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4장] – 부드러운 돌, 단단한 바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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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4장] – 부드러운 돌, 단단한 바람 2


창가에 서 있던 제이어는 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는 고개도 돌 리지 않은 채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각하.”

아이저는 문가에 서서 제이어를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그렇게 제이어의 뒤통수를 보던 아이저는 한숨을 내쉬고 문을 닫았다. 

“여긴 내 방인데, 솔한.”

“알고 있습니다.”

제이어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못마땅한 눈으로 제이어를 바라 보던 아이저는 그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 숨을 급하게 들이쉬었다. 제이어는 아이저의 반응을 무시한 채 자신의 손에 들린 책을 한가롭게 넘겼다.

“각하의 종조부께서는 이름 높은 저술가였습니다. 저술가는 사 상가와 다르지요. 전자는 읽히는 글을 쓸 줄 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저술가 라수 규리하의 명성에 도무지 부합하지 않는군요. 아무래도 고의로 이렇게 쓰신 모양입니다.”

“내 생각도 그래, 솔한.”

“탁월한 저술가가 고의로 알아보기 어렵게 쓴 것이니만큼 이것 을 해석하는 것은 당연히 쉽지 않겠지요. 저는 포기하겠습니다.” 

제이어는 책을 탁 덮어 아이저에게 내밀었다. 마치 아이저가 그것을 읽어 보라고 권하기라도 했다는 듯한 동작이다. 아이저는 묵묵히 책을 받아 들어 책상 위에 놓았다.

“또 누가 알지?”

제이어는 빙그레 웃었다. 아이저는 허리를 똑바로 펴 그를 노려보았다.

“또 누가 알지?”

“아실이 알고 있습니다. 이미 읽었지요.”

“그 아이가 황제의 간자일 리는 없으니 다행이군.”

“아실이 그 책을 해석했을 거라는 생각은 못하십니까?”

아이저는 팔짱을 꼈다.

“해석했다고 하던가?”

“이제 그 책을 더 볼 필요가 없다고 하더군요.”

“더 볼 필요가 없다고?”

“예.”

아이저는 신경 쓰이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해석의 포기 인지, 아니면 책 없이도 해석할 수 있다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아이저는 아실에게 주의를 기울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제이어가 말했다.

“각하, 왜 황제가 그 책을 회수하길 원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제목처럼 거기에 정말 하늘누리에 관한 놀랄 만한 비밀이라도 들어 있는 겁니까?”

“반환 요구가 있었으니까.”

“황제가 그것을 요구했습니까?”

아이저는 의자에 앉았다.

“숭문각의 요청이었다. 라수 규리하의 서적을 전부 구비하고 싶으니 협조해 달라고 하더군. 규리하 성에 보관하고 있는 종조 부의 책 목록을 보내 달라고 했어. 그렇게 했지. 그런데 빠진 것 이 있는 것 같다면서 재조사를 해 달라고 하더군. 하지만 빠진 것은 없었어. 이상하다고 생각하다가 라수의 방을 떠올렸지.” 

“거기서 그 책을 발견하셨습니까?”

“그래. 보다시피 조야한 제목이지. 나는 종조부께서 그런 비결 서 같은 것을 집필하셨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더군. 어떤 시답잖 은 인사가 종조부의 권위를 훔치기 위해 그런 저자명을 사용했고 규리하 가의 어떤 부주의한 자가 그것을 구해 종조부의 유품에 포함시켰다는 것이 내 결론이었어. 만일 그렇다면 이런 물건을 굳이 내보일 필요는 없지.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정말 종조부의 것인지 확인한 후에 공개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빠진 책이 없다는 회신을 보냈지.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인상적인 것이더군. 『천경 비록』이라는 책이 없냐는 것이었어.”

그래서 아이저는 그런 책이 있긴 하지만 라수의 책이 맞는지 알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숭문각에서는 자신들이 확인해 줄 테니 책을 보내라고 했다. 아이저는 라수의 방에 보관된 물건 을 밖으로 꺼낸다는 것이 탐탁지 않았고 수상하다는 생각도 떠올 렸다. 아이저 자신도 존재를 알지 못했던 책의 이름을 숭문각이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그들은 라 규리하가 『천경비록』이라는 책을 썼다는 믿을 만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그 증거부터 라수의 후손인 아이저에게 공개하는 것이 상식이다. 결국 아이저는 보낼 수 없다는 대답을 보냈다. 당시는 황제와 그 의 사이가 악화되던 시점이었다. 아이저는 황제에게 무엇인가를 보낸다는 것 자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전쟁이 일 어났다.

“그렇다면 전쟁과 그 책의 상관 관계는 불확실한 것이잖습니 까.”

“전쟁 자체가 이 책의 특별함을 증명하는 것이지. 『천경비록』 을 요구하던 시점에 이미 전쟁 준비는 진행되고 있었을 테지. 그 렇다면 하늘누리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하늘누리가 전쟁을 준비하면서 하늘누리의 비밀스러운 기록이라는 책을 원한 다면 그 책이 보통 책일 리는 없잖은가.”

