장점은 다 가지고 있다. 세습 체제라는 것은 황위의 안정성을 말하는 것이겠지. 바위는 안정적이지 않느냐? 절대로 죽지 않을 테니. 죽지 않는다면 계승 투쟁이 벌어질 일도 없지. 참으로 안정적이지. 그 다음으로 너는 북부인들의 곤혹스러움을 닐렀지. 결국 북부인들이 그들의 나가 지배자를 사랑해야 할지 증오해야 할지 쉽게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라는 니름이겠지. 하지만 바위는 아무도 증오하지 않겠 지. 이 땅에 살아 있는 그 누구보다도 오랜 세월 북부의 땅에 있 었던 북부의 바위가 북부의 황제가 된다면 정통성 면에서도 문제 가 없겠군. 네 니름대로라면 나보다 훨씬 뛰어난 장점들을 가진 바위를 옥좌에 앉혀 두면 되겠구나.>
데라시는 황제의 농담 같은 니름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필사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도무지 파악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데라시는 상식적으로 대답했다.
<바위는 사람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폐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황제도 사람을 다스리지 않으니까.>
점입가경이다. 데라시는 힘겹게 닐렀다.
<폐하, 이해할 수 없습니다. 폐하는 만물의 지배자이십니다.>
황제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은 네 머릿속에 있는 황제다. 내가 아냐. 만물을 지배한 다면 나는 산에게 일어나 춤추라고 명령할 수 있어야 하고 바다 에게 몸을 갈라 밑바닥을 보이라고 할 수도 있어야 한다. 데라 시, 내가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아마 그렇지 않겠지. 너희들의 머릿속에 황제가 있고 그 황제가 너희를 지배하니, 실제의 황제는 돌이라도 상관없지 않느냐. 물론 엘시 에더리라도 상관없겠지.>
<엘시 에더리가 아무렇게나 고른 후계자라는 니름이십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그는 나보다 낫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다. 나와 다르기 때문에 선택되었지. 그리고 그 다른 점은 돌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어떤 점이 다른지요?>
<짐은 대답하지 않겠다.>
다시 ‘짐’이 되었다. 데라시는 니르지 못할 안타까움을 느꼈다. 귀한 시간을 헛된 질문으로 낭비한 것만 같았다. 데라시는 감히 추궁해 보기로 했다.
<폐하, 모든 것을 폐하께 바치고자 하는 이자의 소망을 부디 들어주십시오. 왜 엘시 에더리입니까? 아니, 이것만 닐러 주십시 오. 그것이 제국에게 가장 좋은 선택입니까?>
<최선의 선택이다.>
데라시는 안도하려 했다. 하지만 의혹이 생겼다. 그것이 짐의 대답인지 나의 대답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을 따져 물을 수 있 을까? 데라시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다른 사람 들보다 황제에게 아주 약간 더 가까울 뿐이다. 갑작스러운 무력 감이 데라시를 짓눌렀다. 치천제가 닐렀다.
<바다를 가른다는 니름을 하고 보니 쟁룡해 밑바닥에서 튀어나 온 타이모의 망령이 떠오르는군.〉
황제는 전장을 보지 못한 데라시에게 힌치오의 모습에 관한 그 녀의 기억을 보냈다. 데라시가 힘없이 닐렀다.
<대단한 모습이군요.>
데라시의 풀죽은 모습을 잘 알아볼 수 있었지만 황제는 그것에 대해 니르지 않았다.
<그자에 대해 알아내라. 락토에게 레콘 일만 명이 있다는 사실 보다 그 일만 레콘에게 그자가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한 사실이다. 타이모처럼 그자는 구심점이 될 수 있다. 전쟁이라는 급박한 상 황에서는 그것이 더욱 빠르게 이루어질 수도 있지. 그러면 분리 주의 운동의 부활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데라시는 할 일이 생긴 것에 감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황제의 집무실을 떠날 수 있으니까. 황제는 닐렀다.
