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4장] – 부드러운 돌, 단단한 바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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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4장] – 부드러운 돌, 단단한 바람 3


쥘칸 장군은 얼어붙은 얼굴로 시허릭 마지오를 바라보았다. 사 람들은 그렇게 착각할지도 모르지만 쥘칸 장군과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이 서로를 증오하는 사이는 아니다. 그저 서로를 싫어할 뿐이다. 하지만 지금 쥘칸은 시허릭을 증오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고 생각했다. 쥘칸은 벼슬을 빳빳하게 세운 채 말했다.

“농담이겠지.”

시허릭은 콧방귀를 뀌고 탁자 위의 지도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군령에 희언은 없다. 쥘칸 장군.”

“그런 말도 안 되는…………….”

“아니, 충분히 말이 된다. 귀관의 부하 장병들 중에도 성채 매 장자의 지휘를 받아 하룻밤 만에 성을 파묻은 장병들이 있다. 또 여기에는 없지만 과거 고추냉이 여단은 유료도로당과의 계약에 따라 시구리아트 산맥의 허리를 뚫었다. 같은 일을 또 못한다는 법이 어디에 있나.”

“그게 같은 일이냐?”

“똑같은 토목공사다. 그리고 공사의 난이도를 보면 그리미 유료 수도의 경우보다 훨씬 용이한 일이다.”

시허릭은 갑자기 손을 뻗어 바라보던 지도를 짚었다.

“귀관과 귀관의 여단은 파리조까지 운하를 파야 한다.”

제국군의 장교들은 신음을 흘리거나 깊은 생각에 빠져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에 쥘칸이나 시허릭을 거들고 나서려는 사람은 아 무도 없었다. 그리고 레콘인 쥘칸은 누가 자신을 거들어 주길 기 다리지 않았다.

“운하는…… 그게 흐르는 길인데?”

“귀관에겐 미안하지만 전술 용어로서 대명사는 적합하지 않으 니 나는 직접 말하겠다. 운하는 물이 흐르는 길이다.”

어떤 수교위는 쥘칸의 주먹에 박살 나는 시허릭의 머리를 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쥘칸은 당장이라도 그 수교위의 몽상을 현 실로 만들어 줄 기세였다. 온몸의 깃털을 세운 채 쥘칸은 시허릭 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시허릭은 말했다.

“소화차의 기동력은 형편없다. 그리고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없다면 소화차는 무용지물이다. 소화차가 전장과 멀리 떨어진 수원 사이를 왕복하게 할 수는 없다. 소화차를 위한 용수 공급은 용이해야 한다.”

쥘칸은 제국군의 장성으로서 타의 모범을 보여야 하는 자신은 참아야겠지만 자기 주먹은 더 참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때 시허릭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레콘과 싸우려면 강을 접하는 편이 좋다. 적당한 강이 없다면 강을 가져가면 된다.”

시허릭의 말은 쥘칸의 주먹을 붙잡았다. 그리고 사태를 예의 주시하던 장교들의 입에서 신음을 뽑아 내었다.쥘칸은 주먹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가져간다고?”

“강을.”

그 말의 호방함은 쥘칸의 마음에 들었다. 시허릭에게 기대했던 적이 없는 성격이기 때문에 쥘칸은 약간의 충격도 느꼈다. 쥘칸 은 팔짱을 끼고 시허릭의 말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장군들은 희미한 두통을 느끼며 같은 일을 시도했다.

전장은 선택하는 것이다. 그것도 대부분의 경우 매우 좁은 선 택폭 안에서 상대가 바보가 아닌 이상 절대 불리한 전장에서의 전투를 받아들일 리 없기 때문에 약간의 불리함이라도 줄 수 있 는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머리를 짜내는 것이 전장 선택이다.

고금의 어떤 군대나 명장도 자신에게 유리한 전장을 가지고 다 닐 수는 없었다. 시허릭은 그저 평범한 운하를 파자고 말했지만 그것은 전쟁의 기본적인 상식을 무너뜨리는 발언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스캄에서 하룻밤 만에 성채를 파묻기 위해 필요했던 물리력은 엉겅퀴 여단의 1대대였다. 모든 엉겅퀴 여단병이 동원된다면 운하를 파는 것이 어려울 까닭이 없다.

물에 대한 레콘의 절대적인 거부감을 논외로 했을 경우 그렇다 는 말이다. 그리고 세상의 어떤 현명한 자도 레콘에게서 물에 대 한 거부감을 제거할 방법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그에 비하면 고 양이가 헤엄치기를 좋아하게 만드는 것이 훨씬 쉬울 것이다. 고 양이는 주먹을 휘둘러 사람을 죽이지는 않으니까. 쥘칸은 풀이 죽어서 말했다.

“나는 내 부하들에게 그런 것을 만들자고 말할 자신이 없어.” 