아이저의 말대로다. 수상한 일이다. 하지만 제이어는 반론가의 위치를 아직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전쟁 때문에 사료적 가치가 충분한 책이 소실되는 것을 우려 한 것일 수도 있잖습니까.”

“솔한, 나는 바보가 아니야. 자기 생각을 의심해 볼 줄은 안다 는 말이지. 전쟁 직전 나는 숭문각을 무시한 채 데라시에게 직접 서신을 보냈지. 그 책을 돌려보낸다면 어떻게 하겠냐고 물었어. 공격 일시를 늦추겠다는 암시를 담은 대답이 오더군. 재미있는 이야기잖은가?”

데라시의 대답을 받은 아이저는 『천경비록』을 원하는 것이 라 수 규리하의 전집을 완성하고 싶은 사서가 아니라 최소한 비스그 라쥬 백 데라시, 또는 황제 자신일 거라고 판단했다. 만약 아이저가 상대하고 있던 것이 숭문각의 사서였다면 데라시가 ‘그 책’이라는 말에 반응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제이어는 아이저의 판단 을 더 반박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 책에는 황제나 데라시가 중요하다고 믿는 내용이 들어 있는 모양이군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셨습니까?”

“아니. 그리고 앞으로도 알아내고 싶은 생각이 없군.” 제이어는 놀랐다.

“알아내고 싶지 않으시다고요?”

아이저는 희미한 분노를 드러내며 『천경비록』을 노려보았다. 

“비밀스러운 책이나 수수께끼, 비결, 전설 따위에 매달리는 것 이 치졸하다는 생각을 내가 왜 못했는지 궁금하군. 그것은 인생 을 우습게 만들길 좋아하는 자들의 태도야. 마법의 말 한마디로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버릴 수 있다는 식의 나태함과 몽상 이지. 이 정도 나이를 먹었으면 진작에 알아차렸어야 하는 일이 야.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잖나.”

아이저는 책상 위에 올려놓은 두 손을 움켜쥐었다.

“산다는 것은 끝이 없는 싸움이야. 모든 적을 일격에 거꾸러뜨 리는 무적의 무기 같은 것이 없는 것처럼 사는 것을 쉽게 만드는 최후의 비결도 없어. 그런 것을 바라며 물러나는 것 자체가 이미 싸움에서 지는 것이야. 칼을 움켜쥐고 한 발 더 걸어 나가는 이 낫지.”

“그러면 그 책은 포기하셨습니까?”

“이 책은 규리하의 물건이니 내가 지켜야겠지. 하지만 더 읽지 는 않겠다. 내 칼을 벼리거나 내 아들에게 용서를 구할 시간도 부족할 것 같으니까.”

제이어는 이채롭다는 표정으로 규리하의 전 변경백을 바라보았다. 아이저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던지고 말했다.

“내 아들이 더 큰 반항을 했더라면 차라리 좋았을 것 같다. 하 지만 그 착한 애의 반항은 아버지의 귀한 책을 다른 사람에게 몰 래 보여 주는 것이었군. 게다가 그것은 사실 아버지에겐 더 이상 귀한 책도 아니었다. 몰락한 아버지를 곁에서 보면서 그럴 수 있 는 아들이 세상에 또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범위 내에 한 명뿐이다. 나는 이이타가 이 책을 빼돌렸다는 것이 기쁘다.” 

놀라운 추리는 아니다. 『천경비록』의 존재를 노출시킬 사람은 이이타 말고 없는 형편이다. 제이어는 다른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자식을 가진다는 것은 참 특이한 경험인 것 같군요.”

아이저는 늙은 독신자를 바라보았다.

“후회되나?”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못한 것은 후회되지 않습니다, 각하.” 

과거 오세느 시야니라는 한 명의 여자를 두고 대립했던 두 남 자는 서로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서로의 얼굴을 보며 자신이 얼 마나 늙었는지 깨달을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다. 그리고 아이저가 해묵은 매듭을 풀기로 결심할 정도의 시간이 지 난 후이기도 하다.

“아직도 취해 있군, 살인 기사.”

제이어는 무표정하게 아이저를 바라보았다. 아이저는 차분하게 말했다.

“오세느가 나를 택한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 니다. 물론 그녀는 아버지의 뜻을 거부하게 된다면 몹시 상심했겠지. 하지만 다행히도 오세느는 현명했다. 경쟁심에 눈이 먼 나 는 알지 못했지만 오세느는 네가 원하는 것이 사랑의 승리자가 아니라 화려한 패배자임을 알아보았다. 그녀는 아버지를 거역할 필요가 없었지.”

“부인께서는 보기 드문 여자였지요. 저를 받아들인 것도 부인 의 뜻이었습니까?”