<가라. 그리고 구레에게 천경유수 지알데 락바이를 부르라고 전해라. >
<알겠습니다.>
데라시는 일어나서 보온복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황제는 의자 를 돌려 벽난로 쪽을 향하게 했다. 불꽃에 고정된 그녀의 눈은 깊었고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얼마 후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찬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느낀 황제는 문 쪽을 돌아보았다. 천경유수 지알데 락바이가 두 손에 무엇인가를 든 채 서 있었다. 쟁반에 담긴 커다란 물건처럼 보였 다. 두꺼운 천으로 덮여 있어서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위험한 물건일 리는 없다. 그랬다간 구레가 통과시키지 않았을 테니까. 황제는 그 물건을 보다가 지알데에게 말했다.
“와서 앉아라.”
“지알데는 뚜벅뚜벅 걸어와 손에 든 쟁반을 앞으로 조금 내밀었다.
“책상 위에 놓아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해라.”
지알데는 그 물건을 내려놓았다. 의자에 앉는 지알데를 보며 황제는 그가 그 물건에 대해 설명할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지알데의 첫마디는 황제의 기대와 달랐다.
“폐하, 전쟁을 중단하십시오.”
황제는 놀랄 필요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대가 무덤에 들어가는 날까지 이 일을 반대할 것임은 잘 안다.”
“오늘 낮, 극히 짧은 시간 동안 죽은 이가 만 명을 넘습니다. 도시 하나가 통째로 사라진 셈입니다. 죽은 이의 가족들이 느낄 고통을 생각한다면 슬픔은 그 이상입니다.”
“그대가 더 큰 피를 부를 뻔했지.”
그런 지적은 지알데를 조금도 당황하게 하지 않았다. 지알데는 엄격하게 말했다.
“레콘들이 광란하여 난동을 부릴지 도주할지 알 수 없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가 시도할 수 있는 유일한 해 결책이었습니다. 그리고 난동을 부린다면 그들이 도망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할 때까지 방류할 작정이었습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번의 인생이 감당하기엔 너무 많은 레콘 원수를 만든 기분이 어떠냐고도 묻지 않았다. 추호의 후회도 두려움도 없다는 대답을 들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 다. 엄격한 천경유수가 말했다.
“폐하께서 저에게 하신 말씀을 숙고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폐 하께서 제위를 양위하시기로 결심하셨다고 판단했습니다. 계승자 가 누군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칼리도 백 엘시에 더리입니까?”
“그의 계승을 반대하나?”
“백작은 좋은 천품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만약 폐하께서 그를 계승자로 지명하시고 저에게 협조를 명령하신다면 저는 보 잘것없는 능력으로나마 최대한 그가 좋은 계승자가 될 수 있도록 협조하겠습니다.”
“반가운 말이군.”
지알데는 웃지도 않고 말했다.
“백작이 어떤 피도 발에 묻히지 않고 황위에 오를 수 있도록 돕겠다는 뜻입니다.”
“짐의 천경유수답군.”
“폐하. 먼저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제게 그러신 것처럼 의견을 구하셔야 합니다. 만약 반대 의견이 있다 면 설득하십시오. 그리고 그 반대의 사유가 옳은 것이라면 귀담 아 들은 후 백작에게서 그 사유가 될 것을 제거하십시오. 그것이 순리입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기도 전에 아직 반대하지도 않은 반대자를 찾아내어 처단하시려 하십니다. 부도덕합니다. 폐하께서는 모든 증오를 직접 받으시고 대신 후계 자가 도덕적으로 순결한 상태로 황위에 오르시길 바라십니다. 불 합리합니다. 그리고 그런 폐하의 결정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 었고 앞으로도 죽게 될 겁니다. 부당합니다.”
“부도덕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했다. 발케네는 반드시 반대하게 될 거라고 말했고, 반대하게 되면 이미 늦다고도 말했다. 한 번 더 말하지는 않겠다. 불합리에 대해서는 그대가 미래를 예언할 수 없다고 대답하겠다. 무시무시한 폭군의 후계자는 우유부단함 이 신중함으로, 난폭함이 용기로, 고집이 의지로 해석될 가능성 이 높지 않은가? 게다가 그대는 백작이 좋은 천품을 가지고 있다 고 했다. 그것은 백작이 우유부단하거나 난폭하거나 고집스럽다 는 뜻은 아니겠지. 그는 좋은 황제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부당함 에 대해서는, 짐의 결정이 옳지 않다는 것을 그대가 증명하기 전 까지는 부당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그대는 아직 증명하지 못했다.”
지알데는 여전히 웃지도 않은 채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리고 불가능합니다.”