시허릭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째서? 운하가 물속에서 땅을 파는 일인 줄 아나? 운하를 만 드는 도중에는 물과 만날 일이 전혀 없다. 공사에 방해되니 오히 려 물이 없어야 하지. 운하에 물이 흐르는 것은 공사가 끝난 후 수문을 열었을 때의 일이다. 그리고 수문을 여는 것은 인간 병사 들만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결국 귀관들은 바싹 마른 땅만 파면 된다.”

“그래서?”

“귀관은 부하 장병들에게 땅을 파라고 말하고, 부하 장병들은 그 명령을 따라 땅을 파면 된다. 물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땅만 다룰 뿐이다.”

“웃기는 소리를 내 부하들이 자기가 파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 하지 못할 까닭이 없잖아. 땅을 파는 도중에 그,어,문이라는 것이 터지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 밖에 다른 불만은 없나?”

“다른 불만?”

“그래. 수문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걱정 외에 다른 걱정은 없는 거지? 그렇다면 됐군. 가서 부하 장병과 함께 수문의 형태를 결 정해 오도록. 기술적 조언을 해 줄 사람을 초빙해 두었다.”

그 순간 쥘칸은 시허릭이 자신의 반응을 이미 예상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시허릭은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지도 결정해 두었 다. 레콘에게 강압이 통할 리도 없지만,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대신 안심할 수 있는 방법을 직접 찾아오도록 명령하는 것이 시 허릭의 해결책이었다. 그리고 쥘칸은 자신이 그 해결책을 거부하 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시허릭이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명령을 보내자 곧 제국병 들이 민간인으로 보이는 사람을 데리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체구가 굉장히 좋은 인간이었다. 그 인간은 시허릭 마지오 상장 군에게 가볍게 목례하고 나서 그 곁에 섰다. 시허릭은 그의 얼굴 을 보려면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굴을 보는 것을 포기했다.

“이 사람은 유수부 수도국에서 온 오니 보다.”

오니 보는 다시 고개를 꾸벅했다.

“안녕하십니까.”

“유수부의 수도국은 하늘누리 시민들 전체가 쓸 물을 하늘누리 에서 흘러내리지 않도록 보관하는 곳이다. 따라서 물을 가둬 두 는 안전한 방법에 대해서는 많은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하 늘에 뜬 저수지를 만들거나 관리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테니까 유수부 수도국의 국원들은 아마도 수리학에 관해서는 제국 내의 최고 전문가들이겠지. 따라서 그들에겐 지상에 있는 운하의 수문 을 튼튼하게 만드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람이 귀관을 도와줄 것이다.”

오니 보는 이 뻔뻔한 거짓말이 참 낯간지럽다고 생각했다. 하 늘누리의 저수 시설이 경이적이긴 하지만 그것을 설계한 사람은 유수부 수도국원이 아니라 도깨비 대장장이와 목수, 건축가들이 었다. 유수부 수도국은 그저 그것을 관리할 뿐이며, 제국 최고의 수리 전문가 어쩌고 하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오니 보는 자신이 그런 식으로 소개되는 것을 거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지오상 장군은 레콘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그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리고 상장군의 말처럼 운하의 수문을 설계하는 것 정도는 오니 보에게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오니는 쥘칸 장군이 마지오 상장군의 거짓말을 받아들이는지 궁금해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오니는 불안함을 느꼈다. 쥘칸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노 려보았다. 당장이라도 호통을 칠 것 같은 표정에 오니는 조바심 을 느꼈다. 그때 시허릭이 약간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암살공은 일만 명의 레콘을 준비해 두고 우리에게 한 방 먹일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겠지. 이젠 우리가 암살공에게 한 방 먹일 차례다. 나는 정말 그러고 싶다, 쥘칸 장군. 전장을 가지고 가는 우리를 보고 암살공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보고 싶다.”

쥘칸이 벌떡 일어섰다. 그는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까지 결정하면 돼?”

시허릭은 웃지 않았다. 다만 신발 속에서 발가락을 꽉 움츠렸을 뿐이다.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최대한 빨리.”

“알았어. 따라와, 오니.”

쥘칸은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오니는 시허릭을 한 번 바라보고 나서 그 뒤를 따라갔다. 시허릭은 큰 한숨을 내쉬고 싶은 것을 참으며 자리에 앉았다.

쥘칸을 분기시키기 위해 한 말이지만, 그것은 시허릭의 진심이 기도 했다. 쥘칸도 그것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를 분기시 키려는 의도를 짐작하면서도 묵인했을 것이다. 시허릭은 정말 암 살공에게 한 방 먹이고 싶었다. 통쾌하고 짜릿하게.

그리고 그것은 사라티본 평야에서 끔찍한 재난을 당해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진 제국군에게도 필요한 일이었다. 나머지 회의를 주관하며 시허릭은 부하 장병들에게 말해야 할 내용을 알려 주었 다. 제국의 수도는 통치상 필요하면 직접 그곳으로 간다. 그리고 제국군은 전략상 필요하면 전장을 가지고 간다. 우리는 황제 폐 하의 군인이니까.

우리는 황제 폐하의 영광 아래 반드시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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