“그래. 오세느는 네가 위험한 남자라고 말했다. 나는 우습다고 생각했지. 그것이 신혼의 신부에게 생길 수 있는 불안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세느는 어수룩한 남편에게 부인을 존중하는 법을 알려 주었어. 나는 그녀의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오세느 는 네가 위험하긴 하지만 그 위험을 피하는 것 또한 어렵지 않다 고 하더군. 그냥 네 뜻을 따라 친하게 지내라고 했다. 네가 원하 는 것이 화려한 패배자에서 과거의 연적과 우정을 나누는 멋진 남자로 바뀌었다고 하면서. 나는 그녀를 존중했고 또 어려운 일 은 아니었기에 그렇게 했다.”

제이어는 서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우정은 가짜였군요.”

“내게 죄책감이나 부채감 같은 것은 없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우선 네가 우정을 나누고 싶었던 대상은 아이저 규리하가 아니라 과거의 연적이었으니까 나는 우정을 교환할 의무가 없 었지. 너는 내 연적이 아니었다.”

“아니라고요?”

“네가 원한 것은 실패였잖나.”

“두 번째 이유는 뭡니까?”

“의무가 없는데도 나는 진짜 우정을 주었다. 따라서 죄책감은 없다.” 

제이어는 고개를 갸웃했다.

“진짜였다고요?”

“삶에 대한 너의 태도를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 하다.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할 것을 알면서도 술을 마시는 주당처 럼 너는 실패할 것을 알면서 그 실패를 즐긴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네 모습이 흥미로웠다. 패배주의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었다. 패배주의자는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다. 패 배가 두렵기 때문이지. 하지만 너는 실패할 것을 알면서 시도한 다. 오세느가 말한 너의 위험성이 무엇인지 대강 짐작하게 되면 서 나는 네게 매혹되었다. 나는 너와 인연을 맺을 수 있어서 기 쁘다.”

제이어는 조금 전에 군령자가 된 사람처럼 행동했다. 자신의 몸이 낯선 듯 이리저리 몸을 비틀던 제이어가 한숨을 내쉬었다.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너는 오세느를 사랑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세느의 아들을 부 탁한다고 말하면 너는 옛 연인의 아들을 결사적으로 지키겠지. 네 인생을 소재로 명작을 연출하는 것이 네 방식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렇게 부탁하지 않겠다. 친구의 아들을 지켜 달라고 말하 겠다. 그것이 내 방식이니까.”

제이어는 아이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규리하로 돌아가실 생각이군요.”

“그곳에는 약간의 수비 병력만 남아 있다. 승전보다 더 어려운 뒤처리를 게을리한 황제는 대가를 치를 것이다.”

“앞뒤로 전쟁을 벌이게 된다면 보통은 괴롭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늘누리에는 앞뒤가 없습니다. 모두 아래지요.”

“맞아. 그래서 그것은 갈팡질팡할 수 있는 유일한 도시지.”

제이어는 그것이 재미있는 농담이면서 동시에 날카로운 지적 이라고 생각했다. 하늘누리의 최대 강점으로 일컬어지는 이동 능 력을 거꾸로 약점으로 삼겠다는 태도는 탁월한 발상의 전환이다. 아이저가 지적한 연출하는 버릇이 발휘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제이어는 안전한 망명지에서 적의 약점을 탐지하는 것보다는 칼 을 뽑아 들고 강대한 적의 지배 하에 있는 고토로 되돌아가는 것 이 아이저에게 훨씬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규리하니까. 그리고 이이타도 규리하다.

“아드님을 데려가시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공자님은 이곳 까지 아버님을 따라왔습니다. 각하를 모시지 못할 수완은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그 아이를 못 믿어서 데려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이타는 내 후계자다.”

제이어는 기대하던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약간의 충격 을 느꼈다. 아이저의 선언은 딸과 아들을 대립시킨다는 뜻이다. 아이저는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나는 비셀스를 세 번 죽였다. 태어났을 때 그 애를 포기했지. 그리고 규리하 성 낙성 당시에 그 애를 포기했다. 그리고 이제 세 번째로 그 애를 죽이려고 한다. 한 번도 할 수 없는 일을 세 번이나 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 끔찍하군.”

“각하, 이이타 공자님에게 대립시키기 위해 황제는 비셀스를 더욱 보호할 겁니다. 각하의 결정은 결국 공녀님을 보호하는 것 이 될 겁니다.”

“고맙군, 솔한 내 후계자를 지켜 주겠나?”

제이어는 결심했다.

“그러겠습니다.”

“고마워. 내일부터 나를 볼 수 없을 거야.”

“그렇게 빨리 떠나십니까?”

“암살공과 황제의 전투가 결판나기 전에 되도록 많이 움직여야 하니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네 용건은 뭔가?”

제이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는 중 요한 것을 건네듯 주위를 살피고 나서 아이저에게 다가갔다. 살 인 기사는 속삭이듯 말했다.

“이제야 제 용건을 물어보시는군요.”

제이어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꺼냈다. 거기에는 날이 새파랗 게 선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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