황제는 웃었다.
“그 불가능에는 왜 서설이 붙지 않는 것이지?”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 물건이 그 불가능의 이유인 모양이군. 보여다오.”
지알데는 천을 들어 올렸다. 그 아래에서 나온 것은 새장 비슷 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안쪽에는 갑작스러운 빛에 놀란 조그마한 동물이 불안한 듯 움직였다. 황제는 물끄러미 그것을 보다가 천경유수를 쳐다보았다.
“다람쥐인가?”
“날다람쥐입니다.”
“그 날다람쥐가 엘시 에더리의 황위 계승을 반대한다면, 굉장 히 정치적인 날다람쥐임이 분명하겠군.”
“이 날다람쥐의 정치적 견해에 대해서 저는 모릅니다. 제가 아는 것은 이것이 날다람쥐이며 동시에 편지지라는 것입니다.”
치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보 태위의 사임 요청서로군. 그 동물이 서식하는 곳이 어디지?”
“유수부에는 동물학에 밝은 이가 없습니다만 날다람쥐는 여러 종류가 있고 꽤 여러 곳에 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 날다람쥐 는 아마도 한계선 남쪽에서 온 것 같습니다.”
치천제는 이전에 왔던 사임 요청서에 대해 생각했다.
“태위는 황금해를 따라 남하하고 있었지. 그렇다면 한계선 아 래로 내려갔을 수도 있겠군. 그런데 라보 태위의 사임 요청서와 우리가 나누던 이야기의 연관성을 짐은 아직 짐작할 수 없군.” “이 동물의 몸에 씌어져 있는 것은 사임 요청서가 아닙니다.”
황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알데는 직접 보여주기 위해 새장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리하여 황제는 동물들에게는 유능한 행정가이며 제국 수도의 지배자인 자를 알아볼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황제는 그녀의 엄격한 천경유수에게 말했다.
“그냥 비명을 질러도 돼.”
“괜찮습니다.”
“손가락에서 피나는데.”
“괜찮…… 습니…… 다.”
황제는 지알데 락바이를 구해 주기로 했다. 손가락을 난자당하 면서도 무뚝뚝한 얼굴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않는 천경유수를 보 고 있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근시일 내에 우리 안의 날다람쥐가 협조적으로 바뀔 것 같지도 않았다.
“이미 읽었다면 그대가 말하는 편이 낫겠군.”
지알데 락바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러지는 않았지만. 그는 우리를 조심스럽게 닫고 상처 난 손을 뒤로 감추고는 말했다.
“태위가 이 난폭한 동물에게 어떻게 글을 썼는지 궁금하군요.”
“어떻게 읽었나?”
“젊은 유수부원들이 도와주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도 태위의 서신을 보았겠군.”
“아닙니다. 태위는 암호로 써서 보냈습니다. 그래서 유수부원들은 내용을 알지 못합니다.”
황제는 탁자 위에 손을 얹으며 우리 안의 날다람쥐를 바라보았다.
“암호라고?”
“그렇습니다. 여기 그 암호와 해석본을 적어 왔습니…….”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던 천경유수는 갑자기 얼굴을 빨갛게 물 들였다. 그리고 황제는 적어 왔다면 왜 날다람쥐를 꺼내느라 그 런 고생을 했냐고 묻지 않았다. 원본과 복사본, 해석본의 순서대 로 제시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엄격한 사람이 저지를 만한 실 수니까. 황제는 기막히다는 내색을 조금도 하지 않은 채 천경유 수가 내민 두 장의 도깨비지를 받아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천경 유수를 위해 암호부터 보지는 않았다. 시간 낭비니까.
황제는 해석본을 벽난로 앞쪽에 들어 올린 다음 도깨비지를 통과하는 빛을 통해 그 글을 읽었다. 내용은 짧았다.
‘폐하, 대장군이 시모그라쥬 공에게 억류되었습니다.’
천경유수 지알데 락바이는 황제가 느낀 충격이 무엇이건 그것 은 나가들만 알아볼 수 있는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치천제의 모 습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꽤 오랫동안 침묵했 다. 지알데는 초조함을 엄격함으로 단속하며 기다렸다.
얼마 후 황제는 그 해석본을 구겨 벽난로 안에 던져 넣었다. 그녀는 우리 안의 날다람쥐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다시 짧지 않 은 시간이 지난 후 황제가 말했다.
“팔디곤이 왜 그랬을까.”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에서도 충격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지알데는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이 서신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시모그라쥬 공 이 발케네 공과 손을 잡았다면, 폐하, 황위 계승자가 적의 수중 에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전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군.”
“그렇습니다, 폐하. 폐하께서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으신 것은 이 경우에는 다행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억류하고 있는 사람이 차기 황제 내정자라는 것을 알지 못하니까요. 하지만 만약 저들 이 그 사실을 눈치 챈다면 백작은 인질이 되거나 최악의 경우 해 를 입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벌써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날다 람쥐가 이곳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을 고려하면 이 날다람쥐는 꽤 오래전에 출발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속히 전쟁 을 중단하고 백작을 구출해야 합니다.”
지알데는 잠시 쉬었다가 말했다.
“폐하, 저들이 그 사실을 모른다 해도 제국군 총지휘관이 억류 된 상황에서 전쟁을 할 수는 없습니다. 대장군이라는 지위만 해 도 이미 훌륭한 인질입니다.”
황제는 물끄러미 날다람쥐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생각난 것처 럼 암호가 씌어져 있는 도깨비지를 집어 들었다. 그녀는 그 종이도 벽난로 안에 넣었다. 불길 속에서 종이는 순식간에 재가 되었 다. 황제는 똑바로 앉아서 말했다.
“전쟁 중단은 없다.”
“폐하?”
“이 전쟁은 계속되어야 한다. 지알데.”
“폐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위 계승자를 위한 모든 준비를 끝마친다 하더라도 계승자가 없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 엘시는 돌아올 것이다.”
“어떻게 돌아온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가 돌아오도록 해 줄 사람이 있으니까.”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엘시 가까운 곳에.”
천경유수는 시모그라쥬에 어떤 사람이 있는지 머릿속으로 더 듬어 보았다. 하지만 그는 하늘누리의 관리자였고 지상의 일에 대해서는 그렇게 해박한 편이 아니었다. 천경유수는 남부에 있는 제국군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엉뚱한 생각을 떠올렸다.
“설마…… 하텐그라쥬에 계시는 그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분이 거기에 있다는 것은 비밀이다.”
“모르겠습니다, 폐하. 누가 백작을 구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치천제는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설명은 그가 돌아온 후로 미루겠다. 그때까지는 모르는 것이 낫다.”
“하지만 폐하, 이 전쟁은…….”
“부도덕하고 불합리하고 부당하다는 것이겠지. 돌아가라.”
천경유수는 오랜 시간 치천제를 모셔 왔다. 황제는 지상에 내 려서는 것을 극도로 피하고 그는 하늘누리의 관리자였으니 제국 의 다른 관료들과 비교도 안 되는 시간 동안 그녀를 접한 셈이 다. 따라서 천경유수 지알데 락바이는 황제가 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않을 작정임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지알데는 황제가 들을 생각이 있든 없든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곧 그녀가 입은 타격을 떠올렸다. 그녀가 선택한 황위 계승자가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다. 오랜 시간 황제를 모신 지알데 락바이 는 그 순간 황제에게 모질게 굴 수 없었다.
“폐하, 늦은 시각이니 오늘은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리고 지알데는 우리를 들어 올리려 했다. 황제가 말했다.
“그 동물은 놔두고 가거라.”
지알데 락바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날다람쥐에게 무슨 용도가 있을지는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치천제는 다른 나가들처럼 산 것을 먹는다. 하지만 지알데는 별로 찬성하고 싶지 않았다.
“폐하, 이 동물은 좀 난폭합니다.”
“괜찮아.”
지알데는 목례하고 집무실을 나갔다. 지알데가 나가고 나서 치 천제는 한참 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하지만 날다람쥐를 바라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황제는 집무실 한쪽을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그녀 외에 아무도 볼 수 없는 것을 바라보던 황제는 한참 후에 야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손끝이 우리를 스쳤고, 황제는 잠 시 방기해 두었던 날다람쥐를 떠올렸다. 해석본도 복사본도 없앴 으니 그 다음은 원본일 것이다. 그녀는 우리로 손을 뻗었다. 황제는 천경유수만큼 고생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